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칩
우리에게 봄이 온다면
물오름달 열하루, 해시亥時
생원들의 수다 소리와 개구리가 우는 소리가 섞여 들어오기 시작했다. 생명이 움트는 시점, 새날이 시작되기 직전. 딱 좋았다.
노곤노곤하게 창틀에 몸을 기대고 눈을 끔벅이던 승철의 어깨 위로 누군가의 손이 얹어졌다.
"기분이 어때."
"또 뭐가."
“음, 5년 생원이 된 느낌?”
“그저 살아있음에 감사하지. 너나, 홍지수나. ...그리고 나도.”
사형들을 보낸 지도 근 4년이 다 되어간다는 사실이 아직 믿기지가 않았다. 항상 저는 1년 생원일 시절에 멈추어 움직이지 못할 줄만 알았는데. 어느새 황룡의 대표 자리까지 제 사제에게 넘겨주었다니.
“3년 전에 순영이를 보러 갔어.”
지수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렇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승철이 곰곰이 생각하다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는 이런 운명이 될 줄 몰랐어. 솔직히,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저, 유서에 있는 대로 행했으니 나는 빈 껍데기와 다름 없다고 생각했어.”
“준휘가 널 살렸지.”
승철이 부끄러운 듯 몸을 웅크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정한을 등지고 꿍얼거렸다.
“많이 변하긴 했지. 그 애가, 시린 잿빛 같던 내 세상에 색동 옷을 입혔으니.”
환한 미소로 저를 마주했던 그 어린 아이를 다시금 생각해 보아도 믿을 수가 없었다. 선물 같았다. 모든 것을 잃고 내쳐버린 승철에게 굴러들어온 희망이었고, 안식이었다.
승철을 보고 있던 둘 또한 마찬가지였다. 먹구름이었던 저들에게 따스한 하늘이 다가와 감싸주었다. 이처럼 소중한 이들이 또 있을까. 모든 가족을 떨쳐내고, 홑몸으로 서당에 들어온 이들이라 더욱 그리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멍하니 그 시절을 느끼며 창밖을 보던 중, 제게 휘적휘적 팔을 흔드는 모양새가 시선을 잡았다.
“어? 명호다.”
현무 침소 지붕 위였다. 3년 나비들이 옹기종기 모여 별을 보려던 것 같았다. 저리로 갈까? 정한의 물음에, 지수가 나갈 채비를 했다. …나는, 다른 곳 갈게. 승철의 말에, 정한은 어련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호가 기와 위에 중심을 잡고 앉았다. 한두 번 올라온 것이 아니었기에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두툼한 겨울 도포를 등에 바닥에 깔고 등을 대니 하늘에 반짝이는 수천 개의 별이 눈 안에 들어왔다. 평온했다. 가벼운 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오늘 승관이 보러 갔어."
"엉?"
"1년 전 오늘."
"아. ...벌써 1년이나 지났나?"
"응."
곁에 있던 민규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게. 이맘때쯤이겠다. 윤 사형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호패 두 개를 들고 뛰어 들어온 것이.
"...이번에는, 우리 침소에 누군가 들어오려나?"
"안 들어올걸. 이젠 과해."
민규의 말에 동조하듯 석민도 말을 이었다.
"안 들어와."
"봤어?"
"응. 올해는 우리가 하잖아."
3년 황룡들이 침소에 배정되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아직도 비어있는 침소가 몇 있어서, 대부분 그리로 배정되지 나비들의 침소에는 변화가 없다고 했다.
"...아마, 찬이가 6년 생원이 될 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않겠지."
"그렇지 않을까? ...찬이가 6년 생원. 진짜 이상하겠다."
“그러니까. 찬이, 내일 통지서 전해주러 가는데.”
“엄청 긴장했더만. 찬이 밑에 사제라니…. 신기하고 묘하다.”
정말 별것 아닌데. 이름을 확인하고, 통지서를 주고. 명호가 제게 했던 대로 전달해주면 끝인데도 찬은 수십 번은 연습하고 나서야 누각에서 나왔다고 했다.
“항상 준비성이 철저하니까.”
“...그러게. ......사형들 올라오려는 것 같지?”
저 멀리서 정한과 지수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명호는 이불을 더 챙기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조심히 다녀와. 민규와 석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잊지 않고서.
"애들, 잘 갔겠죠?"
준휘가 조용한 주작 침소의 정적을 깨며 물었다. 승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휘의 한쪽 팔을 베고 있던 승철이 몸을 웅크리며 더욱 그의 품에 가까워졌다. 준휘는 별 말 없이 그를 받아주었다.
"아무래도, 잘 하는 애들이니까."
"응. ...걱정이 안 되긴 해요. 그냥 물어봤어요."
승철은 그게 뭐냐며 옅게 웃었다.
1년부터 4년 생원까지만 바쁜 것이 황룡이라, 승철은 간만에 여유를 느끼려던 참이었다. 때마침 석민이 별을 보러 간다고 현무에 가기도 했고.
"아까 정한이랑 지수가 물어보더라고. 나도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었어."
"뭘?"
"지금 기분이 어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으음……. 전체적으로요?"
"응.”
“...인간이 되고 싶었고, 내가 누구인지 몰랐어요. 여기 들어오는 것도…. 네가 잘 다니면 인간 취급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해서 입재했어요.”
“.......”
“그때는, 네 명이 가득 찬 침소는 못 볼 확률이 컸잖아요. 다른 침소도 마찬가지였고. 그런데 사형은….”
승철이 고개를 들어 준휘와 눈을 마주했다. 눈두덩이 위로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둘이 넓은 방을 쓰니 좋던걸요. 사형은, 홀로 두 명의 몫을 해주니 괜찮았어요.”
준휘는 못된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 할 말과 하면 안 될 말을 정확하게 구분했고, 듣는 사람을 무조건 배려했다. 지금도 그랬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침소에 홀로 남은 저를 위해 밤늦게 돌아와 준 승철에게 한쪽 팔을 내어 머리를 기댈 수 있도록 두고도 꽤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편한 티 하나 내지 않고 가만히 받아주었다.
정말, 괜찮았어? 승철의 질문에, 준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4년을 꼬박 함께 했는데 투정 한번 없이 저를 온몸 바쳐 받아주는 것이 신기했다. 정한과 지수와 있을 때도 토라지거나 툴툴거릴 때가 꽤 있었는데, 아무리 한 살 어린 동생이라 해도 속내를 비치지 않고 무던히 버티는 준휘가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좋아?”
“넹.”
순간의 망설임 하나 없이 즉각 대답이 튀어나왔다.
“생의 절반을 사방이 막혀있는 공간에서 자랐어요. 아득하기만 했던 내 앞에 사형이 나타나 동트기 시작했는데, 어찌 싫을 수가 있겠어요.”
“나도…. 나도 네가 너무 좋아. 나도, 온통 어두운 세상 속에 홀로 자랐거든. ...세상 끝에 처박혔던 나를 꺼내준 것이 오로지 너 뿐이어서, 그래서 너무 좋아.”
“그래요?”
준휘가 따스하게 물었고, 승철은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이에 답했다. 그런데 왜 울어. 이제는 따스한 준휘의 손이 승철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너를, 너를…….”
“응.”
“너를 사랑하나 봐.”
어떡해. 더 이상 짭짤한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맑고 투명한 눈물을 계속 닦아주던 준휘는 기어코 승철의 몸을 잡아 제 위로 안아 들었다. 고개를 돌려 밤하늘에 수놓아진 별들을 본 승철이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아내고는 몸을 숙였다. 촉촉한 입술이 준휘와 맞닿았다.
발칙하게도, 기나긴 밤이 괜히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빌레라
驚蟄, 우리에게 봄이 온다면
물오름달 열이틀
이게 뭐라고 떨리지. 승관이 괜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한 손에 꼭 쥔 종이 묶음을 빤히 응시했다. 일단, 나, 단정해 보이나? 마구가 제대로 걸려있고, 홍옥 노리개도 잘 달려있고. 아-, 볼끼를 하지 말 것을 그랬나? 괜히 했나? 그치만 추운걸….
승관. 더 잡생각을 하기도 전에 한솔이 승관의 어깨를 붙잡았다.
"몇 명이야?"
"어, 나? 나, 두 명."
"나도 둘인데. 찬이가 셋이래."
한솔이 제 통지서를 보여줬다.
"그래?"
"엉. 그래서 먼저 나갔어. 끝나고 우물 앞에서 보자고 하더라."
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어지는 백호의 흉배를 보다, 볼을 챱 때리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포목전 앞에 서서 문을 작게 두드렸다. 문이 작게 열리고, 그 틈새로 어린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놀라지 않도록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희미하게 향이 났다. 마반인이었구나. 일이 한결 편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세요?"
맹랑한 목소리가 한없이 어렸다. 명호 사형이 날 봤을 때도 이랬을까.
"전해줄 것이 있는데,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아이가 살짝 망설이더니 이름 석 자를 읊었다. 옳게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이걸 받아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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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魔學書堂入學通知書 한양 마학 서당 입학 통지서
“...아!”
그도 곧바로 알아차린 듯했다. 죄송한 마음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 쭈뼛거리며 종이를 받아서 든 그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었다.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낯선 이는 경계하는 것이 마땅하니까요. 열어보시고, 혹 모르는 것이 있다면 정확히 사흘 뒤에, 이 고을에서 가장 큰 우물로 오십시오.”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연거푸 인사하더니 문을 콩, 하고 닫았다. 발을 동동 구르는 소리가 문밖으로도 들렸다. 방긋 올라온 광대가 내려갈 생각을 하질 않았다. 쿡쿡 웃으며 나서기 위해 몸을 돌리니, 익숙한 이가 앞에 서 있었다.
“할멈…!”
“잘 컸구나. 그럴 줄 알았지.”
“할멈. 다, 알고 저를 거두어 주신 거군요?”
“당연하지. 고것이 내 일인 것을.”
“감사합니다. 덕분에, 정말 덕분이에요.”
할멈이 승관의 손을 맞잡았다.
“너 같은 아이가 커서, 모두가 어둠에 취해 있을 때 비로소 꽃망울로 빛의 문을 열어주겠지.”
“........”
“서당의 황룡, 청룡의 어린 신령이여. 안 그러는가?”
이번에는 눈가에 물방울이 맺혔다가, 금세 주르륵 떨어졌다. 당연하죠. 해내야죠! 당당하게 웃어 보이는 승관에, 할멈이 대견하다는 듯 머리를 거칠고 따스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잎새달 하루
정말 제가 열어요? 오색이 걸린 서낭당 나무를 지나 남쪽으로 우르르 걸어가는 황룡들 사이에서 찬이 재차 물었다. 정한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룡들의 가장 앞에 선 찬이 눈을 꼭 감으며 숨을 들이마셨다. 여러 번 드나들었던 서당 입구 앞이었다. 벽 한쪽에는 신진들의 이름이 가득 쓰여 있었고, 그 옆에서는 4년 나비들이 앉아 신진들의 신원확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발한 수십 개의 꽃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해가 다시 드리우고 나비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온 신경이 손끝에 몰린 듯한 느낌이었다. 털이 쭈뼛하게 서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 얼른 하자. 다정한 지수의 목소리에 찬이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을미년 잎새달 하루, 신진을 맞이하겠습니다!”
찬의 푸른 마구가 개開를 그려냈고, 웅장한 소리와 함께 서당의 문이 활짝 열렸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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