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1)
진짜, 정말로, 다정한 사람이에요.
시샘달 아흐레
날이 점점 흐려지더니 경주로 떠나는 당일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자연을 건드리지는 못하기에, 황룡들은 생원들의 출발 시간을 앞당기는 것 말고는 할 수가 없었다. 백호의 아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잠시나마 비가 그칠 때 생원들을 보내기로 하는 것뿐, 별다른 방법은 찾지 못했다.
원칙적으로 가지 않는 5, 6년 생원들에게 대표로 인사를 올리는 것은 지훈이었으며 그 인사는 정한이 받았다. 형식적으로는 남아있을 생원들에게 서당을 잘 지키라고, 그리고 잘 다녀오겠다고 전하는 인사였으나 이왕 하는 거 겉으로 보았을 때 어색하거나 이질감이 들지 않도록 진행하는 것이 우선이라 했다.
지훈의 말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니 치례가 끝이 났다. 입춘쯤에 찬이 지수에게 적어 올렸던 조 편성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과연 만족스러운 황룡이었다. 조금 더 성장한 다른 황룡들은 이를 바탕으로 생원들을 삼삼오오 나누고 일일이 가는 방법들을 설명하느라 서당은 꽤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서당을 뒤로하고 가장 먼저 떠난 것은 승철, 준휘, 명호, 승관, 그리고 찬이었다. 소란스러운 서당이 싫은 명호 덕에 더 일찍이 나오기도 했고. 사형들은 봇짐과 보따리를 한가득 들었고 승관은 별가루-유독 밝고 반짝이는 모래만 모아둔 것 같은 가루들인데, 정한에게 명칭이 정확히 무엇이냐 물어도 끝까지 웃으며 알려주지 않았다.-가 담긴 함을 든 채로 사형들을 따라갔다. 다들 별가루가 돋보이도록 하는 감투는 쓴 상태였고, 승관은 사형들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별가루를 적당히 뿌려주면 되었다. 뒤따라오는 다른 생원들은 전부 감투를 쓰고 승관이 뿌리고 간 별가루를 따라 올 것이다.
승관의 앞에 있는 넷은 웬만한 악귀가 달려들어도 이겨낼 사형들이었으니까, 어린 찬은 명호의 뒤에서 승관의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승관이 가장 앞서 나가는 승철의 등을 빼꼼 쳐다보며 물었다.
“승철 사형, 무예 다시 한다며.”
“아. 응. 근데 그 말이 나오면 가끔 도망가셔.”
“왜?”
“호시께서 수장 자리 다시 드리겠다고 했거든.”
“어우…. 싫대?”
“수장은, 나비들 속에서나 하고 싶다고 하셨어.”
나름대로 순영이 마음 상할 일 없게 잘 돌려 말했음에도 순영은 계속 다가가는 중이라고 했다. 뭐, 설이 지나고 나면 확실히 정해지겠지. 승관이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앞서가던 사형들의 발걸음 보폭이 점차 줄어들더니 이내 멈추고서는 청룡들을 보았다.
“승관아. 어디로 갈래?”
“네?”
“두 갈래로 나뉘어져. 별잡이가 원하는 곳으로 갈게!”
승관이 선택하는 길로 간다면, 남은 나비들은 다른 갈래의 길로 가며 별가루를 뿌려야 했다. 승관은 바닥을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돌부리가 많고 거친 곳을 선택했다. 청룡이 어떠한 길을 선택할 때는, 항상 그들의 다정함이 원천이 되어 작용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제 발바닥 아픈 것쯤이야 괜찮으니 다른 나비들은 조금이라도 편히 가길 원하는 마음에서였다.
다섯 나비 이후로는 원우가 속해있는 조가 가기로 했다. 원우가 서당에 남아있을 황룡들에게 어느 정도 할 일을 알려주고 누각을 나섰다. 그 아래에 대충 걸터앉아 있던 민규의 앞으로 다가가 서니, 자연스레 그의 고개가 원우를 따라 올라갔다.
“다 했어. 나가자.”
“...오. 멋있는데?”
“뭐가?”
“이거.”
민규가 원우가 입은 도포 위 흉배를 툭툭 건드렸다. 멋쩍은 듯 웃는 원우를 보던 민규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소매를 뒤적였다.
“아. ...자, 이거 써. 순영 사형이랑 승철 사형이랑 조를 바꿨어. 다른 애들 사이에서 군말 안 나오게 하려면 지금부터 쓰는 게 낫대.”
“난리네. 음양의 균형을 사랑이 으깨는구나.”
“아까 명호랑도 그 얘기 했는데. 내 양기가 너무 강해서 괜찮을거래.”
“...무슨 말도 안되는...,”
말을 어물쩍 흐리면서도 순순히 감투를 썼다. 생각해보면 민규 같은 애랑 있으면 저뿐만 아니라 지훈과 명호의 음기와도 잘 어우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럼, 순영이랑 한솔이랑 가나? 원우의 질문에 민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셋과 함께라면 뭐든 두려울 것이 없겠구나. 감투의 끈을 더 단단히 묶으며, 민규의 손에 들려있던 제 봇짐을 건네받고 서당을 나섰다. 아 빨리 나와-! 바로 맞은편에 조용한 백호들이 그들을 반겼다.
익숙하게 승관이 선택한 별가루길과 반대편에 있는 곳으로 들어섰다. 한솔은 가장 뒤에서 별가루를 뿌리고 있었고, 민규가 앞서가며 길을 트고 있었다. 원우와 순영은 가만히 따라가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정적을 깨는 역할이었다. 물론 대화의 팔 할이 순영이었다.
“......그래서, 승철 사형한테 수장 자리를 주고 싶다며? 이젠 접은 거야?”
“그러고 싶었는데, 원치 않나 봐. 그냥 장난치는 거지 이제는.”
자리를 원치 않는데 굳이 앉힐 필요는 없지. 현재 서당에서 순영과 비슷한 실력을 갖춘 자는 단 하나였다. 문준휘. 한데, 준휘는 이미 삶 자체로도 부담이 많을 것 같아 제가 유지하고 있었다. 이제 승철이 다시 무예를 시작하기에 살짝 짐을 내려놓고자 부탁한 것이었다. 물론 거절했기에 더 강요할 생각은 없다. 어린 제게 수장을 시켜둔 것이 살짝 원망스러웠던 과거도 있었으나, 지금의 순영은 과거보다 훨씬 강하니까. 그저 힘들었던 과거로 남겨두기로 했다.
대뜸 민규가 우뚝 섰다. 순영은 곧장 그에 맞추어 멈추었지만, 한발 늦은 원우는 민규의 등에 이마를 콩 박고서야 뭐야? 하며 앞을 살폈다. 장대비가 왔던 탓에 나무들이 몇 그루 넘어져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나무였지만, 여러 개 쌓여 통행에는 불편할 것이 뻔했다.
“…승관이네가 저쪽으로 간 게 다행인 것 같네.”
“어떡하지? 이걸 어떻게 다 들어 올려. 사형들한테 지비 보낼까?”
“음,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아무리 우리라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정한과 지수가 있는 나머지 나비들. 한달음에 온다 해도 이리저리 계획이 꼬일 것이 분명했다. 원우가 이마를 문지르며 물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렸지?”
“...이각정도.”
“그 정도면 지비가 도착할 때쯤에 이미 다른 생원들이 올걸요.”
셋이 모여 이런저런 토론을 하던 도중에 번쩍이며 나무가 사라졌다. 본래 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진분홍빛 꽃잎이 흩날렸다.
“누구야. 누가내뒤에서이런깜찍한마법을갈겼어?”
“숨 쉬면서 말해.”
원우가 민규의 등을 토닥였다. 한솔이 놀란 표정으로 어찌할 줄 몰라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뒤늦게 알아차린 순영이 눈을 더 크게 뜨며 다가갔다.
“너, 뭐했어? 어떻게 했어?”
“...방해물을 치움으로써 길을 트리라.”
새끼 백호의 발언으로 인해 청룡과 현무는 말을 잃었다.
“......나빌레라 썼어?”
“...네.”
“써도, 되는 거야? 준휘는 지수 사형한테 혼나던데.”
“괜찮습니다. 지금은 우리밖에 없으니까요.”
뒤따라올 다른 생원들이 수십 명이고, 그들을 위해 쓴 것이니 더욱 괜찮다고 했다. 너 쫌, 황룡스럽다? 민규의 말에 한솔은 픽 웃을 뿐이었다.
“석민이는 불을 쓰는 만큼 체력이 닳는 느낌이라던데. 너는 괜찮아?”
“네. ...죽은 나무이지만 어쨌든 자연을 소거시켜서 그 대가로 제 꽃이 보인 것은 좀... 놀랍네요.”
아무리 막강한 마법을 손에 쥐더라도 자연은 함부로 거스를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죽은 자연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 부려본 마법인데. 하마터면 남들 앞에서 제 꽃을 남발할 뻔했다.
“…….”
“...그것 말고는 정말 괜찮아요.”
“고마워. 덕분에 수월해졌네. 가자.”
원우가 가자며 민규를 툭툭 건드렸다. 민규가 한솔을 뚫어져라 보았다.
“왜 그래?”
“...물 냄새와 꽃향기. 물과 꽃의 신.”
“…….”
“네가 그 꽃다발이었구나. ...역시 맞았네.”
“뭐가?”
“형 기억 안 나? 독각한테 들었던 말. 나빌레라, 조선에서 단 셋만 쓸 수 있댔잖아. 찬이하고, 문준휘 사형하고, 화신의 아들.”
화신이 구삼승과 사이가 각별했거든. 구삼승은 저승에서의 마법만 사용할 수 있으니 나빌레라를 부여할 수 없었어. 그래서 그의 외아들에게 준 것이야. ...아. 하나 더 있다. 화신의 의붓아들. ......그 의붓아들의 보호자는 물의 신선. 그 애는 어쩔 수 없는 마반인이야. ......의붓아들은 물비린내와 꽃향기를 애써 숨기며 양반인 척하고 살겠지.
“아.”
“오.”
아오, 이래서 황룡은 어떻게 됐대! 사형은 뭘 안다고 오, 거리고 있어요?? 답답한 마음에, 민규가 제 가슴을 쿵쿵 쳤다. 한솔은 함에 손을 넣은 채로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어디를 가든 제가 가진 특징들로 인해 특별한 사람마냥 취급받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는데, 현무와 백호의 신령이 될 인물과 용궁의 수문장이 함께 있으니 제가 평범해지는 것 같았다. 유독 이 셋과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나비들과 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제 특별함은 이들의 특별함에 의해 평범해지는구나. 갈 길이 멀어서 일부러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비가 한 차례 쏟아부었다가 그쳤고, 먹구름이 싹 사라지며 무지개가 생겨났다. 노을을 보던 정한이 상쾌해진 공기에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뱉으며 지수를 보았다.
“별일 없나 보다.”
“있어도 애들이 잘 처리했을 거야.”
지수가 남령초를 태우다 곧장 꺼버렸다. 저 멀리서 석민이 다가오고 있었다. 요새 부쩍 횟수가 늘어서 꽤 눈치를 주는 편이었다. 어차피 죽지도 않을 몸 무슨 상관이지 하는 심정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차마 사제를 생각하여 뱉지는 못하고 삼킬 수밖에 없었다. 정한도 그를 눈치챘는지 휙휙 손을 내저으며 연기가 흩어지도록 했다.
“어? 안 나갔네?”
“가야지.”
어디선가 튀어나온 약초학 생원이 말을 걸었다. 말을 걸었다고 하기도 무색할 만큼 지수가 퉁 튕겨냈다.
“...너희는 좋겠다. 서당 밖을 싸돌아다녀도 황룡이라서.”
“뭔 소리야?”
“우리는 식년시 준비하느라 죽겠는데 너희는 왜 이렇게 팔자가 펴져 있지?”
대강 미래를 준비해야 할 시기에 노닥거리는 것처럼 보인다는 소리였다.
'마음 편히 너희들이 식년시를 준비할 수 있는 것이 다 누구 덕인 줄도 모르고.'
'...이런 새끼들을 몇천 년이고 수호하라니, 내가 산신령보다도 더 도를 닦아야 하나.'
각자 지수와 정한이 한 생각이었다.
“알아듣게 이야기해. 뭔소리 하냐고.”
“뭐, 매화에 남색도 들이기로 했나? 싶어서. 길이 정해져 있었던건가?”
“...오호.”
“둘 다 반반한데, 곱상하니 말이야.”
정한이 씁,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갸웃했다. 둘 다 처음 듣는 소리도 아니었기에, 별로 마음이 상하지도 않았다.
“팔자가 핀 것은 네놈이겠지. 어디 황룡 앞에서 혀를 함부로 놀려. 세 치 혀가 사람 잡는다. 조심해.”
“나는 곱상하게 생긴 탓에 곱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별로 타격이 없는데…. 넌, 최승철 없을 때 그딴소리 한 걸 감사히 생각해야겠다.”
지수가 언짢은 티를 팍팍 내며 남령초로 기분 나쁠 정도로 가슴께를 팍팍 찔러대며 말했다.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단 것을 잘 알아서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서 주작과 현무가 안절부절못하며 이리로 올지 안 올지 전전긍긍하는 것이 보였다. 정한은 또 그 장면에 화가 나 중얼거렸다.
“남색 같은 소리 하네. 지혜로도 안면으로도 매화에 들어가지도 못할 것이.”
“...저 생원더러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응. 짜증 나네. 저런 놈은 입구에서 거부당해.”
윤정한 또 이상한데 꽂혀서 화내네. 지수의 말에 정한이 갑자기 멈춰섰다. ...왜? 지수가 불안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저 앞에 석민과 지훈이 보이는데도 더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나 저새끼 한 대만 치고 오게 니 남령초 좀 줘봐.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청룡의 멱살을 끌고 주작과 현무에게 가는 것은 백호의 몫이었다.
제대로 떠나기 전에 식사를 하고 가자는 말에 곧장 주막으로 들어가 한 상 차려 받고 나오는 길이었다. 완전히 어두워진 탓에 불을 붙이려고 마구를 찾던 중, 저거 누구야? 하는 지수의 물음에 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어린아이 둘이 지훈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지훈 또한 가만히 서서 아이들을 보기만 했다. 참다못한 지수가 물었다.
“누구야?”
“꽃무릇의 몸종이요.”
“둘 다?”
“...아뇨.”
하나는 꽃무릇에서 본 아이였고, 다른 하나는 제게 유과를 주었던 그 아이였다.
“그, ...저는, 능소화 이가의 ......소이라고 합니다.”
“...그렇구나.”
유과를 준 아이가 꽃무릇의 뒤에 은근슬쩍 숨으려 했지만 꽃무릇이 거칠게 지훈의 앞으로 밀치고 도망쳤다. 홀로 남은 아이가 지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바짝 엎드렸다.
“......그, 그날, 대감께서 선비님께 드리라고 하셨고, 선비,님..께서, 죽는지 보라 하셨습니다.”
가만히 듣던 석민만 놀랐다. 다른 꽃을 품은 두 사형들은 지훈과 마찬가지로 덤덤한 반응이었다.
“그 유과를 말하는 것인가.”
“...네. 헌데, 어찌해야 할지 몰라 드리고 도망쳤는데... 괜찮으신지요? 혹, 버, ...리셨습니까?”
“......그게 궁금한 건가.”
“현무의 수호를 받은 대감께서도 쉽사리 빼내지 못할 독이라 하셨습니다. 너무, 너무 마음에 걸려서....”
지훈이 한숨을 얕게 쉬며 제 뒤에 있는 세 나비를 보았다. ...알아서 하라는 지수의 손짓을 가만히 보다 이마를 짚었다. 제게도 한 품에 안길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한 제 아비가 죽도록 싫었다. 이 아이는 죄가 없음을 알아서 곧장 그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난 괜찮으니 걱정 말거라. ...그날 이 대감께는 무어라 전하였는가.”
“...,그날 이후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받은, 명이.. 당신의 죽음을 보고, 남은 약과를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미친 새끼. 지훈이 이를 빠득 갈았다.
“이 겨울에 그럼, 밖에 있었어?”
지훈이 무어라 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백호가 소이의 손을 잡았다.
“아기. 그럼, 일 잘하겠다. 설거지나, 빨래 같은 거.”
다른 한 손은 청룡이 잡아주며 눈을 마주쳤다. 따스한 봄은, 상처가 가득한 차가운 손을 감싸주었다.
“...네?”
“아직 칼을 잡기에는 좀 어린 것 같구.... 이리 와. ......매화에 데려다주자. 어린아이가 봄에 얼어 죽는 건 싫어서 말이야.”
지수는 이 겨울에 버려진 어린 아이가 안타까워서 무의식적으로 나온 질문이었고, 정한은 충동적이었다. 제 사람이 아니면 웬만하면 곁을 내어주지 않는데. 이 아이는 여기서 인사하고 헤어지면 정말 어디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사형들의 말이 끝나자마자 석민이 소이를 안아 들었다.
이대로 들어가 누이들을 만난다면 몇 시진이고 매화에 붙잡힐 것 같아, 석민이 홀로 안고 들어가 정한의 이름을 언급하며 소이를 맡겼다. 이후로는 계속 주막으로 가기 위해 걷기만 했다.
“완전히 둥글어지기 전이네. 곧, 휘영청 보름달이 뜨겠구나.”
“그렇겠지. ...그래야 우리가 서당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정한이 돌길을 지나 주막 입구로 들어서며 한 말이었다.
조선에는 마법을 공부하는 생원을 위해 대략 열 개의 주막을 만들어 두었는데, 평소에는 사용하질 못하고 특별히 지금처럼 경주로 오갈때마다 사용할 수 있었다. 문을 열면 수십 개의 복도가 나오고 그 복도 문을 열면 열댓 명 남짓이 살 수 있는 공간이 나오지만 밖에서 보면 일반 주막과 다를 바 없어보인다. 한 공간에는 작은 침소가 다섯 개로 구성되어 있어 나비들이 다 모여도 넉넉할 크기였다.
정한이 열일곱 번째 문을 열자마자 침소에서 승철이 빼꼼 고개를 내밀어 누구인가 확인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생각보다 늦은 시간에 도착한 나비들은 길게 말할 기력이 없어 대강 얼버무렸다. 자고 일어나서 여유가 되면 말해야지. 굳이 먼저 말을 꺼낼 필요는 없다 생각했다.
“승관이는?”
“옆방에 있지. 청룡은 여기야.”
승철이 가리킨 곳으로 들어가니 어린 청룡들이 노닥거리고 있었다. 구석에서 졸린 눈을 겨우 떠가며 찬과 민규의 이야기를 듣던 승관은 정한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환하게 반겨주었다.
“오셨어요?”
“응. 잘 왔네. 별일 없었고?”
“...네!”
약간의 정적이 있긴 했지만 크게 신경을 쓰려하진 않았다. 허허 웃으며 봇짐을 내려두고 승관에게 일어나라 손짓하니, 고분고분 일어나 따라나왔다.
나빌레라
舊正(一), 진짜로, 정말로 다정한 사람.
“...이게 뭐예요?”
“낙화열병 치료제.”
저를 위해 간식거리나 사왔을거라는 생각을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나온 승관인데. 살면서 한 번도 듣지 못한, 하지만 한 때는 미치도록 원했던 그 단어를 들어버렸다.
“...네?”
“승철이네 주작 사형들이 흩어질 때 날렸던 꽃들을 모아서 보관하고 있었거든. 그거랑 준휘한테 꽃을 받아서 연구했어. ...꽃밭에 있는 너희 꽃도 조금 썼고.”
“이걸 왜, 어떻게...?”
“......아마 쓸모없겠지. 다, 사라진 일이니까. 근데 그게 나한테는 마음의 짐이었어서. ...그냥 목적 없이 만들다 보니 3년이 흘렀네. 거의 포기한 상태였는데 네가 들어오고 나니까 다시 만들어 내야겠다, 싶더라고.”
마음의 빚이었다. 흩날리는 사형들을 잡지 못한 것. 그로 인해 줄기처럼 옭아매던 죄책감으로부터 나온 결과물이었다. 검지손가락 하나 정도의 작은 호리병. 딱 두 개만 만들었다. 하나는 승철을 위해, 하나는 승관을 위해.
승철과 승관은 간혹 낙화열병을 마주한 그 시기의 악몽을 꿀 때가 있다고 했다. 효과가 정말 있을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어. 그래도.. 이게 네 곁에 있으면, ...혹시나. 안정이 될까 싶어서. 너희를 위해 만들었어.
새삼 부끄러운지 태사혜로 애꿎은 흙만 퍽퍽 밟아대며 눈도 못 마주치고는 말했다. 승관이 울망거리며 정한의 품에 안겼다. 놀라 뒤로 살짝 몸을 기울이면서도 승관을 밀어내진 않았다. 풀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랑 풀벌레가 찌르르 거리는 소리 사이 간간이 어린 청룡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사형은 진짜..., 정말로, 다정한 사람이에요.”
“전부, 너희 덕분이지.”
물기 어린 승관의 말에, 정한이 동그란 머리통을 살살 쓰다듬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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