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
물과 땅이 얼어굳는다
입동이 되자마자 날이 이렇게 차다니. 한솔이 메마른 목을 축이며 생각했다. 영조례라 당연히 침소에 저만 있을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순영이 곤히 자고 있었다. 창을 굳게 닫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바람이 차서, 조금이라도 새어 들어오면 순영이 깰 것만 같았다. 일찍이 습의를 끝마친 황룡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러 들어온 것이고, 제비뽑기에서 홀로 검은 작대기를 뽑은 지수만 남아 마무리를 했다. 때마침 창을 닫으며 지수와 눈이 마주친 덕에,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솜이 가득 들어있는 옷을 꺼내입고 내려가서는 지수의 곁에 달라붙어서 빤히 쳐다보았다.
“올해는 황룡의 변덕이 심하군. 단풍은 떨어진 지 오래고, 물과 땅이 얼기 시작하는 지금 사신을 모신다니.”
6년 황룡현무였다. 한솔이 흘긋 지수를 보았다. 보통 사형이 오면 고개를 숙일 만도 한데, 꼿꼿하게 머리를 들고 황룡현무의 눈을 보았다. 다 큰 호랑이는 고개를 숙이는 법을 모른다.
“...청의 요청이었습니다.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노여워하지 말라니…. 그저 속상함을 토로한 것인데 그리 말하니 조금 섭섭하구나.”
“일찍이 영조례에 대한 안건이 내려온 시절부터 올해는 입동에 하겠다 하였는걸요.”
네가 우릴 안 도와주고 졸업에만 신경을 썼으니 모를만하다라는 의미를 꾹꾹 눌러 담아 지수의 방식대로 표현한 것이었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모든 일을 4년 황룡에게 맡긴 것들이 잔말은 많았다. 단칼에 황룡현무의 불만을 잘라낸 지수가 한솔에게 천막 한쪽을 내어주었다.
“저기 서낭당 나무에 가서 만세 자세로 들고 있어 줄래?”
“아. 네. 대강 이렇게 들면 돼요?”
“응. 빙글 돌아야 해. 천을 서낭당과 침소에 연결해야 해서.”
한솔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 멀리 달려갔다. 황룡현무는 그 광경을 보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우리 사형들이 살아있었다면, 내가 저기 가려고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제가 하겠다고 나섰을 텐데. 지수가 속으로 생각했다.
“저 아이는 누구야?”
“제 침소 사제입니다.”
“...권순영은 어디 가고?”
“다른 황룡들은 습의를 마치고 쉬러 갔습니다. 저 아이는 1년 생원입니다.”
“오호.”
“사형.”
지수가 한솔이 들고 있던 천들을 차례대로 나무에 걸어주며 말했다. 계속 곁에 계실 거면, 누각에 준비해둔 상床 좀 가져와 주시겠습니까? 보통 이러면 한 번은 도와주고 갈 길을 가던데, 그는 대충 얼버무리다가 사라져버렸다. 저런 것도 황룡 사형이라니…. 단전부터 솟아나는 한숨을 내뱉고는 일을 마무리했다.
서낭당 아래에 선 한솔은 빙글빙글 돌아보며 건물들과 예쁘게 연결된 천들을 보았다. 예뻤다. 지수가 띄울 때 사용했던 공중부양을 손가락으로 그려보았다. ...나중에 알려달라고 해야지. 마음을 먹으며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게로 가까이 들려오는 인기척에 뒤를 돌았다. 승철과 정한이었다.
“너 왜 여기 있어?”
“지수 사형을 도왔습니다.”
“어린 호랑이를 고생시키고…. 안 되겠네, 홍지수.”
“궁금해하길래 부른 거야.”
금방 다녀온 지수가 그들의 뒤에서 다과를 정리하며 말했다. 지수는 관례慣例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잘 알았다. 승철이 그릇을 올려두면, 정한이 아니라면서 치우고, 한솔이 다시 그게 맞다며 제자리로 돌려두었다. 그럼 지수가 한숨을 한 번 쉬고 똑바로 정리했다.
하나하나 틀린 것은 없는지, 놓친 것은 또 있는지 찾아본 후에 한솔을 데리고 서당의 입구로 향했다. 외부인이 들어오는 시간이었다. 황룡들과 주변 생원들이 전부 모였다. 한솔도 그 틈새에 끼기 위해 어슬렁어슬렁 들어가다 정한에게 목덜미를 잡혔다. 결국 황룡의 곁에서 직관할 수 있게 됐다. 아무렴 좋은 거지. 한솔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떳떳하게 서 있었다.
크게 숨을 내뱉은 후, 마구를 꺼낸 승철이 개문開門을 그렸다. 주작 문양이 노랗게 빛나며 서당의 문이 열렸다. ...멋있다. 입 밖으로 나온 한솔의 생각을 들은 정한은 귀엽다는 듯 웃었다.
확실히 정한이 사람을 잘 대했다. 나비들과 있을 때는 누구보다 칭얼거리고 눌어붙어도 이렇게 황룡으로서 대외적인 일을 할 때는 다른 사람처럼 남을 잘 대했다. 한솔은 그저 생원일 뿐이었기에, 정한과 지수의 뒤에 착 달라붙어서 종종 따라갔다. 반궁의 사람들을 전부 누각에 데려갔다. 지훈과 원우가 알아서 잘 대접해드리고 있을 테니 걱정할 것은 없었다. 뒤이어 할 일들이 아주 남아있었다. 차근차근 해나가면 문제 될 것이 없다. 때마침, 다음으로 만날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정한은 느긋하게 그와 가까워지도록 발걸음을 옮겼다.
명호가 설렘을 한 아름 안고 다가오고 있었다. 정한은 명호를 통해 현무의 계절임을 알 수 있었다. 온통 검은 옷을 입은 명호는 금방이라도 눈을 몰고 올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평소에는 활짝 열어놓던 섶을 단정히 여미고, 세조대까지 깔끔하게 찬 그가 낯설기도 했다.
“잠은 잘 잤어?”
“네. 사형은요?”
“나도. 사신들은 누각에 계시도록 할 거야. 영조례 기간에는 네가 들어갈 수 있으니까 마음껏 들어가도 되고, 사시巳時부터는 계속 있어야 해.”
손에 황룡이 권한을 잠시 부여한다는 증서를 쥐여주었다.
“네. 지금, 뵈러 가나요?”
“응. 가자. 곧 오실 거야.”
명호는 괜히 긴장되어 심호흡했다. 입구에 다가갈수록 심장이 더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조금 전 승철이 열었던 문을, 이번에는 정한이 열었다. 금강초롱이 빛나며 다시 서당의 문이 갈라졌다. 명호는 순간 제 위치를 잊고 활짝 웃을 뻔했다.
청의 사신 중 제일 앞에 명호의 아버지가 서 있었다. 그가 넉살 좋게 웃어 보였다. 정한은 명호에게 하고픈 말을 하라고 손짓했다.
*청의 언어
“오는 길 고생 많으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성균관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네요.”
“아무래도 마법을 수련하는 공간이라, 유학을 공부하는 반궁과는 뚜렷이 다릅니다.”
“하하, 네. 훨씬 자유롭고 좋아 보이네요!”
사신이 호탕하게 웃었다. 명호의 말이 끝나자, 정한이 나서 제대로 그들을 인솔했다. 정한과 사신 대표가 함께 걷고, 명호가 살짝 뒤를 따라갔다. 그의 뒤로 다른 사신들과 황룡이 따라왔다. 느낌이 묘했다. 처음에 수련생으로 들어올 때만 해도 제가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이렇게 서당의 황룡과 나란히 걸어가며 한몫을 톡톡히 해낼 수 있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누각에 들어서서 의례의 순서를 읊어주고, 쉴 틈도 없이 곧바로 강론이 시작되었다. 강론은 사방신에 맞추어 6년 생원들이 참여했다. 다른 황룡들은 생원들의 질서를 위해 곳곳에 섞여 있었다. 잘하나 어디 한번 보자며, 정한은 대놓고 팔짱을 낀 채로 멀리서 지켜보았다. 지수도 곁에 함께였다.
“최승철은?”
“준휘랑 더 뒤쪽으로 빠졌을걸. 나비들이랑 있을 거야.”
정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식순에 맞추어 진행만 하면 된다. 필요할 때가 되면 알아서 나타날 테니 눈앞에 없다고 초조할 이유도 없었다. 명호가 6년 황룡의 말을 청의 언어로 옮겨주었다. 잘 몰랐으나, 명호가 서로의 말을 매끄럽게 전달해주는 것 같았다. 지수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잘하는데? 하면서, 안도의 웃음을 보였다.
“강론에 대한 내용을 어느 정도 숙지해야 했잖아.”
“6년 생원이 할 내용을 고작 2년 생원이 공부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응. 그래서 원우랑 지훈이가 고생을 좀 했대.”
명호의 주변을 눈 씻고 찾아보아도 6년 생원이 배우는 것을 아는 자는 없었다. 사실, 제대로 알지 못해도 명호가 두 언어에 능통하기에 말을 전달하는 것에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명호는 제가 맡은 일에 대해서는 끝장을 봐야 하는 생원이었다. 같은 침소 사형들은 그를 너무 잘 알았고.
그래서 내린 결론이었다. 같이 공부하면 되지. 어차피 황룡의 일들은 4년 생원들이 대부분 도맡아서 해줄 것이고, 순영과 준휘가 명호를 데리고 무예를 하러 가 있을 때 원우와 지훈이 서적을 끝까지 공부해두었다. 무예를 끝내고 돌아오면 명호에게 가르쳐주는 방식으로 하늘연달 끝 무렵부터 공부해왔다고 했다. 정한이 저 멀리 허공을 보며 허허 웃었다.
“...그걸 공부한 둘도 대단하다. 어떻게 3년밖에 안 된 애들이 그걸 이해하고 가르치지?”
“홍월천에서부터 배워온 것들이 있으니까.”
지수의 말에, 금방 납득이 되었다. 만약 명호가 민규에게 함께 공부하자고 했어도, 민규가 도와줄 수 있었을까? 정한이 되묻자 지수는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쳐다보았다. 민규는 지훈과 원우에 비해 홍월천에서 더 이름을 날렸을 테니까. 눈치가 빠르고 이것저것 빠삭하게 꿰고 있는 생원이 무엇인들 못 할까.
정한과 지수가 이야기했던 대로, 민규는 원우를 통해 6년 생원들의 내용에 대해 듣고 있었다. 원우가 황룡들의 대답에 대한 의견을 내놓으면 민규가 대답을 거들어주었다. 둘의 대화를 곁에서 가만히 듣던 순영은 질색을 했다.
“넌 처음 듣는 거 아니냐?”
“맞아요. 원우 형이 알려주는걸로 처음입니다.”
“...근데 저걸 단번에 이해해?”
믿을 수가 없단 표정으로 순영과 찬이 둘을 쳐다봤다. 원우는 멋쩍은 듯 웃다, 민규의 말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저러니 둘이 어릴 적부터 붙어 다닌 것이겠지. 원우가 몸이 아파 집에 있을 때는 항상 민규가 먼저 수업을 듣고 와서 알려주었다고 했다. 원우는 그때 진 빚을 지금 갚는 중이라 생각했다.
순영은 끝없이 이어지는 강론의 향연에 더 버티지 못하고 찬과 빠져나왔다. 가장 뒷줄에 있는 준휘에게 눈짓으로 무예 터에 갈 것이라고 알려주며 곧장 무예터로 향했다. 준휘도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다, 승철을 정한과 지수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뒤늦게 빠져나왔다.
명호는 종일 쉴 새 없이 바빴다. 아버지와 사적인 대화는 물론이고 이리저리 설명해주고 돌아다니기에 바빴다. 이러다 환복할 시간도 없겠다며 초조해하던 찰나, 다행히도 강론이 끝나고 반 시진 정도 쉬는 시간을 준다기에 곧바로 무예 터로 향했다.
준휘가 활을 쏘면 국궁을 순서대로 쏘아 과녁을 맞히고. 그럼 승철이 박을 터트린다. 동시에 명호를 선두로 무예를 보이면 된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까 정말 별거 없네. 순영이 명호의 어깨를 툭툭 토닥여주었다. 준휘와 순영은 명호의 뒤에 설 예정이었다. 힘이 꽤 들어가는 권법拳法이라, 준휘를 중앙에 세워 힘의 최대치를 끌어내 볼까도 고민하였으나 일찍이 무술을 배워 몸이 가벼운 명호를 중앙에 두고 양옆에서 중심을 받치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반 시진 뒤에 이들의 무예를 본 사신들은 이를 만족스러워했다. 중심에 선 명호가 단단히 틀을 잡아둔 덕에, 순영과 준휘는 명호에게서 뻗어나가는 든든한 가지가 되어주었다. 나비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래서, 다들 무예를 갈망하는구나. 찬의 눈이 반짝였다.
“과연, 조선의 권법은 절도 있고 힘이 넘치는군요.”
잘했대요, 우리. 명호가 대강 알려주었다. 사신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이 서당의 황룡들이, 꽤 준비에 공을 들였나 봅니다. 알려주었던 시간에 딱딱 맞추어 행사가 진행되네요.”
명호의 전달을 들은 승철이 뿌듯한 표정을 애써 숨기며 웃었다. 보통 이런 일들을 하면 조금씩 시간이 밀려 지연되기 마련인데 이곳은 달랐다. 예상보다 조금 일찍 끝난 무예가 아쉽다는 듯 사신이 멋쩍게 웃었다. 살짝 분위기가 가라앉을뻔한 찰나에, 준휘가 예상치도 못한 말을 꺼내었다.
“그럼 수벽타手擘打는 어떻습니까?”
“...뭐야?”
줄곧 앞만 보던 순영과 명호가 화들짝 놀라 준휘를 보았다. 청의 언어를 했다. 모두가 놀라 준휘를 바라봤지만 준휘는 사신만 빤히 바라보았다. 명호가 무술도 한 적이 있으니 준휘가 장단을 맞추어 주면 꽤 괜찮은 그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신의 생각은 달랐다.
“비무比武는, 가능합니까? 검을 사용하는 것도 보고 싶습니다.”
“잠시만요. ...호시. 비무를 보여줄 수 있냐는데.”
순영은 흘긋 사신을 보고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상 한 번의 비무만 하면 적당히 끝날 것 같았다. 무예 수장인 동시에 황룡이기도 하니까, 이 정도 결정할 권한은 갖고 있었다.
“본디 같은 무기를 사용하여 대련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저는 무예 중에서도 국궁을 주로 하고, 이 수장은 월도로 십팔기 검술을 주로 해왔습니다.”
“아! 당신이 수장이군요.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저희 아들이 수장을 동경하기에, 누구인가 궁금했습니다.”
놀란 명호가 입을 틀어막았다. 둘의 대화는 부러 통역해주지 않았다.
웃음을 겨우 가려내고는 간단히 정리해서 읊어주니 무예학도들이 곧장 자리를 정리해주었다. 순영이 만들어낸 기강이었다. 그 사이 순영은 제 월도를, 준휘는 제 활을 꺼내 들었다. 간혹 순영이 생각이 많을 때면 준휘와 겨루던 것인데 이리 모든 생원 앞에서 선보이자니 답지 않게 긴장이 되었다.
나빌레라
立冬, 물과 땅이 얼어굳는다
모든 것을 찢는 호시의 검과 모든 것을 튕기고도 절대 부러지지 않는 준의 활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맞부딪혔다. 둘 다 요란스럽게 기합을 넣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겨루는 내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무기가 거칠게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만 가득했다.
시작할 때, 준휘와 순영은 약 일각만 겨루어보자고 약속했다. 사신들은 백기를 들 때까지 하는 것이 아닌 비무는 또 처음 보는 것이라 했다. 그리 정해둔 이유가 있었다. 준휘는 큰 체격에 온 힘을 담아내서 순영의 월도를 방어하는 것에 집중했고, 순영은 상대적으로 작은 체격을 날쌔게 사용하여 준휘의 활 사이로 공격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다 간간이 활로 순영의 몸을 격타하기도 했으며 찰나에 월도를 반대로 잡아 그의 힘을 전부 쳐내기도 했다. 둘은 한 번도 승패를 가려본 적 없었다.
그만! 일각이 지나자마자 들리는 승철의 외침에, 둘이 밭은 숨을 내쉬며 몸을 그대로 멈추었다. 사신들이 박수를 치며 정적을 깨어냈고 그 틈새로 생원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미친 거 같다…….”
지훈이 탄식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준휘는 제게 새로 생긴 힘을 조절하지 못했다. 인장을 찍는 것 하나도 조절하지 못해서 꽃으로 빼곡히 가득 채웠던 놈이 그새 완벽하게 두 꽃을 다 숨겨냈다. 순영도 마찬가지였다. 지훈은 일반인인 순영에게 위협이 가해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능소화의 기운이 담긴 패를 월도에 달아주었다. 시작할 때 순영은 그 패를 떼어 제 속저고리 안에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 둘 다, 오로지 본인들의 힘만을 쥐어짜며 비무를 한 것이었다.
중앙에 앉아 있던 사신과 반궁의 박사들이 기립박수를 쳐댔다. 숨을 몰아쉬던 순영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었다. 역시 잘하네요. 믿을만합니다. 사신의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눈치껏 좋은 뜻임을 깨닫고 가볍게 허리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무예가 끝나고는 정악을 하는 곳에 들렀다. 무예 터에 비해 한없이 좁은 공간이라, 정악을 하는 생원들과 4년 이상의 황룡들만 모여야 했다. 유독 정악 감상을 좋아했던 준휘와 순영은 바닥을 치며 아쉬워했다.
꼬박 한나절을 의례의 식순에 맞추어 진행했다. 음식까지 대접하고 나니 온통 밖이 어두웠다. 어둠이 일찍 찾아온 탓에, 유시가 되자마자 서당에 떠다니는 등불에 불을 밝혔다. 바람이 너무 차갑게 불었다. 사신들은 생원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4, 5, 6년 황룡들과 마무리를 짓고 돌아가겠다고 했다. 생원들을 침소에 전부 보낸 후에, 어린 황룡들은 한가해진 서당을 거닐었다.
순영은 지훈을 데리고 정악을 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까 못 본 것이 내심 아쉬웠으나 어쩔 수 없었다. 지훈은 어슬렁거리며 정리된 악기들을 대강 점검했다.
“힘드냐?”
“괜찮았는데, 아까 비무를 하고 나니 어깨가 결려.”
둘이 비무를 할 때면 항상 서로를 위해 힘을 반절 내려놓고 했다. 오늘은 시작할 때 순영이 긴장한 탓에 온 힘을 싣고 선공을 취한 것이라 끝까지 온몸에 힘을 주고 겨뤄버렸다. 힘으로는 절대 문준휘를 못 이긴다고 단언했다.
“명호 아버지가 보고 계신 것도 그렇고, 반궁의 사람들도 있는 곳에서 하자니….”
“...장산범 찢던 버릇 어디 가나.”
“야.”
순영이 발끈해서 벌떡 일어났다. 지훈이 픽 웃으며 다시 눕혔다. 가야금이라도 뜯어주랴? 하고 묻는 말에, 순영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고요한 것이 딱 좋았다. 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순영의 옆에 털썩 앉았다. 너도 누우라며 바닥을 팡팡 쳐댔지만,
“누가 들어오면 널 일으킬 사람도 있어야지.”
하며 거절했다.
“...좋네.”
“뭐가.”
“날 일으켜 줄 사람이 있다는 게.”
순영이 해사하게 웃으며 지훈을 올려다보았다. 지훈이 습관적으로 남령초를 불러오려다가, 순영과 눈을 마주하고는 그 손을 거두었다. 순영의 어머니가 어릴 적 남령초를 종종 피웠는데, 혹여나 그 때문에 세상을 일찍 뜬 것인가 싶다고 했다. 제가 말렸다면 하루라도 더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며 자책하던 놈 앞에서 남령초를 피우자니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좋아할 것도 많다. 작게 중얼거리자, 순영은 아무렴 어떠냐는 듯 웃어넘겼다. 평소였으면 멍하니 앉아있었을 지훈이 수백 번 속으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나도, 너랑 평생을 함께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왜?”
“그냥. 너 같은 사람이 딱 좋아.”
어디서든 당당한 사람은, 내 삶에 있어서 네가 처음이거든. 지훈이 바람결에 흩날리는 순영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담백하게 말했다. 말갛게 웃으며 뱉어내는 그 말이 순영의 심장을 콕콕 찔러왔다. 가을즈음에 준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떤 기분이 드냐고 물었을 때 걔가 그랬는데, 그냥 단번에 바로 알 수가 있다고. 이런 기분이구나. 마음이 걷잡을 수도 없이 갑자기 부풀어 커져갔다. 소맷자락이 펄럭이며 그의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능소화 냄새. 기어이 끝까지 피어나는 능소화가 마음 한쪽에 퍼져나갔다. 큰일 났다. 순영이 애써 저 멀리 떠다니는 등불을 응시하며 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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