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오(2)
악귀와 병마를 쫓아야 한다
누리달 열나흘
죽음을 모시는 꽃무릇 전가. 원우네 집안은 오래전부터 저승사자를 모셔 왔으며, 원우 또한 영혼을 볼 줄 알아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매주 쇠날에 서당 밖으로 나와 그의 사자가 영혼을 저승으로 보내는 것을 도왔다. 꾸준히 2년 정도 그 일을 하니 그저 일상이 되어버렸다.
항상 피곤함에 찌든 얼굴을 하고서도 악착같이 뒤따라오는 원우를 빤히 보던 사자가 이러다간 나보다 네가 먼저 가겠다며 단오가 끝날 때까지 휴가를 내주었다.
저승사자 무명無名은 오랜만에 본 원우를 반길 새도 없이 다급하게 그의 손에 서신을 쥐여주었다.
“너나 나나 시간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일 터이니 서당에 돌아가서 보아라. 급히 불러내어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용무 없이 부르는 일은 없었으니 급한 일일 것이라 예상은 하였습니다.”
원우 또한 잠깐 시간을 내어 온 것이기 때문에 급히 몸을 돌려 서당을 향해 달려갔다.
─
癸巳年 六月 十六日 丑時
尹道元
九尾狐 事故死
─
“...이게 뭐예요?”
“오늘 사시에 내 사자가 준 명부.”
원우가 부른 것은 정한과 민규 둘뿐이었지만, 조전제가 끝난 직후부터 계속 누각에 있었던 석민이 곁에 서서 멀뚱멀뚱 원우를 쳐다보았다. 이게 무슨 의미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원우는 그런 석민을 보다, 지끈거려오는 이마를 짚었다. 이 종이 하나가 너무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공들여 쌓아 올린 탑에 균열이 생기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겸아.”
답지 않게 원우가 석민을 겸이라고 불렀다. 도겸. 석민이 황룡으로서 서당 외부에서 일할 때나 종종 쓰는 이름이었다.
“예..?”
“이제부터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도 발설하지 않아야 해. 자신 있어?”
석민이 조용히 눈치를 보았다. 원우뿐만 아니라 옆에 서서 가만히 명부를 들고 뚫어지라 보고 있는 민규와 정한의 표정에도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낯선 모습들에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자신이 없으면, 잠시 누각에서 나가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
“조용히 듣고만 있겠습니다. 이야기... 나누세요.”
뭐 어떻게 할 건데? 석민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한이 기다렸다는 듯이 들고 있던 명부를 서안書案 위로 툭 던져두며 말했다.
“윤도원이라는 자, 지금 서당 내에 있는 거 알아?”
“압니다. 그래서 부른 것이고요. 특별히 전해 들은 말은 없지만, 이렇게 명부를 주는 것을 보면 아마도 구미호가 서당 내에 있을 수도 있다는 의미겠지요.”
원우가 안경을 고쳐 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명부를 본 직후에 서당에 들어와 문을 닫았어요. 저희가 할 일은 숨어있는 구미호를 잡고 윤도원 생원을 살리는 것...이 되겠네요.”
“저….”
한순간에 셋의 이목이 쏠리자 석민이 헙, 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슬쩍 원우를 보고는 눈을 내리깔고 말을 이었다.
“말을 얹어서 죄송한데, 이 명부에 적힌 자를 살려주어도 돼요? 아무리 저희가 서당의 생원을 보호하는 황룡이라 해도, 그저 직책일 뿐이고. 이 명부는 어찌 보면 저승에서 내려주는 명이잖아요.”
“그 전에, 인간이 아닌 것들이 인간의 목숨에 개입하는 것은 막는 것이 원칙이야. 저승의 명령보다는 인간의 존재가 더 귀하니까.”
민규가 원우 대신 대답을 해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어딜 가냐는 표정으로 원우가 올려다보자, 민규는 빙긋 웃었다.
“준휘 사형의 말을 듣고 다급히 누각에 오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저는 황룡이 아니니 이 일에 개입할 수 없어요.”
“...무슨,”
“승철 사형은 내가 준휘 사형이랑 데리고 있을게. 지수 사형, 불러올까?”
장난치듯 말하는 민규의 말에 원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언제부터 그런 것을 따졌다고….”
“형. 지금은 평소보다 보는 눈이 두 배야.”
“…….”
“자중하셔야지요. 더군다나 지금만 해도, 나만 청룡 도포를 입고 있잖아.”
허리를 숙여 원우에게로 몸을 가까이하고 귓가에 속삭였다.
“...여기서, 모란을 어떻게 써. 나는 황룡도 아닌데 서당 일을 어떻게 도와. 무슨 잡음이 들릴 줄 알고.”
몸을 일으킨 민규는 제가 이 일에 개입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재차 강조하며, 석민을 데리고 쌩 나가버렸다. 멍하니 닫힌 문을 보는 원우에, 정한이 집중하라는 듯 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요괴 하나가 들어와 있으니까 부관이 안 걸렸구나. 일단... 윤도원이 일반인 천민이니까 저렇게 명부가 적힌 것이겠지.”
“...그렇죠. 구미호들은 천민들의 간을 빼먹으니까.”
“윤도원 말고도 다른 일반인 중 천민은 누가 있는지 먼저 찾아두고 주변에서 관찰하자.”
정한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고는 일어났다. 아침 일찍 일어났더니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살짝 비틀거리며 문갑에서 서책 하나를 꺼냈다. 원우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쉬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꺼내어도, 정한은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서책을 펼쳤다.
“다른 생원을 부를 걸 그랬나 봐요. 제 생각이 짧았네요.”
“이것만 하고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 아직은 괜찮아.”
명적을 펼쳐 하나하나 빈 서책에 써 내려갔다. 일반인의 수는 마반에 비해 훨씬 적은 편이었다. 서책에 적힌 이름은, 단 일곱뿐이었다.
“어유, 경주에서는 천인들을 다 한 침소에 몰아서 배정하나?”
다 인에 들어가 있네. 인이 셋, 예가 둘. 그리고 주작과 백호에 한 명씩 있었다. 승철이, 순영이…. 하루에도 열댓 번씩은 불러서 낯설지 않은 이름들을 곱씹었다.
그 순간, 누각 문이 활짝 열리며 지수가 들어왔다.
“지금 이 안에 뭐가 있다고?”
“오는 길에 민규 봤구나? 제사 마치고 바로 온 거야?”
“천인 생원들은, 찾아냈어? 안전한 상태인지 확인을….”
“먹을 거라도 좀 들고 오지. 나 정과 엄청 열심히 만들었는데. 먹어봤어? 한솔이 줬으려나?”
둘 다 서로의 말은 듣지도 않고 제 할 말만 해대는 꼴이 꽤 우스웠다. 말을 하던 정한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가쁘게 쉬어대는 지수의 어깨를 토닥이며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잠시 네가 나 대신 원우를 도와줘. 미안해. ...웬만하면 돕겠는데, 지금 내 몸 상태가 말이 아니야.”
“그렇겠지. 며칠 동안 밤을 새웠다며.”
응. 그러니까 부탁 좀 할게. 한솔이, 3년 전 최승철처럼 되게는 안 해야지. 정한은 원우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지수의 귓가에 속삭이고는 홀연히 누각을 떠났다.
애매하게 둘만 남은 상황에, 지수가 굳은 표정으로 원우를 바라보고는 미동도 없이 말했다. 나, 뭐 해야 하는데. 원우는 끼긱거리며 의자를 내 주었다. 일단 앉으시면 된다고.
“...서당 문을 닫아두긴 했는데, 이번에 부관을 걸지 못해서 마음만 먹으면 나갈 수 있는 상태예요.”
“...부관을 안 걸었다고?”
“어? 아, 네. 저랑 민규, 윤 사형. 이렇게 셋이서 해봤는데, 안 되길래….”
“...아.”
“급한 대로 장벽을 쳐두긴 했는데, 곧 사라질 거고요. 그러니까, 이제는 누군가 서당 입구에 서서 막아야죠. 가장 원초적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그렇겠네. 나가는 순간 여우의 활동 범위가 미친 듯이 커질 테니까……. 내가 서 있을게.”
순영이 무예, 보러 가기로 했는데…. 지수가 혼잣말을 하며 애꿎은 손톱만 뜯고 있었다. 항상 무슨 일이 발생해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처리를 잘하던 지수였기에, 이렇게까지 긴장한 것을 보니 꽤 낯설었다.
“일단 지키는 것이 중요하니까, 나중에 알려주면 이해해 주겠지……. 무슨 일이 혹시라도 일어나면, 하늘에 백색 폭죽을 터트릴게.”
“네. 만약 밝을 때 일어나면, 그냥 아무 색이나 사용해서 터트려요.”
“응. ...어쩐지 어제 하늘에 반짝이는 게 좀 보이더라. 부관이 제대로 걸려있질 않았으니 그랬겠지.”
지수의 역할은 정해졌다. 출입문을 막는 것. 누군가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게. 나머지는 승철과 순영을 제외한 다른 황룡들이 경주의 신을 모아 처리할 것이다. 아마 천민 출생의 생원들 곁을 남몰래 지키겠지.
먼저 가볼게. 몸조심하고. 자초지종을 다 듣느라 몸이 뻐근해진 듯했다. 어느 정도 몸을 풀고는 마구와 황룡 도포를 챙겨 누각을 나섰다.
우려와는 다르게 누각을 제외한 서당 내부는 놀랍도록 평화로웠다. 제례를 지낸 후 바로 무예를 보여주어서 그런지 지나치는 생원마다 온통 무예생들 이야기뿐이었다. 경주 생원, 한양 생원 할 것 없이 삼삼오오 모여서 정과를 나눠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다가, 긴장을 놓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에 박혀 눈을 부릅뜨고 서당 입구 주변을 돌아다녔다.
“...사형, 왜 여기에 있어요?”
“일이 있어서... 나 여기에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무슨 일 없으면 무예 보러 온다면서요. 무슨 일 있는 것 같아서요.”
순영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지수를 쳐다보았다. 지수는 한참 동안 입을 달싹였다.
“지금 일, 나중에 다 처리되면 알려줄게.”
“...사형은 지금 괜찮은 거 맞죠?”
“어? 응. 당연하지.”
“그럼 됐어요.”
그 후 순영은 한참을 말없이 지수의 곁에 있었다. 막 가려고 할 때쯤, 지수가 다급하게 순영의 팔목을 잡고 멈춰 세웠다.
“너, 당분간 어디 갈 때마다 지훈이나 원우 곁에 붙어 있어.”
“오늘도 내내 붙어 있긴 했는데, 왜요?”
“...그냥. 그 애들 옆이 안전해. 알겠지?”
“뭐…. 네. 나중에.. 꼭 이유 말해 주세요.”
승철은 준휘의 곁에 있을 테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더군다나 제가 아니더라도 정한이나 원우가 알려줄 것이 뻔했다. 거듭 반복하고 난 후에야 겨우 순영을 돌려보냈다. 멀어지는 순영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해댔다.
원래는 동이 트고 달이 산 뒤로 넘어갈 때까지 곁에서 붙어 있을 생각이었다. 조전제를 하고, 순영의 무예를 보고, 지훈이 맞추어놓은 음악을 배경으로 삼아 정과를 먹으며 단오제 내내 함께 있자고. 둘이 춘분 시험을 치기 전부터 약속해둔 것이었다. 하루라도 함께 있었음에 감사히 해야 하나, 따위의 생각을 하던 지수는 줄곧 정신을 차리고 그 여우를 잡을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단오제가 시작된 지는 겨우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여우에게 잡아먹히기까지 남은 시간과 같았다.
석민이 청룡 침소에 들어가려다 그곳에서 나오는 정한과 마주쳤다.
“잠은 좀 잤어요?”
“어. 좀 살 것 같다.”
“윤정한 생원님!”
둘이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여생원 하나가 다가왔다. 치맛자락 사이로 보이는 생원의 당혜 앞코에는 붉은 꽃과 나비가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미윤입니다. 차미윤.”
“예? 아, 그 여우 이름 말입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처음 보는 아이가 있어서 말을 걸었더니 알려주었습니다. 침소를 물었더니 난蘭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난은 제주의 침소인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그걸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이상하여 후에 누각에 가 양해를 구하고 명적을 보니, 당연하게도 미윤이라는 이름을 가진 생원은 저희 서당에 없었습니다.”
정한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일단 알겠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생원이 가자마자 정한은 손목을 살짝 까딱했다. 동시에 정한의 손바닥 위로 작은 구슬이 여러 개 쏟아져나왔다.
“이게 뭐예요?”
“자. 너도 하나 들고. 가자.”
석민의 손에도 하나 쥐여주자마자 석민의 손목을 잡고 달려 지수에게로 갔다. 저 멀리 보이는 지수에게 구슬 하나를 던져주자 바로 잡아채 익숙하다는 듯 귀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또 몸을 돌려 누각에 원우가 있는 곳으로 갔다. 시간이 급해 대충 누각 문을 열고 원우에게 던져주자 원우 또한 지수처럼 잘 받아 챘다. 수고해! 짧게 말을 건네주고는 재빨리 누각에서 내려왔다.
“너도 넣어. 넣었어?”
“그냥 귀에 넣어요...?”
“두 용의 수호를 받는, 금강초롱의 마법이지. 귀에 넣어봐.”
‘-윤 사형. 들려요?’
“왁, 뭐야!”
꽂자마자 들리는 원우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하고픈 말을 전할 상대를 생각하며 말하면 그 상대방에게 전달이 된다고 했다. 원우와 지수의 목소리가 번갈아 가며 들렸다.
‘어유, 귀 아프다.’
“미윤이래. 차미윤.”
‘그런 이름은 경주 서당에 없는데.’
“그새 명적을 외웠어? 당연히 없지. 몰래 들어왔을 테니까.”
사람들이 몰려있을 때 둔갑해서 들어왔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아니면 방법이 없다. 이야기를 끝내고 나서 석민이 귀에서 구슬을 빼내려고 하자 정한이 다시 귀에 집어넣었다.
“넣고 있어요?”
“네가 전달할 말을 생각하면 그 말만 전달이 되는 거야.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되도록 넣고 있어.”
“아아, 네.”
“일단 돌아가자. 좀 더 자고, 지수랑 교대해주게.”
아무래도 계속 입구 주변에만 있는 지수가 신경 쓰였나 보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어두워지고 달이 산을 넘어갈 때가 되자 서당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피곤해서 눈이 뻑뻑해지는데도 정신력으로 버텼다. 정한이 잠시 들러 잠을 잘 수 있도록 도왔지만, 한껏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탓에 눈이 감겨도 잠을 청하지는 못했다.
원우가 잠 올 때 먹으라며 쥐여준 공진단도 까서 먹은 지 꽤 오래되었다. 입안에 남은 쓴맛에 인상을 쓰며 슬쩍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는데 저 멀리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
“밤이 꽤 늦었습니다. 속히 침소로 돌아가시는 게....”
지수가 말을 하다 우뚝 멈춰 서서 그 생원을 쳐다보았다. 그 생원도 말없이 지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지수가 얕게 웃었다. 입꼬리가 곱게 올라가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침소가 없구나?”
“...아아...”
들켰네. 미윤이 아쉬운 표정으로 웃으며 천천히 지수에게로 다가왔다. 두 뼘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을 때, 미윤이 지수를 퍽 소리가 나게 밀치고 문을 열어 뛰쳐나갔다. 장벽도, 방어 마법도 전부 다 풀리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는데.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서당이 뚫렸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할 새도 없었다. 지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미윤을 따라잡으려고 달리기 시작했다.
“찾았어!”
‘사형. 지금 어디 있어요?’
“서당 밖. 쫓고 있으니까 나 좀 알아서 찾아!”
‘어? 야!’
당황한 원우와 정한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늦은 밤이라 일반들이 밖에 나돌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울퉁불퉁한 숲으로 들어가는 미윤을 따라 들어가 한참을 뒤쫓다, 결국 마구를 꺼내 들었다.
지수는 동백의 자제이다. 꽃 이름만 뱉어도 앞에서 머리를 조아릴 사람이 한양에 널렸음에도 지수는 티를 내기 싫다는 이유로 마반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한데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동백나무의 뿌리가 땅에서 솟아나 미윤의 발목을 옭아맸고, 미윤이 몸부림칠 때 지수가 미윤을 목을 잡고 나무로 몰아세웠다. 포획 마법이었다.
“간도 크네.”
“..."
“황룡이 곁에 있으니 아무도 못 건드리고 도망치려고? ...나와서 누굴, 또 해치려고.”
“...넌.. 날 해치지 못하네. 안 그래?”
“그걸 왜 단언하지?”
“날 죽일 수 있어? 잘도 숨기고 살았네. 동백 냄새를.”
미윤이 놀리듯 뱉는 말에 지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고, 심장이 빠르게 뛰고 식은땀이 흘렀다. 황룡의 수호를 받으면서 가장 먼저 들은 말이다. 항상 서당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신중해야 하고, 중립을 지키며, 상대의 감정에 동요하면 안 된다. 당연한 것임을 알지만 뜻대로 된 적이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 그러게. 아…. 아깝다. 안 들킬 줄 알았는데.”
미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캑캑거리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귀에 입꼬리가 걸릴 것처럼 웃으며 본인의 목을 조르고 있는 지수의 손목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잡았다.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하늘에서 떨어진 백호 아들 따위한테, 들키니... 자존심이 상하는데.”
크게 움찔했으나 동요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야 했다. 얕게 한숨을 뱉고 두 눈에 또렷하게 그를 담았다.
“지금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닐 텐데. 너, 지금 무슨 죄를 질렀는지 몰라?”
“몰라. 그래도, 백호 새끼가 날 못 알아보고 이틀을 버렸다고. 후에 자랑거리 삼을 수는 있겠네.”
미윤이 붙잡고 있는 지수의 손목에 힘이 들어가 점점 아려오기 시작했다. 하늘에 폭죽을 터트려 위치를 알리기 위해 마구를 꺼내 들었지만 미윤이 방해하는 바람에 저 뒤로 마구가 날아가 버렸다.
“지금 뭐 하는...!”
“하나만 더 달리면 열 개가 되는데, 날 막아?”
“생원을 보호하는 게 황룡의 일이야.”
“그 천한 놈 간! 내 건데. 내가 먹어야 하는데!!”
붉어진 얼굴에 곧 정신을 잃을 것 같은 표정으로도 꿋꿋이 말을 했다. 먹지 않고도 오랜 세월이 지나면 천호가 될 수 있다. 한참 전부터 천상과 지옥에서는 인간의 간을 빼 먹는 요괴에게 중벌을 내렸음에도, 간간이 빼먹는 여우들이 많았다. 미윤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한참을 실랑이하다 제 목을 짓누르는 지수의 손목을 긴 손톱으로 찍어댔다. 차마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옥죄던 손을 떼어내니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기에, 그 틈을 타 지수가 뒤로 날아간 마구를 집어 들고 하늘을 향해 백색 폭죽을 터트렸다. 혹여나 그사이에 미윤이 도망쳤을까 급히 몸을 돌리는 찰나에,
“야, 뭐야?”
휙, 시야가 뒤집혔다.
땅바닥에 지수의 뒤통수를 처박은 미윤이 그의 몸 위로 올라탔다.
“천인의 간이, 맛있긴 하나, 죽기 전에 백호 새끼의 간을 먹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
“수백 년을 살았는데 내가 곱게 죽을 것 같아? 잡혀가도 하나라도 더 죽이고 가야 분이 풀리지.”
얼굴을 향해 오는 날카로운 손톱에 재빨리 피하려고 했지만, 미윤이 올라타 몸을 누르고 있던 탓에 정확히 피하지 못하고 얼굴에 생채기가 생겼다.
“아, 씨발!”
“좀 가만히 있어!”
“너, 그러다가 진짜 불지옥에 처박힌다고!”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지옥 가서 뒤지는 건 똑같은데!”
미윤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황룡 도포 끈을 잡아 풀기 시작했다. 악에 받친 요괴는 힘을 제어하지 못한다. 지수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미윤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평소 옷고름과 세조대를 꽉 매고 다니는 지수였기에 미윤이 옷을 풀어내어 젖히는데도 꽤 시간이 걸렸다.
미윤이 지수가 입고 있던 황룡 도포의 옷고름과 세조대를 겨우 풀어냈을 때, 번쩍임과 함께 멀리 날아가 땅에 쳐박혔다.
“...빨리도 왔다.”
지수가 팔을 들어 올려 눈을 가렸다. 상처가 생긴 곳이 도포에 쓸려 따끔거렸다. 이윽고 들리는 생원들의 발걸음 소리에 지수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밭은 숨만 내쉬었다. 평소였다면 옷이 흐트러지는 것이 싫어 진작 옷을 여몄겠지만, 온몸에 진이 빠져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빌레라
端午(二), 악귀와 병마를 쫓아야 한다
묘시卯時가 되니 저절로 눈이 떠졌다. 제 곁에 딱 달라붙어 자는 민규에게 제 이불도 덮어주었다. 밤늦게 들어왔을 때는 정한도, 민규도 없었는데 늦게라도 들어와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멀찍이 떨어져 홀로 자는 정한을 깨워 서낭당 아래로 향했다. 평소보다도 더 피곤해 보이는 느낌이 들어, 그냥 들어가서 자라며 말려보았으나 정한은 끝까지 도와주겠다며 비척비척 중앙으로 걸어갔다.
수십 번 연습했던 것인데도 긴장이 되어 도포 자락을 꽉 쥔 채로 하나둘 예행연습을 하던 중, 언제 왔는지 지수가 곁에서 큰 종이 묶음을 건네주었다.
“뭐야?”
“....벽보. 어제까지 있었던 일들. 침소마다 붙여야 하는데, 네가 마지막 검사야.”
“이게 뭔, 야.”
“....”
“너.. 얼굴이 왜 그래.”
승철의 말에도 지수는 말없이 묶음을 내밀기만 했다. 얇게 말려 있는 두루마리 중 붉은색 끈으로 묶인 것을 풀어 펼쳐보았다.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내리던 승철의 얼굴이 굳어갔다. 이거 진짜야? 지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구미호는 천인의 간을 특식으로 여긴다. 여우가 서당 내에 있는 것 같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서당 내에는 총 일곱 명의 천인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제외하고 다른 황룡들이 천인들을 주시함과 동시에 여우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열나흘에 여우가 잡혀 사건이 처리되었으므로, 이 글을 올림으로써 알린다.
승철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다시 두루마리를 묶어 건네주었다.
“벽에 붙이고 올게.”
“...그래. 일단은 알려야 하니까.”
승철의 말에, 정한이 네 개의 종이들을 건네받아 떠났다. 말도 없이 일을 처리한 것이 내심 속상하면서도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어서 별말을 안 하는 것 같았다. 그릇과 과일들을 다 올려두고 확인마저 다 끝낸 후에도 별다른 말이 없자, 슬쩍 눈치를 보던 지수도 아무 말 없이 승철에 곁에 서 있기만 했다.
“나중에 알려줄 거지?”
“응. 당연하지. 지금은 이거나 집중해.”
지수가 승철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말 다 해주고 어떻게 집중하라고..! 승철이 머리를 헤집으며 주저앉았지만, 지수는 옆에 서서 웃을 뿐이었다.
-...이상으로 단오제 행사를 모두 마칩니다.
승철을 마지막으로 누리달 열닷새 조전제까지 끝이 났다. 전날까지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각 침소 앞에 붙여두었고, 마지막 날이라는 이유로 모든 생원이 조전제에 나오면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신과 황룡 일부를 제외하면 다른 생원들, 심지어 승철과 순영마저도 다 뒤늦게 안 상황이었음에도 승철은 현재 제관을 맡아 조전제를 지낸 마지막 생원이었기 때문에 황룡 생원들을 대표하여 다시 한번 일을 알리고 사과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난 뒤, 단오 행사를 완전히 마무리했다. 주변에 서 있던 생원들도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려 휘청거릴 뻔한 것을 지수가 잡아주며 입에는 정과를 물려주었다.
“고생했어.”
“엉…. 이제 가서 좀 자야겠다.”
“그래. 수고 많았어.”
저와 순영 몰래 다른 황룡들이 도맡아서 요괴를 잡아냈다는 것을 아침 일찍이 온통 긴장한 상태에서 들었을 테니,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지수는 터덜터덜 동쪽으로 가는 승철의 뒷모습을 보다, 다른 생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떠들썩하게 웃는 석민의 곁에 슬그머니 다가갔다.
“어! 사형! 사형도 같이 갈래요?”
“어딜?”
“몰래 반촌에 가서 아침을 먹을까 싶어요!”
몰래 맞아? 지수의 말에 석민이 목소리가 너무 컸나요? 하며 크게 웃었다.
“난 안 갈래. 그냥 올 때 생각나면 절편이나 좀 사줘.”
“알겠습니다. 쉬세요! 고생 많았어요.”
네다섯 명이 모여서 돌아다니는 것이 꽤 올망졸망하고 귀여웠다. 무엇을 먹을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것을 보다, 조용히 빠져나왔다.
팔자 좋네.
눈을 뜨니 제 앞에는 정한의 얼굴이 있었다. 머리맡에서 내려다보는 것 때문인지 시야가 뒤집힌 것 같았다.
“...”
“안팎으로 난리가 났었는데, 백호 수장이라는 것이 여기서 자고 있으면 어떡해?”
“...누가 듣겠다.”
“너 지금 백호 상태인 건 알고? 다른 애들이 봤으면 어떡하려고.”
정한이 지수의 허연 머리털을 헝클었다. 지수는 다급히 외형을 바꾸고 얕게 한숨을 뱉으며 일어났다.
“그래도 들어올 땐 나비로 둔갑하고 몰래 왔어.”
“거짓말.”
“진짠데. 그리고 둔갑 안 했어도, 일 때문에 텃밭에 들어가는 줄 알았겠지.”
“밥은? 안 먹었지?”
지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한이 지수의 목덜미 옷깃을 잡고 쭈욱 잡아당겼다.
“너는? 애들이랑 안 나갔어?”
“조전제 도중에 일이 있어서 누각에 갔다 오니까 조전제가 끝났더만.”
“응... 승철이는 실수 없이 끝냈어. 역시 잘 하더라.”
“끝나고 만났어. 최승철이 자러 간다고 했는데, 곁에 네가 없길래 찾아다녔지.”
그럼 너도 안 먹었다는 말이네? 정한은 지수에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지수에게 왜 이렇게 다들 굶고 다니냐며, 황룡이 이렇게 맥이 없으니 요괴가 굴러들어온다며 툴툴거리며 질질 끌고 청룡 침소로 향했다.
“나 지금 어디 가?”
“나랑 밥 먹으러! 좀 일어나, 미친놈아. 너 진짜 무거워. 너 밥 먹이고 얼굴에 약도 발라야 해.”
“오-. 순영이가 너한테 시켰어?”
“어. 계속 부탁하더라. 알면 좀 빨리 가자.”
힘없이 끌려가도록 두었던 발을 그제야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수가 걷기 시작하자 잡고 있던 옷자락을 놓고 냅다 달렸다. 늦게 오는 사람이 소반 들기! 앞서가는 정한을 따라잡기 위해, 지수도 온 힘을 다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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