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VT

LOSE YOURSELF 01. 폭풍전야

2의 이야기

Look, if you had one shot, one opportunity 

이봐, 네가 단 한 번, 단 한 번의 기회로 

To seize everything you ever wanted-One moment 

원했던 모든 걸 얻을 수 있게 된다면 

Would you capture it or just let it slip? 

그 기회를 잡겠어, 아니면 그냥 날려 버리겠어?

- Eminem

01. 폭풍전야

“형. 여기서 나갈 수 있다면 어떡할래?”

그건 지훈의 입에서 나오리라고 상상도 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정한은 입을 꾹 다문 채 두 눈만 느리게 깜빡였다. 

…생각해보면 연구소 카메라가 설치되지 않은, 아이들끼리만 공유하는 몇 안 되는 사각지대로 정한을 데리고 온 건 지훈이었다. 방금까지 별 거 아닌 시답잖은 장난을 치는 것처럼 굴었으나, 지금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음이 분명했다. 

농담일까? 진심인 건가?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저도 모르게 쿵쿵 뛰고 있었다.

“…근데 나 밖에 나가본 적 없는데.”

정한은 제 인생 처음으로 ‘기회’가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윤정한은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P연구소의 작은 방 한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커녕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가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여하간 그랬다. 저를 따뜻하게 품어주고, 말을 건네준 사람이 있다는 기억 정도는 났으니 누군가는 있었겠지. 그마저도 없는 아이들이 많은 이곳에서는 그런 온기를 기억하는 것조차 행운이었다.

P연구소는 어떤 섬에 위치한 시설이었다. 정한을 비롯해 무수한 아이들이 먹고 자며 지내는 곳은 양육소, 또는 M동이라 불렸다. 머리가 큰 아이들은 그냥 고아원이라고 부르는 게 낫지 않냐는 우스개소리도 서슴치 않았다. 대개 정한과 비슷한 이들이 그랬다. 부모를 모르고,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들. 

그들은 드넓은 연구 시설과 가꿔지지 않은 숲을 뛰놀며 커갔다. 일대 부지가 모두 연구소의 땅이었으므로 누가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니든 상관은 없었다. 무엇보다 곳곳에 달린 카메라가 그들이 어딜 가든지 비추고 있었으므로 더욱이. 그걸 낯설거나 어색하게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고 자라며 겪은 평범한 일상이라는 게 그랬다.

그런 생활에 미세한 균열을 낸 건, 3년 전 어느 날 연구원 몇 명과 같이 배를 타고 들어온 한 소년이었다. 이지훈. 지금 바로 정한의 앞에 서 있는…… 어쩌면 앞으로의 생활마저 균열을 내버릴 녀석.

정한은 마른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왜 나야?”

“뭐가.”

“이런 얘길 왜 나한테 하냐고. 내가 선생님께 가서 얘기하면 어쩌려구?”

“형은 안 그럴 테니까.”

지훈의 낯은 담담했다. 마치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읊는 듯이. 단정 짓는 말에 정한이 입을 다물었다.

연구소의 일상은 매일이 비슷했다. 매일 때가 되면 주는 식사를 했으며, 스케줄에 따라 훈련도 하고, 개개인을 담당하는 ‘선생님’들, 그러니까, 연구원에게 매주 검진을 받는다. 그리고 매달 말일이 되면 옹기종기 모여서 그들이 가진 ‘능력’을 평가하는 시간을 가지곤 했다. 

지루할만치 똑같았던 나날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지훈이 이곳으로 오면서부터였다. 지훈은 평소 그들 속에서 공동체 생활을 했지만 어느 날 밤만 되면 불쑥 어디론가 사라지고는 했다. 평가회 시간에는 함께 평가 받는 게 아니라 연구원들 옆에서 아이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고 또 며칠이 지나면 좋은 평가를 받았던 몇몇은 선물을 받았다. 그들이 가진 능력을 개화시키거나 보조할 만한 것들을. 

일련의 일들에 지훈이 관여한다는 사실을 모를 만한 건 나이가 어린 애들뿐이리라. 정한처럼 10대 후반에 들어서면 눈치 채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나가고 싶다면 내 손을 잡는 수밖에 없을걸.”

지훈은 정한의 반응을 살피는 것처럼 고개를 기울이다가 말을 툭 던졌다.

“그리고 난 형의 능력이 필요하거든.”

“나? 난 능력 없어, 평가회 할 때마다 늘 꼴찌하는데?”

“거짓말 안 해도 돼. 지수 형이랑도 얘기했어.”

“…….”

“지수 형도 같이 갈 거야.”

걔는 나한테 그런 말 안 했는데. 그 한 마디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사그라들었다.

이지훈은 처음부터 겉도는 아이였다. 연구원도 아닌데 ‘바깥’에서 온 사람, 얌전하고 말수 적은 성격, 먼저 다가가지 않는 완고함, 상대방이 말을 붙이며 친근하게 굴어도 무뚝뚝한 단답형 반응까지. 거기에 더해 평가는 받지 않으면서 평가하는 입장에 있는 것처럼 보이니 몇몇 아이들은 반감을 가진 모양이었다. 그런 불평과 불만에도 지훈은 꼿꼿했지만.

왠지 모르게 날서고 모났던 지훈의 분위기가 그나마 나아질 수 있었던 건, 무리에 섞일 수 있도록 도와준 윤정한과 홍지수 덕분이리라. 다만 정한은 제가 지훈과 그다지 친해지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지훈은 홍지수랑만 친하게 지내는걸. 그런 생각에 다소 의기소침해진 적도 있었다. 분명 그랬다, 아까 전에 지훈이 먼저 다가와 말을 붙이기 전까지는.

“그럼 다른 애들은 어쩌고?”

“형은 걔네가 바깥에 관심이나 있어 보여?”

“그건….”

“밖에서 온 애 한 명도 못 받아들이는 애들이야. 위험해.”

밖에서 온 게 너라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농반진반의 대꾸조차도 하지 못했다. 연구소에서 지내는 아이들 중, 섬 바깥에 관심이 있고 분명하게 나가고 싶어 하는 건 자신과 지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정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구원도 아이들도 모두 알지 못할 거라 여겼던 걸 지훈은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그게 정한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혹시라도 그걸 아는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 대화마저 위험한 게 아닐까. 정한은 치미는 불안감을 애써 누르고 물었다.

“그러는 넌 뭐 때문인데?”

“뭐?”

“왜 우리랑 나가려는 거냐고. 그냥도 제재 없이 나갈 수 있는 거 아니었어?”

“…그럴 수만 있음 얼마나 좋게.”

한숨처럼 돌아온 답이었다. 많은 걸 함축한 것 같은 말에 의아해졌지만 지훈은 제대로 설명해줄 의사가 없어보였다. 오히려 조금 지치고 피곤한 낯빛을 보고, 정한은 한 번 더 물어보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지훈은 사위를 둘러보고 나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암튼… 형들이 나가고 싶어 한다는 건 나만 알아. 그니까 괜한 걱정 말고.”

“어, 어떻게 알았어?”

“지수 형도 똑같은 거 걱정하던데.”

둘이 진짜 안 그런 척 하면서 엄청 걱정 많네. 투덜거리는 지훈은 평소와 크게 달라보이지 않아서 왠지 모르게, 조금 안심이 됐다.


어디선가 펑, 터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정한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달음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도망을 친다면 아무도 모르게 나갈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을 틈타 몸만 슬쩍 빠질 거라고. 그러나 지금은 아직 해가 저물어가는 시기였다. 마치 타오르는 것마냥 발갛게 물든 하늘이 창밖으로 보였다. 아니… 진짜로 타오르고 있었다. 정한은 숨을 헐떡이며 멈춰섰다. 창밖에 보이는, 매캐한 연기와 치솟는 불길에 휩싸인 건물은 연구원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또다시 펑! 폭발 소리가 났고 이어서 들리는 고함… 외침…….

저게 지훈이 말한 ‘나갈 수 있는 방법’의 일환인가? 이렇게 일이 커져도 되나? 긴장감에 손끝이 저릿했다. 이곳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대체적으로 사무적이었으나 또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정한은 제가 아는 연구원들의 얼굴을 몇 명 떠올려보다가 고개를 내젓고 걸음을 옮겼다.

모퉁이를 돌아서 마주한 넓은 로비는 혼란해보이는 아이들과 부산스런 연구원들로 가득했다. 그 틈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가는 상황만 지켜보던 소년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와 평생을 이 섬에서 함께 보낸 친구, 홍지수. 정한은 지수에게 성큼 다가가 손목을 붙잡았다.

“지수야.”

“정한아, 여태 어디 있었어?”

“지훈인?”

정한을 보고 안도한 것도 잠시, 지수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얘는 정말 대체 어딜 간 거람. 이 난장을 피워놓고. 오늘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언질조차 없었지만 혼란을 던져놓은 주체가 이지훈이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정한은 지수의 손을 고쳐 잡고 속삭였다.

“움직이자.”

로비에는 이미 몇몇의 연구원들이 나와있었다. 그리 많지 않은 걸 보면 나머지는 다 폭발이 일어난 곳에 간 모양이었다. 남아있는 이들은 떠들썩하게 밖으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을 각자의 방에 돌려보내려 노력 중이었다. 조용히 하렴, 너무 소란 피우지 마, 별 일 아니니 이제 그만 들어가……. 그런 외침을 듣지 않는 이들은 정한과 지수뿐만이 아니었으므로 두 사람이 M동을 빠져나간다는 사실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에게야 다행인 일이었으나, 정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훈련을 거듭하면 뭐한담.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제대로 써먹지를 못하는데. 

“형들 어디 가?”

연구원들에게서 제법 떨어졌다 싶었던 때였다. 두 사람을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혹시 저기 구경 가는 거야? 나도 같이 갈래.”

“순영아, 그게,”

“아니, 구경하러 가는 거 아닌데.”

“그럼 어디 가는데?”

소란에 자다 일어난 걸까. 정한과 지수가 시선을 교환했다. 지수는 그의 룸메이트인 순영이 잠이 가득한 눈을 비비면서도 제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걸 막지 못했다. 아, 어디 가아아. 늘어지는 목소리는 이 상황을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만을 알려주었다. 고민은 짧았다. 지수 대신 정한이 순영의 손을 잡고 빠르게 입을 열었다.

“순영아, 너 그때처럼 변하는 거 가능해?”

“엉…?”

“평가회 때 늘 호랑이로 변하다가, 이번엔 작은 쥐로 변했었잖아. 어때? 지금 할 수 있겠어?”

“쥐가 아니라 햄스터거든?!”

발끈하는 순영을 지수가 토닥이며 달랬다. 그러지 말고, 해볼 수 있어?

아이들은 저마다 능력도, 그 능력의 크기도 모두 달랐다. 그 중에서 순영의 경우는 또 특별했다. 힘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잘 표현하느냐의 문제였으므로. 

정한은 문득, 순영의 능력에 관해 연구원들끼리 떠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수인화’. 그들은 순영의 능력을 가리켜 그렇게 표현했다. 그것도 대상을 가리지 않는 수인화. 기복은 없었지만 대개 좋아하는 생물로 특정 지어지는 점 때문에 쓴소리도 더러 들었던 힘이었다. 순영은 크고, 세고, 사나운 것을 좋아했으므로 매 평가회에서 호랑이로 변하곤 했는데 지난 달에는 새로운 생물로 변해 칭찬을 받았더랬다.

결국 소년은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궁시렁거리면서도 한 걸음 물러나 순순히 눈을 감았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순영의 몸 주변에서 아주 조용히, 아지랑이처럼 빛이 피어올랐다. 차츰 줄어드는 몸, 달라지는 생김새가 시야에 들어왔다. 1분 남짓한 시간도 흐르지 않았을 때…… 순영은 이미 손바닥으로 감쌀 정도의 크기가 된 후였다. 햄스터로 변한 아이는 눈을 반짝 뜨고 그들을 올려다 보았다. 까만 눈동자를 마주 내려다 본 지수가 그를 조심스레 감싸들고 호주머니에 넣었다.

“들키면 안 되니까 조용히 해야 해.”

혹시라도 제 목소리가 천둥 소리처럼 크게 들리지 않을까, 걱정스레 속삭이는 지수를 보고 정한이 짧게 웃었다.

“이제 어디로 가면 돼?”

“저번에 지훈이가 말해준 곳이 있어.”

어쩌면 지훈도 이렇게 될 줄 알았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에 정작 구체적인 사항은 쏙 빼놓고 대충, 일이 터지면 알게 될 거라 말한 거겠지. 만약 지금이다 싶었는데 내가 안 보이면 거기서 만나.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말한 지훈이 일러준 곳은 아이들도 많이 모르는 장소였다. 연구원도 알지 못하고, 카메라가 잡지도 못하는 몇 안 되는 사각지대 중 한 곳.

“바닷가 쪽으로 일단 나가자.”

연구소를 빠져나와 지훈과 만나기로 한 곳으로 가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소요됐다. 그나마 누군가 불쑥 튀어나와 그들을 제지한다거나, 어딜 가느냐며 추궁하는 일이 없어 다행이었다. 다들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몰려간 모양이었다. 정한은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는 걸 느꼈다.

새삼스럽게도 저희가 여기서 나고 자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Y섬 일대가 P연구소로 이뤄진 만큼, 이곳에서 생활하는 모든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카메라는 어디에나 존재했다. 다만 돌아가면서 섬과 육지를 오가는 연구원들과 달리 정한을 비롯한 아이들은 늘 여기 있었다.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사각지대가 어딘지는 빠삭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체감으로만 30분은 훌쩍 넘긴 것 같았을 때였다. 바닷가가 눈에 들어왔다. 어슴푸레한 하늘을 배경으로 초조하게 왔다 갔다하는 작은 소년도 보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

정한과 지수가 헐떡거리며 도착하자마자 지훈은 조용히 타박했다. 가만 듣고 있노라니 조금쯤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네가 말한 날이 오늘일 줄 누가 알았겠냐고…. 하지만 두 사람은 바로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지훈은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뭍 가장자리에 대놓은 커다란 배와, 그 앞에서 서성이는 몇몇의 어른들을 본 정한은 저도 모르게 그들을 경계하며 지수와 붙어섰다.

“누군데?”

그들을 눈짓하자 지훈도 힐끗 제 주변의 어른들을 보고 대꾸했다.

“우릴 도와줄 분들.”

“안녕, 얘들아.”

“…….”

“우린 너흴 구조하러 왔어. 지훈이한테 들었는데 네가 정한이고… 네가 지수, 맞지?”

지훈의 말에 이어 설명하는 남자는 선량한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경계심이 흐려지는 건 아니었다. 그 옆에 있던 다른 여자는 그들에게 눈인사만 하고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들여다 보는 데 집중했다. 정한과 지수가 가만히 서서 침묵하고 있자, 지훈은 그들 너머로 타오르는 연구소를 본 뒤 입을 열었다.

“우리쪽 사람들이 돌아오면 배 타고 바로 움직일 거야. 먼저 들어가 있어.”

“근데, 정말 우리만 가는 거야? 다른 애들은?”

“위험해.”

지수의 질문을 지훈이 단칼에 잘랐다. 다 끝난 이야기를 지수가 굳이 다시 한 번 꺼내는 이유가 뭔지, 정한은 알 것 같았다. 홍지수의 주머니에 들어있을 순영 때문이리라. 하지만 단호한 지훈을 마주한 지수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고, 정한도 마른 침을 삼키고는 지수의 팔을 잡았다. 뭐가 됐든 여기서 순영을 내보이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지 싶었다.

“그래, 지훈이 말대로 먼저 들어갈까?”

그들에게 말을 걸었던 상냥한 사람의 제안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없었다. 정한은 왠지 모를 불안함을 애써 숨기며 지수와 함께 움직였다. 그들 뒤로 지훈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철이 형은 괜찮대요? 슬슬 능력 쓸 힘이 다 떨어졌을텐데.”

“아직은…… 근데 빨리 철수해야겠어. 이러다 밤이 되면 더 위험해질 거야.”


남자는 내부 시설을 잠깐 설명해준 뒤 선실 하나를 열어 정한과 지수에게 잠깐 있으라며 들여보내 주었다. 침대 두 개와 짐으로 보이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가 문을 닫고 멀어질 때까지 기다린 지수가 재빨리 주머니에서 햄스터를 꺼냈다. 얌전하던 순영은 지수의 손에서 벗어나자마자 사람으로 변했다. 용케 참았다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푸하! 죽는 줄 알았네.”

“괜찮아?”

“아니 근데, 이거 다 뭐야? 형들은 오늘 누가 연구소 터트렸는지 알고 있었어?”

“뭐, 대충….”

“순영아. 우린 여길 떠날 거야.”

어물거리는 지수의 대답을 끊고, 정한이 진지하게 말했다. 짧은 침묵이 그들 사이로 내려앉았다. 순영이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어…, 그, 나도 가는 거야?”

멍한 질문에 지수가 슬쩍 정한과 시선을 교환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가고 싶어?”

“연구소에 남으면 형들 못 보게 된단 거잖아.”

“그렇겠지.”

“그럼 나도 갈래.”

결정은 빨랐다. 권순영은 너 그렇게 쉽게 결정해도 되느냐, 고민을 좀 더 해야지 않느냐, 이런 말이 통하는 애가 아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설령 순영이 가지 않는다고 결정한들 배에 들어온 이상 지훈네를 피해서 다시 연구소로 돌아가기란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즉흥적으로 결정된 상황에 지수도 정한도 조금 걱정스러운 낯이었으나 순영은 피식 웃고 말 뿐이었다.

“태어났으면 꿈은 크게 가지는 거랬어. 한 번 사는 인생 까짓 거 밖에도 나가보고 하는 거지.”

그렇게 모든 것을 주도했던 지훈도 모르는 탈출 인원이, 한 명 더 추가되었다.

선실에는 창문도 없었다. 그저 밖에서 들리는 소란과, 가끔씩 출렁이는 물결을 통해 바깥에서 벌어진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짐작할 뿐이었다.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 정한과 지수, 순영은 서로의 손을 잡은 채 옹기종기 둘러앉아 있었다. 정한은 아이들을 둘러보다 괜히 불안해졌다. 만약 이 모든 소동을 연구소 쪽에서 정리해버리면 어쩌지? 결국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잡힌다면? 정한과 지수는 아이들 중에서도 제법 모범적이라 평가 받는 편이었다. 말썽도 안 피우고, 실제로는 피웠더래도 들키지 않은 거였지만, 연구원들의 말을 잘 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잡히게 된다면 그 평가는 완전히 뒤집힌 채 오랫동안 감시를 받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한은 자신에게 기억이 있던 때부터 지금까지, 섬을 나가고 싶었다. 이제는 그 목소리가 어땠는지, 톤이 낮았는지 높았는지, 말투는 또 어떠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엄마가 해주었던 마지막 말이 있었으므로.

아가, 꼭 도망쳐야 해. 여기서 꼭 살아나가렴.

조막만한 손을 놓칠새라 움켜쥐고 속삭였던 것. 그것은 그의 유언이기도 했다.

연구소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모두가 부모를 모르고 이곳에서 태어난 이들이었다. 연고는 없으며… 단지 ‘능력’이 있는 아이들. 정한은 눈치가 빨랐고 머리 또한 좋았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제 부모를 몰랐고 알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소년은 저를 따뜻하게 품어주며 말을 건넨 사람이 있었단 걸 잊지 않았다. 그건 정한만이 가질 수 있었던 행운이었다.

“끝났나…?”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지수가 슬쩍 사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바깥의 소란도 진정됐는지 더는 뭔가가 터지는 소리나, 사람들이 소리치는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지수의 혼잣말에 화답하듯 문이 벌컥 열렸다.

“뭐야, 두 명만 있다고 들었는데.”

아이들은 바싹 긴장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그들 또래로 보이는 남자애였다. 짙은 눈썹과 커다란 눈, 머리를 감싼 하얀 붕대…… 그 애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소년들에게로 다가서 손을 내밀었다. 발갛게 까진 손바닥이 정한의 눈에 들어왔다.

“반갑다. 최승철이야.”

지수가 그 손을 마주잡고 자기 소개를 했다.

“어…… 난 홍지수, 얘는 권순영인데 같이 왔어.”

“아하.”

왜 같이 왔느냐며 무슨 말이라도 듣지 않을까 싶었는데, 승철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말았다. 왠지 잔뜩 피곤해보이는 낯이었다. 다쳐서 그렇겠지. 정한의 시선이 다시금 머리를 칭칭 감싼 붕대로 향했을 때 승철이 그를 돌아보았다.

“음, 그럼 네가 윤정한이겠네.”

정한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긍정했다. 승철은 대충 아무데나 앉았다가 그대로 드러눕고서는 손을 휘적였다.

“그래, 그럼… 좀 쉬고 있어. 몇 시간 가야 육지에 도착할 거야.”

“다 끝난 거야?”

순영이 묻자 승철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쫓아오지도 못할걸.”

피곤이 묻어나는 것 치고는 자신감 넘치는 대꾸에 긴장이 풀렸는지 지수도 묻고 싶었던 걸 입에 올렸다.

“지훈이는? 다른 방에 있어?”

“엉, 조종실에 있겠지. 옆에 다른 사람들도 있을테니… 걱정 안 해도 돼.”

조종실에서 할 일이 있나. 하여간에 이지훈 걔는 할 줄 아는 것도 많다고 생각하며 정한은 몸에서 힘을 뺐다. 순영은 뭐가 또 궁금한지 승철을 기웃거렸지만, 말을 걸지는 않았다. 피곤해 보이기도 했고 아무래도 환자가 분명했으니까……. 

고요한 침묵 속에서 지수와 정한, 순영은 시선을 마주쳤다. 세 사람은 잠시간 서로를 보고만 있었다. 배가 출발하는지 흔들리는 느낌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그제야 진짜 섬을 나가는구나 실감이 났다.


*순영의 능력: 수인화. 원하는 동물로 변할 수 있으나 주로 호랑이(공격형), 아니면 햄스터(첩보형) 등의 설치류.

올멤 다 등장 예정, 이번 편은 프리퀄이라 바로 다음편과 이어지지 않습니다... 21.05월 작성, 23.12월 포스타입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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