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오방식시(1)

추락한 주작과 백호

서당 by 반야

타오름달 열흘

오방식시 당일이 되면, 황룡들은 축제에 참여하는 생원들을 위해 침소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 석민도 마찬가지였다. 침소에 머물러 있는 동안 할 일들을 누각에서 챙겨 돌아오던 길이었다. 때마침 같은 방향으로 내려오는 명호와 마주쳤다.

“웬일이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나가려고.”

명호가 사유서를 펄럭였다. 지금 나가서 오방식시가 끝나는 날 돌아온다고? 명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는 이유는 뻔했다. 명호는 수련생이다. 현무의 구슬을 발견한다 한들, 개인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하나도 없었다. 차라리 그렇다면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겠지. 사유서 아래에 찍힌 꽃무릇 인장이 그를 증명하듯 붉게 반짝였다.

손에 들려있던 너울을 머리에 얹으니 명호의 모습이 사라졌다. 석민은 익숙하게 허공을 보고 잘 다녀오라며 손을 휘적거렸다.

한솔은 유독 오방식시가 끌리지 않았다. 지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꽃밭으로 피신해 있었으나, 시작되기 약 한 시진 전에 승관이 다급히 쳐들어왔다.

"왜 안 하는데? 재밌을 것 같지 않나??"

"그닥 흥미가 안 생겨. 찬이는?"

"걔는 다른 청룡들이랑 준비 중이야. 나도 갈 건데, 진짜 안 가?"

"응."

승관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다가, 나중에라도 궁금하면 찾으러 오라는 말을 남기곤 떠났다.

승관이 나가면서 헤친 버드나무 잎들이 흔들리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승철이 들어왔다. 마땅히 무언갈 하는 것이 없어 어정쩡하게 일어나 승철을 맞이했다.

생각해 보니 4년 나비들은 구슬을 숨긴 당사자였고, 셋이 모여있기에는 마땅한 침소가 없으니 이곳에 자주 올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찬의 서책이라도 받아 읽어볼까 싶은 한솔이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저는.. 그냥요.”

할 말이라도 생각해서 올 걸 그랬다. 머쓱하게 앉아있는 한솔의 앞에 털썩, 승철이 앉았다. 덥다. 그치? 한솔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승철은 마구를 들어 그들의 주변을 원으로 둘러싸더니, 얼음 결계를 쳤다. 타오름달이다보니 그늘에 있어도 더웠는데, 덕분에 서늘해진 공기가 마음에 들었다.

“왜? 오방식시 하러 안 가고?”

“어……. 주최하는 황룡에게 말하기 좀 죄송하지만,”

“응.”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제가, 몸을 쓰는 게 둔해서 딱히 도움이 안 될 거예요.”

“둔해? 네가? 어떻게 알아?”

질문이 가벼운 것임을 알면서도 한솔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항상 말을 신중하게 하는 편이라 더 그러했다. 승철도 그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그냥, 감입니다.”

“그래? 그럼 나랑 놀러 나갈까?”

“그래도 돼요? 아까 명호 사형도 나간다고 하던데….”

한솔의 말에도 승철은 직전에 만들었던 결계를 깨부수고 일어났다. 잘게 깨진 결계 파편을 만지작거리니, 승철은 어차피 부서진 마법이라 그저 얼음덩어리일 뿐이라고 했다. 녹아내리는 파편을 만지작거리다, 나가자며 내민 승철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나빌레라

五方式試(一), 추락한 주작과 백호

한솔은 승철과 단둘이 마반촌으로 가서 정과를 나누어 먹을 것이라 생각했다. 누각에 따라가 사유서를 쓰고 곧바로 승철의 도장을 받아 나왔다. 한데 원우와 민규가 따라붙었고, 정신을 차려 보니 마반촌은 온데간데없고 뒷산을 오르는 중이었다.

 

옛날부터 황룡은 비정기적으로 서당에 결계를 둘러야 했다. 평소대로라면 정한과 지수를 포함한 황룡들이 결계를 둘러야 했으나 이번 오방식시에는 조건이 여의치 않아 민규와 승철에게 부탁해야 했다. 정한 대신 민규가, 지수 대신 한솔이 따라 나온 덕에 얼추 사방신의 모양새는 갖출 수 있었다.

“일 년 생원인데, 오방식시를 즐기지 않고?”

“안 한대.”

“어유, 그렇습니까?”

평소에도 나긋하고 순하던 원우는 사제의 의견에 토를 달지 않았다. 민규도 비슷했다. 한솔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가장 뒤에서 따라오던 승철이 얼른 올라가자며 등을 떠밀었고, 금세 정상에 도착해 숨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솔아. 멀리 가지는 말고 근처에 있어-.”

“네.”

어린 백호에게 황룡의 일을 시킬 수는 없었다. 민규는 정한의 부탁을 받고 대신 온 마반인이라 쳐도 한솔은 그저 1년 생원 중 하나에 불과했다. 세 사형은 그가 적당히 멀어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각자의 위치에 서서 마구를 꺼내 들었다.

한솔이 슬그머니 절벽 근처로 다가갔다. 드넓은 서당이 한눈에 다 보일 뿐만 아니라, 꽤 높아 마반촌도 얼핏 보였다.

서당을 일각 정도 보고 있자니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드넓은 정상에 마땅히 놀거리는 없었고, 사형들은 여전히 결계를 점검하느라 바빠 보였다.

절벽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다 샛노란 수선화가 발끝에 닿았음을 겨우 깨달았다. 찬은 화신이 준 고유의 꽃들에 유독 관심이 많았다. 저를 제외한 같은 방 나비들의 꽃부터 시작해서, 화신의 덕을 입은 모든 나비에게 물어보고 설화를 듣기를 즐겼다. 그중에서도 찬은 한솔의 꽃을 가장 좋아했다. 금낭화 최가. ...완전 최한솔인데? 하면서.

쿵. 쿵. 쿵.

절벽 끝에 피어난 수선화 한 송이를 보며 추억에 젖을 때, 갑자기 웅장한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

쿵.

쿵.

“뭐가 잘못됐나?”

“그럴 리가. ...이게 무슨 소리야?”

“어디서 나는...,”

“어, 최한솔!!”

쿵.

원우의 다급한 목소리에 한솔이 고개를 돌려 그들 셋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사색이 된 민규가 한솔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기도 전에, 한솔이 노란 꽃을 품은 채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원우가 다급히 아래를 내려다보려고 했으나 눈이 멀 정도로 번쩍이는 알 수 없는 불꽃 때문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불꽃이 어느 정도 사그라들고 난 후에야 겨우 아래를 볼 수 있었고, 그제야 한솔과 승철이 함께 떨어졌다는 것을 인지했다. 게다가 이 정도 불꽃이면, 서당 밖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해도 서당 생원들이 모를 수가 없을 터였다. 더군다나 지금은, 오방식시가 시작되어 대부분의 생원이 서낭당 주변으로 모여있을 시간이다.

지수가 다급히 누각 문을 열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순영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흔들며 깨웠다. 요동치는 불안감 때문인지, 옆에서 엎드려 자고 있던 지훈도 슬그머니 눈을 떴다.

“일어나. 얼른.”

“...무슨 일 있어요?”

“승철이랑 한솔이를 찾아야 해. 절벽에서 둘이 떨어졌어.”

순영이 삐그덕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한순간에 굳었다. 조금 전 사유서를 쓰고 나간 둘이 떨어졌다니. 그들을 찾으러 가야 한다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정한이 둘을 앉혀두고 약도를 그려냈다. 완성된 후에는 서당 입구에서 그들이 있었던 산까지의 길을 푸른색으로 주욱 그어냈다.

“저기 절벽 아래, 보여? 산 있잖아.”

“...네.”

“이 길 그대로 나오면 이 산이 보일 거야. 저기에 승철이랑 한솔이가 있어. 무엇인지는 나중에 설명해 줄게. .......아마, 별일 없을 거야.”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보던 지훈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사형. 현무는 전원우가 갔고, 청룡은 누가 갔어요?”

“나 대신 민규가 갔어. 그리고 그 둘은 지금 돌아오는 길이고.”

아마 민규와 원우가 돌아오려면 최소 두 시진은 걸릴 것이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사내라 하더라도 온종일 걸어 올라간 산에서 마법으로 결계를 걸었다면 몸이 온전치 않을 테니. 일이 발생하자마자 민규가 곧장 지비로 정한에게 사실을 고하고 도움을 요청했다고 했다.

“아, 준휘는 석민이를 데리고 다른 무예학도들이랑 근처에 요괴가 있나 둘러보러 갔어. 호시, 너는 우리랑 갈 곳이 있어서 뺀 것이고. 또,…….”

지수와 정한이 번갈아 가며 하는 말이 순영의 귀를 웅웅 울려댔다. 머릿속 정신이 전부 아득해지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덜덜 떨리고 있는 손 위로, 차가운 지훈이 손이 얹어졌다.

“......야. 왜 이래? 정신 차려.”

“아, 어…….”

“정말 무슨 일이 생겼으면, 걔네가 모를 리가 없어. 우리는 사형들 따라가서 보면 되는 거야. 그때 걱정하고 깨달아도 안 늦어.”

지훈은 끝까지 서당에 남는 황룡이었다. 서당에서, 남은 생원들의 안전을 보호해야 했다. 이들이 계획을 짜는 찰나에 홀로 황룡나비들의 사유서를 야무지게 쓰고 인장마저 찍은 뒤 품에 하나씩 넣어주었다. 모든 것을 확인한 지수가 정한과 순영의 손을 잡았다.

“가자.”

지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온몸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순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 지난 후에야 발이 땅에 닿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꼭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앞에 보이는 광경은 처참했다. 승철이 입고 갔던 도포는 검게 그을려 조각조각 난 채로 떨어져 있었고 승철이 입은 저고리의 등 부분은 구멍이 뚫려 속이 훤히 보였다.

지수가 승철을 정자세로 눕히기 위해 옆으로 누운 몸을 비틀자, 승철의 품속에 있던 한솔이 인상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어? 옷만 탔지, 몸은 괜찮은데?”

“...한솔이는 옷도 깔끔해.”

지수와 정한이 각자 한 명씩 상태를 확인할 동안 순영은 잔해를 정리했다. 떨어진 승철의 마구를 들어 제 것 옆에 걸었고, 타버린 옷 조각들을 주웠다.

승철의 몸을 지수가 안아 들자 우수수 붉은 깃털이 떨어졌다. 당황한 순영이 기색을 숨기고 깃털을 모았지만 모조리 붉은 재가 되어 날아갔다.

생원들 사이에서 소문이 차차 돌기 시작했다. 불꽃 덩어리가 절벽에서 생겨났다가 금세 사라졌다고. 하지만 또 그 소문이 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불꽃 덩어리가 사실 인간이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승관과 찬은 그 소문의 주인공이 승철과 한솔이라는 것 또한 생각하지 못했다.

찬은 걱정스레 떨어진 사람이 서당 생원이면 어쩌냐고 물어도, 승관은 마반인들 있는 곳에는 종종 어둑시니나 어린 혼들이 장난을 친다며 달래주었다.

*어둑시니. 어두운 밤에 종종 보이는 요괴. 장난기가 많을 뿐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 생원들을 간혹 놀라게 하기 위해 대낮에 보이기도 한다.

 

생원들은 밤이 되자마자 죄다 침소로 돌아갔다. 안 그래도 어두운 밤에 구슬을 어찌 찾냐며, 몰래 들고 들어온 술병을 살랑살랑 흔드는 다른 생원들과 섞여 침소로 들어가려던 찰나, 지수가 청룡 침소 앞에서 그 둘을 반겼다.

“사형! 하루 종일 찾았는데! 청룡 침소에 있었어요?”

“응. 정한이랑 있었어.”

“…….”

“…….”

“...왜.. 그러시는..?”

제 앞을 우두커니 막고 서서 비켜주질 않는 지수에, 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지수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양손을 각자의 앞에 내밀었다. 무의식적으로 지수의 손을 잡자마자 시야가 한순간에 바뀌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런데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 있었다. 여기는, 백호 침소였다.

“여기는, 우리 침소야. 너희는 나오면 안 돼. 알지? 청룡이 백호의 영역에 있다가 들키면 너희는 처벌 대상이 돼.”

“네???”

“금의 기운에, 나무들은 상극이란 말이야.”

도통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지수에, 둘은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지수는 다급하게 지금의 상황을 읊어 주었다. 낮에 승철과 한솔이 절벽에서 떨어졌고, 상황을 보기 위해 약초학도인 정한이 있는 청룡 침소에 두었다고 했다. 그러니 둘은 이곳에 있어야 한다면서. 둘은 달리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없어 얌전히 수긍하며 지수를 보내주었다.

 

 

타오름달 열하루

정한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떼어내 툭툭 털었다. 희뿌연 연기가 잠시 앞을 가렸다가 사라짐과 동시에, 준휘가 조용히 제게로 걸어왔다. 정한은 기다렸다는 듯 웃어 보였다.

“승철 사형은 괜찮아요?”

“뭐가?”

“떨어진거요.”

“...어떻게 알았어?”

“같은 주작의 감이죠.”

준휘가 손으로 파닥파닥 날개짓을 하더니 농담이라며 웃었다. 정한도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사형이 하루 종일 방 안에 안 들어오고, 누군가가 추락했다는 소문은 돌고.... 석민이는 계속 불안해하고, 형도 조금 그런 것 같고. 해서 한 번 물어봤어요.”

“눈치가 빠르네. ...보러 갈래? 한솔이는 눈은 떴어.”

정한의 말에 준휘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한은 그런 준휘의 모습을 보며 어린애도 아니고 뭐 이렇게 좋아하냐며 웃었다.

 


주작은 남쪽을 수호하는 사신이다. 붉은 주작은 불과 여름을 관장한다. 도전적인 성격을 타고나는 주작은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살면서 마주하는 모든 한계에 부딪혀 보는 이들은 본인 스스로가 끝이라는 생각이 들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는 행동력을 갖고 있다.

 

주작 영수는 수장과 신령을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하물며 서당의 평범한 생원들과도 차이점을 두지 않으려 했다. 천상과 지상을 가장 많이 드나드는 주작 영수는 시시때때로 서당을 드나들며 남들보다 유독 선하고, 헌신적인 생원에게 제 능력을 나누어 불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도록 했다. 다른 침소의 생원들보다 도전적이고 헌신적인 생원이 많은 탓에 영수가 이들에게만 특별한 능력을 주었다는 설도 있으나, 정확한 사실은 확인할 수 없다.

제 수하로 둘 두 명의 아이는 커다란 날개를 펼칠 수 있게 된다. 때는 알 수 없으나, 주작의 생원이라는 것이 겉으로 표현이 될 때 나타난다고 한다. 한데 불꽃이 튀는 이 날개가 오척五尺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임을 고려하여, 함께 올라갈 또 다른 오방의 아홉 수장과 신령의 눈에만 보이도록 하였다.


정한과 머리카락 길이가 비슷한 사람. 체구는 지훈보다 조금 작았고, 눈은 준휘처럼 매서우면서도 부드러웠다. 뚜벅뚜벅 붉은 옷을 입고 붉은 날개와 불꽃을 터트리며 코앞에 걸어온 그 사람이,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렸다. 온통 어두워진 시야에 발버둥 치려고 하였으나 몸은 움직이질 않았고, 곧이어 그의 목소리로 추정되는 것이 들려왔다.

 

승철아.

이제, 일어나야지.


카테고리
#기타
추가태그
#셉페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