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입하

산과 들에 신록이 일기 시작하는 날

서당 by 반야

잎새달 그믐날

봄 시험이 끝이 나고, 지훈은 곧바로 침소로 향했다. 널브러져 있는 명호를 데리고 마반촌에 있는 잡상인의 집으로 데려갔다. 명호는 한양에 오기 전부터 죽관으로 된 마구를 사용했다. 느릅나무와 노송나무처럼 단단한 목재를 사용하는 다른 생원들과 달리 얇은 대나무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은 충격에도 순식간에 금이 생기기 쉬웠다. 손상이 생길수록 마법사가 소모하는 힘이 세지기에 이를 우려한 원우가 먼저 지훈에게 말을 꺼냈고, 원우에 비해 할 일이 적은 지훈이 명호를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명호에게는 전나무 마구를 선물해 주었다. 가볍고 날렵한 마구를 사용하다 갑자기 묵직한 나무를 들고 있자니 꽤 낯설어 적응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일단은 네 마구랑 같이 들고 다녀. 정 못 쓰겠다 싶으면 쓰던 것 써도 되고.”

“...어떻게 그래요. 선물로 주신건데... 심지어 전나무잖아요.”

“원래 사형들이 사주는 거야. 너도 사제가 들어오면 선물 해.”

아, 전원우가 이왕 사줄 거면 장신구도 사랬다. 가자. 명호의 세조대에 마구 두 개를 나란히 걸어준 지훈이 다시 그를 이끌고 나섰다. 하나밖에 없는 사제에게 선물이라니. 이만한 낭만이 어딨어. 마반촌을 돌아다니는 지훈의 입술은 옅게 말린 채로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푸른달 닷새

시험이 끝나면 누각 아래에 벽보가 붙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침소별로 두 명씩 하여 성적이 우수한 자를 학년별로 구분하여 붙여두었다.

찬은 내심 기대를 했으나 제 이름뿐만 아니라 승관과 한솔의 이름도 찾을 수 없었다.

뒤늦게 찬을 따라온 승관이 헉헉대며 다가왔다.

“없어... 나름 열심히 했는데, 뭔가 부족했나 봐.”

“더 하면 되겠지. 이제 겨우 첫 시험이었잖아.”

가만히 서서 명단을 훑어보았다.

“오... 준휘 사형도 있어.”

“그럴 만도 하지. 모르는게 없잖아.”

“...민규 사형이랑 명호 사형도 있어. 왜 다 잘하는 거야?”

“어, 너희도 나왔어?”

정한이었다. 둘은 벽보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빠져나왔다.

“내가 알려주려고 했는데.”

“여태 누각에 있었어요?”

“엉. 유과 좀 줄까 싶어서 나오려던 참이었어. 먹을래?”

정한이 작은 놋그릇에 덮어둔 천을 들어 보였다. 둘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편히 앉아서 먹기 위해 침소로 돌아가는 길에도, 침소에 들어가서 유과를 먹을 때에도 주제는 변하지 않았다.

“...얘들아.”

쫑알쫑알 벽보 이야기를 하며 유과를 먹던 둘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몰래 먹이를 먹다 들킨 고양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보는 둘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이제 황룡이 바빠질 시기라서, 한동안 침소에서는 잘 못 볼 거야. 민규가 웬만한 일은 다 도와줄 테니까 걱정하지는 말고.”

“...침소로 안 들어오는 거예요?”

“들어오기는 할 것 같은데... 아마 새벽에 들어와서 잠깐 자고 나가는 게 전부일 것 같아.”

등롱이 다 꺼져 어두울 때 들어왔다가, 아침에 닭이 울기 전에 나갈 것이라고 했다. 둘이 입학하고 나서도 함께 있었던 날이 다른 생원들에 비해 적었기에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으나, 정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둘에게는 민규도 있고 함께 다닐 수 있으니 심심하지는 않았다. 한솔은 함께 지내는 사형이 둘 다 황룡이라 더더욱 볼 시간이 없다고 했다. 항상 정복을 입고 바삐 돌아다니는 황룡에 대해 민규가 이야기한 적이 한 번 있다. 1년 생원일 때 치르는 네 번의 시험으로 하여 성적이 우수한 자들이 선발되고, 2년 생원부터 활동을 시작한다고 했다. 첫 번째 기준은 인의예지이며, 이곳에서 걸러지는 생원은 드물다고 하였다. 이후 1년 생원들과 접점이 거의 없는 6년 황룡의 관찰 및 4, 5년 황룡의 추천으로 선발된다. 각 침소에서 한 명씩 네 명이 뽑히며, 큰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6년 생원이 되고 서당을 떠나기 직전까지는 황룡을 내려놓을 수 없다고 했다.

“황룡은 일이 많나 봐...”

“얼마나 많으면 입학 첫날조차도 민규 사형한테 부탁했겠어.”

“...그건 그냥 귀찮아서 그런 거라고 하셨잖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유과나 마저 먹어. 먹고 최한솔한테 가자.”

승관의 말에, 찬이 유과를 덥썩 집고는 입속으로 넣었다.

 

나빌레라

立夏, 산과 들에 신록이 일기 시작하는 날

 

푸른달 아흐레

침소 구석에는 작은 반닫이가 있다. 민규는 강의를 다 듣고 나면 항상 그 반닫이에서 지필묵을 꺼내 들고 나갔다. 정한은 그런 민규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그저 회화를 하러 가는 것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그저 수긍하고 넘겼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시간이 빌 때마다 나서는 것을 보고 있으면 없던 궁금증도 생기기 마련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필묵을 챙겨 나가는 민규에, 찬은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고는 책상 앞에서 서책을 보고 있는 승관에게 다가갔다.

“민규사형, 대체 어디서 그림을 그리는 것일까?”

“모르지. 왜? 궁금해?”

“응…. 매일 가니까 궁금하잖아.”

찬이 승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같이 따라가 볼 생각은 없는가, 싶어서. 승관은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책상 옆의 창을 열어젖혔다. 멀리 가지 않아 가까이서 민규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시선을 거두고 도포를 챙겨 입고 침소를 나섰다.

“...옆에는 명호 사형인가?”

“그런 것 같은데…. 현무 중에 도포를 저리 입는 분은 명호 사형뿐이야.”

슬쩍 나무 뒤에 숨어 민규와 명호를 따라다녔다. 무엇을 저렇게 이야기하는 중이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고 이야기만 하는 둘에 지루해질 찰나, 민규와 명호가 명륜당이 있는 중앙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쫄래쫄래 따라가다 갑자기 뒤를 돌아본 명호와 눈이 마주쳤다. 굳어버린 둘에게 다가온 명호가 장난스레 웃었다.

“어린 청룡이 소리 없이 뱀의 뒤를 밟다니.”

“죄송합니다….”

“같이 가자.”

“예?”

“궁금해서 따라온 거 아니야?”

민규가 찬의 어깨 위로 팔을 둘렀고 명호는 승관의 곁에 딱 붙었다. 힘을 주어 빠져나가지도 못하게 만들고 타이르듯 이야기하는 민규에, 찬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 가는 중이냐고 묻자 서쪽으로 간다는 말만 할 뿐 더 아무런 말을 얹지 않았다. 앞서가는 명호를 따라 백호 침소를 지나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침소 부엌에서 요리하는 비복들이 사용하는 작은 텃밭이었다. 구석에는 약초학 생원들이 사용할 재료들도 조금 있었다.

명호와 민규는 어리둥절한 둘을 데리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끝자락에 있는 큰 버드나무 잎을 살짝 젖히니, 명륜당 하나가 들어설 정도의 큰 꽃밭이 나왔다.

“이런 곳도 있었습니까?”

“내 큰형이 이 서당을 다닐 때 발견한 곳이라고 말해줘서 알았어. 지금은 엄연히 소유자가 있는 곳이라 다른 생원들은 들어오지도 못하지만, 너희니까 함께 데리고 온 것이지.”

이곳의 존재를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는 민규의 뜻을 알아들은 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관은 민규에게 누구의 소유인지 물어보았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이곳에 심어진 붉은 꽃이 상징이지. 따위의 말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찬이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려는 명호의 곁에 슬쩍 다가갔다. 명호가 제 방석을 건네주자 찬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도 꿋꿋하게 주려는 명호를 이길 수 없었다.

이들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승관은 붉은 꽃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민규와 명호의 그림을 가만히 쳐다보기도 했다. 승관의 배에서 허기진 소리가 나자 명호가 약과를 몇 개 갖고 오겠다며 일어섰다. 같이 가자며 일어나려던 찰나 다시 앉히는 명호 덕분에 승관은 민규 옆에 어정쩡하게 앉게 되었다.

“쟤, 청에서 오기 전에 무술을 했던 놈이라 힘이 꽤 세.”

“그런 것 같네요…. 헌데, 사형은 뭘 그리는 거예요?”

슬쩍 보니 풍경화 같았다. 여름을 화선지에 표현하라고 한다면 지금 승관이 보고 있는 민규의 그림을 주면 될 것만 같았다. 여름에 들어서며 산과 들에 빛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민규의 화선지 속 그림에는 그와 걸맞게 나뭇잎과 꽃잎도 살랑살랑 흩날렸다.

이참에 명호 그림도 볼까 싶어 자리를 옮기려던 찰나에 명호가 되돌아왔다. 대부분의 현무는 도포가 단정히 정리되어 있고, 호패도 손상 없이 깔끔하게 유지하여 허리에 잘 매달아 두지만 명호는 달랐다. 도포는 항상 앞이 활짝 열린 채로 바람이 불면 뒤로 흩날릴 수 있게 두었고 호패는 옷고름에 달려 있었다. 그 나름대로 멋이 있었다. 다른 생원들이 똑같이 하려고 해도 절대 따라 하지 못할 명호 특유의 느낌이었다.

약과가 담긴 작은 상관을 건네주었다. 승관이 꾸벅 인사를 하며 받아 들고는 찬에게 나누어주려고 했으나 찬은 어느새 잠에 들어 버드나무 아래에 기대 있었다. 오물오물 약과를 먹으며 승관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다.

 

“...아, 맞다. 사형. 단오제가 뭐예요?”

“엉?”

“정한 사형이 그것 때문에 바쁘잖아요. 저희 고을에서 하던 거랑 같은 것인가, 싶어서요.”

“얼추 비슷할 거야. 단옷날 전후로 사흘 정도 지내는 축제이지. 경주 서당 생원들도 와서 함께 단오를 보내고.”

“되게 짧네요…. 그래도 제주에서는 꽤 길게 했던 것 같은데.”

“경주 서당을 오래 비울 수는 없으니까. 간단한 제례 의식이라도 함께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학한 지 두 달가량 지났으나 특별히 일어난 일은 없었다. 평소와 다를 것이 없을 테니 단오제 걱정은 하지 말라던 정한의 말이 생각났다.

“별거 안 해. 특별한 거..? 굳이 뽑자면, 사흘 동안 네 개 중 절반의 침소를 경주 생원들에게 내어 주어야 한다는 거? 그 정도.”

정한은 4년 동안 서당에서 살아온 생원이었고, 승관은 겨우 두 달이 된 1년 생원이었다. 평소와 엄청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관통했다.

“걱정 마. 우리는 별일 없을 거니까.”

“...왜?”

명호가 둘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원우 형이야 자기 일에 대해 밖으로 말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정한 사형은 다르거든.”

“…….”

“올해는 현무랑 주작이야.”

둘은 승관이 알 수 없을 정도의 단어로만 대충 끊어 말했지만, 승관은 눈치껏 알아들었다. 아마 조금 전 민규가 알려주었던 ‘경주 생원들에게 내어주어야 하는 절반의 침소’가 현무와 주작이라는 뜻이겠지.

“왜? 싫어!”

“아니, 네가 싫다고 해도 별수가 있나... 아마 너희는 지수 사형과 합쳐지지 않을까 싶어. 승철 사형이 우리한테 온다고 하셨거든.”

“아아-, 우리 공간에 누군가 들어오는 게 너무 싫어….”

“어쩔 수 없지 뭐. 궤 안에 넣어두고 마법을 걸던가, 아님 우리 침소에 옮겨둬도 되고.”

어이없는 민규의 제안에 명호가 되겠냐며 실소를 터트렸다. 벌러덩 뒤로 몸을 눕힌 명호가 가볍게 한숨을 푹, 쉬고는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느 정도 완성된 명호의 그림을 보던 민규도 막바지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승관은 그제야 명호의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화려하지만 일상적인 민규의 그림과 달리 명호는 단조롭지만 독특한 그림을 그렸다. 이것마저도 둘의 성격이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일찍 들어갈까, 오늘은?”

“다 그렸어?”

“응…. 너도 그렇고 저기 찬이도 그렇고, 여기서 오래 자면 다음 날 몸이 안 편할 거야.”

민규와 명호가 자리를 정리할 동안 승관은 곤히 잠든 찬을 깨우려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민규의 짐을 승관이 들고, 민규가 찬을 등에 업은 채로 침소로 되돌아가야 했다. 평소보다 희미해진 등롱 때문에 돌아가는 길이 꽤 어두웠다.

“벌써 자정이 지난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렇게 어둡지..?”

“정한 사형이 한 것이지, 뭐. 생원들이 서당을 돌아다니는 시끄러운 소리가 누각까지 들리면 종종 이렇게 하셔. 그럼 생원들은 대충 아, 때가 늦었구나! 하고 돌아가니까.”

말도 안 되는 방식이었다.

“...그래도 됩니까?”

“안되지….”

“…….”

북쪽으로 향하는 명호와 헤어지고 청룡 침소로 가는 길이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등롱이 순식간에 꺼져 주변이 온통 어두워졌다.

“에잇, 윤 사형 진짜.”

민규가 제 도포의 소맷자락에서 마구를 꺼내 들고는 휙 휘두르니, 푸른 털끝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푸른 불꽃이었다. 서책에서나 보던 도깨비불 같았다.

한 손으로 찬을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마구를 들고 있으면 힘들지 않을까 싶어 들어드릴까요? 하고 물어볼 새도 없이 민규가 손에서 마구를 놓아버렸다. 둥실 뜬 마구가 민규보다 반 보폭 앞서 길을 밝혀준 덕분에, 안전히 침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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