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소만

만물이 생장하는, 여름의 문턱이 시작되는

현재 by 반야

 

푸른달 아흐레

여름이 시작되고 보름이 지났다. 조금씩 더워지는 날씨에 침소의 창들은 죄다 활짝 열려 있었고 나무 아래 그늘에는 더위를 피하려는 생원들로 가득했다. 입하에 들어서며 배부되었던 모시 도포마저도 열어젖힌 채로 누워있는 생원들의 꼴을 박사들이 본다면 분명히 한 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생원이 개의치 않는다는 듯 옷고름을 풀어두고 편히 돌아다녔다.

 

한솔이 있는 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창을 활짝 열어둔 채로 조용히 서책을 읽었다. 결국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며칠 전 양친이 집안의 비복을 통해 전해준 부채를 꺼내 들었다가, 혹여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뒤에서 자는 지수가 깰까 싶어 조용히 내려두었다. 나중에 깨면 얼음 결계라도 쳐달라고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서.

 

“솔아…….”

한참을 서책에 집중하던 한솔이 뒤에서 들려오는 지수의 목소리에 곧장 뒤를 돌아보았다. 덥지도 않은지 지수의 몸은 이불 속에 푹 감겨 있었다. 눈곱을 떼며 내는 지수의 목소리는 깊게 잠겨 갈라져 나왔다.

“언제 일어났어요?”

“방금.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어. 너는? 밥은?”

“사시巳時에 마법학 수업을 듣고 왔어요. 이틀 전에 박사님께서 편찮으셔서 수업을 미루셨거든요. ...밥은 아까 권 사형이랑 먹었어요.”

“그래? 지금은 뭐해?”

“그냥 서책 보고 있었어요.”

한솔이 지수에게 보여준 서책은 처음 보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말없이 다시 책을 읽는 한솔에, 지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섰다.

 

잠시 후 머리가 살짝 젖은 채로 돌아왔다. 아마 정방에 들렀다 왔을 것이다. 한참 동안 침소 내에는 한솔이 서책을 넘기는 소리와 지수가 머릿결을 만지는 소리만 맴돌았다.

*정방 : 본래 의미는 대소변을 보도록 만들어 놓은 곳이지만, 편의를 위해 이곳에서는 욕실의 역할을 하는 곳과 합쳐 정방이라 부른다. 목욕통이 있어 세안과 목욕을 함께 할 수 있다.

 

“순영이 보러 갈래?”

“순영 사형이요? 아까 무예를 하러 간다고 들었는데....”

“응. 거기 가자.”

지수가 벌떡 일어났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수를 올려다보는 한솔에게 얼른 준비하고 일각 후에 부엌 쪽마루에서 보자는 말만 전한 후 쌩 나가버렸다. 얼떨떨한 마음으로 모시 도포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

 

멍하니 쪽마루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수가 그릇 하나를 들고 한솔에게로 다가왔다. 그릇 속에는 얼음이 가득 차 있었다. 손이 시린지 긴 도포 소매를 손끝까지 당긴 채로 그릇을 받치고 있었다.

“지금 가보면, 전부 더워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거야. 나중에 나 없이 가더라도 얼음은 꼭 챙겨서 가. 아이들이 엄청 좋아할 걸?”

“…….”

한솔의 표정을 읽은 지수가 귀엽다는 듯 픽 웃었다.

“응. 나중에 알려줄게. 얼음 빨리 만드는 법.”

“오. 좋아요.”

“여름에 재직들 몰래 빙수를 만들어 먹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해사하게 웃으며 말하는 지수에, 한솔은 기대에 찬 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룡 침소랑 현무 침소 사이에 있는 정낭 본 적 있지?”

“음…. 가까이 가보지는 않았지만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아요.”

“응. 거기로 들어가 보면, 애들이 있을 거야. 무예를 하는 애들이랑 국궁하는 애들 전부.”

“멋대로 들어가도 되는 거예요?”

“안 되는데, 우리는 순영이 이름 대면 들어갈 수 있어.”

한솔이 고개를 주억였다. 어느새 도착한 둘이 정낭을 넘어 무예를 하는 생원들에게로 다가갔다. 마침 쉬는 시간인 것 같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순영과 준휘도 다가오는 그들을 발견하고는 작게 손을 흔들었다.

“쉬는 시간이야?”

“아. 다 끝났는데, 그냥 조금 더 하고 있었어요.”

“단오제 때문에?”

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가 순영의 입에 얼음을 넣어주자 순영은 웃으며 양 볼 가득 얼음을 담았다.

“고생이 많아.”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요.”

“안 힘들어?”

“쉬는 것도 생각 해봤는데…. 아무래도 망종이 다가오기도 하니까 이르게 준비를 해두는 게 맞겠거니 싶어서 일찍 시작하는 거예요.”

입에 든 얼음 때문에 발음이 다 뭉개진 순영이었지만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열심히 하고, 다치지는 말고.”

“응…. 조금 있다가 침소에서 봐요. ..볼 수는 있으려나?”

“어? 오늘 일찍 들어와야 해. 이제 여름이야.”

아. 그제야 순영과 준휘가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었으나 지수는 그럴 수 있다는 듯 여유롭게 웃으며 놋그릇을 준휘의 손에 쥐어 주었다.

“잊고 있었구나? 이거, 남김없이 다 먹고. 침소에서 보자.”

“…….”

“일찍 들어와! 준휘 너도. 승철이랑 석민이랑 있어야지.”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이 멀어지면서 말했다. 한솔은 별말 없이 둘에게 꾸벅 인사만 하고 지수를 따라갔다.

 

북동쪽에서 서쪽에 있는 침소로 가려니 시간이 꽤 걸렸다. 종종 만나는 생원들은 전부 지수에게 깍듯이 인사했고, 지수는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전부 받아주었다. 얼마 전 정한을 보았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윤 사형이 무서운 분이 아닌데, 다른 생원들은 다들 겁을 내시더라. 순간 승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곧 메꽃이 피겠다, 그치?”

불쑥 묻는 지수에, 한솔은 본 적도 없는 메꽃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끊기는 것이 아쉬워 대뜸 지수에게 물어보았다.

“이제 겨우 소만이잖아요. 해도 늦게 지는데, 일찍 들어와야 해요?”

“...응? 소만이잖아. 무녀들이 들어오니까 우리는 그들을 위해 잠시 공간을 비워주는 것이지.”

“……답답하실 수도 있는데, 왜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지수가 말을 잇지 못하고 한솔을 쳐다보기만 했다. 유하게 올라간 그의 눈꼬리가 매섭게 느껴지는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

“어……. 몰랐어? 궁금하면 밤에 순영이한테 보여달라고 해봐. 창에 구멍 두 개 정도는 내도 괜찮으니까.”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한솔에게 지수는 얼굴을 가까이했다.

“아직도 이해를 못 한 것 같네.”

“네….”

“표정이 딱 그래. 나중에 침소에 가서 자세히 알려줄게.”

다시 방긋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지수였다. 한솔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서책과 종이를 한가득 들고 걸어오는 정한과 마주쳤다. 지수는 정한을 발견하자마자 한솔에게 먼저 들어가 보라며 침소로 돌려보낸 후 곧바로 정한에게 다가갔다.

“어디 갔다가 와?”

“권 수장한테 다녀오는 길이야. 무예 하는 거, 한솔이랑 구경하러 갔다 왔어.”

“오늘 순영이 일찍 들어오겠네.”

“응. 그것도 가서 말 해줬어. 잊고 있었나 봐.”

“그래. 근데, 나 팔 떨어지기 직전인데 좀 들어줄 생각 없냐?”

“아! 그리고!”

정한의 손에 들린 서책 절반을 덜어준 지수가 눈을 번뜩 뜨고 다급히 정한을 붙잡았다.

“왜?”

“어린 청룡들은 알아? 무녀들이 오늘 돌아다닌다는 걸.”

“장 박사가 말했겠지. 한두 번 겪어?”

“너희 침소 애들이 알아? 확실해?”

“뭔…. 알지 않을까? 승관이랑 찬이가 오늘 사시에 장 박사 수업 듣고 돌아와서 잠들었다던데. 가서 들었겠지.”

“아니야. 나 조금 전에 한솔이랑 말하다가 알았는데, 걔들 몰라. 이틀 전 수업 때 편찮으셨대. 그 깐깐한 성격 때문에 오늘 무리하게 보강을 한 것이고. 그래서 못 전해 들었나 봐. 아까 무예를 하는 곳에서 순영이랑 이야기하는 것으로 처음 들었대.”

큰일 났네. 그럼 지금 누각에 갈 때가 아니잖아. 정한이 미간을 한껏 찌푸리다 지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

“...왜?”

정한이 지수의 손에 들린 서책을 다시 제 품 안에 올리고 확고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지금 당장 호랑이들을 잡아서 침소에 집어넣어. 내가 누각에 가서 현무랑 주작한테 전하라고 할 테니까.”

“어?”

“해가 지기 전에 다 말해야 해. 원한다면 1년 생원 명부도 줄게. 나는 다 외워서 필요 없어.”

“응? 아니, 왜? 마법을 쓰면 되잖아. 지비를 쓰면 되는데...”

지비紙飛라는 마법은 종이에 내용을 적은 후 하늘로 날려 보내면 전달받을 사람의 머리 위로 곱게 그 종이가 떨어져 편지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꽤 간단하고 편리한 마법이라 박사들이 황룡에게 용건을 전달할 때나 생원을 부를 때, 비복 대신 사용하는 마법이었다.

“1년 애들은 머리 위에서 종이가 떨어져도 그게 마법인지 몰라. 승철이가 그랬잖아.”

“......아.”

“백호는 네가 맡아. 지금 넌 황룡이잖아.”

정한은 믿는다는 듯 거듭 이야기하고 뒤를 돌아 누각으로 향했다. 지수는 그런 정한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바라만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침소로 뛰어 들어갔다.

 

나빌레라

小滿, 만물이 생장하는, 여름의 문턱이 시작되는

 

 

소만에는 해가 진 뒤 무녀가 서당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둔다. 외부에서 허가받은 무녀들만 들어올 수 있으며, 그들이 서당에 들어와 길흉을 점치고 재화를 방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푸른달 말에 이런저런 이유로 서당에서 사라진 생원이 꽤 많았기에 괴팍한 무녀의 눈에 띄는 사내는 죄다 잡혀간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따라 서당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매해 1년 생원들이 입학하고 나면 장裝 박사가 나서서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기로 황룡들과 약조했다.

 

“...뭐??”

“들었잖아. 얼른 가. 급한 거 알잖아.”

승철이 여태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한을 바라보았다. 지훈은 조용히 그런 승철의 곁에서 팔을 끌어당겼다. 단오제 준비는 2년부터 4년 황룡이 담당한다. 누각에 오지 않는 5, 6년 황룡들 덕분에 현재 누각에서 가장 힘이 있는 생원은 4년 생원들이었으며, 그중에서도 정한이 대표적이었다. 박사의 말을 대놓고 거스르고도 미움을 받지 않을 생원은 그뿐이었다. 승철은 순순히 의자에서 일어났지만, 정한에게 고정된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해가 지기 전에 다 말해야 해. 나도 곧 침소로 돌아갈 거고. ...지훈아. 미안해. 하필 4년 황룡현무가 병가를 얻어서 서당에 없어서….”

“괜찮아요. 가는 김에 명호에게 오늘도 못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고 돌아오죠, 뭐.”

지훈은 별일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으응... 얼른 가. 백호는 지수가 맡았어.”

“우리는, 애들 숨기고 다시 여기로 모이지?”

“응. 와야지. 새삼스럽게.”

“그럼 나 데리러 와. 나는 무녀를 본 적 없단 말이야.”

무섭다는 소리였다.

“그분도 널 본 적은 없을걸.”

“장난치지 말고 얼른 약조해. 우리 침소로 와.”

“...그래.”

정한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승철이 누각을 나섰다. 정한은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창문을 다 닫고 모든 불을 끈 후에 누각에서 벗어났다.

 

평소보다 일찍 등롱이 꺼지고, 서당 내부는 한없이 고요해졌다. 지수는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거 한솔에게 무녀를 보여주겠다며 침소 창에 구멍을 뚫다 정한의 손에 잡혀 누각으로 끌려갔고, 지훈은 일이 많다며 원우와 명호를 데리고 주작 침소로 갔다.

“어? 지훈! 늦었는데 무슨 일이야?”

“명호 줄게. 석민이 줘.”

“...승철 사형도 좀 전에 정한 사형한테 뺏겼는데!”

“응. 준아. 명호 잘 데리고 있어. 동이 트면 데리러 올게.”

“엉... 다녀와.”

황룡은 다른 침소를 드나들 권한이 있지만 다른 생원들은 그럴 수 없었다. 때문에 몰래 주작 침소에 명호를 넣어두고, 석민과 원우를 데리고 어두운 누각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밝은 내부가 그들을 반겼다.

 

다행히도 서당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한은 누각에서 다른 황룡들과 밤을 보낸 후에, 무녀의 소리가 사라지자마자 장 박사에게 찾아갔으나 그는 정한을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정한은 그런 박사에게 보답하듯 빳빳한 민규의 화선지를 훔쳐 청색 글자로 경고문을 가득 채워 보냄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승철은 그런 정한을 곁에서 지켜보며 그렇게 무례한 행동을 해도 되는 것이냐 물었다가 지수에게 혼만 잔뜩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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