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월천
전원우와 이지훈과 김민규
열매달 이레
“원우야. 나 가기 전에 마지막 소원 하나만 말하자.”
“나도.”
“...뭡니까?”
“이십의 끝자락에조차 미치지 못하고 죽는 우리를 친구로 대해줘.”
“......무슨..”
“사자, 독각 말고. 우리를 염설과 이연으로 불러줘.”
“그리고 이제 우리 때문에 울지 마.”
열매달 스무사흘
지훈은 원우의 방에서 잠을 청했다. 일찍이 눈을 뜬 원우가 지훈이 자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곧장 마루로 걸어 나왔다. 비복들이 아침상을 치우다 원우를 마주하고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쩔쩔맸다.
“조금 전에 어른들께서 아침을 드실 때 말을 해주지 않아서 몰랐습니다. 지금이라도 상을 다시 차리겠습니다.”
“...안 먹어도 됩니다. 급히 하실 필요 없어요.”
“그, 그럼 어떻게…….”
“음.. 방에 친우가 하나 더 있는데, 그 애가 일어나면 오찬을 차려주실 수 있습니까? 때가 되면 제가 다시 부르겠습니다.”
비복들은 알겠다고 연신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고개만 까딱이며 대응해준 후, 조용히 마루 끝에 앉아 있는 익숙한 제 신의 곁으로 갔다. 바로 옆 화단에 손을 뻗어 물을 뿌려주던 그가 웃으며 물을 거두었다. 거짓말처럼 손끝에서 흐르던 물길이 맺었다.
“너는 망자한테도 말을 올려서 하더니, 비복들한테도 그러니?”
“인간은 모두 존중받아야 할 존재니까요.”
“염설을 닮아서 앞뒤가 꽉꽉 막혔군.”
“…….”
염설을 언급하자 인상이 펴질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잠에서 덜 깨어난 상태라 비몽사몽 했는데. 그는 그런 원우를 흘긋 보더니 웃으며 안경을 툭, 건드렸다. 원우는 별말 없이 흐트러진 시야를 재정비했다.
“많이 어리던데. 저 비복.”
“그러니까 더 소중히 대해야죠.”
원우가 집에서 여태 보지 못했던 비복이었다. 한두 마디 해본 것이 전부였으나 집안에서 일하는 것이 처음인 것이 티가 났다. 서당의 방자들이랑 나이가 비슷해 보여서 괜히 조심스레 대하게 됐다.
“…영수께서는 왜 이곳에 계십니까?”
“오랜만에 은퇴한 내 수장과 신령을 보러 왔지.”
원우의 아버지는 현무의 수장이었고, 어머니는 뱀의 신장이었다. 현무는 뱀과 거북의 형태를 갖고 있으므로 십이지신 뱀의 영수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원우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날 수 있었고. 오방신장의 수하에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혼인할 수 없었고,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후에 지상에 내려와 영생을 살아가던 중 혼인하고 원우를 낳은 것이었다.
영수들의 수하들이 제 몫을 톡톡히 해낼수록, 그들의 후대가 태어날 가능성이 작아진다고 했다. 원우의 양친이 하늘에 있던 시절이 너무나도 평화롭고 순탄하게 흘러갔기에, 꽤 오랜 시간 영수와 함께했고 그 덕에 다른 수하들보다 자주 만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현무는 그저 ‘너희가 낳은 아이가 슬슬 현무의 신령으로 올라올 때가 되어간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친히 내려온 것이다. 그러나 막상 지상에 내려오니 그들은 없고 신령과 수장이 될 놈들이 나란히 한 방에 붙어서 자고 있었다. 서당에 안 갔나? 현무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비복들은 감히 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만 같았기에 얌전히 만들어준 아침밥을 먹고 기다리던 참이었다.
“너희, 어느 집안인지 제대로 알려주기 싫어서 꼭꼭 숨기고 다니는 것 아니냐?”
“...맞습니다.”
“그 어린 비복, 교육을 더 해야겠던데.”
꽃무릇 가문에서 태어난 현무의 수장과 뱀의 신령. 그리고 또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후에 현무 신령이 될 아들. 얼마 전 소멸한 저승사자 염설까지. 이들은 각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티를 내지 않으려 온갖 힘을 다하며 살아왔다. 대부분의 마반인들은 꽃무릇에 대해 말하면 ‘혼을 마주하고 죽음을 모시는 집안’이라고만 할 뿐, 그 속에 어떤 인물들이 살아가는지는 알지 못했다. 영생을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짊어진 만큼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대문을 열고 들어오니 곧장 종들이 알려주더군. 대감과 마님께서 장터에 나가셨다고. 나도 어디 가서 마님 소리 못 들을 상이 아닌데. 내가 누군지 묻지도 않고 네 양친의 행방을 알리더구나.”
“비복들도 우리 집 대문은 쉽게 열지 못한단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요. 웬만한 인간은 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쟤들은 내가 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리 대한 거냐? 일반인과 다를 것 없이 대우하던데.”
“비복들은 당신의 존재를 모르니까요. 어린아이들은 신과 인간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합니다. 마반인과 일반인조차 구분을 못 해요.”
원우의 말에 현무가 고개를 까딱이며 대강 들은 체를 하더니, 미처 못 물어봤던 것이 있다며 원우와 눈을 마주쳤다. 곁에 있기만 해도 뿜어져 나오듯 느껴지는 음기가, 동공을 통해 온몸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강해지는 느낌이었다.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보다가, 한없이 멀어지니 기분이 어떠니?”
“…….”
“너희 어머니께서 걱정이 많으실텐데.”
“...압니다. 일이 많고 바쁘다는 핑계로.. 사자를 보내고 나서 곧장 서당에 들어갔으니까요.”
“서신이라도 보내지 그러냐. 네가 어떤 생각으로 서당에 있는지.”
“비단 소멸한 사자뿐만 아니라 제 미래에 대한 말도 해야 하니, 서신보다는 이른 시일 내에 집을 들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영수조차 귀한 방문을 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솔직하게 터놓는 원우에, 현무는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그냥저냥 서당에서 조용히 공부나 하다 제 운명을 받아들이는 줄만 알았다. 그리 사랑하던 제 사자의 소멸에도 별 동요 하지 않는 듯했고, 나비라고 불리는 놈들과도 잘 지내니까. 그 외에는 별다른 친우가 없는 듯했어도... 사회성도 없고 그저 온통 무딘, 공부나 하는 놈일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꽤 융통성이 있고 어른을 대할 줄 아는 놈이었다. 물론 의외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구석도 있었고. 하지만 이건, 아직 어리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뭐.”
“음, 잠시만요….”
원우가 말끝을 흐리더니, 제 방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지훈이 아직도 자고 있음을 확인하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지훈에게 들려주고 싶지는 않은 질문이었다. 비슷한 아픔을 갖고 있을 테니까.
“죽음을 관리하는 현무는, 날이 갈수록 죽음에 무뎌집니까?”
“왜. 무뎌지고 싶은 것이냐?”
“그러기 싫어서 묻는 겁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제게 영원을 굳이 약속하지 않았는데…….”
“근데.”
“염설은, 제게 영원을 약속해서요.”
직위를 얻고 책봉식을 하는 그날, 인간이 아닌 신을 모시는 존재가 되므로 인간으로서의 나이는 그때 멈추게 된다. 후에 세대가 바뀌어 은퇴한 후 다시 하늘에 내려오더라도 그들의 뜻이 변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원우의 양친은 그들의 자식과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었기에 그들에게는 영생, 영원함이 당연하였다. 때문에 원우 앞에서 영원을 내세운 적이 없었다.
반면에 언제 흩어질지도 모르는 까마득한 세상에 살던 염설은, 처음으로 원우가 마주할 필멸의 존재인 제가 그에게 마냥 두려움으로 남을까 싶어 안될 것을 알면서도 영원을 약속했다.
원우는 그가 미운 마음에 묻는 것이 아니었다. 질문 그대로였다. 제가 염설의 곁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끝내 정해진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망자로 분류되어 저승까지 갈 때도 염설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들을 인도했다. 제가 현무 신령이 된 후에 염설처럼 될까 두려운 것이 첫 번째였고, 그 과정에서 염설의 존재를 잊어버릴까 싶은 마음이 두 번째였다. 현무도 그의 생각을 알고 있었는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주었다.
“네가 영생을 살 놈인 것을 알았으니 그랬겠지. 사자도 독각처럼 미래를 어느 정도 내볼 수 있으니까.
“나쁜, 친우네요. 염설이.”
현무가 흥미롭다는 듯 원우를 보았다. 처음에는 실수인 줄 알았는데,
“이제 사자가 아니라 염설이라 하니?”
“네. 염설과 이연의 마지막 소원이었습니다.”
오호... 현무의 동공이 뱀처럼 얄팍해졌다. 소원이 정확히 뭐였는데. 현무가 묻자 원우가 말하기를 망설였다. 괜찮다는 듯 기다려주자 끝내 입을 열었다.
“이십의.. 끝자락에조차 미치지 못하고 죽는 우리를, 친구로 대해달라고요.”
“그게 이름 두 자를 막 부르란 소린 아닐 텐데….”
“신이 아니라, 그저 일찍 세상을 떠난 친우처럼, 끝까지 기억하고 품어달라는 뜻.”
“그래. 그거겠..지.”
지훈의 목소리였다.
“어? 일어났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안녕하심까. 하고 인사하는 지훈에, 현무는 자주 본 사이인 것처럼 반기며 앉으라 했다. 원우는 비복들에게 상을 차리라고 말하고 오겠다며 사라졌다. 그 자리에 앉은 지훈이 어색한 자세로 볼만 긁적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방금 제가 말한 뜻이 아니라, 실제로 이름 두 자로 불러달라 했습니다.”
“그놈들이 그렇게 말했어?”
“...네.”
“본 이름은 석 자인데?”
“함께한 순간에는 두 자였으니까요.”
염설원炎爇圓과 이연지李燃知. 날씨(자연) 독각을 제외한 모든 신은, 인간에서 신이 될 때 인간일 적의 이름 중 마지막 글자를 떼어낸 채로 살아가게 된다. 떨어져 나간 그 한 글자는 후대에 자신을 모실 집안 아이들의 이름에 들어가게 된다. 염설과 이연은 함께 했던 신으로서 살았던 순간이 소중한 것이므로 두 자로 불러달라 한 것이었다. 원우와 지훈이 없던 석 자를 사용한 과거는 굳이 회상할 필요가 없었다.
상을 들고 올 줄 알았던 원우가 저 멀리서 터벅터벅 홀로 걸어왔다. 옆집에서 민규네 독각과 민규가 점심 같이 먹자는데? 민규랑 둘이 계시나 봐. 원우의 말에 현무가 일어나 원우의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누가 봐도 싫다는 뜻이었다. 온몸으로 팍팍 티를 냈지만, 그래도 예의상 한 번은 물어보았다. 밥은...중요하니까.
“...같이 가시렵니까?”
“아니. 김영 그 자식이랑 난 안 맞다.”
“예…….”
수백 년을 살아온 현무와 바다가 안 맞는다고 하는데, 고작 스무 해도 살지 못한 현무 생원이 만들어 낼 대처 방법은 없었다.
“모란에서 바로 서당에 가냐?”
“네. 추석 연휴가 오늘까지고, 내일부터는 또 강의를 들어야 합니다.”
“어. 늦기 전에 들어가고.”
원우의 방 뒤편에 큰 나무가 있다. 그곳을 통해 하늘로 올라가려는 것만 같았다. 깔끔하게 떠나기 위해 흔적을 지우는 방식이었다. 왔던 길 그대로 다시 나가는 것. 우리 가족을 뵈지 않아도 되냐는 원우의 물음에 현무는 잠시 멈칫했다.
“...내 목적도 잊고 떠날 뻔하다니. 꽤 오래 살긴 했나 보다.”
“방에 계십시오. 독각께는 저희만 가겠습니다.”
“그래.”
원우의 방 문을 닫기 전에, 살짝 고민하는 듯하더니 그들을 불러세웠다. 애초에 그 문이 닫히기 전까지는 움직일 생각이 없었던 현무들은 귀를 쫑긋 세우며 그에게 집중했다. 현무는 그 형태가 꽤 만족스러웠다. 얌전한데 말도 잘 듣네, 어린 현무들이. 하면서 싱긋 웃었다.
“너희가 아무리 잘난 꽃들이더라도 그게 나비들의 안전을 보장하지는 못해. 이걸 잊지 말거라.”
“...?”
“도깨비랑 밥 맛있게 먹고.”
알 수 없는 말만 하고는 인사도 듣지 않고 문을 쾅 닫아버렸다. 무슨 말이야, 저게? 지훈이 원우를 봐도 원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그냥 조심하라는 거겠지. 빨리 가자. 원우가 대문을 붙잡고 지훈에게 어서 나오라고 손짓했다. 아무리 튼튼한 능소화여도 마법이 걸린 원우네 대문은 함부로 열지 못하기에, 꽃무릇이 직접 잡고 있어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철통 보안이네. 지훈이 중얼거리자 원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나빌레라
紅月川
민규네 독각은 현무와 다른 의미로 부담스럽고 불편하다. 물건이 아닌 자연에 깃든 도깨비. 오방신을 포함한 모든 영수보다 한 수 위에 있는 신이다. 그런데도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위해 멋대로 살아가는 신. 대개 친절하지만 그만큼 장난이 심하다. 힘도 세고 눈치도 빠른 독각이다.
웬만한 깡이 아니고서는 합석하여 밥을 먹기는 힘들다. 그런데도 어린 현무들은 어린 청룡을 위해 함께 식사해주었다. 홍월천 모란 김가의 음식은 휘황찬란하기로 유명하다. 입이 짧던 원우와 지훈도 단숨에 그릇의 음식들을 비워주었다. 식사하고 상을 치우는 비복들을 하나하나 응시하던 독각이 민규의 흉통에 달린 노리개를 툭툭 건드려보았다. 소란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독각 때문에 상이 차려진 이후로는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목소리를 드디어 꺼낼 수 있게 되었다.
“이건 무엇 하러 달고 다니는 것이야?”
“아. 제 사형들이 만들어준 노리개입니다.”
“너희도 있네. 여러 명이 쓰는 것인가?”
원우와 지훈에게도 있는 홍옥 노리개를 슬쩍 보더니 물었다.
“소환 마법이라도 걸어두지 그래. 너 정도는 만들 수 있을 텐데.”
독각이 원우를 보며 말했다. 어떻게 하는지 알려달라는 원우의 말에, 그가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민규한테만 알려줄 것이다. 너희는, ...뭐, 이연과 염설한테 배워라.”
“독각...!”
민규가 기겁을 하며 독각의 입을 막으려 했다. 민규의 등 너머에 있던 사형들은 그저 웃기만 했다. 독각에게 저 정도는 실없는 장난이란 것은 알 수 있었다. 독각은 그들에게 이리 오라 불렀다. 민규의 노리개와 마구를 동시에 빼냈다. 한 번만 알려주겠다며 단단히 일러두었다.
두 팔을 걷고 마법을 걸려던 찰나, 번쩍이며 힘이 실리는 노리개에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백호 신령의 아들이 건 마법이더라도 파도를 이끄는 독각이라면 풀지 못할 것이 없었다.
동백이 피어난 노리개 위로 옅게 소환召喚 마법을 걸었다. 보통 마법은 제 소유의 마구가 아닐 때는 힘을 전부 담지 못하거나 잘 걸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민규의 마구로도 온전히 독각의 힘을 전부 끌어모을 수 있는 것을 보고 또다시 감탄했다. 짙은 푸른색으로 모란의 문양이 나타났다. 파도를 이끄는 독각이라 자색이 아닌 청색이 나왔다. 붉은 동백 위에 작게 모인 푸른 모란이 이질적이면서도 잘 어울렸다.
독각이 민규에게 다시 노리개를 돌려주고는 원우와 지훈에게 할 수 있겠냐는 듯 턱짓하니, 원우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도 작게 대답했다. 할 수 있다고. 둘이 할 줄 아는 정도면, 민규도 곧장 따라 할 수 있겠다 싶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의 그…. 나비라는 놈들에게는 너희가 걸어주거라.”
“...네. 감사합니다.”
“뭘 이런 걸 갖고. ...아.”
“...?”
“마법이 걸린 너희들끼리 서로 소환할 수 있는것이다. 너희들이 모시던 신은 부르지 못해.”
“악, 제발요! 독각!”
민규만 안절부절못했다. 이들의 속이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는지 가늠조차 못 해서 언급조차 못했던 민규인데, 제 독각은 눈치도 없이 제 사형들의 부서진 마음을 계속해서 갈아버리려는 느낌이었다. 괜히 미안해져서 원우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울먹이는 표정을 지으니, 원우가 너스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얀 손으로 투박한 민규의 손등을 슬그머니 겹쳐 잡아주었다. 독각은 주변에 있던 종들이 전부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말을 편히 했다.
“그래서 왜 왔다고? 물어볼 것이 있다며.”
“...아. 나빌레라라는 마법을 누가 사용할 줄 아는지, 아십니까?”
“알지. 왜? 네 주변에 그 마법을 쓰는 놈이 있을까 싶어서?”
나빌레라. 소원 마법이다. 현재 조선에 유일한, 무적 마법이다. 무엇이든 소원으로 빌면 이루어준다. 무조건 대가 없이 이루어지는 마법이라 꽤 위험한 마법으로 분류된다.
“전에 서책에서 봤을 때, 낙화대전 때문에 화신花神이 크게 화를 내며 마반인들에게서 나빌레라를 빼앗았다고 적혀있었습니다.”
“잘 아네. 어디서 봤어?”
“...제가.. 천마를 만들어 해저 책방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원래 나빌레라는 여러 가문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제주에서 낙화대전이 벌어졌을 때, 본인을 지키기 급급하여 모두가 나빌레라를 사용한 탓에 자연조차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섬 전체에 큰 화를 불러일으켰던 적이 있다. 이후 화신이 모든 나빌레라를 거두어 사문화시킨 것이다. 원우와 지훈은 그리 알고 있었다. 해저 책방에서 본 글이니, 잘못된 문서일 것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
해저 책방. 그 말을 들은 독각이 한 쪽 입꼬리만 올린 채로 웃었다. 처음으로 본, 심기가 불편한 독각의 표정이었다.
“좋겠다. 부러워.”
예상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그 탓에 메우지 못할 정적이 생겨 한참 동안 셋은 서로 눈치만 보았다. 그런 나비들을 보던 독각이 분위기를 흐려 미안하게 되었다며 곧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나빌레라라는 마법을 누가 사용할 줄 아는지...”
“...네.”
“당연히 만든 이가 사용하겠지.”
“에?”
“현재 나빌레라를 사용할 수 있는 자. 만들고, 알리고, 거둔 꽃의 신. 화신이잖아.”
“...그 분이 전부입니까?”
“그랬는데, 이제는 아니야. 혼이 저승에 귀속된 조선의 유일한 인간. 구삼승의 외아들도 사용할 수 있어.”
문준휘. 원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준휘가 저승에 귀속된 아이라는 것은 지훈과 민규가 알지 못하는 사실이니 굳이 입 밖으로 내보내지는 않았다.
“...알고 보면, 막, 준휘 사형인거 아니야?”
“어?”
“아니, 그냥 물어보는 거야. 보통 꽃을 두 개 품고 태어난 자는 한 해를 넘기기 전에 없애버리잖아.”
“…….”
“우리는 그 형이 복수화동인 걸 아니까.”
“…….”
“...나 솔직히, 그렇게 오래 산 복수화동은 처음... 봤거든.”
마반인들 사이에서 태어나는 복수화동複數花童은 잡종, 또는 돌연변이로 취급되어 곧장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태반이었다. 만약 죽지 않고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조선에서는 마음 편히 살아갈 방도는 없다는 것을 셋은 알고 있었다. 당장 나비들은 한 명에게 꽃이 서너 개가 되더라도 별생각 않겠지만 같은 땅에 살아가는 다른 마반인들은 생각이 달랐으니까.
당장 밖에서 복수화동인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은 빠른 시일 내에 이유도 없이 관청에 끌려갈 것이다. 가문과 그들의 힘을 내세워 살아가는 마반인들의 비약한 생존 방식 중 하나였다. 꽃이 두 개면 힘도 두 배일 것이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도 배가 될 것이니 그놈의 뿌리부터 끊어내자는 암묵적이고 나약한 생존 방식. 복수화동이 살아있으면 집안이 멸한다는 되도않는 소문 때문에 버려져 저승으로 오는 아이들을, 원우도 수없이 보았다.
독각은 제 주변 인물 외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민규네 집안에 복수화동이 없다는 사실만 생각할 정도로 가문 외의 일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기에, 민규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그들에게 하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화신이 구삼승과 사이가 각별했거든. 구삼승은 저승에서의 마법만 사용할 수 있으니 나빌레라를 부여할 수 없었어. 그래서 그의 외아들에게 준 것이야. ...아. 하나 더 있다. 화신의 아들. 근데 그놈은 그 사실을...,”
“근데 독각은 그런 걸 어디서 알아내는 거예요?”
민규의 순수한 궁금증에, 독각은 그저 오래 살면 알게 된다고 알려주었다. 말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 민규의 이마에 딱밤을 놓아준 후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자기가 나빌레라를 사용할 수 있는 놈이란 거, 지금쯤이면 알아차렸을 수도 있겠다. 사는 것에 욕심이 없는 놈 같았는데.. 그래도 열여섯 해 정도 살았으면 터무니없는 소원 한 번쯤은 빌었겠지.”
“서당에 들어와있습니까?”
“...너희가 알고자 하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군.”
하나하나 캐물으니 독각도 혼란스러워졌다. 끝없는 지식을 적절히 끊어 알려주어야 하는데, 이러다간 주체 없이 죄다 알려줄 것만 같아 뒤늦은 걱정이 몰려왔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살아 세상이 지긋지긋한 독각이더라도 어린놈들에게는 적당한 선에서 행복만 줄 의무가 있다. 깊은 내용까지 파고들었다간 누구 하나 상처받는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외부에 절대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말해주십시오.”
가만히 듣기만 하던 지훈이 확신에 찬 얼굴로 걱정하지 말고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조그만 놈이 저리 부탁을 하는데, 오래 산 독각이 마다할 수가 없었다. 열과 성을 다해 필요한 정보만 쏙쏙 알려주마.
“...단언하는 우지 네가 귀여우니, 알려주마. 그 아들의 보호자는 물의 신선. 그 애는 어쩔 수 없는 마반인이야. 헌데 꽃의 신은 일반인인 척하고 다녀. 꽃향기를 풍기는 인간은 많으니까 그들에 묻혀서 사는거지. 항구에서 꽃을 판매하는 상인으로 살고 있을 게다. 그놈은 물비린내와 꽃향기를 애써 숨기며 양반인 척 하고 살겠지.”
“...그럼 그들은 떠돌이 생활을 하며 사는 중입니까?”
“설마 그러겠어. 지주로 살면서 농민에게 지대를 받고 살지. 꽃 몇 가닥 팔아서 돈이 되겠어? 신들은 본인의 안녕에 도를 튼 놈들투성이야.”
......최한솔? 민규가 이전에 1년 나비들과 했던 이야기가 번뜩 생각이 났다. 에이, 말도 안되는 소릴. 아니겠지. 순간 들었던 의심을 곧바로 치워버렸다.
“조선의 마법에 관한 모든 자료는 규장각에도 있다. 규장각 내부로 가기 위해 설치된 계단. 그 아래로 가면 마법 서적들이 있어.”
“...그곳에, 가라는 뜻입니까?”
“아니. 그냥 있다고. 나중에 갈 일이 생기면 가봐. 쓸데없이 해저에 드나들지 말고.”
홍월천 나비들은 어느 곳으로 가든 무서울 것 없었다. 여태껏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지만, 불리한 상황이 닥치면 각자의 집안을 뒷배경으로 삼아 권력을 쟁취할 수 있는 나비들이었다. 그런데도 간혹 영수나 신을 뵐 때는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훈의 힘을 끌어모아서 만든 천마로 용궁에 들어가 용왕을 뵙고 해저 책방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규장각에 감투를 쓰고 들어가 몰래 털어보는 것도 재미는 있겠다, 싶었다.(물론 대부분의 재미는 몸이 날쌘 호시가 곁에 있다는 전제로 볼 수 있다.)
일단은 서당에 바로 돌아가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여유 부리지 말고 얼른 들어가라는 독각의 말에 거듭 대답하고는 서당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원우와 민규의 집에서 말을 준비해주려 했지만, 마땅히 세울 곳도 없었고 돌려보낼 방법도 없어 결국 걸어가게 되었다. 거리가 애매하긴 하지만 셋의 체력으로는 충분히 두 시진 안에 도착할 것 같았기에 나온 결론이었다. 여름도 한참 지났으니 걸어가는데 무리는 없겠다 싶었다. 우선 서당으로 출발한다고 사형들에게 지비를 날리고,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슷한 속도로 그들을 앞서 날던 지비를 따라갔다.
원우가 보냈던 지비는 주작 침소로 날아왔다. 지훈과 민규는 정한과 지수에게 보냈다고 했다. 한 글자씩 읽던 승철이 대강 내용을 정리해서 읊어주었다. 홍월천 애들 이제 곧 오겠다. 내일 오전에 강의가 있어서 늦었지만 지금 출발한다고 썼어. 승철의 곁에 누워서 함께 지비를 보던 준휘가 벌떡 일어났다. 몸집이 작은 편이 아니라서 꽤 잽싸게 일어났는데도 석민마저 그 기척을 알아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 가요?”
“홍월천 애들 데리고 올게요. 이제 온다고 하니까.”
“걔들만큼 마법으로부터 방어적이고 안전한 애들이 어디 있다고.”
...그런가..? 준휘가 뒷머리를 벅벅 헤집었다. 근데 뭔가 감이 안 좋아요. 큰 눈에서 눈동자가 도록도록 굴러갔다. 어딘가 불안한 사람처럼 서 있는 준휘에, 승철과 석민도 마땅히 거절하지 못했다. 저 애가 저러는 이유가 있겠지 하는 마음에서였다. 간혹 반출을 하고 뒤늦게 서당에 귀가하는 생원이 생기면 무예학도들이 나서서 그들을 도와주긴 했다. 아무래도 나비들이라 더 신경이 쓰였나보다. 습관처럼 활을 들었다가, 그럴 필요는 없겠다 싶어 마구만 허리춤에 찼다.
“늦어서 걱정돼요. 얼른 데리고 들어오겠습니다.”
“뭐, 그래……. 다녀와.”
휘적휘적 손을 저으며 간결히 인사를 하고 주작 침소를 떠났다. 석민은 괜찮을까요? 하면서 승철을 보았다. 승철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예를 워낙 잘하기도 하고, 제 몸 하나도 잘 지킬 것이고. 걱정되면 뒤따라 가볼 테냐 물으니, 석민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뒤를 밟아보자며 웃는 석민이 마냥 귀여워서 동의하고는 감투를 꺼내 들었다. 이왕 몰래 따라갈 거면 제대로 가보자면서.
열매달 스무나흘
둔탁한 소리가 아래에서부터 올라왔다. 화들짝 놀란 찬이 정한을 보았지만, 정한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민규가 왔나 보네. 하면서. 곧 열린다. 삼, 이, 일. 정한이 수를 세자마자 벌컥 문이 열리며 민규가 뛰어 들어왔다. 온몸이 땀 범벅이었다. 승관은 조용히 민규의 옷을 꺼내 들었다.
“왜 이렇게 급하게 들어와? 너 무서울까 봐 등불도 안 꺼두고 있었는데.”
“...사형. 물 드릴까요?”
“아니, 문준휘. 준휘 사형이 옥에 갔어. 여기 못 들어왔어.”
어서 씻고 오라는 의미로 건네주려 했으나, 민규의 말을 듣고는 손에 들려있던 옷가지를 죄다 떨어트렸다. 정한은 벌떡 일어나더니 민규의 어깨를 거세게 잡아챘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왜 갔는데. 잡혀갔어?”
“꽃이 두 개라서 잡혔어요. 어떡해요?”
제주에서 만천하에 공개된 이후로 정한과 지수가 예민하게 여기는 부분이긴 했다. 준휘가 갖고 있는 두 꽃이 승철에게는 예민한 부분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복수화동에 대한 이야기는 알려주지 않았다. 대충 눈치껏 좋은 현상이 아니란 것만 알고 있어도 괜찮다고 여겼는데, 일찍이 말해줄 걸 하는 후회가 미친 듯이 몰려왔다.
당장 내일 꽃이 두 개인 것은 죄가 아니란 것을 모든 생원에게 알릴 생각이었는데. 제주에서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싶었다. 당혹감보다는 화가 먼저 치밀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차올랐는데, 승관과 찬의 표정을 보고는 애써 숨기며 민규에게 다시 물었다. 무의식적으로 이를 꽉 깨문 탓에, 턱이 아려왔다.
“최승철은.”
“원우 형이랑 같이 지수 사형한테 갔어요. 준휘 사형 끌려가는 거, 승철 사형이 봤어요.”
“일어나. 누각에 가자.”
“원우 형이랑 지훈 사형은 석민이랑 있느라 제대로 못 봤구요, 당시에는 저,랑 승철 사형만 있었어요.”
제주에 다녀오느라 자르지 못한 머리카락을 끈으로 꽉 묶으며 민규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새 바닥에 떨어진 제 청룡 도포로 갈아입은 민규가 엉거주춤 따라나섰다. 너희들도 여기 가만히 있어. 내일 강의 전에는 들어올 테니까. 곧장 할 말만 하고 나서는 정한이 낯선 탓에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들이 나가는 것을 보기만 했다. 후에 승관이 찬을 툭툭 건드리더니 전에 주막에서 얻어온 두꺼운 서책 좀 보자며 재촉했다. 승관은 이 사건이 일어난 이유를 눈치챌 수 있었다. 애써 덜덜 떨리는 손을 숨기며 찬이 건네준 서책을 집어 들었다. 정한이 찢었던 현무 부분은 접어서 구석에 넣어두고, 화신이 있을 만한 부분을 찾아야 했다. 시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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