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망종

반딧불이가 나타나고 매화가 열매를 맺는다

현재 by 반야

 

누각 아래 벽보에는 누리달 열사흘부터 열닷새까지 단오제가 열릴 것이라는 공지가 붙었다. 전부터 일했던 황룡들은 물론이고 무예와 회화, 그리고 정악을 하는 생원들마저도 바쁘게 움직였다. 많은 생원이 단오제 준비로 인해 수업에 빠지게 되었고 자연스레 여러 학년의 생원이 듣는 수업이 취소되기 시작했다. 오로지 황룡의 계획대로 수행되는 단오제였기 때문에 박사들은 별말 없이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수업을 들으러 들어오자마자 취소 소식을 듣게 되면 신이 나 명륜당을 박차고 나가는 대부분의 생원과 다르게 1년 생원들은 항상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넋 놓고 허공만 바라보았다.

 

푸른달 스무아흐레

“통감과 곡조는 단오제 전까지 수업을 하지 않습니다!”

지각할까 싶어 힘차게 달려온 찬이 허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1년 생원 중 가장 오랜 시간 책방에 머무르는 것으로 유명한 찬이었지만 대낮부터 배우지도 못한 것들을 펼쳐 볼 마음은 없었다. 툭툭 명륜당에 기대어 애꿎은 돌만 차댔다. 승관은 한솔과 함께 찬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서책으로 부채질할 뿐이었다. 주어진 자유에 마땅히 할 일이 생각나질 않았다.

“할 일 있어?”

대뜸 묻는 말에, 찬은 한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승관 또한 마찬가지였다.

“없지.. 너 데리고 책방에 가려니 미안해서 고민 중이었어.”

“그럼 책 말고 꽃은 어때?”

“오! 나쁘지 않지.”

그제야 한솔이 꽃밭에 대해 승관과 찬에게 전해 듣기만 했을 뿐 직접 가본 적이 없다는 걸 기억해 냈다. 지금 가면 민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승관의 말을 들으며 꽃밭으로 향했다.

 

한솔이 무거운 서책들을 침소에 두고 가자며 백호로 들어갔고, 함께 갈 수 없던 승관과 찬은 한솔에게 서책만 맡기고는 잠시 햇빛을 피하고자 처마 아래로 들어갔다.

더위에 지친 둘은 벽에 기대어 아무 말 없이 기다리며 종이를 한가득 들고 돌아다니는 황룡이 보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꼴이 어찌 보면 안쓰럽기도 했다.

“힘드시지 않을까? 저렇게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 피곤하실 텐데.”

“...전할 사항이 많으신가 보네.”

“와, 저분은 모시 도포도 아니야.”

“덥겠다.. 해가 지려면 한참 남았는데.”

정한 사형도 춘분 도포를 입고 다니시나? 찬의 질문에 승관이 고개를 저었다. 며칠 전 새벽에 장롱에서 꺼내 입는 것을 잠결에 봤어. 승관의 말에 찬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정한 사형도 더운 걸 싫어하시니까. 괜한 것을 걱정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게. 어! 한솔이 왔다.”

다가오는 한솔을 보며 다시 처마 밖으로 벗어났다. 몇 발짝 움직이지도 않았을 때, 찬의 콧잔등 위로 곱게 접힌 종이가 떨어졌다. 아프지 않게 콧등을 두드리고 발등 위로 떨어진 종이를 집어 들었다.

“나비인 줄 알았네.”

“뭐야?”

한솔이 찬 대신 종이를 펴보았다.

“...사유서 내라는데?”

“그게 뭐야?”

“나라고 알겠나.... 처음 보는 건데?”

민규에게 물어보자며 찬이 다시 종이를 곱게 접고 소맷자락 속으로 집어넣었다.

 

얼마 전 찬이 민규에게 눈치를 보며 꽃밭에 한 명만 더 데리고 오면 안 되냐며 겨우 빌었기에 가능했다. 지수와 순영과 같은 침소에서 지내는 생원이라는 말을 듣고는 민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일을 위해 유지되는 공간이라, 이곳을 아는 생원도 적으므로 한솔에게도 이 공간이 누설되면 안 된다고 재차 강조하고 꽃밭으로 들어갔다.

백호 침소 뒤에 있는 것인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한솔에, 승관은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 꽃밭 전체에 지수 사형이랑 민규 사형이 마법을 걸어두었대. 그래서 입구조차도 잘 보이지 않는대. 잠시나마 생겼던 의문마저 해소시켜준 뒤, 곧장 버드나무 앞으로 달려가 주렁주렁 땅까지 내려온 잎들을 걷어냈다.

한솔은 예상치도 못한 광경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낮은 화단에 꽃무릇이 피어 있었고, 가장자리에 심어진 나무에는 목련이 활짝 만개한 상태였다.

“사형!”

“엉? 호랑이도 왔네. 얘가, 그 애야?”

“네. 오늘 마땅히 할 일이 없어 같이 왔어요.”

한솔이 인사하자 민규는 천연스럽게 받아주고는 편히 쉬다 가라고 말했다. 찬이 우물쭈물 민규에게 다가가자 고개를 들고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사형. 사유서가 뭐예요?”

“그걸 벌써 쓸 때가 되었나?”

“….”

“명확한 사유가 있으면 잠시 밖에 나가서 자고 들어올 수 있어. 곧 망종이잖아. 모도 심고 보리도 베어야 하니까, 사유서를 제출하고 잠시 집에 다녀 오는 것이지.”

“셋이 아침부터 함께 있었는데 저한테만 왔어요.”

“너는 일반인이니 그렇지. 일반 양인이라며. 승관이는 제주에서 온 마반인이고.”

너희도 농사 안 짓지? 민규의 질문에 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랑이, 넌?”

“아, 저는 양반인이에요. 양친이 지주이긴 한데 상인이어서….”

“응. 들었지? 너희 중 농사를 짓고 사는 집안은 네가 유일해서 너에게만 온 거야.”

사유서에 나가야 할 이유를 써서 제출하면 황룡이 판단하여 보내준다고 했다. 민규가 가만히 찬을 보다, 그의 손목을 붙잡고 일어서며 승관과 한솔에게 말했다.

“찬이 너는 나랑 사유서 쓰러 가자. 늦게 내면 너 못 나가.”

“아, 그럼 저희는 여기에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갈게요!”

“그래. 등롱 꺼지기 전에 들어오고.”

민규가 찬을 데리고 꽃밭을 빠져나와 누각으로 갔다. 누각 아래에는 많은 생원이 모여있었다. 전부 종이와 붓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니, 사유서를 쓰기 위해 모인 것 같았다. 생원들 사이에서 황색 도포를 입고 있는 생원에게로 다가갔다.

“최 사형! 안 더워요?”

“일이 많아서 환복도 못 하고 버텼다. 오늘 갈아입어야지.”

“저희 침소 막내가 필요해서 그런데, 사유서 한 장만 주세요.”

그제야 민규의 뒤에 있는 찬을 발견한 승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장 내주었다. 쓸 줄 알지? 승철의 말에 민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하십쇼. 일이 심히 많은 것 같아 길게 말을 못 하겠네요.”

“언뜻 봐도 그렇게 느껴지지? 정한이가 있었으면 난리가 났을 거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승철에, 민규와 찬은 그저 웃었다.

 

종이를 돌돌 말아 손에 꼭 쥐고 명륜당으로 향했다. 한산한 곳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종이를 펼쳤다. 살짝 위로 뜨는 종이 위에 벼루를 얹고는 먹을 들며 찬을 쳐다보았다.

“일단 너는 지금 써야 하는 것이 맞는데……. 생각해 보니 예로 보여줄 것이 없네.”

고개를 쭉 빼내 주변을 살펴보더니 벌떡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찬이 어정쩡하게 붓을 잡고 두리번거리니, 민규가 석민을 데리고 가까이 오고 있었다.

“사유서 쓰는 법 좀 알려줘.”

“너 모르냐?”

“알긴 아는데…. 나는 한문으로만 써서 감이 안 와. 우리 침소에 망종 사유서를 쓰는 생원은 없었잖아.”

부탁 좀 할게. 민규의 말에 석민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승관이는?”

“그 아이는 제주에서 와서 제외된 것 같아.”

“아…. 멀어서 그렇구나.”

석민이 찬에게 하나하나 알려주는 동안 할 일이 없어진 민규는 석민의 옆에 따라와 앉은 준휘를 보았다. 준휘의 손에는 곱게 접힌 종이 두 개가 있었다.

“사형도 나갈 거예요? 어쩐지 승철 사형 옆에 없더라.”

“반출로 나가서 돌아다니다 오게.”

*반출(半出) 아침에 나가서 12시간 후에 돌아오는 것.

*주출(週出) 나간 날을 기준으로 일주일 후에 돌아오는 것.

“사유서에 뭐라고 적었어요?”

“...석민이 일 도와주러 간다고.”

이번에 사유서를 확인하는 황룡이 승철과 지수였기에 가능할 것이라며 웃었다. 평소라면 무예를 할 시기라 나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지만, 수장인 순영이 어머니를 돕는다는 이유로 자리를 비우기에 한동안 무예를 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너는 안 나가? 준휘의 물음에 민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마땅히 나갈 이유가 없어요. 누가 부르는 것도 아니고….”

“승철 사형도 서당에 있겠대.”

“안 나간대요?”

민규와 준휘의 말에 석민이 대뜸 끼어들었다. 어느 정도 정리된 사유서를 보는 민규에게 석민은 재차 물었다.

“승철 사형 여기에 계신다고?”

“어.”

“왜? 나한테는 가도 된다고 하셨는데……. 일이 많이 남으셨나?”

석민은 항상 저보다 다른 황룡들의 안위를 생각했다. 걱정스레 말하는 석민의 미간을 꾹꾹 눌러 펴준 민규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승철 사형은 농사일을 안 하시는데, 넌 꼭 나가야 하잖아.”

“….”

“걱정하지 마. 별일 없으니까 보내주는 것이겠지. 그것보다, 넌 다 썼어?”

석민이 말을 할 새도 없이 찬이 사유서를 반으로 접는 걸 본 민규가 물었다. 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슬슬 가자며 몸을 일으켰다. 재빨리 준휘와 석민에게 인사를 하고는 명륜당 밖으로 나왔다.

“승관이에게 안 가도 되겠지요?”

“늦기 전에 오겠지. 이제 소만이 지나 위험할 것도 없다.”

그새 저녁에 가까워지면서, 침소로 가는 길에 떠다니는 등불들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다시 꽃밭에 가기에는 시간이 애매할 것 같아 순차적으로 밝아지는 등롱들을 보며 곧바로 침소로 돌아갔다.

 

나빌레라

芒種, 반딧불이가 나타나고 매화가 열매를 맺는

 

번뜩 눈을 떴다. 하늘이 온통 까만색이었다. 화들짝 몸을 일으켜 옆을 보니 한솔이 잠에 빠져 있었다. 나른함을 느끼며 잔디밭에 누워 있었는데, 그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한솔을 깨우려고 몸을 일으키자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생원과 눈이 마주쳤다.

작은 천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있어 눈을 제외하고는 온통 검은 생원에 너무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명호만큼이나 음기가 가득한 생원은 처음이었다.

“......일어났네.”

“누구세요?”

더 말을 얹지 않는 생원에, 승관이 쭈뼛쭈뼛 다가갔다. 이름이 뭐야. 낮은 목소리인 데다가 끝 음이 올라가지 않아 한참 후에 화들짝 놀라며 승관이 그 생원을 쳐다보았다.

“...승관입니다. 꽃은, 수선화예요.”

*화신花神은 뿌리 깊은 마반인 집안에 그들 고유의 꽃을 전해 주었다. 꽃이 주어진 가문은 그것을 이용해 그들 고유의 마법 문양을 만들어 내 본인을 지키는 데 사용했다. 오래되고 강한 가문일수록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가문이 승관의 수선화, 민규의 모란이다. 이들의 문양은 다른 가문에 비해 단단한 편이다.

“수선화 부가……. 네가 정한 사형이랑 민규네 침소 아이구나.”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곳저곳 많이 들었지. 누각에서 무료해질 때가 되면 정한 사형이 너희 이야기를 해주셔서.”

“…….”

“난 전원우라고 한다. 3년 생원이고.”

늦은 밤 갑작스러운 통성명이었다. 승관은 눈치껏 알았다. 그의 몸에서 나는 장례식 향香의 냄새와, 그 곁에 있는 둥근 통 속 몇 없는 꽃무릇. 이 사람이구나, 싶었다. 이 공간을 사용하는 주인이. 꽃무릇의 주인이. 꽃무릇 전가…. 나중에 찾아보아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다.

“저 아이는 누구야? 백호인 것을 보니 저 아이가 민규가 말했던 이찬이라는 아이는 아닐 테고.”

“아, 최한솔이라는 아이입니다. 찬이랑 셋이 교우하다 친해져서 데리고 왔습니다. ...사형은 이곳에 어찌 오셨습니까?”

“잠에서 깨서 왔다고…. 아까 말했는데.”

“정말 그것 때문입니까?”

“그래. 날이 더워 한밤중에 눈이 떠지더라. 침소에 돌아갈 때 너희를 깨우려고 했지.”

“아….”

말 나온 김에 슬슬 가자. 저 아이 깨우고. 느리게 일어서는 원우에 승관도 뒤따라 일어났다.

한솔의 어깨를 붙잡고 살짝 흔들자, 감겨있던 눈이 슬쩍 떠졌다. 왜 찬이 한솔을 처음 보았을 때 인사보다 눈이 예쁘다는 말이 나왔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노곤한 듯 반쯤 감긴 눈으로 승관을 바라보는 한솔에게 침소로 돌아갈 시간이라고 하니 단번에 눈이 번쩍 떠졌다.

“밤이야?”

“응. 깜빡 잠들었나 봐. 3년 생원께서 데려다주신대.”

승관이 한솔에게 속삭이는 동안, 푸른 도포를 입은 생원이 원우의 곁에 달라붙어 있었다. 민규였다. 민규 사형은 2년 생원 아니냐는 한솔의 말에, 승관은 옆에 검은 것은 안 보이냐며 타박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민규가 말없이 승관을 바라보았다. 혼이 날 것만 같았다. 몸이 굳은 승관을 보고 웃음이 터진 민규가 얼른 오라며 손짓했다.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미적미적 걸어갔다.

“걱정했잖아.”

“죄송합니다. 깜빡 잠이 들어서….”

정한 사형이 알기 전에 찾아 다행이라며 넷이 꽃밭을 나섰다. 바로 앞에 있는 백호 침소에 한솔을 데려다주고, 그와 동시에 현무 침소로 가는 원우와도 헤어져 둘밖에 남지 않았다. 침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생원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저 호랑이, 내일 혼 좀 나겠다.”

“왜요?”

“사형들한테 말도 안 하고 늦게 들어가니까. 지수 사형, 이런 것 되게 싫어하거든.”

승관은 민규가 왜 한솔을 호랑이라고 부르는지 한참 동안 생각을 하다가, 청룡 침소 앞에 가서야 민규가 한솔의 이름을 몰랐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푸른달 서른날

아침 일찍이 시경을 듣기 위해 일찍이 눈을 떠서 준비했다. 정한과 민규가 깨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잠에서 잘 깨지 못하는 승관이기에 항상 정한이 침소에서 나서기 전에 깨워주었지만 요즘에는 정한보다 일찍이 눈을 떠 준비했다. 바스락 소리를 죽이며 준비를 다 마치고 호패를 허리께에 차려던 찰나, 정한이 부스스한 채로 몸을 일으켰다.

정한은 항상 몸을 일으키고 난 후에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기 때문에 승관과 찬은 익숙하게 호패를 허리에 차며 말없이 정한만 바라보았다. 시경을 듣기까지 약 일각 정도 남은 상태였다.

“일어나셨어요?”

“응……. 이제 누각으로 가야지.”

정한의 말에 승관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가득 담아 정한을 보았다. 삐죽 튀어나온 입을 본 정한이 왜? 하고 물으니 너무 피곤해 보여 걱정이 되니 그렇다고 했다. 정한은 걱정할 거리가 너무 많아도 문제라며 고개를 저었다. 찬은 멍하니 창밖으로 바삐 움직이는 생원들을 바라보다 어제 백호 침소에 맡겨둔 서책들이 생각이 나 승관에게 말하며 일어섰다. 정한은 창문틀에 턱을 괴고 부산스러운 둘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찬. 사유서는?”

“아, 아직 못 냈어요.”

찬이 얇은 서책에 끼워져 있는 사유서를 슬쩍 보여주었다. 어제의 일을 모르는 정한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찬을 보았다. 아직 못 했으리라 생각하고 알려주려던 참이었다.

“쓸 줄 알아? 민규가 도와준 거야?”

“네. 어제 석민 사형이랑 민규 사형이 도와줘서 다 썼어요.”

“아, 그럼 내가 낼게. 나 줘.”

정한이 건네받은 종이를 슬쩍 펼쳐보았다. 사월촌…. 순영이랑 같은 마을에 사네.

“순영이도 일반인인데. 알지? 권순영.”

“아! 전에 본 적 있어요.”

“응. ...익숙하네...”

“네?”

정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었다. 아마 일반인인 데다 양인이니까 허가를 받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했다. 될 거로 생각하고 나흘에 나가는 걸 준비하란 정한의 말에 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리달 나흘

찬은 설렌 마음 때문인지 아침 일찍부터 눈이 떠져 조심스레 일어났다. 아침을 혼자 먹으러 가기에는 마음에 걸려 승관이 깰 때까지 잠시 기다리려고 했다. 마침 외출을 하는 생원들을 위해 황룡이 꽹과리를 울리며 침소를 돌아다녔고 그 덕분에 자고 있던 세 명이 번쩍 눈을 떴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 있었고, 정한은 웬일로 침소에서 이불과 요를 정리한 후 이불을 쌓아두고 기대어 있었다. 평소면 민규와 둘이 일찍이 침소를 나섰을 텐데, 항상 바삐 움직이던 사람이 뼈가 없는 뱀처럼 온몸을 이불에 기대어 있는 정한을 보니 신기했다. 승관은 아침에 꺼내둔 도포를 입고 봇짐을 멘 찬을 부러운 눈치로 보았다. 난 한솔이랑 꽃밭에서 놀 거야. 부럽지? 장난스레 흘겨보며 말하는 승관에게 찬은 올 때 과일 정과를 사 오겠다며 달랬다.

“찬아, 나가?”

“네. 다녀오겠습니다.”

“어어, 기다려. 같이 가자.”

정한이 벌떡 일어나 장롱에서 연푸른 도포를 꺼내입었다.

“주출이었지?”

“예? 아, 네.”

“난 반출로 가게.”

정한은 눈이 동그랗게 떠진 승관에게 샐쭉 웃어 보였다. 찬의 뒤에서 봇짐을 톡톡 건드리며 함께 침소를 나섰다.

 

갑작스레 집에 가겠다며 반출을 쓰고 나간 정한 덕분에, 누각은 소란스러워졌다. 할 일들을 찾아 모으고 분류해서 시키는 것, 그 일들을 마무리하는 것까지 전부 정한의 담당이었기에 남은 황룡들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승철과 지수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지만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서당을 나서지 않은 황룡들을 진정시켰다. 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둘이서 해결하겠다는 말에 황룡들은 안심하며 누각을 벗어났다.

지수가 웃는 얼굴로 원우와 지훈마저도 누각 밖으로 밀어낸 후 문을 쿵 소리가 나게 닫았다. 등을 돌려 문에 몸을 기대고는 가슴 깊숙이 있던 한숨을 다 토해냈다.

“순영이가 있었으면 더 난리였을 거야.”

“그렇겠지…. 윤정한 돌아오면 가만 안 둔다, 진짜.”

“…….그래서, 얼마나 남았다고?”

“그러게, 얼마나 남았을까?”

지수 특유의 눈을 위로 치켜뜨는 표정으로 승철을 보자, 승철이 넘어갈 듯 웃었다. 당연히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경주 생원이 쓸 침소 나누고, 벽보에 붙일 것만 적으면 돼.”

“정말 그게 다야? 박사들께 돌릴 것들은?”

“박사들 물품은 어제 새벽에 순영이랑 했어.”

진짜 끝. 손으로 딱 선을 긋듯이 표현하는 승철에 지수가 웃었다. 정말 얼마 안 남았네. 크게 보면 두 가지였지만 한쪽에 쌓인 두꺼운 서책과 종이들을 다 정리해야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 남이 들으면 기함할 소리였지만 황룡에게는 정말 별거 아닌 일이 되어버렸다.

“현무와 주작이 옮기지?”

“응. 현무에는 의와 지, 주작에는 인과 예.”

“현무는 백호에 가고 주작은 청룡에 가고.”

정한이랑 같이 침소 쓰겠네. 지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에 적었다.

“너는?”

“우리는 원우네 침소에서. 그곳 말고는 마땅히 선택할 곳이 없어.”

“그렇겠지….”

벽보로 붙일 내용을 다 적은 지수가 경주 생원들의 명적名籍을 집어 들며 말했다. 빽빽하게 적힌 이름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지수가 망설임 없이 서책 모양으로 되어있는 명적의 절반을 어림잡아 부욱 뜯어냈다. 뜯어낸 것과 뜯긴 것의 양이 대충 비슷한 것을 확인하고 승철에게 건네자 놀란 표정으로 받아 들었다.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승철과 달리 지수는 뜯긴 명적에 끊어진 채로 붙어있는 실타래를 나긋하게 정리했다.

“이건 내가, 이건 네가.”

“어, 그래…. 근데, 이거 이렇게 막 뜯어도 되나..?”

“어차피 윤정한 오기 전에 끝낼 거잖아.”

그건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며 금방 동조하고는 필통에서 붓을 꺼내 들었다.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경주 생원들의 이름과 침소를 하나하나 다 정리하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윤정한, 진짜 큰일 치를 사람이야.”

“냅다 나간 건 처음이지만, 이렇게 사람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닌 걸 뭐.”

“그 애가 약초학부 으뜸*1등, 2등은 버금 인 것이 신기할 지경이라니까? 곧 둔갑술이랑 비행술도 배울 텐데, 배우면 걔는 조선 최고의 체탐인體探人이 될 거다. 장담해, 내가.”

“그런 소리 할 시간에 이름이나 한 자 더 적자. 정말 이것만 하면 돼.”

또 금세 조용해졌다. 한쪽에 몰아넣어 쌓인 서책들이 계속해서 지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몇 달간 단오제를 준비하며 모은 자료들이었다. 회계장부, 명단, 경주 생원들과 주고받은 전보, 인력과 물자 장부….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제 눈앞에 붓을 휙휙 흔들며 집중하라는 듯 장난스레 타박하는 승철에, 다시 붓을 고쳐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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