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오름달 열하루, 해시亥時 생원들의 수다 소리와 개구리가 우는 소리가 섞여 들어오기 시작했다. 생명이 움트는 시점, 새날이 시작되기 직전. 딱 좋았다. 노곤노곤하게 창틀에 몸을 기대고 눈을 끔벅이던 승철의 어깨 위로 누군가의 손이 얹어졌다. "기분이 어때." "또 뭐가." “음, 5년 생원이 된 느낌?” “그저 살아있음에 감사하지. 너나, 홍지수나. ..
해오름달 열아흐레 삐그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청룡 침소의 창문이 열렸다. 밤새 맺어진 이슬이 그새 얼어붙은 모양이었다. 적당히 시원하기만 할 정도로 틈을 내어 열어두고 찬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았다.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헝클이려다가, 시험을 준비하느라 인시가 다 되어 잠들었을 것이 뻔하여 도로 거두었다. 대신 바로 옆에 있는 예비 수문장에게로 방향을 바꾸었
눈이 많이 내렸다. 침소의 디딤돌이 겨우 보일 정도로 내려, 강의는 대부분이 취소되었다. 나비 중 황룡인 사형들은 잠시 단체로 사유서를 내고 영묘산으로 간다고 했다. 대외적으로는 많은 황룡이 자리를 비운다는 공고를 해야 하니 그리 알린 것이고, 서당에 남은 나비들은 이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었다. 홀로 백호에서 남은 한솔은 찬이 지냈던 사월촌에는 눈
하늘연달 스무사흘 지수가 창 앞에 앉아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단풍이 절정에 이른 늦가을의 아침은 언제 느껴도 기분이 좋았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정한이 갑자기 도술을 써서 어딘가 사라지더니, 곧장 병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뭐냐고 물으니 국화주라 답했다. “...아침부터 술이 들어가?” “밤새웠으니까 아침 아니야.” 소매에 잔까지 알차게 담아왔다.
“달맞이꽃이, 폐화…,” “안돼!” “뭐 하는 짓이야!” 지수였다. 굳은 표정으로 준휘의 팔목을 잡은 지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분명, 승철에게 들었는데. 지수가 어제 오후에 서당을 나섰다고. “갑자기 왜 이래.” “…….” 준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지수가 달맞이꽃을 흘긋 보았다. “돌아가거라. 네 죄는 평생 잊지 말고. ...이 일은, 함구하도록 하
사시 “동백이 좋긴 하더라.” 지수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섰다. 정한은 쿠당탕탕 요란스럽게 움직이는 그를 보고는 픽, 웃었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서책 세 권을 그의 책상 위로 얹었다. “...벌써 다녀왔어?” “응. 동백을 대니까 바로 보내주던데.” 동백이, 좋긴 하더라. 꽃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으나 권력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지수도 씁쓸한 표정
불을 피우는 것쯤이야 승철과 석민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감투를 쓰고 있어서, 일반인들이 보면 불만 둥둥 떠다니는 괴이한 형상이 될 것이 분명했다. 준휘와 멀지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사부작사부작 뒤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준휘도 불은 갖고 있지 않았다. 마구에조차 불을 붙이지 않고도 성큼성큼 길을 헤쳐가며 홍월천에서 오는 그들을 맞
백호가 된 순영이 궁기와 맞붙자마자 떨어져 나갔다. 객석에 있던 나비들뿐만 아니라 경합장에 있는 셋마저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환각의 숲에서 일부 한양 생원들에게 보여준 것만으로도 당황스러운데, 마법 서당 생원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호의 형태를 보여준 꼴이 되었다. 궁수가 넘어가는 것을 보자마자 순영도 중심을 잃고 다시 제 모습으로 변했다. 그의 손에는
열매달 이레 지훈이 소리 없이 누각으로 들어와 정한에게 다가갔다. 가만히 그의 곁에 서서 입을 달싹였다. 정한은 가만히 지훈을 기다려 주었다. 급할 것도 없으니까. “...원우랑 저....” 지훈이 할 말은 뻔했고. “아, 어어. 다녀와.” “...다녀오겠습니다.” 지훈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정한이 고개를 거세게 끄덕이며 허락을 표했다. 지훈이 누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