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규
바다를 누리는 모란
민규에 대한 소식은 삽시간에 홍월천으로 퍼져나갔다. 민규가 고심하며 쓴 간찰의 먹이 마르기도 전에 독각의 것이 날아왔다. 용궁에 갈 때 저를 데리고 가라는 내용이 적힌 것을 보고, 함께 용궁에 가기로 했던 지수와 준휘에게 양해를 구하러 갔다. 민규처럼 서당에서 서찰을 받고 일을 행하러 가는 생원이 생기면 항상 황룡과 무예학도를 하나씩 끼워서 가야 했다. 이번에는 겨울 시험과 시기가 겹치는 것을 고려하여, 성적에 크게 의의를 두지 않는 지수와 준휘가 함께 나서기로 했다.
...괜한 걱정, 괜한 행동이었다. 생각해보면 각자 백호와 구삼승의 아들인데. 도깨비를 무서워할 리가 없지. 헛걸음질 했다. 그래도 어색하지 않게 채비를 잘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곧바로 용궁에 갈 준비를 하고 서당을 나섰다. 애매하게 얼어버린 눈덩이들이 미처 녹아내리지 못하고 길을 방해했다. 준휘가 흘긋 주변을 살피더니 조금씩 불을 만들어 길을 녹여갔다. 준휘가 녹여둔 길을 따라 홍월천으로 향한 셋은 독각을 뵈러 민규네 집으로 향했다. 확실히 홍월천은 반궁 근처보다 길이 더 잘 닦여 있었다.
독각은 그들이 풍기는 향만 맡고 단번에 지수와 준휘를 알아봤다. 누가 보아도 동백이고 저승이라고. 그다지 신기해하지도 않았다.
“바다에 들어가야 하니, 지금부터 꽃을 물고 있거라.”
꽃받침과 꽃자루가 있는 꽃을 입에 물고 있으면 꽃자루가 목과 연결되어 물 속에서도 자유롭게 숨을 쉴 수가 있다. 청룡과 백호는 알아서 제 꽃을 만들고 입에 넣었다. 둘 다 원래 크기보다 조금 더 작은 것들을 만들어냈다. 와중에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던 독각이 가만히 서 있는 준휘를 보았다.
“...저는 아무리 해도 이상하게 나옵니다.”
조심스레 펼친 준휘의 손바닥 위에는 백일홍도, 안개꽃도 아닌 요상한 것이 피어나 있었다. 복수화동이더라도 분리하고자 하면 할 수 있는데, 아직 다루는 것이 어려워 보였다. 평소였으면 따로 천마를 만들어 태워주거나 수중에서도 호흡할 수 있는 약재를 찾아 달여주었겠지만, 상황과 체면이 중요한 시점이니 민규에게 모란을 하나 더 부탁하여 입에 넣어주었다.
도술을 써서 해저마을로 곧장 내려갈 터이니, 지금부터 웬만하면 코로 호흡하지 말고. 입으로 숨이 잘 쉬어지는지 철저히 확인한 독각이 셋을 데리고 홍월천에서 사라졌다.
온갖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온통 검붉은 세상만 봐왔던 준휘의 눈앞에는 한색寒色으로만 칠해진 건물들이 가득하였다. 날짐승과 들짐승의 신들만 봐왔던 지수도 마찬가지였다. 인어를 비롯한 인외와 신선들이 가득했다. 모란 사이로 새어 나오던 독각의 냄새가 이곳에서는 진동을 했다.
해저마을 중심에 세워져 있는 큰 지도를 보고 용궁을 찾아냈다. 민규네 독각은 항상 해수면을 겉돌고, 무료하면 종종 고래의 등을 타고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도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내려온 마을이라며 낯설어하는 것이 느껴졌다.
“한양의 황룡 홍지수입니다.”
“...무슨 일이지?”
“용왕의 서찰을 받고 내려왔습니다.”
입구에 서 있던 수문장들은 지수의 명패를 본 체도 하지 않고 독각만 흘긋흘긋 보았다. 황룡이 제 뜻을 밝히고 있지 않는가. 나지막한 독각의 말에, 수문장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통. 지나가십시오.”
대강 생김새는 옥황상제의 궁과 유사했다. 용궁에 들어온 이후로는 독각이 앞장섰다. 상제의 정전으로 가는 길과 달리, 용궁 내에는 여러 신하들이 모여 자유롭게 떠들고 있었다. 차라리 이러한 소란이 더 편하겠다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궁부宮府의 문이 열렸다. 민규는 단번에 문을 연 자가 용왕임을 알 수 있었다.
활짝 열어둔 문을 등지고 궁부 내부의 중심으로 가는 용왕을 뒤따라갔다. 독각이 절을 올리고 셋이 그 뒤를 따랐다. 물결 같은 용왕의 화려함에 감히 고개를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오랜만이군. 장수 김민영.”
“이제는 김영입니다. 근 300년간, 잘 지내셨는지요.”
“바다를 아우른 그대 덕에 해저는 고요하네.”
“평안함은 수문장과 장수를 비롯하여 오는 것입니다. 저는 그저, 그것을 누리는 도깨비일 뿐입니다.”
민규보다 훨씬 큰 독각, 그리고 그보다도 큰 용왕. 해저 책방에 드나들었던 시절을 반추할 때마다 생각했다. 하늘과 저승을 짊어지는 수십 명의 신과 달리, 홀로 바다를 책임지는 용왕. 홀로 아래에 수천 장수와 신하를 두고 조선의 바다를 휘두르는 자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반란 한번 없이 수천 년을 군림한 차디찬 왕은, 준휘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준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눈만 동그랗게 뜨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가 단상에서 내려왔다.
“...벌써 이렇게 컸던가. 재판을 받을 때는 구삼승의 품속에서 자고 있었거늘.”
준휘가 눈치껏 재차 인사했다. 제 손목에 죄가 새겨지는 것에 대한 심판이 내려질 때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이제 해가 바뀌었으니 18년 정도 지났습니다.”
“.......시간이 그만큼 흘렀구나. 저승에서 받은 죄가 씻겨나갔단 소식을 얼마 전에 들었다.”
바닷속은 고요하여 낮과 밤조차도 잘 분간할 수가 없고, 그만큼 시간 흐름의 척도도 잡기 어렵다고 했다. 준휘는 딱히 말을 잇지 않았다. 하늘에서의 과정은 저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거니와, 바다의 왕에게 부러 제 사적인 일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간단한 안부 인사를 하고, 본래 용건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었다. 일단, 수문장의 후보로서 내려온 민규는 셋과 따로 떨어져 병조 무선사武選司로 갔다. 인사를 담당하는 관원이 민규를 반겼다. 먼저 와 있던 제주와 경주의 생원에 곁에 엉거주춤 다가가서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1차로는 서당끼리 각자 겨루기를 한다.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사람만이 통과하며, 2차로는 일각 동안 현 수문장과 겨루게 된다. 아직 서당의 생원인 점을 감안하여, 이길 필요 없이 그저 쓰러지지 않고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마지막 3차 시험은, 용왕과의 독대였다.
민규는 적잖이 긴장했다. 들어올 때부터 알아차렸다. 한 명은 추석에 준휘가 제주 경합장에서 대화를 나누었던 송松이었고, 다른 한 명 또한 경합장 속에서 사흉수를 처리하기 위해 싸웠던 경주의 의義였다. ...그 많던 생원들 중에서 경합에 선출될 정도의 실력이라면, 준휘나 순영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소리겠지. 바싹바싹 말라가는 입안을 겨우 모른체하며 관원의 말을 전부 담아 들었다.
민규는 들었던 것들을 세 일행에게 다 알려주었다. 힘들겠네. 지수의 한 마디에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민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독각의 앞으로 갔다.
“...저랑, 대련 한 번 하시렵니까?”
독각은 언제 불러왔는지 모를 민규의 대검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제가 모란 김가에 뿌리를 내리며 가보로 내려주었던 환두대도였다. 어린 것의 당참이 여실히 느껴지는 제안이었다. 독각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민규와 눈을 마주쳤다.
“고려의 검을 놓고도 수백 년이 지났는데, 나와 하고 싶으냐.”
“네. 이기고 싶어요.”
이기고 싶은 대상은 당연히 제주와 경주의 생원들이었다. 독각이 한숨을 얕게 내쉬며 일어났다. 대강 짚어줄 터이니 잘 기억하라며, 근처에 떨어져 있던 굵은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청룡답게 시원하고 깔끔해.”
독각이 민규의 몸 주변으로 나뭇가지를 대기도 전에 재빨리 쳐내었다.
“힘의 조절도 탁월하여 네 신장의 장점이 돋보이고.”
“아, 잠시만..!”
“가락 소리에 박수조차 옳게 치지 못하던 네가 때에 맞추어 공격을 하는 게,”
빡, 소리가 날 만큼 민규의 오른쪽 팔을 내리쳤다. 민규가 무너져내렸다.
“...신기하긴 한데 말이야.”
나뭇가지를 땅에 놓았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나동그라졌다. 느려. 민규의 귀에 속삭였다.
“바다에서 해저海底와 사령四瑞을 위해 한 몸 바치려면, 그 정도 속도로는 턱도 없다. 장수로서 짊어져야 할 무게만큼 힘을 담아 무겁고 빠르게 움직여야 하지.”
그래도 서당에서 모든 생원을 제치고 선출된 민규인데. 독각은 가차 없었다. 민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제 검을 세게 말아쥐기만 했다.
“나머지는 오방신에게 부탁해라.”
뒤에서 둘을 지켜보던 백호와 주작이 흠칫했다. 준휘가 습관적으로 지수의 등 뒤로 들어갔다가 다시 얌전히 곁에 섰다. 독각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사라지고, 슬그머니 다가온 준휘가 독각이 내다 버린 나뭇가지를 다시 들었다.
“...알려줄게. 무겁고 빠르게 검 쓰는 법.”
“그거 말고 다른 것도 알려줘요.”
“일단 독각이 말씀하신 것부터 하고.”
청룡은, 허리를 굽힐지언정 땅바닥에 드러눕지 않는다. 좋아요. 준휘가 내민 손을 잡고 다시 일어섰다.
나빌레라
金珉奎, 바다를 누리는 모란
작약. 민규와 처음 붙은 송의 생원이 품고 난 꽃이었다. 마반인끼리 싸울 시에는 꽃이 잠식되는 순간 그자의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 모란 못지않게 상당이 크고 강한 기운을 품고 있어 쉽사리 민규가 잠식시키지 못했다. 재빨리 검으로 썰어도 쉴 새 없이 커지는 꽃들이 미웠다. 물론, 작약의 편에서 봐도 마찬가지였다. ...상황과는 맞지 않지만, 앉으면 작약이고 서면 모란 아닌가. 생각이 완전히 끝맺기도 전에 민규가 연분홍빛의 모란을 피워냈다. 지수가 슬금슬금 제 뒤에서 피워냈던 동백 가지처럼. 도박이었다. 지수가 했던 것처럼, 앞과 뒤를 전부 다 사용할 수 있어야 했지만 민규는 한 가지에 몰두하면 다른 것은 소홀했다. 작약이 민규의 그 틈을 발견하고 달려들기 직전에, 바닷물을 머금은 커다란 모란이 그를 덮쳤다. 모란의 승리였다.
송과 의 생원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이 나서, 지수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어딜 갔는지 독각은 보이질 않았다.
“잔나비 후보야.”
“네?”
“계속 머릿속으로 되뇌이더라고. 원숭이의 신장 후보는 못할 것이 없다고.”
백호의 편법이었다. 민규가 골똘히 생각하다,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멀리서 송과 의 생원의 대결을 보던 준휘가 터덜터덜 걸어오더니 말했다. 시간을 깨는 법, 알아? 하면서.
“신申은 시간의 흐름을 유독 잘 관리해. 잔나비의 후보가 될 정도니까 저 생원의 실력도 나쁘지 않겠지.”
“...그 속에 갇히면 속수무책으로 패하겠네요.”
“안 당하면 되지. 내가 도와줄게.”
준휘가 민규의 몸을 일으켰다. 뭐예요? 하고 묻는 말에, 인간의 시간보다 저승의 시간이 더 무섭거든. 하며 단단한 팔을 잡았다.
“네?”
“지금, 저승의 시간 흐름 속에 널 가둘 거야.”
“네???”
“똑바로 봐. 이렇게 시간에 너를 가두려고 하면 말이야.”
검붉은 기운이 민규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준휘가 민규의 허리께에 있는 마구를 떼어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불 피워. 자연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거. 이걸로 태워.”
“...이렇게 쉽게 돼요?”
“만약 네가 이 기운을 느끼지 못하고 이렇게 갇히면,”
순식간에 기운이 뭉쳐져 민규의 온 몸을 덮었다. 몸이 굳어 아무리 해도 움직이질 않았다. 이번에는 활을 건네주었다. 준휘의 것이었다.
“...이걸 왜 제게,”
말도 안됐다. 준휘의 활을 잡은 손은 왠지 모르게 힘이 들어가 움직일 수 있었다.
“편법이야! 신의 손을 탄 무기는 인간의 술책에 웬만해서는 걸리지 않아.”
“왼손에 검을 쥐고 오른손에 활을 쥐고 들어가면 되겠네.”
“...한데 이러면, 꼴이 웃기지 않을까요?”
“지금 네 꼴이 웃겨?”
지수의 물음에 민규가 입을 다물었다가, 끝내 다시 열었다. 아니요, 간절하죠. 하면서.
그렇게 겨우겨우 모든 것을 깨우쳐 경주 생원과의 경쟁을 위해 들어갔다.
지수의 말대로 잔나비가 맞았고, 덕분에 청룡이 이겼다. 준휘와 지수의 말 그대로였다. 저 둘을 데리고 오지 않았으면, 내가 과연 맞붙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민규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산산조각이 난 채로 바닥에 흩어진 시간의 흐름은 맑은 날 구름 같았다. 아무래도 인간의 시간을 관리하는 신이라 그런 것이겠지. 1차가 끝이 났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아무렴 어때. 이겼으니 됐지.
쓸 수 있는 것, 배운 것, 전부 다 사용했다. 나비들과 꽃밭에서 했던 작은 대결부터 직전에 준휘에게 건네받은 활을 사용하는 법까지, 전부 되감으며 곱씹었다. 비로소 내 것이다. 독각이 말했던 빠른 검을 써야 할 때는 2차 대결에서였다. 수백 년 동안 물 속에서 해저를 지킨 이들을 이기는 것은 언감생심에 바라지도 않았다. 공격은 해보지도 못했으나 수비는 확실했다. 모든 걸 막아낸 팔다리가 저릿할 뿐이지, 체력적인 소모가 크지도 않았다. 일각이 지났다는 신호를 들은 민규가 그제야 대검의 끝부분을 바닥에 콱 찍으며 수문장과 눈을 마주쳤다. 이제 용왕을 뵈러 가면 되죠? 평소 민규였으면 절대 뱉지 않을, 자신감이 차고 넘친 말투였다.
궁부 앞 정원에서 지수와 준휘가 귀를 쫑긋거렸다. 독대를 하러 간 지 반 시진이 지났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독각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민규. 될까요?”
“...그러게. 모르겠어.”
“여기서 떨어지면 허무하겠다. 그쵸.”
“...제 생각은 확실히 잘 전달하는 애니까, ....”
답지 않게 얼버무리는 지수에, 준휘가 웃었다.
“확신이 안 서죠?”
“응.... 그래도 좋은 소식을 들고나오면 좋겠는데.”
뚫어져라 민규가 들어갔던 문을 응시했다. 신하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둘은 모르는 무언가를 준비하는듯했다. 무얼 하나 싶어 그들을 보고 있으니 연두색 천들이 나무와 궁부를 잇고, 형형색색의 산호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인지 한 번만 읽어보면 안되냐고 물었으나 지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신들의 수하에 있는 자들은 웬만하면 읽기가 어렵다. 감히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있고. 대화고 끝나고도 한참을 응시했다. 대강 어떤 것을 하는지는 감을 잡았지만 부러 말을 더 얹진 않았다.
민규는 안내에 따라 궁부로 들어갔다. 모든 신하가 빠져나가고, 명륜당을 모아둔 것의 서너 배는 되는 방 하나에 홀로 앉아 있었다. 멍하니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연푸른 용이 새겨진 천장을 보기도 하고 조금 더 시선을 내려 용과 유사한 색으로 구성된 구조물을 관찰했다. ...그리도 신기한가. 그 목소리를 따라가니, 어느샌가 중앙에 용왕이 앉아있었다. 신기해서 그랬다며 사죄하는 민규에게 너그러이 웃어 보였다.
“....예상 밖이로구나. 제주와 경주가 워낙 막강하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
“살짝 의도와 다르게 들렸을까 싶어 덧붙이지만, 자네도 그들만큼 잘 해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음, 가족은 어떤 인물들인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민규가 자세를 더 고쳐 앉았다.
“선대에 황룡과 소나무의 수호를 받은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 외에 다른 분들도 마법을 공부하고, 그 이후에 마법부의 문관으로서 대대로 모란을 이어왔습니다.”
“그래. 대단하다 소문이 난 모란이 제 발로 용궁에 들어오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자네가 처음이야. ...왜 그 안전한 길을 두고 이리로 온 것이지?”
“문과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만약 이곳에서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무과를 보았을 것입니다. 절대 거스르지 못할 운명을 타고난 나비 같은 친우들과 함께 발맞춰 걷기 위해서, 그래서 칼을 잡고 주먹을 쥐었습니다.”
“거스르지 못할 운명.... 자네 곁에 있던 두 아이를 보아하니 곁에 어떤 이들을 두고 살아왔는지 눈에 선하구나.”
사실, 민규에게만 성적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생원이라 했을 뿐 전부 황룡 나비들의 계획이었다. 격투를 치러야 하는 것은 오로지 민규에게 맡길 수밖에 없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어떻게든 민규가 더 밀고 나갈 수 있도록 할 자들을 탐색했다.
일단 지수는 고정이었다. 용왕은 홍지호의 재판에 참석했을 테니 지수가 어떤 인물인지 알 터였다. 그 후에 준휘가 뽑혔다. 영생을 살아가리라 확신할 수 있는, 더구나 이제는 하늘을 책임질 황룡의 신령이 될 생원. 다행히도 잘 먹힌 듯했다. 거기다 바다의 도깨비까지 끌고 들어갔으니 민규의 진심을 뒤받쳐줄 내력은 확실히 되어주었다. 용왕은 그 점까지 파악했다. 순수한 어린 것들의 알량하고도 발칙한 생각 머리가 마냥 귀여웠다.
“사랑하는 것이 많은 이들은 영생을 버거워하지. 자네는 어떠한가.”
“...네?”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이들을 하늘에, 땅에, 전부 두고서 홀로 차디찬 바다에 내려와 소태를 지을 수 있겠는가? 수문장이 되면 파도를 열고 심해를 가두지. 평생토록 풍운을 휘저어가며 이곳의 안위를 지켜내야 한다.”
“제 그릇은 바다 도깨비의 힘이 들어간 것이라 쉽게 깨지지 않습니다. 그 정도 각오는 했습니다. 곁에서 독각을 모시며 그의 단단함이 걸어온 세월 덕이란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바다를 위해 칼을 잡고 영생을 살게 된다면, 바다를 위해,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절대 무너지지 않아야 함을요.”
민규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났다. 똑부러졌다. 낯뜨거움과 쑥스러움을 구분할 줄 알고, 부끄러울지언정 하고픈 말은 제 뜻을 온전히 담아 뱉어냈다. 민규에게서 묻어나오는 화법에 김영의 말투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제가 가진 힘에서 오는 올바른 자신감조차 용왕의 마음에 쏙 들었다. 계속되는 질문에 돌아오는 답변들이 모두 올곧았다.
“......내게는 상제와 동등한 지위가 있지. 그 권한을 통해, 네게만 알려주겠네.”
“무엇을 말입니까?”
“오방신 아래 열 명의 수장과 신령은, 그들 중 가장 어린 것이 약관을 지나고 나서야 정식적으로 하늘에 올라가게 된다. ...이번에는, 천상의 마지막인 17대 황룡 수장이 스물 다섯이 되어야 올라가는구나.”
민규가 눈동자를 도로록 굴렸다. 한 해 일찍 들어온 찬이 이제 새해를 맞이하여 열여섯이다. ...9년을, 더 있어야 올라갈 수 있다고? 그러면 행년의 차이가..., 더 나아가기도 전에 용왕이 민규의 생각을 끊었다.
“너도 그 해에 내려오거라.”
네??!? 여태 얌전히 답만 하던 민규가 살짝 엇나가는 소리를 냈다.
“잔인하고 영롱한 모험을 준비하기에, 10년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그때까지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어라. 때가 되면 부르마.”
용왕이 손을 뻗어 민규를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연푸른 빛이 도는 대검이 생겨났다. 받으라는 듯 손짓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엉거주춤 일어나 그 하사품을 손 위에 얹었다.
“이 검에는 바다의 힘이 아주 가득 담겼지. 이 검을 쥐고 다시 내려오기 전까지 꾸준히 길을 닦아 나아가거라.”
“...아…….”
민규가 아직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지 못한 듯했다.
“종일 고생 많았다. 용궁의 수문장으로 올 네 덕에, 고려 용궁의 수문장이었던 김영이 이곳에 물길을 틀어 드나들 수 있겠구나.”
가볍게 손목을 꺾으니 문이 활짝 열렸다. 창으로 갇혀있던 공간이 탁 트여, 궁부의 일원一圓이 보였다. 법식에 따라 벌여둔 음식이 한가득하였고, 그를 축하해주는 신하들로 가득했다. 멍한 민규의 시선의 가장 끝에는 당연하게도 그와 함께 온 셋이 있었다. 달려가고픈 마음이 한가득하였으나 겨우겨우 흥분을 가라앉히며 한 걸음씩 내디뎠다. 형식적인 방방放榜과는 조금 다른 급제 방식이라 여태 봐온 의식들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은 편이었지만, 민규는 그저 저 하나를 위해 이리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방방이 끝날 무렵에야 겨우 독각에게로 다가갈 수 있었다. 지수와 준휘는 고을의 서당 생원들과 모여 담화를 나누고 있었기에, 모란의 색이 담긴 어사화 관모를 쓴 민규가 홀로 서서 의식을 보던 독각에게로 달려가 와락 안겼다. 다 큰 것이 왜 이러냐며 떨어트리려고도 했으나 그럴수록 더 몸을 밀착시켰다. …너 우냐. 그의 담담한 물음에 민규는 겨우 고개를 저으며 몸을 떼어냈다. 눈가가 그새 짓물려 있었다. 독각이 소매로 눈물을 닦아주며 따스하게 웃었다.
“우는 것 맞네.”
“…….”
“사내가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아직 어리구나.”
“감사합니다. 덕분에..., 덕분에 이뤘어요.”
“......내가 더 고맙지.”
“아직 부족합니다. 정식적으로 다시 내려오는 그날까지, 제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기꺼이, 그 제안 받아주마.”
이번에는 독각이 민규를 끌어안았다. 손에 힘을 담아 등을 토닥여주었다. 수백 년 고여 있어야 했던 바닷길을 터주어서, 용왕의 눈물을 담고 살아온 불완전한 신의 삶에 숨통을 틔워주어서. 안온했던 고통의 종지부를 복덩이가 찍어주는구나. 나른하게 웃으며 눈물 젖은 청룡의 호패를 들어보았다.
─
金珉奎
肅宗生
甲午龍宮武科
*1697정축년에 태어나, 1714갑오년 용궁 무과에 급제했음.
참으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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