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오방식시(2)

떨어지는 청룡

서당 by 반야

 

마법처럼, 눈을 뜨니 청룡 침소였다.

온통 푸른 빛이 돌았으나 제 침소처럼 드나들어 어색하지 않았다. 식은땀 때문에 몸을 뒤척이려 하자, 어떻게 알았는지 곁에 있던 준휘가 말없이 닦아주었다. 고맙다고 할 겨를도 없었다. 기어코 둘 다 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

“승철아.”

지수였다. 정한도 삐딱하게 벽에 기대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둘 다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힘을 많이 써서 말이 안 나올 수도 있어. 소리, 낼 수 있겠어?”

승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 났어?”

갈라지는 목소리가 꽤 형편없었다. 애써 힘을 주며 몸을 일으켜 앉으니 정한이 그제야 입꼬리를 올렸다.

승철은 얼추 제 상태를 파악한 뒤에야 겨우 한솔의 상태마저 들을 수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승철이 손을 슬그머니 뒤로 가져가 등을 매만져 보았다.

“이제 없잖아. 뭘 만져?”

“...어색...해서.”

정한이 계속해서 승철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승철도 이번에는 제 불찰임을 알아서, 쫑알쫑알 대꾸하던 평소와는 달리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 대해 대답만 했다. 지수는 그들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결국 한숨을 푹푹 내쉬며 사라졌다. 승철이 지수의 뒷모습을 따라 눈알을 도록도록 굴리는 것을 눈치챘는지 정한은 그제야 웃으며 별일 아니라며 다독였다.

 

 

타오름달 열이틀

지수가 다짜고짜 정한의 손목을 붙잡고 나와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그러고서는 최승철이 주작의 수하일 것 같다는 의견을 내뱉었다.

“그래서, 뭐? 최승철이 주작의 수장이든 신령이든 상관없잖아.”

“너무 덤덤한 거 아니야?”

“불확실하던 천상에 대한 생각을 가진 내게, 너의 존재를 알려줌으로써 확실하다는 걸 느꼈어. 신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은 몰랐지. 내가 청룡의 수하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으니 당연하지. 오방신장의 수하에 있을 것들은 운명적으로 붙어 다니게 된다며.”

“응...”

“그래서 최승철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야. 그래서? 굳이 이곳에 데려와서 아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뭔데?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

“너 솔직히, 나도 알고 있었을 거라고 예상은 했을 거잖아. 대체 뭐가 신경 쓰여서 굼뜨는데?”

“넌... 눈치가 너무 빨라서 가끔은 짜증이 나.”

“너나 나나, 다른 처지에서 눈치만 보고 자랐으니까.”

지수가 벽에 기대고 있던 정한에게로 다가가 바짝 붙었다.

“그럼, 너도 잘 알겠네.”

“뭘?”

“남은 주작. 준휘랑 석민이.”

“걔들이 왜…. 아.”

“네가 전에 장난식으로 한 소리, 기억나?”

“...”

“전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너랑 나, 승철이. 하물며 순영이 마저도 우리랑 고작 한 살 차이야.”

“현무는 감도 안 잡힌다. ...그리고….”

“....”

“준휘는, 아닌 것 같은데.”

“애초에 나는 너희가 나랑 평생을 함께할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어. 당연히 나만 올라갈 줄 알았지.”

“와, 그건 좀 상처.”

정한이 가슴에 칼을 맞은 듯한 시늉을 했다. 지수가 지금 장난칠 때냐며 가슴팍을 때렸다.

“그럼 뭐, 어쩌라는 건데? 어쩔 수 없이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해야지.”

“아니. 조금만, 조금만 더 가까이서 지켜보자고. 준휘나 석민이 말이야. 안그래도 다른 생원들이 고깝게 보는데... 이런 부분까지 들키고싶지 않아.”

지수의 단호한 목소리에 정한이 그제야 흠칫했다. 알음알음 백호의 아들임이 퍼졌던 탓에 그들의 시선을 전부 받아냈던 지수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너무 불안해. 이유 없이, 그냥 불안해서 그래.”

애초에 석민은 손에서 불을 내보낼 수 있는 아이였고, 준휘는 불화살을 만들 수 있었다. 불꽃 같은 날개를 펼칠 수도, 엄청난 양의 불을 내뿜을 수도 있다.

정한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겠어. ...근데, 일단 오방식시를 하는 동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으니까.... ”

“그래.... ...그럼 지금은 일단 평소 하던대로 석민이 곁에 내가 있을게.”

“엉.”

또 혼자 속앓이 존나 했겠네, 홍지수. 정한이 그제야 표정을  풀고 평소처럼 장난스레 웃어보였다. 정한에게 생각을 나누었을 뿐인데 금세 마음이 풀어진 지수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정한을 밀쳐냈다.

 

나빌레라

五方式試(二), 떨어지는 청룡

“쟤 뭐 하는 거야?”

준휘가 대뜸 순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순영은 별 말 않고 그의 손을 잡은 채로 서낭당으로 졸졸 따라갔고, 곧바로 찬을 발견해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가장 어린 나비가 서낭당 나무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저러다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러니까. ...아까 볼 때 슬금슬금 올라가고 있었는데. 그새 거의 다 도착했네.”

찬은 꼭대기에 다다라서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위층에 있는 제 침소보다 높게 느껴졌다. 황룡이 되면 이 정도 위치에서 생원들을 내려다보려나? 하며 덤덤하게 예상했던 곳으로 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살짝씩 휘청거릴 때마다 바로 아래에서 걱정하는 승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찬은 시선을 한곳에 두고 그것을 향해 조금씩 팔을 뻗었다.

중앙의 우뚝 선 나무. 한밤중에도 멀리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음에도, 나뭇잎 사이에 가려진 달빛인 줄만 알고 넘겼다. 갑자기 생각이 나 다급히 서낭당 나무 아래로 뛰어가 올려다보니, 푸른빛 구슬이 눈에 띄었다.

“여기 있다!”

반짝이는 구슬이 손에 닿자, 뚝 소리와 함께 찬이 올라탄 굵은 나뭇가지에 균열이 일어났다. 우지끈 끊어진 나무와 함께 찬이 떨어졌다.

“아우씨, 하루가 조용할 날이 없네!!”

준휘와 순영이 찬에게 급히 달려가려던 참에, 다급히 발걸음을 멈추었다.

언제 다가온건지, 석민이 찬을 한쪽 팔에 안고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있었다. 검은 뱀이 석민의 팔과 나무를 단단히 엮고 있어 찬을 더 안정적으로 들 수 있었다.

“...괜찮아?”

아래를 볼 자신이 없는 찬은 석민만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석민과 찬이 안전하게 땅에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뱀이 스르륵 내려왔다. 다리에 힘이 풀린 찬이 주저앉자 석민이 화들짝 놀라며 찬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 찾았네!”

찬이 손에는 반짝이는 구슬이 들려 있었다. 준휘가 달려가 와락 찬을 안았다. 다른 침소임에도 1년 생원이 겨우 찾아낸 것이 대견했다. 그제야 분위기를 읽고 찬이 웃음을 터트렸다. 주변 청룡 생원들은 환호했고, 다른 생원들은 절망했다.

정한이 얕은 숨을 뱉으며 창틀에서 몸을 뒤로 물렸다.

“...자, 이제 끝났네.”

“뭐가?”

“오방식시. 찬이가 찾았어.”

뭐?! 누워있던 승철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불을 젖히고 창가로 달려 나가 보니, 찬이 손에 구슬을 들고 흔들며 웃고 있었다.

“지훈이도 보고 있었네. 누각에서.”

지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지훈도 누각에서 한숨을 쉬며 보고 있었다.

“...다들 표정이 왜 이렇게 안 좋아?”

“....”

승철의 말에 지수가 숨을 들이마시고 정한을 보았다. 정한은 실실 웃기만 했다.

“뭔데? 왜?”

“너 때문이지.. 이 주작놈아. 나와. 가야 해.”

정한이 승철의 볼을 쭉 잡아당겼다. 아린 볼을 만지며 황룡 도포를 입기 위해 일어섰다.

“왜 또 청승맞게 보고 있어. 빨리 입어.”

굼뜨고 있을 새가 없다며 정한과 지수가 팔을 끼워 넣어주고 세조대마저 착실하게 차 주었다. 멀뚱멀뚱 보고 있는 승관과 한솔에게도 다녀올게! 라는 한마디만 하고 쌩하니 빠져나갔다.

“바람결 같다. 사형들.”

“그만큼 바쁘신 분들이긴 하지.”

“너도 봤어? 날개?”

“응? 승철 사형? 그냥 주변이 온통 붉었어. 그것 말고는 기억이 안 나.”

“응? 아니, 석민 사형 말이야.”

한솔이 말없이 승관을 응시했다.

“...못봤어?”

“응. 그냥 휙, 뛰어서 찬이 잡은 것 아니야? 저 밧줄 같은 검은 뱀은 현무의 누군가가 한 것일 테고. 아마 지훈 사형의 것이겠지.”

“네가... 본 것을 보지 않았다고 할 아이도 아니고, 느리면서도 상황 판단은 빠른 아이이니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나중에 찬이한테도 물어봐. 가장 가까이에 있었잖아. 나는 못 봤어, 정말로.”

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뜻한 바람과 함께 청아한 소리가 들렸다. 정한과 지수가 편종을 친 것 같았다. 승철은 순영과 찬을 데리고 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있었다. 승관이 한솔에게 나가 볼테냐 물었지만 한솔은 고개를 저었다. 밑에서 이 축제를 즐기는 것이 가장 재밌으리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도 했으나, 지금처럼 위에서 내려다보는 축제도 나쁘지 않았다. 이들을 발견한 찬이 구슬을 들고 방방 뛰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승관은 그에 답하듯 양손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구슬을 찾은 생원이 받는 혜택은 황룡과 본인만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생원이 속한 침소의 생원들에게도 다른 혜택이 돌아간다. 그 침소의 생원들은 다른 침소보다 휴가를 이레 더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올해부터 추가된 혜택이고, 구슬을 숨긴 4년 생원들만 알고 있던 것이라 순영도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지훈은 석민을 데리고 정악 터에 갔고, 정한과 지수는 찬이 있는 곳으로 갔다. 온 방향에서 황룡 정복을 입은 생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지수 사형이 이런 걸 되게 좋아한댔어.”

“되게... 정신없는데..? 사형이 이런 걸 좋아한대?”

“오방색이 자연스레 섞여 있는 거.”

“그래? 보기 좋긴 하다.”

정한이 머리 위로 손을 올려 손뼉을 치자, 나무에 걸려 있던 오방색의 천들이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약 보름 동안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며칠 전 온갖 종이를 찢어 방바닥에 널브러트리고는 민규를 붙잡고 연습했던 것이다. 금강초롱의 연한 자색이 아닌 밝은 푸른색만 집어넣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아는 승관이었기에, 괜시리 제가 더 벅차올랐다.

타오름달 열하루, 청룡이 구슬을 찾았으니 오방식시가 마침내 끝이 났습니다. 내일 정오에 각 4년 황룡들이 숨긴 구슬의 위치를 알려줄 예정입니다. 정해진 기간은 열이틀까지이므로 내일 하루도 오늘과 같은 전체 휴강입니다. 넓은 서당에 네 개뿐인 구슬을 찾느라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이상으로, 오방식시를 마칩니다.

정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청룡 생원들이 일제히 찬에게로 달려들어 안겼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푸른 생원들에, 승철과 지수가 자리를 피해주었다. 커다란 파도를 안은 찬의 표정은, 행복 그 자체였다.

어슴푸레 달이 창문을 비추었다. 말없는 침소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축제가 끝난 밤이라, 중앙은 고요했다. 수시를 펼쳐 보지 않아도 대충 자정이 지났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정한과 지수가 제 머리맡에서 자고 있었다. 마구를 들어 푹 잠들 수 있도록 하려고 했으나 제 마구를 찾을 수 없었다. 추락할 때 잃어버렸나? 따위의 생각을 하며, 조용히 황룡 도포를 걸치고 방을 나섰다.

고작 입추를 지났다고 밤공기가 서늘해진 것이 꽤 웃겼다. 소리 없이 실소를 지으며 중앙으로 향했다. 마구가 없으니 마법을 쓸 방법이 없고, 곁에 친우와 사제 하나 없는 완전한 홑몸임에도 겁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불이 켜져 있는 누각을 보고, 누군가 누각에서 잠에 들었나 싶었다. 누가 있든 데리고 나와 침소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말을 건네기 위해 계단을 하나씩 오르며 목을 가다듬고 문고리를 잡자, 원래 열리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문이 열리며 준휘가 나왔다.

“...승철 사형.”

“네가 왜 누각에서 나와?”

준휘의 뒤에는 원우도 있었다. 이들이 나와 문을 닫자 누각의 불이 꺼지고 온통 어두워졌다. 원우가 익숙하게 제 마구를 꺼내 불을 피워냈다.

“저랑 할 일이 있어서 잠시 사용했습니다. 오방식시에 있었던 일을 좀 처리하느라....”

“아.”

“....”

“...응. 늦었는데 피곤하겠다. 얼른 들어가. 준아. 넌 이리 좀 오고.”

서둘러 원우를 돌려보내고 침소로 향했다. 준휘를 붙들고 주작 침소 뒷편까지 멈추지 않고 가는데도 그는 말 하나 얹지 않고 조용히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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