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한로(1)

찬 이슬이 맺히고

서당 by 반야


신神은 나무를 타고 다닌다. 타고 다닌다는 것이, 그 위에 올라타 말처럼 나무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무 속을 이용하여 이동한다는 의미이다. 연륜年輪이 많을수록 한 번에 여러 신이 움직일 수 있다. 그 권한의 순서는 체계적이다. 순서대로 명命을 다스리는 시왕(염라), 해海를 다스리는 용왕, 혼魂을 다스리는 상제의 권한이 가장 크다. 그 이후에는 천상의 오방신장, 저승의 차사……

 


하늘연달 여드레

더 이상 문이 열리지 않았다. 동백의 흔적을 쫓아다니려 했지만, 낌새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밤에 몰래 나와서 한참을 찾아다녔다. 2주를 꼬박 돌아다녔는데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항상 그러했듯, 터덜터덜 지친 몸을 이끌고 누각에 들어갔다. 정한이 밤을 새울 때 쓰는 이불이 깔려 있었다. 곧 영조례가 있어 밤낮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반궁의 장의들도 오는 중대한 일이었기에, 더욱 신경을 써야 했다. 괜히 미안해져서 이불보만 만지작거렸다. 승철과 정한이 저를 모든 준비에서 빼두어서 마땅히 할 일도 없었다. 벌러덩 그 위로 누워서도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에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늘어지는 황룡이야 자주 있었으니까.

“지수야.”

“응…….”

승철이었다.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도 지수는 미동 없이 눈만 깜빡였다. 서로의 목소리에 피곤함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승철은 나중에 이야기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소서를 지날 때쯤에, 상제의 서찰을 받아서 혼자 해결한 게 있어.”

“...응.”

“그때 해태 타는 법을 배웠거든.”

모르는 새 감겼던 눈을 번쩍 떴다. 승철의 옆에 정한도 앉아 있었다. 눈에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알려줄까? 그거 타면 올라갈 수 있어. ...그래도, 올라가면 아는 분들은 많잖아.”

둘은 진작에 순영에게서 목문이 닫힌 상태란 것을 들은 후였다. 지수의 상태가 걱정스러워 부러 바로 알려주지 않고 정한과 상의해서 뒤늦게 알려주었다.

“알려줘.”

“해태상 있잖아. 우리 서당 입구에 있는 거. 그걸로 가면 되거든? 일단 일어나봐. 같이 가자.”

“......고마워.”

몸을 일으키다 멈추고는 둘을 바라봤다. 지금 올라가면, 완전히 영조례 준비에서 빠지게 될 것이 뻔했다. 승철은 온전히 지수의 선택에 따를 것이기에 어떻게 할 것인지 되물었으나,

“무슨 소리야?”

정한이 가로막았다. 물론, 그가 무슨 걱정들을 떠안았는지도 알고 있었다. 황룡이 서당 밖으로 나설 때는 항상 무예학도를 데리고 다녀야 했다. 만약 지수가 나가게 되면, 영조례를 준비하던 무예 대열 하나가 공석이 된단 것도 진작 생각했을 터였다. 순영이 지수의 곁에서 흔적을 쫓는 것을 몇 번 도와줬는데 이마저도 빚을 남기는 것 같아 불편했겠지.

“갔다와. 네가 우선이야. 우리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

“...그래도.”

“찬이 데리고 가면 되잖아. 괜찮으니까, 네 걱정만 해.”

아직은 정식 무예생이 아니니까 영조례를 준비할 것이 없을 거라고 했다. 때마침 찬이 강의를 다 듣고 나올 시간이어서 곧바로 그를 낚아채자고 했다. 승철은 그 말을 듣자마자 명륜당으로 뛰어 내려갔다. 지수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따라 나갔다.


간단히 타고 내리는 법을 듣고, 해태를 움직이는 것과 다시 석상으로 돌리는 것도 배웠다. 찬은 기합이 바짝 들어간 듯, 꼿꼿하게 서서는 승철이 알려준 것들을 혼자 읊조리고 있었다. 승철이 찬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툭툭 쳐주었다.

“잘 다녀오고. 조심히, 천천히.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서당에 들어온 지도 꽤 지나서, 나비들과는 말을 편하게 하다가도 이런 때가 오면 착실히 예의를 차렸다. 지수에게는 따로 말을 걸지는 않았다. 승철은 해태를 타는 것을 도와주고, 그들이 하늘로 올라가서 사라지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다시 누각으로 돌아갔다.

지수의 해태가 찬의 해태보다 앞서 나갔다. 찬은 아래를 보지 못했다. 그저 지수의 해태 꽁무니만 쫓았는데, 지수는 미련이 많은 표정으로 아래를 흘끔거렸다. 생각이 많은 것을 사제들에게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던 지수라, 찬은 묘한 감정이 들었지만 꿋꿋하게 위만 쳐다보고 그를 쫓았다.


도착하자마자 천계책방으로 갔다. 찬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읽을 책이 이리도 많다니! 두 눈이 번쩍이는 찬에게는 미안했으나, 지수는 목적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내려가고 싶었다.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이기적인 마음이 앞섰다. 없어진 동백을 찾기보다는 승철과 정한의 곁에서 가까운 미래를 준비하는 게 더 마음이 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그래도. 저를 키워준 유일한 가족이고 세상의 전부였기에 찾아야 했다. 불편한 우선순위였다.

“...찬아.”

“네!”

당연하게도, 천상에조차 흔적이 없어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흘긋 눈치를 보던 찬이 서책을 덮고 지수에게로 다가갔다. 정말 미안한데, 이제 다른 곳에 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찬은 아쉬운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한 마음이 드는 탓에, 결국 동백을 이용해서 찬이 원하는 서책 세 권을 받아왔다.

천계 책방에서 백호관까지는 멀지 않았다. 이곳에는 온갖 귀물과 요괴들이 돌아다녔기에 해태를 타고 움직이는 것이 이질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괜히 해태가 고생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저기까지 걸어갈 것이라며 백호관을 가리켰다. 찬은 당연하게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가보자고 발을 뗐다. 찬은 뒤따라오는 듯하더니 망설이는 말투로 물어봤다.

“사형. 무슨 걱정 있으신가요?”

“응? 음……. 조금?”

“...그렇습니까?”

“왜? ...그렇게 보여?”

“어, 순영 사형이... 무예를 하는 내내 걱정하셔서요.”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와 지수의 발목을 잡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 며칠 사이에 걱정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는 찬의 말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호시에게 알려줄래? 지수의 담담한 물음에, 찬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저리 바쁜 아이들에게 쓸모없는 짐을 얹기 싫었다.


백호관 앞에 섰다. 지수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찬은 알지 못했다. 어찌 열어야 하나 싶은 마음에, 문에 손을 얹어보려고 했다. 준휘 사형은, 이렇게 해서 밀면 모든 문이 열린다던데….

쾅!

지수가 백호관의 대문을 세게 내리쳤다. 주체할 수가 없었다. 동백이 미친듯이 안에서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백호 영수는 지수가 왔음을 알면서도 문을 안 열고 있다는 것조차 화가 났다.

찬은 다급히 그의 팔목을 붙잡았다. 어찌나 세게 내리쳤는지, 손목뼈 아래가 벌써 뜨끈거렸다. 찬이 다급히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안 치울래?”

“사형 이러다 크게 다쳐요..!”

찬의 다급한 외침에도 지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번 더 내리치려 했다.

“거칠다.”

백호의 말이었다. 몸이 우뚝 멈추었다. 문에 바짝 붙어 애타게 그를 찾았다.

“열어주세요. 우리 엄마, 여기 있어요?”

“…….”

“동백이 여기서 나고 있어요? 어디 갔어요?”

문이 웅장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지수는 찬을 잊은 사람처럼, 달려갔다. 곧장 백호의 업무실로 들어갔다.

나빌레라

寒露(一), 찬 이슬이 맺히고 가을 단풍이 짙어진다.

주변은 살피지도 않은 채로 쿵쿵거리며 다가갔다.

거칠게 책상을 짚었다. 백호는 그런 지수를 그저 보기만 했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지수는, 백발에 벽안 상태였다.

“목문을 닫았는데 어찌 왔느냐.”

“홍지호 어디 갔어요. 어디 숨겼어요? 왜 아무 데도 없어요? 서책에 모든 기록이 사라졌어요. 이름이 묵삭되더라도 기록은 남는다면서요. 무명민으로라도 남는다고 했잖아요.”

“…….”

“말 하라고요!”

손목이 아릿할 정도로, 쾅 소리가 나게 짚었다. 이렇게 격정적인 지수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우리 엄마를, 얼마나... 지우려고…….”

다짜고짜 달려들어 와서 그르렁 대던 어린 백호가 금세 곯아떨어졌다. 그의 곁에 있던 주작 영수가 스르륵 쓰러지는 지수를 날개로 받아 올렸다. 날개 한 편에 뉜 몸을 토닥여주며 물었다.

“얘 상태 왜 이래?”

“난들 아나.”

백호가 그제야 일어나 지수를 받았다. 수장이 될 놈이 왜 이리 가벼워? 주작에게 건네받은 지수가 너무나도 한숨이었기에 잠깐 놀란 후에 옆 침실에 눕혀두었다.

찬은 이 모든 광경을 얌전히 보기만 했다. 백호관의 업무실이라고? 그럼, 중심에 있는 저분이 백호일테고, 날개로 받아주신 분은 주작일 테고…. 그 외에는 각각, 저분이 현무와 청룡이시겠구나. 청룡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넌 누구니?”

찬이 화들짝 놀라 주저앉았다. 뒤를 돌아보니, 오방식시에서 본 얼굴이었다. 그는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앞에 있던 넷에 비해 작은 체구였음에도 무언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누구냐고 물었다.”

“아, 저. 이찬이라고 합니다. 서당에서, 청룡 영수의 수호를... 받고, 있습니다…….”

제게 쏠린 다섯 쌍의 눈동자가 너무 부담스러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관계를 최대한 설명해야 했다.

“...그리고! 황룡백호 홍지수의 사제입니다. 무예를 해서, 사형을 보호하기 위해 황룡의 허가를 받고 함께 올라왔습니다.”

몰아붙이듯 말하는 찬이 그들의 눈에는 마냥 귀여울 뿐이었다. 들어와 앉아라. 백호의 말에, 찬은 홀린 듯이 들어와서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16년을 살면서 이리 불편한 자리는 처음이었다.

“지수가 깰 때까지, 말장난할 아이가 생겼군.”

“1년 생원이라고?”

“겁도 없이 하늘에 올라온 값을 치러볼까.”

찬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늘연달 아흐레

민규가 나비들을 불렀다. 석민은 나무 아래에 기대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고, 민규와 명호는 항상 그랬듯 그림을 그렸다. 승관은 꽃밭을 서성거렸다. 원우가 키워둔, 더는 사용하지 않을 꽃무릇 옆에 나비들의 꽃이 한가득 피어나 있었다. 승관이 그중 마지막이었다. 준휘가 엊그제 피워낸 백일홍 옆에 자그마한 수선화를 피워냈다. 그 중 세 송이를 가지고 나와서, 하나는 석민의 새끼손가락에 반지를 만들어주고, 둘은 각자의 벼루 위에 얹어주었다. 민규가 답례로 커다란 모란을 피워서 건네주었다.

영조례가 다가오자 또다시 서당은 바쁘게 굴러갔다. 연례행사가 끝나고 나면 시험에 공부에 과제까지 미친 듯이 밀려오고, 또 다른 행사가 시작될 때쯤이면 강의가 멈추고 황룡들과 무예, 정학을 하는 생원들 위주로 생원들이 바삐 움직였다. 아직 서당에 들어온 지 1년이 채 되지 않는 생원들은 그저 주어지는 순간을 즐길 뿐이었다.

“영조례를 할 때, 누가 와요?”

“청의 임금과 사신이 오지.”

“강론도 하지.”

명호의 대답에 민규가 말을 덧붙였다. 6년 생원들이 한다고 했다. 아마 황룡이 하겠지, 싶어 고개를 주억였다.

“무예도 해요?”

“응. 찬이가 하고싶어 했는데, 아쉽게도 내년부터 할 수 있어.”

승관은 찬이 아쉬워했던 것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았다. 명호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현재 무예생원들보다도 실력이 좋은데, 어리다는 이유로 정식 대열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것이 무척 아쉬운 모양이었다.

“사형도, 기대되시나요?”

“응? 나?”

먹을 갈던 명호가 슬쩍 승관을 보고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래 보여?”

“뭔가, 평소보다 들떠있는 것 같아요.”

“우리 아버지가 청에서 사신 대표로 오거든.”

“...네?”

“뭐?”

놀란 민규의 목소리가 엇나갔다. 명호가 제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거, 우리 아버지 드릴 거야. 사방신이 나비들의 꽃밭에 있는 그림이었다. 평소와 달리 색채를 사용한 이유가 그거였냐는 민규의 말에, 명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 2년만에 보는 것이긴 하나, 반궁의 생원들과 지내는 시간이 더 많을 것 같아 만날 시간은 적을 것 같다고 했다. 연회 끝 무렵에 무예를 끝내고 나서 만날 생각이라 했다.

“춘분 시험을 칠 때쯤에 아버지 서찰을 받았던 것 같은데 벌써 가을 끝 무렵이라니.”

“…….”

“승관이 너, 추분 공부 안 해도 돼?”

“아, 맞다! 서책들 좀 가져올게요!”

뒤늦게 벌떡 일어났다. 오는 길에 제 도포도 하나만 가져와 달라 부탁하는 민규에, 잠시 멈춘 승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문을 표했다. 석민에게 덮어줄 것이 필요할 것 같다는 말에 그제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두꺼운 것 가져올게요! 하며, 종종걸음으로 버드나무 아래로 향했다.


하늘연달 열흘

원우는 준휘와 지훈을 데리고 월묘에게 가려던 참이었다. 순영이 없으면 아무런 말도 안 하는 셋이었음에도 어색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각자 다른 곳에 시야를 두고서도 목적지로 행하는 발걸음은 동일했다. 준휘와 지훈보다 한 발짝 뒤에서 뒷짐을 지고 걷던 원우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민규가 물어보래서 말인데.”

“응. 뭔데?”

준휘의 대답에 원우는 움직이던 것을 멈추었다. 둘이 뒤를 돌아보고 나서야 다시 천천히 말했다.

“한솔이가... 나빌레라를 쓸 수 있을까?”

“응?”

“민규네 독각한테 나빌레라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 한솔이가 떠올랐대.”

뜬금없는 말이었다.

“물어봐, 그럼.”

“넌 그 마법을 어떻게 쓰는지는 알아? 제대로 된 주문 방법을 아느냐고. 네가 어떻게 알건데.”

명쾌한 대답을 내놓는 준휘와 달리 지훈은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물어보았다. 낙화대전 이후에 사라진 마법이라 해도, 그간 있었던 일이 너무나도 많아서 나빌레라 마법을 사용하는 주문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럼 어떻게 물을…,”

“최한솔!”

서당에서 친우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익숙했다. 드넓은 땅에서 사람 하나 불러세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이 정도는 걸러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솔을 부르는 목소리는 승관도, 찬도 아니었으며, 다른 백호들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지수는 서당에 없고 순영은 누각에서 정한과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셋이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저놈….”

“달맞이꽃 집안 막내.”

척 보면 아는 둘이 신기한 준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책방 끄트머리에 앉아있던 한솔에게로 다가간 달맞이꽃은 셋을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모서리로 숨었다. 애초에 한솔이 있을 백호 침소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준휘는 황룡이 아니기에 출입 권한이 없어 원우의 감투를 들고나왔다. 준휘의 덩치는 구겨도 원우만도 못한 것을 알아서, 지훈이 잽싸게 그에게 감투를 씌웠다.

“네 친우. 그 누구냐... ...이찬? 그 애랑 어울리지 말고 우리랑 놀자.”

“...?”

한솔은 전혀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저런 버릇은 마을에서 놀 때 다 떼고 오지 않냐.”

“...어리니까 그렇겠지. 우리도 1년 생원일 때 저런 소리 많이 들었잖아.”

“멍청한 게 도를 넘는데 서당에 어떻게 들어왔지?”

3년 생원들도 한솔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부승관이 은교산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꽃이긴 하나, 그래도 우리도 그만한 명성을 떨치는 집안이거든.”

“....”

“안그러냐? 금낭화. 천한 용들이랑 엮이지 말고, 우리와 함께 다니자. 권력이란 거, 엄청나게 강한 것이거든.”

“필요 없어.”

“그래? 안타깝네.”

완강하게 거부하는 한솔에, 달맞이꽃은 더 설득하려는 기색조차 없었다. 이간질할 꼬투리도 잡지 못하니 꽤 허무할 터였다.

“그럼 하나만 묻자. 마지막으로.”

“더 듣기 싫은데.”

바닥에 앉아있던 한솔이 일어났다. 들을 가치도 없는 놈이라 생각했다. 지나치려던 찰나에 원우와 지훈과 눈이 마주쳤고, 동시에 달맞이꽃 생원이 그를 잡아 돌려세웠다.

“이 서당에 전해져오는 이야기로는, 나빌레라를 쓸 수 있는 생원이 있다는데.”

“…….”

“너냐?”

“실례야. 그런 질문은.”

“...?”

준휘였다. 감투를 벗으며 한솔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저놈 저러라고 감투를 씌운 것이 아닌데…. 지훈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무슨 근거로 한솔이 나빌레라를 사용할 줄 알 것이라는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원우와 지훈도 김영에게 들어서 알게 된 말을 1년 생원이 안다는 것이 꽤 난처한 상황이긴 했다. 제지하려던 찰나에 준휘가 감투를 벗은 것이니 둘은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사형은 살아있음이나 감사히 하십시오.”

“...?”

“복수화동이면, 지금 그 목숨값이 과분하단 것을 알지 않습니까?”

“저 새끼 준휘랑 아는 사이냐?”

“알아도 저러면 안 되는데.”

말하는 싸가지를 보고 있자니, 지훈은 화가 머리끝까지 날 것만 같았다. 조금만 더 건드렸다간 튀어 나갈 것 같은 작은 현무를 원우가 겨우 막아섰다.

“...죽음을 몰고 다니는구만…….”

“뭐?”

“능소화랑 꽃무릇과도 친하지 않나? ...쯧.”

“그런 예의는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군. 달맞이꽃이면 꽤 영향이 센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무리 어리다 한들 집안에 누를 끼칠 발언을 하면 안 되지.”

준휘가 타이르듯 말했다. 한솔은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처음이었다. 준휘가 화가 난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된 순간이.

“그럼, 져버린 백일홍과 안개꽃 따위가 감히 말을 얹는 것은 됩니까?”

“부러 너희 집안의 안위를 위해 와주었더니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무례만 키워내는구나.”

준휘가 마른세수를 했다. 한솔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도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나빌레라는 내가 사용하는 것이야.”

"...?”

손을 뻗어 달맞이꽃의 심장 부분에 얹었다. 준휘와 강의를 한 번이라도 같이 들었다면 알 것이다. 준휘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달맞이꽃의 개화를 막으려고 했다. 진심이었다. 더 이상 피어날 가치가 없는 꽃은 져버리는 것이 옳다.

“달맞이꽃이, 폐화…,”

“뭐 하는 짓이야!”

지수였다. 굳은 표정으로 준휘의 팔목을 잡은 지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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