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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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3)

오지도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던

현재 by 반야

밤늦게 들어온 순영은 남들이 자고 있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 누웠다. 그다지 피곤하단 생각이 들지 않아서, 누워서 잠이 안 오면 어찌하나 걱정했는데 우습게도 눈을 감고 뜨자마자 다음날 대낮이 되어있었다.

허허 웃고는 엉거주춤 일어나 제게 덮여있는 이불을 정리했다. 세안을 하고 들어온 승철이 어제 서당에 일어났던 작지 않은 소란을 이야기해 줬고, 순영은 마침 차례를 지내러 가야 할 시간이라 가는 길에 그곳을 보기로 했다.

“여기에 불이 났어요?”

“응. 살짝 그을린 것이 티가 나지.”

“...그렇네요. 근데 대단하다. 어찌 그렇게 대처를 했대.”

언제 나왔는지, 정한과 지훈이 이들에게로 다가왔다. 지훈도 조금 전에 소식을 들었다며 승철에게 말을 건넸다. 순영은 그을린 자국이 있는 부분을 바스락거리며 신기하다는 듯 정한을 올려다보았다. 정한은 멋쩍은 듯 웃었다.

“그거 다 강연에서 배워.”

“써본 마법이었어요?”

“아니, 그냥 이론 공부만 했지. 그래서 결국에는 터졌잖아.”

겨우겨우 붙잡고 있던 금강초롱이 날아갔을 때, 몸에 와닿았던 불길과 머릿속에 스친 수많은 생각들은 여실히 남아 아직도 따끔거렸다. 4년 생원 초가 되면 배우는 내용이다. 생원 몇 명만 불러서 한정적으로 가르치는 마법이긴 한데... 굳이 말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입술을 말고 빙긋 웃기만 했다.

“사형은 안 다쳤어요?”

“응. 괜찮아.”

그럴 리가 없는데. 모를 리 없는 우리에게도 숨기는 고통을 부러 또 언급하고 싶지는 않아, 순영은 그저 입술을 삐죽거렸다. 뒤이어 찬도 이들 곁에 다가왔다. 별다른 행동을 취하진 않고, 멍하니 순영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짙게 그을린 자국을 보다 이내 느리게 고개를 들어 정한을 쳐다봤다.

“왜?”

“...어제 절 불러도 됐는데....”

찬이 반나절 내내 홀로 생각하다 보면 나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가 있었으면 곧바로 해결할 수 있었으리라 단언하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지. 정한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단단한 승철의 손이 찬의 어깨를 붙잡았다.

“...물과 불을 다루는 우지랑 도겸이 서당에 없었어도. 만약에, 정말 만약에, 서당까지 불이 번졌어도 널 부르진 않았을 거야.”

“왜요?”

“너는 끝끝내 우리가 무너질 때까지, 절대 그 마법을 못 쓰게 할거니까.”

“......제가 황룡인데도요?”

“응. 네가 황룡이니까.”

황룡이란 마땅히 폭넓은 아량으로 세상을 감싸야 한다고 했다. 홍지수가 그랬다. 하지만 승철과 정한은 동의하지 않았다. 한두 살 어린 각 침소의 사제가 황룡이 될 인물이라는 점이 크게 차지했다.

그거는, 하늘에 올라가서나 신경쓰라 그래. 여기는 우리가 먼저니까. 절대, 찬이 다른 생원들에게 노출되고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은 없도록 할 생각이었다. ......근데, 우리 슬슬 가야 하지 않나? 새삼 등골이 오싹해지는 질문이었다. 삐걱대며 시간을 확인하고는, 너 나 할 것 없이 전부 사당으로 달려갔다.

 

2년 황룡들이 사당의 가장 앞에 섰다. 찬을 포함한 셋은 눈을 바삐 움직였다. 하필 사형들이 이 셋을 가장 앞에 세운 탓에, 제주와 제상이 누구며 언제 읍을 하고 언제 향을 사르는지 모두 눈치껏 알아차려야 했다. 한솔이 납주를 하고 올 동안 승관이 다른 사형들과 음복 준비를 했다.

납주 : 제사를 마치고 위패를 사당으로 다시 모시는 등의 마무리

음복 : 차례 음식을 나누어 먹는 행위

“달과 계절이 바뀜으로써 또 새로운 해가 찾아왔습니다. 새로운 황룡, 신, 송의 등극을 모두 축하하며, 올해도 다들 무탈하길 바래봅니다. 모든 생원이 한 서당에 모여 올해의 시작을 함께한다는 것은 꽤나 의미 깊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작년 한 해 잘 버티느라 고생하셨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자, 이로써 모든 차례가 끝났습니다! 배정받은 침소에 다과와 차례 음식들을 배부할 것입니다. 약 두어 시진 정도 걸릴테니 찬찬히 즐기시면 됩니다. 그간 무료하지 않도록 윷놀이 판을 준비했습니다. 서당의 네 침소끼리 각각 겨루고, 우승한 각 서당의 침소끼리 모여 윷판을 벌일 것입니다. 추후 일정은 윷놀이가 끝난 이후에 각 서당의 대표를 통해 고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먼 곳에서 오시느라, 그리고 서당을 지키느라 고생 많으셨단 말을 전하며 이만 마칩니다!”

지루한 신의 말을 듣던 중에 눈이 번뜩 떠졌다. ...윷놀이 판? 질 수 없지. 나비들은 다들 본인의 침소로 뿔뿔이 흩어졌다.

정말 신이 말했던 그대로 판이 다 만들어져 있었다. 스물네 개의 절기가 작은 원 안에 담겨 있어서 모든 곳이 절경이었다. 신이 난 순영이 승리욕을 한 아름 안고 가장 먼저 시작점에 도착했다.

 

 

 

서당에서 가장 먼저 윷을 던진 것은 백호였다. 순영의 기합과 함께 장승만 한 네 개의 윷이 하늘을 향해 던져졌다가 바닥에 착, 달라붙었다. 도. 승철은 그렇게 호들갑을 떨더니 한 칸 움직인다며 배를 잡고 웃었다. 마법으로 만들어 낸 커다란 백호가 그르렁대며 첫 번째 칸으로 움직였다.

다음은 정한이었다. 손가락을 까딱했을 뿐인데 윷이 나왔다. 어찌 저럴 수가 있냐며 순영이 땅을 쳤다. 다시 한번 던졌을 때는 도가 나왔다.

저 멀리까지 나가 있음에도 위엄을 내뿜는 푸른 용을 보던 승철이 발을 쿵 구르니 걸이 나왔고, 뒤이어 입김을 불어 윷을 던진 지훈도 마찬가지였다. 화려한 불을 내뿜으며 날개짓하던 주작은 현무가 걸에 도착하자마자 만들어 낸 물길에 그대로 사라졌다. 승철은 이마를 짚었다.

“이거 뭐, 이기면 상 줘요? 왜 이렇게 진심으로 해….”

어이없단 듯이 승철을 보고 웃던 지훈도, 끝자락에 순영이 던진 윷에 잡아먹히고는 제 머리를 잡아 뜯었다.

 

최종적으로는 백호가 가장 먼저 돌아왔다. 다른 서당에서도 비슷한 시간에 윷놀이가 끝이 난 덕에 곧바로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한양의 백호와 제주의 매화, 그리고 별다른 상징물이 없는 경주에서는 오시午時에 맞추어 말馬로 나타났다. 매화의 수장과 말의 신장은 이들의 윷놀이를 구경하기 위해 제 형체를 내보이며 윷판의 말이 되어주었지만, 백호 영수가 이곳에 올 리가 만무했다. 결국 순영은 지수를 내세웠고, 지수는 이 분위기에 맞추어 허허 웃으며 기꺼이 백호의 형태가 되어주었다. 이제는 제가 천상에서 내려온 백호의 아들이란 사실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서당끼리 했던 것과 달리 이번 판에는 제대로 된 윷놀이를 하기로 했다. 말을 세 개나 사용해서 본격적으로. 지수는 약간의 마법을 이용해 금안을 가진 백호와 금낭화를 품은 백호를 불러냈다. 지수가 아는 백호는 고작 둘 뿐이라, 정한이 대신해서 윷을 던져주었다. 운이 따르는 생원에게 윷을 넘긴 덕에 모든 것이 순탄했다.

지난 추석에 제주에서 한양의 깃발을 내걸었는데, 설에는 경주에 내걸게 되었다. 한양의 문양이 아닌, 백호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긴 했지만. …우리도 즐길 거리를 따로 준비해야 하나. 정한은 신이 나서 마지막 지점으로 뛰어 들어오는 지수의 호랑이를 보며 잠깐 생각했다.

넘어지지 않게 그를 받아주고는 허공에 띄워져 있던 윷들을 가지런히 정리해서 내려놓아 주었다. 마지막 정리는 신들이 하겠지. 적당히 예의 있게 인사하고는 백호들을 데리고 물러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신이 나서줬다.

“과연 금강불괴의 백호는 지는 법이 없나 봅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는 시간의 흐름을 관리하는 잔나비신申神의 특혜로 밤이 길 것입니다. 별을 마음껏 보다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허나 안전을 위해 서당 밖으로 나가는 것은 황룡과 송을 포함한 모두에게 금지되니, 이 점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웃지 않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다. 이런 게 축제구나. 도란거리는 생원들을 보며 정한이 생각했다.

 

승철을 필두로 한 천문학도들이 신이 나 밤새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모든 별을 모아댔다. 누군가는 반짝이는 별의 빛을 담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해 주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별의 선을 따서 술래잡기를 하기도 했다. 기나긴 밤은 모두에게 선물과 같았다.

 

 

나빌레라

 舊正(三), 오지도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던.

 

시샘달 열이틀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달도 어느새 모습을 감추었다. 슬슬 해가 뜰 때가 되자 생원들은 지지치도 않는지, 다시 중앙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서당의 대표가 바뀌고 다시 서당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서당의 주인인 경주부터 제주를 거친 뒤에 드디어 한양이었다. 정한의 목울대가 깊게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마지막으로 한양입니다. 윤정한 생원과 이지훈 생원, 올라와주십시오.”

정한이 몸을 일으켰다. 나비들 사이에 있던 지훈도 겨우 당황한 표정을 숨기며 단상 위로 올라왔다. 말없이 읍례를 하고 정한으로부터 한양 서당의 대보大寶를 건네받았다. 금빛 황룡이 번쩍이는 대보. 무거웠다. 감히 제가 어찌 이 무게를 홀로 짊어질까. 지훈이 멍하니 대보를 보다가 제 소매 속으로 집어넣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서당은 이 셋을 필두로 하여 발전할 것입니다. 모두들 이들에게 아낌없는 축하와 지지를 부탁드리며, 간단히 안내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서당은 바로 일각 이후부터 차례로 비우게 될 것입니다. 경주 생원들은 부디 밖으로 나서지 말고....-”

황룡들은 신의 말을 뒤로 한 채 한양 생원들을 인솔하고자 뒤로 빠졌다. 준휘는 익숙하게 승철에게서 떨어져 명호와 민규의 곁으로 빠졌고, 황룡 나비들은 약속한 장소로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잘 정리된 서당을 보던 정한의 머릿속에 사형들이 잠시 떠오를 뻔했다. 그 찰나를 깨고, 사형들만큼 익숙한 향을 가진 이가 다가와 폭 안겼다.

어때? 지수가 물었다. 은은하게 풍겨져 오는 동백 향을 맡으며 정한이 남령초를 입에 가져다댔다. 아이들이 제게로 오기까지 꽤 시간이 남았으니, 한 번은 피워도 되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아무 생각 안 들어.”

“정말?”

“...외려, 이제 마음 놓고 한평생 너와 같이 할 것을 생각해보면 괜찮다 싶기도 하고.”

“.......”

지수가 가만히 들으며 턱을 괴고 정한을 바라봤다. 한쪽 눈을 찡그리며 연기를 뿜고는 먼 곳을 응시하더니 말을 마저 이었다.

“청룡께서 그랬거든. 왜 나한테 새끼 청룡을 셋이나 더 달았겠냐고.”

“.......”

“한솔이가 그랬지. 운명을 거부하지 못하는 삶이라고.”

“.......응. ”

“여태 열셋이 모이게 되고 모두가 우리를 따라 영생을, 평생을 함께 하리라 약속한 것조차 운명이겠지?”

“그렇겠지. 억제된 운명이겠지.”

지수의 대답을 들은체 만체 하며 그의 소맷자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어젯밤 한솔이 건네준 종이를 다시 펼쳤다. 꾸깃해진 종이 위로 뿌연 금강초롱 연기를 뿜었다.

“와, 뭐야?”

“....백호의 수호를 받지만... 그들을 따를 의무를 타고 나지 않았습니다.”

희미하게 한솔이 지워낸 글자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수도 미간을 찌푸리며 한 글자씩 읊어갔다.

"낙화열병과 낙화대전의 슬픔... 나빌레라를 손에 쥔 마지막 인간."

“진짜, 찬이가 마지막인가봐. 열셋이 끝인가봐.”

“그렇다니까.”

“진짜 모든것이 바뀌었어. 홀로 남았던 나였거든. 다 떠난 내 곁에는 시들어가는 금강초롱 뿐이었단 말이야.”

“....”

“사형도 떠나서 유서만 남았고, 아버지도 청룡께서 치워주셨고. 누이들은, 내가 떨쳐냈으니까. ...이게, 억제된 운명인가? 얼마 전에 찬이가 말하더라고.”

“뭐라고?”

 

“넌 만약 평생 일반인이었다면 어찌 살았을 것 같아?”

“아마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짓지 않았을까요? 뭐, 적당히 좋은 사람과 혼례도 치르고... 가업을 이어받았을 것 같아요. ...왜요?”

“나는 어땠으려나. ...애초에 가문에서 버려지지 않았으려나? 아니면... 잘 모르겠어. 애초에 내 삶의 시작이 버려진 것부터 시작되어 이리로 온 것이니까.”

“아무렴 어때요! 그런 삶은 시작되지도 않았어요. 우리는, 마무리지을 수 있으니까요. 인간의 삶은 흙탕물 같았던 과거의 어느 부분은 미래의 정수淨水를 부어 덜어버릴 수 있는 것이라 예측할 수 없는 거잖아요.”

 

“...막내한테 한 수 배웠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나는, 은연 중에서 오지도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고 일어나지도 못할 과거를 갈망했나봐.”

“지금은 어떤데? 미래가 두렵지 않아?”

정한이 피식 새는 웃음을 지었다. 대보를 넘겨준다는 것이, 정말 상상조차 되지 않았는데. 막상 능소화의 손에 올려주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사형이 떠나고 난 뒤의 막막함. 딱 그만큼 미래가 기대되었다.

“아무래도 그런 편이지. 아마 낙화열병이 마지막 흙덩이가 아니었을까. 너희가, 그리고 우리가... 내 정수精髓니까.”

다시 지수의 소맷자락에 한솔의 종이를 접어 넣어주고 제 소매에 남령초도 집어넣었다. ...잘, 살아 버텨냈네 윤정한. 지수의 목소리가 먹먹한 것 같기도 했으나, 전혀 그럴 일 없다 생각하여 부러 놀리려 들지는 않았다.

 

 

정한의 짧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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