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로(2)
가을 단풍이 짙어진다.
“달맞이꽃이, 폐화…,”
“안돼!”
“뭐 하는 짓이야!”
지수였다. 굳은 표정으로 준휘의 팔목을 잡은 지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분명, 승철에게 들었는데. 지수가 어제 오후에 서당을 나섰다고.
“갑자기 왜 이래.”
“…….”
준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지수가 달맞이꽃을 흘긋 보았다.
“돌아가거라. 네 죄는 평생 잊지 말고. ...이 일은, 함구하도록 하고.”
“...네.”
“…….”
“...죄송합니다.”
달맞이꽃이 연신 사과하고는 사라졌다. 그제야 멀리서 보던 둘도 슬그머니 나왔다.
“언제 오셨습니까?”
원우의 물음은 들리지도 않는지, 지수가 준휘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너, 그 마법의 무게를 알면 그러면 안 되지.”
“저 생원, 방금 모욕한 꽃이 몇 송이인지 아세요?”
“....그래도. 우리는 그러면 안 돼. 그 마법을 그러라고 준 것이 아닐 거야.”
“…….”
네 명이 가만히 준휘를 봤다. 갈래요. 준휘가 지수의 눈을 피하고는 감투를 썼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그 상황을 함께 봤기에 별말 없이 보내주었다. 한솔은 허전해진 제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승철이한테 준휘 혼내라고 하면, 혼 내줄까?”
셋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지수는 다시 예전처럼 돌아온 것 같았다. 지수는 고작 이런 일로 화를 내지 않는다. 정말 만약에, 준휘가 아까 그 상황에서 지수에게 더 큰 화를 내었어도 별 반응을 하지 않았을 거다. 나중에 내가 가서 물어봐야겠지? 하며 오히려 되묻는 지수에,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덕분에 잘 해결하고 왔어. 이제 영조례 준비하러 가야지.”
곧장 밀린 영조례 준비를 위해 누각에 가겠다는 뜻이었다. 우선은 할 일이 남아있으니, 자세한 것은 후에 천천히 알려주겠다고 했다.
“고생하십시오. 일손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르세요.”
“응. 가볼게.”
순영이도 그곳에 있다는 말에, 지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틀만에 제 사제를 보러 갈 생각에 들떠보였다. 한솔에게는 조심히 들어가 있으라고, 오늘 저녁은 함께 먹자고 약속했다.
그를 보내고 난 후, 한솔이 멀뚱멀뚱 원우와 지훈을 봤다. ...월묘 보러 갈래? 그 질문에, 한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 안 해도 되냐는 말에는 더 거센 끄덕임으로 답을 대신했다.
하늘연달 아흐레
지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각할 때나 들었던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들려왔다. 온통 하얀 방 안을 두리번대니 단정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일어났니.”
“…….”
“머릿속이 나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하군.”
백호였다. 들고 온 소반을 지수의 앞에 내려놓았다. 지수가 덮고 있던 이불을 발로 대강 차냈다. 가을 추위에 노출된 지수가 몸을 움츠렸지만 영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먹어.”
“...찬이는요?”
와중에 막내가 걱정됐다. 그냥 밥이나 먹으라고 하려던 백호는, 그랬다간 지수가 굶겠다 싶어 말을 해주었다.
“황룡관에 있다. 홀로 내려보내기가 그래서.”
“왜 그곳까지….”
“긴히 할 말이 있어 따로 내보냈다. 얼른 먹어.”
먹으라고 한 후에 다시 방을 나섰다. 마치 지수가 일어나길 기다린 것처럼 행동했다. 한나절 내리 자고 일어나니 배가 고프긴 했다. 소반에 올라온 것들을 절반 정도 먹고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습관적으로 상을 정리하기 위해 일어섰으나, 앉으라는 목소리와 함께 백호가 다시 들어왔다. 손을 살짝 까딱하니 잔반들이 죄다 사라졌다. 이번에는 책을 두어 권 들고 온 참이었다. 익숙한 표지에 지수의 몸이 굳었다.
“이건 네 어미에 대한 서책이지.”
소반 위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서책을 열어보았다. 당연히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이것은 꽃무릇 전가의 현무 수장 서책이고.”
“…….”
“그리고, 그와 함께 그 세대를 누렸던 십이지신 뱀의 신장의 것이다.”
여태 본 서책들은 죄다 정한이 보여주었던 것과 똑같았다. 온통 비어있었다.
“...왜 다 비어있습니까?”
“우리가 없앴으니까.”
백호를 올려다보는 지수의 동공이 흔들렸다. 제 가족의 것과, 원우의 양친 기록을 보여준 것이 탐탁지 않았다. 백호는 넌 걱정이 너무 많아 큰일이라며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여태 함께했던 것들의 기록은 오방신의 업무실에 각자 배분되었고, 외의 모든 책방에 있던 서책 기록을 지웠어. 현재 임기가 끝나지 않은 이들은 마치는 즉시 서책의 기록을 빼낼 것이다.”
곧 기록이 지워질 현재 임기가 끝나지 않은 수하들. 이번에는 승관이 떠올랐다.
“왜요?”
“너희를 마지막으로 오방신의 수하는 더 이상 태어나지 않아. 한 권으로 끝났던 네 이전 세대들과 달리 수십 권을 무한정 써 내려갈 너희와 구분 짓기 위해. 또, 오방신의 측근이 아니고서는 열람할 수 없게 하려고.”
“…….”
“우리가 경솔했다. 당사자들 모두와 이야기가 끝이 났는데, 너희를 미처 자각하지 못했다.”
“그럼... 엄마는 어디 있나요.”
이런 일이 있으면 전해 들었어야 했다. 분명 얼마 전 제주에 갔을 때, 정한이 승관을 데리고 어머니를 뵙고 왔다고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원우가 홍월천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현무 영수를 뵈었다고 했는데, 그때도 똑같았다.
영수는 창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주렴을 걷어내고 창을 활짝 열었다. 서편에 있는 백호관에 노을이 스며들었다.
“일어나서 와보아라.”
“…?”
“여기 있다.”
백호관 중정이 보였다. 단풍 때문에 온통 붉은 빛이었으나 지수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중정에서도 가장 가운데에, 계절을 무시하고 만개한 동백나무가 있었다. 지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엄마가 왜 저기에…….”
“저 상태로 있으면, 네가 올라오고 나서 평생 곁에서 함께할 수 있으니까. ...자기가 하겠다고 했다.”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동백이고, 신의 기운을 나누어 받았으니 가능하지. 오래 살면 저리할 수 있다. 본디 타고난 것이 동백이니까. 너도 이제 다 컸고, 지호도 이승에서 제 할 일을 다 끝냈다며 올라온 것이야.”
“...그런데 왜 제게는 말을 안 해주셨습니까.”
“지금 한창 영조례를 준비할 시기니, 끝나면 알려주려 했다. 목문을 막아둔 것은 후를 대비하여 잠시 닫아둔 것이다. 겨울이 오고, 대설이 되면 다시 열려고 했지. 그때 너와 함께 올라올 아이들이 많아서,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두 명이 올라오도록 열어두었던 문에 일곱 명이 들어오게 하는 것에는 여러 마법이 필요하니까.”
“…….”
“...미안하다. 다시는 동백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리라 약속했는데, 또 이리 번거롭고 고된 나날을 보내게 해버렸구나.”
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모든 의문이 풀리고 걱정이 사라졌으니 뭐든 괜찮았다.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림과 동시에, 하얗던 머리와 파랗던 눈이 까맣게 변했다. 백호는 위로하는 법을 몰라 그저 어깨만 툭툭 토닥여줄 뿐이었다.
약간의 정적 후에, 지수가 다시 물었다.
“일곱 명은 누구입니까?”
“눈이 가장 많이 내릴 시기에 서찰을 보낼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라.”
“......네.”
물음이 단칼에 거절당했다. 노을마저 걷어낸 해가 산 너머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찬이 생각났다. 황룡관에 가봐야 하는데…. 혼잣말로 읊조리자 백호가 가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정도는 더 묵었다 가도 된다는 말에,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일단, 찬이한테 가기 전에 저 나무 좀….”
“보고 가라.”
“네. ...감사합니다.”
나빌레라
寒露(二), 찬 이슬이 맺히고 가을 단풍이 짙어진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단풍과 은행잎을 딛고 나아간 곳에 동백이 있었다. 다른 동백에 비해 몸통과 가지가 굵었다. 지수는 큰 손으로 가지를 약하게 쥐었다.
“...엄마. 왜...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이렇게 왔어요? ...내가 너무 바빠서 그랬나?”
시든 부분 하나 없이 건강하게 피어있는 동백꽃 줄기를 잡고 살짝씩 꼬았다 풀기를 반복했다.
“얼마 전에 사제한테 옛날이야기를 들었어요. ...서당에서 바삐 지내다 일 년 만에 집에 갔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요. 그러고 나서 엄마가 사라진 걸 알았는데…….”
주저앉아서 뿌리를 내린 땅을 어루만졌다.
“나랑 엄마도 그렇게 될까 싶어 너무 무서웠어요. 날 버릴 리는 없는데, 그래도, 혹시 몰라서 다급하게 올라왔어요. 서당의 황룡인데, 누구보다 중심을 잘 잡고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직은 혼자가 무서워서 그런가 봐요.”
나무에 등을 대고 기대어 앉았다. 발끝에 동백 한 송이가 떨어졌다. 지수는 그걸 움켜쥐었다. 붉은빛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와 홍옥 노리개로 스며들었다.
떨어진 동백에는 그의 비호庇護가 담겨 있었다. 웬만한 마법은 동백의 힘을 전부 담을 그릇이 되지 못해서 으스러지지만, 지수가 만든 노리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나비들의 힘이 골고루 담긴 노리개를 응시하던 지수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생 많았어요. 함박눈이 내릴 때 다시 보러 올게요. ...아마, 오방신이 나랑 평생을 함께할 아이들을 데리고 올라오라고 부를 것 같아요. 그때는 승철이랑 같이 올게요.”
나무에서 살짝 멀어진 후에, 절을 올렸다. 괜히 뒤를 돌아보면 미련이 생길까 싶어, 일어서자마자 중앙으로 향했다.
“찬아.”
“사형!”
찬은 황룡관 가장 구석에 있었다. 지수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호다닥 달려 나와서 그에게 안겼다. 확실히 한솔과 성격이 달랐다. 왜 간혹 정한이 침소에 돌아갈 때 애기들 보러 가야 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가슴팍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반짝 들어서 눈을 마주쳤다.
“괜찮으십니까?”
“응. 이제 괜찮아. 넌, 괜찮아?”
“네. 영수께서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뭐 하고 있었어?”
저 멀리 찬이 있던 공간을 보며 물었다. 무언가 많이 쌓여있긴 한데…. 서책인가? 싶었다.
“아! 가을 시험 준비요. 영수께서 편의를 많이 봐주셨습니다. 조금 전에 사형이 일어났단 소식을 조금 전에 들어서 마침 돌아갈까 싶어 정리하던 참이었어요.”
“...내일 내려가자. 급한 거 없으니까…”
“정말요?”
“응. 책방도 다녀오자. 엊그제 갔던 곳.”
“좋습니다!”
지수는 돌아가기 전까지 찬과 함께 있기로 했다. 들고 온 짐도 없었기에 몸만 황룡관으로 옮기면 됐다. 내일까지 이곳에서 지내다가, 책방에 들른 후에 해태를 타고 내려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종종걸음으로 다시 방 안에 들어가려는 찬의 뒷모습을 보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나 자는 동안, 영수들께서 네게 뭐라 말씀하신 것이 있어? 찬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샐쭉 웃어 보였다.
하늘연달 여드레
찬의 앞에는 영수 다섯이 앉아있다. 괜히 긴장이 되고 손에 땀이 났다. 얼른 지수가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수천 번 외치고 있을 때, 현무가 입을 열었다.
“하늘에는 어떻게 올라왔는가.”
“서당 내 황룡께서 해태를 타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서당 황룡이 누구며, 어떻게 알았는지 아는가.”
찬이 흘긋 눈치를 보다 답했다.
“...황룡주작 최승철 사형이고, 상제의 서찰을 처리해준 후 해태를 타고 차원을 이동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홍지수를 따라온 이유는 무엇인가.”
“황룡의 안위를 위해 서당에서는 무예학도를 꼭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현재 무예학도 대부분이 영조례 준비로 바빠서, 함께 수련은 했으나 정식 무예생이 아닌 제가 대신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말하는 찬이 꽤 마음에 들었다. 가운데에 앉아 있던 황룡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고는 질문을 이어갔다.
“일반인으로서 이곳에 와서 마법을 배우니 어떠하냐.”
“…좋습니다.”
“안 힘들어?”
“힘듭니다. 그래도… 함께 하는 친우가 있고 도와주는 사형들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곁에서 턱을 괴고 보던 백호가 찬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황룡이 되고 싶은것인가?”
“...네.”
“왜 서당 황룡이 되려고 하는 것이지?”
“서당에 저 같은 일반인은 현재 넷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더 많은 일반인이 들어오면 저도 똑같이 도와주고 싶어서요.”
“큰 나무가 곁에 두 그루가 있어서 그런가…. 엇나가지 않고 올곧게 잘 자랐구나.”
정한과 민규를 뜻하는 것이었다.
“...주제 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나무는 홀로 자랄 수 없습니다. 흙에 뿌리를 내려야 서 있을 수 있고, 만물의 도움을 받아야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1년도 채 되지 않았으나, 저는 그 덕에 이렇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황룡이 되고 싶...습니다.”
찬은 구어체와 문어체를 구분할 정도로 많은 어른을 뵙지 못했다. 게다가 실제로 영수들을 눈 앞에서 보고 있자니 떨려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정한과 민규가 사용하던 어투를 기억해내어 쓰려고 애를 썼다. 영생을 산 영수들은 그가 귀여워 미칠 지경이었으나 끝내 티를 내지 않았다.
황룡이 일어나서 찬에게로 다가왔다. 책상을 톡톡, 치며 일어나라 손짓했다. 얌전히 일어서서 앞의 사방신에게 인사를 하고 그를 따라나섰다. 백호도 조용히 두 용의 뒤를 따라갔다.
“손을 뻗어.”
“...이렇게 말입니까?”
“응. 꽃을 향해 뻗어.”
“네. 했습니다.”
찬이 황룡의 자세를 따라 했다. 황룡은 가만히 찬의 자세를 바로잡아주었다. 화단에 다 죽어가는 꽃이 온통 짓눌려 있었다.
“따라 말해보거라.”
“네?”
“이 꽃을, 만개하리라.”
“……!”
화신이 만든 마법 중 대표적인 것이 나빌레라이다. 이를 만들고, 알리고, 거두었다. 현재 조선에 유일한 소원 마법이자, 무적 마법이다. 나빌레라를 이용해서 빌면 대가 없이 무조건 이루어지는 꽤 위험한 마법이다.
……
현재 그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은 조선에 세 명 있다. 첫째로는 구삼승할망의 아들이고, 둘째로는 화신의 아들이며, 셋째로는 황룡의 수호를 받을 수장이다. …….
“왜 그리 망설이느냐.”
눈치가 빨라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입을 달싹이길 반복했다. 황룡이 괜찮다고 재차 말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이 꽃을.. 만개하리라.”
예상했던 대로 꽃이 활짝 피어났다. 익숙한 꽃의 잎들이 예쁘게 펼쳐졌다.
“제가 피운 것입니까?”
“그럼 누가 피웠겠느냐.”
“이거, 승관이가 보여준 마법인데….”
고유의 꽃을 가진 마반인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찬의 순수한 질문에, 황룡이 살풋 웃었다.
“나빌레라가 있으면 네가 누구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예?”
“금강초롱과 모란은 가을에 피고, 수선화는 봄에 피어나지. 이 세 송이를 네게 피워내라 한 이유가 그것이다.”
“어린 놈한테 너무 많은 것을 알려준다.”
백호가 둘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나는 지수에게도 이만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는데 말이야.”
백호가 남령초를 꺼냈다. 찬이 곧바로 마구를 꺼내 들었다. 순영과 그가 겹쳐 보였다. 따로 말을 하지는 않았다.
“나빌레라를 어찌 쓸 생각이냐?”
“...쓸 생각 없습니다.”
“근데 가족은 왜 떠올려?”
“앗.”
“농사짓고 있는, 사월촌에 네 가족.”
백호는 독심술을 갖고 있다. 과제를 정리하며 외워둔 것이었다. 저거 재수 없지. 황룡의 말에 찬은 아니라는 듯 양손을 휘적여가며 부정했다.
“...가족,에게 제 기억을 지우려고 했습니다.”
“...왜.”
“그게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가족들은 마법을 이해하지 못할 테고, 저는 이 마법을 갖고 평생을 살아야 할 운명을 타고났으니까요.”
“인간들은 참 알 수가 없네……. 권순영이랑 똑같은 소리, 똑같은 행동을 하는구나.”
“...이렇게 하면, 안됩니까?”
아무리 무적이더라도 생명을 건드리면 안되는 것입니까? 눈치를 살피는 찬의 말투에, 황룡은 찬의 머리통 위에 손을 얹었다.
“네 마음대로 해라.”
“예...?”
“옳은 행동이라 생각하는 것 아니냐.”
백호는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황룡은 달랐다. 인간은 좀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고 중얼거리는 백호를 무시한 황룡이 찬의 귀를 잠깐 막았다가 떼어주었다. 의문으로 가득한 찬을 보고 인자한 표정을 보았다.
“대개 황룡의 판단은 옳은 것이니, 믿고 나아가라고.”
아 짜증 나. 보다 못한 백호가 질색하며 자리를 떴다. 지수나 순영처럼 놀리는 재미가 있을 줄 알았는데, 온통 순박한 것이 모든 것에 거짓이 묻어나질 않아서 즐겁지 않았다. 황룡은 그런 찬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도 이제 들어갈까. 어린 수장아. 은은한 미소를 짓는 황룡에게, 찬은 활짝 웃어주었다.
제가 황룡이 된대요. 찬의 말에 지수가 계단을 오르던 발을 멈추었다. ...진짜로? 네. 진짜로. 지수가 더 묻기 전에 찬이 확답을 내주었다.
“나빌레라를 쓸 수 있습니다.”
“현재 쓸 수 있는 인간은 셋뿐이라고 알고 있는데.”
올라오기 전 정한이 규장각 지하에서 가져온 서책을 잠시 봤기에 알고 있었다.
“...그럼 네가, 수장이겠구나.”
“네. 황룡 영수께서 나빌레라를 쓰는 법을 알려주셨어요.”
“마음이 어때?”
“무겁습니다. 이 마법의 무게가, 너무 커요.”
솔직한 대답이었다.
“어린아이가 짊어지기에는 버거울 만도 하지.”
“사형 저랑 다섯 해도 차이 나지 않습니다.”
찬의 투정 어린 말에, 지수는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 마법을 남용할 아이도 아니고, 누구보다 힘과 권력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아 더 말을 얹지도 않았다.
괜히 마음이 벅차서, 별이 수를 놓은 밤하늘을 한 번 보았다. 그 전까지 들었던 소식보다 몇 배로 심장이 두근댔다. 결국 운명이 이리 되는구나.
사형! 안 오십니까? 그새 멀리갔는지 작아진 소리가 황룡관에 미약하게 울렸다. 그 말을 들은 지수가 다급히 어린 용을 따라 들어갔다.
하늘연달 열흘
모든것이 정리가 되고, 지수가 주작 침소로 갔다. 서당 황룡의 권한으로 주작 침소의 문을 열었다. 셋 다 누워서 시시덕거리고 있길래, 승철에게 나오라고 손가락을 까딱했다. 준휘가 일어나려는 것을 저지시켰다.
날이 추운데도 서당을 산책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자연스레 빙빙 돌아다니는 산책 행렬에 끼어들었다. 승철이 유독 신경을 써준 나비였기에 가장 먼저 말해주기 위해 부른 것이었다.
“……준휘가 그랬다고?”
“응. 그래서 막았는데 그냥 가버리더라.”
나빌레라와 관련된 모든 일을 들은 승철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늦었다며, 주작 침소에서 나가는 승철에게 준휘가 그의 누비옷을 덮어주었다. 살짝 긴 소매를 꽈악 쥐면서 더 물어보았다.
“그래서 아까 준휘가 그렇게 어정쩡하게 일어났구나. ...혼, 냈어?”
“...내가 어떻게 그래. 전후 사정을 몰라도 준휘가 잘못했을 리가 없지. 그리고, 옆에 한솔이가 있어서 넘어갔어.”
“으응…. 그래도 내가 가서 물어보고 혼내줄게.”
지수가 승철을 흘긋 보고는 픽 웃었다.
“네가 퍽이나 그러겠다. 이젠 별로 놀라지도 않는구나? 그 마법을 썼다고 했는데.”
“이런 일은 이제 익숙하지. …처음에는 당황하긴 했는데, 이 정도는 쉽게 납득하지.”
이 말은 그만하고, 이제 네 일은 다 해결됐어? 승철이 묻자 지수의 입꼬리가 예쁘게 말려 올라갔다.
“엄청난 걸 듣고 보고 왔지.”
“오호.”
“해태도 잘 돌려놓고 왔고.”
“고생했어.”
”네 덕이지. ...그런데, 동백 이야기는 영조례가 끝나고 말해줄게.”
엥, 왜?! 승철이 우뚝 멈추어 섰다가, 뒤에 걸어오는 생원들을 생각해서 다시 지수와 속도를 맞추었다.
“바쁘잖아.”
“야, 너 없을 때도 정한이랑 얼추 다 했거든!”
“그러니까 다 끝나고 말해줄게.”
“약속해.”
새끼손가락을 내어오는 승철이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중얼거리는 지수의 팔목을 잡은 승철이 강제로 약속을 받아내었다.
지수는 예쁘게 웃으면서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을 보면서, 승철은 정말 지수가 완전히 고민을 풀고 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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