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
더위가 그치고 나락이 입을 벌려 꽃을 나불거린다
타오름달 스물사흘
“다 부쉈어?”
“네. 침소 아래에 있던 백호 구슬, 찬이 발견했던 청룡 구슬, 준휘가 활로 쏘아서 깬 무예 무기고 지붕에 주작 구슬.”
“응. 잘했어. 현무는 다른 생원이 직접 부쉈대.”
“...네.”
순영의 손에 든 사방색의 구슬 껍데기들을 지수가 건네받았다. 작은 보자기에 그들을 감싸고 누각 지붕으로 올려보냈다. 4년 생원이 되면 배우는 도술 중 하나라 했다. 손목을 굳게 고정하고 바람을 일으켰다. 환한 금빛을 내며 재가 된 구슬들은 바람결에 흩날려 사라졌다. 입추쯤에 열린 오방식시에서 이용한 구슬은 처서가 되어야 처리할 수 있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드는 계절의 엄연한 순행을 드러내는 때에 맞추어 오방식시를 마무리 한다는 의미였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에 섞여 사라진 구슬의 잔상을 멍하니 바라보다, 쌀쌀해져가는 날씨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침소로 돌아가려 몸을 돌렸다.
“점심을 먹을때까지 꼭 끌어안고 잠이나 더 자자.”
“한솔이는 깨우고 자야 해요.”
한솔은 잠이 많았다. 자정이 지나면 곧바로 잠에 들었고, 적어도 일곱 시간은 푹 자는 생원이었다. 물론 잠만 깨워두면 알아서 잘 움직였기에, 항상 바빠도 지수와 순영은 한솔을 일으켜주었다. 느릿느릿 이불 속에서 앉아 꿈뻑이는 한솔을 보면서 지수는 웬 거북이 하나가 앉아있다며 웃기도 했다.
갈까요? 하며 묻는 순영에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각 지붕에 남은 재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을 끝으로, 완전히 오방식시를 떠나보낸 시점이었다. 누각을 등지고 서쪽으로 가려던 찰나 뒤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발소리에 저절로 다시 몸이 돌려졌다. 현무 하나가 쌩하니 누각으로 뛰어들어갔다. 형체가 워낙 얇고 날렵하여, 보자마자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어, 원우다.”
“...우리 못 본 것 같은데?”
“그러게요. 오늘 오전 강의도 없는데 뭐 저리 바쁘게 가지?”
“누각엔 정한이 뿐인데.... 그걸 알고 가는 것도 아닐테고.”
급한 일이었으면 이들을 먼저 불러세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별 말 없이 다시 침소로 향했다. 일이 생기면 정한이 지비를 수없이 날려 저들을 부를 테니,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원우는 둘을 보지 못했다. 지수와 순영이 황룡 정복이 아닌 백호 도포만 입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급해서 누각만 보고 달려왔기에 못 보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잽싸게 누각을 비집고 들어가자 정한이 가만히 앉아 일을 보고 있었다. 정말 그냥 눈으로 보고만 있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서 있는 원우에게, 생긋 웃으며 손인사를 했다.
“사형.”
“응. 이번엔 좀 늦게 들어왔네? 손에 그건 뭐야?”
“다음주 명부입니다. 사형. 서당 문을 닫아야 해요.”
보통 원우는 많아봤자 열 장 정도의 명부를 들고 온다. 매주 쇠날에 나가서 제 사자와 혼을 모아 저승으로 올려보내는 일을 한다. 일을 끝나고 서당에 돌아갈 때 사자가 다음 주 망자들의 명부를 전해주면 원우가 서당에서 틈틈이 그들의 집을 알아보고 그곳으로 가는 길을 정리했다. 또다시 쇠날이 되면 그 명부와 정리한 것을 바탕으로 밖으로 나가 그들을 저승에 보내주었다. 이 반복적인 일을 약 3년째 해왔고 정한은 매년 그것을 보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번에는, 한 손 가득히 들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뭔.... 왜이렇게 많아? 평소엔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더만.”
“역병이 돌아요. 마반촌은 물론이고 일반촌까지 싹 다 지나갈 것 같아요.”
정한의 손에 들려 있던 겉보기식 업무 두루마리를 툭, 떨어트렸다. 원우는 개의치 않고 그쪽으로 가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대충 먹을 갈아 사유서를 쓰고, 종이 아래에 본인이 작성했음을 상징하는 꽃무릇을 새겼다. 대충 접고 정한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번 사유서는 제가 갖고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형식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이번에는 살려야 해요. 사형이 일년 생원일 때, 그 때처럼 둘 순 없어요.”
그 때. 원우의 한마디에 정한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박사들께 내가 알릴게. 다른 황룡들도 모아야겠다.”
“네. 현 서당의 생원들. 인원을 파악하고 문을 닫으십시오. 결계는 얼마 전 저랑 민규가 쳐서 안전할겁니다.”
“응. 너는? 다시 나가야 하잖아. 그쪽에 계속 있어야 하는데,”
“감투를 쓰면 그동안 저는 저승의 관할 아래에 있기에 그런 것은 걱정 안해도 됩니다. 전 죽지 않아요.”
“....”
“나가는 길에 꽃무릇을 써서 서당을 봉인시키겠습니다. 후에 민규랑 지수 사형이 일어나면 잡아서 또다시 봉인을 시키십시오. 그냥, 꽃이 있는 생원들 중 마법의 효력이 강한 자들은 죄다 총동원하십시오.”
“...그,”
“..?”
“..알겠어.”
평소였으면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정한도 그걸 깨닫고 말을 아낀 것이었다.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는 생원은 원우 말고도 많으니까.
“이건, 제 사유서고요. 저는 이 역병이 끝날때까지는 저승의 명을 받은 사자의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돼요. 서당의 모든 일에서는 제외해주세요.”
다급히 말을 마치고 슬쩍 눈치를 보다, 감투를 미리 쓰고 문고리를 잡았다. 붉은 누각 문에 더 붉은 꽃무릇 문양이 잠깐 반짝이더니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정한은 꽃무릇 문양밖에 보지 못했으나 대충 눈치로 짐작만 할 뿐이었다. 원우가 많이 급해 어쩔 수 없이 제 능력을 써서 저승으로 바로 가버렸구나, 하고.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여유를 부릴 틈이 없어 곧장 다시 문을 열었다. 다른 모든 황룡들을 깨워 움직이게 해야만 했다.
나빌레라
處暑, 더위가 그치고 나락이 입을 벌려 꽃을 나불거린다
서당의 문을 봉인시켜야 한다. 불려온 생원들 모두가 한 말이었다. 정한은 그 이유를 알지도 못하면서 지훈과 지수가 강력하게 강조하는 말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원우가 민규도 쓰래. 정한의 한 마디에 석민이 청룡 침소로 가서 자고 있던 민규를 데려왔다. 어느정도 체계를 잡고 나서 봉인을 위해 서당 입구로 갔을 때, 그 때가 되어서야 정한이 지수에게 물었다. 이런 것은 왜 하냐고. 지수는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자, 말하긴 싫었지만... 엄청 약한 놈의 꽃으로 봉인마법을 걸어두었다 치자. 정말, 권력에 눈이 멀어 만들어진 이도저도 아닌 개풀같은 집안의 꽃이라 쳐.”
“응.”
“너의 금강초롱이 그 꽃을 잠식시키면 네 힘으로 문을 열 수 있어.”
“....”
“그걸 막기 위해, 모란과 동백을 이용하는거고. 내가 최종 방어선인거지, 사실은.”
정한이 말없이 흙뿐인 땅바닥에 구멍을 만들고 금강초롱 문양으로 봉인을 걸었다. 일반인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옅은 자색의 결계가 만들어져 구멍으로 손을 집어넣지 못하고, 꾹꾹 누르기만 했다. 지수는 그 위에 제 동백을 피워냈다. 금강초롱이 붉은 동백에 휩싸여 사라졌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지수의 손끝을 보고 있으니, 지수는 제 손가락으로 구멍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지수 가문의 힘으로 정한의 결계를 뚫은 것이다.
대충 이런식이야. 하면서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다른 생원들은 제 꽃에 예민하여 감히 엄두도 못 내는 설명방식이었으나 지수와 정한은 그들 고유의 꽃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럴 때나 쓰는 것이니, 상처도 자존심도 내세울 것 없었다.
“동백을 무너뜨릴 정도의 힘을 가진 자들은 진작 도망쳤을 테니.”
“...그럼 승관이도...?”
“승관이는 어려서, 아직 못 해요. 봉인, 2년 생원일 때 배우는 거니까요.”
“....”
민규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여름에 봉인 마법을 배웠다고 했다. 지수는 그의 곁에서 고개만 저어댔다.
“수선화도 동백만큼 강하긴 하지. 근데, 지금은 능소화도 있고 모란도 있어. 애들한테 손을 벌리진 말자. 내 선에서 끝낼 수 있어야 해.”
“...근데 왜 이곳에 몰려와?”
“가장 현명한 생원들이 몰려있는 이곳. 다들 죽어나가는 바깥세상에서 가장 쉽게 뚫을 수 있는 안식처라고 생각하는 거지. 원우는 그걸 예상해서 미리 막으라고 한 것이고. 우리 때도, 그렇게 해서 다들 죽은것이니까.”
“...아.”
하필 그 대답을 승철이 해버렸다. 이 마법은 마반인만 쓸 예정이었기에 승철을 따로 부르지 않고 다른 일을 맡겼는데 그새 끝내고 온 모양이었다.
역병 소리만 들으면 저절로 승철을 떠올렸기에 더 그러했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1년 생원일 적 지수와 승철의 모습이 떠올랐다.
......머리 한켠이 아릿했다. 덮기에는 소중하고 간직하기에는 애처로운 기억이었다.
서당의 문을 막는 동안 승철은 석민과 다른 황룡들을 데리고 서당 생원들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각 침소별로 생원들이 전부 있는지, 혹여나 없는 생원이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 빠짐없이 확인했다. 다행히도 현무에서 지훈의 침소 한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서당 내부에 있었다. 그 소식을 전해듣자마자 정한이 생원 전원을 중앙으로 모으게 했다. 오전 강의가 있는 생원들은 일단 수업을 제꼈다는 사실에 즐거워했고, 오전 강의가 없어 단잠에 빠져 있던 생원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서낭당 나무 아래에 모였다.
“역병이 발생하였습니다. 다행히도 현 서당에는 사유서를 쓰고 나가 저승의 일을 돕는 황룡현무 전원우를 제외한 199명의 생원과 20명의 박사 모두가 내부에 있습니다. 사유서를 작성하셨더라도 역병이 끝나기 전까지 외출은 금지되며, 유일한 서당의 출입문 또한 봉인 마법을 걸어두었습니다. 혹여나 이 봉인을 뚫고 허가 없이 나가게 된다면 그 즉시 서당에서 퇴출될 것이며, 마법 능력을 전부 잃을 것입니다.”
승철이 한 글자씩 읽어내려갔다. 찬찬히 읽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흠칫하며 멈추었으나 곧바로 다시 읽기 시작했다.
“...수업은, 전원우 생원을 고려하지 않고 그대로 진행됩니다…. 외부와의 연계가 많은 약초학과 천문학은 일정 변동이 많을 것이니 후에 누각 아래 공지를 보고 잘 숙지하여 강의를 들으시길 바랍니다…….”
각 학년별로 모여 듣고 있었다. 익숙하게 준휘의 등에 기대어 눈도 못 뜨고 꿍얼거리던 순영이 어느샌가 눈을 꿈뻑꿈뻑 뜨고 가만히 서 있었다. 지훈은 준휘가 힘들다며 순영을 떼어내려 했지만 준휘는 괜찮다며 순영이 기댈 수 있게 두었다. 머리통을 콩, 하고 다시 준휘의 등에 기댔다. 어차피 지수가 쓸 때 옆에서 보고 들었던 내용이라 그닥 열심히 듣지 않아도 됐다. 뻔하고 형식적인 말들 뿐이었기에 멍하니 준휘를 껴안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장난을 쳤다가, 결국 지훈에게 한소리 듣고 나서야 몸을 떼어냈다.
서당 안에만 있었더니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바깥 세상의 일이니까. 찬은 제 가족이 걱정되긴 했으나 나가지도 못하고 마법의 존재조차 모르니 어쩔 수 없이 공부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명륜당에 들어가 서책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제 것과 승관, 한솔의 것. 둘이 잠이 많아 정신을 차리기 위해 정한과 지수에게 쓴 탕약을 받아먹고 오겠다고 했다. 이들의 자리마저 잡아두고 여분의 지필묵마저 챙겨두자 그제야 눈썹을 찡그리며 들어왔다.
“오늘 뭐 하는지 알아?”
“몰라…. 이 과목은 서책도 들고 오지 말고 마구만 들고 오라했잖아.”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시려나?”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여태껏 해왔던 것들을 배울 수 있지.”
지금 이들이 듣는 과목은 마법학이었다. 가장 기초를 배우는 학문이라 항상 내용이 많이 담긴 두터운 서책을 사용했었으나 이번에는 들고오지 않아도 된다는 공지가 떨어졌었다. 영문도 모른 채로, 그저 들 것이 줄어들어 좋아하기만 했다. 들어올 때가 되었는데도 한참동안 박사들이 들어오질 않아, 승관이 그를 찾으러 나서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했다. 찬도 따라가겠다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을 때, 찬은 제 바로 뒤에 있는 승철과 눈이 마주치고는 화들짝 놀랐다.
그제야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몇일 전 민규가 이제 슬슬 4년 생원들이 1년 생원들을 가르치는 날이 있을 것이라 알려준 것이 기억이 났다. 좋은 사형과 짝이 되어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나중에 친해지면 손해볼 것 없다는 말을 듣고는 누굴 만날까 한껏 기대했는데, 그 기대가 하늘에 닿았나보다.
승관은 오방식시 마지막 날 정한과 지수에게 말을 한 이후로, 항상 그들에게 갖가지 이야기를 듣느라 바쁜 하루를 보내야 했다. 수업이 끝나면 정한을 만나러 누각에 가는 승관에게 대체 무엇을 하기에 그러냐 물어도 이래저래 배울 것이 많이 생겨 그렇다 할 뿐이었다. 물론 저야 한솔과 둘이 있으면 되고, 굳이 알려주지 않는 것을 알아내려 할 이유가 없어 별다른 말은 얹지 않았다.
서당에서 마법을 선행하여 학습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기에 승철에게 배우고 난 것을 정리하여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승철이 나지막이 하는 말로는, 대부분 박사들 몰래, 황룡들 몰래 먼저 다른 학년의 마법을 알려주고는 마법 역사같은 기본적인 마법을 가르쳤다고 거짓을 적어 제출한다고 했다. 아마 정한도 승관에게 그리하여 알려줄 것 같다고 말을 잇기도 했다. 제대로 들어보니, 그저 같은 서당의 사형에게 마법을 배우며 친목을 갖는 전통이라 했다. 전통이라는 게 꽤 많고 귀찮지? 라는 승철의 질문에도, 찬은 고개를 저으며 좋다고 헤실거렸다. 학문 자체를 즐기던 생원인데, 거기에 좋아하는 사형들이 배운 적 없는 마법을 알려준다고 하니 마구를 제대로 쥐기도 전부터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 진정이 되질 않았다. 승철은 찬에게 간단한 방어 마법을 알려준다 했다. 방어 마법은 1년 생원 겨울이 되면 배우는 것이니 거짓으로 적어 제출할 필요도 없다고 했고. 승철은 찬을 데리고 생원이 적은 외진 곳으로 갔다.
“우리는 가문의 꽃도 없고, 타고난 힘도 없어서 이게 제일 중요해.”
“넵. 근데 저희가 방어를 할 일이 있나요? 무예학도가 될 생각이긴 하지만 이렇게 평화로운데....”
“모르는 일이지. 나도 1년 생원일 때는 이걸 쓸 날이 생길 줄 몰랐거든.”
“실제로 사용 한 적이 있어요?”
“응. 물론, 내가 이곳에 있을 때는 네가 못 쓰게 해야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승철이 찬의 손에 마구를 쥐어주었다. 꽃이 있는 마반인 생원들은 손만 제대로 움직일 줄 알면 저절로 방어 마법을 쓰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지만 이들은 마법이란 것을 서당에 와서 처음 배운 일반인이었다. 괜히 듣고 나니 비장해져 승철이 가르쳐준대로 손에 꽉 쥔 채로, 차근차근 방패干를 한자로 그렸다.
“이게, 가장 간단한 것. 이걸 머리 위에 그리면 비를 막을 수 있고, 앞에서 그리면 불어오는 바람도 피할 수 있는 것.”
찬의 앞에 방패 마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둔 채로, 승철은 근처 나무에 바람을 불게 하여 나뭇잎이 찬에게 향하도록 했다. 방금 한 말을 증명하듯 나무는 찬을 빗겨 뒤로 날아갔다. 놀란 찬에게 다시 다가가며 다시 손을 겹쳐잡고 이번에는 다른 방패防를 그려주었다. 꽤 간단한 술식처럼 보였지만 좀 전에 그렸던 干보다 더 빠듯하게 메꾸어진 마법이었다.
“이건 정말 몸을 방어할 수 있어. 간혹 밖에서 만난 요괴들의 짓궂은 장난도 막을 수 있고, 넘어지는 네 친우들이 다치지 않게 할 수도 있어.”
찬의 몸에서 조금 거리를 둔 후에, 발 아래에 있는 돌을 제게 던져보라 손짓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사형께 돌을 던지냐며 고개를 저었지만 승철도 거듭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망설이다 툭, 정강이 아래로 돌을 던지자 승철은 방금 전 찬에게 가르쳐주었던 방패를 그려 돌을 막았다.
“이렇게 쓰는 거야.”
“...아.”
“너는 무예도 하니까,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
승철이 이번에는 너도 해볼래? 하며 찬이 던졌던 돌을 주워들었다. 찬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살 던질게! 하며 장난스레 웃던 승철이 한순간에 표정을 굳히며 찬에게 달려왔다. 그 찰나에도, 찬은 승철이 제게 무예와 관련된 행동을 하려는 줄 알고 방패를 그리려 했다. 가끔 순영과 준휘가 들려주었던 무예학도 시절 승철의 이야기는 항상 상상력을 자극했기에 더 그러했다. 무술도, 국궁도, 검술도 잘 했던 사형이지. 그 말을 떠올리며 그를 막기 위해 획 하나를 그으려던 순간, 승철이 찬을 꽉 잡아 껴안고 반대편으로 방패를 그렸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에 당황스러운 찬은 그제서야 발견했다. 승철의 방패에 막혀 제게 오지 못하고 떨어진 샛노란 돌덩이들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후두둑 떨어진 돌덩이들이 박살이 나며 파편으로 튀었다. 승철의 방패에 가려져 미처 보지 못한 파편 조각이 찬의 정강이로 튀었고 뒤늦게 이를 피하려다 발을 헛디뎌 앞으로 넘어졌다.
“야, 괜찮아?”
“...네. 그냥 살짝, 까졌습니다. 견딜만 해요.”
발목이 아린 것은 둘째치고 피하지 못한 파편이 피부에 쓸려 깊게 패인 상처가 생겼다. 찬은 인상을 살짝 쓰면서도 거듭 괜찮다고 반복했다. 승철이 손을 내밀자 꽉 잡고 일어나려고 했으나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안 괜찮잖아!”
“…….”
“정한이. 윤정한 데려올게. 기다려!”
승철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청룡과 백호를 둘이나 더 데리고 돌아왔다. 승관이 걱정스런 눈으로 다가와 찬의 앞에 주저앉았다.
“뭐야? 다쳤어?”
“엉…. 아프다. 넘어졌어.”
“어떻게 넘어졌길래 이래? 발목에 힘은 들어가고?”
“…아니, 왜 이렇게 아프지?”
그렇게 세게 넘어진 것 같지 않았는데도 정한이 발목을 만질때마다 찬은 앓는 소리를 냈다. 정강이에 흐르는 피에 점점 부어오를 것 같은 찬의 발목을 보던 정한이 몸을 일으키며 한솔에게 턱짓했다. 한솔은 순순히 찬에게 등을 내주었다. 힘이 좋아서 찬을 업고도 번쩍 일어나 정한을 보았다. 정한은 웃으며 승철과 지수를 보았다.
“승관이는 네가 알려주고 있어.”
“...어?”
“지수 너도 같이 해. 승관아, 열심히 들어. 언젠가는 쓸 곳이 있을 테니까.”
지수와 승철은 순간 당황했으나 곧바로 맡기라는 듯 당당한 표정을 지으며 셋을 보냈다.
정한이 사라지자마자 지수는 뭐하러 그런 짓을 하겠냐며, 곧바로 태도를 바꾸고는 승관을 데리고 누각 아래로 향했다. 그늘 아래에서 쉬면서 이야기나 나누자는 말에 승관은 좋다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타오름달 스무여드레
죽음은 시간을 가리지 않았다. 저승에서 명령을 받고 다시 인간의 세상으로 나왔을 때, 마을은 아비규환이었다. 하루종일 그들을 인도하고 썩은 시체를 피해 숨어 있다가 또 때가 되면 나와 죽은 자들의 혼을 정리하여 저승으로 보내주길 반복했다. 간혹 민규나 준휘를 포함한 다른 나비들이 지비를 날려 주면 그것을 보고 웃을 수 있었다. 익숙하게 여러 사람을 보내주고 난 후 잠깐 틈이 생겨 숨을 돌리던 찰나, 기다렸다는 듯이 지비가 하나 날아왔다.
언제 오냐.
네가 없으니까 나비 중 황룡현무가 나 뿐이라, 외로워 죽겠다. 명호도 보고싶어. 너 나가고는 같이 자지도 못했다.
...
호시는 무예 한다고 잘 안 들어오고 문준휘는 원래 못 들어오고. 사형들은 1년 생원들 가르친다고 바빠서 안 들어오고. 도겸은아직 강의 듣고 있어. 나도 그냥 정악이나 즐기러 갈까 싶다.
막내가 다쳤어. 지금은 거의 다 낫긴 했는데, 알기나 하라고 보낸다.
...
지긋지긋하네. 언제쯤 이게 끝날까 싶어. 도겸이 3년 생원이 되고 나면, 일을 전부 계승할거다. 오방식시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너랑 애들이랑 모여서 꽃밭에서 잠이나 계속 자야지.
물론 안될거 알아서 쓰는 소리야.
...
여유가 되면 올 때 먹을것 좀 사오고...
너도 고생이 많다.
지비 아래에 찍힌 능소화의 문양이 눈에 띄었다. 빳빳하고 새하얀 고급 종이에 얇고 검은 붓으로 쓴 지훈의 글. 그 옆에 번쩍이는 주황색의 능소화를, 원우의 사자도 본 모양이었다.
능소화랑 사이가 좋아 보이는구나. 그의 말에 원우가 멋쩍은 듯 웃었다.
“능소화에 붙었던 불꽃이 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네.”
“….”
“꽃무릇에도, 불꽃이 피었던 것이었더구나.”
애써 당겨 올렸던 입꼬리가 더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
“...그걸 어떻게….”
“사자가 소멸에 가까워지면, 제 자아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하더군. ...이건, 몰랐나보네.”
“…….”
“둘 다 같은 수성금화사 임원이었음에도 누군가는 그에 한이 맺혀 불도깨비가 되었고,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사자로써 수백 년 살아왔다는 것이 참 신기하지 않느냐? 운명이란 참….”
“….”
소멸에 가까워지면. 심장은 그 때 철렁 내려앉았다. 소멸에 가까워진다니. 지금의 일이 많아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 급작스레 훅 다가왔다. 제가 모시는 사자가 죄를 씻어내기 위해 채워야 할 이백 년이 다 채워져 곧 끝나간다는 것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원우는 인간의 형체로 돌아갈 수 없기에 감투를 쓰고 있었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순식간에 뭉쳐진 마음의 응어리는 풀어질 생각이 없었고,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사자는 알 수 없을 것이니까.
“...오호...”
애석하게도, 쉴새없이 눈물이 흐른 탓에 가슴팍에 얇은 눈물선이 떨어져 사자에게 숨길 수가 없게 되었다.
“.....”
“네가 우는 것은 꽤나 오랜만인걸. 어릴 적에는 자주 보았는데. 기억 나느냐? 민규가 겁도없이 내게 와서 아픈 널 데려가지 말라 했었는데.”
“.....”
“학당도 가지 않고 널 지키느라 안절부절하던 강아지같던 그 녀석도, 항상 열병을 앓던 얌전한 괭이같던 너도. 벌써 이만치 컸구나.”
“…….”
젖은 감투 끝자락만 애써 매만졌다. 사자는 그것이 원우의 불안함을 나타내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새하얗게 질려 달달 떨리는 그의 손을 잡아 내려주었다.
“머지 않았다. 맑은 날 이슬이 내리기 시작하는 그 시기에, 그 누구보다 강렬한 불꽃을 내어주겠구나, 그 아이에게.”
“당신도…. 그때쯤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겠지. 헌데 난, 과거에 그 자가 떠난 후에 저승으로 온 것 같더군.”
“하루 차이입니다. 다시 인간의 영역에 발을 들인 날은 다르지만, 끝은 같습니다.”
사자는 죽었을 때의 육체 그대로 살아왔다. 원우의 사자는 스무 해를 채 넘기기도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간혹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며 생활할 때는, 원우의 친우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저보다 앳된 얼굴을 하고서는, 곧 세상에서 사라지는 사람처럼 말을 하는 것이 답답하고 화가 났다. 그의 속을 알 리가 없는 사자는 원우의 손에 들린 지훈의 지비를 다시 곱게 접어 소매 속으로 넣어주었다.
“이 사실을 전해주겠느냐? 우지라는 그 녀석에게.”
“누군가의 소멸은.. 인간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호시라는 아이에게는 알려주었으면서?”
“...그건,”
“그 벌은 내가 받는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그래서 하는 말이네.”
“…….”
“걱정 말고 알려주거라. 그 죗값은 내가 치르겠다. 지금의 내가, 무엇이 두렵겠는가.”
이제 갈까? 눈물도 좀 그쳤는 것 같은데. 원우의 대답은 듣지 않은 채로 다시 꽃무릇이 담긴 통을 메도록 해 주었다.
민규는 하루종일 바빴다. 아침부터 나와 마법을 썼고 그 후에는 명호를 데리고 수업을 들었다. 이후에 찬을 데리고 정한이 있는 약초학도의 약방에 들렀고, 그곳에서 석민을 만나 책방으로 끌려갔다. 명호가 기다렸다는 듯 민규의 서책을 한가득 들고 반겨주었다. 이들의 가을 시험 공부를 도와주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한 시진만 자고 나오겠다며 질질 기어나오듯 빠져나왔다.
쌀쌀해진 찬바람을 맡으며 침소에 들어가려고 하던 찰나, 검은 형체가 휘적휘적 동쪽으로 걸어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 형! 언제들어왔어? 문은 또 어떻게 열었어?? 미리 지비로 알려주지! 안 힘들었어?”
“....”
“...뭐야.”
말을 와다다 쏟아내고 난 후에 얼굴을 자세히 보니, 원우의 눈가가 꽤나 붉었다. 덥석 습관적으로 손을 잡으니 얼음장처럼 차가워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평소보다 더 힘이 없어보였다.
“...무슨 일 있었어?”
“사자가... 열어주셨어. 그냥, 얼굴 보러 왔지. 갈게.”
“형.”
피곤한 표정의 원우가 슬그머니 몸을 돌려 민규를 바라보았다. 민규의 잠을 원우가 다 가지고 간 것 마냥 굴었다. 평소에는 혼을 많이 모셔도 이만큼 힘들어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
“사자와 계속 함께 있던거, 맞아?”
“어.”
“사자의 향이... 거의 나질 않는데. 계속 같이 있었을 것 아니야.”
“....”
“무슨 일 있어?”
“...아니. 없어.”
“형,”
“나, 지훈이 보러 가야돼. 미안.”
꼭 붙들었던 민규의 손을 원우가 힘없이 내쳤다. 민규는 당연하게도 힘을 풀고 원우를 놓아주었다.
“....”
“내일 보자. 아침에 명륜당에서 만나.”
스르륵 영혼만 남은 요괴처럼 사라지는 원우의 뒷모습을 보다, 민규는 뒷머리를 괜스레 벅벅 긁으며 다시 책방으로 향했다. 이대로 침소에 가봤자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침소 문을 열자 지훈이 들어앉아 있었다. 몸을 돌린 지훈과 눈이 마주치자, 손에 들고있던 감투를 바닥에 던지고 주저앉았다.
지훈은 화들짝 놀라며 무너지는 원우에게 다가갔다. 얼룩진 감투 천 위에 다시 눈물이 떨어져 또다른 얼룩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씨, 개같은거....”
“...갑자기 돌아와서는 왜 욕이야? 피곤해? 문은 어떻게 열었대? 사자가 열어주셨냐?”
등에 있던 빈 통을 빼내어 구석에 옮겨두고 그 위에 감투를 얹었다. 옷 좀 갈아입으라고 몸을 잡아당기자 그제야 다시 일어난 원우가 지훈을 내려다보았다. 근 3년을 본 얼굴이었지만, 감정변화가 별로 없는 원우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왜 울어?”
“이런 일은, 너한테 더이상 알려주기 싫었는데.”
“지금은 나밖에 없잖아. 뭔데?”
명호는 공부하러 갔다며 겨우겨우 원우를 안정시켰다.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성격이 절대 되지 못하는 지훈은, 한참을 고민하다 원우의 소맷자락을 들어 그의 눈 아래에 대어주었다. 피식 웃음이 난 원우가 톡톡 눈물을 닦더니 지훈과 눈을 마주쳤다.
“...사자가, 곧 소멸해.”
“...어?”
“자기 이름이 뭔지, 언제 어떻게 하다 죽었는지, 어느 이유로 꽃무릇에 달라붙었는지, 아무것도 모르던 그가.”
“...설마.”
“이백년 전 불속에서 스스로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어.”
“....”
“이연과 함께 수성금화사에서 재직했던, 열아홉의 염설炎爇이라는 것도.”
가만히 원우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지훈의 어깨에 고개숙여 얼굴을 파묻고 있던 원우가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 물어보더라. 능소화와 사이가 좋아 보인다고.”
“아.... 정말 기억이 돌아오셨구나.”
“....”
“확인사살 하셨네.”
“....”
“......그, 그거. 쓸거야?”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지훈의 물음에, 원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 위해 현무로 오길 빌었는데.”
“....”
“너도잖아.”
“...나는 내 독각에게 미련이 없어.”
“...거짓말.”
대충 눈치껏 모르는 척 해주라. 지훈의 말에 원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은 많았지만, 애써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어찌 되든 지훈과 원우에게 상처로 돌아올 것만 같았다. 지금 그 상처를 받아주기에는, 제 그릇이 너무나도 작았다.
꽤 시간이 지나 서당 중앙부터 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곧 명호도 들어오겠다며 창을 닫으려는 지훈에게, 원우는 다시 넌지시 물었다.
“...지훈아.”
“어.”
“다시 한 번 더 물을게.”
“....”
명호가 들어오기 전에 서둘러 말을 해야 했다. 책방이 현무와 가장 가깝기 때문에. 주춤할 시간이 없었다.
“너는, 네 독각이 미워?”
“왜 다들 내게 그걸 묻는지 모르겠는데....”
“....”
지훈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웃었다.
“남들은 다, 우리가 져버릴 꽃이라 생각하여 묻는 것 같더라.”
“....”
“너는 어떤데?”
“....”
“그렇게 잊지못해 마지못해 함께 살아가는 네 사자가, 미워?”
질문이 되돌아 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원우가 잠시 고민했다.
“...아니야.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
“요즘 느껴.”
“....”
“왜 네가 그토록....”
“....”
“네 신을 미워했는지.”
“좋아하기도 했어.”
“....”
이제 명호가 진짜 올 것 같으니 말을 줄이라며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댔다. 원우는 그새 장난기가 돋아 일부러 입을 오물오물거렸고, 지훈은 그 모습이 괘씸해 제 책을 힘을 주지 않고 집어던졌다. 시기가 딱맞아떨어졌다. 명호가 문을 벌컥 연 순간과, 원우가 지훈의 책에 맞아 털썩 뒤로 누운 순간이.
“...뭐하십니까?”
“어유. 명호 왔니?”
둘은 알지 못했지만, 해사하게 웃는 원우의 표정을 보고 명호는 안심했다. 잠시 나갔다 들어온 민규가 명호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서 했던 소리가 계속 맴돌았다. 네가 보았을 때 원우 형이 불안해 보이면 날 불러. 괜한 걱정을 했던 것 같았다. 가만히 문 앞에 서 있자, 지훈은 추운데 왜 그리 서 있냐고 말을 걸었지만, 그걸 듣고도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고생.. 하셨습니다.”
“하하, 난 한 것이 별로 없는걸, 뭐. 아. 명호야. 선물.”
“...뭡니까?”
“자명금을 구해왔어. 한동안 밖에 못 나갈 것이야.”
“...!”
“그림 그릴 때나 꽃밭에 있을 때 들으라고.”
그제야 쿠당탕 소리를 내며 안으로 다급히 들어왔다. 심지어 원우가 가져온 자명금은 마반촌에서 구매한 것이었다. 까다롭긴 해도, 잘만 건드리면 지훈이 만드는 곡조도 담을 수 있었다. 반짝이는 눈으로 지훈을 바라보기만 했음에도, 지훈은 필요하면 연주해주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일주일만에 셋이 함께 잘 수 있게 되었다며 명호가 웃었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다른 침소에 비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을 명호에게 미안함이 컸다. 그 때문에 자명금을 사온 것도 있었다.
사형들이 있어 다행입니다. 진짜, 행복해요. 갑작스레 훅 치고 들어오는 어린 사제의 고백을 들은 둘은 그런 낯부끄러운 소리 하지 말라며 손을 휘저었다. 얼른 잠이나 자자며 촛불을 죄다 끄자,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각자 제 위치에서 꽤 고된 하루를 보냈기 때문이라 생각하며 조용히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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