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
봄꽃이 만발하던 날
물오름달 열아흐레
푸른 나뭇잎이 넓은 창을 절반 정도 가렸음에도, 풍등의 빛이 사이로 스며든 덕에 답답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경칩이 지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생명체들이 속삭이는 소리조차도 배경 삼아 듣기 좋은 날이었다.
“명호야.”
고요하던 현무 침소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다급한 지훈의 부름에 놀란 명호가 뒤를 돌아보니, 제 사형들이 엉망진창인 채로 서 있었다. 꽤 멀리서부터 달려온 것인지 숨을 몰아쉬면서.
“...무슨 일 있습니까?”
“지금, 할 일 있어?”
“어... 아니요. 그냥 서책을 보고 있었어요.”
원우가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 도포 소맷자락에서 반듯하게 접힌, 두껍고도 매끄러운 종이를 꺼내어 건네주니 명호는 도통 의미를 알 수가 없어 원우를 쳐다보기만 했다. 섣불리 제가 열어볼 것이 아니라고 판단되어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도 못했다.
“입학 통지서야. 너도 작년에 받았지?”
“네.”
“이번에는 네가 좀 가야 할 것 같아. 할 수 있겠어?”
“네, 네?”
지금 믿을 만한 생원이 너뿐이라며 지훈이 재촉했다. 자세한 것은 나가는 길에 전부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명호에게 도포를 입히고 감투를 손에 쥐어 주었다.
물오름달 스무날
“얘, 승관아!”
할멈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승관이 방문을 벌컥 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가득해 주막의 마당이 안 보일 정도였는데 지금은 또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고요했다. 조심스레 쪽마루로 발을 내딛고 할멈의 목소리가 들렸던 부엌으로 향했다. 할멈은 승관에게 말없이 나물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보여주었다.
“나물 손질 좀 도와.”
할 일이 많다며 대충 승관의 근처에 바구니를 툭 던져주었다. 승관은 선뜻 다가와 소매를 걷고 바구니를 들었다. 끙, 열여섯이 들기에도 이리 무거운데 할멈은 이걸 어떻게 한 손으로 들었대? 양손으로 버겁게 들고 부엌을 빠져나오면서 생각했다.
“자정이 넘으면 성균관으로 가.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해야겠다. 네가 발걸음이 좀 느리냐.”
“...느리진 않은데.”
“느려.”
“으응. 그렇군요...”
할멈은 승관의 미적지근한 반응을 슬쩍 보고는 픽 웃었다.
“그곳의 북서쪽 담장 모서리에 서서, 열세 발짝 정도 다시 남쪽으로 걸어가.”
“...왜 이렇게 어려워요? 어디 있는지, 제가 혼자 알 수 있기는 해요?”
“때가 되면 다- 알아서 간다. 수백 년 동안 입구 못 찾아서 입학 못 했다는 놈은 못 들어봤으니.”
“....”
“그곳에서 정해진 주문을 외면 들어갈 수 있어. 그 주문 또한,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혹시, 출입할 때마다 그걸 외워야 해요? 아잇... 까먹을 것 같은데.”
“한 번만 하면 된다. 선택받은 아이들을 가려내기 위한 것이니까.”
승관이 몸을 빙글 돌려 멀리 보이는 반궁을 가리켰다. 대충, 저쪽이죠? 하고 묻자 할멈은 고개만 끄덕였다.
“보지도 않았음서.”
“이 나이 되면 다 알지.”
“응, 그렇구나. ...할멈은 어떻게 알아요? 마반인인가?”
조선에는 현재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가 몇 있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마반인, 양반인, 일반인으로 나누었다. 보통의 사람들을 일반一般인이라고 하고 부모 중 한 명만 마법을 사용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양반兩班인이라 불렀다. 그리고, 전부 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집안은 마반魔班인 집안이라 일컬었다.
갈 곳 잃어 정처 없이 떠돌던 승관에게 대뜸 너, 마반인이지? 열여섯이군. 하고 말을 걸었던 할멈이니 보통 인물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할멈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별이 수놓은 밤하늘을 잠시 보다, 승관의 눈을 마주했다. 동글동글한 눈 속 온통 까만 동공이 맑았다. 할멈은 투박한 손으로 그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머리가 죄 헝클어지는데도 승관은 가만히 그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기만 할 뿐이었다.
“...한 때, 마반집 귀한 처녀였지.”
목소리에 약간의 슬픔이 묻어 있었다.
“후딱 대가리나 따지 뭣하러 그런 걸 물어봐? 사내자식이 이리 굼뜨면 어쩌잔 거야.”
“아잇, 할멈이 말하는 거 듣다가 그랬잖아요!”
“제주에서 왔담서. 거서 뭘 하고 살았길래 콩나물 손질을 두 시진동안 하고 앉았어?”
“나 그래도, 학당에서는 공부 좀 했는데.... 집에서는, 내가 한양 서당에 입학만 하면 다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승관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다 다듬은 나물 바구니를 건네주었다. 그래도 시간이 걸린 만큼 꼼꼼하게 다듬었네. 할멈이 빙긋 웃었다.
“농담이었다. 당연히 서당에 가야지. ...뭐, 이제 열여섯 먹은 애한테 무엇을 알려주겄냐.”
“......”
“어두워지니 이제 방으로 돌아가.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 나돌 생각 말고.”
승관이 대충 고개를 주억이며 일어났다.
조용히 제 방으로 돌아온 승관은 마땅히 할 일이 없어 방바닥에 퍼질러지듯 누웠다. 제주에서 올라올 때 작은 보따리 하나에 돈 몇 푼과 읽지도 않을 서책을 몇 권 챙겨온 것이 전부였는데, 그마저도 잃어버려 빈털터리인 상태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밤늦게까지 저잣거리에서 나다니다 돌아왔는데, 오늘은 할멈의 말을 듣기로 했으니 꼼짝없이 몸이 묶인 셈이었다.
멍하니 보따리를 베고 누워있다가, 문득 눈을 뜨니 밖에 등불조차도 할멈이 다 꺼버린 것인지 온통 어두워 보이질 않았다. 어둠에 잠식된 방에서 다시 잠들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던 중 밖에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안에 계십니까?”
확실히, 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또래의 앳된 목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승관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틈 사이로 보이는 검은 도포를 입은 선비와 눈이 마주친 승관은 순간 제 앞에 저승사자가 온 것인가 하는 생각도 했다.
“...누구십니까?”
“전해줄 것이 있습니다. 실례지만 이름을 물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아, 어...”
승관은 매사에 신중했다. 이 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내 이름을 알려주어도 되는 것인가? 타지에서 하루하루 보내는 것에 평소에 비해 살짝 예민한 상태인 것도 한몫했다. 선비는 그를 이해한다는 듯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별 볼 일 없는 생원일 뿐입니다.”
“...아! 승관..이라고 합니다. 부승관이요.”
“응. 옳게 찾아왔네요. 이거, 받으십시오.”
승관이 붙잡고 있던 문을 무례하지 않을 정도로 약하게 당겨 전부 열고는 두터운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
漢陽魔學書堂入學通知書 한양 마학 서당 입학 통지서
승관이 받자마자 본 글자였다. 서당에서 온 인물임을 그제야 확신한 승관이 죄송한 마음에 꾸벅 인사를 했다. 무작정 경계한 것에 대한 사죄였다.
“괜찮습니다. 대개 당연하게 경계하는 것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혹 열어보시고 모르는 것이 있다면 사흘 후 정오에, 이 고을에서 가장 큰 우물로 오시면 됩니다.”
“모르는 것이요?”
“네. 가족 중 한양 서당을 다닌 적 없는 생원들이 입학하는 경우 어려움을 겪어 따로 마련한 방안입니다. 그곳에서 길 도에 겸할 겸을 사용하는 자를 찾으시면 될 것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승관의 답에, 생원이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하고는 주막에서 벗어났다. 승관은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더니 급히 신을 신고 할멈의 방으로 뛰어갔다.
“할머니! 저, 이거 받았어요. 통지서! 이거 때문에 나가지 말라고 한 것이지요?”
“그래. 들었다.”
승관이 받은 종이를 다짜고짜 할멈의 얼굴 앞으로 들이밀었다. 할멈은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승관은 난생처음 옥춘당을 먹어보는 어린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종이를 펼쳤다.
나빌레라
春分, 봄꽃이 만발하던 날
잎새달 하루
할멈의 말 그대로였다. 입구는 근처에 가자마자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고, 입학 통지서에 있는 문구를 그대로 읊으니 바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서당은 반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으며, 주변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형태였다. 엄청나게 커다란 서당은 높은 나무와 산들에도 기가 죽지 않을 만큼 웅장했다. 괜스레 심장이 빨리 뛰는 것 같아 승관은 제 가슴에 손을 올리고 심호흡했다.
“생원들은 좌측으로 와서 본인의 이름이 명적에 있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서당 곳곳에서 황금빛 도포를 입은 생원들이 소리치며 신진들을 인솔했다. 승관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 사이를 비집고 커다란 종이가 붙어있는 벽 앞에 우뚝 섰다. 죄다 한문으로 적힌 이름들을 한 자씩 찬찬히 살펴보다 고개를 뚝 멈추었다. 찾았다. 부승관夫勝寬.
‘...한글로 된 이름도 있네.’
큰 종이 끝자락에 딱 하나 있었다. 하지만 밀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슬쩍 흘겨보기만 할 뿐 한적한 곳으로 빠져나와야 했다. 이름을 확인한 사람은 신원을 확인하고 침소 배치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생각보다 바삐 움직여야 하는구나. 더 많은 신진이 이리로 오기 전에 재빨리 신원 확인을 끝내야 했다.
양육자나 가족, 신분, 생업 등 구체적인 사항들을 확인하고 나니 그늘에 앉아 신진의 명부르 확인하던 생원이 승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확인되었습니다.”
“넵. ...저는 이제 어디로 가면 됩니까?”
“저기 중앙에 여러 천이 걸려 있는 나무 보이죠? 그리로 가서 계시면 됩니다.”
승관이 곧장 큰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오방색의 천이 주렁주렁 나무에 걸려 있었음에도 기묘하거나 을씨년스럽지 않고 오히려 장엄하고 고결한 느낌만이 들 뿐이었다. 온통 피곤한 표정의 생원 하나가 다가와 승관을 툭툭 쳤다.
“신진입니까?”
“네. 저 앞에서 이리로 오면 된다고 하셨어요.”
“아, 예.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마시고 잠시 이 주변에 계시면 됩니다.”
그의 말에 승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무가 잘 보이는 곳 주변을 돌아다니라니. 한참을 고민하다 명륜당明倫堂 아래로 향했다. 나무를 바라보며 털썩 주저앉고 보니 저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생원들이 워낙 많아, 혼자 보고 있는 데도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처럼 꾸벅꾸벅 졸음과 싸우던 승관의 곁에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이국적으로 생긴 아이가 하나 앉아 있었다. 종종 어머니를 따라 항구에 놀러 갈 때면 보았던 얼굴들과 비슷했다.
“혼자 있는 거야?”
“응.”
...숫기가 없는 편인가? 승관이 볼을 긁적이며 그를 빤히 보았다.
“왜 혼자 있어?”
“아는 사람이 없어서.”
“나도 그런데. 안녕! 나는 부승관이야.”
“어. ...나는, 최한솔이라고 해.”
한솔은 낯을 꽤 가리는 것 같았음에도 승관의 말을 전부 받아주었다. 그의 밝은 성격 덕인지, 처음 만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끊이지 않는 대화를 나누었다.
“1년 생원들은 서낭당 앞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오, 와. 우리가 1년 생원이래!”
“...그러게. 가보자.”
신이 난 듯 폴짝폴짝 뛰던 승관이 서낭당 나무를 향해 콩콩 뛰어갔다. 그러다 휙 몸을 돌려 느긋하게 걸어오는 한솔의 손목을 잡고서는 함께 달려갔다.
“우리 서당은 조선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최고의 마법을 배우는 곳입니다. 올해 이곳에 들어온 생원은 총 예순 명입니다. 가장 우수한 실력을 갖춘 박사에게 깨끗하고 현명한 마법을 배우는 곳이므로, 다들 예를 지켜 활동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제 침소 배치를 시작하겠습니다. 배치가 끝난 즉시 각자의 침소 대표 생원을 따라가 배급된 물품 및 같은 방 사형들과 인사를 나누시면 됩니다.
침소 배치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짧게나마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서낭당은 본래 마을의 수호신으로 서낭을 모셔놓은 신당이었습니다. 우리 서당에서는 다섯 방향, 즉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으로 생원들을 분류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색은 백색, 황색, 남색, 녹색, 적색이었으나 이곳에서는 각 침소의 색을 따와 백색, 흑색, 청색, 적색을 사용합니다. 각각 백호, 현무, 청룡, 주작을 상징하며, 황룡은 서당의 침소별로 생원을 수호하는 것이 아닌 이들을 이끄는 직책 중 하나이므로 침소 배치에서 제외됩니다.”
“넌 어디에 가고 싶어? 이런 것들, 알고 있었어?”
승관은 대강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다. 한솔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배우고 왔어. 음... 모르겠다. 그냥 배치되는 곳에 가야지 뭐.”
“나는,”
“최한솔 생원, 나오십시오!”
승관의 말이 꺽둑 썰리고 한솔이 호명되었다. 갔다 올게. 한솔은 긴장한 기색 하나 없이 나무 아래에 섰다. 한참을 서 있어도 종이가 떨어지질 않아 한솔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가린 푸른 나뭇잎을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은은한 바람이 불며 종이 하나가 나무에서 떨어졌다. 새하얀 종이가 한솔의 손안에 떨어졌다.
백호가 되어 돌아온 한솔이 자리에 앉자마자 승관이 호명되었다. 나무를 바라보며 앉아있을 때는 몰랐는데, 1년 생원들 뒤에는 각자 다른 색의 도포를 입은 생원들이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괜히 심장이 더 빨리 뛰는 느낌이 든 탓에 승관은 또 양손을 모으고 심호흡해야 했다. 당연히, 당연히....
“...!”
곧바로 푸른 종이 하나가 살포시 떨어졌다. 승관은 그걸 주워 들고 가까이에 서 있는 황룡 생원을 쳐다보았다.
“부승관. 청룡입니다.”
승관이 웃음을 숨기지 못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모든 신진들의 침소 배정이 끝났습니다. 1년 생원들은 뒤에 서 있는 생원들에게 각자 찾아가시면 됩니다. 잎새달 하루, 모든 생원의 입학을 환영합니다.”
영문도 모른 채 황룡의 말을 따라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반대로 향하는 한솔에게 인사를 하고 청룡 생원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청룡 침소는 서낭당을 기준으로 동측에 자리 잡고 있었다. 승관을 포함해 열댓 명 정도 되는 생원들이 청룡 생원 하나를 졸졸 따라갔다. 키가 훤칠한 편이라 멀리서 보는 것임에도 곧장 잘 따라갈 수 있었다. 그는 복층으로 되어 있는 침소의 아래층 마루 위에 서서 1년 생원들을 내려다보았다.
“자, 이곳이 너희가 여섯 해를 보낼 청룡 침소다. 아마 대부분이 아래에서 묵게 될 텐데, 방 하나에 서너 명이 이용하게 될 거다. 각 방 앞에 너희 이름이 적힌 명패가 걸려 있을 테고, 들어가면 필요한 물건들이 다 배정되어 있다.”
그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방 앞 명패를 집어 들어 보여주었다.
“방 안이 답답하면 나와서 쉬어도 된다! 서당에는 학문에만 중점을 둘 뿐 서로의 신분에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다른 침소에 방문하는 것 또한 금지되어 있으니 이 두 가지만 유의하면 된다.”
휘몰아치듯 설명을 마친 생원은 이제 침소 안으로 들어가라며 손짓했고, 가장 앞에 서 있던 생원부터 차례로 마루에 발을 올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돌아다니며 아래층 모든 방문 앞을 기웃거렸지만, 승관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며 툇마루를 걸어 다니는 승관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누구십니까?”
“저, 이번에 입학한 생원입니다. 혹시 좀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다짜고짜 도움을 요청하는 생원에 당황한 승관이 되묻자 그가 한참을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한문을 아직 잘 읽지 못합니다. 제 이름 좀 찾아주실 수 있습니까?”
“아. 네! 이름이 무엇인지...”
“이찬이라고 합니다. 외자예요. 이 찬.”
승관이 찬을 데리고 다시 툇마루 끝부터 부엌까지 돌아다녀봤지만 찬의 이름은 물론이고 승관의 이름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위에 올라가 볼까요? 대개 아래층을 쓴다고 하셨으니까... 위에 있을 수도 있잖아요.”
승관이 그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용히 한 번 가볼까요? 숨을 죽이고 계단에 발을 올렸다.
계단을 오르자마자 보이는 문 옆에 보란 듯이 승관과 찬의 명패가 붙어 있었다. 빛날 찬, 이찬. 이곳이 우리 방인 것 같다며 찬에게 말해주니 맑게 웃으며 얼른 들어가 보자고 재촉했다.
방은 생각보다 넓었다. 한쪽 구석에는 이불이 네 개 놓여 있었고, 장롱과 좌식 책상이 붙어 있었다. 가운데에 있는 두 책상 위에는 붓을 포함한 여러 물건이 바구니 안에 담겨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 아래에 묶여 있는 의복들과 세조대, 호패까지 전부 각을 맞추어 정리되어 있어 보기 좋았다.
“...아! 다행히도 호패는 한글이네요. 못 읽으면 또 어쩌나 싶었는데.”
“아마, 한글로 된 서책을 사용할 터이니 큰 걱정은 마십시오. 음... 일단 정리를 좀 할까요?”
둘 다 가지고 들어온 짐이 거의 없어 정리가 수월했다. 어릴 적부터 봐온 것이 많은 승관이 재빨리 정리를 마치고 옆에 앉은 찬을 도왔다. 이것저것 묻는 찬에게 전부 대답해 주며 말도 트고 부쩍 가까워지고 나서야 왜 서당 입구에 한글 이름이 존재하는지 알 수 있었다. 찬은 일반인이었다. 찬은 서당의 입구에 제 이름만 한글로 되어 있어 기분이 이상했다고 했다.
“...근데 붓은 왜 이리 많아? 다 다른 건가?”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하니까 그렇지 않을까? 거기서 가장 긴 것만 빼 봐.”
마반인들이 쓰는 물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붓이라고 했다. 붓은 일반 서예나 미술용 붓, 그리고 마법용 붓으로 나누어진다. 마법용 붓들을 전부 통틀어 마구라고 부른다. 여기서 찬이 승관의 말을 듣고 집어 든 바구니 속 가장 긴 붓이 대표적인 마구였다.
1년 생원들은 기본적인 마법만 배우기 때문에 임시 붓을 제공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흰 털이 달린 일반 붓들과 달리 마구는 솔의 끝부분에 푸른색이 묻어 있었다.
“아마 이걸 항상 들고 다니게 될 거야.”
“딱 그렇게 생겼네...”
“어. ...이 정도면 다 한 것 같은데?”
“그러게. 다 했다.”
둘이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느라 생기는 정적도 잠시였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내에, 둘은 몸이 굳은 채로 문 쪽을 응시했다. 그 생원이 싱긋 웃으며 승관과 찬에게로 다가왔다.
“엇, 그... 안녕하십니까.”
“응. 승관이 찬이... 나는 4년 생원 윤정한이라고 해. 아마 곧바로 2년 생원도 하나 더 올 거야.”
잘 부탁한다며 웃는 정한의 뒤로 긴 그림자가 생겼다. 아까 1년 생원들을 침소 앞에 데려다주었던 그 생원이었다. 긴 다리를 휘적이며 들어오느라 도포가 바람결처럼 휘날렸다.
“아니, 같이 가자면서요. 왜 자꾸 먼저 가요!”
“응, 얘가 2년 생원 김민규. 아까 봤지?”
“미안해. 너희만 위층이라고 말을 해주어야 했는데. 찾느라 고생 좀 했겠다.”
미안함이 가득 담긴 투로 사과하는 민규에, 승관과 찬은 손을 내저어 가면서까지 괜찮다고 대답했다.
“정리는 다 했어? 깔끔해 보이는데.”
정한이 책상을 훑어보며 물었다. 승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규가 잠시 서당 구경을 하다 오자고 제안했다.
“지금 입고 들어왔던 옷들은 다 접어서 농 안에 넣어두고, 이제 이 청색 도포를 입고 다니면 돼. 이 호패는 명륜당에 갈 때 세조대에 달고 다니면 되고.”
민규가 익숙하다는 듯 하나하나 접어 정리해 주었다. 찬이 호패를 차는 법을 어려워하기에 그것조차도 다 알려주었다. 여유가 되면 뒤따라가겠다는 정한만 침소에 두고 셋이 다시 서낭당으로 가기 위해 침소를 나섰다.
해가 뜰 때 이 서당에 들어왔는데, 어느덧 해가 지고 잔잔한 바람이 불어 나뭇잎들이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하늘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등롱들도 살짝씩 흔들렸다. 찬은 아무런 지지대 없이 둥둥 떠 있는 등롱들이 신기해 괜히 톡 톡 쳐보다가, 앞서가는 민규와 승관의 부름에 다시 그들에게로 호다닥 달려갔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