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분(1)
벌레는 땅속으로 숨고 물이 마르기 시작한다.
불을 피우는 것쯤이야 승철과 석민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감투를 쓰고 있어서, 일반인들이 보면 불만 둥둥 떠다니는 괴이한 형상이 될 것이 분명했다. 준휘와 멀지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사부작사부작 뒤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준휘도 불은 갖고 있지 않았다. 마구에조차 불을 붙이지 않고도 성큼성큼 길을 헤쳐가며 홍월천에서 오는 그들을 맞이하러 갔다.
“혼자 안 무섭나?”
“...무서워요?”
“조금. 어둡잖아. 불도 없이 잘 다닌다, 쟤는.”
“사흉수를 볼 때도 별로 무서워하지 않던걸요.”
환각이었음에도 거대한 사흉수를 마주치는 것은 보통 생원들이라도 어려운 일이었다. 준휘는 당황 한 번 하지 않고 사흉수를 없애버렸기에, 잊을 수가 없었다.
속닥속닥 이야기하다 보니 저 멀리서 민규가 보였다. 준휘가 우뚝 서서 손을 휘적 흔드니 곧바로 알아차린 셋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민규의 마구에서 푸른 불빛이 피어나고 있었다. 단번에 주변이 밝아졌다.
“이 어두운 밤에 나온거야?”
“너희 마중 나온 거야.”
“웬일이야? 혼자 나오고.”
“어? 혼자 아니야.”
지훈의 말에 준휘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손을 뻗어 단번에 승철의 감투를 잡아 벗겼다. 뒤이어 곁에 서 있던 석민의 감투도 치워버렸다. 앞머리가 헝클어진 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준휘는 승철의 앞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어떻게 알았어?”
“내가 살던 세상이 인간들의 감투로만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다 보이고, 다 들렸어요.”
“...사람이 배로 늘어나니 북적이고 좋네요. 갑시다.”
나비들이 잠시 나갔다 서당에 돌아올 때는 항상 밤참을 사서 들어갔다. 부러 정해둔 것은 아니었고, 자주 못 나가는 서당 생원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전해진 규칙이었다.
사실 석민이 준휘를 따라 밖으로 나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때마침 지훈이 얼마 가지 않아 반촌이 나올 테니 밤참을 사가자 했다. 승철이 저는 준휘와 망문상전에 다녀와도 되겠냐고 물었다. 민규도 그들을 따라가 보고 싶다며 따라붙었다. 결국 다시 셋씩 나뉘어 헤어지게 되었다. 볼일을 다 보고 각자 서당에 들어가는 것으로 약속하고.
“사형들은 왜 가려는 건데요?”
“마구, 우리 둘이 맞추려고.”
“오-.”
“윤정한이나 홍지수랑 있을 때 오면 놀릴 것 같아서.”
승철의 말을 들은 민규가 씩 웃었다. 오동나무로 된 마구 두 개를 고르니 민규는 선물이라며 붉은 나비와 노란 나비가 달린 고리를 사주었다. 붓의 끝부분에 매달아도 되고 노리개와 함께 섞어도 된다면서 건네준 두 쌍의 나비들은 꽤 값이 나갈 것처럼 생겼다. 비싸 보이는데. 준휘의 솔직한 말에, 민규는 사형들을 위한 마음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딱 끊어냈다.
“...뭐야?”
허리춤에 나비 고리와 마구를 단 것까지 확인한 민규가 문을 열자 마주한 것은, 관원이었다.
“누구십니까?”
“......모란 김가와 파도 김영의 영식이군.”
민규는 홍월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마반인들이 알 정도로 유명했다.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는 관원을 본 민규가 이를 빠득 갈았다. 아플 만큼 물었던 것을 겨우 열어 말했다.
“...네. 김가 민규입니다.”
“나는 한성부 마법관 소속이다. 복수화동이 있다는 신고를 받았는데.”
관원이 몸을 살짝 기울여 민규의 뒤에 있던 둘을 보았다. 팔을 뻗어 승철의 얼굴 앞에 가져다 대어도 별 반응 없었다. 멀뚱히 보는 승철을 뒤로하고 준휘의 얼굴 앞에서도 손바닥을 펼쳐보았다. 번쩍이며 준휘가 가진 문양이 번쩍였다. 탐탁잖은 표정으로 민규의 얼굴에도 손을 펼쳐보니 포도색의 진한 모란 문양이 빛났다. 무어라 할 틈도 없이 관원이 준휘의 목을 거칠게 잡았다. 몸이 크게 요동치지도 않고 얌전히 붙잡힌 준휘는 절대 눈을 깔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서 놀란 승철을 제 뒤로 다시 숨긴 민규가 감히 관원의 팔을 잡았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꿈틀거리는 모란이 되고 싶었다.
“...반항 한번 않았는데, 너무 무례하십니다.”
나지막이 말하는 민규에, 관원이 준휘의 목을 손에서 놓았다. 어린 놈이더라도 모란을 무시했다가는 어떤 화를 입을지 모른다. 곧장 마구를 휘둘러 준휘의 양손을 포박했다. 다른 관원에 의해 거칠게 끌려 나가는 준휘를, 민규는 보기만 했다.
“왜 데려가? 왜?”
“...사형.”
민규는 지금 제가 나설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눈치껏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고 있었다. 준휘 또한 이런 일이 언젠가는 일어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민규만 믿고 순순히 따라가려던 참이었다. 승철은 이를 몰랐다. 저를 막는 민규가 미웠고,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관원이 싫었고, 준휘를 잡고 싶었다. 승철의 물음을 듣고는 준휘가 질질 끌어가는 다른 관원들을 무시한 채로 몸을 돌려세웠다. 준휘의 힘으로는 포박된 손목마저 자유롭게 하고 곧장 도망칠 수 있었음을 대놓고 티를 낸 것이었다. 그에 압도된 관원들이 잠시 주춤했다. 승철의 앞에 선 준휘가 마구와 고리를 다시 떼 그에게 쥐여 주였다.
“꼭 돌아오겠습니다. 기다려요. 사형께 다시 받을게요.”
고개를 살짝 숙여 귓가에 이야기해주고는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바로 옆에 있던 민규만 볼 수 있을 만큼 조용하고 빨랐다. 뭐해?! 관원의 호통에 다시 거칠게 돌려세워져 끌려 나갔다.
“야, 너는 왜 가만히 있어…!”
“그럴 시간 없어요. 빨리. 빨리 가요.”
“뭐?”
“한성부라잖아요. 빨리, 서당에 가야 해요. 뛰어요. 어서!”
의금부로 넘어가면 더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몰라요. 서당으로 곧장 달리며 민규가 말했다. 저는 할 수 있는 일이 적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웬만한 내용은 승철에게 알려주려 했다. 그중에서도 거듭 강조한 것은 ‘의금부로 넘어가면 서당의 황룡조차 손쓰기 어려울 만큼 일이 커지니,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였다.
서당에 들어가자마자 민규는 지수에게 승철을 넘겨주고 청룡 침소로 갔다. 멈춰서 숨 고를 시간조차 없었다. 쓰러지더라도 정한에게까지 알려주고 쓰러져야 했다.
“……원우 형이랑 지훈 사형은 석민이랑 있느라 제대로 못 봤고요, 당시에는 저,랑 승철 사형만 있었어요.”
자르지 못한 머리카락을 끈으로 꽉 묶으며 민규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제 청룡 도포로 환복한 민규가 엉거주춤 일어나 따라나섰다.
“너희들도 여기 가만히 있어. 내일 강의 전에는 들어올 테니까.”
많이 다급한 목소리로 곧장 할 말만 하고 나서는 정한이 낯설었다.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들이 나가는 것을 보기만 했다. 승관이 찬을 툭툭 건드리더니 전에 주막에서 얻어온 두꺼운 서책 좀 보자며 재촉했다. 승관은 이 사건이 일어난 이유를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애써 덜덜 떨리는 손을 숨기며 찬이 건네준 서책을 집어 들었다. 정한이 찢었던 현무 부분은 접어서 구석에 넣어두고, 화신이 있을 만한 부분을 찾았다.
화신花神은 뿌리 깊은 마반인 집안에 그들 고유의 꽃을 새겨주었다. 꽃이 주어진 가문은 그것을 이용해 고유의 문양을 만들어냈다. 오래되고 강한 가문일수록 그 문양이 견고하고 확실해진다.
마반인들이 품는 꽃은 영면을 마주하는 동시에 시들어 사라지게 된다. 힘이 축약되어 사용할 수 없으며, 저승에서 생활할 시 간혹 다른 물건에 힘을 빌려 새기는 것 정도만 가능하다.
허나 2촌 이내의 직계가족에 새로운 인간이 추가되면 생명의 축복에 의해 죽은 이들도 다시 피어난다. 무조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그만큼의 무게를 받아낼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자의 속에서 스스로 피어나는 꽃이므로 저승에서도 불법으로 규제되지 아니한다.
…
간혹 복수화동이 태어나기도 한다. 마반인 부모의 사이에서 두 꽃을 전부 품고 나게 된다. 이들은 남들보다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범위도 넓으며 지능과 체력이 월등히 뛰어난 채로 나게 된다. ……
“이거. 준휘 사형, 이거 때문에 끌려갔을 거야.”
“어?”
“...잠깐만.”
승관이 곧바로 아랫 문단을 읽기 시작했다. 찬도 따라 읽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이거, 사형들한테 보여줄까. 그 말을 듣자마자 서책을 덮고 일어나 문을 벌컥 열었다. 뒤따라 찬도 서책을 듣고 따라나갔다.
“현무로 갈까. 지금 떠오르는 사람, 명호 사형밖에 없는데.”
“...백호 거쳐서 현무로 가는건 어때.”
북쪽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뚝 그치고 곧장 서쪽으로 돌렸다. 그래. 이왕 가는거 최한솔도 데려가자, 하면서. 정한이 돌아오기 전에 들어와야겠다는 다짐도 잊지 않았다.
화신이 만든 마법 중 대표적인 것이 나빌레라이다. 이를 만들고, 알리고, 거두었다. 현재 조선에 유일한 소원 마법이자, 무적 마법이다. 나빌레라를 이용해서 빌면 대가 없이 무조건 이루어지는 꽤 위험한 마법이다.
낙화대전 당시 남용하는 마반인들에 극노한 화신이 그들에게서 나빌레라를 빼앗고 봉인시켰다. 이 마법 주문을 외는 법을 온전히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며, 때가 되면 자연스레 터득하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까지 아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나, 현재 그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은 조선에 세 명 있다. 첫째로는 구삼승할망의 아들이고, 둘째로는 화신의 아들이며, 셋째로는 황룡의 수호를 받을 수장이다. 다음 오방신의 수하가 세대교체가 되면 이후에 더 이상 세대교체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오방신 영수들과 삼신할망의 약조가 체결되었고 이를 들은 옥황상제는 그 몫을 짊어질 후대 황룡의 수장에게 화신의 힘을 빌려 나빌레라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나빌레라
秋分(一), 벌레는 땅속으로 숨고 물이 마르기 시작한다.
열매달 스무나흘
“한성부에서 서찰이 왔어.”
정한이 거칠게 던지듯 내려놓았다. 승철이 다급히 펼쳐보았다.
─
복수화동을 신고한 자는 이가 한양 마학 서당의 생원임을 알렸고, 이 또한 현 백일홍과 안개꽃을 가진 이 자가 서당의 소속이라 밝혔다. 그러나 한성부에 있는 명부에는 이 자의 이름이 없으니, 명부를 다시 내놓을 것을 명한다.
옆에서 훑어보던 지수가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줬어? 하고.
“내가 그걸 왜 줘.”
“...한성부에 있을 때.. 데리고 와야 한대.”
“누가 그래?”
“민규가.”
정한이 이마를 짚었다. 언제 그런 이야기도 했냐고 물을 새도 없었다.
“한성부... 그래. 한성부에 있을 때 데리고 와야지. 의금부로 넘어가면 남들처럼 죽어서 나올 테니까.”
“어?”
그 말을 들은 지수가 바삐 연력을 살폈다. 모레가 추분이었다. 곁에서 이를 함께 본 정한이 스무닷새를 손으로 짚었다. 안도의 한숨을 얕게 쉬다가 다시 들이마셨다.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니까.
“한성부에 가야지. 모레가 추분이네. 오늘부터 한 사나흘 정도는 일하지 않을 테니까. 서둘러 일을 끝내야 해.”
“왜 일을 안 하는데?”
“매화에 가거든.”
정한이 어릴 적 꾸준히 봐왔기에 알고 있다. 춘분과 추분에는 한성부 관원들이 죄다 매화로 왔다. 그 떼거리로 몰려와 누이들을 괴롭히는 놈들이 끔찍이도 싫었다. 그 사이에, 익숙한 사람이 있어서 더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저랑 갑시다. 순영이었다. 지수와 지훈은 서당에 있기로 했다. 정한은 순영과 원우를 데리고 나갈 계획을 짰다. 승철이 저도 나서겠다며 일어섰다가 다시 지수에 의해 앉았다.
“한성부에 가서 누가 일렀는지 확인하고, 준휘를 데려와야겠지.”
“...”
“지금, 호시랑 원우가 정한이랑 한성부에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준휘는 잘 있는지 확인하고 돌아와.”
정한과 원우는 몸보다는 입을 더 잘 사용했다. 순영이 무예생들을 더 빼내 와야 하나 고민하며 찬과 명호를 떠올리기도 전에 지수가 선을 그었다.
“...안 빼 오고 그냥 보고만 돌아와요?”
“응. 준휘는 영안靈眼을 갖고 있어. 감투를 쓰고 가면 너희는 괜찮을 거야.”
“...”
지수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셋을 봤다.
“다녀오면 후에 나랑 승철이가 데리고 나올게. 내가 처리할게. 너희가 하기에는 위험할 것만 같아서. 내가 할게.”
과연 믿음직스러운 동백이었다. 원우가 일어났다. 얼른 감투를 챙겨오겠다는 말에, 순영도 따라 나가서 환복을 하고 오겠다고 했다. 정한은 일찍이 나올 때부터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기에 얼른 다녀오라며 손을 휘적였다.
“...정한아. 나 부탁할 거 있는데.”
“뭔데.”
“백호 행세 좀 해줘.”
“...너 미쳤냐?”
정한이 지수를 데리고 구석으로 갔다. 남은 황룡들은 문서를 정리하고 강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승철도 초조한 것처럼 눈을 도록도록 굴리긴 했으나 나비들을 믿어서인지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지수는 그를 흘긋 보더니 다시 정한과 눈을 마주쳤다.
“우지한테 들었어? 규장각 지하에 마법 서책이 많대.”
“...나더러 거기에 가라고?”
응. 당연한 것에 대답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야 돌았니? 정한의 말에도 지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동백 인장을 쥐어주었다. 해저책방과 비슷할 것이라 했다. 입구에 있을 사서에게 이걸 보여주고 서책에 찍어오면 된다고 했다. 대여할 생각이었다. 여태 그걸 이유로 두어 번 더 용궁을 드나들었으니까 이번에도 그리하겠다고 생각했다. 손에 들린 인장을 빤히 보았다. 이건,
“장서인이잖아.”
“그냥 가져와. 두 번 가기에는 위험해.”
“내가 왜 위험해? 그러면 왜 날 보내는데. 네가 가서 가져오면 되는데.”
“싫어. 그리고, 네가 제일... 귀티나.”
“나도 네가 귀티 난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은 좀 싼 티 난다.”
지수가 아프지 않게 정한을 툭, 쳤다. 정한은 팔짱을 끼고 씩 웃었다.
“말장난은 그만하고, 가져와 줘.”
“뭘 가져와야하길래 이래? 우리 지금 중요한 일 앞두고 있는 거 알지?”
“알지. 준휘만큼 중요한 건 아니니까, 안될 것 같으면 그냥 안 가져와도 돼.”
들을수록 모순덩어리 같았으나 잠자코 들어보았다. 그러니까, 대체 무엇이 필요하냐고.
“찬이가 들고 있던 신들의 서책.”
“...그것만?”
“응. 무거울 테니 주의하고. 도술을 써서 움직여.”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걸 도와주었다. 노리개를 걸어주고, 마구를 매달았다. 꽤 자란 머리를 다시 묶으려다 슬쩍 지수의 눈치를 살피고는 날카로운 가위를 건네주었다. 뭐냐는 말에는 답하지 않고 지수를 등지고 앉았다. 지수도 곧장 눈치채고는 대강 목둘레를 한지로 감싸주었다.
“...감투가 답답해도 화내지 말고.”
“웅.”
“감투 벗지 말고, 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알았다고.”
서걱서걱 잘리는 소리에 맞추어 잔소리해댔다. 좀 전까지 정한이 했던 것처럼 지수도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려댔다. 잔소리 좀 그만하라며 쫑알대는 정한의 입에 사탕을 집어넣었다.
“앞머리 내어줄까?”
“아닝.”
“응. 다 잘랐다.”
“이러나까.”
“얼른 일어나. 저기 순영이도 오네.”
순영은 무예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외부에 나갈 때 입을 옷이 다른 생원들에 비해 현저히 적은 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몸을 쓸 상황이 오면 익숙한 복장이 낫겠다 싶어 무예복을 골랐다. 원우는 염설을 따라 저승에 갈 때나 입던 옷으로 환복한 상태였다.
원우가 먼저 정한의 머리를 가리켰다. 어떠냐는 정한의 물음에, 잘 어울린다는 수수한 대답만 해주었다. 정한과 순영은 세 시진 정도 후에 강의가 있었다. 황룡은 강의에 출석하지 않아도 별문제가 없지만, 나비들은 그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어서 나가보라며 재촉하는 지수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한성부로 향했다. 지수는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명호를 찾아 나섰다.
진시
물이 마르기 시작해 바싹 건조해진 공기를 크게 한 번 들이마셨다. 땅속으로 숨은 벌레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정한은 일각 내외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서책을 살피는 데에는 그의 절반으로도 충분하나 대여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며 정한 기간이었다. 딱 일각이 지나는 때가 되었다고 느낄 때, 정한은 푸른 용 비늘을 사르르 날리며 둘 앞에 나타났다.
“뭘 보고 오셨어요?”
“응? 별거 안 봤어. 이거는 그냥, 무원록. 내 과제에 쓸만한 서책.”
“알차게 챙겨오셨네요.”
“으응. 그리고 이건, 우리 막내가 들고 있던 신들에 관한 서책.”
정한이 가져온 서책은 총 세 권이었다. 무원록은 원우에게 주고, 신들에 관한 서책은 호시에게 주었다. 무원록이라고 칭하는 서책은 한 권이었으나 그 아래에 겹쳐 있는 또 다른 서책이 무엇인지 부러 물어보지는 않았다. 서책들이 꽤 두꺼웠기에 덜어주어야 정한의 몸이 축 처지지 않을 것 같았다. 옷 안에 한 권만 고이 넣어서 고정한 정한이 맑게 웃다가, 이내 곧장 정색했다.
“...왜 그래요?”
순영이 정한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따라온 이유는 이뿐이었다. 함께 돌아다닐 황룡을 보호할 것. 헌데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한은 무의식적으로 제가 감투를 잘 쓰고 있나 확인했다. 그런 정한을 보던 원우도 뒤돌아서 원인을 찾아냈다.
“윤 대감이네요.”
“어떻게 알았어?”
살짝 떨어진 곳에서 윤 대감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원우는 감투 위로 콧등을 톡톡 건드렸다. 시들어가는 꽃의 향기를 쫓아다니며 죽음을 모셨기에 남들보다 예민하게 냄새를 맡았다. 수십 발걸음 너머에서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사형한테서 나는 향보다 더 진해요. 금강초롱은 제 가문의 꽃을 한데 모아두기로 유명하니까요.”
“응... 근데 이리 만날 줄 몰랐어.”
진작에 매화에 있는 제 누이들에게 윤 대감 좀 붙잡고 있어 달라고 서찰도 보낸 상태였다. 정말 이리 만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마법부 중에서도 가장 윗머리를 차지하고 있는 윤 대감의 주변에 관원들이 별로 없었다. 그의 표정은 썩어들어가기 직전이고, 관원은 겨우 두어 명뿐인 걸 보니 잠깐 일이 있어 온 듯했다.
정한이 뒤늦게 알아차리듯 화들짝 놀랬다. 정한의 몸에서 나는 향을 숨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윤 대감은 옥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갈 정도로 관리에 열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마주하는 것조차 더럽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옥에 금강초롱의 향을 풍기면, 안되는 것 아니야? 혹시나 하는 의심으로 감투를 써보면 어떡해. 우리의 존재를, 알아버리면 어떡하냐고.”
저 안에 있는 관리 중 마반인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몇 없는 금강초롱의 향을 맡았다간 제가 이곳에 들어와 있음을 들킬 수도 있다. 셋은 서로 눈치만 보고 상황만 살폈다. 결국 정한은 일찍이 서당에 돌아가기로 하고 원우와 순영만 들어가기로 했다. 죽음을 모시던 꽃무릇의 향이 풍기더라도 관원들은 별생각 않을 터였다. 한두 번 맡는 것이 아닐 테니까. 옥에서 죽어나는 놈은 한둘이 아닐 터였다.
“이 새끼 이거, 끝까지 입을 안 여네.”
“서당 생원 놈이라, 고문을 할 수도 없고, 어찌합니까?”
준휘는 눈을 멍하니 뜬 채로 땅만 바라봤다. 한성부 관원들은 매화에 간 상태였고, 빈자리들을 포졸 두세 명이 겨우 채우고 있었다. 포졸들이 뺨을 툭 툭 쳤다. 온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숙인 상태였다. 양 볼을 움푹 패도록 잡아서 고개를 쳐들었다.
“기골은 장대한 것이 힘아리가 이리 없어서 어따 쓰겠나.”
“...파옥의 우려는 없어 보이는데, 슬슬 퇴근하지.”
사시가 채 되기도 전인 시각임에도 염치없이 퇴근을 논했다. 준휘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의금부에도 연락하라는 명을 들었습니다.”
“그건 모레쯤에 해야 해. 그놈들은 매화에 더 오래 있을 테니까.”
관원들은 준휘를 발로 툭 쳐보기만 할 뿐이었다. 대강 훑어보고는 옥을 나섰다. 그 찰나에 원우와 순영이 들어왔다. 준휘는 뒤섞인 발소리만 듣고도 알아차렸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가장 구석에 들어와서 눈을 마주치자마자 샐쭉 웃어 보였다. 순영의 눈에는 준휘의 온몸이 이리저리 굴러서 만신창이처럼 보였다. 덜컹 소리를 내며 창살에 가까이 몸을 부딪쳤다.
“야. 너….”
“...괜찮아?”
순영은 그대로 문을 부수고 준휘를 데리고 나오고 싶었다. 준휘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젓고 웃었다. 목이 온통 메말라서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원우도 그를 눈치챈 듯 말했다.
“우지를... 데려올 걸 그랬다. 나는 물을 못 만드는데.”
“온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데 그래?”
준휘는 괜찮다는 듯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지금은 아무것도 처리된 것이 없어. 근데, 너도 알다시피 네가 의금부로 넘어가면 정말 손을 쓸 수가 없을 것 같거든. 이틀이야. 이틀 안에 널 구하러 올게.”
“...”
“어, 그…. 아니다.”
못 오게 되면 문을 부수고 곧장 서당으로 오라고 하려 했으나, 순영은 뒷말을 삼켰다. 그럴 리 없다. 분명 구하러 올 것이다. 준휘는 알겠다고 웃으면서도 뒷말을 이어주었다. 확실히 해야 하니까,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부수고 갈게.”
“...”
“내가 서당에 들어가면, 그 후에 처리는 따로 하면 되는 거잖아.”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였다. 이리저리 긁힌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부수고 가겠다고. 안 오면. 준휘의 말에, 원우가 창살을 꽈악 잡았다.
마법 서당 또한 문묘를 관리하는 성균관과 묶인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애석하게도 준휘가 붙잡힌 지역이 마반촌 끝자락에 있어 애매하게 해당하지 않아 잡혀 온 것이었다. 관원들이 민규를 보았을 때 곧장 알아채고 살짝 망설이기도 했다. 만일 준휘가 스스로 서당의 구역으로 뛰어 들어오게 되면, 한성부는 물론이고 의금부도 그들에게 아무런 요구를 하지 못하게 된다. 물론, 자질구레한 일 정리는 황룡의 몫이었고, 이 또한 순영과 원우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 전에, 나 구하러 올 거지?”
“당연하지.”
“빨리 올게. 네 명부가 없어서 여기서도 곤혹을 겪을 테니까, 그새 우리도 준비해서 올게.”
“응. 걱정 안 해도 돼.”
순영이 슬쩍 주변 눈치를 보더니 이제 나가보자며 일어서려 했다. 순영의 움직임에 따라 시선을 옮기던 준휘의 눈앞에, 옥춘당 하나가 내밀어졌다. 얇은 원우의 손목이 창살 너머로 들어와 있었다. 입. 빨리. 간결한 원우의 어조에 순순히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오물거리는 그를 보다 뭐 더 할 말이 있냐고 물었다.
“승철 사형 보고 싶어.”
“덜 힘든가 봐, 얘.”
즉각으로 튀어나온 대답을 들은 둘은 장난스레 웃었다. 진짠데.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웃기까지 하는 준휘에게, 끝까지 꼭 데리러 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만 거듭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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