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2)
같이, 영원히, 열셋이서 함께 봐요.
시샘달 열하루
서당에 들어서기 위해 대문 앞에 섰다. 신라의 기풍을 이어받은 경주의 서당은 한양과 제주의 대문보다 수십 배는 더 화려했다. 금으로 감싸진 문고리를 잡고 두드리자 거슬리는 소리 하나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가장 가운데에 서 있던 경주의 생원이 복조리 다섯 개를 품에 안은 채로 다가왔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는 길이 험하진 않았는지요.”
“전혀요. 전에 비해 훨씬 다듬어진 것이 좋았습니다.”
“다행이네요. ...대문은 사시부터 해시까지 열어둘 것입니다. 여러분 이후로 들어오는 생원들은 약간의 절차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네. 이미 생원들에게도 다 고한 사항들이며,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하여 술시까지는 들어오라고 하였으니 웬만해서는 다 들어올 것입니다. 음, 약간의 절차 또한 준비했고요.”
경주 생원들은 승철의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방에 짐을 풀고, 혼란을 막기 위해 오늘 하루는 황룡들만 최대한 밖에 나와 있길 부탁했다. 그들의 말에, 곧바로 침소로 들어섰다. 순영은 차곡차곡 방구석에 쌓이는 봇짐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사형들이 없었으면 어쨌을까요?”
대외적으로는 모든 걸 총괄해야 하는 4년 황룡임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태 그래왔듯 승철과 지수가 하는 대로 따랐고, 웬만한 것은 정한이 실행했다. 이번에 일이 진행되는 것도, 얼추 4년 나비들이 해두고 나서 뒤따라 보태준 것이 전부였다. 순영의 질문을 들은 승철은 그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대강 알아차렸기에, 그저 얕게 웃기만 했다.
뭘 어째. 네가 해야지. 말은 저리 해도 최대한 다 도와줄 승철임을 알아서, 그리고 다음부터는 곧잘 이끌 순영임을 알아서. 서로 더 이상의 대화는 하지 않고 곁에 찰싹 달라붙어 안겼다. 준휘에게 기대있던 승철은 순영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와르르 넘어졌다. 승관도 그 위에 살포시 누우려다가 가장 아래에 깔린 사형을 생각하여 실천에 옮기진 않았다.
“일각 정도만 쉬었다가 내려가자. 애들 들어오는 거 봐야 해.”
승철의 말에 다들 앓는 소리를 내며 겨우 대답했다. 순영과 찬은 무예학도로서 서당을 지키는 것에 또 힘을 써야 할 테니, 입구에서 생원들을 맞이하는 것은 승철과 승관이 하기로 했다.
정확히 일각을 푹 쉰 후에, 입구에서 하나둘씩 들어오는 생원들을 맞이했다. 제주의 생원이 오면 가볍게 묵례로 보내주고 한양의 생원이 오면 하나하나 이름을 확인해 가며 배정된 침소를 다시 짚어주길 반복했다. 힘들어도 맡은 일이니 해야지. 승관이 작게 기지개를 켜며 먼 곳을 응시하다 제게로 다가오는 이와 눈이 마주쳤다. 곁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있던 승철이 그를 보더니 자세를 고쳐잡고 제대로 섰다. 풍기는 분위기가 가볍지 않았다.
“...아는 분이셔?”
“으음-. 용의 신령님이시죠.”
...그러니까, 저분이 네 어머니란 소리잖아. 예전에 들었던 것이 떠올라 후다닥 인사를 올리니 코앞으로 다가온 그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어서 오십시오. 한양의 생원들이여.”
경주와 제주에는 신과 관련된 자들이 편히 서당을 돌아다닌다. 형체를 감추고 돌아다니기도 하고, 이렇게 대놓고 돌아다니기도 한다고 했다. 확실히 인간의 영역에 크게 관여하는 신들이라 그런지 오방신에 비해서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승관은 승철의 배려로 잠시 어머니와 함께 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봤자, 승철과 대여섯 발짝 떨어진 것이 전부였지만.
“못 본 사이에 훌륭한 황룡이 되었구나.”
“어떻습니까?”
“멋있군. 누굴 닮아 이렇게 잘 컸지?”
승관이 행복할 때면 짓는 표정이 있다. 온통 사랑만 받아온 아이들이 유독 기분이 좋을 때 나오는 예쁜 얼굴. 지금이 딱 그러했다. 제가 이루어 낸 성취로 인해 돌아오는 타인의 행복과 축하는 과분하게 받아도 버겁지 않고 좋기만 했다. 승철은 그런 나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기에, 괜히 더 뿌듯해지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네 어미를 못 본 지 꽤 됐어. 네가 황룡이 되었다는 사실도 얼마 전에 알았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이런저런 일들. 한창 수호신장을 뽑을 시기라.”
“…….”
“그게 전부야. 별일 없다. 괜히 또 걱정시킬 뻔했구나.”
오방신의 수하가 교체될 시기에 맞추어 경주와 제주도 신장과 수장들을 교체하는 시기가 되었다고 얼핏 들은 것 같았다. 아무튼. ...너희도 마저 일해야지. 황룡들아. 이제 네 사형도 들어오네. 청룡과 주작의 등을 두어 번 토닥여준 용의 신령은 그 자리에서 수선화 꽃잎을 조금 날리며 사라졌다. 떨어지는 노란 꽃잎 하나를 손바닥에 받아낸 승관은, 한참 동안 보다가 이내 날려 보내고 다시 승철의 곁으로 다가갔다.
생원들이 다 들어오고, 약간의 휴식을 위해 경주 생원은 황룡과 송에게 밖에 잠시 돌다 나와도 된다고 했다. 한양처럼 빡빡하지 않은 결계가 큰 부분을 차지하는 듯했다. 순영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지훈에게 달려갔다. 방문을 벌컥 열고 허리에 양쪽 손을 올리고는 자랑하듯 입고 있는 옷을 내보였다. 지수를 베개 삼아 드러누워 있던 정한이 오-. 예쁘네. 하고 박수를 쳐줬더니, 그에 힘입어 더 뿌듯해했다. 벽에 기대어 졸고 있던 지훈이 그 소리에 잠에서 깼다.
“어때?”
“...과연, 잘 어울리네.”
고요한 밤하늘. 누각에서 함께 있었던 때 대부분이 밤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종종 나갔던 산책길에 함께 보았던 별 때문인지, 지훈은 항상 순영을 보고 별을 떠올렸다.
“황룡들은 잠시 나가서 걷다 와도 된대. 나갈래?”
“......안 피곤하냐?”
“너 봐서 괜찮아. 갈래?”
지훈이 입을 달싹이더니 이내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올 때 맛있는 거 사와-. 겸이도 보이면 데려오고. 사형들의 말을 대강 주워들으며 신을 고쳐 신고 밖으로 나섰다. 살짝 서늘한 추위가 불편하지 않아, 가벼이 입은 채로
말없이 걷기만 했다. 순영은 별로 어색해하지 않아 보였는데, 지훈은 뭐가 그리 불안한지 뒷짐 지고 말아쥔 주먹을 계속 꼼지락거렸다.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달싹이기도 전에 순영이 휙 뒤를 돌아 지훈을 봤다.
“어때? 밖에서도 잘 어울리나?”
해사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도 마냥 웃음이 나오질 못했다.
“....너는.”
“응.”
“안 두려워?”
“뭐가?”
“계속 함께해야 하는데, 이런 사이에서 더 애매하게 나아가서 남이 되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순영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질문이 불편해서, 당황스러워서 짓는 표정이 아니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얼굴에 묻어났다.
“물론 지금이야 남부럽지 않게 행복해. 네가 입은 철릭을 보며 고요한 밤하늘이 비치는 바다를 꿈꿀 수 있어서.”
“그럼 된 거 아니야?”
“어?”
날카로운 눈매를 하고는 제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매서운 호랑이의 눈에 걸려 도망칠 생각조차 못 한 지훈은, 말랑한 순영의 손이 제 양 볼을 잡아 가까이할 때까지도 가만히 있었다. 바르작거리지도 않고 얌전히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마지막까지 네 곁에 남아있을 테니까. 그럼, 됐잖아.”
“.....너는,”
“너는 그렇게 삶이 쉽냐고? 설마, 그럴 리가.”
지훈의 생각을 그대로 읊어냈다. ...뭐지? 당혹스런 지훈의 생각을 들은 순영이 살풋 웃었다.
“가끔, 네 불안이 읽혀. 왜인지는 모르겠어. 다른 사람들은 안 읽히거든.”
“........”
“네가 날 좋아하는 것도 알아. 그 때문에 커지는 불안감을 숨기지 못해 쳐내는 것도 알아.”
내가 만들어 내는 움직이는 밤 파도를 즐기면 되잖아. 우리는 안 헤어질 거잖아.
“내 삶이 쉬웠을 리가 없지. 창고에 이불 깔고 자던 내가 백호가 된다니. 구전설화도 이렇게 하면 재미없다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릴 텐데 말이야.”
“........”
“한데 내 삶은, 어느 양반댁에서 뛰쳐나온 현무보단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아서 다행이야. 안 그래?”
넌 절대 혼자가 될 수 없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정언이었다. 순영은 언제가 되든 지훈을 사랑할 것이고, 지훈은 평생토록 순영을 갈망할 테니까. 알면서. 다, 알면서. 내 죽음마저도 빼앗은 네가 어찌 날 떠나?
“석민이한테 전해 들었어. 그거, 내가 먹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며? ...뭐, 이미 삼켜버렸고 독은 빼냈으니 상관은 없지만....”
“걔가 그런 것도 말해줘?”
“말해주지. 내가 널 좋아하니까. 근데 있잖아....,”
그때 기분이 꽤 좋았거든. 온몸은 구속당해서 움직이질 못하고, 겨우겨우 내 모든 걸 네게 맡겼을 때 말이야. 넌 어땠어?
“이제 슬슬, 다시 답을 할 때인 것 같은데.”
순영이 답을 종용했다. ...그래, 해보자. 너나 나나 서로밖에 없는데. 해보자, 밑도 끝도 없는 순애.
지훈은 뒤꿈치를 살짝 들었다. 그때처럼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다. 순영은 잠시 당황하더니 지훈이 불편하지 않도록 허리를 살짝 숙여주었다.
나빌레라
舊正(二), 같이, 영원히, 열셋이서 함께.
조용한 침소가 마음에 들었다. 정한은 지수의 배를 베개 삼아 누워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었다. 가만히 있던 정한이 킁킁거리기에, 지수가 얌전히 좀 있으라며 코를 틀어막았다. 니지금청룡하나죽일뻔했어. 정한이 지수의 손을 잡아 내렸다.
“탄 내 난다.”
“...저녁 시간이니까 그런 거 아니야?”
“경주 생원들은 밥을 태워서 먹냐?”
“듣고 보니 냄새가 좀 심하긴 하네.”
대화를 하면서도 둘 다 몸을 일으킬 기력이 생기지 않아 누워만 있었다. 탄 냄새가 익숙해져 거의 의식되지 않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한바탕 서당이 소란스러워졌다. 슬그머니 창밖을 내다본 지수가 화들짝 놀라며 도포를 챙겨입었다. 장난치는 모양새가 아닌 느낌이 들어 뒤이어 정한도 고개를 내밀어 창밖을 보았다. 나무 아래에 불이 붙어 번지고 있었다.
“...미친거아니야.”
“신들은 다들 떠났어. 승관이가 아까 말해주더라. 내일 차례를 지내고 다른 행사가 진행될 때까지 서당을 비울 테니 자유롭게 놀라 했다고.”
생원들끼리 저 불을 꺼야 한다는 소리였다. 애초에, 신들이 있었다 한들 크게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 뻔하지만.
바로 내려가 경위를 파악했다. 저녁을 준비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사소한 불씨가 튄 것이라 대수롭지 않게 없애려고 했는데, 쉽게 되지 않았고 이렇게까지 번진 것이라고. 더 이상 불이 번지면 가장 가까이 있는 명륜당까지 불이 옮을 것 같아, 정한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까지 남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은데, 구차한 제 인생을 속으로 한탄하며 팔을 뻗었다.
금강초롱꽃 모양의 거대한 종이 불 위로 엎어졌다. 물을 다룰 수 있는 지훈을 저들이 내보냈다.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일단, 불을 가두었다. 신과 송들이 달려와 종 내부에 온갖 물을 뿌려대도 불은 식지 않았다. 그렇다고 찬이에게 불을 거두는 나빌레라를 쓰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연고 없는 청룡이 자연을 소멸시키려 들면 어떤 해를 입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아무리 무적이라 해도.
“야 홍지수...! 뭐, 방법 없어?! 물을 아무리 뿌려도 안 돼.”
그득그득 화력이 거세지며 정한의 꽃이 들어 올려지기 직전이었음에도 애써 잡아 누르며 뒤를 돌아봤다. 열기가 엄청난 탓에 다시 꽃을 볼 용기가 안 났는데, 이상하게도 지수와 민규과 제게로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민규 뒤에는... 승철이랑, 준휘인가? 왜 저렇게 바쁘게......,
펑, 말도 안 되게 큰 소리와 함께 정한이 만든 금강초롱이 박살 났다. 화력에 튕겨 나간 정한은 지수가 받아냈다. 단단한 몸이 아래서 저를 받쳐준 덕에 아프지도 않았다. 둘 다 튕겨 나오자마자 번뜩 고개를 들어 불을 쫓았다.
언제 달려왔는지, 석민이 모든 불을 흡수하고 있었다. 빨려가듯 석민의 얇고 긴 두 손바닥부터 팔을 타고 온몸을 휘감더니 서서히 사라졌다. 불씨가 남지 않았는지 모조리 확인한 후에 휘청이며 고꾸라졌다. 승철은 또 무의식적으로 석민이 살아있는지 확인했다.
“...괜찮아?”
“주작이란 거, 꽤 힘드네요…….”
“몸 괜찮은 거 맞아?”
“네. ...너무 많은 힘이 들어와서, .......조금만 있다가 일어날게요.”
쓰지도 못할 화력이 온몸을 감싼 탓에 꽤 놀란 것 같았다. 달려오는 나비들에게 연거푸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고도 한참을 누워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앉았다. 경주의 신들이 허겁지겁 달려와 그의 안위를 살폈다. 석민은 제가 좀 타고난 주작이라, 따위의 농담을 펼치며 제가 건강함을 드러냈다.
한바탕 소란을 지운 후, 겨우 정신을 돌아온 지수의 눈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한솔이었다.
“넌 왜 이렇게 서 있어?”
“...큰일 난 것 같아서,... 석민 사형 데리고 오느라요.”
한솔은 지수와 비슷한 시기에 불을 발견했다. 이번에도 제가 나빌레라를 써야 하나 싶다가도, 저보다 더 적절한 사형이 떠올라 그를 찾으러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신은? 급해서 달려오느라 못 신은 거야?”
한솔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없던데요. 그 말을 들은 정한의 눈에는 다시 생기가 돌았다.
침소로 돌아가려던 승철이 정한을 붙잡았다. 석민은 거의 승철의 몸에 업혀 있는 꼴이었다. 정한은 생글생글 웃으며 지수와 한솔을 데리고 있었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꼴이, 누가 봐도 외출하려는 듯했다.
“어디 가?”
“응.”
정한이 도포 매무새를 마저 정리하며 답했다. 승철이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봤다.
“...아니, 어디 가냐고...”
“아! 한솔이 신 사주러.”
“설빔이야?”
이번에는 지수가 답했다. 정말 셋이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간혹 서당에 들어오고 1년 사이에 부쩍 성장하는 사제들이 있어서, 사형들은 그들에게 설을 맞이하여 선물을 사주기도 했다. 지수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털렸지. 경주 생원이 가져간 것 같아.”
경주에서 구애받은 첫 생원은 한솔이었다.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돌아올 신이겠지만 그동안 맨발로 돌아다닐 수는 없으니까. 정한은 작년에 민규의 신이 털렸을 때부터 줄곧 놀려왔는데, 이제 한 명 더 늘었다며 꺄르르 웃을 정도로 좋아했다.
두어 시진 안에 들어오겠다 약속을 하고 나온 셋은, 보이는 사람들을 붙잡고 신발전의 위치를 찾아낸 후에 하얀 태사혜를 사서 신겨주었다. 값을 내려는 한솔을 지수가 붙잡은 덕에 정한이 낼 수 있었다. 차마 사형들이라 무어라 토를 달진 못하고, 입술을 삐죽이는 것으로 조용히 불만을 토로하고 있으니 지수가 그를 발견하고 푸하하 웃어버렸다.
“사제한테 해준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그래.”
“항상 받기만 했는데 어찌 없다고 할 수 있어요?”
“너도 네 사제 들어오면 그렇게 해-.”
부담을 느끼지 말라며, 지수가 한솔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말했다. 정한도 웃기만 했다. 연례행사 같았다. 준휘의 신을 사주고, 민규의 신을 사주고, 한솔의 신을 사주고. 한솔은 한참을 태사혜를 보다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안 들어오지 않을까요?”
“응? 왜?”
“오방신의 가까이 있을 인간은 없으니까요. 열 명은 이미 정해졌으니까.”
한솔 앞의 두 사형은 할 말을 잃었다. 한솔도 그 분위기를 살짝 뒤늦게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어 그들의 눈치를 보다가, 지금이 딱 제 생각을 말할 때라 느껴 더 말을 잇기로 했다.
“명호 사형이 제게 이야기한 것이 있어요. 민규 사형은 수문장으로 나비들과 함께 할 것이고, 사형은 산의 신선으로 살 것이라고요.”
“......들었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우리와 영원을 약속해 준 것이 고맙지.”
“음, 인간은 여러 변수를 만들어 겪기를 반복한다고 들었어요. 헌데 신은 완전한 존재여야 해서, 그들과 가까이 지낼 운명일수록 변수를 최대한 억제한 삶을 살아야 한대요. 운명을 거부하지 못하는 삶을 살도록....”
운명을 거부하지 못하는 삶. 그 말을 들은 지수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한솔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민규 사형은 독각 때문에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살아가기로 한 것이고, 명호 사형도 따지고 보면 산의 신선이 되어 나비들과 함께하기 위해 역병이 그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한양에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이례적으로 현무에 배정된 것까지, 다 신의 계획이라 칠 수 있을 것 같은데.”
“.......”
“그럼 나는, 왜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그때부터 생각했어요.”
조선의 오방신에 영향이 가지 않을 현무의 수련생과, 독각의 가호를 양껏 받은 청룡. 별 볼 일 없는 나는, 왜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대체 내가 점지받은 운명이란 무엇일까. 감히 내가, 어찌해야 운명을 타고 이들과 함께할 수 있을까. 매일 홀로 침소에서 사형들을 기다리며 생각해 본 것이다.
“.......”
“같이, 영원히, 열셋이서 함께 봐요.”
소맷자락에서 꼬깃꼬깃 접혀있는 종이 하나를 지수에게 주었다.
“...이게 뭐야?”
“상강 시험 논제요. 낙화대전에 논하라는... 근데 좀, 제가 하고픈 말만 적어서 제출하진 않았습니다.”
“…….”
“사형들 드리려고 했어요. ...태사혜를 사준 값으로 쳐주세요.”
한솔은 상강에 낙화대전에 논하라는 논제를 보고, 한참을 고민하다 글을 써 내려갔다. 하지만 두 장을 한가득 적고는, 첫 번째 장만 제출하고 뒷장은 제출하지 않았다. 일부러 주제에서 조금 벗어나게 적었으니까.
이런 순간이 오면 주려고 매일 밤 펼쳐서 곱씹어 읽어보고 고치길 반복했다. 살짝 얼룩덜룩했지만 보기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봐도 된다는 한솔의 말에, 지수가 살짝 떨리는 마음을 앉히고 종이를 펼쳤다.
낙화대전에 대해 논하라.
두 번째 장에 시작하기에 앞서 저는 화신花神의 아들 최한솔임을 밝힙니다. 꽃의 신과 물의 신선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 사실이 조선 어디에 퍼져도 상관이 없을 것 같다는 판단으로 이를 고합니다.
화신의 아들은 나빌레라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저는 오방신 중 백호의 수호를 받지만 천상에 올라가 그들을 따를 의무를 타고 나지 않았습니다. 극악한 확률로 태어나는 신들의 자식은 전부 아무런 능력이 없는 인간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인데, 왜 제게 이 마법을 지우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갖고 태어난 운명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오랜 시간 따라다녔습니다. 순리에 따라 살다 죽는 인간의 삶은 신들이 보기에는 한없이 짧은 찰나입니다. 그 찰나에 이 마법을 써야 하는 순간이 오는건가? 아니면, 그저 화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받은 마법인가? 답이 없는데도 계속하여 되뇌게 만드는 마법이었습니다.
저는 백호의 수장과 신령이 있는 침소에 배정되었습니다. 저와 가까이 있는 이들은 낙화열병과 낙화대전의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낙화대전이 발생하게 된 원인 중 가장 큰 요소인 나빌레라를 손에 쥔 마지막 인간입니다. 비로소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나비들에게 있어서 내가 할 일은 이들의 꽃이 저버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 나빌레라는 인간을 위해, 그리고 인간을 수호할 나의 사형과 친우들을 위해 사용할 것입니다. 이왕 흙의 기운을 함께 타고난 김에, 잘 가꾸어서 꽃의 신선이 되어보려 합니다. 다른 나비들보다는 가벼이 주어진 이 운명에 힘을 담아 나아갈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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