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
여름의 절정
견우직녀달 스무이틀
원우가 기지개를 켜며 앓는 소리를 냈다. 시간이 빌 때마다 누각과 꽃밭을 오가며 공부만 했던 터라 온몸이 쑤셨다.
“매해 네 번씩 치르는 것인데... 특히 여름이 너무 싫다.”
원우의 말을 들은 순영이 기다렸다는 듯 보던 서책을 퍽 덮었다.
“...얼마 전에 천상에 올라가 봤어.”
“그랬지. 좋았어? 이제야 말을 하네.”
“너랑만 있으니까.”
“...깨어있는 사람이 둘뿐이니까.”
순영의 말에 원우가 힐끔 엎어진 셋을 쳐다보았다. 유시酉時쯤에 1년 나비들이 서책을 한가득 들고 오길래 제대로 공부하겠구나 싶었는데, 해시亥時쯤에 잠들어서 두 시진이 지났는데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꽤 오래 두었으니 이각쯤 후에는 깨우자는 순영의 말에 원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넌 천상에는 안 가봤어?”
“그게 쉬운 일인가. 난 저승에만 자주 갔지. 하늘에는 갈 생각도 못 했어.”
원우의 말에 순영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꽤 잘 구축되어 있던 천상에는, 각 수호신 영수들의 터를 제외하고도 십이지신을 포함한 여러 신선이 사는 것 같았다.
“안 무서웠어?”
“응. ...나 궁금한 거 있어.”
대뜸 묻는 순영에, 원우는 말해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규랑 지훈이네 집안에서 도깨비를 모시잖아. 한평생 해야 하는 건가?”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
“인간 외의 존재를 직접 보고 나니 신기해서.”
“아, 그럴 만하지…. 음.... 일단, 도깨비는 날씨랑 물건에 깃드는 것으로 나누어져.”
“뭐가 다른데?”
“민규네 집안은 날씨 중에서도 가장 큰 힘을 아우르는 바다 도깨비를 모셔. 물의 기운이 강한 민규네 집안과 잘 맞아서 그곳에서 지내는데.... 자세히는 나도 몰라. 가령 뭐... 어찌하다 독각이 되었는지 같은 것들 있잖아. 자연 독각은 워낙 귀한 영물이라서 함부로 더 언급하기가 좀 그러네....”
민규의 독각은 용궁의 관원이었다. 용왕의 총애를 받았음에도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그의 뜻을 거부하고 바다에서 목숨을 다했다. 그의 풀리지 못한 한은, 용왕의 눈물과 섞여 날씨 도깨비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온전한 인간도, 신도 아니었으나 그는 열망이 들끓는 존재였다. 해일을 일으키며 모란 김가에 간 민규네 독각을 원우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순영에게는 함구했다. 함부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럼 지훈이는?”
“그 독각은 생전에 멸화군滅火軍이셨어. 물건 독각은 때가 되면 재가 되어 사라지셔. 그 ‘때’라는 건, 하늘의 상제와 저승의 염라가 정하는 것이고. ...당연하게도, 이분 또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말 못 해주고.”
“...너는? 네가 모시는 사자는?”
“사자는 전생에 큰 죄를 지어서 되는 것이야.”
“응.”
“...공부 안 해도 돼?”
원우가 안경을 고쳐 쓰고는 턱짓으로 순영의 손에 들려있는 서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순영은 보란 듯이 들고 있던 서책을 덮어 상 위에 얹었다. 원우는 기가 찬다며 웃었다. 그러다 후회한다며 거듭 말해보았으나 순영은 이것 듣는다고 시험이 망하진 않는다며 원우를 보챘다. 원우가 순영의 앞에서 사자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왠지 모르게 미안해 말을 아꼈는데, 이렇게 보채니 어쩔 수 없었다. ...한번만 말해주고 다시는 안 할 거야. 원우의 나직한 한 마디에 순영의 눈은 반짝이며 빛이 났다.
한밤중, 명륜당은 한적했다. 앉아 있는 생원, 누워있는 생원, 졸음을 참고 겨우겨우 정신을 차려 가며 서책을 펼치는 생원도 있었다. 민규는 그 사이에서 조용히 문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어느 정도 다 작성해 가는 시점에, 승철이 땀을 뻘뻘 흘리며 민규의 앞에 앉았다. 민규가 어디에도 안 보여서 명륜당을 다 돌고 여덟 번째인 이곳에서야 겨우 찾아냈다며 쫑알거렸다. 침소에 있을 걸 그랬네요, 하며 미적지근하게 답하는 민규를 보던 승철이 그제야 제 목적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추분쯤에 꽃놀이 갈 생각 없어?"
"...사형이랑 둘이요?"
"아니, 다른 아이들도 같이!"
정한이랑, 지수랑.. 준휘도 가나? 아무튼, 다른 사제들도. 승철의 말에 민규가 종이에 향해 있던 시선을 앞에 앉아서 저를 쳐다보는 승철에게로 옮겼다. 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묻는 승철에 민규는 한참 동안 승철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다시 내렸다.
“사내놈들끼리 가을에 무슨 꽃놀이에요?”
“단풍도 물드는 시기에 서당에만 있는 것보단 괜찮은 선택 아닌가?”
민규는 말이 없었다. 입술을 댓 발 내민 승철이 이번에는 종이 위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뭐 써?”
“아, 닷새 후에 본가로 잠시 내려가야 해서 사유서 쓰는 중이에요.”
“본가에 왜 가는데?”
“어... 도깨비 모시러요.”
….도깨비? 네. 도깨비??? ??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네. 읽어볼래요?”
못 믿겠다는 듯한 승철의 표정에 민규가 다 쓴 종이를 승철이 보기 쉽도록 돌려주었다. 글 내용은 보지도 않고 잘 쓴다며 감탄만 하는 승철이었다. 민규는 쑥스러운 듯 벼루에 새겨진 무늬만 괜히 만지작거렸다.
“아마 나흘 정도 있다가 다시 올 거예요.”
“어? 난 봐도 잘 몰라.”
“...아, 독각獨脚이 도깨비예요. 대강 저는 대대로 독각을 모셔 온 김씨 집안이고, 이날 독각을 뵈러 가야 한다는 뜻이고요.”
민규네 집안뿐만 아니라, 그들이 모시는 도깨비는 워낙 유명하여 민규가 입학하기도 전부터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으나 사유서에는 명확히 표시해야 할 것만 같아서 이리 자세하게 적었다고 했다. 활자들을 하나하나 곱씹던 승철이 아쉽다는 듯 고개를 느리게 까딱거렸다.
“응…. 그래서, 꽃놀이는 같이 못 가는 건가?”
“...아마 추분에도 갈 것 같은데, 그렇게 같이 가고 싶어요?”
승철이 눈썹마저 축 처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규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손에 쥐고 있던 붓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더 완곡히 이야기할 것도 없었다. 죄송스러워하면 승철은 더 속상해할 것이 뻔했다.
“밤이 늦었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 이렇게 온 거예요?”
“응. 빨리 말해주고 싶었거든.”
“...갑시다. 바래다줄게요.”
안 그래도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승철은 민규가 먹과 종이를 정리하는 걸 도왔다. 평소보다 챙길 것이 적어 꽤 빨리 정리를 끝내고 명륜당에서 나왔다. 밤에도 무더운 대서가 되면, 정한이 항상 서당 가장 가운데에 있는 명륜당에 얼음 결계를 작게 쳐서 공간이 시원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해두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훅 끼쳐오는 더위에, 승철은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 덥다. 이제 여름 끝 무렵인데, 이렇게 더우니….”
“그러게요. 얼마 전에 명호가 침소 사형들이랑 부채를 사서 들어오던데, 같이 살 걸 그랬나 봐요.”
항상 현무 생원들에게 거북과 뱀이라 그런지 느려서 답답하다며 장난을 칠 때가 많았는데, 이럴 때 보면 용보다도 빠른 것 같았다. 그런 면에서는 참 빠르다며 무의식적으로 주작과 반대 방향에 있는 현무 침소로 고개를 돌렸다. 해가 늦게 지는 여름인데도 시간이 많이 지났는지 어둠이 아득해져 현무 침소는 물론이고 누각도 보이지 않았다.
“..되게, 어둡네….”
“무서워요?”
혼자 중얼거리는 승철의 말을 들은 민규가 마구를 꺼내 들었다. 곧바로 밝은 하늘빛의 불이 붓의 호에 붙어 마치 마구가 곧 탈 것처럼 보였다.
“뭐야?”
“독각의 가호加護요. 완전한 것은 아닐 테지만, 도깨비불 같은….”
“설화 같은 곳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근데 이거, 이렇게 대놓고 비춰도 되는 거야? 다른 생원이 보면 어떡하려고...”
“안될거 있나요. 이 능력을 쓸 줄 아는 자는 저밖에 없기야 하겠지만…. 독각이 주신 능력인데.”
“어엉... 잘 어울리네. 너답고.”
“...그렇습니까? 일단 늦었으니 가볼게요.”
“응. 내일 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벌써 주작 침소 앞이었다. 그래도 나름 민규가 데려다주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승철이 침소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본 후에야 불을 없애고 동쪽으로 다시 몸을 돌렸다.
견우직녀달 스무사흘
사형. 저희 꽃놀이 가는 거요. 원우가 누각의 정적을 깨고 말을 꺼냈다. 가만히 있던 승철이 벌떡 일어나 책상을 쾅 짚었다.
“민규는 그날 도깨비님 모시러 간대.”
“어유, 그래요? 벌써 시기가 그쯤인가?”
“어. 저번에 명륜당에서 물어봤는데 그렇게 답했어.”
“...민규가 먼저 말했어요? 도깨비…. 모신다고.”
“응. 먼저 말을 꺼내던데?”
왜? 하고 물어도 원우는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옆에 있던 지훈은 속으로만 웃었다. 제 독각 이야기를 남에게 하다니, 참 세상 별일이 다 있다 싶었다.
그럼 일곱 명이 가는 건가? 휙 돌아보며 묻는 승철에,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우는 가만히 앉아 다시 손가락을 접으며 인원을 세어 보았다.
“네. 일곱.”
“이렇게 많이 나가는 것은 처음이야. 아! 꽃밭도 원래는 일곱 명만 알고 있었잖아.”
“그렇죠. 이제는 아는 생원이 벌써 열셋이나 되니….”
지금이 딱 적당히 복작거리고 좋아요. 더는 데려올 생원이 없기도 하고. 원우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지훈과 승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열셋을 제외한 다른 생원들에게는 꽃밭의 존재를 알리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혹여나 누군가가 출입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4년 나비들이 따로 홍옥 노리개를 만들어 들어갈 수 있는 마법을 걸어두었다. 노리개가 있어야 출입이 가능하도록. 그리고, 열셋을 묶을 수 있는 한 가지의 수단이 생긴 것이 꽤 마음에 들었다.
자기 힘이 담긴 노리개를 매만지며 이야기하던 승철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한이랑 지수는?”
“아. 지수 사형은 아침에 강의 들으러 갔어요.”
“...정한 사형은 왜 안 오시지? 보통 동이 트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오셨는데.”
“…….”
“…….”
갔다 올게. 셋을 감싸는 묘한 기시감에, 승철이 황룡 도포를 챙기며 나섰다. 습관적으로 남쪽으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급히 동쪽으로 돌렸다. 때마침 명륜당을 나오던 지수가 어딜 가냐고 물었지만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스쳐 지나쳤다.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려가 정한의 방문을 열었다. 곧바로 보이는 것은, 책상 앞에 앉아 도포 자락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정한이었다. 승철이야? 문만 열었을 뿐인데 바로 알아차리는 정한에, 승철이 곧바로 들어가 정한의 앞에 앉았다.
야. 나 봐. 흘러내리는 도포를 다시 올려주며 몸을 흔들어도 싫다며 힘주고 고개를 들지 않는 정한에, 승철도 결국 정한의 팔목을 잡은 손에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어깨까지 닿는 긴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이 숨겨져 보이지 않았다.
“왜 왔어어….”
“이러고 있을까 봐.”
“나, 괜찮은데….”
“어어. 너 울고 있었던 거 알아. 빨리 고개 들어봐.”
훌쩍이며 싫다고 하면서도 이제는 순순히 승철의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한참을 울었는지 눈가가 새빨개진 채로 바라보는 정한에, 승철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괜찮다며.
나빌레라
大暑, 여름의 절정
……
청룡은 동쪽을 수호하는 사신이다. 동쪽을 수호하는 청룡은, 오행 중 나무와 봄을 관장하고 청색을 상징한다.
……
청룡 영수는 수장 및 신령이 될 아이들에게 식물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나누어주었다. 서당을 지을 당시 청룡과 황룡이 사용했던 능력의 크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이었으나 두 수하는 적절히 정도를 가늠하여 사용하였다.
또한 청룡 수장과 신령에게 어떠한 신체 변화가 나타나는지에 대한 정보가 꽤 적은 편이다. 하지만 진시辰時에 드물게 머리가 진청색이 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이 또한 다른 오방신에 비하면 옅게 드러나는 부분이라 알지 못한 채로 한참 뒤에나 알아차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승철은 누각을 나간 지 일각이 채 되지 않아 정한을 데리고 들어왔다. 어딘가 찜찜한 표정인 승철과 달리 정한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디 있었어요?”
“나? 침소에 있었지. 늦잠 잤어.”
지훈의 질문에 뻔뻔하게 대답해 주며 자리에 앉는 정한을 승철이 흘겨보았다. 아까 마주쳤던 지수도 곧바로 온 건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정한을 쳐다보았다.
“괜찮아? 진짜 늦잠이야?”
“엉. 요즘 알아가는 게 많잖아. 피곤해서 그랬나 봐.”
거짓은 아니었다. 요즈음 정한은 휘몰아치듯 쏟아지는 도술 수업에 정신을 못 차리며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모든 분야에서 높은 성적을 자랑하던 그가 처음으로 막혀서 깨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것이 공간이동술이었다. 자신을 믿고 간절히 바라면 된다는 말을 미친 듯이 되뇌며 수없이 반복해도 한 걸음도 이동할 수 없었다. 싸라기눈 같은 털과 붉은 불꽃을 내며 사라지는 지수와 승철을 눈앞에서 보면서, 정한은 무너졌다.
항상 꽃밭에서 남몰래 늦게까지 연습하는 것을 나비들도 알고 있었기에, 정한의 말을 모두가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승철은 할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애써 참으며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정한아. 미약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누각 기둥에 팔짱을 낀 채로 기대어 멍하니 있던 정한이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지수였다.
“뒤에 지비.”
정한이 뒤를 돌아보자마자 지비가 이마에 콕, 찍히고 떨어졌다. 주워서 종이를 펼쳐보더니, 다시 접어 도포 소매 속으로 집어넣었다. 표정을 보니 그닥 좋은 상대가 보낸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요즘 귀찮아서 서당 문을 안 막아놨더니….”
웬 벌레 새끼가 꼬이네. 지수가 정한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소매에 손을 넣어 지비를 꺼내 보았다.
큰 제지를 하지 않는 정한에 별것 아닌가 싶어 슬쩍 눈치를 보고는 종이를 펼쳐 읽더니, 다시 눈치를 살폈다.
“다 봤으면 넣어. 다시.”
“...왜 안 말렸어. 보지 말라고 했어야지....”
“한 번 봐야 다신 안 읽지.”
정한의 말대로 다시 집어넣으려는 것을 중간에서 집어 든 승철도 종이를 펼쳐보았다. 태연하던 지수와는 다르게 승철의 표정은 묘하게 변했다.
“금강초롱….”
“안 갈 거야. 다 읽었으면 넣어.”
그래도 되나 싶은 눈치였지만 승철도 곱게 다시 접어 소매로 넣어주었다. 손을 펼쳐 시간을 본 정한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의서醫書를 들고 황급히 누각을 나섰다. 다급하게 따라 나가서는 어디에 가냐고 소리 지르는 승철에, 정한은 더 크게 약초학 수업을 들으러 간다고 소리치는 것으로 응했다.
“정한아. 또 왔다.”
모든 수업이 끝나고, 꽃밭에 누운 채로 서책을 읽던 정한의 콧잔등 위로 떨어졌다. 매번 얼굴에 지비가 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정한이었고, 이번에도 눈치 없이 지비는 정한의 얼굴에 처박듯이 떨어졌다. 누가 보냈는지 알면서도 정한은 굳이 종이를 펼쳐보았다. 황룡 도포를 밑에 깔고 저고리만 입고 있던 정한이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밝은 빛과 함께 정한의 어깨부터 아래로 연노랑 색의 두루마기가 생겨났다. 이런 정한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는 것은 덥다는 핑계로 꽃밭에 함께 나온 승철과 지수 둘뿐이었다.
"사형! 잘 어울려요!"
"그런가? 타고난 황룡이지."
도술을 신기해하는 승관과 찬에게 맞장구를 쳐주는 정한에게 승철은 꼴값을 떤다고 했다.
"의복 하나로 무슨…. 나가게?"
"응. 안 되겠다. 사유서는 네가 알아서 써서 처리해줘."
"...그래."
"하, 금강초롱이 뭐라고…. 그치?"
갔다 올게. 꽃밭을 나서는 정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지수가, 쟤 화났다. 하고 읊조렸다. 승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어디가요..? 하고 묻는 승관에, 지수는 근 4년 친우면 눈만 마주쳐도 알 수 있다고 했다. 지금 어디에 가는지도 대충 알 것 같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승관과 찬에게 지수는 웃으며 둘은 걱정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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