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오(1)
재액을 예방하고 풍요와 안정을 기원하며
누리달 열하루
현무에서 백호로 짐을 옮기는 생원들로 아침부터 침소 밖이 소란스러웠다. 한솔은 도포를 대충 걸쳐 입고 앞길을 여미지도 않은 채로 백호 침소를 나섰다. 그다지 쓸 데도 없을 것 같아 마구도 장롱 안에 넣어두고, 정말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로 무작정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백호에서 주작을 지나 청룡까지 혼자 살랑살랑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돌아다녔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을 때, 무예를 하는 생원들이 드나들던 정낭이 눈에 보였다. 앞에서 기웃거리며 정낭의 나무 기둥을 매만지다가, 뭐 하냐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로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끼긱거리며 고장이 난 듯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준휘와 승철이었다.
“뭐해?”
“아…. 그냥 궁금해서 보고 있었어요.”
“들어가자!”
“…에?”
들어가려던 것 아니었어? 준휘가 한솔의 팔을 붙잡고 끌어올렸다. 엉거주춤 일어나는 한솔이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승철은 웃으며 준휘가 정낭 너머로 한솔을 들여보내는 것을 도왔다.
얼떨결에 무예를 하는 곳에 함께 들어와 버린 한솔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넓은 공간에 셋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돌담에 무예 자세를 그려놓은 그림들이 신기해 한참 동안 멍하니 둘러보다가, 뒤늦게 승철의 손에 들려있는 화채를 발견했다.
"그건 뭐예요?”
“이거? 앵두화채."
할 일도 없을 테니 같이 먹자는 준휘에 한솔이 홀린 듯 화채가 담긴 그릇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주에도 황룡 같은 것이 있어요?”
“당연하지. 신이라고 한다. 믿을 신.”
“...그냥 신이요?”
“우리도 황룡을 황룡이라 부르잖아.”
준휘가 소맷자락에서 꺼낸 마구로 바닥에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적었다. 준휘의 말에 의하면, 경주는 신의 뒷부분에 수놓은 것들을 보고 침소를 구분할 수 있다. 남생원은 태사혜, 여생원은 당혜를 신고, 의와 지에는 여생원이, 인과 예에는 남생원이 배정되어 있다.
“인은 푸른색, 의는 붉은색, 예는 적갈색, 지는 황색. 그 색으로 아무거나 수를 놓을 수 있어.”
“아무거나…?”
“꽃을 새겨도 되고, 나무를 심어도 되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는 한솔에 승철이 말을 덧붙였다.
“당혜나 태사혜 뒷부분 가죽에 실로 마음껏 뜨면 돼.”
“아...! 대충 이해했어요. 그럼 신信은 어떻게 알아차려요?”
“내일부터 우리 서당 안에 경주 생원들이 돌아다닐 거야.”
“맞아. 그때 신의 뒤꿈치를 정-말 자세히 보면 돼.”
준휘의 말에 한솔이 괜히 자신의 태사혜 뒷부분을 쳐다보았다. 승철은 웃으며 화채를 한 숟갈 떠먹고 말을 이었다.
“아마 신信들이 신고 있는 것에는 나비가 새겨져 있을 거야.”
“...나비?”
“신信뿐만 아니라 한양의 황룡과 제주의 송松의 뒤편에도 나비가 새겨져 있지.”
“정말이에요?”
“본 적 없어? 네 침소에 황룡이 둘씩이나 있는데. 죽은 영혼이 나비에 잘 들어간다는 말이 있거든. 이전에 서당을 떠난 영혼들을 모시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생원들만 나비를 새길 수 있어.”
“제사를 지내는 생원들. 그게, 황룡의 일이잖아.”
“맞아. 그리고, 황룡이나 신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승철의 말에 한솔이 기억을 더듬었지만 남의 신을 신경 써서 보는 편이 아니었기에 알 수가 없었다. 때마침 한솔의 눈에 그들의 태사혜가 들어왔다. 준휘의 태사혜는 입고 있는 도포와 어울리게 붉은색 꽃이 새겨져 있었다.
“사형, 사형 신에는 왜 꽃이 있어요?”
“...이거?”
준휘가 제 발을 가리켰다. 한솔이 고개를 끄덕이자, 준휘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웃을 뿐이었다. 그러게. 누가 날 좋아하나 보다! 준휘가 밝게 웃으며 말했지만 사레가 들렸는지 기침을 해대는 승철 덕분에 뒷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
“아, 모르나? 태사혜 뒷부분이 헝겊으로 되어 있잖아.”
준휘의 말에 한솔이 태사혜를 슬쩍 만져보더니 아, 하고 깨닫는 소리를 냈다.
“예전부터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신 한 짝을 들고 가서 신 뒤쪽에 꽃 자수를 새겨. 그리고 그걸 새긴 사람은 자신의 도포나 저고리 소매 안쪽에 똑같은 꽃을 새기는 거야.”
“만약에 누군가 제 태사혜에 자수를 놓아도 누가 한 것인지 어떻게 알아요? 소매 안이면 보이지도 않을 텐데….”
“모르지, 너는. 우연히 발견하면 몰라도. 그냥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 알 수 있는 거지.”
좋아한다고 무작정 밀어붙이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목을 매만지며 말하는 승철에, 한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좋아하는 사람의 신에, 내 소매에도 새겨진 것과 같은 꽃이 새겨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용기 있는 일을 한 것이니까.
“민규 태사혜 뒤에 보면, 완전 꽃밭이야.”
“…왜요?”
항상 명호와 꽃밭에 있는 모습을 본 한솔이라 쉽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신 좀 제대로 보고 다닐 걸 그랬나 싶은 한솔이었다.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떠오르지 않았다.
“항상 다른 서당 생원들이 오면 첫날 민규 태사혜가 없어져. 마지막 날에 민규 손으로 들어오던데?”
“아, 여자 생원께서 하시는...?”
“모르지. 마반끼리는 동성이어도 혼인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너도 간수 잘해야겠다. 앵두를 씹으며 말하는 준휘의 뜻을 뒤늦게 이해한 한솔은 부끄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기만 했다.
화채를 다 먹고 잔디 위로 내려놓았지만 말은 끊이지 않았다. 달이 뜰 때까지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다음 날 많은 생원이 오기 때문에 어서 침소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에 부랴부랴 그릇을 들고 일어났다.
한솔은, 승철의 소맷자락에 있는 붉은 꽃을 끝까지 보지 못했다.
원우와 민규는 떠다니는 등롱을 다 잡아서 내려둔 후에, 단오제 동안 떠다닐 풍등을 하늘에 올려둘 수 있도록 마법을 거는 일을 하고 있었다. 민규가 등롱을 잡아서 정리할 동안 원우가 풍등을 펼쳐 다시 띄우는 것을 반복했다.
“괜찮겠어?”
“뭐가.”
“경주 생원들한테 업혀 들어오는 혼이 있으면 어떡해?”
“괜찮아. 나는 되도록 계속 침소에 있을 생각이니까….”
그러면 더 안 좋을 텐데... 민규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음기가 강한 현무와 백호가 함께 있는 곳이다. 항상 넘치는 음기 때문에 혼이 꼬이는 원우에게 안전할 리가 없었다.
“차라리 밖에 나와 있을래? 나랑 같이 있자.”
“...넌 청룡 애들이랑 있을 거잖아. 양기가 흘러넘치니 혼이 꼬이지는 않겠네.”
“아니이…. 그냥 내 옆에 있으면 안 돼?”
혼을 보는 게 익숙했기에 웬만하면 놀라지도 않는 원우였고, 분명 그것을 알 텐데 민규가 답지 않게 매달렸다. 어릴 때 붙은 정이 쉽게 떨어질 리가 없지. 이런 민규를 약 15년째 보고 있는데, 유독 올해가 심한 것 같았다.
“아이도 아니고, 왜 이렇게 날 못 잡아두어서 안달이야?”
원우가 언짢은 표정으로 풍등을 펼치며 물었다.
“걱정되니까 그렇지. 돌아다니는 것이 싫으면 우리 침소에 와서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
원우가 다시 풍등을 띄우며 말했다. 민규는 나름대로 걱정을 한 것인데 표정을 굳히고 물은 것이 괜히 미안해져 시선을 민규에게로 돌리지 않고 바닥으로 고정한 채로 마저 일했다. 슬쩍슬쩍 눈치를 보던 민규도 한숨을 쉬고 하늘에 있는 등롱을 거두었다.
“...이거.”
“응?”
“부관不觀…. 걸어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부관不觀 외부에서는 내부를 볼 수 없도록 하고, 함부로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도록 방어결계를 걸어두는 마법.
원우의 말에 민규가 소맷자락에서 정한이 준 종이를 꺼내 펼쳐보았다. 훑어본 민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 해. 정한 사형이 살짝 걸어두긴 했는데 금방 없어지나 봐.”
“아…. 근데 우리 이거, 아직 안 배웠어.”
“할 줄 몰라? 형 알잖아.”
이미 마구를 손에 쥐었으면서도 아무 말 없이 민규를 쳐다보는 원우였다. 어렸을 때부터 일을 치르기 전에 민규를 보며 짓는 표정이었다. 사고를 치고 나서도 민규를 믿는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원우 때문에 민규는 항상 뒤처리를 해주었다. 서당에서 배우지 않은 마법을 사용하다 걸리면 벌을 받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부관은 3년 동지에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원우와 민규는 당연히 쓸 수 없었다. 서당에 들어오기 전에 홍월천에서 기본적인 마법은 다 배우고 들어온 둘이기에 손에 쥔 마구를 휘두르기만 하면 정한이 걸어둔 것보다 몇 배는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었지만, 벌은 받기 싫은지 아까 살짝 언쟁이 오고 간 것은 잊고 빤히 쳐다보는 원우에 민규가 항상 그랬듯 입을 열었다.
*홍월천(弘月川) 큰 달이 붉은 비단 같은 넓은 강을 통해 떠오르는 곳. 마반인들 중 부유한 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
“내가 알아서 할게. 됐지?”
어차피 박사는 단오제에 직접적인 관여를 못 하거니와, 본인이 벌을 주는 황룡에 들어가 있음에도 아무것도 아닌 민규의 말 한마디에 눈을 맑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규는 그런 원우를 보며 얕게 한숨을 쉬고는 하늘로 마구를 높게 들어 올렸다. 조금씩 마법을 걸 때마다 옆에서 되도 않는 감탄사를 뱉는 원우에 민규가 칭얼거렸지만, 원우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원우의 눈에 성내는 민규는, 그저 어린 청룡일 뿐이었다.
“잘하네. 김민규.”
“흥. 당연하지, 이 정도는.”
하늘이 반짝이며 떠 있는 풍등들이 흔들거리는 것을 보고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민규가 마구를 소매 속으로 집어넣었다.
얘들아! 찬아, 승관아! 문밖으로 들리는 정한의 목소리에 찬이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정한은 각각 사과와 배가 담긴 유기를 들고 있었다. 그 옆에 검은 도포를 입은 지훈도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마지막 준비. 이거 좀 받아줘.”
마땅히 할 일도 없는 찬이 쭈뼛쭈뼛 정한의 곁에 앉았다. 오가며 지훈을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지훈이 낯을 꽤 가리는 편이라 들어 선뜻 말을 걸지는 못했다. 상 앞에 앉아서는 야무지게 과일을 깎는 둘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아. 내일은 밖에 나돌지 마. 서당 출입문이 열리긴 하는데 저잣거리 나돌다가 못 들어오는 수가 있으니까.”
“문을 왜 열어둬요?”
“인시寅時부터 유시酉時까지 총 8번에 걸쳐서 경주 생원들이 들어오니까.”
“여생원부터 들어올 텐데. 같이 가볼래?”
장난스레 웃으면서 묻는 정한에 찬이 손사래를 쳤다. 그럴 줄 알았다며 내일은 생원들로 혼잡할 테니 되도록 나가지 말고 침소에 있으라고 거듭 당부했다.
“답답해서 나가고 싶으면 조용히 백호에 가고, 다른 곳은 가지 마. 현무에는 여생원들이, 주작에는 남생원들이 경숙할 곳이니 들어가면 안 돼.”
항상 단오제에 관해 물어보면 제대로 된 것은 대답해 주지 않고 겪어보면 안다고 하던 사형들 때문에 찬은 하나하나 다 귀담아듣기에 바빴다.
누리달 열이틀
인시부터 생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온 여자 생원들이 현무 침소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느라 혼란을 막기 위해 다른 한양 생원들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얼핏 창밖을 보았을 때는 오색 빛의 저고리와 한복을 입은 생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웃음소리가 서당 내에 들리기 시작했고, 승철과 정한은 그것을 듣고 경주 생원들에게 나눠 줄 수리취떡과 앵두화채를 준비하러 떠났다. 해가 뜨기 시작하는 시간이었지만 풍등이 밝게 빛나서 어둡지 않았다. 경주 생원 중 일부는 지치지도 않는지 서낭당 주변을 배회하며 돌아다녔다.
점심쯤 되어서는 남자 생원들도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누가 보아도 혼잡스러운 밖을 그저 방에서만 쳐다보던 승관과 찬은, 마땅히 할 것이 없어, 하지 시험공부를 하고자 책을 펼쳤지만 금세 시끄러워지는 것을 들으며 나란히 엎어져 잠자리에 들었다.
한참 후에 정한이 앵두화채를 먹으라며 깨우자 비척비척 일어나 먹고는 뒷정리를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정한은 그런 둘을 보고는 아직 아기 같다며 신기해했고, 민규는 항상 그래왔다며 웃어넘겼다.
나빌레라
端午(一), 재액을 예방하고 풍요와 안정을 기원하며
누리달 열사흘
“왜 계속 부관이 깨지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외부에서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하는 마법은 제대로 이루어졌다. 외부인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방어 마법은 계속해서 유지하지 못하고 깨지기만 했다. 마구에 손상이 생긴 것 아니야? 정한의 말에 원우가 손에 들린 마구를 만지작거렸다. 손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깔끔했다.
“매끈한데.... 그리고 민규와 함께 걸었기에 풀릴 이유가 없는걸요.”
“그건 그렇지. 너희 둘이면 절대 안 깨질 텐데…. 내가 한번 해볼까?”
“...네. 그런데, 사형이 하시는 것마저 실패하면 어떡하죠?”
“결계를 못 두는 것이지. 뭐, 별수 있나? 장벽이라도 세워야지.”
정한이 허공에 마구를 휘둘렀지만 잠시 큰 구형으로 하늘이 반짝일 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어, 진짜 큰일 났다. 왜 이래? 정한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일단은 귀명鬼明 박사께 알리는 것이….”
“아냐. 일단 상황을 두고 보자.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아까 얼핏 당황한 표정을 보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또다시 여유로웠다. 원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멍하니 마구를 매만지다가, 정한을 따라 누각으로 돌아갔다.
“한솔아!”
낯선 생원의 목소리에 한솔이 눈을 번쩍 떴다. 졸린다는 생각을 할 새도 없이 눈앞에 있는 명호의 얼굴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버렸다.
“일어나. 진시辰時가 되면 제사를 올리러 가야 해. 준비할 시간이 얼마 없어.”
옆에서 준비하던 지수가 장롱에서 백색 도포를 꺼내어 주었다. 지수가 입은 황룡 정복은 창문을 넘어 들어온 햇살 덕분인지 오늘따라 도포가 더 밝게 빛나는 것 같았다. 제 도포를 건네받은 한솔이 영문을 모르고 멍하니 앉아만 있자 명호가 어깨를 토닥였다.
“정방에 가서 세안하고 오자. 삼각三刻 정도 남았어. 얼른!”
달래는 것이 익숙한 듯 명호가 한솔을 일으켰다. 한솔이 이 침소에서 유일한 1년 생원이었기 때문에 늦게까지 잘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준 것 같았다.
어영부영 태사혜를 끌고 밖을 나가보니, 전날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명륜당 너머로 보이는 서낭당 아래에는 제사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평소보다 많은 생원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순영은 한솔이 눈을 떴을 때부터 방에 없었고, 다시 침소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지수와 지훈도 나간 후였다. 곧이어 원우도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빨리 왔구나? 얼른 도포 챙겨 입고, 서낭당 아래로 가자.”
“예…. 다른 사형들은 어디 가셨어요?”
“나가면서 이야기하자. 일찍이 가두는 것이 좋아.”
도포에 팔만 겨우 끼워 넣은 한솔의 손에 호패를 챙겨주었다. 먼저 가겠다며 원우에게 말을 전한 후 침소에서 나와 서낭당으로 향했다.
“사흘 동안 단오제를 하잖아. 아침마다 제사를 올린다는 것은 알고?”
“네. 조전제라 한다고 들었어요.”
“맞아. 조전제를 하는 동안 4년 황룡들이 제관을 맡아 하루씩 제사를 올려.”
“...4년 황룡은 넷이잖아요.”
한솔의 말에 명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해 들은 바로는 현무 4년 황룡이 부득이하게 빠지게 되어 현재 서당에 없다고 했다.
“그럼, 오늘은 누가 해요?”
“오늘은 윤정한 사형이, 내일은 홍지수 사형이, 모레는 최승철 사형이 할 거야.”
“...고생이 많으시네요.”
약 두 달 전에 춘분 시험이 끝나고 나서부터, 잠을 아껴가면서까지 단오제 준비를 하던 둘을 가장 가까이서 보았다. 분명 엊그제 밤에 지수가 지친 표정으로 이제 다 했다고 했는데, 여전히 할 일이 남아있었다.
“아직 많이 남았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명호가 한솔의 옷매무새를 다시 정돈해 주었다. 어찌 보면 신께 인사를 올리는 것이니,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조전제가 끝나고 보자며 어깨를 토닥이고는 저 멀리 현무 2년 생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혼자 남게 된 한솔은 서낭당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서서 황룡과 경주의 신이 제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분주하게 움직이면서도 우왕좌왕하지 않고 착실하게 제 일을 해내고 있었다. 뒤늦게 나온 승관과 찬이 무엇을 그렇게 넋 놓고 보냐고 물어도, 한솔은 저래야 황룡을 할 수 있냐며 멍하니 황룡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제례는 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황룡과 경주 신들을 제외하면 다른 생원들은 딱히 하는 것도 없었지만, 오색 천으로 둘러싸인 큰 서낭당의 분위기에 압도되어서 그런지 꽤 경건한 마음으로 서 있었다. 길었던 제례가 끝이 난 후에 생원들이 신주新酒와 정과正果를 건네주기에 한솔은 그것을 받아들고 침소로 돌아갔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에, 풍등도 함께 휘날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순영과 함께 걷던 지수가 제 옆에 따라 오는 느낌이 들지 않아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 왜 갑자기 멈추는...”
“순영이 너랑 이렇게 걷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낯설다.”
“...한창 바빴으니까요. 여태 못 걸었던 것들, 오늘 다 걸어야 해요.”
세상에. 다리 닳는 것 아니야? 지수가 밝게 웃으면서 걸음을 빨리했다. 순영의 옆에 서자, 다시 걸음을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음악, 지훈이가 맞춘 건가?”
“네. 틈틈이 가서 맞추는 것을 봤어요.”
“역시 좋다…. 너는 그때 무예를 하고?”
“거의 그런 식으로 했죠. 틈이 나면 무예를 하러 갔으니까요. 이번이 워낙 바빴어서..”
“내일도 계속 연주하려나?”
“아마 하지 않을까요? 내일은 아마 정오가 지나서 틀 거예요.”
“아! 너희, 내일 무예 하는구나.”
“네. 보러... 올거죠?”
“당연히 가야지! 얼마나 기다렸는데.”
애써 덤덤한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괜한 쑥스러움에 빨라지는 걸음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것을 지수가 못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부끄럽냐며 순영의 걸음걸이 속도에 맞춰 다가오는 지수에, 괜히 오기가 생겨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귀 붉어졌는데! 지수가 뒤에서 목소리를 키워도 순영은 멈추지 않았다. 서낭당 주변으로 크게 한 번 돌고 난 후에, 숨이 차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덩달아 뒤따라온 지수도 곁에 앉았다.
“하……. 숨차다.”
“...저도요.”
“급한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가야지. 어떻게 준비한 건데.”
그 말에, 순영은 또 뭐가 좋은지 베시시 웃으며 지수의 어깨에 기대었다. 지수는 이렇게 여유로운 것도 오랜만이라며, 기울어 오는 순영의 몸을 가만히 받아주었다. 간간이 별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지만, 부관이 걸려 있으면 별은 볼 수 없기 때문에 지수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애써 무시했다.
“내일은 내가 제관이라, 제사를 지낼 때는 같이 못 있을 거야.”
“아. 그렇네요.. 오늘 윤 사형처럼 움직여야 할 테니.”
“응. 그리고 넌 무예로 바쁠 테니까, 아마 제사 끝나고 보겠다.”
“정과 좀 많이 챙겨와주세요. 한솔이도 정과를 꽤 좋아더라고요.”
“알지. 우리 호랑이들…. 나 아니면 누가 먹여 살려.”
순영이 웃으면서 하는 말에, 지수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는 순영을 호랑이라고 불렀다. 아는 이 하나 없고 친우 하나 없는 백호 침소에서 유일하게 아끼는 동생이었기에 더 그러했다.
순영도 그 호칭을 좋아했다. 항상 호랑이라고 불러주던 것이 버릇되어 한솔이 들어오고도 숨기지 않았다. 지수는 한솔도 호랑이라고 불렀다. 아기 호랑이. 순영보다 늦게 태어났으니까. 물론 한솔은 입재한 후 한동안 지수를 자주 보지 못했고, 제가 아기 호랑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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