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이지훈

홀로 남은 능소화

현재 by 반야



-망자 이연지李燃知는 수성금화사에서 근무하였다. 모두가 고의로 불을 지른 뒤 이를 수습하여 수당을 얻어가는 것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로 인해 피해를 입은 자들을 위해 기꺼이 제 삯을 깎아 수습해주었다.
입사한지 다섯 해가 지난 견우직녀달 열이레에 망자의 하나뿐인 친우 염설원이 동료의 고의적인 방화에 의해 목숨을 잃었으며, 이를 견디지 못한 마름달 스무이틀에 망자는 수성금화사 내부에 불을 질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살아온 생이 매우 짧기는 하나 그 속에 담긴 진실성과 인간성은 환갑을 지낸 노인보다 풍부하다. 허나 본디 저승의 법도에 따라, 삶의 무게를 짊어질 권리를 스스로 박탈시킨 망자는 저승사자가 있는 저승으로 배치하도록 한다. 또한 그의 죽음은 부정부패를 알리는 막중한 무게 또한 짊어졌음을 감안하여 일정 기간 저승사자로서 목숨값을 지운 뒤 환생할 수 있는 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지훈은 8살에 이연을 처음 만났다. 우물쭈물 인사를 올리고 마주앉으니 이연이 지훈의 머리를 쓰다듬고자 손을 뻗었다. 지훈에게는 좋지 않은 기억밖에 남지 못할 수단이라 몸을 움츠리니, 그가 안타까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손을 다시 거두었다.

“오랜만에 왔더니, 그새 작은 능소화가 피었구나. 이름이 무엇이냐?”

“이지훈입니다.”

“그렇군. 글은 쓸 줄 알고?”

“천자문...”

“...”

“...정도...”

“...이번 능소화는 말수가 적은 편인가?”

지훈이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니 이연이 다시 하얀 백설기같은 피부로 손을 올렸다. 이번에는 살짝 흠칫할 뿐 큰 반응이 없었다. 옳지. 놀라지 마렴. 나는, 널 지키기 위한 수호신이란다.

날 지키는 수호신. 지훈은 그 한 마디에 왈칵 눈물을 쏟았다.

한 해, 두 해씩 밥 먹듯 흘러갔다. 어느덧 학당에 다니기 시작한 지훈이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들어와 팩 서책들을 집어던지고는 방바닥에 누워버렸다. 불만이 많은 듯한 표정이었다. 뾰루퉁한 찹살떡을 꾹꾹 눌러보아도 평소 고양이같이 반응하던 지훈은 어디가고,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기만 했다.

“어허, 이놈이 답지 않게 왜 이럴까.” 

“독각.” 

“왜.” 

“차라리 꽃을 다르게 타고나서 아버지께 잠식되면 좋겠습니다. 제가 어머니의 꽃이 되었다면, 달라졌을까요?” 

“내가 항상 너를 능소화로 부르긴 하지만 네 꽃이 너 자신을 상징하는 것은 아님을 잊지 말아라.” 

“어머니의 꽃을 타고났더라면 이렇게 크진 않았을 겁니다. 차라리 내쳐지는 것이 좋았을 것 같아요.” 

“넌 이제 겨우 학당에 다니는 것이 왜 이리 비관적인 것이냐?” 

“...저 이제 명심보감 배웁니다. 다 컸,” 

한참 멀었지. 마법이라고는 쥐뿔도 배우지 않은 어린 능소화야.” 

멍하니 있던 지훈이 눈알을 굴려 독각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따뜻한 저 눈빛. 저 눈빛만을 보고 지긋지긋한 능소화굴레 속에서 열두 해를 견뎌냈다.

“독각은 왜 항상 저를 능소화라 부르는 것입니까? 제가 능소화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는 너도. 항상 날 독각이라고만 부르지 않느냐?” 

“....” 

“...그래. 이연. 연아-, 하고 불러보거라. 그래보았자 내 목숨은 열아홉에 끊어졌으니 따지고 보면 네 또래가 아니더냐.” 

“...독각은 그러고도 거의 백 년을 사셨잖아요.” 

“하하, 그렇긴 하지.” 

서당에 들어와 현무의 수호를 받는 지금 돌이켜보면, 지훈의 미래를 얼추 점지한 독각의 애틋함과 애잔함이 담겨있던 눈빛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래 없이 열아홉에서 멈춘 그에게 찾아온 지훈이 얼마나 반가웠을까. 단언컨데 독각에게 호의적인 능소화는 지훈밖에 없었을테다.

지훈은 독각의 예상대로 현무에 들어가 황룡을 달았다. 항상 콩콩거리며 마루를 지나 안방으로 들어오던 발걸음이 답지 않게 느리고 무거웠다. 그의 아비인가, 하는 생각을 하던 독각은 문을 거세게 열고 마주한 지훈의 얼굴을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쪼매난 능소화 한 송이가, 제게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독각은 제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하셨죠.” 

“...그래. 어느 정도 네 행방과 업적을 예상할 수 있지.” 

“그럼, 이것도 예상 하셨나요.” 

“...무엇을....” 

“독각. 백 년 전 당신은, 죄인이었던데요.” 

기어이, 하나 남은 제 능소화마저 세상은 등돌리게 하려는구나. 독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수성금화사에 불을 질렀습니까?” 

“....” 

“이래서, 제가 예전에 해저책방에 가자고 했을 때 그렇게 불같이 화를 냈냐고요. 당신이 죄를 지은 신이라는 것을 그렇게까지 숨기려고 하였습니까? 집에서 나오려는 것도, 제가 불쌍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저 아버지의 눈치가 보여서 그랬던 것이잖아요. 쫓겨나듯 나온 것이면서, 왜 죄다 저를 위한 척 하셨냐고요.” 

“...지훈아.” 

“진짜... 사람 불편하게... 신이라는 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당신 때문에 우리 집 꽃이 져간다는 것이, 이걸 의미하는 것인가요?” 

“......울지 말고. 무너지지 말고.” 

“할 말이 그것 뿐입니까?” 

“....” 

“독각도, 아버지랑 다른 게 없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꽤나 욱신거리는걸. 독각이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미소를 지었다.

나빌레라

李知勳, 홀로남은 능소화

타오름달 여드레

새벽에 할멈이 지훈을 불러냈다. 잠결에도 예의를 차려 밖으로 나가니 할멈이 말없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얌전히 손을 모으고 뒤에 서 있으니, 할멈이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머지않았다. 그놈이 또다시 재가 되어 사라질 날이.” 

“그놈이 누구인지, 부러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훈의 손에 손톱자국이 남기 시작했다.

“...저는 독각께서 가셔도…. 전 가족 같은 친우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마음 속에는 끝없는 의구심을 품고도 왜 물어보지 않는 것이지?” 

“네?” 

“네 독각은 죄인이 아니다. 내 너에게 확신을 내려주지.” 

그제야 담배를 거둔 할멈이 지훈에게로 다가왔다. 담뱃대로 턱을 치켜들게 하여 눈을 마주했다. 자글자글한 주름들 사이로 선명한 동공에 담겼다.

“해저책방의 서책을, 믿지 말아라.” 

“그곳에는 모든 신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저는 그 서책을 보았는데요.”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살아있을 때 확인을 해야지. 그 아이의 말은 들어 보았고?”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라서요, 그 독각과.” 

“억지 부리다가, 마음 상하는 것은 네 책임일텐데... 뭐, 알아서 하겠지.” 

맞았다. 옳았다.

신의 말이 맞았다.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미련이 남았다.

죄다, 내 잘못이다.

지훈의 볼 위로 시리도록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시간이 참 빠르구나. 널 처음 본 날이, 정확히 십년 전이었는데 말이야.

네 발길이 끊기고 난 후 드문드문 서당에 들어가서 보았을 때, 넌 몰라볼 정도로 많이 컸더구나.

마법을 잘 다루는 네 손도, 듣기 좋은 가곡을 불러대는 네 목소리도, 자연을 다루는 네 힘도, 황룡의 수호를 받게 된 네 운명도, 하나도 빠짐없이 완벽했다.

이제는 조선에서 사용하는 모든 마법을 깨우친 나의 작은 별아. 가여운 나의 별, 어린 능소화야.

네가 서당에 가더라도.

금강초롱은,

꽃무릇은, 모란은,

동백은, 수선화는,

금낭화는,

그리고

백일홍과 안개꽃은,

절대널 두고 떠나지 않을 것이다.

벌써 네 곁에는 수많은 꽃들이 머무르고 따르는구나. 만개한 꽃들의 중심에서 피어난 네 꽃은, 절대 지지 않을 것이다.

홑몸이 된 능소화야. 그간 나로 인해 고생 많았다. 네가 어떠할 지는 모르겠으나, 꽤나 미련이 남는구나.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냈음에도 말이야. 나는 네가 꿋꿋이 나아갔다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니

한 치 앞도 모르는 네 운명을 향해 달리고, 깨지고, 부딪혀보아라.

겨울의 현무가 될 우리 지훈아. 이지훈아. 우지야.

앞으로 너의 찬란한 길을 내가 비추어주겠네.

너는, 날 잊고 세상의 흐름에 맞추어 살아가거라.


지훈이 종잇자락을 구겼다. 마지막 구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후회와 한이 미치도록 휘몰아쳤다.

🎵멀리-안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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