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부승관

시들지 않는 수선화

서당 by 반야

“할망. 할망. 제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무슨 소릴 하는 게냐. 넌 천성이 고운 것인데.”

“이 나이가 되도록 뚜렷이 해낸 것이 없습지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예끼 이것아! 네가 그 위치에서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널 따르는 아이들은 뭐가 되냐! 버럭 화를 내어도 삼신의 앞에 앉은 자는 말 없이 바닥만 고운 손으로 긁어댔다.

“혼인도 꽤 괜찮은 곳에 가지 않았느냐.”

“응. 내 아내는 경주 서당을 수료하고 십이지신 용의 신령이 된 분이시지요.”

“만월滿月이 너도, 송松의 수장 아니더냐.”

저와 제 부인의 그릇은 아주 큰데, 슬하에 자식 하나 없는 것이 신경 쓰인다며 울음을 터뜨렸지만, 삼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못나서 이런 것일까요?”

“너희 부가夫家는…. 화신이 수선화를 내어주었구나.”

“어떻게 알았습니까?”

“내가 나의 아이들에 대해 모르는 게 있겠냐. 수선화라..”

퍽 너와 안 어울린다. 삼신이 놀리듯 말하자 눈썹이 축 처졌다. 투박한 손으로 눈썹을 억지로 들어 올려주니 금세 뭐가 즐거운지 웃어 보였다. 얼씨구. 삼신이 덩달아 웃더니 표정을 싹 지우고 말했다.

“지금 네 행실을 봐라. 잘난 네 자신도 폄하하는 것이, 자식이 생기면 그것을 잘 키울 수나 있겠냐.”

“....”

“더는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없다.”
수장님! 삼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제주 생원들이 담장 앞에서 만월을 불렀다. 그래도 나름 수장이라고, 얼굴에 남아있던 슬픔을 싹 지우고 웃음만 가득 채운 채로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니 애잔했다.


“할망! 나한테, 아들이 생겼어요.”

“......그러냐.”

“그날 이후로, 아내와 여러 이야기를 했습디다. 서로를 더 아껴주자고요. 수장과 신령으로서 바쁘더라도, 하루에 한 번은 지비를 날려 서로를 사랑해주자고.”

“....”

“이것이, 그 사랑의 결과일까요?”
만월이 품 안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꺼내 보여주었다. 삼신은 말없이 아이의 볼을 쓰다듬기만 했다. 저희 집안의 성을 쓰고, 이름은 승관으로 정했습니다. 잘 자랄 수 있도록, 튼튼한 디딤판이 되어줄 것입니다. 잘 할 수 있겠지요? 화사하게 웃는 만월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삼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매달 스무날

서로 자시에 꼭 이곳에 오라고 당부를 한 후에, 준휘에게 어디로 갈 것이냐 물으니 그냥 바다나 보러 가겠다고 했다. 승관은 들뜬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했다. 길을 잘 아는 것 같았다.

서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었다. 승관은 막힘없이 큰 길가에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버려진 집은 아닌 것 같았다.

“어머니가 여기서 보자고 했는데….”

“이곳에서? ...사람 사는 곳 같은데 괜찮나?”

“괜찮아요! 여기, 제가 살던 곳이에요.”

그 말을 들은 정한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쩐지, 한 번도 멈칫하지 않고 척척 걸어온 이유가 있었구나. 지나쳐온 모든 집이 고급스러웠던 이유가 있었다. 은교산이었구나. 제주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었다. 승관은 정한의 등 너머에 보이는 익숙한 형체를 향해 맑게 웃어 보였다.

“엄마!”

휙 뒤를 돌았다. 승관의 어머니를 만나면 그에게 할 말들을 다 정리해 두었다. 제가 누구이며, 왜 함께 와 있는지 말을 해줘야지, 하면서. 그러나 제 앞에 서 있는 그를 보자마자 정한은 말문이 막혔다.

“...안녕하세요.”

“그래. 또 만나는구나.”

소나무 수장. 송의 지도자. 얼핏 지수에게 들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오방신장의 수하는 다음 후대가 천상에 올라와 직위를 넘겨받고 난 후에야 혼인이든, 아이를 낳든 할 수 있지만 십이지신을 비롯한 다른 모든 신들의 수하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자유롭다고 했다.

부 만월. 사흉수 경합할 때 제 옆에서 부적을 붙인 박사였다. 성함을 처음 들었을 때 승관이 생각이 나긴 했으나, 제 성이 제주에서는 흔한 것이라는 말이 함께 떠올라 우연이구나 싶어 넘겼던 것이었다.

“정한 사형이에요!”

“응. 알지. 한양 서당의 황룡이잖니.”

“우리 엄마. 소나무의 수장님이에요.”

“아……. 그래서 네가 여기 오는 걸 그렇게나 기대했구나?”

“응. 이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도 되겠죠!”

승관이 정한과 나서기 전에 했던 말이 기억났다. 어머니를 만나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인지 말을 해주자고 했다. 승관이 꽃을 가진 마반인의 영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들이 어떤 인물인지는 몰랐기에 망설였다. 승관의 가족이 어떤 분인지 알고 난 지금에야 이해가 갔다.

“무엇을 말인가? 너희들이 청룡이 될 거라는 거?”

승관의 눈이 커졌다. 만월은 뭐 그런 것 갖고 놀라냐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언제였더라……. 입추였나? 오방신들이 자청비自請妃와 풍백을 만나기 위해 출장을 왔던 적이 있어.”

“..아.”

“그때 십장생의 수장들도 모였는데, 그때 알려주더라고.”

청룡이 승관의 어머니에게 먼저 알려주고, 승관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승관의 어머니는 승관이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제게 먼저 이야기를 해주기 전까지는 언질이라도 주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왔다. 누군가를 모시는 것에 대한 무게를 일찍이 알고 있기도 했고, 하나뿐인 제 자식이 그로 인해 중압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했다. 아직은, 열여섯이니까.

걱정과는 달리, 승관은 부담을 별로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모셔야 한다는 생각에 더 공부를 열심히 했다. 정말 그게 다였다. 승관은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에는 최선을 다했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제게 서신을 보낼 때는 그런 말을 안 했어요?!”

“네가 알고 있는지를 몰랐으니까.”

수하로 올라갈 생원이 스스로 알기도 전에 말하면 안 되지.

만월은 말이 없는 정한을 흘긋 보더니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자며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방이 꽤 넓었다. 만월은 그들을 사랑채로 안내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커다란 족자 세 개였다. 소나무를 중심으로 수선화가 피어나 있는 족자 하나, 그리고 용 족자가 두 개. 가운데에 있는 족자의 용은 푸른색이었다.

“어! 청룡!”

“그래. 네가 후에 오게 되면 보여주려고 했지.”

“우리 가족은 소나무 수장님이랑, 용의 신령님이랑, 저랑. 이렇게거든요.”

승관의 말을 듣고 다시 보니,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청룡 그림 옆에 있는 용. 승관의 어머니겠구나, 하면서. 십장생과 십이지신. 순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굳건하고 용맹했다.

그새 차를 내어온 만월이 정한과 승관에게 하나씩 내어주었다.

“...하나 물어보아도 되나?”

“어, 네. 무엇입니까?”

“자네, 은은하게 꽃의 향이 나는 것 같은데….”

무례한 걸 알지만 꽃을 물어보아도 되냐는 것이었다. 정한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렇게 먼저 결례라는 것을 아는 마반인은 드물었다.

“아. 금강초롱 윤가 입니다.”

...역사가 깊은 곳에서 피어났구나. 만월은 그 말만 할 뿐 첨언하지 않았다.

승관은 여태 서당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려주었다. 풍등을 올린 것도, 무녀의 일도, 단오제도, 오방식시도, 그리고 역병까지. 슬쩍 정한의 눈치를 보고, 청운관에 드나들었던 것도 말을 해주었다. 만월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승관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홍옥 노리개를 보여주며 나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동백이랑도 친하니? 그의 영식과 너는 두 해 정도 차이 나는 걸로 아는데.”

“4년 사형이에요. 정한 사형이랑 친우이고, 황룡백호. 어떻게 알았어요?”

“이렇게까지 묵직한 힘을 담을 수 있는 집안은 동백뿐이지. 딱, 잡아보면 안단다. 마법 구조를 이리 촘촘히 짜여 있는데 어찌 모르겠는가…….”

동백이 너희를 꽤 사랑하나 보다. 그들은 제 힘을 선뜻 내어주지 않는 걸로 유명한데. 손에 쥐고 있던 노리개를 스르륵 놓아주었다. 승관은 다시 집어 들어서 제 허리춤에 매었다. 가느다란 마구 옆에 놓인 붉은 노리개가 꽤 마음에 들었다.

“이야기하다 보니 곧 자시가 되겠구나. 그때쯤 들어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니?”

“오! 맞아요. 가야겠어요. 엄마는요?”

“나는 내일 오전에 다시 서당에 가야지. 조심히 가렴.”

“응. 여유가 되면 내일 나비들도 소개해줄게요!”

승관과 정한이 재빨리 서당 앞으로 향했다. 승철과 준휘도 슬슬 오고 있을 터였다. 처음 왔던 길인데, 그새 익숙해져 승관을 착실히 따라갈 수 있었다. 역시나 둘이 일찍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하다며, 오래 기다렸냐 물으니 그건 또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일 있을까, 싶긴 했습니다.”

“근데 둘이 있는데 위험한 일이 생기진 않을 것 같아서 잠깐 기다렸을 뿐이야.”

늦은 시각이라 온통 어두컴컴했다. 불이 켜진 집안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대화했다. 오랜만에 왔으니 더 돌아다니고 싶다는 승관을 위해 조금 더 놀아보기로 했다.

이튿날 아침에 출발한다고 했다. 내일까지는 서당에 있어야 하니, 늦게 들어가도 상관없었다. 바다를 보고 싶다는 승관의 말을 듣자마자 준휘가 가보자며 손을 잡고 뛰어갔다. 먼저 앞서가다 길을 잃으면 못 찾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정한이 걱정하자, 승철이 조금 전까지 저와 둘이 바다를 보다 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고개를 주억인 정한도 그들을 뒤따라갔다. 선선한 바람과 저 멀리서 들려오는 찰박임, 그리고 하늘에는 수없이 놓인 별까지. 딱, 이곳에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것이 완벽하고 좋았다.

나빌레라

夫勝寬, 시들지 않는 수선화

파도 소리를 들은 승관이 눈을 떴다. 모래사장 한가운데에 앉아서 뚱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손과 발을 움직일 때마다 몸이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꿈이구나. 승관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몽롱한 정신에, 가장자리가 희뿌연 시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제주 은교산의 바닷가였다.

좋은 추억을 되감는 느낌이었기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마침 시험을 끝내고 돌아와 잠든 참이었다. 훌쩍이며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가족을 떠올리다 잠든 탓인가 보다. 영원히 이곳에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용 엄마. 여기요!”

“알았다.”

승관이 이상함을 감지했다. 저 멀리, 아직 한양에 입재하지 않은 열세 살의 부승관이 있었다. 내가 왜 저기 있지? 그것도, 3년 전에 있었던 일을 되감고 있었다.

“빨리요. 얼른 와요!”

“알겠다고. 요놈아.”

어린 승관이 종종 뛰어와 제 어미의 손을 덥썩 잡았다. 용은 어린 청룡에게 붙잡힌 채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곳에 모아둔 조개 껍데기를 보여주는 어린 승관의 표정은 뿌듯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관아.”

“응!”

“네가 다 모은 것이야?”

“웅. 엄마들 주려고, 예쁜 것들만 모아뒀어요!”

용 엄마가 저를 보는 얼굴은 항상 좋았다. 아. 저 때 엄마가 내 머리도 쓰다듬어 줬는데. 손길을 떠올리자마자 용이 어린 승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멀리서 보아도 나른해지는 순간이었다.

‘...!’

쪼그려 앉은 어린 승관이 아무것도 모른 채로 조개를 제 손에 담고 있었고, 그의 위로 온통 붉은 화살이 날아오고 있었다. 용은 그 화살을 낚아챘고, 곧바로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표정이 한순간에 식었다.

물론, 그것도 찰나였다. 어린 승관이 고개를 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곱게 웃어주었다.

“...다 골랐니?”

“네. 이건, 송 엄마한테 보여줄 거예요!”

예쁘게 웃는 어린 승관을 용 엄마가 안았다. 그는 제 아들을 번쩍 든 채로 하늘을 날았다. 그 광경을 보던 승관은 잠시 멈칫했다. 난 아직 나는 법은 모르는데...? 잠시 고민하다, 멀지 않은 거리에 집이 있단 것을 알고 있으니 한번 걸어가 보자며 몸을 틀었다. 동시에 모래사장에 땅이 아래로 꺼졌다. 빠져나올 틈도 없이, 승관의 시선이 온통 뒤집히며 흔들렸다.




어머니들의 방이었다. 지금은 한밤중인 것 같았다. 엉거주춤 벽 모서리에 끼어서 그들을 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땅을 박찼다. 붕 떠서 천장에 붙은 상태로도 볼 수 있구나. 한결 편안해진 승관이 양손을 가슴에 모으고 그들을 마저 관찰하기로 했다.

“오늘은 무슨 일 없었습니까?”

“없었지요. 당신은요? 어땠습니까?”

“...승관이를 데리고 바닷가에 잠시 놀러 갔습니다.”

“아! 맞아요. 아까 제게 예쁜 조개 껍질을 주었습니다.”

송이 예쁜 보자기에 싸여 있던 껍질들을 보여주었다.

‘다행이다. 좋아했구나.’

어렸던 승관은 항상 송이 들어오기 전에 잠들었기에, 반응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승관이 감격한 듯 양손을 모아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가 꽃이었다면 지금쯤 활짝 만개했을 테다. 하지만, 용은 웃을 수 없었다.

“...원인 모를 붉은 화살이 승관이에게 날아왔습니다.”

“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잡자마자 박살을 내어버려서……. 증거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용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송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어린 승관에게 난데없는 위협이 가해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지금 되짚어보면, 송과 용이 당황할만하다고 생각된다. 십이지신 용과 십장생 소나무의 아들에게 감히 어느 누가 위협을 가하겠는가. 그리 대담한 짓을 할 사람들이라면…,

“짐작 가는 것이 있습니까?”

“...화무십일홍을 내세우던 자들의 반란이겠지요.”

화무십일홍. 승관은 그제야 제게 닥칠 미래를 알아차렸다. 장난하냐? 일어나. 일어나야 돼. 길몽인 줄 알고 가만히 있었는데, 악몽이었다. 볼을 챱챱, 아무리 때려도 꿈에서 깨어나질 않았다. 아무런 소리도 통증도 돌아오지 않았다.

“일단 상제와 화신께 서신을 보내야겠습니다.”

“네. 제가 화신께 작성하겠습니다.”

“응. 내가 옥황상제께 올릴게요.”

이 상황에서도 엄마들은 침착했구나. 생각하자마자, 또다시 승관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시야가 전환되었다.


승관의 기억 속 가장 구석에 있는 부분이었다. 어린 승관은 용과 함께 저잣거리에 나와 있었다. 용이 어린 승관에게 잠시 이곳에 있으라 한 뒤, 세책가로 들어갔다. 곧바로 일어날 일을 알기에, 승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린 승관의 눈을 가려주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다.

펑.

가슴에 마구가 꽂힌 남성이, 분홍빛 꽃잎을 흩날리며 어린 승관 앞으로 쓰러졌다.

온통 비명소리로 가득했다. 승관이 덜덜 떨리는 다리로 그 남성의 근처에 갔다. 작약 사이로 꽂혀 있는 마구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피가 담긴 통에 넣었다 뺀 것처럼 새빨간 마구였다. 끝부분에는 검은 종이에 새하얗게 ‘화무花無’가 새겨져 있었다.

“안돼. 승관아!”

다급히 뛰어나온 용이 어린 승관의 눈을 가렸다. 용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얼굴을 파묻었다. 작약을 시작으로 국화도, 물망초도, 백합, 수국까지 전부 흩날리기 시작했다. 난장판이었다.

승관이 가로막아도 그의 몸을 전부 통과하였다. 용과 어린 승관에게도 마구가 날아오기 시작했으나, 용이 전부 쳐내었다. 용의 신령은 이 일에 개입할 수가 없었다. 중립을 지키고 언제나 모두를 위해야 했던 용은, 몸을 숙이고 앉아서 어린 승관과 눈을 맞추었다.

“관아. 집에 혼자 있을 수 있겠어?”

소매로 눈물을 벅벅 닦던 어린 승관이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거짓말. 넌 열여섯 살이 되어서도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 거다. 승관이 생각했다.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비명 사이로 앳된 여성이 다가왔다. 살짝 옅은 눈물 자국이 있었으나 이들은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익숙한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신령님. 저는 제주 서당의 1년 송장의松掌議 류혜강입니다. 어린아이들을 서당에 데리고 가 있겠습니다. 송의 수장께서 지시하셨습니다.”

*서당을 대표하는 생원. 한양은 황룡, 경주는 신, 제주는 송이다. 제주와 경주에서는 장의를 뒤에 붙여서 부르기도 한다.

어린 승관은 그렇게 용에서 혜강에게로 넘어갔다. 용이 공간이동술을 써서 사라졌다. 화려한 효과가 번쩍이다 사라졌다. 승관은 혜강을 뒤따라갔다.

제주 서당은 여성이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혜강을 따라 들어가려던 어린 승관이 결계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당황할 틈도 없이 그 광경을 본 혜강이 결계를 깨트렸다. 혜강의 꽃은 작약이었다. 그가 어린 승관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처음부터 계획했던 행동이었던 것처럼 서당 안의 또 다른 송장의가 다시 결계를 채웠다.

어린 승관은 그곳에서 송을 찾았다. 제가 이미 겪은 일임에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어린 것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수많은 꽃들을 제치고 수선화의 향을 쫓아 어미를 찾아냈다. 송은 어린 승관을 수없이 달래주었다.

“...관아. 아가야. 엄마들은 괜찮을 테니까, 잠시 누이들이랑 있어. 알겠지?”

“으응…….”

사실 달래주기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송은 십장생의 수장으로서, 바삐 나가야 했다. 송장의와 송이 어린 승관은 만월의 방에, 다른 아이들은 송장의들의 침소에 데려다주었다. 모든 생원이 아이들에게는 한없이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승관은 그제야 알았다. 웃어 보이는 저 제주 생원들도, 겁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여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음을.

방문을 닫자마자 표정을 굳힌 그는 방어와 보호 마법으로 서당 전체를 둘러쌌다. 노란색의 화려한 마법이 번쩍 빛났다. 그 후 곧바로 서당 생원들의 안위를 모두 확인했다. 승관은 빠른 걸음으로 보폭을 크게 하여 송의 뒤를 따랐다. 대강 어디로 갈지는 눈치채고 있었다.

“...갔다 오마. 서당을 잘 부탁하네.”

서당의 송장의와 박사들을 모아 그들에게 인사를 한 후, 가장 큰 소나무의 문을 열어 그 속으로 들어갔다. 승관도 다급히 그를 뒤따라 가려고 목문으로 몸을 내던졌으나 그를 통과하여 반대편으로 나올 뿐 들어갈 수 없었다. 아, 좀 보내주지! 승관이 땅을 주먹으로 치며 일어나 보니, 서당이 아닌 낯선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십장생들의 빈청賓廳이 소란스러웠다. 폐화대전에 대한 회의를 하던 도중, 오방신이 오고 있다는 말과 함께 청룡이 들어왔다. 승관은 지금 이 상황을 판단하기가 바빴다. 제 기억에 의하면, 서당을 나섰던 송이 돌아오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아마 그 시간 중 어느 한 지점에 와있는 것이겠지. 승관은 제가 보고 있는 지금이 종전 시기와 가까운 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청룡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빈청 밖에서 여관의 목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청룡이 다급히 비녀를 머리에 꽂으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열 명의 수장들은 일어나 그에게 격식을 차렸다. 청룡은 그리할 필요 없으니 어서 앉으라고 손짓했다. 승관은 엉거주춤 제 어미의 뒤에 서서 그들을 관찰했다. 영물을 모시는 신들의 회의장소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예의가 없다 느꼈기에 한 선택이었다.

“청룡. 오셨습니까?”

“네. 오방신이 바빠 홀로 오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까?”

청룡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반란이 사그라들었다고요. 청룡의 말에, 승관의 심장이 또 두근거렸다.

“화무십일홍을 내세우고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모조리 잡았습니다.”

“역시나, 마반인이 대부분이던가요?”

“네. 대부분이 사망하였고 살아남은 자들도 꽃을 잃어가며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반란을 꾀한 자들의 가족까지도 잡으셨습니까.”

“그게….”

학의 수장이 머뭇거리다 피로 물든 종이를 건네주려 했다. 승관이 고개를 쏙 내밀어서 글을 읽어보았다. 반란을 일으키기 전, 가족을 전부 몰살하고 시작할 것. 사망한 반역자들의 옷에서 전부 나온 것이었다.

승관도 모르는 사이 화신이 들어왔다. 기개가 엄청났다. 그는 청룡에게 건네진 그 종이를 중간에서 낚아챈 후, 종이를 모질게 구겼다. 화가 많이 난 듯했다. 분노의 근원이 명확했기에 아무도 물어보려 들지 않았다. 화신이 청룡을 보며 물었다.

“말했나?”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경위를 알아낸 후에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청룡이 말끝을 흐렸다.

“본 순서는 그게 맞지. 그러나 지금은 여유가 없다. 말하거라.”

나직한 화신의 목소리가 빈청에 울렸고, 단아한 청룡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상제께서 이 모든 사건을 저희에게 맡기셨습니다.”

“어찌…,”

“꽃을 다스리고, 인간에게 나빌레라를 만들어 부여한 것이 우리니까.”

이를 증명하듯 마패를 꺼내 보였다. 한 번도 신들의 마패를 본 적도 없었으나 단번에 상제의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폐화대전으로 인한 열병이 한양까지 도래하였다. 상제가 올 여건이 되지 않아 권한을 이어받았다네.”

“나빌레라를 모든 인간에게서 빼앗겠습니다. 만인의 평안을 위해 만들어낸 이 마법을 더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청룡이 화신의 말을 이어서 하는 동안, 화신은 회의록을 작성했다. 승관이 그에게 다가가서 자세히 내용을 읽었다. 그 당시에만 돌아다닌, 지금은 어디에도 기록 되지 않은 회의록이다.



인간은 오만하고 이기적이다. 그럼에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여뻐서 이들에게 내려준 선물이었다. 자연의 섭리를 모두 무시하고 한 줌이 되지도 않는 제 권리와 가문의 이익을 생각하는 인간에게, 더 이상 무적을 제공할 이유가 없다.

…….

하여, 옥황상제께서 나빌레라를 모두 거둘 것을 명령하였다. 자연 독각귀, 오방신 등 인간에 의해 태어난 모든 신이 이에 동의 하였으므로 화신은 오늘부로 나빌레라를 인간으로부터 거둘 것이다.



회의록을 다 본 승관이 고개를 들었다.

또다시 저잣거리였다. 모든 것이 마무리될 시점으로 넘어왔구나. 이제는 바로 알아차렸다. 제주 서당의 문 앞에 용이 서 있었다. 용의 옆에 서자마자, 서당의 문이 열리면서 송과 어린 승관이 나왔다. 승관은 문이 열리자마자 코를 틀어막았다.

순식간에 승관의 머릿속까지 냄새가 파고들었다. 사라지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기에,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해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피비린내와 수많은 꽃향기에 저항하지 못하는 어린 승관은 생리적인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린 승관이 울며 용에게로 달려갔다.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하던 승관이 등에 벽이 닿자마자 또 시야가 뒤집혔다. 이제 일어날 때가 된 것 같은데….


어림도 없지. 팔과 다리에 나무가 꽂힌 승철이 투명한 승관의 몸 위로 떨어졌다. 지금보다 살짝, 볼살이 있는 것 같은데……. 뒤에서 다급히 일어나는 정한과 지수도 그러했다. 단번에 주작의 침소임을 알아차렸다. 온통 붉은 침소 내부에, 창틀은 너덜너덜했다.

“야, 최승철!”

정한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갔다. 승관이 몸을 일으켜 밖을 보았다. 매일 아침 보는 서당. ...사형들이 1년 생원일 시절로 왔구나. 승관만큼 작은 승철이, 앞에 누워있는 사형들을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 이곳에도, 익숙한 냄새가 한동안 빠지질 않았겠구나.

승철을 말리는 정한과 지수도 한없이 작아 보였다. 승관이 마룻바닥을 밟고 일어섰다. 이제 슬슬 잠에서 깨려는 것인지 감각이 생생해지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전혀 나지 않을 용기가 생겼다. 가까이서 보고픈 마음에 디딤돌을 밟자, 또 땅이 꺼졌다.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없다.

홍월천은 사라지고, 이상한 공간에 또 서 있었다. 나뭇잎이 온통 하얬고, 하늘은 누가 틀어막은 듯 새까매서 끝을 볼 수가 없었으며, 강 대신 붉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저 멀리서 사람들이 탄 배가 한두 척씩 다가왔다.

배를 타고 넘어오는 자들은 승관이 있는 공간에 발을 딛자마자 몸이 반투명해졌다. 이들은 홀린 듯이 한곳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이들의 도착지로 보이는 건물이 있었다.

‘...어?’

준휘였다. 반투명한 몸을 가진 이들은 계단을 수없이 올라가야 했고, 준휘는 어른 한 분과 함께 그들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할매. 요새 망자가 너무 많이 와.”

“...그러네.”

“왜?”

망자? 승관은 믿기지 않았다. ...지옥이라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어린 준휘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저 망자는 왜 우리한테 와?”

“…….”

준휘가 빤히 승관을 보며 물었다. 뭐지? 뭐야? 승관이 끊임없이 되물었다. 발이 무거워져 움직이질 못했다. 그때, 옆에 있던 할멈조차 고개를 돌려 승관을 보았다.

“이제 일어나라.”

“……!”


하늘연달 스무나흘

승관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지수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거두었다.

“...괜찮아? 악몽을 꾸는가 싶어서….”

“…….”

“거두어주려고 했는데, 손을 대자마자 일어났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승관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괜찮아? 정한이 부를까? 걱정스런 질문에 겨우 손사래를 치며 거부했다.

어제 정한, 지수와 함께 서당으로 들어왔고, 곧바로 침소에 들어왔다. 그때부터 잠을 자기 시작해서 꼬박 하루가 지나 겨우 일어난 것이었다.

민규는 찬을 데리고 산책하러 나갔다고 했고, 지수는 정한과 밥을 먹기 위해 청룡 침소로 온 것이고. 마침 정한이 밥을 가지러 내려간 사이에 일어난 승관은 하루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전해 들으며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색색 숨을 차분히 내쉴 때까지 등을 토닥여준 지수가, 너도 밥 먹어야지! 하며 일어섰다. 문을 열자 정한이 양손으로 소반을 든 채로 서 있었다. 언제 일어났어? 정한이 놀란 듯 물었다. 지수는 고대로 소반을 받아 승관의 앞에 내어주고, 다시 그와 밖으로 나갔다.

먼저 먹으라는 뜻으로 주고 간 것이겠지만, 그래도 어찌 사형들을 두고 숟갈을 뜨나 싶어 얌전히 밥상 앞에 앉아 꼬물거리기만 했다. 다들 겪었던 일을 가까이서 본 것이었으나 부러 말을 꺼내어 또 아픈 기억을 건드릴 필요는 없었기에 승관은 이번 꿈은 홀로 묻어두고, 결코 다시 꺼내 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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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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