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입춘

시원한 봄바람을 안아들고.

서당 by 반야

시샘달 이틀

봄이 시작됐다. 전보다 햇볕이 따스해진 느낌에, 순영이 입춘축을 핑계로 서당을 나섰다. 지훈도 함께였다. 아직 개나리도 안 피는 이른 봄에 나가서 무얼 할 거냐고 주절대면서도 순영을 위해 볼끼 하나를 챙겨 나섰다.

"아직 동백이 다 지지도 않았는데 봄이라니."

"...그러니까. 설 지나고 와도 됐을 것 같은데."

"그래도 제주에는 수선화랑 복수초 같은 꽃들도 피어있대."

"승관이가 그래?"

"응."

솔직한 답변이었다. 시시한 대화를 나누며 걷기 시작했다. 잠깐 산책하듯 나온 것이라 양손이 가벼웠다. 가장 먼저 정했던 목적을 해결하기 위해 입춘축을 써주는 곳으로 향했다.

아재는 종이를 꺼내 들며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생원이란 것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지훈은 아직도 남이 저를 본인과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 익숙해지지 않은 듯하여 순영만 계속 대답하는 꼴이 되었다.

"집에 붙일 거지? 입축문에 따라 달리 써주면 되나?"

"아뇨. 건양다경建陽多慶만 써주십시오."

"알겠네. ...마반인?"

"아, 얘만 마반인이고 저는 일반인이었습니다."

아재가 흘긋 지훈을 보았다. 표면적으로는 능소화를 버리고 나온 외아들이라는 꼬리표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아서 가리개를 쓰고 나온 덕에, 얼굴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리저리 알아보는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피곤할 테니까. 그런데도 예의는 알아서, 꾸벅 인사하니 아재는 한참을 보다 다시 붓을 쥔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생이 많았겠군. 아재의 말이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해 둘은 가만히 있었다. 

가장 단순한 춘축을 받았다 꽤 명필이라 값을 비싸게 부른 것에 불만은 없었으나, 순영은 그만한 돈을 갖고 있지 않았다. 결국 그 정도 가격은 예상하고 온 능소화가 전부 값을 치렀고 순영은 밥이라도 제가 사야겠다며 시장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황룡으로서 받는 녹으로 이 정도 사는 것은 별거 아니라며 뿌듯한 표정을 짓는 순영에, 지훈은 별다른 말을 얹지 않았다.

"선비님. 하나 드시겠습니까?"

"...오, 그래. 고맙다."

식사를 먼저 끝내고 나서 잠시 여유를 즐기던 도중 지훈은 어린아이로부터 작은 주머니 하나를 건네받았다. 지나치고 무시하기에는 어린것의 마음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감사의 표시를 어찌해야 하나 쩔쩔대던 새에 아이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순영은 그냥 여기 있는 놈 같던데 신경 쓰지 말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뭐야? 유과?"

"응. 어떻게 알았어?"

"저런 아이들이 만들 수 있는 것 중 가장 성의와 호의가 많이 담긴 것이지."

"...그래?"

저도 그랬다며 말을 덧붙이기에, 지훈은 꼼지락대며 주머니를 만질 뿐이었다.

"유밀과 먹던 도련님의 취향은 아닌가 보네. 나 줘."

그새 기름 같은 것이 묻은 주머니를 단단히 묶고 순영이 있는 곳으로 밀어주었다. 갈까? 우리끼리 있는데, 그냥 지름길로 가자. 그릇을 싹 비운 순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길 알아? 지훈의 물음에 순영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덥썩 손을 잡고, 홀로만 아는 길로 함께 들어섰다.

아이에게 받았던 유과를 먹으려고 꺼내 들었다가 지훈이 묶어둔 끈을 풀지 못해 꽤 고역을 치렀다. 지훈도 제가 묶었던 것을 제대로 풀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허공에 던지고 그 찰나에 주머니를 반으로 썰었다.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게 재빨리 다 받아낸 순영이 신기하다는 듯 그를 보았다.

"어떻게 했어?"

"...꺽둑썰기. 중앙을 가로로 정확하게 그으면 돼."

꺽둑꺽둑? 하고 순영이 웃었다. 귀여운 어감과는 다르게 살짝 까다로운 사용법이었다. 빠져나오는 내내 여러 번 적용해보다가 뒤늦게 유과를 다시 꺼냈다. 지훈은 마구를 사용하여 꺽둑썰기하는 법을 생각해내고 있었다. 주㔌. 권순영한테는 좀 어려우려나. 가벼이 휙휙 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 지훈아. 이거 이상하다."

순영의 걸음이 점점 느려지더니 주저앉았다. 오른팔을 제외하고는 몸이 전부 굳어버렸다. 그새 준휘의 마법이 걸린 노리개를 오른손에 쥔 덕분이었다. 겨우 덜덜거리며 만져보아도 감각이 돌아오질 않았다. 지훈이 사색이 되어 다가왔다. 아까 먹은 것 때문이라 짐작했다. 계박繫縛 독이 음식에 발라져 있었나 보다. 주머니 속에 남은 유과를 바닥에 털어 으깨보니 능소화를 버티지 못한 계박이 바스러지듯 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낮게 욕을 읊조리며 순영의 볼을 잡았다. 발끝부터 올라온 독이 목까지 온 듯했다.

"아..., 몸이 너무 아파."

"맹독도 아니고, 문준휘 힘을 이지 못하는 걸 보면 오로지 이승의 마법일 텐데. 처음이라 버티질 못하는 것 같아."

지훈이 속사포로 말을 하며 웅크리고 있던 순영의 몸을 제대로 뒤집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지훈의 팔을 붙잡았다.

"이상한 짓 아니야. 현무는 독을 마실 수 있거든. ...그러니까,"

...접문 좀 할게. 잠시 방 안에 들어가겠다는 말투로 어마어마한 말을 뱉고는 곧장 입술을 처박았다. 송곳니를 순영의 입술 가장자리에 찍어 피를 내었다. 무의식적으로 팔을 들어 지훈의 목에 휘두른 탓에 노리개가 목덜미를 간질거리게 했다. 꽃을 가진 집안은 일반인보다 번식력이 더 뛰어났는데, 유독 향을 잘 맡는 이들은 그것에 홀리기가 쉽다고 했다. 이만큼 능소화와 가까이 맞닿은 적 없었던 순영은 향에 취해서인지 더 안달나게 했다.

피가 나오던 입술을 얼얼해질 만큼 빨던 지훈의 양팔을 붙잡는 손이 느껴졌다. 그제야 몸을 뒤로 물리며 순영의 안색을 살폈다. 순영은 달뜬 표정으로 조금 전까지 제가 물고 있던 부분을 핥았다. 땅에 닿아있는 등이 불편하고 거슬렸는지 이리저리 뒤척이며 너 정말 뱀 같다. 하며 웃어 보였다. 지훈이 괜히 입가를 벅벅 문지르며 시선을 돌렸다.

"......이제 좀, 괜찮냐."

"어.... 그냥 쥐난 것 같아. 바로 괜찮아지네."

일으켜줘. 순영이 팔을 허공으로 뻗으니 지훈이 머뭇거리다 잡아당겼다. 느릿하게 일어나서는 콩콩 뛰기도 하고 땅을 여러 번 박차며 발을 굴리기도 했다. 고개를 좀 까딱이며 ...괜찮은데? 하며 웃는 순영에, 그제야 지훈도 안심하며 한숨을 얕게 뱉었다. 비릿한 피를 핥는 사이에 혀마저도 뒤섞인 것에 대해서는 둘 중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빌레라

立春, 시원한 봄바람을 안아들고.

"우리랑 함께 황룡으로서 서당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볼래?"

정한은 승관과 찬에게, 지수는 한솔에게 한 질문이었다. 당연히 바라던 바였던 승관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한솔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수와 순영이 있을 황룡 누각에서 함께 무언가를 이루어나갈 수 있으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찬은 그래도 꽤 고민했다. 후에 민규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감히 내가?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서 그랬다고 했다.

결국에는 1년 나비들 전부 황룡에 이름을 올렸다. 찬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지훈의 제안이 없었으면 아마도 승관과 한솔만 황룡이 되었을 상황이었으니까. -이 말을 들은 민규는 어쨌든 됐는데 뭐 어때? 하고 넘어갔다.- 그 탓에 겨울 시험을 치고 2년차 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지 비어있는 시간을 죄다 책방에서 보냈다. 사형들이 다 알려주고 도와줄 것을 알지만, 마음속이 복잡하고 이유 없이 안달 나는 것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찬은 잘 때가 되어서까지 침소에 들어오지 않으면 정한이 걱정하는 것을 알기에 항상 자시가 되면 슬금슬금 동쪽으로 돌아갔는데, 유독 피곤했는지 그 자리에서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무예가 끝나고 돌아가려던 승철과 준휘가 발견하여 깨울 수 있었다.

"안 추워?"

"네. 괜찮아요!"

승철이 두터운 도포를 벗어주려 했지만 찬이 극구 반대했다. 추우면 언제든지 말하라는 것에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청룡에 데려다 주려던 발걸음을 멈춘 준휘가 허공을 가만히 보더니 남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승철을 먼저 올려보내고, 찬의 손목을 잡고 서낭당 나무가 있는 중앙으로 향했다. 나한테 따로 할 말이 있나? 수장과 신령의 관계가 된 사형들은 서로 잘 어울리는데 준휘와 찬은 침소도 다르거니와 듣는 강의도, 수행하는 무예도 전부 함께하지 못했다. 어딜 그리 가느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지만 입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아 넓은 등판만 보며 따라갈 뿐이었다.

누각이 보이는 중앙에 도착하니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를 증명하듯, 가을 무렵 보았던 것처럼 빛과 함께 나무가 열리며 인영이 생겨났다. 찬이 무의식적으로 준휘의 뒤로 숨었다.

"...누군지 아세요?"

"황룡이지."

아까 전부터 계속 찬이 네 옆에 있었다고 말해주며, 긴장하지 말라며 제 뒤에 서 있던 찬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황룡은 사방신이 전부 집결한 후에 수장과 신령을 볼 수 있어서 이리되었네."

"...."

"찬이 너는 얼마 전에 보았고. 그치?"

"...네...."

"반갑네, 나의 황룡들아."

강인하고 지혜로운 아이들아. 황룡이 준휘의 앞에 서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찰나에는 준휘의 머리카락이 밝은 금색으로 바뀌었다.

"재판받고 죄가 새겨진 것이 엊그제인데...."

"근래 뵈는 모든 신께서 그 말을 하십니다."

"...구삼승의 아들이라 그런가.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구나. 지수도 은연중에 날 불편해하는 것이 느껴지던데."

"생심코 대할 인물이 아니니 그랬을 것입니다."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찬이 슬그머니 준휘의 옆에 섰다. 사방신의 곁으로 올 아이들의 자격을 전부 판단하고 나서야 황룡이 내려와 볼 수 있다고 했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지수의 백호관 침입과 준휘의 자격에 대한 논쟁이 있었기에 조금 더 늦어졌다. 가뜩이나 잘 살아온 이 둘에게 더 바라는 점이 없어서 즉위식이 될 때까지 내려가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그 의견을 들은 사방신의 질타에 못 이겨 내려오게 되었다.

"우직하고, 강인하고, 지혜롭게. ...역시나 잘 지내고 있구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혹시 저희에게 황금빛 돌덩이를 던지셨습니까?"

"그래. 나 아니면 뭐, 할 자가 있던가?"

역시 맞았구나. 찬이 생각했다. 그저 장난을 치려던 것인데 의도치 않게 해를 입혀 미안하다는 사과도 함께였다. 되려 찬이 당황하여 고개를 저었다.

"...저를 복수화동으로 신고한 저의는 무엇입니까?"

"포괄적으로는, 황룡의 고초를 네 곁에 있는 사방신이 도와줄 수 있을까 하여 그랬다. 네가 그 중심이니까."

"제가요?"

"그럼. 추석에 모든 생원이 모이는 곳에서 네가 품은 꽃이 두 가지임을 밝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오방신의 지위에 복수화동이라는 존재가 오점이 되지 않아야 했고, 그와 동시에 은연중에 그 경합장에 있는 사방신을 대표하는 생원 중 누군가가 황룡의 수호를 받음 또한 알려두어야겠다 싶었지."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하셨습니까? 오방신이면 그 누구도 반기를 들지 못할 텐데...."

"준휘. 네가 여태 봐온 그 권력은, 오방신의 것과 다르단다. 저승의 모든 아이를 거두고 시왕과 함께 목숨줄의 경중을 다루는 네 어미와, 인간의 생애를 다섯가지로 쪼개어 돌보는 우리가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또한, 한 톨의 죄도 없는 네가 누명까지 써가며 올라오는 것은 하늘에서도 원치 않을 것이고."

"...."

"되지도 않는 군소리는 황룡 수장과 백호 신령, 그리고 주작 아이들에 대한 것만으로도 충분할 테지. 배우지 못한 이들의 무서움을 견디지 못함으로써 나오는 한탄은 수천 년간 나오는 것이었으니까 말이야."

더 이상 말을 얹지 못했다. 황룡의 기세에 단단히 눌려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돌덩이는 추석에 경합장에서 보았을 때 알아차렸다. 인간에게 절대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보고, 신의 장난이구나. 하면서. 저승에서도 그런 장난을 종종 써먹는 신-구삼승과 시왕-이 있어서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준휘와의 대화가 끝난 황룡이 찬과 눈을 맞추었다. 저번에 하늘에서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날은 지수를 지키는 무예학도로 올라와서인지 꽤 각이 잡혀있고 나름 예민해 보였는데, 준휘의 곁에 있으니 밍숭맹숭한 것이 누가봐도 어린 아이였다.

"...얼마 전, 네가 지내는 침소의 아이 하나가 용왕에게 대검을 하사받았다고 하더구나."

"아! 맞습니다. 용궁의 수문장으로 등용되며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용왕과 청룡의 아이들 사이에서, 나의 황룡이 이토록 훌륭하게 자랐는데 어찌 외로이 두겠어. 그렇지?"

황룡이 손을 뻗어 찬의 손목을 잡아올렸다.

"경합장에서 도철에게 달려드는 널 보고, 계속 생각했던 것이다. 이젠, 누구나 다 잡을 수 있는 언월도 말고 이걸 쓰거라. 넌 특별한 인물이니까."

살짝 힘을 주어 찬이 손바닥을 펴게 하고, 그 위로 노란색과 하늘색의 농담이 적절히 섞인 막대가 생겨났다. 찬이 그 무게를 한 손으로 온전히 받아내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양손으로 막대를 잡자마자, 양 끝에 월아가 만들어졌다. 방천화극方天畫戟이었다. 홀린 듯 한참을 보다 고개를 들어보니 황룡은 사라지고 없었다. 당황하여 준휘를 보았지만, 그 또한 마찬가지인듯 했다.

시샘달 사흘

"......그래서, 그 검은 어디 두었어?"

"침소에 두었습니다. 민규 사형의 검이랑 같아요."

"무예터에 두지도 못하고 애매하겠네. 공간 차지가 크겠는걸."

"응. 아침에 보니까 사형이 벽에 무두정을 박고 있더라고요. 걸어둘 생각인가봐요."

시끄러워서 깼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지수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석민이 찬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고, 원우가 허리띠를 매주었다. 청룡 흉배가 붙은 황룡 도포. 정한이 항상 저만 홀로 청룡이라 외롭다며 찡찡댔는데, 이제는 주작과 현무보다 황룡나비가 더 많아졌다.

각자 침소를 상징하는 흉배가 붙은 도포를 입은 채로, 누각에 창을 열고 쪼로로 모여서 잎이 나기 시작하는 나무를 보고 있었다.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는데도 괜히 기분이 좋았다. 쌀쌀하게 불어오는 봄바람이 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갔다. 찬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이 순간을 즐겼다.

아 맞다. 원우야. 창틀에 기대어 셋을 보던 지수가 입에 물려있던 담배를 슬쩍 떼며 연기를 뿜었다.

"뭐 할 거야? 심화 과목, 너희부터 춘분에 바로 시작한다던데."

"...저승연구를 하려고요."

정한과 지수는 환상동물학을, 승철은 천계신시학을 선택했었다. 조선 전역에서 태어나는 동물을 배우는 환상동물학은 다른 심화 과목들에 비해 흥미롭고 수월한 이론 과목이라 인기가 많았고, 천계신시학은 모든 신의 탄생과 존재함에 대해 배우는 과목이라 조선의 행정기관에 들어가려는 성적 좋은 생원들의 차지였다. 원우는 애초에 선택지로 둘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승의 신과 사흉수에 대해 배우는 것이니까, 염설을 모셨던 과거를 기억하며 저승연구를 이어갈 것이라는데 어느 정도 확신이 있기도 했다.

"요새는 천계신시학이 너무 어렵대."

"준휘가 그걸 한다고 했어요."

"어우... 둘이 같이 듣고 공부하겠네."

지수가 장난스레 표정을 찡그리며 다시 담뱃대를 입에 가져다 댔다. 원우는 가만히 뒤에서 뒷짐을 진 채로 창밖을 보다 찬에게 물었다.

"막내, 너는?"

"...환상동물학을 할까 싶어요. 정한 사형이 하는걸 보니, 재미있어 보여서요."

"네가 들을때 쯤이면, 우리는 여기 없겠다."

찬이 4년 생원이 될 해가 되면 지수는 서당에 없을 것이다. 원우는 졸업을 준비할 것이고. 그 순간을 상상해본 찬이 입술을 삐죽이며 지수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졸업, 안 하시면 안 됩니까? ...찬아. 아무리 어리고 귀여운 막내라도, 그런 미친 소리는 못 받아줘. 백호가 차갑게 거절했다. 현무는 청룡이 붙잡기도 전에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아직 두 해는 더 남았어. 그 전에, 첫 임무를 줄게."

시킬 일이 생겼다고 불러놓고, 팔자 좋게 잡담을 나누었다. 담뱃대를 소매에 끼워 넣은 지수가 모서리로 가서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서책을 두 권 가져왔다. 친히 찬의 손 위로 얹어주며 곱게 웃어 보였다.

"나는 이제 곧 5년 생원이라, 이런 건 너희를 시킬 거야."

원래는 4년 생원 즈음부터 황룡으로서 하던 일을 놓고 학문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 지수와 다른 4년 황룡들이 확실히 보장된 미래를 꿈꾸고 있기도 했고 학문 또한 더 집중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3년 황룡, 2년 황룡들이 힘들어하지 않도록 물심양면 도와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좀 쉬어가며 하고 싶어서. 그리고, 1년 생원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잘 따라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찬찬히 예전에 해왔던 대로 규율을 돌려두어야지, 싶었다.

찬은 제 손 위에 놓인 서책의 이름을 번갈아 보았다.

"명적인데요?"

"응. 경주랑 한양 생원들 침소가 적혀있어."

"오...."

"우리는 남생원 침소인 인과 예로 나누어서 갈 건데, 네가 나누어봐."

"...제가요?"

"응. 당연히! 혼자는 못 하겠지. 아무나 붙잡고 같이 해봐. 별것 아니고, 정답도 없으니 너무 두려워하진 말고."

지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찬이 야무지게 석민의 팔을 잡았다. 지수는 그를 보며 원우의 팔을 잡았고.

"너는 나랑 나가야 돼. 순영이 독 빠진 거 확인하러."

"아."

바보 도 터지는 소리에 지수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다들 봄이라고 정신을 놓고 사는 것 같다고 했다. 순영이 독이 발려있는 음식을 먹었고, 지훈이 급하게 빼내었다는 걸 듣긴 했다. 순영이 빠진 탓에 무예를 하던 나비들이 뿔뿔이 흩어져 승철에게, 꽃밭에, 그리고 누각에 온 것이니까.

원우가 슬금슬금 그제야 지수의 눈치를 봤다. 아까부터 줄곧 담배를 피우며 무언갈 생각하는듯하더니, 이것 때문에 화가 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 아끼던 사제가 입춘이라고 잘 쓰지도 않던 반출을 써서 나갔으면서, 모르는 놈에게 독을 받아먹고 와서 앓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테다. 첫 절기부터 몸이 상해서 오다니, 이만저만 속상한 것이 아니라며 쫑알대는 백호를 겨우겨우 진정시키고는 찬과 석민이 듣지 못하도록 누각에서 나와 곧장 청룡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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