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추분(2)

다 여문 곡식들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한다.

서당 by 반야

사시

“동백이 좋긴 하더라.”

지수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섰다. 정한은 쿠당탕탕 요란스럽게 움직이는 그를 보고는 픽, 웃었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서책 세 권을 그의 책상 위로 얹었다.

“...벌써 다녀왔어?”

“응. 동백을 대니까 바로 보내주던데.”

동백이, 좋긴 하더라. 꽃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으나 권력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지수도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마 정한도 윤 대감네 집에서 버려지지 않고 그대로 컸다면, 동백이 아닌 금강초롱을 달고 다녀도 서책 정도 가져오는 것에는 별 무리가 없었을 터였다.

서책을 대충 훑어보고는 잘 가져왔네, 고마워. 하고는 다시 덮어버렸다. 아무래도 지금은 준휘가 더 급하니까. 근데, 그러면 왜 지금 시켜? 이런저런 생각들이 앞섰다. 짧은 머리 탓에 목덜미가 서늘한 것이 적응이 안 되어서 신경 쓰일 것이 하나 더 늘어난 탓도 있고, 지수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것도 있고, 그리고, 하나 더. 해야 할 말이 생긴 기분이라 그런 것도 있고. 목덜미를 느릿하게 만지며 한숨을 푹 쉬고는 지수가 보고 있던 서책을 곁눈질하다 손으로 가렸다. 지수는 이런 일에 별로 화를 내지 않는다. 가만히 쥐고 있던 붓을 벼루 위에 얹고는 정한을 올려다보았다.

“...일이 마무리되어가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응. 왜?”

“현재 백호 신령은 공석인 거 알아?”

“응? 알지.”

“...아니…….”

“?”

정한이 머리를 벅벅 긁더니 아아악, 하고 앓는 소리를 내다가 결국 무원록 아래에 깔려있던 서책을 꺼냈다. 이거 봐. 백호 신령, 홍가 지호. …비어있잖아. 서책 전부가. 제목이 적힌 앞면을 한번, 서책을 펼쳐서 비어있는 종이들을 한번. 덜덜 떨리는 손으로 거칠게 가리키는 정한을 천천히 따라갔다. 눈동자가 텅 비기 시작했다.

“...”

“...”

“…나 오늘 승철이랑 같이 준휘 데리러 가기로 한 거,”

“응. 알아. 어찌 결정 났는지, 도겸이랑 우지한테 다 듣고 왔어.”

“준휘가 사월촌에 집이 있으니까... 빠져나온 후에 거기서 자고 올게.”

나비들은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잘했다. 그곳에서 안 잘 거면서. 준휘를 구해내고 나서는 그를 핑계로 두고 지워진 동백의 근원을 찾으러 날밤을 새울 거면서. 정한은 알면서도 싱긋 웃기만 했다. 지수는 그런 그에게 항상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걱정 안 할게. 네가 따로 늦게 들어와도 믿을게.”

“응. 다, 처리하고 올게.”

고마워. 가라앉은 듯한 목소리였다. 정한은 꿋꿋이 모르는 체하며 시선을 돌렸다.

“...고생하겠네.”

“괜찮아. ...나, 이참에 너한테도 부탁할 게 있는데.”

“뭐?”

“명호랑 순영이가 필요해.”

명호랑 순영이? 정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나 하는 대비책으로, 몸이 날쌔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애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몸이 날쌔진 않은데. 정한의 말은 지수의 귓등에서 다 내쳐졌다. 이것만 다 하고 같이 둘한테 가자는 말만 하는 통에 정한은 결국 뒤편에 가서 자리를 잡고 누워버렸다. 일각 후에 강의 시작이니까 깨워줘. 웅얼거리는 듯 말을 했지만, 곧잘 알아들은 지수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유시

씨. 강의 들어야 하는데. 그래야 낙제 없이 승철 사형과 수업을 같이 들을 수 있을 텐데. 준휘의 성적이라면 일찍이 한 해 위의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승철과 약속한 일이었는데. 쓸데없는 결석이 생겨 성적에 지장이 가게 생겼다. 지금 끌려와서 그럴 생각을 할 여유가 있나? 스스로 생각하고는 웃음이 날 뻔했다. 그러나 곧바로 제 앞에 서는 관원들 때문에 싹 사라졌다. 재수 없다. 일부러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퇴근한다며. 해가 지는 시각인데 왜 이곳에 있지? 당황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올려다봤다.

“이중꽃에 대해 마지막으로 묻는다. 네 가문의 꽃이 무엇이냐.”

“….”

준휘는 끝까지 관원들 앞에서 입을 열지 않았다. 때마침 저 멀리서 관원 하나가 다급히 뛰어왔다. 한 손에 꼭 쥐고 있던 문서를 주기 위함이었다. 거칠게 헛숨을 몰아쉬는 그에게서 건네받은 문서를 보더니, 차근차근 읽어주었다. 의기양양한 관원의 표정이 꽤 재수없었다.


한쪽 손이 절단된 아이. 안개꽃 문가의 성을 사용하며, 이름은 수려할 준과 빛날 휘를 사용한다. 다른 하나는 백일홍이다. 그는 이미 태어난 해를 넘기지 못하고 과다출혈로 사망하였으나 구삼승할망의 은혜를 입어 저승에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 허나 인간의 생명이 귀한 것을 간과하고 다시 태어난 이에게, 시왕은 벌로 손목에 그의 존재를 새겨주었다. 그의 손목에는 610亡者가 새겨져 있다. 유월 십 일에 태어났으나 죽음을 무시하고 감히 이승에서 눈을 뜬 죄는 평생 씻지 못할 그의 표식으로 남게 되었다.


서책을 바닥에 내다 버린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까봐. 그의 말에 포졸들이 그의 손목을 포박해서 옷자락을 들춰냈다. 숨길 새도 없이 선명하게 새겨진 망자의 표시가 드러났다. 준휘는 더 이상 숨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관원이 우악스럽게 준휘의 얼굴을 잡아챘다.

“더 할 말 없나? 감히 주제와 신분을 숨기고 뻔뻔스레 복수화동으로 살아놓고.”

주제와 신분을 숨기고? 준휘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자세를 바로잡고 똑바로 관원을 쳐다봤다. 아무도 정의하지 못하는 주제와 신분을 감히 누가 숨기려 들겠는가.

“...복수화동의 존재는 죄로 제정되었던 적이 없습니다.”

“뭐?”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신경질을 긁는 준휘가 슬슬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이를 바득 간 준휘가 잠시 망설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저승의 중앙, 구삼승의 사동死童입니다.”

저승에는 팔방을 나누어 관리하는 시왕十王과, 중앙을 관리하는 구삼승할망이 있다. 관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린 나이에 죽었던 놈이니, 구삼승의 아래로 갔을 테고. 진짜, 이놈이 구삼승의 사동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꽉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준휘의 들려있던 몸이 힘없이 주저앉았다. 관원이 발로 툭,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 그냥 의금부에 넘기지. 저승의 법도는 한성부에서 처리할 수 없으니.”

이를 바드득 갈던 관원이 서책을 주워 준휘에게로 던졌다. 분이 풀리지 않는 듯했으나, 서당과 저승의 소속임을 명확히 알게 되었기에 쉽사리 건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문이 잠기고 그 틈새로 날아오는 서책을 몸으로 받으려던 찰나, 붉은 깃이 펄럭이며 앞이 번쩍 빛났다. 크게 움찔거리던 준휘의 몸이 한순간에 멈추었다.

승철이었다.

모두가 준휘에게 등을 돌린 찰나에 감투를 쓰고 붉은빛을 흩날리며 승철이 나타났다.

“미안해. 많이 기다렸어?”

“아니요. 올 줄 알았어요.”

처음에 계획했던대로, 승철은 준휘를 데리고 공간이동술을 써서 나가려 했다. 감투를 급히 씌워주고 자세를 다잡았다. 잠시 가만히 있다가, 저를 빤히 내려다보는 준휘와 눈을 마주쳤다.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요?”

“...지수가, 네 집으로 가라고 했어.”

“응. 그런데?”

“너희 집이 어딘지 모르잖아, 나는...”

우물쭈물대며 말끝을 흐리는 승철이 귀여웠다. 준휘가 싱긋 웃었다. 한 품에 승철을 안았다. 뭐 하냐는 물음에도, 준휘는 꽉 붙들라며 손을 제 허리에 올려주었다. 올려다보는 승철이 눈을 감을 수 있도록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춰주고, 땅을 박찼다.

감투를 벗겨주고, 놀란 탓에 다리에 힘이 풀린 승철을 눕혀주었다. 옷을 갈아입혀 주려고 하자 부끄럽다며 고개를 젓더니 건네받기만 할 뿐 일어나질 않았다. 준휘는 잠시 누워있으라는 말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방에 열을 올려주고 주변을 정리했다.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 집이 꽤 서늘했다. 얼추 돌아보고는 방에 들어가 보니 그새 쥐어준 옷으로 환복을 하고는 다시 누워있는 상태였다.

“많이 놀랬어요?”

“...너는 그걸 어떻게 쓴 거야? 어디서 배웠어?”

먼저 마법을 공부할 리 없는 준휘가 4년 생원들이 배우는 공간이동술을 썼으니, 꽤 놀란 눈치였다.

“저승의 모든 망자는, 아이를 사랑해요.”

두고 온 자식들이 그리워서, 미안해서. 그게 가장 커요. 씁쓸하게 말했다. 준휘는 재판받은 이후부터 서당에 들어오기 전까지 구삼승에게 저승의 마법을 배웠고, 망자와 사자들에게 이승의 마법을 배웠다. 그곳에서는 서당에서의 규칙을 아는 자가 극히 드물었으니 저들이 아는 것들을 죄다 알려주었다. 준휘는 그것을 전부 습득해서 올라온 것뿐이고.

“그러니 나 혼내지 마요.”

“...좋아하니까 눈감아줄게.”

씻을래요? 물 받을까요? 뒤에 목욕통이 있다며 목욕하러 나갈 것이냐 물었다. 승철은 가만히 누워서는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근데 아마, 지수랑 호시.. 순영이가 새벽녘에 이리로 오지 싶어.”

“그건 그때 필요한지 물어보고, 받아서 데우면 돼요.”

“혼자 지내는 공간인 것 같은데... 신기하네.”

“친한 요괴들이 많아서요. 그 아이들이 종종 와서 사용하고는 정리해두고 가요.”

신기했다. 왜 여태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묻자, 완전히 서당과는 관련 없는 일이라 딱히 말할 적기를 찾지 못해서 그랬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근데 사형은...”

“응?”

“...나랑 관련이 깊어질 사람이니까요.”

배시시 웃고는 휙, 나가버렸다.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어딜 가냐고 소리치자, 자기는 씻어야 한다는 대답이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뒤편으로 멀어져갔다.

“…쟤가 지금 뭐라 말한 거야?”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이불을 팡팡 쳐댔다. 그러던 승철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쟤 또 옷 안 가지고 간 것 같은데. 종종 주작 정방에서 함께 씻을 때도 제 옷을 두고 와서 승철이나 석민이 가져다줬는데, 제집에서도 저러다니. 대강 두터워 보이는 옷가지를 챙겨 방문을 열었다.

애초에 준휘가 도착한 곳이 지금 승철이 있던 안방이었다. 내내 그곳에만 있어서 몰랐다. 꽤 넓었다. 마당이 좁지 않았고, 주방으로 나서는 길과 마루가 깔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그 사잇길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보니, 등불이 은은하게 뒤편에 있는 변소와 목욕 공간이 보였다. 얌전히 그 앞으로 가서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흔들리는 문 틈새로 뿌연 공기가 빠져나왔다. 찰박이던 물 소리도 어느새 그쳤다.

“준아. 옷, 챙겼어? ...가져왔는데.”

“아!”

매끄럽게 문이 열렸다. 당연했지만, 예상했지만, 불쑥 튀어나온 상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놀란 승철이 그대로 들고 있던 옷가지에 고개를 파묻고 주르륵 주저앉았다. 나 아무것도 안 입고 있는데, 사형이 그렇게 앉아버리면 어떡해요. 준휘가 손을 뻗어 사르륵 옷을 빼내 갔다. 재빨리 입고 나와서는 밖에서 가만히 쪼그려 앉았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승철의 손목을 잡아 치워주었다. 눈을 마주치니 또 부끄러운지 시선을 마추질 못했다.

“사형.”

“...”

“누가 보면 혼인한 첫날 밤인 줄 알겠어요.”

“야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귀가 새빨갛다. 준휘는 그저 웃었다. 날이 차니, 다시 방에 가서 정을 나눌까요? 그의 말에도 승철은 부끄럽다며 고개를 숙이고 저을 뿐이었다. 준휘는 지금 어두운 탓에 승철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 괜히 아쉬웠다.

준휘의 집은 고양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요괴나 영혼들에도 알음알음 알려진 곳이었다. 인간의 형태를 한 요괴들이 잠시 머물 때 이곳에서 몸을 정리하고 갈 수도 있기에, 준휘는 항상 목욕을 하고 불을 끄지 않았다. 저절로 꺼지거나 요괴들이 끄고 가거나 할 테니까. 닫았던 목욕실 문을 다시 열었다. 빛이 다시 새어 나왔다. 찰나에, 승철의 양 볼을 붙잡고 천천히 고개를 들도록 했다.

“사형.”

“...응.”

“매일 같이 씻고 잤는데, 그렇게 부끄러워요?”

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 때문에 준휘가 인간 같지가 않았다. 진짜... 설화에서나 봤던, 사람이 홀린다는 말이 이런 건가? 싶었다.

“응...”

“왜요?”

“여긴...,”

너랑 둘만 있는 네 집이니까.

대답을 하기도 전에 입술을 가로막는 준휘 때문에 소리가 먹혀들어 갔다. 비집고 들어온 혀가 부드럽고 진득하게 얽혔다. 얼얼해질 때쯤에 승철이 준휘의 팔을 붙잡았다. 숨이 벅차올랐다. 겨우 가슴팍에 주먹을 두드려 떼어냈다. 또다시 얼굴을 마주하기가 부끄러워, 폭 끌어안았다. 준휘도 그를 가만히 받아주며 허리 아래를 토닥여주었다. 안으로 갈까요. 응... 마법을 쓰기에는 너무 짧은데. 걸어갈 거야... 어물쩡 몸에서 떨어진 승철이 종종걸음으로 빠져나갔다. 준휘도 그와 격차가 벌어지지 않을 만큼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

나빌레라

秋分(二), 다 여문 곡식들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한다.

지수가 가만히 앉아있는 관원들에게 명적을 내어주었다. 손을 내어 받으려는 찰나에 휙 다시 낚아챘다. 어린놈에게 농락당한 것이 못마땅한지, 쾅 소리를 내며 책상을 내리쳤다. 지수가 비소를 지으며 다시 내어주었다.

“문준휘가 적혀있는 명적인데, 쓸모가 있겠습니까?”

가족, 구삼승할망. 그의 신분 및 생업, 저승의 사동 관할 및 중앙 통치자. 준휘의 말 그대로였음을 확인한 관원이 서책을 들고 부들부들 떨며 찢을듯이 쥐고 있었다.

“그놈을 빼내 가려고 이제야 온 것인가?”

“….”

“하! 늦었네. 내일, 의금부로….”

거칠게 서책을 다시 뺏었다. 곧바로 도포의 소매 속에 집어넣었다. 지수는 승철이 함께 옥에 들어왔을 때 곧바로 준휘를 데리고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뇨, 당신들이 늦었습니다.”

“뭐?”

“문준휘 생원은 이미 옥에서 다른 황룡의 도움을 받아 빠져나갔을 터입니다.”

관원이 예상했던 것이긴 했다. 가끔 동백의 외손자가 서당을 휘어잡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머리가 나쁜 편이 아니고, 일을 잘 처리하여 그를 미워하는 생원은 많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는 너는 안전하리라 믿고 홑몸으로 온 것이냐?”

말을 하자마자 정한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뒤에 생원을 하나 더 데리고 들어왔다. 고개를 까닥이며 관원에게 인사한 정한과 달리 명호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지수가 빙긋 웃었다. 시기가 적절하니 딱 좋았다.

“…됐습니까? 서당의 무예생들을 이끌고 왔습니다.”

“헌데 동백이 그럴 권한이 어디있는가. 현재 대표는 금강초롱이라 알고 있는데.”

관원은 저 뒤에 서 있는 생원이 정한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정한이 턱, 소리가 나게 종이 하나를 펼쳐 보였다. 금강초롱과 동백의 문양이 나란히 찍혀있었다.

“임시로 권한을 넘겨받아 왔습니다. 그러니 당신들도, 저를 건드리진 못할 테고요. 경고하러 왔습니다.”

“뭔….”

“다시는 서당 생원을 붙잡고 건드릴 생각 마십시오. 치외법권 관할 밖에서 일어난 일이라 해도 서당 자체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부러 키우지 말란 소리입니다.”

눈매가 매서워 보였다. 확실히 의사전달을 잘했다. 명호는 속으로 감탄했다. 정한이 대표로 하는 이유가, 두뇌 회전이 빠르고 그만큼 몸도 날쌔서. 훈장 및 박사들에게도 지지 않고 동등하게 대할 수 있는 생원이라서 그렇다고 들었다. 가만히 뒤에서 듣다 보니 지수에게도 그의 권한을 넘겨줄 만하다고 생각했다. 정한 못지않게 적당히 적을 갖고 놀 줄도 알고, 상황판단도 빠른 편이었다. 지수가 몸을 좀 더 가까이하고 낮게 읊조렸다.

“윤정한이 오길 바랬을 텐데 아쉬운가요? 걔를 잡아 와야 윤 대감한테 잘 보일 수 있을 텐데. 맞죠?”

“하. 참”

“뻔한 속임수는 백호한테 다 들켜요.”

더 이상 할 말도 없고 듣고 싶은 내용도 없었다. 준휘에 대한 정보를 잠시나마 건네주었고, 경고도 했으니. 더는 서당 생원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가자. 지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나름 어른에 대한 예의라고,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관원들은 멍하니 그들을 보기만 할 뿐이었다. 잡지 않았으니, 가면 된다. 명호가 문을 조용히 열었고 둘은 그를 따라나섰다.

“...고생했어.”

“응. 내가 하기로 한 것이니까, 당연하지. 관원들, 진짜 멍청하다. 너 윤대감이랑 진짜 똑같이 생겼는데 그걸 못 알아봐.”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날 무예생으로 둔갑시켜 뒤에 세운 너도 참 대단하다 생각해.”

“응. 궁금했어. 그래도 용케 금강초롱 향을 없애고 왔네?”

“안 하려고 했는데, 민규랑 승관이가 침소 문을 막고 빌더라고.”

“......저, 호시는 누가 데려오나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정한과 지수에게 물었다. 명호의 질문에, 둘이 잊고 있었다는 듯 뚝 걸음을 멈추었다. 지수가 둘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내가 데리고 올게. 어디에 있다고?”

“아마 북에서 이리로 직진해서 올 것입니다.”

“잡아라!!!!!”

거칠게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았다. 지수가 귀를 쫑긋거렸다. 명호는 지수가 한껏 예민한 상태일 것이라 예상은 했는데, 날카롭게 빠진 눈꼬리와 움찔대는 귀가 인외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지수가 다급히 명호를 두드리며 말했다.

“잡히는 놈이 호시겠다.”

“네?”

“먼저 가. 데리고 갈게.”

정한이 지수의 소매를 다급히 붙잡았다.

“너 내일,”

“백호 하나 정도는 더 붙어도 괜찮아.”

조심히 들어가. 고생했어! 지수가 명호의 엉덩이를 두드려주며 말하고는 곧장 뛰어갔다. 정한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명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사형. 응? 도술을 쓰면 청룡 비늘이 남는데, 괜찮나요. 응, 당연하지. 후에 들키면 또 곤란해지는 것 아닙니까? 마법이라,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거든. 명호는 궁금증이 풀렸는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정한은 뿌듯한 표정으로 이제, 갈까? 하고 묻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서당으로 이동했다.

신시

비녀로 북을 찢었다. 시간을 알 수 없게 해야 한다. 혹시나 승철이 준휘를 데리고 빠져나가지 못하고, 지수가 교섭을 하는데 실패하게 되면, 때가 늦어지면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를 듣게 된다. 관원들은 북소리에 맞춰 움직이기 때문에 찢어두는 것이었다. 혹시나 누군가 들켜서 다시 옥으로 들어가는 일을 막기 위해. 순영이 북을 찢고, 그때 명호는 정한과 아래에 내려가서 지수에게로 가기로 했다.

“무엇으로 찢을 겁니까?”

“이거.”

순영이 비녀를 꺼냈다. 둘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명호가 그렇냐며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정한이 그것을 가만히 내려주고는 반대편 손에 칼을 내어주었다. 아마 한성부에 있는 북은 제 아버지의 마법이 걸려있을 테니, 더 강한 힘이 필요할 것이라며 준 것이었다. 순영이 손에 꽉 쥐자마자 익숙한 문양들이 번쩍였다. 능소화와 꽃무릇, 모란과 동백이었다.

“언제 이런 것까지 준비했습니까?”

“널 위해서 일찍이 해둔 것이지. 실패하면 안 되니까.”

먼저 가볼게. 정한과 명호가 무예복으로 갈아입었다. 급히 마련한 옷이었는데도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정한 사형은 이런 옷도 잘 어울리는구나. 순영이 홀린 듯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호는 그에게 긴장하지 말고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고 다독여주었다. 감투를 들고 오지 않아, 평소보다 더 조심해야 했다. 알겠다고 연신 대답하며 그들을 보냈다.

잠시 기다리니 곧이어 북을 치러 올라온 관원과 마주쳤다. 무어냐는 말을 듣기도 전에 놀란 관원에게 졸음睡 마법을 걸었다. 제게로 쓰러지는 관원을 받아서 들고는 구석에 처박아둔 후에 북을 찢었다. 확실히 북을 찢는 동시에 표면에 금강초롱이 번쩍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찌할까 고민하던 순영은 환각 마법까지 새겨두고 내려왔다. 순영을 마주한 것은 기억하지 못하게 되고, 제가 북을 실수로 찢었다고 생각하도록 했다.

이제 셋이 있는 곳 앞에서 기다리다 함께 돌아오면 된다. 정한은 명호와, 지수는 순영과 공간이동술을 사용해서 서당으로 돌아가면 된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총총 소리 내지 않고 걸어가고 있었다.

“거기, 웬 놈이냐?”

발걸음이 우뚝 멈추어 섰다. 등에서 오싹함이 느껴졌다. 고장 난 듯 고개를 끼긱거리며 돌아보았다. '진짜 관원'이 서 있었다. 마법부 같지는 않아 보였다. 평소였으면 넉살스레 웃어 보였겠지만, 지금 제 손에는 칼이 들려있다.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어디 소속 누구냐?”

“어….”

한양 서당의 황룡 호시라는 말을 하기에는, 제 앞에 이 자가 너무 일반인스러웠다. 어디에 간다는 말도 하지 못한다. 정한이 북을 찢기 전 위에서 ‘우리는 저쪽에 갈 거야.’ 하며 지수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을 뿐이었기에. 관원에게 쩌어어기 갑네다.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곳을 칼 한 자루를 손에 꽉 쥐고 간다고 하면, 누가 봐도 검계劍契라고 생각할 것이 뻔했다. 그럼….

달려야지. 존나, 달려야지. 한성부의 구조 정도는 오는 길에 외워뒀다. 길을 외우는 머리가 좋은 것을 이럴 때 쓸 줄은 몰랐다. 관원이 우렁차게 잡으라고 소리 질렀다. 뒤따라오는 소리가 살짝씩 멀어지는 것을 느낄 때, 안쪽으로 미끄러지듯 몸을 날려 숨었다. 짤그락. 칼은 제 손에 여전히 쥐어져 있는데 경쾌한 소리가 멀찍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비녀였다. 차라리 떨어진 게 칼이었으면 했다. 비녀는 절대로 두고 갈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근데, 관원이 오면 들킬 것만 같았다. 속으로 수백 번 스스로에게 욕을 하고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빼내었다.

“저기 있다!!!”

“아, 미친.”

밖으로 몸을 빼서 비녀를 쥐자마자 바로 들켜버렸다. 아까 마주한 관원이었다. 아직 발걸음이 하나뿐인 걸 보니, 여기 관원들은 죄다 멍청하고 느린갑다, 싶었다. 제 아래에 있는 무예생들은 제가 낮게 한마디만 해도 우르르 나올 텐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낮은 담장을 짚고 넘어갔다. 담장 안이 깊었는지, 착지를 제대로 하질 못했다. 몸을 굴리며 앞으로 상체가 쏟아질 뻔한 찰나였다.

언제 왔는지 모를 지수가 제 앞에서 받아주었다. 온전히 품에 안겨서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의도적으로 내려간 눈과 입꼬리를 본 순영이 당황하며 억지로 대칭되는 호선을 그리려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더듬어보았을 때, 담을 짚다가 비녀를 또 놓친 것 같았다. 독심술을 사용할 수 있는 지수는 순영의 생각을 온전히 읽고 있었다.

“비녀를 또 놓쳤어?”

“...관원이 이리로 오기 전에 찾아야 해요.”

퍼뜩 몸을 떼어내서 말하는 순영에, 지수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담장 너머로 뻗었다. 손가락 사이로 비녀가 날아와 꽂혔다. 순영이 동그랗게 뜬 두 눈으로 비녀를 보다가 얌전히 받고 품속에 넣어주었다.

“이 정도는 도술로 가져올 수 있어서 말이야.”

“...고마워요.“

“응. 이제 갈까? 다친 곳은, 없지?”

“네.”

“역시. 우리 호랑이는 그럴 줄 알았어.”

몸을 탁탁 털며 일어났다. 담장 바로 너머에 관원이 있었으나 이제는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지수가 웃으며 순영의 허리와 머리통에 손을 올렸다. 꽉 껴안고는, 곧바로 사라졌다. 관원은 당황스러운 눈으로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순영이 도착한 곳은 당연하게도 서당이 아니었다. 낯선 집이었다. 지수가 도술을 잘못 쓸 리 없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쉿.”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리며, 고개를 잡아 천천히 돌려주었다. 안방에서 나는 웃음소리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승철이었다.

“승철 사형이 여기 있어요?”

“응. 여기, 준휘 집이야.”

그럼 사월촌이라는 것인데. 그 생각을 하고 보니 대강 어디쯤인지 알 수 있었다. 사월촌 끝자락에 있는 가장 큰 집. 娑月. 추는 달 아래 흥이 넘치는 곳. 달 아래 춤추는 사람들의 마을이라고도 한다. 무희나 일반인들 중에서도 무희들이 많이 사는 마을이라 대개 작은 집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데, 이 집이 유일하게 크고 한적했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대문을 꽁꽁 잠그고 있으면서 안팎에 드나드는 사람이 없어 죽은 집이라고도 종종 불려왔으나, 십여 년에 한두 번 늙은 할멈이 제 손주뻘로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드나들었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다. 그럼, 준휘가 10년 할머니라는 분의 손주인가? 따위의 생각을 했다.

“...들어가면 되나요.”

“어떻게 할래? 나는 지워진 백호를 쫓으러 돌아다닐 거야.”

“아, 네?”

지수가 준휘를 옥에서 완전히 빼내고 나면 다른 일을 더 할 것이라는 걸 지훈에게 얼핏 듣기는 했다. 지워진 백호를 찾는 것이라니. 순영이 한참을 뜸을 들이다 물었다.

“...제가 따라다녀도 괜찮아요?”

“응? 당연하지! 너도 나와 같은 백호인데.”

“....”

“그리고….”

내가 비녀 찾아줬으니까, 이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려주면 좋겠는데. 지수가 속삭였다. 순영은 가만히 그를 보기만 했다.

“......어딜 가요.”

“응? 아. 저번에 갔던, 하늘에 다시 가볼까 해.”

“백호 영수를 뵈러 가는 거예요?”

“아니! 천계책방에.”

한양에 있는 책방에는 별로 가보지도 않았는데, 하늘 위나 바닷속에 있는 책방은 밥 먹듯이 드나들게 생겼다. 그럼 가는 길에 이야기해주겠다며 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해줄 거야?”

“네. 언젠가는 이야기 해야겠다 싶어서 생각하고 있었어요.”

“고마워. 근데 힘들면, 안 해줘도 돼.”

순영이 말하기 힘들어하는 것을 알았기에 여태 듣지 않았다. 제가 말을 하다 도중에 그만두어도 지수는 별다른 내색 없이 고생했다고 해줄 사형이다.

“네. 힘들면 그것마저도 사형께 이야기할게요. 그럼, 전원우한테 이어서 들어요.”

“응….”

순영의 말을 들은 지수가 조용히 대문 위에 손을 얹었다. 동백의 힘을 써서 문을 열었다. 무게감이 있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옆에 있는 영묘산에 가야 했다. 지금 지수가 나무를 타고 천상에 올라갈 방법은 그곳뿐이었다. 

“저희가 지금 여기 있는거, 준휘한테 말 해야하지 않아요?”

“알고 있을거야. 여기 걸린 마법이, 꽤 강하거든. 여기 우리가 있는걸 느끼고 있을거야.”

“...네.”

지수의 예상대로 준휘는 이미 이들이 제 집 마당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집 전체에 구삼승의 방어마법이 걸려있기에,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자는 없다. 제 공간에 드나드는 인간이 있으면 본능적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경계를 했는데, 대문을 연 자가 동백임을 느끼고 나서는 괜히 안심이 되었다. 내일 동이 트면 오시겠구나, 하며 일찍이 물을 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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