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우수

본격적으로 꽃이 피기 시작하는

서당 by 반야

시샘달 열이틀

겨울의 추위가 한 걸음 물러난 지도 꽤 되었다. 봄에 들어선 덕에 서당은 또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몇 생원들은 농사일을 돕기 위해 사유서를 내고 황룡들을 찾아 다니기 바빴다. 나비들 중에서는 이번에 외출하는 생원이 단 한 명도 없어 삼삼오오 모여 돌아다닐 뿐이었다.

담장 너머 소란을 듣던 명호가 지겹다는 듯 한숨을 쉬며 뒤로 벌러덩 누웠다. 서리가 녹아 바닥이 축축하다며 석민이 일으키려 해도 괜히 힘을 주어 버티는 탓에 결국 손을 놓았다. 오랜만에 다도나 하자는 민규의 말에 3, 4년 나비들이 꽃밭에 둘러앉았다.

“준휘 사형은 어디 있어요?”

“강의 들으러 갔지. 천계신시.”

“사형들도 천계신시학이잖아요.”

저승연구를 하는 원우를 제외하고는 전부 천계신시학을 듣는다. 명호나 민규에 비해 손이 가벼운 석민이 차를 따르고 건네주며 물으니, 순영은 네 침소 사형이 아니냐며 웃었다.

“주작들은... 항상 바빠서....”

“알지, 알지. ...준휘는 우리랑 같이 안 들어.”

“왜요?”

“승철 사형이랑 듣지.”

바삐 움직이던 3년 나비들의 손이 전부 멈추었다. 차를 우리던 명호와 그림을 그리던 민규뿐만 아니라 원우의 찻잔에 주전자를 기울이던 석민의 손까지도. 원우는 어유, 뜨겁겠다. 하며 석민이 손을 직접 움직여주었다.

“저번에 한성부에 가 있던 것 때문에 일수가 안 채워진다고 했는데....”

“성적으로 비벼 넣었지.”

순영이 그때의 짜릿함은 절대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한 해 일찍 천계신시학을 듣기 위해 조건을 하나하나 다 적어 벽보에 붙이자마자 준휘가 앞으로 달려가 충족하는 요건과 점수를 옆에 적었다. 4년 나비들은 그 모습을 곁에서 같이 지켜보았다. 수업일수의 타격이 꽤 있었다. 한성부에서 보낸 시간이 하필 가을의 정점이어서, 평균보다 한없이 점수가 낮았다. 포기해야 하나 싶을 정도의 출결 점수를 받은 준휘가 겨우 마음을 다잡으며 여태껏 받았던 과목의 성적을 부탁했고, 세 황룡나비는 기꺼이 그의 성적을 몰래 빼돌려 건네주었다. 하나하나 꺼내 보며 성적을 옆에 적기 시작했다. 지훈은 그 성적의 총합을 계산하기 위해 말없이 준휘의 곁에 앉았다.

“...말도 안 된다.”

“미친놈이네.”

모든 점수가 만점이었다. 무엇을 더 헤아릴 필요도 없었다. 출석에서 생긴 구멍을 메꾸고도 남는 점수였다. 벌떡 일어난 준휘는 곧장 벽보 아래로 달려가 월반越班 신청서를 집어넣었다.

“...그래서, 된 거예요?”

“응. 곧 끝나겠다. 여기로 오라고 할까?”

“누구를?”

“어이쿠, 너를.”

순영과 지훈의 사이에 얼굴을 들이민 준휘가 저를 빤히 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인사했다. 순영의 어깨를 토닥이며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마법학 박사께서 널 찾아.”

“나? 왜?”

“몰라...? 호시가 어디에 있냬서, 찾아서 드리겠다 하고 왔어.”

순영이 끙,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자, 교체! 준휘를 앉히고 잠시 어디 좀 다녀오겠다고 소리쳤다. 지훈이 같이 가 줄까? 하고 따라 일어서려 했으나 순영이 제지하여 다시 앉을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나비들의 말에 대강 대답해준 순영이 버드나뭇잎을 걷으며 꽃밭을 나섰다.

나빌레라

雨水 ,본격적으로 꽃이 피기 시작하는

“어어, 왔군.”

“옙. 무슨 일 있으십니까?”

간혹 본가로 돌아가는 박사들이 보필을 부탁하는 경우가 있어, 이번에도 그런 건가 하여 쭈뼛쭈뼛 무예복으로 갈아입고 온 참이었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에 딱딱한 신을 얌전히 벗고 들어가 앉았다.

“호시. 자네가 워낙 뛰어난 것을 아니까, 내 하나만 부탁하겠네. 이 마법을 아는가?”

“아... 네. 얼마 전에....... 경주에서 본 적 있습니다.“

”그래. 윤정한이 사용했다고 하더군. 여태 이론만 강의했는데, 나도 이제 실습을 할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돼서.“

앓는 소리를 내던 박사가 두꺼운 서책 하나를 순영에게로 던졌다. 같잖은 시선을 숨기지 않고 그 서책을 받아서 든 순영이 무어라 질문을 얹지도 않고 박사를 보자, 그는 제 행동에 한 치의 부끄럼도 없는지 딴청을 부리며 턱짓했다.

”그러니까 그것 좀 연습해보겠나? 자네가 무언가를 학습하는 능력이 뛰어나니까. 이 서책을 보고 한 번 해보게.“

“...아-. 알겠습니다. 언제까지 하면 됩니까?”

“자네가 되는 대로. 안된다면 뭐, 할 수 없는 거고.”

이유모를 승리욕이 타올랐다. 할 수 있죠. 못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해맑게 웃던 순영이 표정을 싹 지우고 바닥에 떨어진 서책을 주웠다.

구정부터 춘분까지는 무예학도들이 쉬는 기간이다. 텅 빈 무예 터 한가운데에 앉아 아무리 서책을 따라 해 보아도 마법이 작동되질 않았다. 정한 사형이 했던 것을 보았더라면 따라 할 수 있었으려나. 끙 소리를 내며 잠시 풀썩 드러누웠다. 금강초롱이 종이 되어 공간을 만들어냈다. 금강초롱, 금강초롱…

그런데 이거, 내가 할 수 있는 마법인가?

벌떡 일어나 서책을 거칠게 집어 들었다. 정낭을 한 팔로 짚고 풀쩍 뛰어넘어 향한 곳은 당연하게도 능소화가 피어난 현무였다.

쿠당탕탕 거리는 소리에 지훈은 익숙하단 듯이 문을 열어주었다. 순영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지훈에게 책을 펼쳐보았다.

“지훈아. 이거 좀 도와줘.”

“뭔 일이래. 네가 도와달라고 온 것은 오랜만이다.”

“...박사께서 시켰는데, 아무리 해도 안 돼.”

"뭐?"

지훈이 펼쳐진 부분이 잘못된 건가 싶어 되물었다. 순영은 다시 자세를 잡고 박사가 시킨 부분을 짚어주었다.

"이거, ...하라고 하셔서."

"아니. 너 이거 어떻게 쓰는지는 알고 하는 소리야?"

"어... 여기 있는데, 아무리 해도 안돼서...."

"미친..., 당연히 안 되겠지. 그건 마반인이나 할 수 있는 마법이니까."

"어?"

"꽃이 있어야 할 수 있다고. ...누가 시켰는데. 이거에 대해 아무런 말도 안 해줬어? 네가 못 들었을 리는 없고."

“마법학 박사께서 부르셔서 가니까, 한 번 연습해 보라고 하던데.”

지훈이 멍하니 서책을 보더니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으득이는 소리와 함께 비릿한 향이 침소에 풍겼다. 뭐해?! 순영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댈 새도 없이, 지훈이 그 피를 다시 입에 가져다 댔다.

이리 와. 붉은 피가 묻은 입술이 오물거리며 순영을 불렀다. 머뭇거리다 입을 맞대니 이에 호응하듯 입술을 깨물었다. 순영이 홀린 듯이 탐색했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비릿한 향은 사라지고 오로지 달고 쌉싸름한 능소화 향이 입안에 맴돌았다. 지훈은 평소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순영의 목덜미를 잡고 떨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붙잡더니, 숨이 차서 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느릿하게 손을 놓아주었다.

“...뭐야?”

“딱 한 시진이야. 네가 능소화를 쓸 수 있게 했어.”

“.......”

“박사는 내가 처리할 테니까, 너는…. 이거 쓰고 있어.”

이제 네가 하려 했던 마법을 써봐. 지훈의 나긋한 말에 순영이 손목을 움직였다. 작은 능소화 세 송이가 손에 만들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이렇게, 쓰는 거구나. 허망한 듯한 표정으로 지훈을 올려다보았다. 텅 빈 동공과 대비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숨겨가면서.

지훈이 누각의 문을 열었다. 성큼성큼 걸어와 제 책상 위로 서책을 던졌다. 깊은 한숨 때문에 바닥이 꺼질 것만 같았다. 그의 행태를 보던 정한이 물었다.

“우지. 왜 이렇게 화가 났어?”

"권순영이 마법 과제를 받아왔어요."

"엉. 4년 생원인데, 설마 사형들한테 도움을 받으려는건 아니겠,..."

"꽃을 필요로 하는 마법인데 그걸 시켰더라고요."

"...."

"보褓. 사형이 경주에서 썼던 그거요."

"누가."

지수의 목소리가 싸하게 식었다.

“마법학 박사요.”

“미친놈인가? 호시는, 알아?”

“네. 말 해줬고요, 제 꽃을 잠시 넘겨주고 왔어요.”

“...우와…”

지훈이 왜 그러냐는 듯 정한과 지수를 봤다. 너 정말… 호시를 사랑하는구나? 정한의 입꼬리에 장난기가 또 걸려있었다.

“꽃을 넘겨준다.” 정말 기본적인 마법이면서도 대부분의 마반인이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제 힘의 절반을 묶어둔 채로 남에게 일정 시간 양도하여 그가 마법을 부릴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사장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지금 지훈은 능소화로서의 기본적인 행태만 허용된 상태일 것이다. 애써 그런 것을 숨겨가며 서당의 중앙까지 온 그가 기특하고 대견했다. 지훈은 별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연습, 해보고 싶어 할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그 점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맞는 거겠죠. 이 박사에게 무어라 할 수 있는 권한은 없는 거예요?”

설레는 표정의 순영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다. 온전한 행복만 줄 것이라 다짐했는데. 이리도 속상하게 만든 것이 미안한 것이 첫 번째였고, 기어코 순수한 그의 마음에 생채기를 낸 것이 생원이 아닌 지위를 가진 박사라는 점이 두 번째였다.

“우리가 아무리 동등한 지위를 가졌다 한들, 이걸 가지고 무어라 말을 얹을 수는 없지.”

“.......”

“너도 알고 있잖아. 그치? 순영이가 당한 일이 아니라면, 그저 네가 사과하고 끝냈을 일이잖아.”

항상 지수가 하던 말이었다.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이성적으로. 지훈이 완전히 무시한 요소였다.

“...일부러 그런 것이잖아요. 꽃 하나 없는 일반인 출신이 이 서당에 셋 뿐인데, 왜 하필 권순영을 시켜요.”

“할 수 있으니까!”

누각 문을 부술 듯이 박차고 쳐들어왔다.

🎵Flower fantasy-Nflying

순영을 무예 터에 보낸 지 이각이 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얼떨떨한 표정의 셋이 순영을 맞이했다. 갈증이 모두 사라진 듯 말간 얼굴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 꽃 없어도, 할 수 있어. 봐.”

순영이 왼손바닥에 작은 능소화 보를 만들어 올렸다. 오른손바닥을 들더니, 매끈한 낙엽을 불러와 같은 형태로 만들어냈다.

“...뭔데.”

“가을의 백호. 해냈어. 낙엽으로도 할 수 있고, 은행잎으로도 할 수 있어.”

퐁,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은행잎이 순영의 머리 위로 만들어졌다. 귀여운 모자처럼 얹어진 은행잎에 히히 웃는 순영은 어린아이 같았다.

끝내 박사에게는 지훈이 갔으며 일반 생원들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으나 모두에게 알려주는 것이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 일러두었다. 웃음기를 싹 지운 지훈에, 박사 또한 무어라 더 말을 하지 않고 그를 보내주었다.

순영은 곧장 승철과 찬을 찾았다. 승철에게는 붉은 깃털을, 찬에게는 푸른 비늘을 꺼내어 보를 사용할 수 있도록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석민은 이미 누각에서 순영에게 배워 한 번 만에 깃털로 커다란 보를 만들어냈다. 정한이 까르르 웃으며 깃털을 이불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둘을 무예 터로 불렀다.

승철은 제 손바닥 위에 올라온 간질거리는 깃털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이 웃었다.

“...이거, 작년에 마법학 강의 때 한 건데.”

“사형은 그때 뭐 했어요?”

“꽃이 없어서 그냥 앉아서 이론만 봤지. …어떻게 했어?”

순영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제 손가락으로 머리를 두어 번 툭툭 건드렸다.

“그저, 믿음이죠. 내가 이걸 해낼 수 있다는 믿음. 나는, 마법을 잘 다룬다는 믿음. 봐요, 찬이도 할 수 있잖아요. 이게 뭐 별겁니까.”

허나 오방신의 수하가 될 아이들이라 이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인지, 혹은 정말 순영의 말대로 순수한 믿음과 열정 하나로 해낸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후에 또 다른 일반인 생원이 입재하게 된다면 그때 다시 알려주는 것으로 약속했다.

“...고마워.”

“예? 뭐가요.”

“그냥….”

이타적이고 든든한 내 사제 덕분에 별걸 다 알아가네. 많은 걸 배워. 미처 움켜쥐지 못한 손바닥에서 깃털이 빠져나와 훨훨 날아갔다. 에이, 이게 뭐라고요-. 순영은 허허 웃으며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때마침 승철의 머리 위로 찬이 살포시 용의 비늘을 얹어주며 살포시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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