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동지

새로운 날, 새로운 기분으로.

서당 by 반야

매듭달 스무이틀

아세亞歲다. 낮이 가장 짧은 날이라,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올 참이었다. 황룡으로서 생원들의 출입을 지도해야 했던 승철은 맡은 일을 지수에게 넘기기로 했다. 완전히 제외되지는 못하고 아침잠이 많은 지수를 위해 묘시까지만 승철이 하고 그 후에는 전부 다른 황룡들이 하기로 했다.

준휘는 가만히 마루에 앉아 그런 승철을 기다렸다. 꽁꽁 언 눈조차도 녹이지 못하는 겨울 햇살 따위가 인간에게는 마냥 따가워서, 고개를 들고 하늘을 손으로 가렸다. 이리 가벼이 가려지는 태양이 속절없이 내 죄를 지웠구나. 손목으로도 가려지는 너머의 태양을 빤히 노려봤다.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손목이 일주일째 낯설었다. 일정하게 뛰고 있는 심장도 마찬가지였고.

“뭐해?”

때마침 속절없는 또 다른 태양이 제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손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출이라 딱히 챙길 짐이 없어 몸이 가벼웠다.

“다 끝났어?”

“응. 이제 나가면 돼.”

“고생했어요. 갈까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승철이 슬그머니 준휘의 팔목을 잡았다. 아직 다른 생원들 앞에서 손을 잡고 돌아다니기는 부끄럽다고 했다. 날이 추운 탓인지 확실히 망종보다는 일찍 나가는 생원이 적었지만, 부끄럽다는 사형의 손을 무작정 잡고픈 마음은 없어서 얌전히 팔목을 내어줬다.

황룡 의복을 갈아입은 승철을 데리고 서당 입구로 향했다. 지수가 눈을 꿈뻑이며 생원들을 봐주고 있었다.

부러 아는 체하지 않고 서당에서 빠져나왔다. 저번에 갔던 그곳. 사월촌으로 가야 한다. 승철은 당연히 그리 생각했는데, 준휘가 방향을 다르게 틀어 영묘산 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준휘의 팔목을 잡고 있던 승철은 곧이곧대로 그를 따라가 주며 물었다.

“우리 지금 어디 가?”

“잠시 확인할 게 있어요.”

“뭐? 뭘 확인하는데?”

준휘가 걸음을 멈추었다.

“사가족보私家族譜요.”

“어?”

준휘가 감투를 재빨리 씌워주었다. 승철은 다 이유가 있겠거니 해서 굳이 감투를 벗기진 않았다.

“나 단단히 잡아요.”

“아니. 너희 집안 족보? 그거 봐서 무엇하게. 네가 그걸, ...굳이, 왜 보려고 하는데?”

“모두 태어난 순서대로, 어느 꽃을 달고 났는지 기록되니까요.”

일단 나 단단히 잡아요. 질문에 답해주며 승철의 허리에 팔을 두른 후에 몸을 최대한 밀착시켰다. 준휘가 시키는대로 바짝 몸을 붙이면서도 뭐하게? 뭐하게? 하고 꾸준히 되물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묻기도 전에, 둘은 회오리치며 서당 앞 마반촌에서 존재감을 없앴다.

“......준아. 이거 쓸 거면, 미리 말 좀 해주라….”

추분에 이어 또 멋대로 공간이동술을 쓴 준휘 덕에 온몸에 힘이 풀렸다. 웃으면서 단단히 저를 받쳐주는 준휘와 눈을 마주쳤다. 후에 주변을 둘러보아도 고요하기만 할 뿐이었다.

“...나 신경 쓰지 말고 볼일 봐.”

“나한테 딱 기대어 있으면서. 볼일을 어떻게 봐요!”

말은 그리하면서도 조심스레 대문 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그 틈을 따라 들어갔다.

종종걸음으로 빨리 뒤따라간 덕에 사랑채의 문은 함께 열었다. 준휘가 왼쪽부터, 승철이 오른쪽부터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준휘가 작게 찾았다, 하며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소리 없이 펼쳐서 한참을 보고는 조용히 덮었다.

“가요.”

“가?”

“네.”

적막 속이라 최대한 목소리를 줄여 말하고 있었는데, 아이의 울음소리가 준휘의 목소리를 묻었다. 그 울음에, 승철이 화들짝 놀라며 입을 막았다. 그 상태 그대로 다시 왔던 길을 따라 돌아 나왔다. 대문까지 소리를 죽여 빠져나온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봤어? 보고싶은거.”

“......네. 백일홍이 생겼어요.”

“괜찮아?”

혹여나 준휘가 상처를 입을까 걱정이 되었다. 힘들어도 그닥 내색을 하지 않던 놈이라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무던하고 조용하더라도 속이 들끓을 수도 있으니까.

“네. 알고는 있었어요. 원우한테 들은 게 있어서…….”

“...진짜 괜찮냐고.”

“응. 난 괜찮다고.”

준휘는 단지 어떤 꽃이 붙었는지, 제 동생이 된 아이도 두 꽃을 품지는 않았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말하지 않으면 계속 걱정하고 끙끙 앓을 것 같아서, 얼굴을 양손으로 감싼 채로 눈을 마주하며 곱씹어주었다.

“나 정말 괜찮아요. 그냥 어떤 꽃을 품었나 보러 온 거야. 정말로.”

어떤 꽃을 품었는지, 또, 그새 죽지는 않았는지.

“...그렇다면 다행인데….”

“그리고, 다시 할 거예요. 나 꽉 잡아요.”

“어? 뭐? 왜?”

“영묘산에서 내 집까지 가기엔 좀 멀어요. 나, 이번에는 미리 말했어요!”

정신을 차리기도 어지러운 와중에 승철은 몸을 찰싹 붙였다. 준휘를 꼭 껴안은 채로 눈을 감았다. 어지러운 감각은 언제나 익숙해지지 않았다. 홀로 할 때는 몇 번 연습을 한 덕에 중심을 잃지 않았는데 남과 함께 움직일 때는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아 휘청거리길 반복했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니, 앞에 펼쳐진 배경이 추분과 똑같았다. 준휘네 안방이었다. 승철은 또 그대로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고작 하룻밤을 지내본 게 전부인데도 제집마냥 익숙했다. 준휘는 그런 승철의 옷을 갈아입혀 주려는 시도 대신 그 위로 이불을 덮어주었고.

너 진짜 내가 덜 좋아했으면 혼냈어…. 웅얼거리는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에 입을 가볍게 맞추어주었다. 조금씩 지훈의 기운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때를 잘 맞춰서 왔네. 조금만 더 여유를 부렸으면 현무와 백호가 집 앞에서 추위에 벌벌 떨 뻔했다.

“어지러울 테니 누워 있어요. 애들도 온 것 같으니, 잠깐 자도 돼요.”

“으응…….”

말랑한 볼살을 아프지 않게 꼬집은 준휘가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능소화가 대문 밖에서 이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멀리서 마법으로 대문을 열어주니 순영과 지훈이 기다렸다는 듯 걸어들어왔다. 준휘는 흘긋 그들을 보고는 부엌에 불을 때기 시작하며 손을 흔들었다.

“일찍 나왔네?”

“엉. 권순영이 그러더라. 조금이라도 늦으면 마반촌에 팥이 다 털릴 거라고.”

“멥쌀도 아슬아슬했지.”

순영이 지훈을 깨우러 현무에 들어가서 한 소리였다. 동지를 미처 잊고 있던 사람들이 다들 새벽부터 나와서 팥을 사니까, 우리도 그에 맞춰서 나가야 한다면서. 지훈은 얌전히 순영의 의견을 따랐다. 요리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는 지훈이라, 순영의 뒤에 가만히 서서 지켜보다 짐을 들어주기만 했다.

대문 안으로 들어온 순영은 춥다며 몸을 바르르 떨고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지훈이 제 손에 있던 짐들을 준휘에게 주었다.

“너도 얼른 들어가. 방금 불 땠으니까, 조금 있다가 만들면 되겠다.”

“얼마 정도 걸리려나?”

“음…. 한 시진하고도 이각 정도?”

“딱 되겠다. 찬이한테 정오가 지나고 나오라고 했거든.”

처음에는 명호와 승관도 오기로 했지만 명호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며 빠졌고, 승관은 난데없이 감기에 걸린 탓에 못 나오게 됐다. 청룡 침소에서 하루 종일 걱정하는 정한이 벌써 눈에 선했다. 아쉽게도 둘과는 다음을 기약했다. 함께 할 장래는 더없이 밝고 기니까.

준휘는 어느 정도로 팥죽을 만들어야 할지 그릇에 나누어 담기 시작했다. 지훈이 멈칫멈칫하며 준휘를 도우려고 했으나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몸을 굳히고 있었다.

“응….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

“지훈. 요리 해봤어?”

“안 해봤지.”

“응. 나랑 순영이랑 할게.”

“...그래도 새알은 굴릴 수 있어.”

무언가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준휘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놀렸다.

“그것도 반죽을 만들어야 굴리지!”

“…….”

“알았어. 알았어! 반죽 만들고, 부를게.”

그릇을 나누어 담은 준휘가 솥에 담아두고 뚜껑을 덮었다. 날이 차니까 조금만 몸을 녹이고 하자면서. 발걸음을 가벼이 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승철은 아까 누운 자세 그대로 잠이 들어 있었고, 순영은 승철의 배 위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준휘가 까치발을 든 채로 장롱으로 가서 이불을 하나 더 꺼내주었다.

사시가 될 때쯤에 준휘가 순영을 깨워서 팥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준휘가 완전한 영물이 된 탓인지, 아니면 팥죽을 해 먹는 동지인 탓인지, 영혼들이 집을 돌아다니지 않았다. 적절히 음과 양이 잘 맞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하며 차근차근 만들어갔다. 도중에 새알 반죽을 만들어 방 안에 집어넣어 주니 이각이 좀 지나서 동글동글한 새알들이 가득 담긴 바구니가 나왔다.

정말 딱 준휘가 말했던 대로였다. 정확히 한 시진이 지나고 나니 고소한 냄새가 집안에 풍기기 시작했고 이각이 지나고는 다 만들었다며 방문을 열어젖혔다. 생각보다 많은 양이 솥에 담겨 있어서 지훈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두어 번 다시 봐도 5인분은 충분히 넘을 정도였다.

“뭐… 나비들도 줄 거야? 왜 이렇게 많아.”

“막내 의견이야! 사월촌에는 팥죽을 못 먹은 사람이 많거든.”

“신을 모셔서?”

“아니, 돈이 없어서.”

순영이 덤덤하게 말하며 그릇에 팥죽을 담았다. ...미안. 지훈이 사과하자, 순영은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젓기만 했다. 그런 건, 사과할 필요 없으니까. 승철은 솥 앞에 앉아 큰 주걱으로 젓고 있는 준휘의 등에 착, 달라붙었다. 혹여나 무거울까 싶어 일어나려 했으나 어찌 알았는지 준휘가 먼저 따뜻하고 좋다며 한 손으로 엉덩이를 받쳐버리는 바람에 뻣뻣하게 굳어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딱 맞게 찬이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을 어떻게 열었냐는 말에, 찬은 멀리서 달려오며 제 허리에 대롱대롱 달린 준휘의 노리개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반대쪽 손에는 매작과가 한가득이었다. 사형 집에 처음 방문하는 건데, 음식을 주는 것도 고마워서 사 왔다며 말을 붙였다.

“고마워! 이거 먹고, 먹으면 되겠다.”

승철이 매작과를 받으며 준휘의 몸에서 떨어지고 순영은 준휘와 함께 상을 방 안으로 갖고 들어갔다.

찬이 요새 배우는 마법들에 대해 듣다 보니 순식간에 식사가 끝이 났다. 마법이란 것을 처음 접한 1년 생원은 언제 봐도 조마조마했다. 승철도, 순영도 찬과 마찬가지로 뜬금없이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이라 마음이 더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찬은 비교적 무탈한 서당에서 잘 배운 덕에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다. 학문도, 무예도, 나비 사형들에 비하면 조금 더뎠지만 그만큼 열과 성을 다해가며 꾸준하게 잘 따라오고 있었다.

“...기특하네. 너 같은 아이가 황룡 수장이 되나 보다.”

“왜요?”

지훈이 말을 어찌해야할 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냥, ...저 많은 팥죽을 해서 나누어주자는 것도 네 의견이었다며. 그런 사소한 배려가 모여서 좋은 세상을 만들테니까.”

“...아. 이거는…….”

찬이 말하는 것을 망설이다 혹시 하나만 부탁해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넷은 무엇이든 말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사월촌에 저희 가족도 살잖아요. 어…. 강의 중에 박사께서 하신 말씀인데요, 영생이란 신과 그들을 모시는 이들에게 전부 엄청난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모시는 신을 끝까지 모시지 못하는 것에 대한 슬픔, 그리고 나를 믿어주고 따라주는 이들이 영면하는 것에 대한 비참함 때문에요.”

“...그렇지.”

다들 본인의 마음 한 켠에 있는 인물들을 속으로 떠올렸다.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사형들처럼 인간의 삶을 살다 신을 모시게 되는 운명이 되면요, 가족은 어찌 되는 건가 하고요. ...그러다가 제가 황룡 신령이 된단 걸 알게되고는....”

“……”

“...일반인인 내 가족이, 차라리 날 잊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가족들을 기억한 채로 살고, 어머니랑 동생은 저에 대한 기억을 잊게 해야겠다고요.”

“마음을 굳혔어?”

“네. 한로부터 동지까지, 계속 생각했던 것이에요. 이게 옳은 것 같아요.”

“네 선택이 그렇다면 그리해야지. 오래 생각한 것이니, 네 선택에 따를게. ...그런데, 우리한테 무얼 바란다는 거야?”

승철의 질문에, 찬이 흠칫하며 머뭇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홀로 기억을 지우는 마법을 공부했습니다. 나빌레라를 사용할 줄 알긴 하지만 이렇게 개인적인 일에는 사용하고 싶지 않아서요. 그래도 혹시나, 제가 공부한 것이 그릇되어 실패하게 되면 사형들이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지 뭐.”

순영이 단번에 대답했다. 제가 하려다 실패한 것을 가장 아끼는 청룡이 하고자 한다니,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

처음에는 망각술을 사용해서 살아온 기억을 전부 지우려다, 입추에 순영이 쓴 마법을 쓰고자 했다. 이마에 마구의 호를 대고 제가 존재했던 기억만 빼내면 되기에 이론적으로는 이게 더 쉬웠지만, 삐끗해서 봉을 잘못 잡고 했다가는 그 기억이 평생 그 사람의 뇌를 맴돌게 된다고 했다.

순영을 데리고 조용히 찬의 집으로 갔다. 순영은 항상 누군가의 집에 갈 때마다 온전히 가족을 보호할 공간이 있다는 것을 부러워했다. 뒷문으로 들어가서 곤히 자는 동생의 머리에서 기억을 완전히 빼냈다. 어린아이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찬이 걷어낸 기억은 물에 젖은 듯한 표시만 남을 뿐, 관원처럼 짙은 회색이 나오진 않았다. 조용히 밖으로 나와 부엌 옆 마루에 앉아 졸고 있는 어미의 머리에서도 기억을 빼내었다. 옅은 분홍색이 찬의 호를 물들였다. 사랑이네. 감투를 쓰고 곁에서 지켜보던 순영이 말했다. 찬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제 감투를 벗었다. 순영은 그런 찬을 가만히 기다리며 지켜보다,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건네주었다.

“...저, 어머니.”

묘하게 목소리가 떨렸지만 의식할 정도는 아니었다.

“누구...?”

꾸준한 노력은 찬을 배신하지 못했다. 저를 못 알아보는 어머니에게  김이 폴폴 나는 그릇을 드렸다.

“아. 전 한양 동학東學 유생입니다. 제가 사월촌 출신이라, 키워주신 주민들께 보답하려고 만들었습니다.”

“어유,…. 고마워요. 아이랑 잘 먹을게요. 참, 부모님께서 자랑스러워하시겠네……. 이리 좋은 아들을 두고.”

“......다, 덕분이죠.”

“으잉?”

“아. 아뇨! 맛있게 드세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얼른 꾸벅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한 번 감투를 벗고 나니 다시 쓰기에는 주변 사람들이 너무 의식되어 미적미적 발을 끌며 준휘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려 했다. 그러다 재빨리 나오느라 두고 나온 순영이 생각이 난 탓에 다시 집으로 몸을 돌렸다가, 감투를 벗고 제 뒤에 바짝 붙어있던 순영의 가슴팍에 이마를 부딪쳤다. 고개를 들기도 전에 순영이 폭, 품에 안았다. 잘했다고. 평소였으면 장난치며 떨어졌을 텐데 이번에는 말없이 눈물을 삼키며 가만히 안겨 있었다. 서당에 들어오고, 아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리광을 부렸다.

시리도록 따스한 겨울이었다.

나빌레라

冬至, 새로운 날, 새로운 기분으로.

일양一 陽이 생生하도다. 한 해의 태양이 죽어가며 음기가 극성한 이때 양기가 새로이 생겨났다. 동지가 되면 삼삼오오 모여서 팥죽을 해 먹었는데, 민규는 그 점이 항상 불만이었다. 양친의 일이 바빠 동지에 함께 식사할 시간도 없었거니와, 들려오는 말로는 제가 원우와 친하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내는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고 했다. 사자가 혼을 인도하는 데 방해가 된다나.

어디 가서 이 불만을 토로할 성정도 되지 못하여 눈이 쌓인 동지에는 항상 방에 틀어박혀서 울기만 했다. 그렇게 두어 해를 보낼 때, 동지에 맞추어 모란에 들른 바다 도깨비 김영은 작고 여린 모란 한 송이를 위해 팥죽을 내어주었다. 계속 안 먹겠다 떼를 쓰더니, 막상 내어놓고 숟가락을 쥐여주니 소반 위에 내려두지도 않았다.

“먹어도 된다.”

“꽃무릇 저승사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 먹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거는 전원우한테나 해당되는 소리지. 넌 원래 양기가 많아서 먹든 안 먹든 똑같다.”

“...정말 먹어도 됩니까?”

그리 물으면서 숟가락은 착실히 새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먹으래도.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홀린 듯, 민규가 덥썩 새알을 퍼먹었다. 이날 이후로, 독각은 항상 민규를 위해 동지가 될 때마다 차가운 바다를 등지고 모란으로 왔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홀로 홍월천에 다녀오는 것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그래도 올해부터는 원우와 함께 갈 수 있겠다 싶어, 대설에 원우가 천상에 갔다가 온 이후부터 착실히 함께하자고 졸랐다. 적막 속에서 눈이 내리는 것만 보기에는 시간이 아까우니 흔쾌히 승낙하려던 원우는 제집에 함께 귀신을 쫓아줄 인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민규는 그것마저 예상했는지 독각에게 원우를 데려가는 것까지 허락을 맡은 상태였다. 결국 원우는 민규를 따라가기로 했다.

차분하고 단정한 꽃무릇에 익숙해져 있다가 모란으로 들어서면 항상 화려함에 넋을 놓게 된다. 수십 년을 들락날락  하였음에도, 항상 마당 빼곡히 피어난 목단의 향과 광채 나는 내부에 시선을 빼앗겼다. 독각! 저희 왔어요. 딸기를 한 아름 챙겨 든 민규가 대문을 열면서 소리쳤다. 사내종들이 뛰어와 바구니를 가져갔고, 때에 맞게 사랑채에서 독각이 나왔다. 굳이 마당으로 내려오지 않고 곧장 대청마루로 갔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연잎 소반에 보자기가 봉긋하게 덮여 있었다.

“굶어 죽지는 않겠다. 오기 직전에, 상을 다 차렸다고 하던데.”

“다행입니다! 딸기를 사는 데 좀 오래 걸려서, 늦으면 어찌하나 했는데.”

“너는 잘 다녀왔냐.”

독각께 방석을 드리고 앉으려던 원우가 독각의 질문을 듣고 삐끗했다.

“네?”

“위에.”

“아. ...네. 상제를 뵙고 장래의 오방신에 대해 논하였습니다.”

많이 포괄적이긴 하지만, 조금 더 깊게 말했다간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발설할 것만 같아서 더 말을 잇지는 않았다. 독각도 별로 더 물어보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져, 이번에는 원우가 질문을 던졌다.

“독각께서는 제가 이런 운명이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알고 있었지. 김민규보다 한 해 일찍 태어나, 일평생 죽음을 모실 것을.”

“…….”

“너는 어찌할 것이야? 네가 타고난 운명은 이미 1년 생원일 적에 그쳤는데.”

“...청룡이 된 것이요?”

“그래.”

항상 독각이 민규에게 해주던 말이 떠올랐다. 운명은 네 삶에 뿌리를 내리고 우직하게 자라난 몸통이며, 그곳에서 네가 가지를 그려내면 우연이 될 것이라고. 운명에서 피어나는 우연이 합쳐 삶이 된다고 했다.

“이제 별다른 전환점은 없는 것입니까?”

“네가 만들어내는 우연이 운명으로 만들어지겠지.”

“으음…….”

“네가 태어날 적에, 위로 올라갈 운명이 아니란 것이 이상하긴 했다.”

말하기를 고민하는듯한 민규에게, 독각이 넌지시 말을 이었다. 옆에서 깨작깨작 팥죽을 먹던 원우의 움직임이 더 느려졌다.

원우도 그리 생각했던 적이 있으니까. 홍월천에서 지내면서 서당에 들어오기 전까지, 열다섯 해를 모두 민규와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인간관계가 좁았다. 상제의 입에서 준휘가 나오기 전까지 원우는 착실히 민규가 황룡 신령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해왔다.

“그건 언제, 어찌 아셨습니까? 제가 오방신의 수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요.”

“네 어미의 배 속에 자리를 잡았을 때부터 그랬지.”

분명 전원우의 삶에는 항상 김민규가 있는데, 오방신들의 사이에는 없었다. 날 때부터 그의 기운이 없기도 했고. 원우는 물의 기운을 한가득 안고 태어난 것을 직접 보고 느꼈는데, 민규는 은은한 나무의 향만 날 정도였다.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긴데. 민규가 흥미롭다는 듯 들으며 새알을 씹어 삼켰다.

“그래서, 무엇을 하고 살 거냐고.”

“…….”

“이 집안에서 태어난 이상, 그 짧은 인생을 모두 무위도식하며 지내다 가도 되지.”

헌데 넌, 그러지 못할 성정임을 아니까. 독각이 말을 덧붙였다. 민규는 항상 받은 사랑의 배를 돌려주고, 인간들에게 끝없이 달라붙어 애정을 간구한다. 무언가를 이루어내고자 하는 욕망도 적지가 않음을 알기에 하는 소리였다. 짧은 인생…. 민규가 웅얼거리다 독각과 눈을 마주했다.

“짧은 인생을 살지 않을 겁니다.”

“다들, 그 소리 하면서도 날 두고 떠났다.”

도깨비가 받는 유일한 형벌이었다. 저를 모셔주는 이들의 죽음. 민규는 입을 삐죽이다가 확고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우는 이곳으로 오는 길에 얼핏 들은 것이 있어, 민규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예상하며 독각을 흘긋 보았다.

“용궁에 갈 겁니다. 진짜, 짧게 안 살거라구요.”

“......뭐?”

처음 보는 신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독각이 도깨비로서 살아온 인생에서 가장 당황한 순간일 것이다. 민규는 독각이 가장 아끼던, 고마운 이의 운손雲孫이 낳은 막내아들이다. 돌고 돌아 그가 용궁에 다시 들어가겠단 말을 입에 담았다.

“바다의 수문장, 해보겠습니다. 독각과, 원우형과 영생을 살 거예요.”

“고된 영생을 시퍼렇고 찬 바다에서 보내겠다고.”

“네.”

“무예학도도 아닌 네가, 덩치만 믿고 수문장을 하겠다 하는 것이야?”

그러지 않을 아이임을 알지만, 치기 어린 생각을 하는 것인가 싶었다. 터무니없이 영생을 바라는 인간은 수없이 봐왔다. 그저 죽음이 두려워 그런 인간이 대부분이었으며, 간혹가다 신을 갈망하고 동경하던 이들의 근거 없는 바람이 들어있기도 했다. 민규는, 아무래도 후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뇨. 무예학도랑, 대설에 겨루어보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가.”

“백일안개랑 했는데, 공격은 한 번도 못 했어요. ...막기만 했습니다.”

“두 힘을 가진 마반인에게 그 정도 저항이면 잘했네.”

“아무튼, ...당신이 사랑하는 용궁에, 내가 다시 들어갈게요.”

“발칙하네.”

그리고, 상대가 17대 황룡 신령입니다. 그럼 더할 나위 없이 잘했군. 심해 같은 그의 목소리가 파도처럼 다가와 민규의 귓가에서 부서졌다. 속이 한결 편해졌다. 무작정 뛰어들어도 저를 격려해주는 신이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모르겠다. 원우는 덤덤히 민규의 무릎과 허벅지 부근을 쓰다듬어주기만 했다. 말하기까지 고생했다고.

언제 가니. 비복들이 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상에서 조금 물러난 원우와 민규에게 독각이 말했다. 정해진 시간 내에만 가면 된다고 답하며 수시를 확인해보니, 서당으로 돌아갈 때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좀 촉박할 것만 같았다. 둘은 얼른 가보겠다며, 꾸벅 인사를 하고 나섰다. 민규는 나서기 전에 비복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서 딸기를 꼭 먹어보라며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매듭달 이레

과녁 앞에 박살 난 화살들을 줍고, 승관에게 각궁 다루는 법을 얼추 가르쳐준 준휘에게 민규가 대뜸 제안했다. 저랑, 무예 대결을 해보자고. 점심이 되기 전까지는 시간이 좀 있으니 한 번만 해보자며 다가왔다. 여간 당황스러운 것이 아닌지, 허리를 채 펴지도 않은 채로 자세를 멈추고 물었다. 옆에서 듣던 승관이 멍한 표정으로 그의 허리를 세워주었다.

“나랑... 뭘 하고 싶다고?”

준휘가 얼떨떨한 듯 물었다.

“비무요.”

“...나?”

“네.”

더 바뀌지 않는 대답을 굳이 반복할 필요는 없었다. 준휘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네가 무엇을 배웠다고 했지?”

“대검을 배웠습니다.”

“...그럼, 나도 검을 잡아야 하나? 순영이랑 할 때처럼 활 잡으면 안돼?”

“안 돼요.”

왜지? 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부러 묻지 않았다. 준휘는 알겠다며 목검 두 자루를 가져왔다. 민규가 쓰는 대검에 비해서는 둔하고 두텁고 무거웠지만, 생색내지 않고 비무를 준비 했다. 승관은 멀찍이 떨어져 앉은 채로 그들을 봤다. 준휘도 목검을 몸에 익숙하게 맞추려는 듯, 툭툭 잡아서 땅에 찧고 있었다.

“왼손으로 해줘?”

“...무예생에게도 왼손으로 해줍니까?”

“간혹가다 찬이랑 할 때. 아직 힘 조절을 못 해서.”

찬이 무작정 달려들 때 준휘가 평소처럼 받아치다간 다칠 우려가 있어서 그런다고 했다. 민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거면 부탁을 안 했지.

“......하던대로 하시죠. 그냥…,”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목검의 끝부분이 무섭게 바람을 가르며 민규의 코를 스쳤다. 민규는 살짝 뒷걸음질 친 것이 고작이지만, 승관은 놀라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뭉툭한 목검 뒤, 준휘와 눈을 마주쳤다. 엇비슷한 위치에 있는 새까만 눈동자가 송구할 만큼 매서웠다.

“비무로는 장난 안 쳐. 진심으로, 해?”

“...네.”

“못 하겠으면, 아픈 곳이 생기면 바로 말해.”

준휘는 민규의 대답을 듣자마자 검을 휘둘렀다. 꽃밭에는 한참 동안 목검이 맞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말로만 진심으로 한다고 하고, 조금이라도 봐줄 생각이었는데. 준휘의 예상보다 훨씬 힘있고 강단있는 목검이 제 몸으로 치고 들어오려는 탓에 온 힘을 다해 민규를 막았다. 원래 덩치가 있어서 그런가? 청룡들은 원래 무기를 잘 다루나? 따위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그의 공격을 다 받아쳐냈다.

준휘는 민규의 공격을 받아낼 자신이 없어서, 민규가 공격할 틈새조차 만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공격한 것을 끝내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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