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방식시(3)
싹트는 현무의 의심
서둘러 원우를 돌려보내고 침소로 향했다. 얇은 손목을 붙들고 주작 침소 뒷편까지 멈추지 않고 가는데도 준휘는 말 하나 얹지 않고 조용히 따라왔다.
“무슨 일 있어요? 이 늦은 시간에 몸도 성치 않은데 돌아다니면 어떡해요. 이제 날도 추운데.”
“...침소에는 석민이가 있으니까.”
“...”
“그..., 너도 봤어?”
준휘가 승철을 내려다보았다. 항상 승철의 눈높이에 맞춰 구부정하게 서 있던 사람이, 이렇게 텅빈 눈을 하고 꼿꼿하게 서서 내려다보니 이상했다. 승철은 평소와 다른 상태인 것을 알면서도 애써 모른척 했다.
“정한 사형에게 전해 듣기만 했어요. 붉은 날개를 펼치며 추락했다고.”
“그럼 너는 대충알겠네. 내가....”
“...주작이라는 것을요?”
“...응.”
그제야 준휘가 탁, 막혔던 숨을 뱉으며 제 뒤에 있는 주작 침소의 벽에 등을 기대었다. 팔짱을 끼고 승철을 보자, 눈을 피했다. 도록도록 큰 눈이 저 멀리 준휘를 피해가는 것이 여실히 보였다.
“알죠... 잘 알죠....”
“그러면, 그냥 말 할게.”
“...”
“나 너 좋아해.”
조용했다. 누군가 갑자기 소리를 질러도 좋으니 이 적막을 깨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입을 뗀 준휘가 입술을 달싹였다.
“...”
“...그것도 알고 있었어요.”
“너도....”
“...”
“나 좋아했잖아.”
기어이 준휘를 피하던 눈에서 눈물이 한 가닥 떨어졌다. 평소였다면 재빨리 닦았겠지만, 승철은 애써 무시했다. 지금은 가벼운 눈물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응.... 난 지금도 좋아해요.”
“나, 좋아하지마. 내 옷에 있는거, 네 태사혜 뒤에 있는거. 같은 꽃이잖아.”
“네.”
“......근데, 이제 말 해야돼. 너, 나랑 같은 삶을 살지 못해.”
겨우 달래지 못한 눈물이 기어코 흘러나와 숨을 어지럽게 흩트렸다. 뭐가 급한지, 승철은 말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나갔다.
준휘는 그런 승철을 보며 말없이 눈물만 닦아주었다. 승철이 눈을 뜨고는 거의 처음 보는 준휘의 얼굴이었다. 그 며칠 보지 않았다고 그리워했던 제가 후회스러웠다. 털어놓으면 끝날 줄 알았다. 눈을 뜨기 전, 아니, 한솔을 품에 안고 땅으로 곤두박질 칠 때부터 생각했던 것이다. 후회가 남지 않도록. 제 소매에 있는 꽃을 끊어낼 생각이었다.
“고작 큰 맘 먹고 한다는 소리가 그거예요?”
“....”
“참, 무던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승철의 붉어진 눈가를 매만졌다. 준휘의 차가운 손가락이 열오른 승철의 얼굴에 닿을때마다 흠칫흠칫 놀랐다. 평소였으면 가만히 안아주었을 준휘지만, 상황이 따라주질 못했다.
“사형.”
“...응.”
“...진짜,”
마음을 꿰차고 들어와 함부로 휘갈긴 것도 모자라, 들쑤신 제 사형을.
“....”
서로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티 하나 내지 않고 있었던 승철을.
“이기적이고 못된 사람이네요.”
“...알아.”
죽었다 깨어나도 미워하지 못한다는 것을, 준휘는 잘 알고 있었다.
“....”
“...먼저 들어가. 난 누각에 있다가,”
끝까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떠나려는 승철을 붙잡았다.
“싫어요.”
“....”
그제야 승철이 준휘를 쳐다보았다.
“...그냥 같이 들어가. 지금 사형 혼자 누각에 가면, 석민이도 걱정해요.”
“....하.”
“사형도 지금 가기 싫잖아요. 앞으로 나랑 2년은 더 같이 있어야 하는데.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접어버리면, 사형 소매자락에 있는 그 꽃, 뜯어버려야하잖아요. 그럴 자신 있어요? 내 신에 있는 것도 뜯을 수 있냐고.”
“...할거야.”
“거짓말.”
승철이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준휘의 손목을 세게 내쳤다. 울분이 치밀었다. 모든 게 제 탓 같았다. 차라리 화를 내지. 여태 준휘는 제게 큰 소리, 쓴소리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야. 너 이런 애 아니잖아. 왜이렇게, 애처럼 굴어?”
준휘의 표정이 굳었다.
“사형은 지금 내가 그저 어리광부리는것처럼 보여요?”
“....”
“...정말, 정말 사형이 그렇다면... 더이상 할 말 없어요. 조심히 가요.”
“....”
준휘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며 제 허리에 차고 있던 승철의 마구를 떼어 다시 걸어주었다. 승철이 살짝 주춤하던 것도 잠시,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길었던 침묵이 제게만 해당했던 것이 아니었는지 날이 밝아오는 것 같았다. 날이 환히 밝으면 정한과 지수가 누각으로 오겠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굳게 닫혔던 문을 열었다.
타오름달 열사흘
뭐야? 해가 뜨고 얼마 되지 않아 예상치도 못한 생원이 들어왔다.
“왜 벌써 나와 있어? 안 피곤해? 정한이가 좀 쉬어야 한다고 했잖아. 너 떨어진 지 얼마 안 된 건 알지??”
쉴 새 없이 밀어붙이는 지수에 승철이 진정하라며 손짓했다.
“너는 무슨 일인데? 원래 일없으면 잘 안 오잖아.”
“한솔이한테 빌렸던 서책을 두고 와서. 애기 공부한다길래 가져다줘야겠다 싶었거든.”
“아…. 그래? 가을 공부를 할 때이긴 하지.”
“왜 여기 있어? 도포는 왜 벗어두고?”
승철이 도록도록 눈동자를 돌리는 소리가 누각에 울리는 듯했다.
“....”
“...너 밤새 이곳에 있었어?!”
쾅 책상을 내리치는 지수의 말을 듣는 척 마는 척 하며 승철은 꿋꿋이 시선을 회피했다.
“이렇게 외면하면, 어쩔 수 없지.”
이들에게는 잘 사용하지 않았던 지수의 능력은 이럴 때 요긴하게 쓰였다. 혹시나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제 생각이 전해지지 않을까 싶어, 승철은 눈을 꼭 감아버렸다.
“…….”
“...야!”
승철은 겁이 많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깜짝 놀랄 정도로 겁이 많다. 지수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을 때도, 당연하단 듯이 화들짝 놀랐다. 동공이 떨어질 정도로 눈을 크게 뜬 승철을 빤히 본 지수가, 엄한 표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너 미쳤어??”
“...왜?”
“그걸 왜 뜯어? 새벽에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랑 정한이한테 와야지. 너 이제 잘 다니잖아.”
“아니, 내 말을,”
“네 생각 아직 읽고 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여태 뜯지도 못했으면서 도와달라고는 왜 말 하는데?”
승철은 준휘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누각에 도착해서 마음을 수천 번 다잡고 제 소매에 새긴 꽃을 뜯어내려 했으나, 이름도 없는 못난 이 꽃을 지워내기에는 용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게.”
“그거, 미련이야. 뜯지도 못할 것을 왜 붙들고 있어? 잠도 안 자고.”
승철이 대답을 하지 않고 제 도포에 얼굴을 파묻었다. 혼자 한참을 운 덕분에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시린 눈을 꼭 감고 숨만 내쉴 뿐이었다.
“….”
“너 겨우 회복했으면서 밤 샌 거 알면, 너도 정한이한테 혼나고.”
“응.”
“네가 잠들지 못한 이유인 준휘도 혼날걸?”
“...아.”
“봐. 이걸 더 걱정하는 걸 보니, 넌 글렀어.”
지수가 한숨을 쉬며 의자에 걸쳐진 얇은 이불을 던져주었다. 누각에 지내는 이들이 함께 사용하는 것이었으나 항상 정한의 품에 감겨 있었던 것을 증명하듯, 승철이 받아들었을 때 정한의 향이 훅 끼쳐왔다.
“지금이라도 얼른 자.”
“할 일이 많은데...”
“그건 다른 애들 시킬게.”
“...넌? 다른 나비들은?”
“난 바빠서…. 일단 자고 일어나. 그럼 알려줄게.”
평소였다면 무슨 일이냐며 벌떡 일어나 장난을 쳤겠지만 승철은 얌전히 눈을 감았다.
나빌레라
五方式試(三), 싹트는 현무의 의심
지수가 석민을 데려오라는 지비를 지훈에게 날렸고, 지훈은 그걸 받고 석민을 주작에서 끌어내 세안을 시키고 데려가고 있었다. 오방식시가 끝난 것에 대해 시시콜콜 이야기하던 석민은 일이 어찌 마무리가 처리 되었는지 지훈에게 물었다. 찬이 떨어지는 걸 석민이 잡아 다치지 않게 내려주었다는 것을 작성하여 공문을 올렸다고 했다.
“...그래서, 공문 인장은 사형 걸로 했어요?”
“응. 아주 대문짝만하게 능소화가 피었지.”
“이유도 정한 사형께 알려줬어요?”
“설마 그랬겠냐... 그냥 급해도 내가 책임지는 것이 나을 테니 내 것으로 했다 했지.”
사실 말 해도 정한의 마음이 상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수 인장으로 하면 그 누구도 못 건드리는데? 같은 농담을 할 수도 있다. 나비들과 있으면 가문의 꽃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들이 아닌 다른 생원들은 가문의 꽃이 뭐 대단한 권력인 것마냥 받들어주기에 더욱 티 내기가 싫었다. 능소화가 금강초롱보다 힘이 센 가문이라는 것 정도는 석민도 알고 있었다.
“..박사들이 별말 안 하실까요?”
“안 하지. 별말... 할 것 같았으면 김민규를 데려와서 찍었어.”
“...모란이 그렇게 강해요?”
“엉.”
잘라버린 지훈의 말에 더는 이어붙일 것이 없어져 입을 다물었다
가 다시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박사님들은 아세요? 사형... 처지를..?”
“모르겠지. 아버지도 내가 부끄러워서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 테고.”
“....”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씨, 괜히 머쓱해지게. 지훈이 중얼거렸다. 다른 주제로 대화를 돌릴까 싶었으나 딱히 떠오르는 소재가 없었다.
“그, ......너 어제, 날개 펼쳤잖아.”
“...보셨어요?!”
머리를 굴리느라 뒤늦게 놀란 석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 당연히 봤지.”
“어디 계셨습니까? 중앙에 있었어요?”
“누각에 있었는데. 그 뱀, 내가 해준 거야.”
“와... 사형이 포획을 사용하셨던거예요?”
*포획捕獲 마반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고유의 마법. 지수는 동백나무의 뿌리가 땅에서 솟거나 가지를 내어 물체를 옭아맬 수 있는 능력이고, 지훈은 검은 뱀이 똬리를 틀며 옭아맨다.
멀리서 구경만 하던 지훈이 화들짝 놀라 별다른 방법을 생각할 새도 없었다며 말을 얹었다. 주작 생원들 대부분은 그저 어느 현무가 도와준 것 같다고 생각한다는 석민의 말에 지훈이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어. 너 다칠까 봐.”
“근데, 주작 생원들에게 물어보았는데요....... 날개를 못 봤다고 했습니다. 한솔이도 못 봤고, 명호도 몰랐대요.”
“...찬이는? 물어봤어?”
“네. ...눈을 감고 있어서 그냥 훤했다고만 했어요.”
“계속 감고 있었으니 알 수가 없겠네. 일단 알겠어.”
“넹. 근데, 무슨 문제 있어요?”
석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도 지훈은 절레절레 고개만 저을 뿐 다른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어깨에 손을 올리고 졸졸 따라갔으나 지훈은 기겁을 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한참 후에야 다른 생원들은 석민의 날개를 보지 못한 것 같아 이상한 느낌이 든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대뜸 남에게 묻기에도 이상한 질문이긴 한데... 별 일 아니지 않을까요? 석민은 좋게 생각하는 편이 낫다며 지훈을 양옆으로 흔들었다.
때마침 누각 앞에 도착했다. 이들의 대화를 들은 지수가 조용히 창을 열고 얼른 올라오라며 손짓했다. 조금 있다가 지수 사형한테도 물어보자는 지훈의 말에, 석민이 동의하며 계단에 발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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