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소한

살얼음이 한 겹씩 쌓인다.

현재 by 반야

해오름달 이틀

김민규는 행운이 따라다닌다. 원우는 항상 그리 생각했다. 수문장을 입 밖으로 낸 지 보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운명적으로 온 용왕의 서찰이 이를 증명했다. 열어본 서찰에는, 용궁의 수장을 선출할 시기가 되었으니 적절히 조건에 부합하는 생원을 하나 뽑아 데리고 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한 각 서당에서 데려온 세 생원끼리 대결을 하여 최종적으로 한 명만 선발할 것이라 했다. 한양 생원의 조건은 이러했다. 2년 생원 이상이 되는 학력을 갖출 것, 키는 여섯 자 정도가 되어야 하고, 서당 재학 중 치렀던 여덟 번 이상의 계절 시험에서 과락이 없을 것. 당연하게도 민규는 모든 부분을 충족시켰다.

“재능이 있고 의지가 있으니 희망이 따라오는 거겠지.”

원우의 곁에서 서찰을 본 승철이 공고문을 쓰며 말했다. 재능에, 의지에, 희망까지. 원우는 입 안에서 맴도는 그 단어들을 하염없이 곱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순영을 비롯한 다른 황룡들이 모였다. 승철이 쓴 공고문을 보며 토론한 결과, 무예 대결을 통해 후보를 한 명 선출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무작위로 두 조를 짜서 연승전의 끝까지 서 있는 자를 데리고 간다는 것까지 공고문에 명시하고 황룡의 인장을 찍어 서당 곳곳에 붙였다.

다들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생원들은 하나하나 조건에 충족하는 이들을 찾아보며 서로 지원해보라 부추겼고, 그에 힘입은 몇몇은 당당히 누각으로 걸어가 지원서를 넣기 시작했다.

나비들 내에서는 키의 척도를 명호로 두고 그보다 큰 생원을 추려냈다. 서당 안팎으로 초미의 관심사였던 생원 중 하나인 민규는, 당연히 공고가 벽에 붙자마자 지원했고.

아쉽게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승철이 준휘에게 제안했으나 제 두 꽃을 더 이상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부러 말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고. 힘을 두 배 가졌다느니, 죽었던 놈이라느니, 다른 생원들이 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굳이 그런 소문을 들을 일을 하고 싶진 않았다.

민규와 준휘 다음으로는 원우였다. 원우가 현무의 신령이 된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무니까 재미 삼아 한 번 겨루어보라는 지수의 제안이 그 시작이었다. 정말 만약에 결승까지 가게 되면 기권하면 되니까. 죄다 민규만 한 덩치의 생원들이 참여하는 마당에 원우가 이길 확률이 높지 않은 것도 있었다. 원우는 결국 나비들의 성원에 못 입어 꽃무릇을 등에 업고 지원서를 작은 함函에 집어넣었다.

해오름달 사흘

대결할 때 사용되는 무기는 무조건 집이나 가죽으로 감싸고 할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당연한 소리였다. 실제로 검을 물려받아 수련하고 서당에 입재한 생원들이 대부분인데 이들이 아무런 보호 없이 칼을 휘두르고 창을 찌르기라도 했다간 온통 피바다가 될 것이 분명하다. 서로 좋자고 하는 것인데 일부러 해를 끼쳐 서당에서 묵삭되고 쫓겨나는 것을 원하는 생원은 아무도 없었기에 설립된 이후로 지금까지 이에 대한 사고는 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나지 않을 것이고.

남들이 무예 터에 모여 삼삼오오 조를 짜고 대결하기 시작했다. 나비들은 굳이 그리 가지 않았다. 열셋 전부 꽃밭에 모이는 것이 일상이 된 지 꽤 오래여서, 동이 트자마자 그리로 모였다.

원우가 대뜸 지훈에게 대결을 요청했다. 나비들의 전투력이 낮지 않아서, 여기 애들만 이겨도 반은 하겠지. 하는 마음에서였다. 뒹굴거리던 지훈이 제 창포검을 손에 불러오며 나비들끼리의 작은 격투가 시작됐다. 가죽을 입혀도 여전히 얇고 긴 창포검이 소름 돋는 소리를 내며 휙휙 흔들렸다. 원우네 집안은 대대로 편곤을 전해주었는데,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대결이라 둘 다 꽤 삐그덕댔다. 종국에는 둘 다 백병을 내팽개치고 수벽타를 하는 꼴이 되어버렸으나 공격 마법도 꽤 배워두었던 덕에 나비들에게는 즐거운 구경거리가 되어주었다. 먼저 힘에 부친 지훈이 결국 항복을 선언하고, 뒤이어 승철이 나왔다. 주춤하는 원우에게 연승전이라며? 한마디만 하고는 다시 원우의 편곤을 손에 쥐여줬다.

“...사형은 좀 무서워요.”

“다들 그 소리 해-. 그래도 안 다치게 할게.”

두터운 소리와 함께 승철의 망원경이 원우의 몸 안쪽을 파고들었다. 평소에는 그리 느리던 원우도 단번에 낌새를 알아채고 편곤으로 쳐냈다. 승철의 힘을 다 버티지 못한 편곤이 원우의 손에서 벗어났다. 힘이 어찌나 센지, 오른팔 전체가 웅웅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근데 이거...,”

“...?”

“손이랑 무기를 동시에 써도 되잖아. 원우야. 그리 멍하니 있으면 안 돼.”

“...익,”

망원경을 든 오른손이 원우의 힘으로 뒤로 밀려났으나 승철의 왼팔은 그러지 않았다. 굳건히 그 자리에서 원우의 어깨를 붙잡아 내리찍으려 했지만, 원우도 가만히 있을 성격은 아니었다. 여기서 비등비등하게 해야 희망이라도 가져보지. 편곤이 사라진 원우의 오른손이 승철의 복부를 밀어내는 것이 먼저였다. 가까이 밀착한 둘 사이에서 꽃무릇 문양이 번쩍임과 동시에 승철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온몸이 쓸리며 밀려나 꽤 아플 만도 한데 승철은 상쾌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잘하네. 하면서.

“...제가 배운게 아니라서 살짝 불안해요.”

“꽃무릇도 네 고유한 힘이야.”

“...그렇습니까.”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던 민규도 원우와 하고자 했다. 어차피 만날 테니 지금 해보자며 어슬렁어슬렁 나오는 민규에, 누워서 듣던 무예 수장이 인상을 썼다.

“너는 쟤 기풍을 다 봐놓고, 하고 싶냐?”

순영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워있던 지훈도 치사하네, 민규. 하고 말을 얹었다. 제 편을 들어준 지훈에게 웃어보였다. 나 잘 했지? 하면서. 지훈은 그저 웃으며 그래. 하고 답했다.

민규가 무어라 답을 하기도 전에 정한이 지수를 퍽 밀어 민규의 앞으로 내보냈다. 지수가 돌았냐며 허허 웃었다. 원우는 살풋 웃으며 빠져주었다.

“...지수 사형은 뭘 잘 다루시지?”

“으음....... 향비파?”

“야.... 아무리 그래도 동백이 모란과 겨루는데 무기 대신 악기를 들까.”

승관과 한솔의 대화가 무색하게, 지수는 낭선을 꺼내 들었다. 민규는 기함했다.

“미쳤나봐..! 사형 그거 쓸 줄 알아요? 선대에서 끊겼다고 들었는데?”

“응 그치. 나는 지워진 자식이니 엄마부터 끊겼겠지. 홀로 터득했어. 야생의 동백이야.”

가지의 끝에 동백이 만개했다. 가죽을 입히지 못하는 무기라, 지수가 일부러 마법을 부려둔 것이었다. 애꿎은 청룡 사제가 다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낭선은 지수의 키보다 조금 컸다. 양손으로 단단히 받든 백호가 청룡의 위로 날아올랐다. 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다급히 방패를 펼쳐 든 민규가 왼손에 대검을 불러왔다. 방패를 없앰과 동시에 지수의 낭선 가지 사이사이로 끼워 넣은 후에 재빨리 돌렸다. 어떠한 형태로도 무너지면 패하는 대결이라, 필사적으로 낭선을 지키던 지수가 결국 손에서 놓았다.

기괴하게 엮인 낭선과 대검을 뒤로 던진 민규가 정말 잠깐 멈칫하더니, 지수의 종아리부터 모란을 엮어 땅까지 고정시켰다. 모란의 포획이었다. 꽤 힘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는지 한쪽 눈을 찡긋거린 민규가 손바닥을 펼쳤다. 영灜. 지수가 딛고 있는 땅바닥에, 바닷가처럼 찰박이는 물이 원형의 납작한 형태로 생겨났다. 포획이 걸린 모란 줄기가 점점 올라가 지수의 허벅지까지 올라가고 나서야 지수가 픽 웃었다. 지수의 발밑에 있던 원형의 물길. 그 속에 갇히면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론으로만 보던 마법을 직접 경험하니 꽤 당황스러웠지만 애써 표정을 숨겼다.

“어린 것이 이런 마법도 쓸 줄 알고... 반칙이야. 너.”

“.......”

힘겨운 숨을 몰아쉬던 민규가 지수의 말을 듣고 싱긋 웃으려던 찰나,

“...!”

지수가 만들어내는 동백 포획이 그를 넘어뜨리는 게 더 빨랐다.

조선 마법의 토대는 마음이고 기본은 마구라고 하지만, 기초는 몸으로부터 시작한다. 손과 발을 함께 써서 몸 안에 힘을 이용한 마법. 그 때문에 다들 팔다리를 묶으려고 하는데, 박차기조차 못하도록 묶어둔 발목 대신 낭선이 그 역할을 해주었다. 민규의 뒤에 버려진 직후부터 민규만 모르는 새에 낭선 가지에서 끝도 없이 피어난 동백이 슬금슬금 범위를 좁혀오고 있었다. 소문 없이 다가온 낭선의 동백가지가 민규의 발목을 잡아챘고, 놀란 상태에서 충격을 얻은 민규는 속절없이 미끄러졌다. 제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졌다. 민규가 앓는 소리를 내며 벌러덩 누웠다.

“뒤도 봐야 해, 민규야. ...그래도 네 힘이 강하긴 하네. 꼼짝도 못 했어.”

“아.... 아쉽다. 정말, 안 쓰는 마법도 썼는데.”

두어  번 민규의 등을 토닥여준 지수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승철이 정한을 밀쳐냈다. 휘청거리며 튀어나온 정한이 째려보자 승철은 준휘의 품에 쏙 들어가 버렸다.

“야. 내가 쟤랑 어떻게 해!”

“...할 수 있어요. 사형.”

승철 대신 준휘가 위로해주었다. 

“하.... 다녀와서 너 죽인다, 최승철.”

사인검을 불러오며 승철을 협박했다. 민규와 정한은 무기와 체형이 비례했다. 정한은 생각했다. 종잇장같은 내 몸과 검으로 저 대도를 어찌 이기랴. 무예를 했던 생원들은 심판해야 하는 입장이니 섣불리 후보자들과 대결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정한은 본인이 그 약속을 제안했던 것이 원망스러워졌다. 순영이랑 대결을 시키면 되는데…. 입술을 삐죽이며 터덜터덜 민규의 가까이 섰다.

“민규야. 나는 힘 조절하는 법 몰라.”

“네.”

“알아서 피하고 공격해.”

민규의 대답은 듣지 않았다. 검을 초장에 내려놓고, 금강초롱을 민규에게로 냅다 던졌다. 내 힘은 없어도 꽃은 잘 다루거든. 금강초롱 꽃봉우리들이 허공에 붕 뜨더니 섬광탄처럼 번쩍였다. 민규가 찡그리며 몸을 굳히는 새에 정한이 가까이 다가갔으나 그 큰 몸에 어찌 건드려야 하나 싶어 차마 더 공격을 붓질 못했다. 검을 괜히 놓았나 후회를 하려는데,

“제가 할까요?”

어느새 끼어든 석민이 정한의 곁에 다가와 몸을 잡고 뒤로 당겨주며 물었다.

“너, 눈 안부셔?”

“등에 달린 주작의 날개가 이것보다는 눈부셔서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간단한 위협용이어서 민규가 적응하는 것도 순식간일 테고. 석민이 정한을 휙 돌려세우고는 불을 뿜어냈다. 얇고 긴 석민의 손가락에서 날카로운 불덩어리들이 민규의 대검을 땅에 떨어트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불을 만드는 것은 비단 석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민규는, 도깨비의 가호를 받고 자라난 아이였다. 저보다 훨씬 잘하면 잘했지, 못 할 것이라는 생각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막상 정한에게 넘겨받고 나서는 넘어뜨리는 법을 생각하지 못했다. 민규에게 위협만 가할 수밖에 없었는데, 석민의 불과 민규의 불이 섞여 묘한 보랏빛이 만들어져 꽤나 절경이었다.

석민을 가만히 보던 준휘는 앞에 안겨있는 승철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지금 오방신의 곁으로 올라가는 나비들 중에 제대로 된 무기를 다루지 않는 생원은 주작 둘이 유일하다. 승철은 앞에서 그저 감탄만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승철의 곁에 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구해주고 살려줄 테다. 그런데 내가 없으면? 만약, 둘이 있을 때 문제가 생기면? 영생을 사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죽게 되면 저승에 가기도 전에 소멸한다. 누가 감히 오방신의 수하에게 허튼짓을 하겠냐 싶지만, 삶이란 알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인간들의 전쟁보다 훨씬 드물지만 그만큼 엄청난 타격이 휘몰아치는 것이 신들의 전쟁이다. 또한 이들의 위치를 고려해보면 어느 정도의 무예 능력은 갖추고 있어야 마땅했다.

“...형.”

“응?”

“나한테 무예 배울래요?”

승철의 몸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정한과 지수에게 얼핏 들은 바로는 주작 사형들이 승철의 무예를 좋아했다고 했다. 당시에는 1년 생원들도 무예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종종 사형들이 승철에게 ‘네가 우릴 지켜주면 되겠다.’ 라고 말했다는 것도 들었다. 그에 힘입어 승철은 대부분의 무예 기술을 습득해냈지만 열병이 터지고 사형들을 지키지 못한 후에는 그 죄책감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받았던 수장의 자리를 급히 순영에게 넘겨버리고 무예는 하지 않는 상태일 때, 준휘의 부탁으로 승철이 무예를 잠깐 보여주었던 적이 있다. 딱 한 번. 나비들 앞에서. 순영과 준휘는 승철의 움직임에 두려움이 그득그득 담겨있음을 곧바로 눈치챘고, 그날 이후로는 다른 생원들에게 승철의 무예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사형들이 준 망원경으로라도 무언가를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승철에게 고마움만 느껴왔다. 하지만 덧없이 긴 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친 지금은 달랐다.

“무예보통지 기본만 기억난다면서요. 주작 중 하나라도 무기를 잘 다룰 줄 알아야 편할 텐데. 내가 도와줄게요. 가르쳐주고 안 떠날게요. 약속해요.”

승철은 언젠가 준휘가 이런 말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내려둔 목검을 다시 잡으라는 말을, 제 사제들에게 듣기 전에 먼저 꺼내 들어야겠다고 생각만 했던 것이 벌써 2년 정도 되었다. 승철은 가만히 준휘의 손만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럼, 나랑 겸이랑 같이 알려줘. 말이 나오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그만큼 단호한 목소리였다. 응. 알겠어요. 준휘가 승철을 끌어안으며 귓불에 살짝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대화를 하는 사이, 결국 넘어져 버린 석민이 엉금엉금 기어 두 주작에게로 왔다. 준휘가 잽싸게 가까이 다가가서는 무예를 배워보자며 석민의 머리를 잡고 맑게 웃었다. 석민은 본인의 모든 체력을 끌어모아 불을 뿜어낸 탓에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고 준휘가 당기는 대로 질질 끌려갔다.

“......사형. 저 지금 죽을 것 같아요....”

“넌 안 죽어! 무예 하자. 승철 형이 동의했어.”

“제가 무예를 배우는데 왜 사형이...?”

“주작이잖아. 하자. 하자! 사람 살리는 주작이 되어야 하잖아.”

준휘의 마지막 말 한마디에, 석민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도와줘야돼요…. 일단 오늘은 조금 쉬고요……. 다 갈라져 가는 목소리가 퍽 안타까웠다. 그럼 그럼, 당연하지. 준휘는 대강 대답해주며 주작에게 각각 어느 백병을 가르칠지 생각했다.

나빌레라

小寒, 살얼음이 한 겹씩 쌓인다.

해오름달 엿새

말도 안 되는 격투 끝에 원우와 민규가 결승으로 올라갔다. 온몸에 소름이 돋은 준휘가 제 머리채를 잡아 뜯었다. 승철은 얌전히 손을 내려주었고, 명호는 제 일마냥 뿌듯해했다. 찬은 입을 떡 벌린 채로 명호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들을 보았다.

일단, 원우는 이기더라도 기권할 예정이었기에 민규가 한양 대표로 선발되어 용궁에 한양 서당 후보자로 간다는 것은 확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충 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게 서로에 대한 예의고 기본이니까.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내기에는 원우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원우는 민규와의 차이를 잘 알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봐온 저 돌쇠 같은 놈이 얼마나 강한지, 서당에서 제일 잘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태껏 겨뤘던 다른 후보들과 체격은 비슷하더라도 마법의 범위가 확연히 달랐다. 둘의 대결이 시작되자 원우는 승철에게 배웠던 대로 철편과 마구를 써가며 공격지만 청룡의 간절한 노력 앞에서는 이길 수 없었다. 원우의 빈틈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에 속절없이 공격당했다. 모란의 촘촘한 마법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막판에는 쫓기듯 막고 공격하길 반복하다 결국 체력이 모자라서 쓰러졌다. 완전한 꽃무릇의 기권이었다.

인사조차 하기 귀찮아진 마당에, 원우는 땅에 누운 채로 손만 휘적휘적 내저었다. 대결을 진행하며 심판을 보던 순영은 그런 원우를 보고 웃으며 민규가 우승했음을 알렸다. 민규가 원우의 곁으로 다가가 누웠다. 평소였으면 몸도 약하면서 이리 차디찬 바닥에 누우면 어찌하냐고 쫑알댔을 테지만, 잠깐은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별다른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신령님아. 그렇게 약해서, 어찌 하늘을 다스리겠어.”

“수장이 다섯이 있고 신령은 넷이나 더 있는데. 이 정도면 됐지.”

“여기 애들을 기준으로 하면 어떡해.”

“아-. 앞으로도 더 배울 거잖아….”

“그렇게 만족할 거야?”

악의가 전혀 없는 장난이었다. 민규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직전에 예닐곱을 이기고 결승에서 처음으로 패하였는데, 그런 소릴 들으니 무척이나 고깝구나.”

“와. 방금 되게 사자 같았어.”

민규의 말에 원우가 픽 웃으며 빙글 돌아누웠다. 민규는 지치지도 않는지 벌떡 일어나 원우의 등을 두드려줬다. 수고했어, 형. 원우는 앙칼지게 홱, 쳐내며 몸을 더 굽혔다.

“최종적으로 안 뽑히기만 해봐. 저승에 시왕 장군으로 추천을 넣어버릴 테니까.”

웅얼거리는 원우의 말에 장난이 그득 담겨 있었다. 이를 놓칠 리 없는 민규가 원우의 위로 엎어지며 몸을 겹쳤다. 무거울 만도 한데, 원우는 아무런 말 하지 않고 민규를 받아주었다.

순영은 다른 무예학도들과 대결장을 정리한 후에 최종적인 공지를 쓰기 위해 누각으로 갔다. 민규가 최종적으로 뽑힌 것, 한동안 용궁에 간다는 것, 누구와 함께 가는지도 적어야 했다. 아, 어떤 도구와 마법을 사용했는지도 적어야지. 용궁에 일찍이 전달해야 할 것들도 많아 이것저것 생각하며 누각 문을 열었다.

“오늘 처음 보는 것 같네.”

“...그러게. 뭐해?”

어쩐지 대결할 때 지훈이 안보인다 싶었는데, 역시나 홀로 누각에 와있었다. 정초한파가 몰려오는데 굳이 사내놈들의 격투를 보러 나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래도 결과는 궁금했는지, 은근슬쩍 물어왔다.

“예상은 하고 있을 것 같은데.”

“누군데.”

“당연히 민규가 이겼지.”

“...그렇게 애를 잡더니. 결국 우승시켰구나.”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순영이 머쓱하게 웃었다. 무예를 할 때가 되면 괜히 날이 서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별것도 아닌데 되게 예민해지는 것이 간혹 자신도 의식할 때가 많아, 줄이고자 노력을 꽤 많이 했다. 특히 처음 배우는 무예학도나 민규 같은 생원들에게. 사나흘 정도, 아침마다 몰래 민규를 가르쳐줬다. 돌이켜보면 꽤 싫증 나고 짜증 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거칠게 대했는데 적절히 웃어가며 순영의 지시대로 실력을 만든 민규가 한 편으로는 대견했다. 나중에 고생했다고 따로 말을 해야겠다. 순영이 낮게 혼잣말로 읊조렸다.

재빨리 주제를 돌리고자 하는 마음에 지훈이 들고 있는 것들을 훑어보았다. 1년 생원들의 성적이 적혀있었다. 곧 동지 시험이고, 그 시험이 끝나면 새로운 황룡을 선발해야 한다. 한솔의 명패를 받아 침소에 내건 것이 엊그제 같은데 눈 깜짝할 새에 시간이 이리 흘렀다.

“...왜이래? 다들 이번에 공부를 못 했나?”

“사형들이 걱정하는 게 이거였어.”

보통 네 번의 시험에서 얼추 황룡의 수호를 받을 생원이 가려지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중구난방으로 처음 보는 이름들이 들쑥날쑥했다. 이렇게 되면, 반영 비율을 바꾸던지, 추가 시험을 쳐서 선출해야 한다. 그건 귀찮은데…. 순영이 지훈의 가까이 다가가며 더 자세히 봤다.

“...한솔이는 희망이 있다고 쳐도, 청룡에서는 승관이랑 찬이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네.”

“그걸 계속 생각하고 있었거든. ...사형들께 물어볼까 고민 중이야.”

“뭘?”

“인원 감축을 언제까지 유지할 생각이냐고.”

“나비를 위해서? ...네가 그렇게까지 한다고?”

“너도 힘들어했잖아. 다들 아닌 척해도 다들 버거워했고.”

생원의 수가 확연히 줄어들어 서당 황룡의 수를 줄였던 것이 어느새 4년 전이다. 무작정 서당의 인원이 줄었다고 한 명씩만 뽑으라는 하늘의 전언을 듣고 죽어나는 것은 그 해부터 황룡의 수호를 받은 열여섯의 생원들이었다. 날밤 새워가며 일감을 처리하고 뒤를 돌아보면 새로운 건들이 쌓여있었다. 5, 6년 황룡들은 나 몰라라 제쳐두는 것이 관습이라, 모든 일감은 그 아래 황룡들의 차지였다.

“아마 이제는 다시 생원들이 들어차겠지. 일찍이 해두면 좋잖아.”

진작에 보고 생각했으면 상제를 뵈러 갔을 때 직접 건의 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이걸 생각하지 못햇을까. 한 발 늦은 스스로가 살짝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훈의 이런 속마음을 알지 못하는 순영은 그저 감탄만 했다.

이번 건도 사형들께 지훈이 직접 알릴 것이다. 순영의 예상대로, 황룡의 인원을 다시 해마다 여덟 명을 선발하는 것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필이 수려하게 문장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장 아래쪽에 능소화와 제 이름을 새기는 것까지 묵묵히 지켜보던 순영이 입을 열었다.

평소의 순영이라면 생각을 곧장 내뱉었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대결을 보기 위해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몸단장할 때부터 생각했다. 아니, 영조례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 정도 했는데도 내 생각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라면 속앓이하는 것보다는 뱉어보는 게 낫지.

“...있잖아, 지훈아.”

“응.”

애써 말을 꺼냈는데 야속하게도 뒷말이 뱉어지질 않았다. 평소였으면 그냥 불러봤다 하고 넘겼을 테지만 오늘은 그러기가 싫어진 탓에 겨우겨우 혀를 움직이고 입을 열었다. 얼굴을 볼 자신은 없어서 종이에 스며든 검은 먹만 멍하니 응시한 채로. 물론, 지훈이 본인을 보고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내가 너한테 수도 없이 했던 말 있잖아.”

“뭐.”

“...너 같은 사람이 있어서 좋다고.”

“...? 그랬지. 거의 매일 했잖아.”

“긴가민가 해서 계속 그렇게 말 했거든. ......친구니까.”

더 이상 지훈은 답을 하지 않았다. 밖의 차디찬 바람이 창문을 거세게 때리는데도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순영만 겨울인 것 같았다. 순영의 안팎으로 요동치는 거센 바람이 정신을 못 차리게 했다.

“처음에는 그냥 동경인 줄 알았고 얼마 전까지는 우정인 줄 알았어.”

“…….”

“......그런데 이게 만약에 있잖아... 만약에 이게 사랑이고 순정이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너랑 있으면 한밤도 백야 같고 칼바람에서도 꽃내음이 날 것 같은데, 어떡해. 저조차도 답변하지 못하는 질문을 지훈에게로 넘겨버렸다. 아무런 대답이라도 좋으니 무슨 말이든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지훈은 그 물음에 답하지 않고 곧장 자리를 떠버렸다.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꽤 씁쓸함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름 고심해서 한 고백인데, 이지훈스럽게 도망쳤네. 순영은 실없이 웃으며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눈이라도 보고 말할걸. 몇 안 되는 순영의 후회 중 하나였다.

팔을 뻗어 능소화가 새겨진 종이를 가져왔다. 빳빳한 종이에 단정히 적힌 한문. 이것도 전부 쟤가 가르쳐준 건데. 글을 가르쳐준 선비님한테 종놈이 은혜도 모르고. 천양지차를 무시했네. 괜히 먹이 번지면 안 되니까, 순영은 눈물이 떨어지기도 전에 소매로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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