홍지수
추락한 백호의 동백
홍지수는 동백을 품고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홍지호는 집안의 맏딸이었으며, 백호 영수의 신령이었다. 한양에서 나와야 할 오방신의 수하가 제주에서 났다는 이유로, 그는 백발과 벽안, 그리고 그에 걸맞는 마법 능력을 갖췄음에도 신령밖에 되지 못했다.
신령으로 재임하던 중 그는 지수를 가졌으며, 배가 불러오는 탓에 이를 중앙에게 들켜 쫓겨나게 되었다.
“...상제여. 어찌할 생각입니까.”
“오방신장의 의견은 어떠한가.”
백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여성의 잉태는 죄가 아니므로, 홍지호 또한 무죄입니다.”
“아니.”
“....”
“홍지호를 추방한다.”
이를 바득 갈았다. 다른 오방신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홍지호는 고개를 숙인 채로 제 배를 감쌀 뿐이었다.
“상제! 그게 무슨 말입니까? 분명 황룡이 앞서 저희 의견을 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았네. 한데 홍지호는 하늘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는가. 오방신의 수하의 자격을 스스로 박탈하였다.”
“애초에 수장이 되어야 하는 아이를 신령으로 내렸다는 것은 하늘의 뜻이었습니까?”
백호가 울분을 토했음에도 상제는 끄떡없었다. 겨우 황룡이 백호를 진정시켜 자리에 앉히니 상제가 두루마리 하나를 집어들었다.
“...홍지호는, 오방신과 그들의 수하는 서로를 믿고 의지하여 홑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천상의 규칙을 어겼다. 높은 직위에 있음에도 그의 책임을 잊고 잉태하였으며, 끝내 누구의 아이인지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홍지호를 천상에서 추방한다.”
푸른 하늘이 급작스레 어두워지며 폭풍이 몰려들었다. 백호의 분노가 가득했다. 쿵쾅거리며 정전을 두드렸으나 상제는 끝까지 그에 답하지 않았다.
나빌레라
洪知秀, 추락한 백호의 동백
백호가 망설이며 지호의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지호는 따스하게 웃으며 손을 떼어냈다.
“이제 관내로 돌아가십시오. 혹여나 상제의 눈에 띄어 해를 입을까 두렵습니다.”
“...데려다 준다니까.”
“정말, 괜찮습니다.”
“.......”
“인로. 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감히, 백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구나.”
결국 백호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입은 웃고 있었으나 찌푸려진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지호도 그에게 맞추듯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신령도 아닌 인간이 되었으니, 이름 정도는 입에 올려도 되지 않겠습니까.”
“.......”
“...압니다. 알아요. 나는 죄가 없어요.”
그러니 당신도 나로 인한 죄책감을 느끼지 말았으면 해요. 고운 손이 백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내 주저앉아 통곡하는 백호였으나, 지호는 그를 두고 백호관을 떠났다.
하늘에서는, 신령이라는 자가 감히 아이를 낳았다고 하였다. 하늘을 날던 백호가 땅에 처박혔다면서.
홍지호는 굴하지 않고 일반인들 속에서 제 자리를 만들어 냈다. 그의 성품을 알아챈 인간들은 그를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받아주었고, 그 덕에 큰 소란 없이 지수와 살아갈 수 있었다.
완전히 정착하여 인간의 삶에 녹아들었을 때쯤, 오방신이 내려왔다. 그들의 기운은 감히 무시할 수 없어, 지호는 곤히 잠들어 있는 지수를 품에 안고 그들을 마주했다. 굳건한 표정으로 그들을 보던 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에 보낸 서신에 대한 답은 이미 하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온 거야.”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백호 대신 현무가 나서서 사건을 읊어주었다. 지호가 추락한 이후 오방신장이 꾸준히 그의 일에 죗값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음을 주장하였고, 옥황상제 또한 그것을 끝내 인정하였다고 했다.
“그럼, 무엇이 달라집니까? 제 이름은 이미 묵삭된지 오래인데, 어찌하자고 온 것입니까.”
“너를 모함하고 거짓을 고한 백호의 수장을 해임하였으며, 저승에 혼을 묶어두어 영원히 나오지 못하도록 벌을 주었다.”
“.......”
“...다시, 돌아올 생각은....”
“없습니다.”
단칼이었다. 오방신장도 예상한 대답이었다. 혹여나 원하는 것이 있냐 물으니, 지호는 말없이 다가가 백호에게 지수를 안겨주었다.
“...백호다.”
백호의 옆에 있던 주작이 읊조렸다. 백호의 품에 안기자마자 지수가 눈을 떴다. 푸른 눈동자가 오방신장을 가득 담고도 기어이 울음을 터트리지 않았다.
“백호 수장이 될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그렇네.”
“홍지수라고 합니다. 이 아이가, 저 대신 자유로이 천상에 올라가 노다닐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것이면, 되겠어?”
주작의 물음에, 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그곳에 발을 딛고 싶지 않습니다.”
지수가 태어날 때부터 마음을 다잡았다. 필연적으로 백호의 운명을 타고 난 제 새끼. 한양 서당에 가겠구나. 나는, 평생 이곳에서 자리를 지키며 지수를 올려보내야겠구나.
정말로 지호의 뜻이 그렇다는데, 오방신장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확고한 그의 말을 들은 황룡은 제 몸에서 비늘을 하나 뽑아냈다. 지수의 가슴팍에 작은 상처를 내어 피 한 방울을 손가락으로 훑어냈으며, 이를 이용하여 지호의 집 뒤편에 있는 커다란 나무로 하늘을 드나드는 길을 터주었다.
“너와 지수가 함께 올 수 있으니, 괘념치 말고 언제든지 올라와도 된다.”
지호는 절대 올라갈 생각이 없었음에도, 그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는 입학 통지서가 올 때까지 제 모습을 숨기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 백발의 백안인 제 아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 앞에 내세우기에는 겁이 났던 홍지호는 지수를 집 안에서만 길러야만 했다.
운명처럼 한양의 입학 통지서가 날아온 날, 홍지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수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제는 밖에서 다른 사람도 만나야 하니까. 지호는 제 앞에 앉아 이야기를 들으며 엉엉 우는 지수의 양 볼을 붙잡았다.
“나는, 언제나 지수를 믿어. 훗날 네가 어떤 인물이 되어도 항상 사랑할 거야. 너는 내 전부니까. ...그치?”
“...응.”
“항상 스스로를 믿고, 사랑해야 해.”
내가 너에게 준 사랑보다 더. 알겠지. 지호가 부서질 듯 그를 껴안았다. 지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다짐했다. 꼭,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늘에 올라가 제 어미의 누명을 없애버려야겠다고.
지수의 입학은 꽤 유명했다. 지수 또한 이를 예상하였기에, 최소한의 생원과만 친분을 만들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첫 번째가 서당에 들어오기 전에 만난 승철이었고, 두 번째가 들어온 직후에 만난 정한이었다. 이 둘이 지수에게는 전부였다.
그 욕심이 컸던 탓인지, 누구도 탓할 수 없이 사형을 잃었다. 낙화열병 때문이었다. 몸에 있던 꽃들이 죄다 터지면서 죽어가는 사형을 묻고, 제가 있는 침소에 들어와서는 앞에 엎드려 훌쩍이는 승철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웃음도 울음도 나지 않았다.
“일어나. 언제까지 울거야?”
“........”
“...짜증나.”
승철이 흠칫하며 몸을 일으켰다. 저에게 하는 말이 아니란 것 정도는 곁에 있었던 기간이 허투루 되지 않았던 덕에 알 수 있었다. 슬쩍 고개를 들어 지수와 눈을 마주쳤다. 퉁퉁 부어 벌게진 눈이 배는 더 커졌다.
“너 왜 그래?”
“뭐가?”
승철이 다급히 방을 뒤적여 거울을 찾아냈다. 비친 제 모습은, 백발에 벽안이었다. 겨우 덤덤한 척했다.
“...이게 왜.”
“너 백호야?”
너무나도 순수한 그 질문에 픽 웃음이 터져버렸다.
“응. 질문이 너무 웃기다.”
“...그럼 넌, 안 죽겠네?”
“......그렇겠지.”
너희들은 평생 내 곁에 있으면 좋겠어. 투정을 부리는 듯한 승철의 그 말에, 지수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처음에는 죄책감 때문이라 생각했다. 사형들을 제 편에 두지 않은 것에 대한 죄값을 받는 것으로 그들의 죽음을 무마시키려 했는데, 이제는 이도 저도 못 하게 되었다.
“그래. 나는, 네 곁에 있을게.”
“.......”
“언제든지 너희랑 있어야겠다.”
내 세상은 엄마랑 내가 전부였는데. 이 또한 너희로 인해 넓어지겠구나. 동그란 머리통을 괜히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누리달 스무닷새
백호가 지수를 보았다. 백호는 가끔 백호관에 들르는 지수를 언제나 반겨주었다. 간혹 백호가 먼저 부르는 때도 있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백호관을 열고 들어오기에 자리를 내어 주고 다과를 건넨 참이었다. 지수는 저를 빤히 보는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너는 네 운명을 받아들인 건가 싶어서.”
그의 말에, 지수가 이제 와서요? 하고 되물으며 웃기만 했다.
“...타고난 김에 버티는 거죠. 어찌 도망치겠습니까?”
“........”
“조금 전, 이곳에 오는 길에 듣긴 했습니다.”
“무엇을.”
“태어나지 못할 운명을 이겨낸 아이라던걸요.”
백호의 인상이 구겨졌다.
“맞는 말이라서, 상처받지는 않았습니다. 그 운명을 이기고 난 제가 후에 백호 수장이 된다는데....”
늘어지듯 몸을 펴며 턱을 괸 지수가 창밖 너머를 응시했다.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이내 자세가 흐트러져 상 위로 엎어지는 꼴이 되었다.
“...그런데요, 영수. 고작 엄마를 위해 이어 나가겠다 마음먹은 내 삶이, 내 세상이.. 지금은 한없이 넓어져 사방四方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 때론 신기하기도 해요.”
어느덧 입학한 지 4년이 된 지금은 열둘이나 제 곁에 머물러 주었다. 이들은 전부 서당의 비밀 공간 중 하나인 원우의 꽃밭을 드나들 수 있었으며, 여러 의미로 꽃에 모이니 서로를 나비儺飛라 부르기로 하였다. 별칭을 그리 정한 탓인지 동백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나비가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
“서당에서 적응을 하긴 했다니 다행이구나.”
“...그 정도 사회성은 있습니다.”
백호가 그건 몰랐다며 놀리듯 웃었다.
지수가 백호의 수장이 된다는 것은 비단 제 어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운명을 짊어졌음에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이며, 이후 만들어 갈 세상이 계속해서 넓어질 것이니까. 그리고 그에 따라 사랑하게 될 것 또한 늘어나겠지. 이 모든 것을 안을 수 있을 만한 놈이 올라오는 것임을, 부러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홍지수도, 그리고 홍지호도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알아서 그리 사는 것일 테니까.
“...뭡니까?”
“가만히 있어라.”
“.......”
“......잘 키웠네. 지호가.”
백호가 산발이 될 정도로 지수의 머리를 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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