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권순영(1)

영원불멸의 백호

서당 by 반야

순영은 머리가 좋고 눈치도 빠르다. 날때부터 순영은 어머니를 제외한 세상 모든 것이 경계의 대상이었다.

시도때도 없이 화를 내는 주인 영감이 무서워 주어진 부엌일만 말없이 했고, 기분이 제멋대로 바뀌는 도련님이 두려워 그를 위해 도벽을 밥 먹듯이 했다. 천민출신의 또래 아이들은 죄다 뛰어놀았지만 순영은 혹여나 그마저도 어머니께 누가 될까 싶어 하질 못했다. 대궐 같은 집구석 한쪽에 놓인 작은 이불 창고를 집으로 하여 지냈는데, 항상 그곳에 처박혀 있었다.


물오름달 스무날

도련님을 위해 꿀떡을 해서 올려주니, 꽤 기분이 좋았던 모양인지 약주를 한잔하고는 순영에게 용돈을 주었다. 이렇게 모아둔 돈을 속으로 생각해보았다. 얼마나 모였는가 대강 어림잡아보면, 같이 지내는 몸종 아이들과 함께 국밥집에 가서 한 그릇씩 시켜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순영은 가보라는 명을 듣자마자 곧장 집에 달려가서 유일하게 제 것인 서랍을 뒤적였다. 흰 천에 고이 싸여있는 돈 묶음을 찾아내고는 바로 시장통으로 빠져나왔다. 반촌으로 뛰어가서, 항상 봐왔던 장신구 판매대 앞에 섰다.

“어이, 돈 없으면 보지도 말어.”

주인아저씨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순영이 쭈뼛쭈뼛 돈을 꺼내 보이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돈이면, 어떤 걸 살 수 있어요?”

자세히 돈을 보여주며 물었다. 아저씨는 슬쩍 그 돈을 보더니 가당치도 않다는 듯 웃었다.

“하이고 이놈아. 이 돈으로는 뭣도 못 사. 요새 한양 물가가 어떤 줄은 알고 온 거냐? 누구 심부름이야?”

“심부름 아니고... 우리 엄마 주려고요. 생신인데, 아무것도 해드려 본 적이 없어서요.”

“어유, 효자네. ...자! 내 그 돈 받고, 이걸 주마.”

아저씨가 비녀 하나를 보여주었다. 못생겼다. 값싸 보였다. 결국 나는 엄마한테 이런 선물밖에 못 해주는구나, 싶었다. 그냥 밥이나 맛난 거 사 먹는 것이 훨씬 낫겠다 싶어 돈을 거두려던 찰나였다.

“아저씨. 암만 물가가 올라도, 그 정돈 아니에요.”

“뭐?”

꽃냄새가 훅 끼쳤다. 키는 비슷한데, 골격이 좀 더 굵직한 느낌이었다. 외모는 화려해서 샛노란 도포는 눈에 거슬리지도 않을 정도였다.

“...윤정한이, 넌 또 웬일이야?”

“누이들 심부름이요. 매화가 한창, 바쁠 시기잖아요.”

정한은 순영의 돈 묶음을 한 번, 아저씨의 손 위에 있는 낡은 비녀를 한 번 보았다. 그러더니 제 품에서 비녀 하나를 꺼내 보였다. 단정하게 생긴 나무 비녀였다.

“이걸 저 돈 정도 주고 샀던 것 같은데.”

“너….”

정한이 샐쭉 웃어 보였다. 아저씨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결국 나무비녀와 비슷한 수준의 다른 비녀를 내어주었다. 미안하다는 사과는 덤이었지만 순영의 귀에는 그런 것이 들려오지 않았다. 돈을 전부 주고, 그 비녀를 받은 후에는 홀린 듯이 손에 쥐고 보기만 했다. 한참을 보다가 정한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들었으나 그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순영이, 순영!!!”

익숙한 목소리에 퍼뜩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애들이 이리로 뛰어오고 있었다. 대강 바지춤에 쑤셔서 넣고 그리로 갔다.


“야, 너는 왜 항상 이 모양 이 꼴이야?”

그만 가보라고 자기가 말 했으면서 그 잠깐 사이에 제가 사라졌다고 화가 난 모양이었다. 이 집에서 요리할 줄 아는 어린 비복은 순영뿐인데, 덜렁 주고 없어졌으니, 화를 낼 만했다. 물론 순영은 이해하지 못한 채로 고개만 조아릴 뿐이었다. 이럴 때는 머리만 박고 얌전히 있으면 넘어갈 테다.

“…..”

“니 애비도 노비라며. 종놈마저도 내다 버린 자식이라 불쌍해서 데리고 있어 주었더니…….”

고개만 처박고 주먹을 꽉 쥐었다. 가보라는 성의 없는 말투를 듣고는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앞에 있던 술병, 그걸로 머리라도 내려칠 걸 하는 마음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순영은 집에서 가장 떨어져 있는 곡식 창고에 들어가서 한참을 울었다. 늦게 들어가면 어머니께서 걱정하실 것이 분명했다. 조금만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집으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나 쉽게 풀리질 않았다. 괜히 곱게 묶여있는 쌀 포대에 주먹을 꽂으며 화를 풀었다. 그마저도 쌀 포대에 구멍이라도 나면 어머니가 대신 혼날 것을 알아서 빨리 그만두었다. 얄궂게 파인 쌀 포대 중간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빌레라

權順榮(一), 영원불멸의 백호 

인기척이 들려 눈을 떴다. 그새 잠이 들었다. 날이 지는 것도 모르고 잠들다니, 멍청한 짓은 골라서 한다며 낮게 욕을 하려던 찰나,

“왜 이런 곳에서 자고 있어?”

겨울이 지고 봄이 피어날 무렵인데. 엊그제 부엌에서 몰래 이화전을 부쳐 어머니께 드렸다가 잔소리를 들었는데. 제게 말을 건네오는 생원에게서 옅은 동백의 향이 났다. 후다닥 일어났다. 옷차림새가 너무 고왔다. 오늘 하루종일 예쁜 사내를 줄기차게 보는구나. 낮에는 매끄러운 곡선을 가진 금강초롱을 뵙고, 밤에는 두터우면서도 세밀한 동백을 보았다. 이상하게도, 동백은 순영이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것을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응. 그래 보이더라. 여기가 집은 아닌 것 같고….”

“예. 좀 떨어져 있는데……. 헌데, 누구…십니까?”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하는 순영이 약간 웅얼거리며 물었다. 동백은 웃으며 더 다가왔다. 그래봤자 순영과 한두 해 정도의 나이 차를 가진 사내일 뿐인데, 그는 순영이 일어나며 떨어트릴 뻔한 쌀 포대를 가벼이 한 손으로 받쳐서 제자리로 돌려주었다.

“네가, 순영이지? 권순영. 병조판서 자택 내 이불 창고...에 산다고 알고 있는데.”

“...네. 맞는데요.”

“이걸 전해주려고 왔어. 한번 펼쳐볼래?”

동백은 끝까지 제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다. 순영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를 흘끗 보더니, 순순히 종이를 펼쳐보았다. 알 수 없는 것들이 수두룩했다.

“......제가 글을 몰라 무슨 뜻인지 영 모르겠습니다. 누구에게 전해드리면 됩니까?”

“네게 주는 것이지!”

“아무리 보아도, 이 서신은 제 것이 아닐텝니다. 저따위가 무슨….”

“네 서신이 맞아. 네가 살아온 열다섯 해를, 무엇 따위로 감히 정의할 자는 없어.”

단호한 동백의 말에 순영의 심장이 쿵, 하고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내가 읽어주고, 알려줄게.”

꽤 이름있는 집안사람처럼 보였다. 깔끔하고, 친절하고, 고운 사람. 빛깔 나는 도포를 입고 있던 그가 순영의 곁에 착 달라붙었다. 순영은 또 감히 제가 있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슬그머니 몸을 떼려던 찰나,

“방금 말했잖아. 신분 따위 신경 안 쓰니, 걱정하지 말고 옆에 서 있어도 돼.”

제 머릿속을 완전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팔을 잡아 당겨버리는 동백이었다. 순영은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옆에 자리를 잡고 섰다.


“......대강 이해한 것 같네. 똑똑하다.”

“….”

“계속,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하네.”

“….”

“어찌 알았냐고? 하하, 네 표정이 딱 그래.”

“보통 일반인 아이들은 직접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알지도, 믿지도 못하지.”

또 낯선 목소리가 문턱 너머에서 들렸다. 어, 벌써 왔어? 동백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또, 또, 또. 이번에는 잘생긴 사람이 왔다.

“쟤도 너랑 같은 일반인이었거든. 아, 그….”

“그냥, 쉽게 생각하면 된다. 네 집안에서 마법의 존재를 알아챈 사람이 너뿐이면, 너도 일반인인 거야.”

“….”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순영이 서 있었다. 동백은 직접 보여줘야겠다며, 문턱에 서 있던 잘생긴 사내를 데리고 들어왔다. 인상이 강하게 생긴 그는 홍지수 너도 참 못 말린다며 중얼거리고는 붉은 먹이 묻은 붓을 꺼내었다. 화르르 새빨간 불을 피워냈다. 순영이 놀란 눈으로 붓을 보자, 동백이 이제 여기서 나가자며 손을 잡았다. 지수라 불리는 이 사람에게서는 동백 향이 끊기질 않았다.

지수는 인상이 짙은 사내와 함께 순영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꼭 잎새달 하루에 서당으로 와야 한다며, 앞서 읽었던 내용을 되짚어주고 나서야 떠났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휘리릭 지나간 찰나에, 순영은 공허한 마당을 두리번거리다 조용히 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저를 맞이한 것은, 걱정이 가득한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요놈아-, 순영아. 이제 오면 어떡하니!”

“미안. 저, 곡식 창고에서 잠들었어.”

“호랑이한테 덥석 물려갔으면 어쩌나 얼마나 걱정했는데!”

“아잇, 내가 호랑이한테 먹힐 놈이야?”

“말은 잘하지!…….”

순영이 비녀를 꺼내 들었다. 엄마. 거듭 부르며 가까이 다가가서 뒤에서 안겨도, 익숙하다는 듯이 받아주기만 했다. 슬그머니 손에 비녀를 쥐여주자 놀란 듯 뒤를 돌아 순영과 눈을 마주쳤다.

도련님께서 받은 삯들을 모아 산 것이라 했다. 말없이 비녀만 만지던 어머니는 결국 비녀 위로 눈물을 한 방울 뚝 떨어트렸다. 아 왜 또 울어!! 꼭 안아주며 다독여주었다. 두 사내에게 받은 종이들은 차차 다시 열어보아도 되니까. 간식 안 사 먹고 열심히 모으길 잘했다고, 날이 새도록 생각한 순영이었다.


잎새달 하루

꼭두새벽에 일어나 몰래 몸을 단장하고, 일어나는 어머니께 수복청에 일거리가 생겨 그곳에 가봐야한다고 뛰쳐나왔다. 길을 외우는 머리가 좋았기에 바로 들어올 수 있었다. 순영은 들어가는 입구에서 준휘를 만났다. 엄청나게 큰 놈이 더 큰 활을 들고 서 있길래, 뭐 하는 놈인가 싶어 가까이 가봤을 뿐인데 냅다 인사를 하더니 친구가 되었다.

명적을 확인하라기에 함께 갔다. 죄다 한문이어서 어지러울 정도였다. 순영이 다급하게 보따리를 뒤적였다. 들고 올 것이 없어 큰 천에 짐을 대강 싸서 몸에 대각선으로 맨 것이 다였다. 지수에게 받았던 통지서에, 순영의 한문 이름이 적혀있었다. 權順榮. 어렵게도 생겼다.

겨우 찾아서 신원 확인을 하고 서낭당 아래에서 준휘랑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수군대며 일제히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분위기가 금세 바뀌고 술렁거릴 정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준휘와 순영도 그 흐름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당에 있던 다른 이들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작고 말간 아이가 들어오고 있었다. 입고 있는 중치막의 값이 꽤 나가는 모양이었다. 온통 새까만데도 햇빛을 받으니 문양이 하나하나 살아나서, 언뜻 봐도 귀한 집 자식 같았다. 무슨 애가 저렇게 하얗지? 검은 옷을 입어서인지 흰 피부가 창백해 보일 정도였다. 말이 없는 그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죄다 무시해가며 서낭당 쪽으로 오고 있었다.

“우리 저 애랑 친구 할까?”

불쑥 들어온 준휘의 말에도 순영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아는 사람이냐고 물으니, 준휘는 당차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아는 사람도 아닌데 우리가 왜 쟤랑 친구를 해?”

“좋은 사람 같아. 이리로 오지 않을까?”

저 멀리서 걸어온 검은 사내는 순영과 한 보 떨어진 곳에 털썩 앉았다. 준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영을 콕콕 찔렀다. 준휘는 파도 같았다. 크고 요란한데 행동이 조용하여 모난 구석 없이 잘게 부서져 흡수되었다. 왜 그러냐고 쳐다보니, 그를 조용히 가리켰다. 두어 번 이들을 번갈아보던 순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준휘에게 말했다.

“...능소화…냄새나지 않아?”

“....”

나름 조용히 물었는데도 능소화가 들어버렸다. 그가 말없이 순영을 봤다. 순영도 가만히 능소화를 보기만 했다. 준휘는 그 사이에서 쩔쩔맸다.

순영은 결국 먼저 아는 체했다. 하얗고, 예민하고… 토끼 같은 놈. 그런데 능소화 냄새가 나는 놈. 먼저 말 좀 걸어보지, 뭐.

“너. 좋은 냄새 난다.”

“......뭐?”

“나는 일반인이래. 너는 어떤 사람이야?”

당찬 순영의 질문에도 능소화는 답이 없었다. 곧바로 나무 아래로 모이라는 소리 때문에 대답은 듣지도 못하고 어영부영 일어났다. 순영은 괜한 오기가 생겨 꿋꿋하게 능소화의 곁에 앉았다. 준휘도 끌어당겨서 함께 갔다.

흘긋거리는 다른 생원들이 조금 거슬렸다. 다들 능소화를 보는 것이 분명한데, 둘이 있으면 하나는 꼭 능소화를 보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또 다른 검은 옷을 입은 생원을 보는 것 같았으나 그건 제 알 바가 아니었던 순영과 준휘였다.

준휘와 순영은 각자 붉고 하얀 종이를 받아서 돌아왔다. 웬만한 생원들의 침소가 다 배정될 때까지도 능소화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 그래서, 너 이름이 뭐냐니까?”

“이지훈! 나오십시오.”

그제야 능소화가 일어나서 나갔다. 이름이 이지훈이구나. 순영과 준휘는 두어 번 되새겼다. 토끼 같은 까칠한 능소화는, 이지훈이라고. 그러면서 동시에 앓는 소리를 내며 탄식했다. 하필이면 옷과 똑같은 검은 종이라니. 그걸 받고 돌아오는 지훈의 표정이 마냥 좋아 보이진 않았다.

“아, 같은 침소였으면 좋았을 텐데!”

“...”

“모든 배정이 끝났습니다! 뒤에 계신, 배정된 침소의 사형들에게로 가시면 됩니다!”

저 생원님은 눈치가 없어! 순영이 지훈에게 말을 걸려고 해도, 칼같이 끊기는 느낌이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지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잇씨, 네가 싫단 말은 안 했잖아. 그치? 난 권순영이라고 해. 백호 권순영이야!”

“무슨…,”

“난 친구가 얘뿐이거든? 너도 나랑 친구 하자. 난 네가 좋아. 안녕! 나중에 또 봐!”

순영이 다급히 인사를 하고는 백호 종이를 받은 생원들과 섞여 백호 사형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어!?”

백호들 가운데에 지수가 서 있었다. 반갑게 손을 흔들자니, 사형인데 그래도 되나? 싶어서 가볍게 묵례로 인사를 하니, 그가 예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잎새달 이틀

“전원우. 안녕?”

“...권순영?”

원우는 순영을 알고 있었다. 지훈의 옆에 있어서 의식한 것도 있고, 애초에 같은 공간에서 수업을 들으니 이름을 부르고 출석을 확인할 때 조금만 더 신경을 쓰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응. 네가 그, 죽음을 모시는 꽃무릇이라는 아이구나.”

“어?”

원우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들은 내용이란 것을 순영은 알지 못했다. 그래도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로 들었는데 이제는 직격으로 물어보는 생원도 생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일반인이라 남들과는 다른 아이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안녕, 원우야. 지훈이랑 같은 침소라며? 우리 친구 할까.”

당돌했다. 당시 원우는 지훈과 말을 튼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한두 마디 필요한 말만 겨우 고르고 골라 뱉어본 것이 전부였다. 순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원우의 양 볼을 챱, 잡았다. 원체 마른 몸이라 별로 볼살이 올라오진 않았으나 원우를 집중시키는 데는 확실했다.

“져버리기 직전의 능소화와 꽃무릇이라니. 이렇게 파릇파릇한데!”

얼마 전 다른 생원들이 저를 보고 한 말이었다. 순영도 근처에 있었기에 들었던 내용이었다.

“...”

“나는, 피지도 않은 씨앗 권순영이야!”

원우는 순영의 손을 떨쳐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멀뚱멀뚱 그와 눈을 마주치고 보고만 있으니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친구 하자고, 나랑. 친구. 난 너까지 셋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셋?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

“너랑, 이지훈이랑, 문준휘랑. 너희가 좋아.”

순영이 담담하게 말했다. 같은 침소 지수에게 들었던 것이다. 아마 네 곁에 있던 아이는 능소화 집안이라서 다른 생원들이 관심을 보였던 것이라고. 꽃 가문에 대해 아는 것이 생긴 순영은 더 망설일 것도 없어졌다.

남들이 다 아는 꽃 가문의 영식들이면 아는 것도 많겠지. 다들 능소화를 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던데, 그럼 내가 내 편으로 만들면 이득 아닌가? 하는 김에, 어제 지훈이랑 같은 취급을 받는 전원우랑도 친구를 하면 더 좋겠고. 그리해서 나온 결과였다.

“나... 아직 지훈이랑 안 친해.”

“나랑도 안 친하고 문준휘랑도 안 친하잖아.”

“...응.”

“이제 하면 되지. 지훈이도 너랑 친구 하고 싶어해.”

그렇게, 집 밖에서 만들어진 순영의 세상이 조금씩 정립되기 시작했다.

지수는 저보다 한 살 많은 사형이었고, 서당에 들어오기 전 만났던 인상 짙은 사내는 지수의 친구, 승철이었다. 지수는 친우가 단둘 뿐이라 했다. 같은 수업을 듣는 1년 생원들이 함께 쓰는 침소 사형들도 죄다 비슷한 처지 같았다.

순영은 준휘와 지훈, 그리고 원우까지 해서 딱, 넷이서 어울렸다. 간혹 청룡이 있으면 사방신이 딱 맞고 좋을 텐데, 따위의 생각을 했다가, 아무래도 지훈과 원우에게 조건 없이 호의적인 생원을 찾기에는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어 바로 그만뒀다. 슬슬 지훈과 원우가 말을 트기 시작했는데. 이들만으로도 순영은 충분히 행복했는데, 걸림돌을 애써 만들 필요는 없었다. 사형들과 나까지 해서, 올해는 딱 일곱 명만 있으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막상 행복감을 누리자니, 꽤 어려웠다. 친우가 셋이고 사형이 셋이나 되었음에도 언문조차 읽지 못하던 일반인이 수많은 한문 서적을 사용하며 배우는 마법을 쉽게 깨우칠 수는 없었다. 이왕 들어와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데 내가 못할 것이 뭐가 있어? 라고 쉽게 책을 펼쳤다가, 포기하고 싶었던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지수에게 들은 바로는, 이 서당의 1년 백호들 사이에서 일등을 해야 본인처럼 황룡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황룡이고 뭐고 그저 배울 수 있다는 것에만 감사하자고, 굳이 애써서 일등을 차지하려고는 하지 말자는 생각이었는데. 마법을 동등하게 배울 필요가 있다고 했으면서, 꽃이 뭐고 신분이 뭐고…. 짜증이 나고 진절머리가 나서, 어느 순간부터는 꼭 내가 황룡을 해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매일 강의를 듣고 나서 바로 지훈을 붙잡았다. 바지를 붙잡고 질질 끌며 두어 번 복습하고 나면, 강의를 끝나자마자 자러 갔던 준휘가 그들에게로 온다. 그러면, 지훈이 혼자 정악을 구경하러 가고 준휘가 슬그머니 앉아서 공부를 알려줬다. 원우는 종종 사자의 부름 때문에 자는 시간이 일정하지가 않아서 마주칠 때마다 일정을 물어보고 공부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시험기간이 되면 정한과 준휘가 붙어서 알려줬다. 이미 이 시험을 한 번 치러본 사형이 필요했고, 모든 걸 여유롭게 봐줄 수 있는 친우가 필요했다. 정신이 멍해지면 준휘를 데리고 승철이 있을 무예 터로 가기도 했다. 지쳐서 힘이 풀릴 때면 정한이 걱정하듯 달랬다. 이번만 있는 것이 아니니 천천히 해도 된다고, 급히 하지 않아도 된다고. 날이 선 호랑이는 습관처럼 괜찮다고 했다. 호랑이가 낯선 땅을 밟았으면 풀이라도 뜯어야 속이 시원하지. 끝내 붓을 쥐고 앉아있는 생원은 순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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