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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호는 운전대를 잡고 액셀을 밟는다. 전방에 장애물이 있습니다, 띠띠띠. 옆좌석에 앉은 문준휘는 라디오를 만지작거리고, 뒷좌석의 최한솔은 헤드폰을 쓰려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앞좌석에 손을 내민다. 문준휘는 자연스럽게 서명호의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내 그 손 위에 얹어준다. 홍지수는 조용히 창문을 내린다. 멀어지는 소음. 깨지는 소리들. 날카롭게 스쳐 쓰라린.

"어디로 갈까?"

서명호가 물었다. 홍지수는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

센티넬의 취급은 객관적으로 말해서 엉망이었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한다면 각성자 전반의 처우가 좋지 않았지만 가이드는 경우에 따라선 인생에 메리트가 있었는데 센티넬에게는 디메리트 뿐이었다. 각 개인이 아무리 강하고 특별하다한들 센티넬은 소수고, 현대사회는 강인한 소수에 의해 지배당하기에는 고도로 문명화되었다. 문명화된 사회도 힘의 논리로 움직인다지만 센티넬은 그런 논리에 의하면 필연적으로 패자였다. 일단 수가 적었고, 응집이 되지 않았다. 게이트가 열리고 재해가 발생하고 갑자기 일상이 디비진다한들 그들 중 상당수는 물 틀면 따뜻한 물 나오는 현대화된 세계에서 살았다. 갑자기 생긴 힘에 얼떨결하는 민간인 출신들이라 생각하는 게 다 달랐다. 백 명의 센티넬이 보여서 센티넬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를 만들자는 주제를 놓고 토론하면 얼마 전까지는 민간인이었던 아흔 명 정도는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하면서 논의가 종료되는 게 재해 초기의 상황이었다. 쉽게 말해서, 기존의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적었다는 거다. 현상유지를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 그들은 와해되고, 극단적인 우생학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서로를 멸시했다.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다가, 그대로 끝이었다.

그러던 중 일부 센티넬들의 비각성자 대상의 테러 행위와 가이드 납치와 기타등등의 범죄행위로 센티넬 전반에 대한 인식이 바닥을 쳤다.

최한솔은 말한다: "핑계 아냐?"

당연하지만 맞는 소리다. 사고치는 놈은 정해져있고 그런 놈들은 각성의 유무와 무관하게 대가리가 썩어빠진 거다. 일반화는 편견과 차별의 흔한 도구고 '기존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은 그들을 유리시킬 핑계를 편리하게 써먹었다. 여전히 재해는 끝나지 않아 센티넬은 필요한 인재고 센티넬의 인권에 대한 담론이든 뭐든 진행은 되고 있다지만, 그런 것들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인권이 유린되고 있다는 증명이기도 했다. 서명호는 고개만 까딱 들어올려 최한솔을 바라본다. 부루퉁하니 억울한 얼굴을 한 게 제법 귀여웠다. (최한솔 무릎 위를 태평하게 차지하고서 하기엔 우스운 생각이었다.) 최한솔은 센터에 소속된 어린애들 중에서는 비교적 늦게 각성한 편인데, 그래서인지 사고방식 같은 게 '보통 사람'같은 구석이 있었고 서명호는 그 애의 그런 점을 좋아했다. 팔을 쭉 뻗어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면 얌전해지는 것까지, 최한솔은 '애'였다.

"또 왜?"

동글동글하게 뭉그러지는 발음. '또'라는 데에서 알 수 있지만 최한솔이 이런 불평불만을 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서명호는 신중한 청자이기에 늘 듣던 불평이라도 성실하게 들어주는 편이며, 최한솔은 그런 그를 믿는 구석으로 여겼다. 그 애는 시큰둥하게 대꾸한다.

"얕잡아볼 걸 찾는 거 같아."

생략된 앞뒤의 사정을 같은 곳에서 거주하는 서명호는 안다. 최근 각성자들이 그들의 권리 보장에 대해 시위하던 중 감정이라도 격해졌는지 폭주를 한 탓에 소소한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인명피해가 없었던 건 그 시위에 참여한 다른 센티넬들이 그를 제압해서인데 대부분은 시위 중 재산피해가 발생했다는 데에 초점을 둬서인지, 요즘 안쪽이 영 뒤숭숭했다. 익숙해졌어도 예민한 서명호도 스트레스로 위에 구멍 하나 뚫었으니 아직 익숙해지지 못한 최한솔은 불안해할 만했다.

으응. 서명호는 웃음소리를 낸다. 무언의 이해였다. 머리카락에 닿아있던 손이 미끄러져 뒤통수에 닿고, 최한솔의 위에 앉아있던 서명호는 몸을 돌려 그 애를 끌어안고 토닥인다. 거죽과 지방의 물렁함보다도 뼈의 단단한 윤곽이 느껴지는 얄팍한 육신은 끌어안겼다해서 썩 안정감을 주지는 못했지만, 콩콩 뛰는 심장소리는 규칙적이라 최한솔은 그런 사소한 부분에서 위안을 얻어보려고 노력한다. 어렵지는 않다. 그 애는 타고난 자질 자체가 무던하고 금세 적응하고 느슨한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최한솔은 서명호의 태도에서-그리고 자신이 아는 서명호라는 인간에 대한 정보값을 통해-그가 자신이 겪고 겪게 될 부당한 처우에 대해서 꽤 끈질기게 고민을 해왔으리라는 걸 유추해낸다.

원죄의식을 불어넣으려는 각성자들에게 제공되는 교육과 생활은 사실…그들이 뭘 의도했는지와는 별개로 썩 효과적이진 않았다. 죄의식 때문에 비굴해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보다 많은 이들이 불필요하게 분노했다. 혐오와 공포와 분리를 목표로 하면서도 편리하게 사용하고 싶어한다는 건 모순됐다. 외출 하나 하려고 해도 다섯 종류 검사와 열 장 정도의 서류를 작성해야 하는 처지라고 한들(그리고 동반해줄 가이드도 필요하다) 그들은 인간이다. 짐승이 아니다. 인간을 짐승 취급하면서도 다수에 대한 연민을 요구하는 곳에서 지내는 건 사람을 망가뜨린다. 인지부조화는 정서적 안정에 극독인 법이다. 최한솔을 제 머리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이 안에서 얼마나 있나 싶었다. 어린 최한솔은 암담할 정도로 비굴하거나 당황스러울 정도로 분노에 차있는 사람들을 견디기엔 섬세하고 정이 많았다. 맞닿은 체온을 싫지 않다고 느낄 정도로는 그랬다.

최한솔은 묻는다. 화제의 전환은 기분이 괜찮아졌다는 신호다.

"형 다음주에 또 임무 나간다며." 별개로 화제 선정 자체는 또 금방 기분이 나빠질만한 것이다. 어쩔 수 없지만 이곳의 일상은 단조로워서 저런 것밖에 할 말이 없다.

"응, 쭈니 형이랑. 슈아 형이 갔던 거 마무리." 그게 뭐였지. 최한솔을 눈을 굴린다. '슈아 형'이라 불린 홍지수-조슈아 지수 홍-이 최근에 나선 현장이 한두 개가 아니라 영 모르겠다는 결론이 나온다. 지난 주 기준으로 세 개니까 그 셋 중 하나일 거다.

"마무리라 해도 요즘 좀 잦지 않아?"

"걱정돼?"

"그럼 걱정되지, 안 하겠어?"

서명호가 웃는다. 굴러가는 웃음소리. 최한솔은 서명호가 자기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 것 같아 다소 서운해진다. 그가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걸 알아도 그렇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최한솔은 알 나이다. 하지만 그가 제 말에 귀를 기울여줬음에도 자신과 같은 걸 느껴주지 않아 속이 상할 만큼은 어리다. 나이 차이보다는 경험의 문제였다.

서명호는 꽤 일찍 각성했다. 국가마다 각성자 대우와 교육과 기타 등등에 대한 차이가 있는데, 비교는 필요없을 정도로 도토리 키재기니 그가 어떤 환경에서 교육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걔가 한국에 덜렁 떨어진 데에 서명호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만 알면 된다. 각성은 여덟 살, 한국에 파견된 건 열두 살. 당시 한국에 정신계 센티넬과 그와 '유사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센티넬이 없다는 게 그와 문준휘가 말도 안 통하는 타국에 내던져진 까닭이었다. 그들의 의사도 그들 가족의 의견도 반영되지 않았고 오로지 윗분들의 손익계산과 당시의 법제도와 사회적 합의 기타등등으로 결정된 그들의 위치는 영 애매하다. 한국에 온 지는 제법 됐다지만, 일단은 파견직이라 소속이 애매했고, 남의 손을 잘 탄다지만 기피순위로 최상위권을 달리는 정신계 센티넬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보내진 만큼 깊게 친해진 사람은 적었다. 감성적이고 섬세하지만 예민하고, 상냥하고 정이 많아 쉽게 상처받았고, 그런 거 치곤 꽤 유연하고 요령도 좋았지만, 최한솔이 생각하는 서명호는 그냥 좋은 사람이었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자기 머리로 생각해서, 현상에 적응해버린 사람이기도 했다.

"버논아, 나는 그래도 이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그래서 최한솔은 종종 서글퍼진다. 서명호는 그를 '최한솔'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틈에서 몇 안되는 그를 '버논'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서명호 특유의 동그란 발음 속에서 최한솔은 버논아, 보다도 버노나, 가 되어가고, 그건 서명호와 최한솔이 서로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최한솔은 가끔 서명호와 다른 걸 생각한다고 느끼거나, 기껏해야 한 살 많은 그가 왜 저런 사고를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느낀다.

서명호는 "불안해서 못 견디는 거잖아. 이해할 수 있어."라고 말한다. 서명호는 센티넬을 '칼을 든 어린애'에 비유하는 종류였다. 악의가 있을거라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런 '사람' 곁에 가족이나 친구같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기 싫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걸 넘어선 혐오나 차별이나 기타등등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는 이해의 영역에 있는 것엔 냉소적으로 굴지 않았다. 그를 이해하지 않더라도 그러는 걸 현명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서도.

최한솔은 대답하지 않는다. 심통이 난 최한솔을 서명호는 들여다본다. 서명호는 말하자면, 최한솔의 뻗댈 구석이었다. 각성 직후에 센터에서 겉도는 최한솔을 그들 무리에 데리고 온 건 홍지수였지만 그를 실질적으로 돌본 건 서명호라서다. 당시의 최한솔은 집에 돌아가고 싶어서 훌쩍거리는 어린애였는데, 서명호는 최한솔에게 울지 말라고 윽박을 질렀다가 끌어안고 토닥여주다가 계속 옆에 붙어있거나 하면서 정을 붙였다.

그런 서명호는 또 동향인이라는("준훼이랑 내가 살던 곳은 여기서 내 고향까지 가는 것보다 오래 걸리는데 동향인이라고 해도 돼?")문준휘가 보살피고 그 문준휘는 또 홍지수랑 붙어다니고 그랬으니 돌봄의 연쇄같은 게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그 드센데 서투르고 정 많은 서명호는 자기보다 어린 애 위로하는 법 따윈 티끌만치도 모르면서도 최한슬을 보살피려고 들었고, 최한솔이 자신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납득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려고 노력했다.

나는 내 가족들 옆에 삐끗하면 터지는 시한폭탄 같은 거 두기 싫어. 최한솔도 그것만큼은 이해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형 아직 미성년자잖아." 그러니까 '그것만큼은' 이해했다는 거고, 그 외의 부분은 대체로 언짢았다.(애정을 담아서.)

"슈아 형도 마찬가지인데."

"슈아 형은 요즘 왜 그런데?"

홍지수는 원래 온건파였다. 센터엔 성인도 미성년자도 있지만 아동학대에 대한 비난여론으로 만 십사 세 미만은 현장은 못 나가고 미성년자는 파견될 수 있는 재해에 제한이 있고 그런데, 말이 제한이 있다지 실상 인력난이니 실적이니 뭐니 하며 되는대로 파견하고 그랬다. 홍지수는 그런 작금의 세태에 대해 방긋방긋 예쁘게 웃는 얼굴을 하고선 요령 좋게 빠져나가는 인간이었고 그의 그런 종류의 '요령'은 문준휘를 거치고 서명호를 통해 최한솔에게도 전수되었는데, 그런 그가 최근 연구팀에 들어온 사람들이랑 친해지더니 영 요상하게 굴었다.

사람이 달라졌다, 수준은 아니었다. 일단 그 정도로 달라졌으면 문준휘가 서명호나 최한솔의 닥달에 못 이겨 징계를 감수하고(센터 내에서 서로에게 능력을 사용하는 건 금지되어 있다) 홍지수의 심상에 침범했다가 극대노한 홍지수에게 '애들이 부탁했다'고 말하며 넷이 아웅다웅 싸우면서 뭐라고 갈피는 잡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불편함을 감수할 정도는 아니었다. 남들 세 번 갈때 온갖 오령으로 한 번 가장 안전한 곳으로 다녀오던 인간이 사선을 가리지 않고 오다니는 걸 볼 때면-그러면서도 다치는 일은 없었다는 게 홍지수의 역량이니 감탄스럽긴 하다-최한솔은 저 형이 뭘 잘못 먹었는지를 생각하곤 한다.

홍지수는 원래도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는 무르고 다정한 것들을 모아다가 콘크리트와 송곳같은 걸 섞어서 예쁘게 빚어낸 듯했다. 폭주 위험도가 높은 대신 끔찍할 정도로 강하다는데, 현장에서의 그를 마주해본 적 없는 최한솔이 볼 수 있는 홍지수는 기타를 둥당거리고 맨날 똑같은 노래를 흥얼거리고 단 거 싫어한다면서 트윅스를 간식창고에 꼬박꼬박 쟁여두는 모습이 전부였다. 그가 겉돌던 최한솔을 제 무리에 데리고 와준 건 맞지만 당초에 그들 무리는 아웃사이더 집단이었고 개인플레이 성향도 강했다. 다들 외로움을 타면서도 '다른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 영역을 가졌다. 서로에게 불필요할 정도로 '잡히지' 않을 것이 그들 집단에 속할 조건이라도 되나 싶었다. 홍지수와 문준휘는 상냥하고 다정하지만 선이 뚜렷했고, 홍지수는 '모두에게' 일관적인 걸로 선을 긋는다면 문준휘는 원하는 모습만 보여주면서 선을 그었다. 서명호는 얼핏 보면 오는 사람 아무도 안 막고 아무것도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굴었지만, '영향을 받는 것'과 '침범'을 구분했다. 최한솔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사람은 좋았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그들 넷은 그런 부분들이 비슷해서 편했다. 동류거나 이해가 가능한 지점이 있거나 소속되지 못해서 소속되거나 하면서, 서로에게 애정인지 전우애인지를 느꼈다. 그게 굉장한 벡터값을 지닌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사람이 오래 보거나 외롭거나 하면 머리 한구석이 약간 망가지기라도 하는 건지("너무 비관적이네." 서명호는 새초롬하게 쏘아붙인다.)홍지수는 가끔 그들을 '돌봐야'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개월수로 치면 얼마 차이 안 나는 문준휘는 가끔 그걸 떨떠름해하는 티를 냈다. 서명호부터는 아무 생각 없었다. 고로 최한솔도 별 생각 없었다. 그들은 그냥…이렇게 살 것 같았다. 주변이 엉망이 되든말든 그들만큼은 언제나와 같은 상태로. 무변화. 현상유지. 괴리감. 하지만 어차피 그들은 서로를 제외하고는 소속될 수 없으니 괜찮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홍지수는 변했다. 최한솔은 그게 꽤 불만스러웠다.

변화는 언제나 외부요인에 의해 발생한다. 최승철과 윤정한은 최근 채용된 연구원이었다. 최승철은 일반인이고 윤정한은 가이드였는데, 둘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다는 게 특이점이라면 특이점이었다. 직장에서도 친구와 함께 지내는 건 좋은 일인가? 최한솔은 모를 일이다. 최한솔은 '직장동료'가 이탈하거나 미치거나 죽지 않는 이상 넓은 의미로는 같은 곳에 소속되어 있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홍지수가 그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건 그의 취약성, 툭하면 폭주하는 주제에 끔찍하게 강해 가이딩조차도 어려워 '써먹기 곤란하다'는 판정을 기어코 받아낸 이후의 일이었다. 연구원 신분인 둘이었으니 아마, 그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함이었을 거다.

"AS받는 것 같네."

홍지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자신을 파편화하고 무기물처럼 묘사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게 홍지수 나름의 불쾌함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표정을 구기지 않는다. '잘못하지 않은' 사람에게 화풀이하지 않는다. 설령 그들이 받아줄 의향이 있다 하더라도, 홍지수는 자신의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때 수치심을 느꼈다. 그는 침범을 바라지 않는다. 옆에 누군가가 있어주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홍지수는 그 연구원들에게 정을 붙여버리면서 변했다. 문준휘가 조잘거릴 때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응, 응, 그랬구나. 하면서 이야기를 들어주던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비중이 늘었다. 이 '자기 이야기'는 그의 주변 사람들, 그날의 일들, 최근의 특별한 일들을 포함하는데, 홍지수의 말 속에 이전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등장했다. 무서워보이지만 사실 잘 삐져, 만만해, 걔는 장난이 심해, 그래도 착해. 뭐 그런 말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꽤 큰 사건이었다. 홍지수는 사람을 좋아했는데, 사람한테 관심이 있진 않았다. 누구에게든 친절하게 대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을 좋아했지만 그가 엮이기를 선택하는 사람은 대단히 많지 않았다. 선을 단계별로 그어서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들에게는 쉽게도 마음을 열어줬다. 서운하지는 않았다. 질투가 나지도 않았다. 홍지수에게도 의지할 구석이 필요한 법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를 하고는 있다지만 홍지수는 꼴에 형노릇을 하려고 들어서 그들에게 아주 의지하지는 않았다.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기뻐, 는, 의지하고 있다가 아니다.

경계를 그어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느껴진다. 홍지수는 그들을 보호하고 싶어한다. 좋아한다. 아끼고 있다. 어떠한 동류에 대한 의리를 느낀다. 하지만 의지하지 않는다. 존재만으로도 의지가 된다고 말하지만 개개인에게 의지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문준휘에게는 좀 했다. 둘이 나이차이는 '년'보다는 '달'단위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친구같은 형은 형이지 친구가 아니다. 홍지수는 대등한 타인을 바랐다. 그를 얕잡지 않고, 동정하지도 않고, 질투심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는 무력하고, 적당히 선량하고 다정한 보통의 사람을…

"원한 거 아냐?" 여기까지가 최한솔의 추측. 둘의 자세는 그 사이에 바뀌었다. 둘 다 바닥에 찰싹 늘러붙었다. 문준휘가 돌아오면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문준휘의 상담이 좀 오래가는 모양이었다. 정신계 능력자들이 흔히 겪는 후유증은 문준휘라도 피해갈 수 없다. 서명호는 대답한다.

"슈아 형이 말 안 하면 모르지."

"그 형은 말 안 하잖아."

"그러니까 몰라."

서명호는 심드렁하다. 서명호도 홍지수를 좋아하지만 홍지수의 저런 태도에는 약간 삐져있다. 진심으로 빈정이 상했다는 건 아니고, 딱 애교스러운 수준으로 나 언짢아요, 하는 정도다. 홍지수는 서명호의 그런 태도를 귀여워할 거고 서명호는 홍지수가 귀여워하면 알아서 기분 풀 테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없다. 최한솔과 문준휘는 그러려니 하고 있다. 아닌가? 솔직히 조금 언짢나? 우리만 있으면 될 것같이 굴어놓고선 진짜 좋아하는 건 다른 놈들이구나 이 배신자…라고 생각하고 있나?

"질투해?" 서명호가 묻는다. 최한솔은 순순히 인정한다.

"조금."

그러면 서명호는 꺄르르 웃는다. 웃음소리가 높고 천진하다.

"말하면 되잖아."

"싫어."

"왜?"

"그 형 웃기만 할 걸." 삭막한 감상.

"그건 그래." 서명호까지도 동의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홍지수가 어떤 인간인지가 드러난다. 형 정말 좋아하지만 솔직히 좀 거리감 느껴진다. 그런데 우리 잘못 아니고 형 잘못으로. 그런 이야기를 해도 그는 큰 눈 예쁘게 접고 눈썹 내리면서 정말 미안해.(아마 여기서 발음을 뭉개느라 미아내.가 되겠지.)많이 서운했어? 앞으론 안 그럴게. 해놓고선 그대로 굴겠지. 안 봐도 뻔했다. 그의 그런 점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싫진 않다. 좋지도 않았다. 그는 좋아하지만 그의 모든 부분을 좋아하진 않았다.

이후에는 대화의 소재가 떨어져 이야기가 단순해졌다. 최근의 플레이리스트 공유, 알고리즘을 발굴해서 찾아낸 괜찮은 아티스트 공유하기, 감상 나누기, 영화 동호회(멤버는 둘 뿐인) 일정 잡기, 쿠팡으로 구매했다는 적당한 가격대의 주전자의 성능이 생각보다 좋았다는 얘기 등. 자연스럽게 시간 내서 차 마시고 영화를 보자는 멋진 휴일 일정이 정해진다. 그런 뒤엔 다시 영화 정하기. 기존에 본 영화에 대한 감상평. 감독과 배우에 대한 이야기.

서명호는 불만스럽게 말한다. "쭈니 형 언제 오는 거야?"

상담이 길어진다고 한들 그건 기본적으로 예약제다. 센티넬 중에선 정신이 약해진 사람들이 많으므로 예약은 빼곡하게 채워져있고, 문준휘는 능력의 특성과 그 희소성 때문에 '우선순위'가 높은 내담자긴 하지만 그에게 주어질 수 있는 건 한 명 분의 시간이 추가로 주어지는 정도다. 지금은 한 사람 반 분량이다.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있던 서명호가 몸을 일으킨다. 최한솔은 연락 온 게 있는지를 확인한다. 없다. 불만과 불안을 느낀다.

둘은 문준휘를 찾으려고 했다. 문준휘와 홍지수가 같이 있을거라곤 생각을 못 했을 뿐이다. 홍지수가 문준휘에게 무언가를 묻고 있고, 문준휘는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산뜻한 목소리로 홍지수는 묻는다.

"여기서 나가고 싶어?"

앞뒤의 맥락을 듣지 못한 둘에겐 저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문준휘의 낯을 보면 홍지수가 이상한 소리를 한 게 맞긴 한 모양이다. 과장됐나 싶을 정도로 황당한 얼굴이었는데, 문준휘 이목구비가 선명하다보니 멀리서도 잘 보이는 게 우스웠다. 문준휘가 그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말과 말이 겹쳐지면 구분해내기가 어렵다. 목소리가 서로 엉겨붙어서, 그걸 내뱉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둘을 떼어낼 수 없게 되어버린다.

하지만 문준휘는 그에게 무언가를 대답했다. 홍지수가 들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날 이후로 홍지수는 사라졌다. 당연하지만 그들에게 한 마디 설명도 하지 않았으며 이는 서명호를 몹시 분노하게 했다.

*

윤정한은 홍지수가 장기-고위험-그 외의 해당 건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 과정에서까지 배운 모든 부정적 어휘가 붙은-임무에 자원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눈가가 붉어져있는 걸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의 뒤에 앉아있던 최승철이 입을 꾹 앙다물고 있는 건 계속 눈에 들어왔다.

홍지수가 없어졌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달라지진 않았다. 최한솔도 가끔 그들을 따라 현장에 나갔고, 현장의 센티넬 취급은 더 거지같다고 생각하고, 가끔 싸움나는 동안 저녁에 뭐 먹을지를 고민하며 뒤로 빠져있다가 거북이 등 터졌다. 정말 별일 아니었다. 가끔 서명호와 그의 능력을 두고 '유독성 인간과 마약인간 중 어느 쪽이 더 멸칭인가'에 대한 자조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서명호의 능력은 세밀하게 말하자면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쪽이고 그는 제 능력으로 취향인 향이나 만들고 싶어했다)늘 있던 일이며, 상담 시간에 틀에 박힌 이야기를 해서 빨리 빠져나오는 요령을 터득한 것도 별거 아닌 일이었다.

홍지수에게선 아주 가끔 편지가 왔다. 윤정한과 최승철에게 보내는 봉투 속에 그들에게 보내는 게 한 통씩 들어있었는데, 홍지수는 글씨를 참 못 썼다. 말하기 듣기는 되는데 읽기에서 버벅거리는 둘을 위해 최한솔은 가끔 그걸 차근차근 읽어줬고, 내용은 늘 비슷했다. 잘 지낸다.(언제나처럼 거지같다는 뜻이다.) 낯선 사람들이라 어렵긴 하다.(미친새끼들 존나 많다는 거다.) 가이딩 부족 때문에 가끔 어지럽다.(센티넬 대우 좆같이 한다는 거다.) 쿠션어로 잔뜩 뒤덮인 문장들은 옛날의 홍지수같았다. 그의 문장에는 더는 낯선 타인에 대한 사적 친애가 묻어나오지 않는다. 그가 들일 수 있는 사람의 한계선이 이 이물질 세 개와 '보통'의 두 명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냥 그가 마음에 들일만한 인간이 안 나타났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들은 홍지수 없이도 잘 지냈다. 솔직히 잘 지내진 않았고 적당히 끔찍하게 지냈다. 매일매일이 시끄러운데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싸우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고 그냥,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으면서 둥둥 떠다녔다. 그게 처세였다. 집단이 커지면 내부에서 급을 나누는 법이고 그들은 어디 좀 큰 곳에 소속되면 운이 좋아야 열외순번이 되리라는 걸 알았다. 기피대상 둘에 순종적이진 못한 하나. 그들을 원하지도 않고 그들도 원하지 않으면서 형성된 평화는 불온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불온하더라도 평화는 평화다. 최한솔은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만큼 비관적이고 우울한 사고에 노출되기 쉬운 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사소한 지점에서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다. 좋아하는 영화의 재개봉, 아니면 그걸 봐주기로 약속한 좋아하는 형, 최근에 사귄 친구같은 존재는 최한솔을 그럭저럭 즐겁게 해줬다. 많은 걸 바라지 않는 사람은 게으르다 비판받지만 각자의 최선은 또 다른 법이다. 최한솔은 자기 자신을 지키고 싶었다. 그리고 서명호와 문준휘와 자기들을 두고 간 홍지수까지는 무사했으면 한다. 윤정한과 최승철과 최근 친해진 부승관 이찬, 이런 애들까지는 그래도 마음을 쓸 수 있다.

최한솔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안다. 가족들에게서 연락이 올 때마다 목소리에서 피로와 불안이 짙어져가는 걸 알고 센터장이 바뀐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뒤숭숭한 분위기를 인식은 하고 있다. 알면, 알아서, 최한솔이 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생각을 멈춰선 안 된다지만 최한솔은 '좀 더 어린 시절의' 서명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곤 했다.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그도 아주 괜찮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는 걸 알았다.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홍지수는 말 없이 떠났고 예고 없이 돌아왔다. 좆뺑이를 쳤는지 얼굴에 살이 쪽 빠졌는데 신기하게도 낯짝이 상한 구석은 없었다. 미인이 살이 오르면 동그랗고 귀엽고 미인이 살이 내리면 퇴폐적이라 매력적인 법이라는 걸 증명하듯이, 안색은 후진데 낯짝은 반지르르했다. 홍지수는 새로 임명된 센터장의 뒤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저쪽 연구진 측에서 최승철이 뒷목 잡고 쓰러지는 시늉을 하고 있는 걸 봐선 홍지수가 지좆대로 굴긴 굴었던 모양이라고, 최한솔은 머리 좀 굵어진 티를 내며 생각한다.

그리고 딱 이틀 뒤 홍지수는 그들 셋의 보호자 자리를 꿰찼다. 센티넬과 가이드의 특이성을 고려한 각성자로 등록된 사람들에게 허용되는 일종의 입양제도 같은 거였는데, 기존의 가족관계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걸 특징으로 했다. 아무튼 가이딩을 한다고 상대와 사귀고 싶진 않거나 가족은 되고 싶어도 결혼은 싫거나 하는 경우정도는 존재하는 법이다. 제도적인 권리와 의무를 설정해서 남들에게 설명이 쉬워진다는 의의가 있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센티넬과 가이드의 특이성을 고려한 것이며 절차가 번거로운데 홍지수는 그걸 했다. 보통 그 과정에서 쌍방의 동의와 꽤 복잡한 절차가 존재할텐데 그런 과정까지도 스킵했다. 어디서 좆뺑이를 쳤는지 남의 뒤를 닦아준건지는 모를 일이었는데 홍지수는 그걸 숨길 생각도 안 했다.

문준휘는 "형 진짜 제정신이야?" 라는 말로 홍지수에게 항의한다. 홍지수는 그저 웃어넘긴다. 그는 동생 셋이 기겁하고 경악할지언정 누가봐도 좆뺑이의 결과물 중 하나인 걸 거부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 거 같았다. 그게 손익계산이든 정에 물러지는 거든 홍지수는 옳았다.

비유하자면 라인을 탄 거였다. 가족같은 형태로 상대를 묶어둔다는 건 꽤 힘이 크다. 진심을 다하고 있다, 얘네는 내 사람이다, 건드리면 후환이 두려울 거다. 썩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속되게 말해 졸라 튀었다-홍지수는 권력을 남용하고 그런 인간은 아니라 적당히 아니꼬운 소리 몇 번 듣고 말았다. 사실 좀 자주 들었다. 그는 어깨나 한 번 으쓱이면서, "예수님도 싫어하는 사람은 싫어하던데 날 싫어할 수도 있지."하고 기도하러 갔다. 홍지수는 라인 타기 전에도 대부분의 거슬리는 소리를 못들은 척 넘기는 데에 재주가 있었으니(사실 그들 다 그쪽 분야에서는 꽤 재능있긴 하다)변함없었다 볼 수 있다.

달라진 건, 그러니까, 얼마 없었다. 센터 밖으로 가끔 나갈 수 있었다. 홍지수와 가이드 둘 정도의 동행이 필요하긴 했지만 절차가 간소해졌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한겨울에 놀이공원을 가게 된 건 다소 어이가 없었으나, 본인이 즐거워보여서 그러려니 했다. 달라진 건 그정도다. 약간의 운신의 자유가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는 점. 홍지수가 돌아왔다는 점. 고개를 돌리면 홍지수가 윤정한과 편먹고 최승철에게 장난을 치다가 삐진 최승철을 달래주는 게 보였다. 좋아보였다.

*

문준휘의 생각은 달랐다. 평화를 바란다면 변화는 없어야 했다.

냉소적인 사고라고 비판받을 수는 있겠지만 문준휘는 그가 겉으로 보여주고 싶어하는 이미지보다 신중했다. 남의 머릿속을 주무를 수 있는 각성자는 드물고 문준휘만큼 패널티가 적은 케이스도 적다. 자아분열은 흔한 케이스고 어린 시절에 각성한 정신계열의 센티넬들의 정신방벽은 연약하다 못해 무른 수준이었다. 문준휘는 자신의 아역배우 이력이 '자신'을 지켜내는 데에 유의미한 기여를 했을지에 대해 종종 생각하곤 했는데, 필연적으로 지나간 꿈에 대해 회상하게 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만뒀다. 문준휘는 그런 걸 꽤 잘 하는 편이었다. '의도'를 담아서 하거나 하지 않거나를 정하고, 스스로를 통제하여, 원하지 않는 자기 자신은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문준휘가 제 약한 지점을 내보일 때는 더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폭발했거나 불가피한 사유로 서로한테 관대해졌을 때에 한정된다.

문준휘는 영특한 애였다. 각성자 팔자는 뭘 해도 사납다지만 문준휘는 그런 최악 중에서는 최선이 될 수 있다. 연민을 느끼는 짐승 취급을 받으면서 자신이 인간임을 잊지 않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고독해지는 거다. 진심을 다하면 다할수록 쉽게 상처받는다. 물론 그는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는 어린애였지만 다행스럽게도 처세엔 능숙했다. 저보다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는 안 통할지라도 정신연령같은 게 또래라면 잘 통했다. '필요'에 따른 교류. 주고받기. 이해타산. 가끔은 외로웠지만 덜 얽힐수록 자유롭다는 걸 깨닫자 사람들 틈속에 억지로 제 자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됐다. 그건 정말, 너무나도 외로운 동시에 편리한 일이었다.

홍지수와 서명호는 그런 문준휘의 불가피한 예외였다.(후에 최한솔이 추가된다.) 둘의 공통점은 만리타국에 내던져진 불시착 이방인이라는 점이고, 그걸 제외하면 글쎄, 다른 사람이었다. 어떤 공통점이 있어서 그들이 문준휘의 예외가 됐다고 하긴 어렵다. 홍지수는 문준휘의 동류고 서명호는 상극이었다. 선을 넘지 않으면서 서로를 존중하고 외롭지 않은 선에서 교류를 하면서도 섬세하게 살피는 건 홍지수고, 서명호는 맞지 않는 부분이라도 죽어라 두드려가면서 서로에게 맞춰가야하는 부류였다. 어느 쪽과 더 많이 싸웠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거다. 막상 홍지수는 서명호와 그닥 싸우지 않았는데, 문준휘와 홍지수의 사회적 페르소나의 결이 달랐기 때문일 수도 있고 동류라고는 한들 문준휘와 홍지수는 다른 인간이라 그랬을 수도 있다. 비슷해서 괜찮은 사람과 정반대인데 '어쩌다보니' 괜찮아진 애. 후에 홍지수가 통보하듯 데려온 얼마 전까지는 보통이었던 어린애. 문준휘는 이미 그 시점에서 포화상태였다.

마음에 총량이 있다면 문준휘는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부분은 가족에게, 그 다음으로 좋은 부분은 그들에게 예비해두었다. 그런 뒤엔 남는 게 없다. 자신을 지키는 데에 남은 마음을 전부 다 썼으니까. 한 명분의 마음이 작진 않았지만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데엔 생각보다 많은 양의 마음이 필요하다. 부족한 부분은 보기보다 정이 많은 동생들이나 저래보여도 형노릇을 하려는 홍지수가 채워줬는데, 문준휘는 딱 그 상태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최악 중의 최선이었지만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상에야 이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문준휘는 지금의 삶에 큰 불만은 없었다. 가족들은 잘 지내고 있고, 일과 취급은 거슬리지만 그 특성상 홍지수처럼 앞에 나서는 일도 적어 비교적 안전한 편이었다. 제공되는 숙소의 옆방에는 아끼는 동생들과 형이 있었고, 소소한 취미생활을 하면서 규칙적이고 지루한 인생을 사는 데엔 지장이 없었다. 그들은 어차피 이방인 속의 이방인이었다. 개선을 바란다 하더라도 그들의 무리에 넣어줄 리가 없었고 넣어준다 하더라도 최악 중의 최악을 보면서 자기위로하는 데에나 쓰일게 뻔했다. 문준휘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들도 같은 걸 생각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홍지수는 묻는다. "여기서 나가고 싶어?"

그날 그의 표정을 볼 수 있었던 건 문준휘 뿐이었다. 서명호와 최한솔이 문준휘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는 건 홍지수는 그들로부터 뒤돌아있었음을 뜻한다. 그의 기묘한 낯을 기억한다. 온순하게 웃고 있는데 눈만 새카맣게 죽어서 번들거렸다. 잘못된 확신에 빠진 사람들이 저런 얼굴을 했다.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가축이 되길 선택하려는 사람같았다.

문준휘는 그를 말리고 싶었다. 그가 잘못된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지금이 최선이라서, 조금이라도 잘못된 선택을 했다간 돌이킬 수 없어진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미 선택한 건 돌이킬 수 없다. 그걸로 끝이다. 그러니까 선택은 신중하게 해야한다고, 좀 더 생각을 해보라고, 왜 굳이 다른 길을 가야하냐고 쏘아붙이려다가 문득 문준휘는 아연해진다. 홍지수는 그와 동류다. 비슷한 인간이다. 그가 문준휘도 생각할 수 있는 걸 생각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했음에도 저러고 있는 거면 이 질문에는 의미가 없다. 결정을 내렸으니까. 이건 그냥, 그가, 아끼던 인간들에게, 너희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걸 주고 싶다고 선포하는 거다.

홍지수는 그걸 해냈다.

그래서 문준휘는 불안했다.

*

서명호는 정이 많다. 이 정은 '사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걔의 성장과정은 사람을 삭막하게 만들 법도 한데 서명호는 운이 좋았는지 꽤나 줏대있는 성정을 가진 건지 쉽게 사랑하고 쉽게 마음을 열었다. 옛적에 막 둘이 이곳에 내던져졌을 때 문준휘는 서명호의 이런 천성을 걱정했다. 대단히 친하던 시절도 아니었으나 유일한 동향인 동생이 낙담과 좌절에 익숙해지길 바라지 않을 정도의 전우애는 있었다. 그의 우려와는 달리 서명호는 잘 지냈다. 진심에 진심을 보답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진심을 돌려받는 경우도 있었고, 서명호는 그걸 정을 줘도 괜찮은 인간을 걸러내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였다. 씩씩하고 뺴지 않는 건 서명호가 가진 것 중 가장 뛰어난 재능이다.

문준휘는 사람 머릿속을 주무를 수 있어서 위험분자였는데 서명호는 유독해서 위험분자였다. 잘 쓰면 감기약인데 잘못 쓰면 극독이고, 악용하려고 들면 약물중독자를 대거 양성할 수 있고 어쩌고저쩌고. 서명호는 뭔 소린지 못 알아들었다. 센티넬의 '역량'은 본인 능력에 대한 이해도와 응용능력 이런 거에도 일정 부분 좌우되는데 그런 점에서 서명호는 어떤 때는 압도적으로 우등생이없고 다른 때엔 터무니없을 정도의 열등생이었다.

꾸역꾸역 자기 능력에 대한 이해를 밀어넣을수록 그는 그걸로 향이나 조향해서 홍지수랑 어떤 것이 더 취향인지 얘기하고 싶어했고 딱 그만큼 약해졌다. 그의 '약해짐'과 관련된 건은 최한솔에게는 전해지지 않고 문준휘와만 논의한 사안이다. 자신이 사용될 수 있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축소하려는 시도는 약삭빠른 짓이었지만 서명호는 그걸 해냈다. 운이 좋아 들키지도 않았다.

그는 그랬다. 악용이 되려고 하면 밑도 끝도 없이 악용될 수 있는 걸 가지고 본인 역량 부족을 핑계삼아 스스로에게 선을 그어뒀다. 많은 걸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순간 더 잘못된 방식으로 '쓰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거짓말이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부당한 대우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시도는, 선의 뒤쪽에 있는 방식으로 실현됐다.

그러니까 서명호는 정말, 괜찮았다. 꽤 오래 괜찮았었다.

의외로 서명호의 한계는 그가 정이 많은 인간이라서 찾아왔다. 홍지수가 돌아온 뒤 서명호는 조금 더 많은 곳을 갈 수 있게 됐다. 그 과정에서 자주 동행하게 된 가이드들과는 기존의 삭막한 가이딩을 주고받는 직장동료를 넘어서 친구가 되기도 했다. 앞선 홍지수의 사례에서부터 알 수 있는데, 이게 문제였다.

그들이 나쁜 사람이었다는 건 아니다. 그들은 서명호와 동갑이었고, 각성이 비교적 늦었으며, 그 나이대 남자애들의 평균치와 비교하기엔 부끄러울 정도로 섬세하고 상냥했다. (사실 센터 내부의 또래들은 그들의 주변환경 때문에 밝고 명랑하기 어렵긴 하다.) 서명호는 그들이 정말 좋았다. '정말'이라는 것은 진심을 담은 강조다. '그냥' 좋았던 게 아니라 아주, 많이 좋았다. 그들도 서명호를 정말 좋아했다. 그들은 서명호의 어눌한 발음을 놀리지 않았고, 그의 감성적인 지점을 비꼬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석민은 서명호를 끌어안고 "명호야, 잘 잤어?" 같은 말을 하는 애였고, 김민규는 서명호에게 좋아하는 와인바를 같이 가자고 제안해주는 사람이었다. 그 과정에서 제출해야 할 서류와 번거로운 절차같은 걸 감안해주는 사람은 드물다. 그들이 아주 드문 인간들이었기에 그들과 있는 건 서명호를 들뜨게 만들었다.

서명호는 두려움을 크게 느끼지 않는다. 예민하고 몸이 자주 아프긴 했지만 이건 그냥 살이 잘 안 붙는 인간들의 숙명같은 거고, 해보고 싶은 거 많고 좋아하는 거 많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게 많았다. 감성적인데 생각 많은 인간들이 흔히 그렇듯 쉽게 우울해지긴 했지만 우울에 휘둘리지 않을 줄도 알았다. 정서적으로 안정되어있고 성숙하기 때문에 천진하게 굴 수 있는 건 서명호의 특이점이고 강점이고 장점이다. 서명호는 자기 인생에 들어온 새로운 사람들을, 정말, 좋아했다.

하지만 서명호는 지금까지 내내 같은 처지인 사람들과만 교류해왔다. 어린 나이에 각성했고 능력 자체가 악용의 소지가 높아서인지 외부와 접촉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만리타국에 떨어진 뒤엔 꽤 오랫동안 문준휘랑만 지냈다. 그와도 잘 맞는 건 아니었는데 그를 제외한 누구와도 말이 통하지 않아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잘 맞지 않는다'가 '싫어한다'를 의미하는 건 아니라 다행일 뿐이다. 그러다가 홍지수를 만나고, 이때까지는 셋 다 비슷한 처지라 괜찮았다. 어린 남자애들 모아두고서 안 싸우길 기대하는 거야말로 멍청한 짓이니 그때 싸운 건 없는 일로 친다.(솔직히 하루에 다섯 번씩 싸우는 건 싸우는 게 아니라 대화의 방식이 다툼이었다고 봐야한다.) 최한솔이 그나마 '보통'에 가깝긴 했는데 결국엔 비슷했다. 서명호에게 그 둘은 진심을 주면 진심을 돌려주는 첫 외부인이었다.

몇번이고 강조한다. 그들이 정말 좋았다.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도, 나를 생각해주는 것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다른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저 한 사람으로 여겨주는 게 좋았다. 하지만 그들이 좋아질수록 깨닫는 게 있다. 깨닫지 못했으면 모를 수 있었던 것들이 있다. 상냥함에 의존하지 않으면 인간으로 존중받을 수 없다는 걸 머리로 아는 것과 깨닫는 건 다르다. 그들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서명호는 괴리감에 시달렸다. 이미 만나버린 건 돌이킬 수 없는데, 만나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고 그들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은데, 서명호는 그들이 좋은 만큼 괴로웠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데.

*

재해의 빈도는 센터의 분위기를 좌우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빈도' '강도' '발생지역'(수도권이거나 부촌일 경우 심각해졌다는 점에서 사회의 불공평함을 알 수 있다)에 따라 달라지는데 최근에는 그랜드슬램을 차지했다. 이는 현정권의 재해관리청 예산삭감이 가장 큰 원인을 차지하나 책임은 그들이 아닌 실무자들이 치른다는 게 불운한 점이다.

이런데엔 대개 악순환이 있다. 예산을 삭감한다. 재해 감지가 늦어진다. 피해가 커진다.(이 과정에서 각성자들이 꽤 자주 희생된다.)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각성자들에 대한 비판여론이 커진다. 이를 의식하여 예산이 삭감된다. 다시 반복. 반복. 반복.

그러다가도 나아지는 일이 몇 번쯤 있었으니 이번에도 기다리면 해결됐을 거다. 경험은 때때로 온건한 선택지를 제공한다. 더럽고 치사한 새끼들 좆같아 미치겠네 열창하고 알콜을 빨든 니코틴을 빨든 약을 빨든 하면서(각성자들은 도파민에 뇌가 절여지는 만큼 마약에도 취약하다) 오늘 죽냐 내일 죽냐 푸념하다보면 상황이 잠깐 개선되고, 그러다가 운이 좋으면 조금이나마 원론적인 부분에서의 개선이 생기고, 사실 이건 운이라고 말하면 안 되는 수많은 노력의 결과지만 일단은 넘어간다. 그냥 정말, 그런 식으로, 기다리면 됐다. 항상 결국엔 '더 좋은' 방향으로 끝났다. 그 과정에서 몇 명이 죽어나가고 몇 명이 사라지고는 그들이 알아야 하는 내용이 아니었으니까. 소속되지 않는다는 건 '모를' 핑계가 생긴다는 거였다.

하지만 그들은 하필이면 지금, 이럴 때에 소속되길 선택했다. 홍지수는 등이 꽤나 터졌다. 터지는 거 자체는 사실 별일이 아니었을 거다. 홍지수는 각성자 중에서는 딱 넷 정도만 신경썼고 그 외의 사람도 최승철 아니면 별로 신경 안 썼다. 원래 그가 신경쓰는 사람은 셋밖에 없었다. 추가된 건 둘 뿐이다. 고작 둘밖에 없었다.

최한솔이 말한다. "우리끼리만 있을 때가 더 좋았어."

홍지수는 그걸 부정할 수 없다고 느낀다.

홍지수는 정말 잘 싸웠다. 아주 잘 싸웠다. 그걸 좆뺑이든 줄타기든 멸칭을 붙여가면서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가 노력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그가 바란 건 현실의 개혁이나 집단 단위의 권리보장이 아니다. 그런 걸 바라지 않았다는 건 아니고 그 길이 가시밭길이라는 걸 알았다. 길고 지난하고 그 과정에서 성취감보다는 무력감에 시달리게 되리라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그래도 나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홍지수는 아니다. 홍지수는 정말, 그냥, 너무 평범해서…소중한 것밖에 생각할 수 없는 거다.

홍지수는 잘 살고 싶었다. 가이드인 윤정한과 일반인 최승철이 얘기하는 대학 시절 에피소드를 이해하고 싶었다. 걔네랑 같이 놀이공원도 가고, 사람이 북적거려 미어터지는 복합상가도 가보고 싶고, 인스타에 유행하는 카페도 가보고 싶었다. 해보고 좋았다면 그가 책임지기로 한 세 명도 데리고 가보고 싶다. 그 애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책임감이나 전우애다. 홍지수는 그들을 일종의 부모자식같은 관계로 권리를 얻어내고 보호하려고 들었지만 그들은 절대 부모와 자식같은 사이는 될 수 없다. 스승과 제자가 되기에는 홍지수가 미숙했고, 형제가 되기엔 친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끔 이 애들은 나를 이해하겠지, 내 편이겠지, 얘네만큼은 조금이라도, 다르게, 살 수 있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홍지수는 노력했다. 비굴해지기도 했고 비겁해지기도 했다. 성격에 안 맞는 일부터 능력에 과분한 일까지 다 해봤다. 고작 사람 네 명을 사람처럼 살게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 뿐이다.

결국은 막다른 길이다.

*

센티넬의 폭주도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나름의 단계라는 게 있다. 통제가 약해진다, 감정기복에 취약해진다, 를 시작으로 하여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까지도 터져버린다. 처음의 통제 약화나 감정기복의 취약성 따위를 폭주의 단계라 보느냐 전조로 보느냐의 차이는 있는데, 민간인에게는 그 단계에 놓인 센티넬도 위험하니 최대한 빨리 격리해서 가이딩을 받게 하라는 게 관리 매뉴얼의 깔쌈한 요약이다.

홍지수는 안정성이 낮다. 그런 주제에 그의 능력은 또 파괴적인 방향인지라, 민간인과 단 둘이 내버려두는 건 꽤 위험한 편이다. 그래봤자 그도 총맞으면 죽는 사람인 건 마찬가지라는 게 아이러니다. '얕잡아보이기' 쉬운 수준은 아니다. '얕잡아보면' 재밌어지는 부류에 속하는 건 맞다. 그를 좀 더 무서워했다면 이런 일까지는 없었을지, 최한솔은 피투성이가 된 복도에서 생각한다.

시체의 형상을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문준휘가 홍지수를 잡아 일으킨다. 서명호가 홍지수에게 안정제를 꽂아넣는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임시방편인데, 가이딩을 안 맞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누가 가이딩을 하겠다 나설까 싶지만, 윤정한이라면 나서긴 할 거다.

하지만 홍지수는 '폭주에 의한 실수'라 하더라도 사람을 죽였다. 센터장을 아주 으스러뜨린 센티넬이 홍지수만 있었던 건 아닌데 처벌이 기가 막히긴 했다. 외국인이니 외교 논란으로도 번질 수 있겠지. 그러면 또 복잡해질테고. 최한솔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모든 게 지긋지긋하고 피로하다고 느꼈다.

한편으로는, 늘 이런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홍지수가 무언가를 말한다. 너희 뭐해? 너희 가야 해. 준아, 애들 데리고 가. 가야 해. 문준휘가 묻는다. 어디로? 그 말에는 홍지수도 대답하지 못한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서 서명호가 웃는다. 최한솔은 서명호가 울 것 같다고 생각한다. 말하지 않아도 무언가 통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아무것도 말하지 못해도 같은 걸 생각하고 있다고 확신할 때가 있다. 전처럼은 살 수 없다. 돌아갈 수 없다. 돌이킬 수도 없다.

*

서명호는 운전대를 잡고 액셀을 밟는다. 전방에 장애물이 있습니다, 띠띠띠. 옆좌석에 앉은 문준휘는 라디오를 만지작거리고, 뒷좌석의 최한솔은 헤드폰을 쓰려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앞좌석에 손을 내민다. 문준휘는 자연스럽게 서명호의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내 그 손 위에 얹어준다. 홍지수는 조용히 창문을 내린다. 멀어지는 소음. 깨지는 소리들. 날카롭게 스쳐 쓰라린.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은 오래 살 수 없다. 가이드가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평균 수명 삼십 세. 현장 사망률은 3할 정도고 4할은 폭주에 의한 쇼크사고 3할은 자살인 게 그들네 인생인 법이다. 홍지수는 예정된 4할의 퍼센테이지를 일부 높여줄 것이 예정되어있다. 벌써부터 헤롱거리는지 코 밑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 피를 닦을 건 없어서 내버려두기로 했다. 얼굴이, 옷이, 차 시트가 더러워져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 애착이 있는 가이드들에게 정으로 호소한다면 그들에게 협력할지도 모른다. 이 또한 넷이 동시에 생각해낸 거다. 윤정한과 김민규와 이석민이 그들의 선지에 등장했다가, 같은 순간에 사라진다. 그래봤자 그 애들은 '우리'가 될 수 없어. 우리를 이해할 수도 없을 거야.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같은 걸 그 애들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우리도 걔네를 이해할 수 없잖아.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서로밖에 없어. 그런 확신이 들자, 신기하게도 이 순간만큼은 그들이 서로에 대한 애정이나 친분이나 그런 걸 차치하더라도 정말 '하나'같이 느껴졌다.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느꼈다.

누가 시작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소리내서 웃기 시작한다. 높낮이가 다른 소리들이 뒤엉켜 불쾌한 소음이 된다. 그 불유쾌한 것이 길고 길게 이어진다….

오랫동안 그들은 사람처럼 살아보려고 노력해왔다. 사람처럼 산다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사회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고, 튀지 않고, 무던하게 자기 자리에서 할 일 잘 하면서 사는 게 사람같이 산다는 거 아닐까 싶다. 그렇게 노력했는데 결국은 이렇다. 죽은 사람의 차를 타고 그들은 고속도로로 들어선다. 홍지수가 가이드 없이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다른 셋은? 떠난다고 해서 갈 곳은 있나? 없다. 그렇지만 원래도 그들이 갈 곳은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원래 짐승을 우리 안에 가두면 한 번씩 탈출하는 법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사살당하기도 하고, 포획되기도 하는 거니까. 그냥,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우리는 짐승. 우리 속에서는 살 수 없는. 그걸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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