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우
봄의 마지막
잎새달 열이레
춘분이 지나는 시점부터, 석민은 항상 명륜당과 누각을 돌아다니며 하루를 지냈다. 매 계절이 끝날 때 치르는 시험 준비만으로도 바쁜데, 경주 생원까지 올라오는 단오제까지 준비하려 하니 몸이 열 개가 되어도 모자랄 듯했다.
2년 생원이 될 때, 마법학을 선택한 민규와 명호에 반해 석민은 약초학을 선택했다. 둘이 서당 한구석에서 조각보를 깔고 앉아 차를 달여 마시며 그림을 그릴 때 석민은 명륜당 뒤편 약방에서 약재를 달달 외우고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제가 선택한 길이라 후회는 하지 않았다.
오전부터 휘몰아치는 강의를 겨우 버텨내고 나온 셋은 항상 그러했듯 약초학과 마법학으로 갈라섰다. 비치는 햇볕이 따가워 눈을 비비던 석민이 둘을 바라보았다.
“...어디 가?”
“신시에 주자학 들으러 가야지.”
“너는? 누각에 갈 거지?”
“응.... 나는 약초학 들으러 가야 해. 전까지는 시간이 좀 남으니까...”
“얘 곧, 기절하겠는데?”
민규가 걱정스레 석민의 얼굴을 살폈다.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 민규와 명호를 위해 기꺼이 웃어주었다. 괜찮다는 말을 수십 번 듣고 나서야 겨우겨우 둘을 떼어냈다.
“그럼 오늘은 잘 못 만나겠네.”
“응... 내일 봐.”
석민이 피곤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늘어졌다. 축 늘어진 어깨에 힘없는 팔들이 괜히 휘청이는 것 같아 애처로웠다.
“쟤, 내일도 늦게 일어나면 어쩌지?”
“뭘 어떻게 해. 오늘처럼 또 데리고 가면 되지.”
석민에 대한 걱정을 뒤로하고 서당을 거닐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작은 정자에 앉았다. 불어오는 봄의 끝자락을 맞고 있으니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명호는 청淸에서 온 수련생이다. 그가 살았던 곳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 분위기가, 2년 생원이 된 아직도 완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흥얼거리며 누각을 응시하던 명호에게, 민규가 차를 우려내어 건네주었다.
“뭐가 신기해? 뭘 보는 거야?”
“그냥. 일상.”
명호는 새롭게 맞이하는 모든 것을 즐겼다. 가만히 앉아서 만나는 것도, 직접 뛰어 들어가 마주하는 것도 전부, 즐겁다고 했다. 서당에 입학하고 명호가 민규에게 항상 했던 말이었다.
“다행이네. 걱정거리가 있나 싶었어.”
“응, 별일 없어. ...굳이 따지자면 이석민이 걱정되긴 하네.”
그래도 누각에 간 지금 잠깐이라도 눈 좀 붙였으면 좋겠는데. 너무 바빠. 명호가 입술을 삐죽였다.
“...근데 이거 뭐야? 향이 좋다.”
“왜에서 건너온 거래. 향이 좋아서 본가에서 몇 개 챙겨 왔어.”
은은한 향에 코를 박고 있던 명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규를 보았다. 꽤 만족스러운 눈동자였다.
“나중에 꽃밭에도 들고 가자. 마반촌에서 마시는 것보다 더 맛있어.”
“응. 좋지. 일단 가져가서 원우 형이랑 지훈 사형이랑도 먹어봐.”
명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로록 잔을 깨끗하게 비운 것을 보고는 슬슬 일어나 가보자며 몸을 일으켰다. 들고 있는 찻잔과 이용한 자리를 치우고 명륜당까지 가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대충 시간을 확인한 명호도 벌떡 일어나 자리를 정리하기에 다 마신 것이 맞냐며 재차 확인하자, 명호는 머리 위로 잔을 올려 탈탈 털었다. 하여간 사형들한테 이상한 거나 배워왔다며 호탕하게 웃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나빌레라
穀雨, 봄의 마지막
잎새달 스무아흐레
서당에서는 계절마다 한 번씩 시험을 치른다. 시험을 치기 전날에는 대부분의 강의가 취소되어 생원들이 시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민규는 정오까지 늦잠을 자다 오후가 되어서야 느긋하게 밖으로 나왔다. 이른 아침부터 나왔던 명호와 석민 덕에, 적당히 나무의 그늘이 생긴 곳에서 다시 누울 수 있었다. 마지막 공부를 하는 생원들이 꽤 많아서 책방은 이미 가득 찬 상태였고, 잔디밭은 서책과 잔디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바글바글했다.
한데 자세히 살펴보면 공부를 하는 생원은 거의 없고 다들 사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민규와 명호도 마찬가지였다. 서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석민과 달리 호기롭게 떠들기나 하고 있었다.
“너희 공부 안 해도 돼?”
“야... 원래 매해 봄 시험은 기본 지식으로만 치는 거야. 춘분에서 시작한 강의에서 나와봤자 얼마나 나오겠어?”
민규의 말을 들은 석민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허나 황룡께서는 학문에 열을 다 하셔야지요.”
장난스레 덧붙인 말에 석민이 울상을 지었다. 민규가 석민의 손에 들려 있던 서책을 슬쩍 보았다.
“다 했어?”
“웬만한 거는....”
대충 보아도 서책이 많이 닳아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민규가 그의 서책을 잡아 이리저리 펼쳐보더니 물었다.
“마법에 중독된 자에게 해독제를 주어야 해. 그때 사용하는 주된 재료는?”
“죽은 애벌레 껍질이랑 양배추. ...그리고...”
석민이 말끝을 흐렸다. 여우의 간도 넣어야 해. 명호가 옆에서 답을 알려주었다.
“헷갈릴만 했어. 왜 이렇게 어렵냐, 이거... 정한 사형도 이런 거 했으려나.”
“그렇겠지. 그게 정한 사형 서책이었으니까.”
약초학부 생원들은 기본적으로 남들의 두세 배 정도 되는 서책을 들고 다녔다. 그 비용이 만만치가 않음을 알아서, 정한이 해가 바뀔 때마다 석민에게 제 서책을 물려주기로 약속했다고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뱀의 송곳니가 있다면 그걸로 독을 빼낼 수 있지.”
“그건 또 어떻게 외웠대.”
“뱀의 송곳니가 흔해?”
석민이 명호에게 아, 하며 입을 벌려 보라는 행동을 취했다. 의문이 가득한 채로 얌전히 입을 벌려 주니 얇은 손가락이 툭, 하며 명호의 송곳니를 치고 빠져 나갔다.
“너도 있네. 현무도 뱀이야.”
“내가 독을 마셔?”
“현무의 수호를 받는 생원도 가능하다고 들었어. 네게 영향이 가는 것은 없고.”
그래도 소름 끼친다며 명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위급해지면 어쩔 수 없지, 뭐. 석민이 멋쩍게 웃으며 더 해보라는 듯 민규에게 까딱거렸다.
“뭐, 이게 다 시험 범위야? ...건망증 약의 해독제는?”
“생강 뿌리랑... 쥐의 꼬리, 다진 마늘.”
“...이걸 안 만들면 됐잖아. 건망증 약을 애초에 왜 만드는데?”
“아!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낙화열병이...”
민규가 다급히 서책으로 석민의 입을 막았다. 하마터면 서책의 모서리가 입술에 부딪힐 뻔했다. 다행히도 빗나가 통증이 크진 않았다. 놀란 표정으로 왜 그러냐는 그들에게 민규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는 그 이야기 하지 마. 나중에 우리 셋이 있을 때나 말하자.”
“뭐... 그래.”
민규가 이러는 것은 다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 하던 것이나 마저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기양양한 표정을 유지하던 석민은 민규의 질문들에 굴하지 않고 모두 받아 쳐냈다. 서책에 있는 것들을 죄다 외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완벽했다. 민규가 대단하다는 듯 웃으며 서책을 덮었다.
“이제 마지막. 이거는 정한 사형 때도, 원우 형 때도 나왔던 문제야.”
“그런 게 있어?”
“응. 조선에 있는 서당을 이야기해 봐.”
“그게 마지막 질문이야?”
“2년 봄에는 항상 나왔던 거랬어. 조선에 현존하는 서당 및 그곳의 특징들을 서술하시오.”
석민은 말문이 막혔다. 한양, 경주, 제주. 특징도 알아야 해?
“당연하지. 위치는 1년 생원들도 알걸.”
“안 알려 줬잖아. 난 처음 들어. 명호는 알았어?”
“여기 들어온 날. 원우 사형이 알려줬어.”
석민이 배신이라는 듯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만 모르냐는 석민 특유의 표정을 보고 깔깔 웃던 민규가 겨우 진정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자, 한양. 여기는 넘어갈까?”
한양에 대해서는 차고 넘치게 적을 수 있었다. 모든 신을 모시는 공간이며, 오방신을 수호할 수장과 신령으로 점지받은 아이들이 성장하는 곳. 네 침소로 나뉘어 있으며 그들을 이끄는 황룡이 색장色掌으로서 존재한다. 얼추 적을 수 있을 것 같아, 석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경주. 우리가 전통 마법이 발달한 곳이라면, 여기는 천문학이 유명해. 보름달이 뜨는 날 첨성대의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서, 지하로 이어진 길을 따라가면 나오는 곳이 경주 서당. 한양처럼 선택받은 이들의 눈에만 보인대. 여기는 인, 의, 예, 지로 침소가 나뉘어져 있고 신이 이들을 이끌지.”
“신神?”
“신信. 인의예지라니까. ...그리고, 십이지신과 함께 인간의 흐름을 관리하지. 우리는 오방신, 얘들은 십이지신.”
“아아. 알겠어.”
“다음. 제주. 십장생을 포함한 자연과 기후를 관리하지. 여기는 우리랑 반대야. 여자 생원들만 있어. 당연히 우리처럼 세시풍속을 제외하고는 남자가 들어가지 못한댔어. 여기는 매, 난, 국, 죽. 그리고 송. 우리는 춘분에 입학하여 강의가 시작되잖아. 여기는 푸른달에 시작해.”
“그래서 제주 생원들이 단오에는 서당에 안 오는 거였구나. ...근데 왜 늦게 시작해?”
민규가 입술을 달싹이더니 명호와 석민의 머리통을 가까이 당겨 모으고 속삭였다. 낙화열병 때문에, 라고.
“...자세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정말 큰일이었나 보네.”
“...아무튼. 더 있어.”
“응...... 계속 말해.”
“한양 서당의 이념이 뭐지?”
명호가 기대에 찬 눈으로 석민을 바라보았다. 너는 알겠지. 하는 표정이었다.
“모든 생원의 조화를 추구하며, 더 나아가 세상의 균형을 이루도록 하라.”
황룡의 수호를 받는 날 외웠다. 툭 치면 바로 나올 정도로. 명호가 이건 몰랐다며 제 서책에 적기 시작했다.
“응. 그렇지. 경주는, 찰나의 순간조차도 인간을 위해서. 제주는 모든 자연을 위해 피어나라.”
더 외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석민이 머리를 감싸고 눈을 감았다. 앓는 소리를 내는 석민의 등을 민규가 거세게 토닥여 주었다.
“가서 기억 안 나면 사형들한테 물어봐. ...이제 갈까?”
“네가 뭘 했다고 가.”
“시험 전날에는 공부 많이 하는 것이 독이야.”
능구렁이처럼 웃으며 슬쩍 일어나는 민규에, 석민도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리를 정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각자의 침소 방향이 죄다 달라서 나무 그늘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져야 했다.
현무 침소로 가는 길에 책방이 있다. 그곳에 들러 마무리 정리를 한 명호는 해가 완전히 진 후에야 겨우 침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혹여나 사형들이 잠들었을까 싶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원우와 지훈은 천문학도였다. 석민이 낮에는 명륜당에, 밤에는 누각에 있다고 한다면 이 둘은 반대였다. 낮에 누각에서 버티다 오후와 저녁에 걸쳐 강의를 듣고 새벽에 잠을 잤다. 명호는 대개 낮에 강의를 듣고 남은 시간은 무예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며 보내기 때문에 이들과 함께 잠드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오늘 방 밖으로 안 나갔어요?”
“당연한 소릴. 민규랑 석민이랑 있다가 오는 길이야?”
“네.... 사형들은 공부 안 해도 돼요?”
따지고 보면 신기했다. 현재 함께 어울리는 3년 생원 중 가장 우수한 성적을 받은 자는 준휘였다. 그럼에도 황룡을 하지 않고 그저 마법학도에 무예생으로 지내고 있고, 순영은 황룡인 것만으로도 벅찬 일정을 죄다 소화하며 명호와 매일매일 무예를 익혔다. 준휘, 순영과 함께 어울리는 것은 명호 본인인데, 대체 어디서 어떻게 친구가 되어 이 관계를 유지하는 건지 새삼 의문이 들었다.
“응. 괜찮아.”
식사했냐는 질문에 답하는 듯한 어투였다. ...그렇군요... 더 할 말이 없어진 명호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 다 했어?”
“그러게. 하루 종일 나가서 있다가 오네. 2년 생원들은 무슨 과목을 쳤더라?”
“일단 마법학이랑, 오경이랑, 기본 약초학이요. 기본 천문학은 후에 따로 공지하겠다고 하셨어요.”
“일찍 끝나려나. 천문학 시험을 치면 보통 두 시진 걸리잖아.”
“...우리는 천문학도니까 두 시진이지. 쟤들은 기본이잖아.”
“마법학을 제외하고는 전부 한 시진 안에 끝내야 해요.”
“그래? 그러면. 일찍 끝나면 어디 가지 말고 침소에 돌아와 있어.”
명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순영과 준휘가 시험이 끝날 때까지는 홀로 무예를 해야 했다. 그러면 재미와 흥미가 바닥을 칠 텐데. 차라리 침소에 와서 낮잠이나 자야겠다고 다짐했다.
사형들의 옆에 조심스레 다가가 누워 있으니 급격히 노곤해졌다. 눈이 반쯤 감겨 둘의 대화도 한 귀로 들어오고 나가길 반복했다. 멍한 상태로 천장만을 응시하는 명호를 지훈이 발견하고는 원우에게 보여주었다. 원우는 옅게 웃으며 조용히 등불을 꺼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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