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하지

밤이 가장 짧은 날

서당 by 반야

누리달 스무하루

“뭘 그렇게 많이 들고 와?”

“...과제요. 책방에서 가져왔어요.”

“단오가 지났으니, 이제 첫 과제겠네?”

“네…. 오방신에 대한 걸 조사해서 제출하래요.”

“응, 그런 것 같네.”

한솔이 책상 앞에 자리를 잡고 쌓아둔 책 중 오방신五方神 이라고 적혀있는 것을 집어 들자마자 지수는 제가 읽던 서책을 두고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잠시 누각에 갔다 올게. 점심은 순영이랑 둘이 먹어. 알겠지?”

태사혜를 신으며 말하던 지수가 살짝 멈칫했지만 줄곧 밝게 웃으며 인사하고 떠났다. 한솔은 볼을 긁적이며 서책을 펼쳤다.

 


조선에 마법을 쓸 줄 아는 자가 생기기 시작했고, 아무것도 정립되지 않았던 그 시절의 길거리는 마법을 쓸 줄 아는 자들의 횡포로 난리가 났다. 학당에서조차 뭣 모르고 쓰는 아이들의 마법 때문에 피해가 발생하기 일쑤였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마법을 쓰는 가장 현명한 자였던 령伶이 그와 비슷한 능력의 친우 넷과 함께 한양 산중에 터를 잡고 마학 서당을 설립했다. 서당을 사방으로 나눈 후 각자 방위를 분담하여 인간을 수호하기로 약조하였다.

......

그 후 마법을 사용할 줄 알며, 인의예지를 모두 충족하는 사람을 서당에 불러 모아 마법에 대해 공부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섯은 서당의 박사로써 아이들을 돌보았다.

설립 1년 차에 1년 생원으로 마법 서당의 시작을 함께한 이들이 6년 생원이 되고 서당을 떠날 때가 되었을 때, 다섯 명의 설립자는 각자 침소의 수장을 뽑은 후 그 침소를 상징하는 영수가 되었다. 황룡은 령, 청룡은 청의淸義, 백호는 인로仁露, 주작은 진하 進夏, 현무는 명현命賢이 맡았다. 중앙은 황룡의 영수가 되어, 소수의 우수한 생원만 수호하게 되었다. 그들의 힘은 여전히 서당 깊숙히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법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드물게 스스로 마법을 깨우치는 사람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결국 기준을 세워 이들을 마반, 양반, 일반으로 나누었고, 서당을 세 곳으로 배치해 매해 남자 60명을 뽑아 한양으로 보내고 여자 60명을 뽑아 제주로 보냈다. 또한, 각각 40명씩 뽑아 경주로 보내 균형을 맞추었다. 누군가에게는 상처만 남을 구분이었기에 끝까지 미루고 반대했으나, 이것보다 더 좋은 선택지는 떠오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가문에서 나온 마법사의 비율에 따라 그들을 구분했다.

한양에서는 오방신장이 자라 천상에 올라가 오방신 영수뿐만 아니라, 인간들마저도 수호한다. 경주에서는 십이지신을 모시고, 제주에서는 기후와 동식물을 관리한다.

……

생원들이 늘어나자, 수장들은 마법을 쓰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다. 영수 다섯과 수장 다섯. 조선의 이들을 수호하기에 열이라는 숫자는 벅찼다. 결국 영수와 수장 아래 신령을 두기로 했다.

또한, 삼승과 상제가 약조하여 수장과 신령이 될 운명의 아이는 날 때부터 능력을 갖추고 태어날 수 있도록 했다. 능력은 태어난 후 스스로 도를 터득할 때 완전히 나타나는데, 그전까지는 감정이 급격하게 변화할 때 종종 나타나기도 한다. 각 수장과 신령마다 특징이 다르지만, 공통적인 것은 현명하고, 총명하며 중심보다는 선에 조금 더 기울어져 있어야 한다.

*삼신(三神) 아기를 점지하고 산육을 관장한다는 신. 그가 탄생한 제주에서는 삼승 할망이라고 불렀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삼신 대신 삼승이라 알고 있다.

……

백호는 서쪽을 수호하는 사신이며, 가을을 관장하고 흰색을 상징한다. 음의 영수로 간주하는 백호의 생원들은, 옳다고 생각되는 일이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일을 해내는 끈질긴 성격을 갖고 있다. 대부분이 다른 생원들보다 강인한 신체와 정신력을 갖고 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백호이기에, 이들의 기준에서 옳지 않다고 판단되는 일에는 나서지 않는다.

백호 영수는 수장이 될 아이에게는 나비로 둔갑할 수 있는 능력과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독심술을 주었고, 도를 터득할 때가 되면 백발과 벽안으로 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신령이 될 아이 또한 도를 터득할 때가 되면 백발이 되도록 하였으며, 수장과는 다르게 금안으로 변하도록 하여 그들을 구분했다.

 


 

첫 과제라 제출하기까지의 기간이 꽤 길어서, 천천히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였다. 어느새 오방신장 이야기에 빠져 읽고 있었다. 한참을 읽다가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 간식이라도 꺼내고자 몸을 일으켰고, 때마침 순영이 오전 수업을 마치고 침소에 들어왔다.

순영은 어두운 곳에서 불 하나 밝히지 않고 앉아 있던 한솔을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나빌레라

夏至, 밤이 가장 짧은 날

 

“...여우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저랑 민규가 잡고 바로 사자에게 넘겼습니다. 처분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인간을 해하려 했으니 천상에 갈 수도 있고, 이미 해친 목숨이 아홉이나 되니 저승에 가서 벌을 받을 수도 있겠네요.”

“...구미호라며. 순순히 잡혀줬어? 지수 얼굴에 상처를 보니, 가만히 있을 성격은 아닌 것 같던데.”

“그냥 체념한 것처럼 보였어요. 지수 사형은, 그때 날밤을 고스란히 밝히고 있던 것이니 힘이 없었고요.”

“그러게, 나한테 말을 해주었으면 됐잖아!”

“...농으로 하는 말인 것은 알지만 정말 그럴 상황이 아니었어요.”

승철은 원우의 말에 해사하게 웃었다. 한 박자 늦게 소식을 접해서 남들보다 궁금한 게 많은지, 경주 생원을 보내고 나서도 한참이 지났는데 여전히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원우는 그런 승철에게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하나하나 다 설명을 해주었다.

“...민규가 모시는 독각 냄새가 강했는지 꽤 싫어하던걸요.”

*독각(獨脚) 도깨비의 한자어. 정식적인 이름은 독각귀이나 발음하기 편하게 독각이라 부른다.

“민규? 아무 향도 안 나는데?”

“독각 특유의 향이 있어요. 저 또한 미약하게 제가 모시는 저승사자의 향이 나고요. 대부분의 요괴가 싫어하는 향이에요.”

승철이 옆에 앉은 원우의 도포에 코를 대고 향을 맡았다가, 곧바로 들어오는 지수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향을 맡아보았다. 안 나는데..? 승철이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넌 왜 안 나? 왜 왔어? 할 일 있어?”

“...할 일이 없어도 와도 되잖아. 너도 지금 그냥 있는 거 아니야?”

“난 일하는 중이거든! 놀러 온 거야? 너는 맨날 일이 없으면 침소에 있었잖아. 마법 약재 수업까지도 꽤 많이 남았는데."

“침소에서 아기 호랑이가 오방신 과제를 하더라고. 자릴 비워줬지.”

승철은 지수로부터 한솔의 과제를 전해 듣고는, 본인이 1년 생원일 때는 본인의 수호신만 하면 됐다며 어떻게 첫 과제로 오방신 전부를 하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부분의 생원이 각자의 수호신만 조사하다 보니 지식이 얕아질 것을 고려하여 이번 해에 들어오는 생원부터는 오방신 전체를 해야 한다고 했다. 기간은 꽤 넉넉하게 주는 것 같았는데 꽤 일찍 시작하는 것을 보아하니 승관과 찬이 일찍 일찍 끝내놓는 성격이라 그들을 따라가는 것 같았다. 지수는 오방신에 대해 지식이 많은 편이었고, 괜히 한솔의 옆에 있으면 말을 얹어 불편하게 할 것만 같아 먼저 방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느새 지수가 원우의 곁에서 문서 정리하는 것을 돕고 있었다. 대부분을 한자로 써야 하는 황룡의 문서는 지수와 원우가 처리했다. 승철과 순영은 서찰을 받고 활동적인 일을 자주 했다. 조금 전 지수에게는 일을 한다고 했으나, 제대로 펴지지도 않은 서찰을 앞에 두고 있을 뿐 별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넌 다른 생원들은 다 쳐내면서 순영이랑 한솔이한테는 유독 유하게 대하더라.”

“순영이는.. 백호 수장이 될 리가 없으니까 그랬지.”

아무렇지 않게 뱉은 지수의 말에, 순식간에 누각이 조용해졌다. 아! 너무 솔직했나? 농담이야. 웃으며 말하는 지수에, 승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표정을 지었지만 씁쓸한 감정을 숨기지는 못했다. 원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말하지만 순영이가 서당 내에 들어올 때부터 느꼈거든. 백호 기운이 강하다는걸. 옆에 있는 애들이랑 너무 대조되어서, 더 그렇게 느꼈던 것 같아.”

“옆에? 지훈이랑 애들?”

“응. 준휘랑... 원우까지.”

지수는 항상 생각하던 것을 다 정리해야 말을 꺼내는 아이였다. 하지만 초점을 잃은 눈으로 필요 없는 먹을 갈아대며 술술 말하는 지금, 지수의 입은 곧 멈출 것 같지는 않았다.

“...너희도 봤잖아.”

“뭘?”

승철이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입학한 이후로, 심지어 황룡의 수호를 받기 시작한 이후로는 저를 제외한 모든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에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원우가 얕게 한숨을 내뱉고 대답했다.

“금안이요?”

“...응. 넌 봤구나. 순영이가 떨어지는 종이를 받을 때, 잠시 금안으로 변했어.”

“...금안? 너는,”

승철의 질문에 먹을 갈던 지수의 손이 툭, 하고 멈췄다. 벼루 위에서 움직이는 지수의 손만 보던 승철이 지수의 얼굴로 시선이 향했다. 승철이 본 지수의 눈은 푸른 빛이 돌고 있었다. 벽안이었다.

“미친놈아. 너 그거 하지 말랬지. 지금 누가 들어올 줄 알고.”

“잠깐이니 괜찮아!”

승철은 지수가 벽안을 갖고 태어났고, 백호의 수장이 될 거라는 것은 전부터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마냥 환상같던 오방신의 존재를 알게 된 후에, 지수가 정한과 승철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처음에는 마냥 장난인 줄 알았으나 책방에 나오는 백호 수하의 형태와, 지수가 보여준 형태가 같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야 겨우 받아들였다. 백발에 벽안. 백발에 벽안을 가진 조선인이 있다고 하면, 누가 승철을 멀쩡한 사람으로 보겠는가.

지수는 백호 수장의 운명을 아주 어릴 때부터 알았다고 했다. 그 덕분인지, 제 감정을 꽤 잘 조절해 왔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승철은, 지금 지수가 한 살 어린 원우를 앞에 두고도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실수가 아니라는 것도 단번에 알아챘다.

원우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애초에 반응이 적은 편이기도 했고, 원우는 날 때부터 저승의 일꾼 하나를 모시고 살았으니 친하게 지내던 사형이 오방신의 수하라는 것 하나로는 놀라지 않았다. 순영의 금안도 원우가 홀로 보고 알았던 것이라고 했다. 남의 일을 떠벌리고 다니는 성격이 아니었다. 지수와 승철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첨언할 생각도 없었지만, 원우는 걱정거리를 조금이라도 만들기가 싫어 먼저 토로했다. 순영의 금안을, 남몰래 속에서 내어 말한 것은 이것이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어쨌든, 금안의 백호래. 신령이 될 아이래. 나랑 한평생을 함께할 애가 들어왔어. 그 애가 나랑 같은 침소래.”

“...그래서 옆에 두었던 거야? 네가 가는 길에 동행자가 생겼으니?”

“처음에는 그저 그 이유뿐이었지. 근데 순영이는, 정말 좋은 생원이야. 난 아마 그 애가 금안을 보이지 않았더라도 함께했을 거야. 지금의 너희처럼.”

“무슨 이야기 해?”

정한이 들어왔다.

“웬일로 소란스럽나 했다. 홍지수가 여기 있었네.”

“아. 예전 과제 이야기하고 있었어.”

“그래?”

먼저 물어보았으면서, 별 관심 없었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하며 상 위에 있는 서책 무덤을 뒤지기 시작했다. 곧바로 제 서책을 찾아 꺼내 들고는 지수와 승철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냐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둘에, 정한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잡담이 재미있어도 수업은 들어야지. 못난 황룡들아.”

정한이 한심한 표정으로 누각을 나서자마자 쿠당탕탕 부딪히는 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누각과 가까운 곳에 있어 꽤 빨리 명륜당 입구에 도착했다. 웬일인지 복도부터 생원들이 많이 몰려있었다. 셋은 일단 짐부터 두고 오자며 자리를 잡은 후에 다시 복도로 나왔다.

“......아. 뭐야.”

“징글징글하다.”

 

天界神侍學

幻想動物學

黃川硏究學

獨脚硏究學

4년 생원이 될 때 필수로 하나 선택해야 하는 심화 과목들이었다. 모든 신을 공부하는 천계신시학, 상상의 동물을 배우는 환상동물학, 각각 저승과 도깨비를 연구하는 황천, 독각연구학. 다른 생원들에 비해 셋은 익숙한 표정이었다.

“미리 전달받았던 것 그대로네.”

“그러게. 뭐라도 변할 줄 알았더니.”

“항상 그렇지, 뭐. 늙은이들이 뭘 더 하려 들겠어?”

승철이 지수와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는 동안 정한은 곁에 서서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뚫어져라 보다, 박사가 올 것 같다며 조잘대는 둘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왜 그렇게 생각해?”

“...뭘 들어야 하나 싶어서.”

“뭐라도 해놓으면 좋겠지.”

“넌 어차피 약초학을 잘하니까 의원을 할 생각 아니었어?”

“맞아. 맨날 그 이야기 했잖아.”

“그렇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지.”

“어? 지금은? 아니야?”

우릴 지켜주고 싶다며. 승철의 그 한마디에 정한의 움직임이 잠깐 멈추었다가, 이내 그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냐며 웃을 뿐이었다.

“거기 주작! 시끄럽다.”

언제 왔는지 범訉 박사가 앞에 서서 들고 있던 곰방대로 승철을 가리켰다. 셋뿐만 아니라 다른 생원들도 한참 떠들썩했는데 승철은 본인이 제일 만만하냐며 옆에 있는 정한과 지수만 겨우 들을 정도로 꿍얼거렸다.

“그리고 옆에 백호 자네는 수업 마치고 내 방으로 오게.”

“네? ...네. 알겠습니다.”

화들짝 놀란 상태로 대답한 지수가 살짝 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둘을 바라보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더 크게 뜬 승철과 정한이 보였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그 둘의 표정은 수업을 시작하고 나서도 피식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강의가 끝난 뒤 지수가 들은 첫 질문은 이러했다.

“...정말 둘 중 하나가 자네와 함께 하늘로 가는가.”

“예?”

“그... 같은 방을 쓰는 생원 중에... 신령이 있느냐고....”

지수는 비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제가 입학할 때는 소란스레 자리를 차지하고 와서 제가 동백의 아들임을 확인하고 멋대로 백호 수장이라 단정 지었으면서, 순영이 입재하고 한솔이 입재한 올해까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 정도의 관심도 열정도 없으면서 이제 와서 괜히 물어보는 꼴이란. 같잖지도 않았다.

수장은 무조건 천상으로 올라가 영수의 곁에서 인간을 수호해야 하지만 신령은 아니었다. 수장과 신령의 합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는 천상에 올라가서도 여전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수장이 신령을 선택할지 말지는 오로지 수장의 선택에만 달려 있었다. 홀로 백호의 곁을 지키느냐, 혹은 수장과 힘을 합치느냐.

천상에 올라가면 평생을 함께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나는 것이라, 보통 수장이 될 자가 배정된 후 비슷한 시기에 신령이 될 자도 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순영과 한솔이 유력한 후보인데, 순영은 일반인이며 한솔은 양반인이라 하였으니, 둘 중 누구가 되든 오랜 세월을 살았다 자부하는 박사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인물이었으 테지.

지수는 그저 모른 척 했다. 야. 그냥 모르는 척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고 뻐팅기면 박사들도 체념하고 넘어가. 알겠지? 강의가 끝난 뒤 누각 앞에서 헤어질 때 정한이 제게 해준 말이었다. 착실히 그의 말을 따랐다.

완강하게 모르는 체하는 지수를 도저히 이기지 못한 박사는 알겠다며 씁쓸한 표정으로 나가보라 명했다. 지수는 그제야 맑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한데, 하늘의 뜻을 짐작해 보자면... 동백은 홀로 있는 것도 괜찮다 여기실 수도 있겠군.”

박사의 말에 지수의 눈이 푸르게 변했다. 결례를 무릅쓰고 박사와 또렷하게 눈을 마주하니 그가 크게 흠칫했다.

“하늘은 당신들처럼 편협한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아니 내 말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문을 쾅 닫았다. 미약한 연기가 폴폴 풍길 정도의 힘이었다. 콱 틀어박힌 문을 보던 지수가 겨우 진정하며 한숨을 쉬고는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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