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
한겨울로 넘어서며
눈이 많이 내렸다. 침소의 디딤돌이 겨우 보일 정도로 내려, 강의는 대부분이 취소되었다. 나비 중 황룡인 사형들은 잠시 단체로 사유서를 내고 영묘산으로 간다고 했다. 대외적으로는 많은 황룡이 자리를 비운다는 공고를 해야 하니 그리 알린 것이고, 서당에 남은 나비들은 이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었다.
홀로 백호에서 남은 한솔은 찬이 지냈던 사월촌에는 눈이 적게 와서 볼 일이 별로 없었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일찍 일어나 그를 밖으로 불러냈다. 둘이 있던 곳이 현무와 멀지 않은 곳이라, 침소에서 그들을 발견한 명호도 내려와 함께했다. 홀로 있는 것이 익숙한 명호도 눈길을 걷는 것을 마다하진 않았다. 사형들의 설피를 꺼내어 한솔과 찬에게 빌려주었다.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고, 사형들이 피워둔 각자의 꽃도 한 송이씩 따와서 나이의 순서에 맞게 얹어주었다. 하지만 뿌듯함도 잠시, 스물여섯 개의 공을 굴리느라 손바닥이 한없이 차가워졌다. 두어 개 겨우 굴려서 얹어준 명호가 손이 안 차냐고 다정하게 물으며 찬의 양손을 잡았다가, 화들짝 놀라며 한솔과 찬의 손을 어루만졌다.
“너희 손이 얼음장이 되었잖아.”
“그래도, 눈사람이 귀엽지 않습니까?”
“네 손이 상하잖아!”
“괜찮아요!”
뭐가괜찮아잇. 명호가 화를 내며 각자의 손을 잡고 있던 양손을 떼어냈다. 구 형태의 난暖 마법을 만들어 각자의 손에 쥐여주었다. 신기한 마법을 하나 더 알게 된 찬이 반짝이는 눈으로 보다가도 금세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새 명호는 그 표정을 알아차리고 왜 그러냐 물었다.
“...이거, 누군가는 발로 차겠지요?”
“꽃이 있는 것들은 안 찰걸.”
한솔이 말했다.
“잉.. 다 소중한데.”
찬은 전부 가져가서 침소 창틀에 올려두고 싶다고 했다. 물론, 정한이 허락하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다. 명호는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마구를 들고나왔냐고 물었다. 찬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간혹 강의 도중에 검사하기도 했다. 마법사가 될 사람의 기본이라고. 둘 다 들고나왔음을 확인한 명호가 제 마구를 꺼내 들었다.
“보호 마법을 알려줄게.”
“방패로는 안 돼요?”
이미 승철에게 배운 것이 있어서 물어본 것이었다.
“음.... 되긴 하지. 근데 방패랑 보호는 달라.”
방패 마법을 걸어둔 것에 누군가가 발길질하다 다치면, 찬에게 불이익이 갈 수도 있다고 했다. 보호 마법은 그렇지 않아서 알려주는 것이고. 간단한 것이었다. 保. 이 정도는 이제 쉽게 외울 수 있는 난이도였다. 단단한 구 형태로 물체를 둥그렇게 감싸는 방어와는 달리 이 마법은 얇은 천막으로 감싸두는 것처럼 물체에 적용이 됐다. 한솔은 이미 써본 마법이었기에, 찬이 홀로 연습도 해볼 겸 열세 개의 눈사람 전부 보호 마법을 걸어주었다. 한솔은 그런 찬의 뒤에 가만히 서서 이 눈사람들을 나중에 승관에게도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해가 뜬 시간에 맞추어 나무를 타고 올라왔다. 눈이 쌓인 지상에 비해 천상은 한없이 맑았다. 서당의 일곱 황룡은 백호를 가장 앞에 세워 옥황상제가 있는 곳으로 갔다. 특히 주작들은 하늘을 주재하는 신을 보러 간다는 사실이 꽤 흥분되는 듯 했고, 현무들은 왠지 모르게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지상의 궁궐과 크기가 비슷했다. 가장 먼저 입구에 도착한 지수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서너 개의 문을 더 통과하고, 서당만한 마당을 지나 정전正殿 앞에 도착했다. 정전까지 가는 계단 앞에서 지수가 뒤를 돌아 여섯 명을 보았다. 각자 본인의 침소에 맞는 도포를 입은 모습이 꽤 멋있었다. 믿음직스럽고.
“...왜 안가?”
“......가야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성큼성큼 계단을 밟았다. 모든 창과 문이 활짝 열려 있어 화려한 정전의 내부가 시야를 사로잡았다. 얼핏 보아도 신이 많았다. 오방신은 당연히 있었고, 십이지신과 십장생 영수들도 있었다. 평소에는 농업신-풍백, 우사, 운사-과 저승의 시왕, 그리고 탄생신에 속하는 할망들까지 전부 모인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오방신의 수하 중 일부만 올라온 것이니 당연히 오방신을 제외한 다른 신은 모이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지수는 그 속에서 가장 가운데에 앉아있던 신과 눈이 마주쳤다. 신을 벗고 안에 들어가 절을 올리고 나서야 그가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이군, 지수.”
“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제 어미를 쫓아내고 한때는 박해했던 신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옥황상제와 백호의 마지막 수장이 만나는 자리란 것을 잊지 않기로 했다. 그의 끄덕임을 보며 자리에서 바로 섰다.
석민을 제외하면 전부 각자의 영수와 만난 적이 있었다. 오방신의 앞에 두 자리씩 비어있는 것을 보고, 눈치껏 각자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정한의 옆자리와 황룡 앞의 두 자리는 공석이었다. 저를 제외한 세 영수의 앞자리가 가득 찬 것을 본 정한이 멋쩍게 웃으며 뒤를 돌아 청룡을 보았다. 그도 정한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춰주었다. 청룡은 언제나 봄처럼 따스했다.
“외로워?”
“...조금, 그렇게 느껴집니다.”
청룡은 정한이 마냥 귀엽기만 하여 웃을 뿐이었다. 정한도 딱히 더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기에, 미소를 유지하며 시선을 되돌렸다. 때마침 상제가 작은 종을 울려 이목을 집중시켰다.
“오늘 이 자리에는 오방신의 열일곱번째 수하 중, 한양의 황룡들만 소환하였네. 그 이유를 아는가?”
“…….”
“지수.”
가장 만만한 이름이겠지. 내어진 차를 조용히 마시던 지수가 덜그럭거리며 잔을 내려놓았다. 상제는 미소 지으며 대답해보라고 손짓했다. 지수가 그에 답하듯 예쁘게 웃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이 대답 말고는 나올 수 없었다. 앞뒤 내용 없이, 대설이 되면 영묘산에 있는 목문을 타고 올라오라는 서찰을 받은 것이 전부였으니까. 상제가 웃음을 싹 지웠다.
“논할 것이 있어 불렀네. 함께 할 수장과 신령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여 서당이 바삐 움직이지 않는 지금 부르게 되었어. ......우선, 서당의 황룡이 될 가능성이 있는 청룡 신령 부승관과 황룡 수장 이찬의 자질은 후에 다시 결정할 날이 올 테니 차치한다.”
지금 1년 생원들은 내년이 되어서야 서당의 황룡으로 선발이 될 테니, 아직은 그들에 대한 판단이 이르다는 소리였다.
현재 상제의 앞에 있는 나비들끼리 모여 누가 황룡이 될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적지 않았다. 남은 나비 중에서 정해진다는 것은 서로 거의 확신한 상태였다.
상제가 뜸을 들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까지, 나뭇잎조차 떨어질 생각을 못 할 정도로 고요한 침묵이 흐른 뒤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17대 황룡 신령 문준휘의 자격을 논하고자 한다.”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모두가 흘긋흘긋 승철을 보다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승철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빌레라
大雪, 한겨울로 넘어서며
다들 은연중에 민규가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천성이 밝고 사람을 좋아하길 타고났지만 도의와 정의에 대한 생각이 확고하여 맺고 끊음이 분명했으니까. 요즈음에 들어서 이야기할 때면 준휘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저승에서 살아난 인간이 천상에? 가당치도 않은 소리라 생각했다.
“어찌 생각하는가. 서당의 황룡이 되길 거부한 주작이 올라오는 것에 대하여.”
서로 눈치를 보던 중 정한이 입을 열었다.
“자질이 충분하다고 여겨집니다.”
“왜지?”
“학문으로서 뛰어난 성적을 가진 것뿐만 아니라, 적법한 절차에 따라 황룡이 될 수 있음을 증명받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그가 서당의 황룡을 거부한 것은 개인의 선택이니 존중할 필요가 있어 황룡들도 상의한 후에 받아들였습니다.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 것이 아니니, 성품과 실력에 대하여 논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차석임에도 황룡 신령이 자리를 거부함으로써 황룡의 수호를 받게 된 현무 신령은 그 과정에 없었으니 자질이 부족하다고 봐도 되는가?”
상제는 거침없었다. 미리 대답을 알고 반문을 준비한 사람처럼 곧바로 다음 질문을 던졌다. 정한이 원우와 눈을 마주쳤다. 차마 무어라 더 말을 해야 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를 알아챈 지수가 대신 답을 이었다.
“그 또한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상제의 고개가 지수를 향해 돌아갔다.
“전원우 생원을 황룡으로 데려올 때 일반적으로 시행했던 절차 중 일부가 누락된 것은 사실이나 이 점을 감안하여 전원우 생원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로 두 달간 당시의 5년, 6년 생원에게 관찰을 맡겼습니다. 또, 관찰 후 내부 회의를 통해 결정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저희는 전원우 생원과 친분이 있었으니 결정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판단하여 내린 결정이며, 그들이 평가한 전원우 생원의 기록과 두 달 늦게 황룡으로 등극 되었다는 문서 또한 정리해 두었으니 증명할 수 있습니다.”
4년 아래의 황룡들은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현무 신령의 자질은 충분하단 소리군.”
“네.”
지수가 확고하게 대답했다. 고작 이제 3년 생원이 된 황룡들의 말을 들을 생원들이 몇이나 있을까 싶었지만, 그 당시 서당에 살아남아 있던 황룡이 적어서 나름의 동지애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잘 알겠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지. 황룡 신령 문준휘가 죽은 몸으로 저승에 내려갔다가 되살아난 죄로 시왕의 심판을 받은 것은 아는가?”
“...문준휘 생원과 사이가 가까운 터라 얼추 알고 있었습니다.”
“그를 저승에 데리고 간 저승사자는, 염설이었단 것 또한 아는가.”
이번에는 원우가 답했다. 이 질문은 원우 외에는 답을 할 수 있는 자가 없으니까.
“몰랐습니다. 한데, 그가 저승 소속의 사자로서 업무를 수행했던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중 하나일 뿐입니다. 어디에 거주하던 누가, 언제 망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따라서, 현재 본분을 다하고 사자의 직위에서 벗어난….”
말을 잇던 원우가 입술을 달싹였다. 잠시 고민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고인 염설원은, 문준휘 생원과 관련이 없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황룡 신령이 운명의 흐름을 거스른 것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는가. 이에 대해서도 답을 명확히 해주었으면 하네. 자네들을 부른 이유의 근원은 이것이니.”
백호는 이 광경을 흥미롭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이들 중에서는 백호들이 말을 제일 많이 할 줄 알았다. 지수는 원래 어른을 잘 대했으며, 순영 또한 예전에 대화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꽤나 잘 말했으니 이번에도 그리하리라 생각했다.
두 백호 못지않게 서로 눈치를 보면서도 하고픈 말을 전부 할 줄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신령 하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살신성인일 줄이야. 백호가 생각했다. 틈을 타 순영이 말을 하고자 하였으나, 의외로 원우가 더 빨랐다.
“접때 저승을 드나들던 중 구삼승할망을 뵌 적 있습니다. 구삼승할망께서는 문준휘 생원을 살린 것이 온전히 그분의 잘못임을 언급했던 바 있습니다. 문준휘 생원은 그저 그럴 운명을 타고난 것뿐입니다.”
“현무 수장의 의견도 동일한가?”
“...네. 고작 반년을 이승에서 살고 저승으로 넘어온 그에게는 선택권조차 없었으니 그는 이에 대해 짊어질 책임도, 사명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답변이 현무다웠다. 상제도, 그를 알기에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잘 알겠다.”
순영이 말하려던 것을 어찌 알았는지, 상제가 순영에게 말해보라며 손짓했다.
“그가 운명을 거슬렀다고 생각치 않습니다.”
“...왜지?”
앞뒤를 전부 자른 순영의 당돌함에 상제가 잠시 멈칫했다.
“방금 상제께서 운명의 흐름을 거슬렀다고 하셨잖습니까. 음..., 저는 문준휘 생원이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누구와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가장 많은 시간을 서당에서 함께 보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삶에서 확신이란 큰 용기가 필요한데, 어찌 그리 단언할 수 있지?”
“제가 무예 수장이니까요. 물리적으로 같이 한 시간이 많다는 의미기도 하지만, 수장은 항상 용기가 넘칩니다. 그래야 하고요. 그 용기 모두 살아온 날들을 기반으로 한 확신으로 뭉쳐진 것이니 의심 마십시오.”
순영이 씩 웃어 보였다.
“이어서 계속 말하겠습니다. 곁에서 가장 오래 지켜보았으며, 가장 가까운 사이일 것입니다. 조금 전 전원우 생원이 말했듯, 문준휘 생원은 구삼승할망의 선택으로 그 운명을 따라 자라 온 것뿐입니다. 기억도 못 할 어릴 적 이야기입니다. 그 생원은 누구보다 과거를 사랑하고 미래를 갈망해요. 보통 인간이었다면 절대 견디지 못했을 과거도 사랑할 수 있기에, 그러한 운명조차도 짊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군.”
“예. 문준휘 생원은 운명을 거스르지 않았습니다. 옥황상제의 질문부터 그릇되었습니다.”
가만히 듣던 정한이 경악했다. 하늘에 있는 신 중에서도 가장 높이 있는 신에게 저리 똑바로 눈을 마주하고 당신이 틀렸음을 언급하는 인간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순영의 말을 들은 상제는 대범한 호랑이라며 좋아했다.
“왜 주작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지? 같은 침소를 사용하면서.”
주작 영수가 말했다. 삐딱하게 앉아 있던 주작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 담겨있었다. 모든 신의 시선이 두 주작에게로 쏠렸다. 석민이 승철과 눈을 마주치곤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곳에서 가장 어린 석민에게 제 부담까지 건네주고 싶지는 않아 입을 열었다. 그러나, 승철 또한 마땅히 할 말은 없었다.
“...제가 하고픈 말을 다른 생원들이 다 해주었기에 딱히 덧붙일 말이 없습니다.”
“그럼 다른 것을 물어보아도 되는가?”
상제가 얇은 서류들을 보며 물으니, 승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제는 서류를 살포시 내려놓고, 뒤에 앉아 있던 다른 신들에게 이만 가보아도 좋다고 했다. 오방신과 서당의 황룡들만을 남겨두고 남은 이들을 다 떠나보냈다. 그들은 덕분에 흥미로웠다며 가벼이 인사하고 미련 없이 떠났다.
마지막으로 십이지신 용의 신령이 나가며 정전의 문이 닫혔다. 상제가 다시 승철을 보며 말했다.
“그에 대해 말해보거라. 무엇이든 괜찮다. 자네의 시선에서 본 그 생원을 말해보거라.”
“…….”
“편히 말해도 된다.”
최승철에게, 문준휘를 읊으라 했다. 어디부터 어찌 말을 해야 할지 입을 달싹이다 맞은 편에 앉은 정한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옆에는 지수가 있었고. 묘하게도 쿵쾅대던 심장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제게 그의 삶을 물었으니 제 인생과 섞어 말해보겠습니다.”
꽤 당차게 말하고서는 상제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너그러이 웃으며 손짓했다. 편히 말해도 된다니까, 하면서.
“저는... 낙화열병을 바로 앞에서 보았습니다. 문준휘 생원이 들어오기 전까지 함께했던 사형들은 각각 백일홍과 안개꽃을 품고 난 마반인들이었습니다. 봄의 거친 바람 속에서 그는 눈앞에서 흩어졌던 사형들의 두 꽃을 동시에 품은 채로 서당에, 그리고 주작에 들어왔습니다.”
잠시 감은 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문준휘 생원은 복수화동으로 태어났으며, 저승에서 산 삶이 이승에서 지낸 날보다 턱없이 많습니다. 삼도천을 건넜으나 저승과 이승을 드나들 수 있으므로 영물로 분류된 채로 살아왔습니다. 조선 어디에도 영물로서 두 꽃을 품고 열여덟 해를 버텨낸 사람은 없습니다. ...어쩌면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숨기고 살아왔습니다. 본인을 저승으로 인도해준 사자를 모시던 친우에게도, 날마다 함께하며 합을 맞추는 무예 수장에게도, 본인을 사랑하는 침소의 사형에게도, 그리고 사제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같은 침소를 함께 쓴 사형이지만 앞서 말했던 내용들은 전부 올해가 되어서야 알게 된 사실입니다. ...그가 가진 힘의 무게를 가늠할 줄 알기에 그럴 수 있었다 생각합니다. 살아온 길이 순탄치 않았음에도 아무에게도 티 내지 않는 것이, 열여덟의 생원에게는 한없이 힘든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되짚을수록 사형으로서 해준 것이 없어 미안해질 뿐이었다. 이러면 준휘가 싫어하던데. 잽싸게 생각을 지운 승철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다시 상제를 보았다.
"며칠 전, 주작 영수를 서당에서 뵌 적 있습니다. 그때 영수께서 제게 잉걸불 같은 생원이라 했습니다. 감히 제가 덧붙여 문준휘 생원을 설명해보자면...."
승철이 말끝을 흐렸다. 항상, 내가 준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더라. 아. 찰나에 떠오른 단어를 뱉어냈다.
“...밤불 같습니다.”
“밤불?”
“말 그대로 밤에 피어난 불이라 하였습니다. 눈 감았다 뜨면 그새 사라졌을까 하는 마음에 찾아가게 되는 불. 바람결에 사라질 것 같은 그 불은, 불안감을 가득 안은 인간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 따스함으로 다가오니까요.”
“잘 알겠다. ...헌데, 그 불이 사라지면 인간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문준휘 생원은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받치고 있는 잉걸불은 절대 지지 않을 테니, 확신할 수 있습니다. 황룡은, 주작은 그래야 하니까요.”
호기롭게 뱉은 말과 달리 마음은 그러질 못해서,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졌다. 승철이 텅 빈 눈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안 좋은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고 슬픈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다. 그냥, 있었던 일로 비추어볼 때 좋은 사람이었음을 이야기한 것인데. 왜 눈물이 날까. 내 사랑이 그리 애달프진 않았던 것 같은데.
상제가 손목을 가벼이 돌리니 승철의 앞에 연꽃 모양의 손수건이 생겨났다. 승철이 얼굴을 정리하는 동안 오방신은 수장과 신령들이 있는 곳에 따로 결계를 두었다. 소리가 새어 들어오지 못하게 한 채로 여섯 명이 대화를 나누었다. 백호가 펄쩍펄쩍 뛰기도 하고, 주작이 이마를 짚으며 의자에 거의 눕기도 했다. 현무는 한결같이 삐딱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청룡과 황룡은 상제와 같은 자세로 대화했다.
“최승철 결국 옥황상제 앞에서 울었네.”
“..조용히 해.”
“괜찮아?”
“안 괜찮을 이유도 없지.”
“상제는 뭘 저리 보고 계신 것이지?”
“회의 기록이 자동으로 녹취되는 서책일걸. 두 권이잖아. 오방신들의 대화를 들으며 우리 대화를 듣고 계시겠지.”
상제가 고개를 들어 그들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준휘가 신령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나 봐.”
“이걸 우리가 논해도 되나?”
“함께 할 사람들이니 묻는 것이겠지.”
지호의 추방 이후로 천상에 문제가 생기면 상제는 이런 식으로 신들을 모아 회의한다고 했다.
일각이 지나고 나서야 결계가 사라졌다. 오방신이 다시 자리에서 자세를 고쳐잡았고 상제는 잡음이 전부 사라질때가지 기다렸다.
“우선 내 생각이 짧았네. 백호 신령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이 간단한 것을 깨우치지 못해 이리 자네들을 소환한 것이 미안하네. 문준휘는 황룡 신령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좋은 생원이고, 누군기에게는 괜찮은 사형이며 또 사제이다. 밤불 같은 그가 저승에서 살아온 일생은 오점으로 남을 것이 아니거니와 그곳에서 받은 판결 또한 잘못되었음을 인지하였다. 현재 저승에서 귀물이 아닌 영물로 분류되므로, 시왕의 재판보다 상제의 권한이 더 강한 점을 앞세워 그의 손목에 새겨진 죄의 표식을 지워내도록 하였다.”
상제가 서책들을 전부 덮었다. 이제부터 하는 말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회의도 끝이 났다는 소리였다.
“다들 이곳에 오느라 고생 많았네. 내일이 되면 다시 내려가도록 하여라. 각 오방신의 건물에 손님이 묵을 공간이 있으니 그곳에서 하룻밤 자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내용은 주작 신령이 전해주었으면 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듣는 축복이 더 행복할 테니까. 그렇지?”
상제가 다 안다는 듯 웃으며 승철을 보았다. 얼굴이 옅게 붉어졌다. 겨우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방신들이 먼저 자리를 뜨고, 나비들이 머물렀던 자리를 정리했다. 승철은 상제가 끝에 했던 말을 계속해서 상기했다.
정전에서 나온 후에 각자 모시는 오방신의 객실로 갔다. 그러나 무리가 찢어진 것도 잠시, 나비들은 또 모이기 시작했다. 정한은 석민과 주작을 뵈러 갔고 승철은 백호관으로 갔다.
백호관에 있던 순영이 얌전히 자는 척을 하다 이들의 대화를 슬쩍 듣고는 벌떡 일어났다. 지수가 자는 줄 알았다며 미안해하자 순영은 두 분 좋은 시간 보내라며 일방적으로 소리치고 현무관으로 향했다. 원우가 잠시 현무를 뵈러 간 시점에 딱 맞춰 온 것이라 지훈만 덩그러니 누워 서책을 읽고 있었다. 제집처럼 들어와 지훈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가만히 있던 순영이 입을 열어 정적을 깼다.
“생각이 많아지네.”
“...왜.”
“준휘 이야기를 할 줄 몰랐고. ...그냥, 이곳에 있으니까 이상해.”
“네가 백호관에 안 가고 현무관에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지수 사형이 승철 사형이랑 잠시 밖에 계셔서, 그냥 나왔어.”
“...알아. 그냥 한 소리야.”
순영이 데굴데굴 굴러서 지훈의 옆에 착 달라붙었다. 지훈은 몸을 살짝 반대로 돌릴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있잖아.”
“응.”
“준휘가 동지에 애들이랑 팥죽을 먹으러 가자던데.”
“...너 이번에는 그곳으로 끼게? 원래…,”
지훈이 말을 하다 입을 다물었다. 순영은 망종이나 동지가 되면 매번 어머니를 도우러 간다는 이유로 사유서를 쓰고 밖을 나갔다 왔다. 재가 된 어미를 뿌렸던 강가에서 하루 종일 있다가 돌아온다는 것을 지훈은 알고 있었다. 몰래 뒤를 밟았던 적이 있으니까.
한없이 조잘대던 순영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지훈이 뒤를 돌아보려 하자, 순영이 허리를 꽉 붙잡고 놓질 않아서 다시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같이 가. 나랑.”
“어딜.”
“문준휘랑 애들이 가는 사월촌에. ...동지를 같이 보내줘.”
“......그래.”
달라붙은 백호가 싫지는 않아서 이후에도 가만히 자세를 유지했다. 고로롱거리는 소리가 들려와서 더욱 움직이질 못하다, 원우가 남령초 향을 풍기며 들어와서 살짝 몸을 움직였다. 마침 눈이 내리기 시작했는지, 어깨에 묻은 눈을 톡톡 때네며 다가왔다. ...떼줘? 원우의 질문에도 겨우 삐그덕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지 않으면 지수가 분명히 데리러 올 테니까.
현무들의 예상대로, 동백을 귀에 꽂은 백호가 눈을 걷어내며 작은 백호를 데리러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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