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추석(1)

모두의 조화를 추구하며 균형을 이루도록

서당 by 반야

열매달 아흐레

“곧 추석이라 제주에 갈 생각에 들떠 있는데, 공부하려 하니 꽤 집중이 안 되는가?”

“…….”

“이른 아침에 들으려니, 꽤 버거울 만도 하지.”

멍하니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던 석민이 움찔하며 박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뒤에 앉은 민규와 명호도 저와 다를 것 없이 지루함을 느끼던 중이었다. 박사는 펼쳐두었던 두꺼운 서책을 턱 소리가 나게 덮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민과 눈을 마주치며 빙긋 웃었다.

“자네조차도 집중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누가 되겠는가?”

“엇, 아…. 죄송합니다.”

“슬슬 재미난 이야기를 해보지. 자네들, 제주 서당에 가는 것은 처음인가? 가는 길에 거쳐야 할 환각의 숲도 처음 가볼 것이고.”

모종의 사건 때문에 현재 2년 생원들도 제주에 가본 적이 없었다. 환각의 숲 이야기가 나오자 생원들이 술렁거렸다.

“걱정 말게. 환각술 수업과 유사한 것이니까. 이미 수업을 다 들었지 않나.”

민규가 슬쩍 몸을 기울여 명호에게 속삭였다.

“명호야. 환각술이래. 네 전공이다.”

“무슨... 그냥 좀 하는 거지. 너희도 다 할 수 있잖아.”

확실히 명호는 환각술에 뛰어났다. 환각 마법을 이용하여 웬만한 나비들의 기술을 재연해낼 수 있었다. 정한이 단오제 때 사용했던 구슬, 준휘의 불화살, 민규의 도깨비 불, 석민의 주작 불, 그 외에도 모든 것을 전부 사용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생원이 불을 피우고 꽃을 피워내는 것만으로도 힘겨워했던 수업이었기에 명호는 일부러 숨기고 꽃밭에서 민규와 석민에게만 보여주었다. 환각술은 수업 도중 개인의 외상을 꺼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기에 성적을 산출하지 않아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환각술은 자네들이 만들어서 이용할 수 있는 도술이지만, 환각의 숲은 반대라고 생각하면 된다네. 현존하는 온갖 환상의 요괴가 요동치지. 그 속에서는 폭우가 내리기도, 눈이 내리기도 하고.”

“자연은 둘째치고.. 요괴가 달려들면 어떡합니까?”

“요괴가 달려들어도 환각이기에 실제로 해를 입을 수는 없어. 그래도 어린 생원들은 간혹 몸을 버둥대다 홀로 다치기도 하더군. 사제가 있는 생원들은 사형으로서 그들을 지켜주면 될 거야.”

누구랑 가냐는 듯 석민의 책상을 툭, 쳤다. 4년 생원 둘과 3년 생원, 1년 생원과 간다고 하니 슬그머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를 믿게 만드는 것. 고작 1년 차이더라도 1년 생원과 2년 생원은 확실히 달라. 아직 온전히 사형들에게 마음을 맡기지 못하지. 고작 몇 달 같이 먹고 자고 지냈다고 어떻게 믿겠는가.”

그렇지? 박사가 웃으며 석민을 보았다. 항상 제일 앞자리에 앉아 열정적으로 듣는 생원을 싫어할 박사는 없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유독 그를 아끼는 박사임을 알기에 석민도 거세게 동의를 해주었다. 그의 반응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오늘은 일찍이 강연을 마치겠다며 명륜당을 나서주었다. 그가 생원들을 지나쳐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뒤에 앉아있던 명호가 석민에게 와락 안겼다. 너밖에 없다면서. 격하게 감동받은 듯 뒷통수를 쓰다듬어주었다. 박사의 서책과 지필묵을 정리해서 그의 방에 가져다 두어야 했다. 석민이 주섬주섬 주으며 민규와 명호에게 꽃밭에 갈 것이냐고 입모양으로 물어보았다.

“모르겠다. 아마 순영 사형이 부를 것 같은데.”

“아무래도 곧 제주로 내려가니까. 우리 둘이 가 있을 테니까, 일찍 마치면 와.”

명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명륜당을 나섰다. 민규는 석민의 짐을 조금 덜어주고는 한쪽 팔로 어깨동무를 했다.

“슬슬 놀러 갈 준비를 해볼까, 황룡주작아.”

열매달 열흘 해시

진시부터 맞춰놓은 순서에 따라 생원들이 조를 이루어 서당을 빠져나가야 했다. 승철이 있는 무리는 진시에 일찍이 나가고 정한 순영이 있는 나비들은 사시에 뒤따라 나가는 것으로 정해졌다.

전날부터 미리 싸둔 승철의 짐을 준휘가 들고 있다가 건네주었다. 단상 위에서 내려와 품에 안은 승철이 민규를 찾았다. 당연하게도, 민규의 곁에는 원우와 한솔이 있었다. 역시나 믿을만한 인물이었다. 알아서 때를 맞추어 착실히 움직이는 민규가 꽤 마음에 들었다. 먼저 가보겠다며 준휘의 볼에 입을 맞춘 승철이 발걸음을 떼려다 허리께가 붙잡혀 다시 품속에 안겼다. 승철은 잠자코 그 품에 안겼다. 간혹 지금처럼 답지 않게 어리광을 부릴 때가 있다.

“조심히 가요.”

“응…. 같이 가고 싶었는데, 진짜로.”

“나도. 그래도 어쩔 수 없죠, 뭐.”

“어차피 너희 우리랑 같이 출발할 거잖아. 누가 보면 완전히 따로 가는 줄 알겠다.”

승철에게 얼른 가보라며 둘을 떼어놓은 정한이 짓궂은 표정으로 웃었다.

두 시진 정도 차이 나는 생원들은 각자 나룻배 앞에서 기다렸다가 함께 출발하기도 했다. 승철도 그렇게 해서 정한과 순영의 조와 함께 가려고 했고. 준휘와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제 마음을 정한이 모를 리가 없었다. 밉다는 듯 흘겨보고는 정한의 가슴팍을 퍽 치고 민규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준휘가 정한의 어깨에 턱, 손을 올렸다.

“...왜?”

“짖궃어요. 사형.”

“흐흥, 아알겠어. 이제 안 할게.”

정한의 약속에도 준휘는 입술을 삐죽였다.

곧바로 서당 문에서 나와 마반촌으로 향했다. 가는 데 이레 정도 걸리기 때문에 마반촌에서 먹을 것들을 잔뜩 사고 이불도 한두 개 사야 했다. 민규가 허공에 도깨비불을 피울 수 있으니 조리도 할 수 있다면서 신나게 장을 봤다. 야무지게 양손에 짐을 들고 환각의 숲 앞에 섰다. 안개가 낀 것처럼 안이 보이질 않았다. 정말. 아득했다.

“솔아. 무조건, 나랑 원우 등만 보고 걸어.”

“......네.”

“누가 말을 걸어도, 네 앞을 막으려 해도 그냥 무시하고 따라와.”

한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철과 원우가 앞장 서 들어가고, 곧바로 한솔과 민규가 따라들어갔다. 산 정상에서 아래로 추락하는 저를 살리기 위해 몸을 내던져 구해준 사형인데 한솔이 그들을 못믿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 아득한 숲속에 들어가는 것은 무서워서, 승철이 방금 전 한 말을 계속 되새기면서 민규의 팔을 꽉 잡았다.

숲속에는 숯을 바른 듯 검은 형체가 강아지 소리를 내며 뛰어다녔다. 여러 마리가 뛰는 것처럼 소리가 겹쳐 꽤나 소란스러웠다. 저 꺼먹살이들 전부 환상이라는 민규의 말을 들으면서도 진짜같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것들을 유심히 살펴보려던 찰나, 꺼먹살이 하나가 한솔에게로 달려들었다.

“...!” 

바로 앞에 있던 원우가 마구를 꺼내어 막아줄 새도 없었다. 놀란 사형들의 틈새를 비집고 굳건히 서 있던 한솔이 금낭화 방패를 만들어 펼쳤다. 얼떨떨한 표정의 한솔에, 셋은 놀란 듯했다.

“뭐.. 어떻게 한 거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잘했어. 일단 나가자.”

아무 일 없이 잘 막아냈으니까. 승철이 두근거리는 제 심장을 손으로 짚어보며 말했다. 이제 끝무렵이니 곧 빠져나갈 수 있다며 다시 걸어가려던 찰나 한솔이 다시 민규의 팔뚝을 잡았다.

“...이거, 만드는 법은 배웠는데.. 없애는 법을 모릅니다.”

까만 먹이 덕지덕지 묻은 방패를 어정쩡하게 펼쳐들고 있는 한솔을 보며 픽 웃은 민규가 귀엽다는 듯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는 그 위로 모란을 피워 잠식시킨 후에 방패를 없앴다. 사라진 방패 때문에 먹이 흙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것을 본 후에야 다시 빠져나가는 길로 향할 수 있었다.

“근데, 어디서 배운 거야? 너는 아직 못 배우는데.”

“지수 사형이 처서쯤에 알려주셨습니다. 방패 펼치는 거 알려주시고 나서 찬이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거두는 법은 못 들었어요. 그때도 승관이가 없애주었습니다.”

“어쩐지…. 보고서 보니까 뭔 되도 않는 역사 알려줬다고 적어놨더라. 선행을 해서 그런 거였네.”

사부작사부작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이후로는 더 요괴가 나오지 않았다. 오래 걸리지 않고 무사히 환각의 숲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가장 고요하고, 무난했다. 승철은 본인의 이름이 적힌 나룻배를 찾은 후 그 위에 짐을 전부 실어두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셋은 물가에서 신을 벗고 찰박이며 놀고 있었다.

“애들도 지금쯤 숲에 들어왔겠다.”

“한, 반 시진 정도 걸리려나?”

“으음…. 그렇겠다. 우리가 삼각 정도 걸렸으니.”

많이 젖지 않게 몸 좀 사리라는 승철의 말에도 대강 대답하고 물을 튀겼다. 검은 먹이 한솔의 옷소매와 원우의 어깨 부분에 조금씩 튀어 있다는 걸 발견한 민규가 둘의 겉옷을 벗겨내어 먹을 없애기 시작했다.

승철에게 이리 와서 같이 놀자는 말에, 힐긋 숲속을 보더니 작은 발로 민규에게 다가갔다.

“애들…. 괜찮겠지?”

“다들 조심해서 오겠죠. 제 앞가림, 워낙 잘하는 나비들인데요, 뭐.”

“…….”

“백호들이 유독 그러니까요. 지수 사형이랑 순영 사형이 잘 데려갈 겁니다. 믿을만한, 유일한 육지 동물이니까요.”

앞서 들어왔던 승철의 무리처럼 서당에서 나와 반촌을 들렀다. 그 후 바로 시간을 맞춰 숲으로 들어온 넷은 순영의 말을 따랐다. 딱히 정해두고 들어간 것은 아니었으나 은연중에 나오는 수장의 모습에 이들이 저절로 마음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나선 승철의 무리와 달리 뒤늦게 출발한 지금은 다른 생원들도 많았다. 준휘가 슬쩍 뒤를 돌아 뒤따라 걸어오는 생원들을 보았다. 줄줄이 들어오는 생원들 중 뒷쪽에 있는 정한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해주었다. 앞을 보려던 찰나, 하얗고 긴 털이준휘의 시야를 가렸다.

퍽 소리와 함께 뒤로 밀쳐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등에 메고 있던 활이 먼저 바닥에 부딪힌 덕에 팔로 땅을 짚을 수 있어 크게 아프진 않았다.

“어?”

장산범이 나타났다.

활을 차고 있던 문준휘는 장거리 공격이 뛰어났고 무술을 배워온 서명호는 단거리 공격에 뛰어났다. 권순영은, 둘 다 괜찮게 할 수 있었다. 명호가 먼저 막으려고 했으나 순영의 반응이 더 빨랐다. 준휘가 본 하얗고 긴 털은, 순영의 머리털이었다. 백발에 금안이 된 순영이 장산범을 잡아 찢어버렸다.

환각으로 만들어진 요괴는 인간에게 직접적인 해를 입힐 수 없으며, 정신이 건강한 인간일수록 맥을 추지 못했다. 찢어질수록 재가 되어 사라져가는 장산범을 보며 명호가 뒷걸음질 쳤다. 인외의 존재와 신의 존재를 모시고 여기는 한양 서당의 생원이라 해도 순식간에 벌어 난 일에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금세 일어난 준휘가 뒤에서 제게로 뒷걸음질치며 오는 그를 받쳐주었다. 팔을 잡아주자 명호가 휙 고개를 돌려 준휘와 눈을 마주쳤다.

“……명호야 좆된 것 같다.”

“사형이 그런 구린 말도 쓸 줄 아시는 분인지 몰랐네요.”

어떡하죠? 명호의 물음에 돌아오는 건 다른 생원들이 지르는 소리들 뿐이었다.

산산조각이 난 채로 사라져가는 장산범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순영이 준휘의 손이 닿자마자 정신을 차린 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 모습을 거두었다. 순영의 시야가 뿌옇게 흐렸다.

“아무리 힘이 좋아도 그렇지.. 장산범을 뜯네. 승철 사형도 그건 못했다 했는데.”

“...야, 준휘야.”

여전히 축 처진 채로 준휘의 몸에 제 몸을 기대고 있었다. 준휘도 불편한 기색하나 없이 단단히 잡아주었다.

“응. 호시야.”

“나 제대로 사고 친 것 같은데.”

...어떡하냐? 순영이 고개를 들어 준휘를 바라보았다.

“글쎄, 왜 다들 나한테 묻지? 내가 황룡인가?”

“아….”

“잘했어. 백호답고 좋았어.”

호랑이를 마주친 백호가 제 청룡을 지키겠다고 달려든 거, 꽤 멋있거든. 순영을 제대로 설 수 있게 도와주고 손과 옷에 묻은 흙들을 털어주었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제 친우의 당혹스러운 표정에, 준휘는 그저 말없이 웃어 보였다.

뒤에서 익숙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정한과 명호가 찬을 살피는 듯했다. 달려온 듯 숨이 찬 정한의 목소리를 들으며, 안심하라는 듯 순영을 안고 토닥여주었다.

“갈 길이 멀어. 휘청거리지 말자.”

순영만 들을 정도로 낮고 작게 속삭여주고는 금세 몸을 떼어냈다. 뒤이어 다가오는 지수와 지훈에게 괜찮으니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숨을 몰아쉬며 제 상태를 확인하는 지수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꽤 놀란 듯했다. 제가 미치도록 아끼는 호랑이가 장산범을 때려잡았다는 것에 첫번째로 놀랐고, 백발의 금안이라는 무방비한 상태로 해냈다는 것에 두번째로 놀랐다. 순영이 달려들자마자 지훈이 다급히 연막을 만들어 다른 생원들의 시야를 방해하긴 했으나 가까이에 있던 생원은 죄다 볼 수 있었기에 난리가 난 것이었다. 소문이 날 것이 뻔했으나 지금은 그걸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큰 사고를 쳤다는 생각에 멍하니 있는 순영과, 그런 순영을 만든 원인이 본인이라는 생각에 휩싸인 찬을 다독였다. 어깨를 토닥이며 괜찮으니 일단 나가자는 정한의 말조차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어나오는 아홉의 표정은 꽤 묘했다. 나룻배에 탄 상태로 무슨 일 있었냐는 승철의 물음에도 정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대로 제주에 가면 순영이 타는 배는 침울함만 싣고 제주에 도착할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곧이어 따라나오는 생원들이 꽤 많아졌다. 더 정신이 없어지기 전에 우선 가보라며 승철이 탄 배를 출발시켰다. 왜 그러냐는 말에도 그저 웃으며 배웅해주기만 했다.

“준아. 나눠서 타자. 세 개로.”

“...좋아요.”

준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순영과 석민을 제 배에 태웠다. 그새 명호는 지훈과 승관을 데리고 두 조의 짐을 세 개로 나누었다. 정한이 남은 나룻배를 끌어왔고, 지수가 찬을 그 배에 집어넣었다.

얼추 눈치껏 정리된 후, 곧바로 출발시켰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출발시켜 순영과 찬이 서로를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라지는 나룻배 두 척을 본 후, 그제야 지수가 나룻배에 몸을 담았다.

“우리도 슬슬 출발해볼까?”

“...네.”

“걱정이 많네, 찬이.”

머릿속이 꽤나 어지러웠다. 찬은 자꾸 자신 때문에 사형들이 안좋은 일에 휘말리는 것 같다고 계속 미안해했다.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는 나룻배가 안정감있게 속도를 내었다. 절대 휘청거리지 않음에도 살짝 겁이 나는지, 찬은 배를 꽉 잡고 있었다.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주어 잡고 있는 찬의 한 손을 잡아떼내어 맞잡아준 지수가 싱긋 웃었다. 이럴 때는 남의 생각을 읽는 것이 참 도움이 된다.

“겁내지 마. 불안해 하지도 말고.”

“...어떻게 그래요…. 나 때문에 많은 생원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는데.”

“순영이는 잘못한 게 없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찬이 푹 숙인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탓 같았다. 오직 저를 위해주는 사형이 셋이나 함께 있었는데, 그들을 믿지 저 때문에 환각 요괴가 나온것이라는 생각 뿐이었다.

“이런 일을 봐주고 도와주기 위해 함께하는 거잖아. 후에 네가 누군가의 사형이 되면, 네게도 이런 일어나게 되면, 그때 너도 똑같이 할걸?”

“순영이가 백호의 상태가 된 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긴 했지. 근데, 문제가 될만한 행동은 아니니까 걱정 마.”

“찬, 너도 나 따라서 황룡이 되고 싶다며.”

“......네.”

발끝을 바닥에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는 처음 듣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한을 쳐다보았다. 정한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지수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입만 벙긋거리는 탓에 집중하며 정한의 입술을 눈으로 쫓아야 했다. 낙화열병 이야기해줘도 돼? 지수는 순간 표정을 굳히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찬아. 우리도 너처럼 모든게 두렵고 무서웠던 때가 있었거든.”

“…….”

“나랑 승철이랑 지수랑, 왜 황룡이 되었는지 알려줄까?”

찬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똘망똘망한 그와 눈이 마주친 지수는 싱긋 웃어보였다.

나빌레라

秋夕(一), 모두의 조화를 추구하며 균형을 이루도록

“제주도에서 일어난 전쟁이야. 화무십일홍이라고, 알아?”

지수의 말에 끄덕이던 고개를 드디어 저었다. 한번 성하면, 반드지 멀지 않아 쇠해진다고. 이후에도 정한이 말을 덧붙여주었다.

“웅. 그걸 내세우던 마반인들이 충돌을 일으킨 거야. 소수의 강한 꽃들이 지지 않고 대대로 이어가는 것, 그리고 부와 권력을 유지하는 것. 그걸 빌미로 일으킨 대전이야. 원래는 자초해서 무너지고 붕괴한 것이라 폐화대전이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낙화 대전이라 불리게 됐어.”

“왜...요?”

“꽃이 떨어지는 것이, 완전히 져버리는 것보다는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으니까.”

그조차도 마반인들의 의견이었다. 꽃잎이 떨어지는 것과 더 피어나지 못해 사라지는 것은 다르다면서 꿋꿋하게 낙화 대전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정한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수도 마찬가지였다. 꽃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마반인들은 항상 진절머리가 났다. 아무것도 모르던 찬은 탄식만 하다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을 알아보고 싶었다. 대체 뭐길래, 이렇게까지 사형들이 고통받아야 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럼 그 대전은, 어떻게 되었나요?”

“어떻게 됐기는…….”

“….”

“그런데 찬이 너는 왜 그렇게까지 알고 싶어?”

지수가 물었다. 이번에 들어온 1년 나비들이 다른 생원들에 비해 학구열이 높은 편이긴 했다. 그러나 정한이 안된다고 하는 것은 곧바로 포기하던 셋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말을 잘 듣고 잘 따르는 찬이 이렇게까지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다들 안 알려주니까요…. 사형들도, 얼마 전까지 몰라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차마 승관이가 제게 이 이야기를 꺼내어서요, 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이걸 듣는 너는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지수의 다정한 말에도 찬은 굳건한 표정을 지었다. 정한도 생각이 많은 듯했으나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다.

“제주에는 그들 고유의 꽃 가문이 꽤 많았는데, 그게 대부분 다 져버렸지. 충돌을 일으킨 자들, 그리고 맞선 자들 전부 피해를 보았어. 그곳에서 겨우 살아남은 몇 없는 꽃 중 하나가 승관이네 꽃이야.”

“웅. 수선화.”

정한이 지수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주고받듯 둘이 번갈아 가며 사건을 읊어주는 것이 꽤 흥미로웠다. 물론 내용은 가벼이 들을 것이 아니었지만.

“차라리 거기서 끝이 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낙화 대전에서 져가는 가문들이 악의적으로 꽃병을 만들었어. 병. 꽃을 담는 병이 아니라, 나랑 석민이가 연구하는 그런 병. 그들은 그저, 꽃을 가진 마반인들만 걸리도록 해서 모든 가문이 멸망하길 바랐어. 근데, 퍼져가는 과정에서 양반인들도 꽃병에 걸리는 사태가 발생했지.”

“어떻게요..?”

“제주에 마반인들은 죄다 여성들이어서 육지로 퍼질 일이 없었는데, 양반인들 중 남성들이 육지를 왕래하며 전국적으로 퍼지게 된 거지.”

“아.”

승관과 한솔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마반인들은 동성끼리도 혼인을 할 수 있다고. 자식을 키울 여력이 된다고 판단되면 삼승할망이 데려다준다고 했다. 승관도 그런 경우에 속하고, 드물게 양반인들 중에서도 동성혼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일반인들에게는 그저, 마을 너머 양반 같은 분들이 돌아가신 이유 모를 역병이었겠지만 마반인이랑 양반인들은 이 꽃병을 낙화 열병이라 부르게 되었어.”

“이때가, 우리가 딱 찬이 네 나이일 때야. 응. 열여섯, 1년 생원.”

찬은 열세 살일 때 일어난 것이었다. 제주에서 열세 살이었던, 가장 가까이서 봤을 승관이 떠올랐으나 말을 아꼈다. 정한과 지수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을 터였다.

“꽃병이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우리 서당 안까지 들어오게 돼. 그 당시 황룡들이 입구를 막고 약초학 연구를 힘썼으나 역병을 막기에는 무리였고 수업은 강제로 전면 중단 되었어.”

“그때 우리가 뭘 알았겠어? 이번에는 바로 공지를 내렸잖아. 홍지수 얘가 공고문을 쓰고 최승철이 넘겨받고 말해서. 나가거나, 허튼짓 하면 마법을 전부 무력화시키고 서당에서 쫓아내겠다고. 근데 그때는 아니었거든. 우리는 뭐, 수업 없어지니까 마냥 좋았지. 그냥 휴강한다는 말만 하고 박사들은 사라졌거든. 황룡들은 답도 안 나오고, 그들은 자기 가족 챙기겠다고 나가버리고. 그 상태에서 마반인들이 서당 입구를 박차고 몰려 들어온 거야. 안전할 줄 알고 다들 쳐들어왔는데, 그게 한둘이 아니라 수십 명이니까 난리가 났지. 지금처럼 서당에는 마반인들이 많았거든. 꽃이 있는 생원들이 감염되기 시작했고.”

정한은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했다.

“당시에 우리는 책방에 모여서 공부하고 있었어. 나는 애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황룡이 되고 싶다고 마음을 먹었거든. 음……. 나는, 원래 마법을 잘 썼거든. 그래서 외부 마반인들을 보자마자 봉인마법을 걸었어. 정말 무의식중에 해낸 거야. 내가 있던 곳 창문을 다 닫아버렸지. 승철이랑 얘랑 나만 가둔 채로. 근데 이걸, 6년 생원들이 본 거야. 정한이랑 나를 불러서, 서당의 문을 폐쇄하도록 했지. 응, 얼마 전 역병이 돌았을 때 나랑 민규랑 애들이 썼던 그 마법.”

“아니, 그럼 뭐하냐고. 폐쇄되면, 고립된 이들끼리 병을 옮기기 일쑤인데. 승철이네 침소에는 5년, 6년 사형들이 계셨거든. 그 사형들이 최승철을 꽤 아꼈어. 졸업 직전에 들어온 열여섯짜리 사제. 얼마나 귀엽냐?”

“오…….”

“걔가 애교도 많고 해서, 바빠도 항상 밤이 되면 최승철이 잠드는걸 보고 나올 정도였거든. 아무튼, 그 사형들이 우리 셋을 전부 주작 침소에 밀어 넣고 꽃 결계로 잠가버렸어. 절대, 나오지 못하도록.”

지수의 마법은 웬만한 곳에서 다 통한다는 것쯤은 찬도 알고 있었다. 반짝이는 눈으로 지수를 보았으나 슬픈 눈으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형이 열었어요?”

“아니…. 나는 그때 내 방어만 할 줄 알았지 결계를 잠식시키는 법을 몰랐어. 그래서 나올 수도 없었고.”

“...그럼 어떻게 나오셨습니까..?”

“꽃의 마법은 주인이 영구로 걸어두는 것이 아니면 전부 사망함에 따라 사라져. 승철이가 문을 세게 밀어쳤는데 문이 부서지더라고. 그래서 알았어. 아, 승철이네 사형들이.. 돌아가셨구나. 그리고, 낙화 열병은 끝나 있었고. 서당 생원의 절반 넘게 사망한 후였어.”

생각할 때마다 아득했다. 꽃을 품은 가문의 마반인들은 죽으면 그 자리에 가문의 꽃이 피어난다. 수없이 피어난 꽃의 잎들이 온통 섞여 흩날렸고, 그 위에는 치우지 못한 사체들이 쌓여 있었다. 으, 끔찍했어! 정말. 지수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우리가 나가자마자 각자 침소에 가봤어. 정한이의 침소에는 사형들의 유서만 남아 있었고, 내 침소에는.. 승철이랑 내 사형들의 유서가 있었어. 거기, 공통으로 적힌 글이 뭔지 알아?”

“…….”

“꼭, 황룡이 되라고. 다시는 이런 상황이 나타나지 않게 막아달라고. 생원들을.. 보호하라고…….”

“2년 생원이 되고, 황룡의 수호를 받고 나서는 말만 그랬지. 서당의 생원들을 위해 힘쓰겠다고. 너는, 이 서당의 이념이 뭔지 알아?”

“...몰라요.”

얼마 전 석민이 알려준 것을 들었던 것 같은데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모든 생원의 조화를 추구하며, 균형을 이루도록 하라.”

“아….”

정한이 기다렸다는 듯 말해주었다. 항상 바삐 움직이면서도 저와 승관에 대한 것은 줄줄이 꿰차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기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저것 배에 실었던 짐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와중에도 이 둘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던 것인지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힘들면 무조건 헌신하겠다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겠다고. 정말, 정말 말만 그랬어. 근데 내 사형들이 다 죽고 홀로 남은 상황에서 민규가 들어왔어.”

승철은 준휘를, 지수는 순영을 만나 함께 지낼 동안 정한은 홀로 지내야 했다. 그 당시 정한의 세상에는 승철과 지수 뿐이었기에, 홀로 있는 청룡 침소보다 마음 놓고 만날 수 있는 누각에서 버텼던 것이었다. 그 때문에 아직까지도 아침 일찍이 누각에 나가서 승철과 지수를 기다렸다.

“...진짜 내 사제…. 민규가 생기니까 알겠더라고. 내 사제를 보호해야 하고, 사제의 친우도, 사제의 사제도, 사제가 동경하는 사형들도…. 다, 보호해야겠다고. 그렇게 느껴지더라고.”

“…….”

“이기적이긴 했지? 그 때, 우리 말이야.”

찬은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동백의 고운 얼굴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었으나... 만일 그가 웃고 있었다면, 괜찮다고, 잘 이겨냈다고. 그 한 마디는 해줄 수 있었을 것만 같다.

열매달 스무날

“야! 홍지수!”

“...아. 언제 왔어?”

승철이 지수의 얼굴을 가까이 했다. 커다란 눈동자 속 가득히 지수의 얼굴만이 담겼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불러도 듣질 않아?”

“그냥……. 태어나서 살아온 것들. 반추하고 있었어.”

“오.. 그래?”

“응. 황룡이 된 것까지 생각했는데, 네가 불러서 끝났네.”

주작이 그려져 있던 흉배는 마법으로 인해 황룡으로 변해있었다. 지수가 손가락을 뻗어 황룡의 선을 따라 긋기 시작했다. 승철이 간지럽다고 웃었으나 별다른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승철은 제 시선을 지수의 손끝으로 두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다 입을 열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 적지는 않았다고 해야하나?”

“...너 보니까, 담배 피우고 싶어. 우리 황룡 되기 전에 틈만 나면 피웠잖아.”

지수가 입을 뻥긋거렸다. 승철은 단호하게 눈썹에 힘을 주었다.

“안되지. 우리 한 번 더 피우다 걸리면 윤정한한테 진짜 혼날 거야.”

“걔는, 자기도 간혹 피우면서 우리한테만 무어라 말을 얹더라.”

“그니까. ...아니. 그래도 안돼.”

“왜? 나는 네가 준휘 몰래 피우는 걸 봐주었,”

다급히 지수의 입을 틀어막았다. 즈응흐 흐르.. 힘이 센 탓에 지수는 턱조차도 움직일 수 없었다. 힘껏 눈꼬리를 휘며 고개를 끄덕이니 그제야 숨이 트였다.

“...사실, 나는 내 시간이 사형들의 유서에 묶여 흐르지 않을 줄 알았는데.”

“…….”

“유서의 내용도 이해를 못 했거든.”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하지 말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그리고 꼭, 황룡이 되어 다시는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못하도록 막아주길 바란다.


 

두 주작의 사체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백호와 청룡이 있었다. 늦었음에도 꿋꿋하게 그들을 기리고 밤 늦게 침소에 돌아가니 유서가 있었다. 눈이 따끔거리는 것도 잊었는지 승철과 정한이 또다시 엉엉 울면서 지수 홀로 있는 백호 침소로 들어와서는 말했다.

 나도, 꼭, 지수 너랑.

서당의 황룡이 되어야한다고.

이 약속만은 지켜줄 것이라고.

 

“황룡이 되고, 순영이가 들어오고 나니 알겠더라.”

“...나도. 준휘를 보고 나니까.”

살아남는게 아니라, 살아가야 한다고. 느껴지더라. 지수가 씁쓸하게 말하며 웃었다.

“...아. 순영이한테는 무슨 말 해줬어? 꽤 긴장하고 있던데.”

 경합 때문에 제주로 오기 전 날부터 긴장되는 마음에 잠도 설친 순영인데, 와중에 백호 신령의 형태로 장산범까지 마주했으니 심란함이 극에 달할 터였다.

“긴장이 풀렸을 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말을 했길래.”

“…….” 

“그냥, 우리 엄마가 나한테 마지막으로 해주었던 말.”

 지수는 서당에 들어가고 난 후로는 지호를 마주한 적이 없었다. 간혹 서신만 주고받는다는 것을 승철이 모를 리가 없었다. 역병이 터진 이후로는 뵈러 가는 걸 꿈도 꾸지 못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아, 축제인데... 눈물이 많아지네.” 

 “너…….”

“야, 최승철!!”

 지수의 슬픈 눈과 마주하던 승철이, 또랑또랑하게 들려오는 정한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너 왜 이러고 있어?!”

“어, 어?”

경합 규칙이 바뀌었다며, 순영이 다급히 승철을 찾는다 했다. 승철은 힘없이 정한의 손길에 이끌려 경합장으로 갔다.

 그래도 경합 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남은 기억을 더 되돌아볼까 싶어 바람을 등지고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경합장에 가기 전에 나비들을 얼추 모아야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동백 위에 나비를 얹고 살아가기 딱 좋은 날이었다.

“사제의 친우도 보호해야겠다고…….”

열하루 오후에 겨우 출발한 배는 열아흐레가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새벽에 도착한 탓에 깊게 잠들어 있는 찬을 승철이 업어서 데려다 주었다.

첫날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는 별다른 행사를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나비들을 따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왠지 모르게 텅 빈 듯한 마음은 어찌 채워야 할 지를 몰랐다. 항상 경합 준비를 할 때마다 순영은 찬에게도 기회를 주었다. 이번에도 당연히 순영이 언월도를 건네주었지만 찬은 고개를 저었다. 내일이 바로 경합이니 이번에는 그냥 구경만 하고 싶었다. 오는 길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둘 다 굳이 꺼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경합이 열린다고 하니, 전부 경합장으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제주 생원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찬의 귓가를 스쳐 지나갈 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늘 꼭대기까지 떠오를듯한 달을 눈으로 좇고만 있었다.

“순영이도, 같은 마음 아니었을까?”

“네?!??”

낯선 서당임에도 중간에 우뚝 선 채로 멍하니 있는 찬에게 민규가 훅 다가왔다. 환각 장산범을 마주했던 일은 이미 나비들에게 다 퍼진 것 같았다. 안 다쳤지? 다정하게 돌려 묻는 민규에, 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사형은 왜 여기 계세요?”

“응. 가야지. 넌 안 가? 애들이 널 찾아. 같이 가자.”

당연히 경합 준비를 하러 일찍이 경합장으로 갔으리라 생각했다. 먼저 경합장으로 걸어가다 뒤를 돌아 빙긋 웃었다. 찬은 여전히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다.

“...애들이요?”

“승관이랑 한솔이. 가자. 얼른!”

민규가 덥석 손목을 잡고 경합장으로 향했다. 확실히 제주의 서당이 크고 넓었다. 침소도 명륜당도 전부 단층으로 되어 있었음에도 복잡하지 않고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한구석에 있는 경합장 앞에 다다르자 정한과 순영이 답지 않게 화를 내고 있었다. 승관과 한솔은 다른 사형들이랑 먼저 올라간 듯했다.

“아니, 경합 규칙이 달라졌으면 말을 해줬어야죠.”

“그런 규칙 없었잖아요. 미리 말을 해도 빠듯해질 판에..!”

“일괄 지비로 보내드렸고, 답신이 없어 방자들도 보냈습니다. 헌데 한양 서당이 죄다 꽉 막혀 있었다고 하더군요. 수선화를 제외하고는 제주의 어느 꽃도 뚫을 수 없는, 동백으로 막혀 있었는데 우리가 어찌 보냅니까? 동백꽃을 내세워 문을 막아둔 이유가 무엇인지 먼저 물어봐도 될까요?”

“아, 그건…!”

정한이 순영을 막았다. 쓰고 있던 안경을 고쳐 쓰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양에 강한 역병이 돌았습니다. 3년 전처럼 될까 싶어 퍼지기 전에 죄다 잠가 두었고요. 감염된 자가 없어야 마음 놓고 제주에 올 수 있을 테니까요. ...그새 왔었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지금, 이각 정도라도 시간을 좀 내어주시면 안 될까요? 그동안 저희가 인원을 바꿔보겠습니다.”

“...아…….”

금세 조용해졌다. 지지 않고 맞받아치려던 제주의 송과 경주의 신도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서당의 문을 다시 열고 지비를 보내지 않은 황룡들의 잘못도 있었으나, 역병을 눈앞에서 마주했던 적 있던 자라면 빠짐없이 이해해줄 일이었다.

“그럼.. 알겠습니다. 제가 다른 소나무들에게도 알릴게요. 얼른, 가보십시오.”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언성만 높인 것이 꽤 죄송합니다. 지금은 일이 바쁘니, 후에 제대로 된 사과를 하겠습니다.”

그들의 말에 정한이 가볍게 묵례만 하고 승철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자, 규칙 다시 말해줄게. 빨리 말한다. 서당마다 한 침소씩 모여야 해. 4년 생원 이하만 참여할 수 있어. 같은 연도에 입재한 생원은 최대 두 명만 이용할 수 있고. 그러니까, 지금 최승철이 경합장에 투입이 안 된다고. 4년 생원이긴 하나, 준휘와 같은 주작이니까.”

“청룡 하나가 필요하단 뜻이네요. 순영이 성에 차는 청룡은 없었는데.”

“이각을 준대. 어떻게 할래?”

명호가 긴 앞머리를 걷어 올리고는 하늘을 보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역병 때문에 막은 서당 문이 더 큰 일을 가져왔다.

“정 안되면 김민규 집어넣어야죠. 도깨비불도 다룰 수 있고, 모란이라 단거리 방어는 확실히…,”

“아니.”

준휘가 명호의 말을 끊었다. 항상 남을 먼저 생각했고, 말도 행동도 전부 저보단 남이 먼저였던 생원이었기에 순영이 놀란 듯 쳐다보았다.

“찬이. 어! 마침 여기 있네.”

한순간에 정적이 생겼다. 순영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명호도 걱정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찬, 장거리 단거리 다 잘하잖아. 그래서 우리가 언월도 쓰는 법도 알려준거잖아.”

“그래도 너무 어려. 1년 생원이야.”

“명호랑 한 살 차이야.”

“활이랑 검 둘 다 어느 정도는 할 줄 알죠. 확실히 단련되어 있기도 하고요. 근데…….”

명호가 말끝을 흐렸다. 승철은 함께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제 잘못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괜히 미안해서 준휘의 손을 꼭 잡고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경합이 열리는 마당에 환각술이 걸려 있다. 장산범이 나온 곳을 지나온 찬에게 정신적으로 무리가 갈까 싶어 걱정되었다.

“환각의 숲에서 그 일이 일어났는데, 괜찮을까요?”

“괜찮아요!”

찬이 곧바로 치고 들어왔다. 사실 넷이 합을 맞춰온 상태에서 새로운 생원으로 교체된다는 것이 마냥 쉽지는 않았다. 간간이 함께 연습을 했던 찬이 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오는 길에 있었던 일 때문에 순영과 명호가 망설였던 것이었다.

“...이제는, 진짜 믿으니까요.”

“하……. 너, 정말 괜찮겠어?”

순영의 걱정스러운 질문에도 찬은 굳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승철과 정한은 그들을 보더니 그럼 됐네, 하고는 다시 송과 신에게로 갔다. 명호는 환각술 기초라도 알려줄 테니 어서 경합장으로 들어가자며 찬을 다독였다.

보름달이 높이 치솟은 추석. 한양의 대표인 정한을 포함해 제주와 경주 생원의 대표, 그리고 제주 서당의 대표 박사들이 모여 목각 네 개에 주술을 건 부적을 붙여 경합장 안으로 던졌다. 객석에 앉은 생원들이 원형 경합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목각에 모든 관심이 쏠렸다. 그 큰 경합장에 생원은 열둘 뿐이었다. 환각술이 걸린 커다란 경합장에, 주술이 걸린 사흉수가 나타났다.

체감상 민규의 열 배는 되어 보이는 사흉수들이 너무 무서웠다. 오던 길에 보았던 환각 장산범과 별반 다를 것 없을 테고, 무슨 일이 있다면 사형 셋이 저 보호해 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찬아. 네 몸, 잘 보호 해. 넌 그것만 하면 돼.”

“...네.”

준휘의 말에 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굳게 언월도를 잡았다. 원을 세 구역으로 나누었다. 시작은 각자 서당의 구역에서만 할 수 있다. 선을 넘어 다른 서당의 구역으로 들어가면 감점이었다. 시작해보자며 찬에게 준휘를 보내고 순영은 명호에게로 갔다.

근 몇 년은 낙화 대전과 낙화 열병으로 인해 추석에 하던 사흉수 경합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경합은 제주의 생원들이 가장 많이 우승을 차지했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들 모두 처음 출전하는 것이었으나 꼭 이겨버리겠다는 다짐으로 가장 앞장섰다.

순영은 곧바로 백호의 형태로 변해서 달려들었다. 사흉수와 맞먹지는 못해도 비슷한 크기의 백호가 궁기와 맞붙자마자 떨어져 나갔다. 환각 요괴는 직접적인 공격 못 한다며..! 객석에 앉아있던 석민이 기겁을 했다. 경합장에 있던 셋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한양 생원들에게 보여준 것만으로도 당황스러웠는데, 마법 서당 생원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호의 형태라니.

궁수가 사라지고 곧바로 넘어진 백호는 순영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궁기 부적이 붙은 목각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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