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장] 불이 꺼지면 어둠이 찾아온다

5만 자 / 인간로한 x 인외죠스케 천사 오컬트 AU

어쩌다죠죠 by 밈지
11
0
0

“그러니까 로한 선생님, 제—크흠—약혼녀가… 꽤 유명한 집안 사람이거든요? 그 중에 로한 선생님도 알 만한 분이 있었는데. 만화가 고모다 히로시라고, 60년대 말에 초 히트작을 써냈었습죠. 듣고 계십니까?”

아, 듣고 있지. 그래서 약혼녀니, 고모다 집안이니,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로한은 반문하며 눈앞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편집자가 주선한 자리였다. 그와 사촌 되는 사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남자는 무거운 낯빛을 띤 채 앉아 있었다. 그 녀석 말을 들어보면 정말이지 기이한 사정이 숨겨져 있는 것 같거든요, 로한 선생님도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훌륭한 소재가 될지도 몰라요, 하고 편집자는 로한을 설득했었다. 결국 사촌이 상심하는 꼴은 못 봐주겠으니 로한이 눈 딱 감고 도와달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편집자가 업무관계를 남용하여 터무니없는 부탁을 한 셈인데, 로한이 이를 일단 수락한 건 어디까지나 그가 전에도 진짜로 ‘기이한 일’을 찾아온 전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일단 기이한 일이 뭔지 들어야 허튼소리인지 아닌지 판단하지 않겠는가. 로한은 편집자의 친척을 다시 한번 추궁했다. 사내는 깊이 숨을 들이쉬더니 주변을 한번 살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속닥였다.

“잘나가던 일가가 지금…. 가세가 영 말이 아닙니다. 일 년 전부터 갑자기 사업도 망하고, 부모님은 나란히 독감으로 열꽃이 피다 돌아가시고요. 아니. 지금이 무슨 시대인데 독감이 사람 목숨을 앗아갑니까? 아무튼—말로 다 할 수도 없어요. 온갖 우환이 닥쳤는데, 그것 때문에 결혼과 함께 꿈꿨던 미래도 다 망하게 생겼단 말입니다!”

“그래, 변고란 건 한번 닥치기 시작하면 끝이 없지. 유감이군. 한데 그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내가 도울 만한 건 없다고.”

“그 집안의 명성과 어마어마한 부가 애시당초 어디서 나왔는지 알고도 그러십니까?”

“사업 수완이 좋았나 보지.”

로한은 대꾸했다.

“아뇨, 그게 아닙니다.”

사내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더욱 목소리를 낮추었다.

“일가의 성공은 고모다 히로시 씨의 성공과 함께 시작되었어요. 그분은 데뷔 초에는 그저 그런 삼류 만화나 그려내던 작가였는데, 오랜 기간 잠적하더니 갑자기 당대 최고 인기작을 발표했죠. 이후 그의 동생분도 이런저런 사업을 벌이기 시작해서는 적지 않은 수입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애당초 고모다 씨는 어떻게 성공했을까요. 제 약혼녀 말로는 그건… 실력도, 천재성도, 뭣 때문도 아니더라군요. 모든 건 그분이 한참 마법이니, 주술이니, 그런 기묘한 이야기에 푹 빠진 끝에 만난 어떤 존재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사내의 말을 끝까지 들은 로한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상식적으로 남자가 들었다는 이야기는 어떻게든 가문의 몰락 원인을 과거로 돌리고 싶어하는 망상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악마 추종자와의 만남, 마법서의 가르침, 초월적 존재 소환. 전부 뻔하디뻔한 레퍼토리였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가 제시한 정황이 지나치게 구체적이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남자는 이야기가 망상이라고 의심하기는커녕 진심으로 로한이 자신의 약혼녀와 그 집안을 도와줄 수 있다고 믿는 듯싶었다. 그는 이대로 전부 수렁에 빠지는 광경을 보고 있느니 차라리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이었다.

남자는 있는 힘껏 해명했다. 절대로 그 집 가업을 일으켜 달라고 부탁하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이런 일을 경찰에게 맡겨 조사할 수는 없어요, 게다가 로한 선생님은 기이한 수수께끼라면 어떻게든 풀어내는 경향이 있지 않나요, 사촌에게는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저 로한 선생님은 딱 원인만 알아내주시면 됩니다. 그 존재가 더 이상 축복을 내리지 않는 이유를요.

망상이든 사실이든 이 사건은 분명 흥미로운 구석이 있군. 로한은 그렇게 결론지었다.


로한이 가을 비를 뚫고 고모다 저택 입구에 도착한 것은 약 일주일 후의 일이었다. 남자의 약혼녀, 고모다 오아키가 한달음에 달려나와 로한을 맞이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 열아홉의 젊은 나이에 혼자 일가의 일을 모두 떠맡게 되었다고 들었는데 과연 얼굴이 핼쑥했다.

여자는 로한을 저택의 미로 같은 길 사이로 안내하며 낮은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했다. 그녀의 큰삼촌인 고모다 히로시는 이미 작고하여 천사를 소환한 상황의 자세한 내막은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다만 성공한 것은 확실하며 천사는 지금도 감금되어 있다고. 요절한 삼촌은 천사가 있는 곳의 열쇠를 남겨주었다. 부모님이 살아생전에는 그것을 관리했고 자신에게는 손도 못 대게 했다고 한다. 그러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자신이 그 열쇠를 책임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예요.”

오아키는 으슥한 별채 안으로 향했다. 말이 별채지 사실상 방치된 창고처럼 보였다. 농기구니 버려진 가구가 쌓여 있었다. 그녀는 별채 바닥을 더듬더니 희미한 틈새 자국을 찾아내어 다시 열쇠를 꽂았다. 놀랍도록 서늘한 기운이 솟아나왔다.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열렸고 계단 끝에는 사방 10미터 가량의 정사각형 방이 있었다.

로한의 눈이 어둠에 적응하자 먼저 정사각형 방 한가운데에 그려진 붉은 원이 눈에 들어왔다.

원 안쪽의 바닥에는 흰 옷을 입은 사람 형상이 수그리고 앉아 있었다.

로한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저기…. 이보세요, 제 말 들리세요?”

오아키가 말을 걸었다.

원 속의 사람은 앉은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가 숨을 쉬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선생님께서 보시다시피…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아요. 제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쭉….”

“대체 뭡니까, 저건?”

로한은 물었다.

“말씀드렸잖아요. 우리 집에 축복을 가져다줬던 존재…. 일종의 천사라고요.”

“…..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소년 같은데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지요.”

오아키는 동의했다.

“하지만 저건… 인간이 아니에요. 일 년간 계속 상태를 확인해 봤는데 신체적 변화가 없어요. 머리카락이나 손톱이 절대 자라지 않더군요. 게다가 등에, 날개가 달려 있던 자국이 보이지 않으세요?“

그 존재는 과연 혹처럼 보이는 것이 양쪽 어깨뼈에 하나씩 붙어 있었다. 그것이 만약 천사라면 물리적으로 날개를 분리한 흔적이라고 믿을 만했다. 혹은… 소년 하나를 가두어 놓고 등에 뭔가를 심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즉 로한은 이것이 진짜로 천사로 통하는 초월적 존재인지, 아니면 고모다 가문 사람들이 소년을 감금하고 천사라 망상하며 엽기적인 행각을 벌이고 있었다는 뜻인지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로한이 오아키에게 그렇게 말하자 상대는 답답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진짜예요. 제가 왜 선생님께 거짓말을 하겠어요?! 아, 이러기보다 천사를 감금한 도구를 보여드릴게요. 직접 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는 계단을 뛰어 올라가기 전 덧붙였다.

“원은 절대 넘어가지 마세요. 천사가 그동안 힘을 잃었을 수도 있고, 의식이 없을 수도 있지만… 위험할지 모릅니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로한은 눈앞의 존재를 더 면밀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덩치가 좀 크긴 하나, 평균적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크기는 절대 아니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했고 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을 지녔다. 눈앞의 존재에서 그나마 평범하지 않은 곳을 찾는다면 머리카락이었다. 지금은 한물 갔다는 소리나 들을 리젠트 헤어스타일이었던 것이다. 리젠트 머리를 한 천사라고? 로한은 여기까지 생각하고 피식 웃고 말았다.

물론 보기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로한에게는 더 확실한 방법이 있었다.

로한은 원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섰다.

“헤븐즈 도어.”

소년의 뺨이 양쪽으로 갈라지더니 페이지가 빠른 속도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안에는 글자가 빽빽히 적혔다. 곧 이 소년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릴 것이다. 그는 정말로 초월적 존재일까? 아니면 스탠드 유저? 혹은 미친 사람들에게 감금당한 불운한 소년일까?

솟아나는 호기심에 로한이 더 자세히 읽으려고 소년 쪽으로 고개를 살짝 숙인 참이었다. 페이지 안쪽에서 눈부시게 밝은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로한은 눈을 깜빡였다.

다음 순간, 로한은 손목을 강하게 잡아채는 힘을 느꼈다.

소년이 두 눈을 새파랗게 뜨고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쪽 손으로는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로한의 스탠드, 헤븐즈 도어의 오른쪽 손목을 잡고 있었다.

뭐야?

잠시 당황한 사이 소년은 스탠드를 잡은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로한은 부리나케 오른손을 빼려 안간힘을 썼으나 소년은 꿈쩍하지 않았다.

“이봐, 이거 안 놔?!”

로한이 소리쳤다. 소년은 표정 변화 없이 스탠드를 움켜쥔 손을 유지했다. 통증이 점점 심해지니 이대로라면 진짜로 뼈가 산산조각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로한이 있는 힘껏 소리를 치려 하는데 계단에서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로한 선생님, 보세요! 여기, 이 성냥을 그으면—”

붉은 원의 둘레를 따라 검은 불꽃이 솟구쳤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동시에 화끈거리는 감각이 퍼져나갔다.

소년은 뭔가에 데인 듯 움찔하며 손아귀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찰나의 순간 지직거리더니 원래의 자세로 되돌아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아키는 성냥을 불어 끄고 계단을 마저 내려왔다.

“어때요, 누가 봐도 평범한 불꽃은 아니죠? 이제는 좀 믿으시겠어요?”

“… 아… 그래요. 일리가 있군요.”

로한은 오른쪽 손목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로한은 그날 오아키와의 대화에서 그녀가 아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삼촌인 고모다 히로시가 천사를 소환한 것은 1965년의 일이었다고 한다. 본래 그는 데뷔작으로 만화계에서 눈여겨볼 만한 신인으로 통했으나 이후에 발표하는 작품마다 예전 작품만 못하다는 평을 얻으며 빠르게 잊혀져갔다. 설상가상으로 세 번째 작품 연재 중에는 슬럼프에 빠져 장기간 휴재에 돌입했다. 편집자의 독촉과 방에 틀어박힌 장남을 대하는 가족들의 태도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고모다 히로시는 자신이 모아둔 돈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당시 주변 사람들은 그가 왜, 어디로 떠났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채로 몇 년이 흘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삼촌은 마법을 실현할 방법을 찾으러 떠나셨던 거예요. 진짜 마법사를 찾으러 세계 각국을 여행하셨던 것 같아요. 그만큼 필사적이었으니까요.“

오아키가 말했다. 그렇잖아도 그녀의 삼촌은 대학 시절부터 천사와 악마, 요괴, 신, 주술 등 초자연적 현상과 관련된 소재에 깊은 흥미를 보였다고 했다. 그때는 모두가 이를 그저 창작가 지망생의 특이한 열정 정도로만 여겼다. 히로시 본인도 처음에는 비슷한 생각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상황이 절박해진 만큼 그는 이러한 주제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1964년, 고모다 히로시는 오랜 방랑 끝에 일본으로 돌아오고 다음 해에 천사를 소환하는 데 성공한다.

그것이 현재 별채 지하에 감금된 존재로, 그는 1965년 이후 고모다 히로시가 짧은 생애 동안 불후의 걸작을 연달아 그려내며 부와 명성을 얻도록 축복을 내려주었다.

“그런데 그 축복이란 건 어떻게 받았다는 겁니까? 천사를 불러놓고 따로 설득이라도 했나요?”

로한이 물었다.

오아키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세한 내막은 저도 몰라요. 거래였는지, 협박이었는지, 만약 그렇다면 무슨 수단을 썼는지. 다만… 성경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지 않나요?”

그는 조심스레 말했다.

“야곱이라는 사람이었나, 천사 하나를 밤새도록 잡아두는 데 성공해서 그 대가로 축복을 받았다고요.“


로한은 오아키에게 지속적으로 방문하겠다고 예고했다. 그녀로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키시베 로한 선생님은 협조할 마음이 없을 수도 있으니 너무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약혼자가 당부했었기 때문이다. 사촌 말로는 성격상 어쩔 수가 없다더라, 그렇지만 혹시 모르니 부탁은 해 봤다고. 천만다행이었다. 이 괴상망측한 사정을 다 듣고도 놀라기는커녕 더 자세히 알아보겠다는 사람이 생길 줄은 몰랐다.

한편 로한의 주의는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리얼한 천사—혹은 요괴든 무엇이든—와 마주치는 일은 쉽게 넘겨버릴 소재거리가 아니다. 로한은 새로운 경험을 겪고 있다는 감각에 들떴다. 게다가 그 존재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겨버렸으므로 빠른 시일 내에 그를 다시 대면해야 했다. 물론 오아키에게는 구체적인 동기를 밝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두 번째 방문에서 로한은 천사와 단둘이 있기를 요구했다. 그래야 알아서 관찰하고 이것저것 생각해낼 수 있다는 이유였다. 오아키는 마음대로 해달라며 혹시 모르니 지하실에 주술용 성냥과 함께 의자 하나를 놓아두겠다고 했다. 성냥은 지난번에 보았듯 속박 주술을 강화하는 용도이고, 의자는 로한이 오래 머무르다 피곤해질까봐서라고. 글쎄, 로한 생각에는 피곤해질 만큼 무료하지는 않을 것 같았으나 딱히 거절하지는 않았다. 의자 하나 있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오아키가 계단을 올라가 문을 닫자 로한은 어둑어둑하고 서늘한 지하실에 홀로 남겨졌다. 바깥의 소음이 완전히 차단되니 더욱 지하가 휑하게 느껴졌다. 지금 이 방 안에서 살아 있는 존재는 오직 로한 본인, 그리고 바닥에 수그려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소년 모습의 천사인 것이다.

며칠 전 자신의 손을 망가뜨린 망할 천사 말이다.

로한은 의자를 끌어당겨 앉은 후 입을 열었다.

“어이. 움직일 수 있는 거 다 알아. 그러니 눈 뜨지 그래?”

천사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로한은 열이 뻗치려는 것을 다스리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는 한숨을 내쉬곤 천천히 원 속으로 오른손을 뻗었다.

로한의 스탠드가 허공에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헤븐즈 도어—”

그때 꿈쩍도 하지 않던 천사가 벌떡 일어났다.

소년은 짜증스럽게 로한의 스탠드를 한 팔로 쳐냈다. 그 반동으로 헤븐즈 도어는 하마터면 벽으로 날아가 처박힐 뻔했다.

“아~ 느낌 이상하다고! 하지 말라고요!”

이런 목소리였구나? 쇳소리가 섞이긴 했어도 앳된 고등학생 목소리가 맞군. 생각보다 하이톤인걸. 로한은 스탠드에 가해진 충격을 다스리느라 빈정거리는 말은 입속으로만 삼켰다. 머릿속이 윙윙 울리고 이마가 지끈거렸다.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눈앞의 존재를 훑어보았다. 천사는 원 안에 서서 로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난번과 다를 바 없는 새파란 안광, 철 지난 헤어스타일, 그리고 적당히 굴곡진 몸. 여러모로 지금 입고 있는 수수한 흰색 옷보단 가쿠란이 훨씬 어울릴 것 같은 외모였다. 악마는 천사의 얼굴로 온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천사는 고등학생의 얼굴로 온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아무튼 그건 됐고.

“너, 이건 언제 돌려놓을 거야?”

로한은 오른손을 흔들며 대뜸 말했다.

“…. 내가 뭘.”

천사가 잡아뗐다.

“네놈이 내 스탠드를 잡았다 놓은 이후로 낮에는 오른손 셋째, 넷째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처음엔 병인가 싶었는데, 밤에는 멀쩡해지고 낮에는 못쓰게 되기를 반복하더군. 이건 초능력 혹은 저주로밖에 설명할 수 없을 텐데. 네가 한 짓이지?”

로한이 따지는 동안 천사는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생각에 빠졌다. 아니, 생각에 빠지는 척했다.

“글쎄요, 내가 했다는 증거가 어딨다고—”

“뭔가를 원하는 거라면.”

로한이 딱 잘라 말했다.

“얘기를 해. 자네 때문에 지금 급히 연재처에 휴가를 내고 오는 길이니까. 이대로는 만화 작업을 전만큼 빠르게 할 수 없단 말이다.”

“댁도 만화가였구나? 어쩐지.”

시작부터 동문서답이다. 로한은 스스로 요괴와의 만남이 적지 않은 편이라 여겼지만 이렇게까지 언어가 잘 통하면서 말이 안 통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헤븐즈 도어도 무용지물이니 곤란하게 되었다.

“그래서, 왜 그런 건데? 이 손가락.”

로한은 다시 인내심을 다지고 물었다.

소년은 잠시 습관처럼 건들거리더니 주머니에 천천히 손을 집어넣었다. 꺼낸 손에는 언뜻 보기에 노끈처럼 생긴 물건이 두 개 늘어져 있었다.

“이게 그때 당신 스탠드였던가, 아무튼 거기서 뽑아낸 손가락 힘줄이야.”

과연 생긴 대로 무식한 방법이다.

“원래 내가 뽑아낸 건 계속 이 주머니에 들어 있어야 하는데, 매일 밤에 없어지더라고. 내가 이 원 안에 있는 동안에는 힘이 딸려서 그런 거야.”

“그 정도는 예상했다. 그래서 뭐?”

“아니, 지금 말하고 있잖슴까.”

소년은 툭 쏘아붙이곤 말을 이었다.

“처음엔 댁이 나를 읽어보려고 잠을 깨운 것 자체가 짜증나서 계속 갖고 있으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요 힘줄이 오락가락하는 걸 보아하니 예상보다도 내가 기력 회복이 느리더라고. 이대로는 답이 안 나오는 것 같거든?

그래서 댁이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슴다. 도와주면 이 힘줄은 둘다 그대로 돌려줄게. 안 그래도 당신, 방금 나한테 원하는 게 뭐냐고 물어봤잖아요?”

이 녀석이 장난하나? 로한은 정말로 골이 아파지기 시작했다. 이런 게 천사라고.

“아 그래, 만에 하나 내가 널 돕고, 네놈이 힘을 회복한다 쳐. 그게 성공하고 나서 네가 내 힘줄을 영영 빼앗아갈지 어떻게 알아?”

“지금 천사의 약속을 못 믿는 검까? 딴 건 몰라도 나, 약속한 건 확실히 지킨다고요.”

“아하.”

로한은 비죽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고모다 히로시와의 약속은 중간에 잊어버렸다? 참 믿음직스럽군.”

소년은 단번에 얼굴을 굳혔다. 그렇잖아도 서늘했던 방의 기온이 삽시간에 8도쯤 내려갔다.

“그 인간 얘기는 꺼내지 말지.”

소년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몰라도, 댁 생각은 틀렸어. 그 놈은 쓰레기보다 못한 인간이라고. 맘 같아선 저승까지 찾아가서 영혼을 손수 불태우고 싶은데, 나한테 그럴 권한이 없다는 게 무진장 한스럽거든.”

물론 로한은 고모다 히로시가 천사를 의리 있고 정직하게 대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양측 중 약속을 어긴 쪽이 있다면 그건 고모다일 것이다. 좋게 생각하면, 그는 이런 결말을 의도하지 않았으나 요절하면서 중간에 일이 틀어졌을지도 모른다. 어찌됐건 고모다 히로시가 천사를 소환한 후 일가가 사십여 년간 천사를 줄곧 감금해둔 건 사실이다. 소환 당시 합의한 조건에 사십여 년의 구금까지 포함되어 있었을까?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오아키의 약혼자는 천사의 축복이 사라져가는 원인을 알아내 달라고 했으나, 로한이 보기에는 이 일가가 더 일찍 무너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로한은 그저 이 망할 천사가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었다.

“네 의견은 잘 알았다.“

로한이 대꾸했다.

“하지만 완전히 믿을 수는 없어. 자네에게는 내 헤븐즈 도어가 통하지 않으니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고.“

”하, 참, 그게 무슨—“

”그러니 힘줄을 먼저 돌려줘.“

로한은 상대를 응시했다.

“그럼 나도 자네를 도와주지.”

천사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 채로 로한을 흘겨보았다. 놀랍도록 인간적인 표정이라고 로한은 생각했다.

“뭘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나는 그냥 이대로 다시 잠들어도 되거든요? 나는 잃을 게 없어. 반면에 댁은 이 제안을 거절하면 잃을 게 많고.“

”내가 계속 찾아와서 잠든 자네를 헤븐즈 도어로 깨워도 잃을 게 없다고?“

”한번 더 그랬다간 손가락 힘줄에서 끝나지 않을 검다. 아예 거동도 못 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어.“

”그리고 자네는 내 도움을 받지 못하겠지.“

둘은 서로를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천사 쪽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눈을 굴렸다.

”이렇게 하면 어때요. 지금 댁 힘줄을 하나 돌려줄게. 셋째 손가락 말야. 그리고 당신이 날 도와서 내가 힘을 회복하면 나머지 하나도 돌려주는 거고. 합리적인 제안 아닌가? 이것도 엄청나게 양보한 검다.“

셋째 손가락에 힘이 들어갈 수 있다면 작업 속도는 지금보다 빨라질 것이다. 여전히 불편하긴 하겠지만. 로한은 속으로 펜을 굴리는 상상을 해 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그렇게 나오셔야죠.”

천사는 약간 더 긴 힘줄을 집어 자신의 손바닥 위에 얹었다. 그러고는 다섯 손가락을 천천히 구부려 힘줄을 완벽히 덮었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소지 순이었다. 이후 그는 정확히 반대 순서대로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그 손바닥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동시에 로한은 셋째 손가락에서 인대가 자라나고 늘어나며 뼈 옆을 비집고 들어오는 기분 나쁜 통증을 느꼈다.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이나 겪고 있지만 여전히 적응하기 힘든 감각이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그래도 앞으로는 손가락 하나만 참으면 되겠군. 로한은 생각하며 조심스레 손가락을 접었다 펴 보았다. 아직도 찌르는 듯 얼얼한 것을 제외하고는 큰 문제는 없는 듯했다.

로한의 손을 바라보던 천사는 기다렸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댁이 날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얘기할 차례네요.“

천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힘을 회복할 수 있는 조건만을 제시했다. 그의 말로는 고모다 히로시가 자신을 소환했을 때 세 가지 소유물을 가져갔다고 한다. 셋 중 천사의 눈빛은 오랜 기간 잠에 들어 회복할 수 있게 되었으나 나머지 둘은 혼자서 되찾아올 수 없었다. 심장 모양 브로치와 자신의 머리에서 잘라낸 머리카락 뭉치가 바로 그 물건들이었다. 브로치와 머리카락이 어디에 있는지는 천사도 잘 모르는 듯했다. 아마도 저택 안에 있지 않을까 짐작할 뿐이었다.

한편 물건을 모두 되찾아도 구속 주술을 깨고 나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천사는 여기부터는 로한이 도울 필요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로한 입장에서야 반가운 소식이었다. 애당초 손가락 힘줄을 인질로 잡혀 강제로 돕게 된 일에 더 깊이 관여하는 것은 사양이었다.

“자네가 뭘 원하는지는 알겠는데.”

로한이 말했다.

“브로치와 머리카락 뭉치를 발견했다 쳐. 그게 네 것인지는 어떻게 확인하지?”

천사는 잠시 놀란 눈빛을 했다. 그리고는 뒷목을 긁적였다.

“인간 입장에서 생각한지 오래되어서 깜빡했네. 가까이 와 봐요.”

로한은 그를 불신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 이상한 거 아니라니까! 그냥 댁한테 허가증 비슷한 걸 주는 검다. 내 권속이 되면 나랑 관련된 물건은 문제없이 알아챌 수 있거든."

"네 권속이라고?"

"말만 그렇다는 거죠. 못 보던 걸 볼 수 있게 해주는 거예요. 꿈이 데리고 다니는 까마귀 같은 게 되진 않슴다."

로한은 꿈이니 까마귀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으나 대강 말뜻은 눈치챘다. 수족처럼 부려질 가능성은 없다는 거다… 이미 꼼짝없이 돕게 생겼으니까, 굳이 다른 제약을 달 필요가 없겠지. 로한은 어깨를 으쓱하곤 일어나 원 가까이로 다가섰다.

소년은 로한의 양 어깨를 손으로 살짝 감쌌다. 그러고는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로한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자, 이제 됐어요.”

천사는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로한은 무의식적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기분상으로는 그다지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때가 되면 차이를 알 수 있다는 건가?

그건 그렇고.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어.”

로한이 말했다.

"뭔데?"

"넌 내 이름을 알지. 그런데 난 네 이름을 몰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이름 정도는 알고 싶은데."

천사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로한을 바라보았다. 이게 그렇게 놀랄 만한 질문이었나? 로한이 또다시 의문에 빠지려는 차였다. 천사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정 그러면 죠스케라고 부르십쇼.”

죠스케라. 호위한다는 뜻의 장(仗)과 돕는다는 뜻의 조(助) 자를 합친 결과다. 수호와 축복, 전사와 원조자의 의미가 함께 들어가 있다. 천사라는 정체성에 잘 들어맞는 이름인 것은 틀림없다. 만약 그 망할 녀석도 천사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혹시 그건 그 녀석이 직접 지은 이름이었을까? 로한은 잠시 궁금해졌다. 천사의 작명법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어야 말이지. 다음에 만나면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로한은 저택 안채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자신의 약지 힘줄까지 되찾으려면 앞으로 찾아볼 것이 적지 않아 보였다. 모든 것은 40여년 전 고모다 히로시의 천사 소환에서 시작되었으니 이를 둘러싼 정황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내야 감이 잡힐 테다. 그렇게 물건 두 개를 찾고, 빨리 손가락을 회복한 후 이 일의 핵심부에서 손을 떼는 것이 현재 로한이 생각하는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그와 별개로, 저 녀석… 나를 다짜고짜 부려먹은 값은 언젠가는 받아내 주고 싶군. 로한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모다 히로시가 천사에게서 가져갔던 물건들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묻자 오아키는 곤란한 낯빛을 했다.

“글쎄요… 브로치랑 머리카락? 너무 평범한 물건 같은데요. 삼촌은 제가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비슷한 걸 들은 기억도 없고요. 음…”

오아키는 한참 생각하다 물었다.

“그런데 그 물건들은 왜 필요하세요?”

“천사의 힘을 회복하려면 필요한 것 같더군요.”

로한의 대답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듣는 입장에서는 ‘천사가 가진 축복의 힘’으로 알아듣겠지만 말이다.

“그럼 반드시 찾아야겠군요.” 오아키가 놀라며 말했다.

“수상한 물건이 있을 법한 장소는 알아요. 삼촌이 작고하신 뒤로 그분 물건들은 한 군데에 모아서 보관해두었거든요. 주술에 쓰인 성냥도 거기서 나왔어요. 우선은 그 창고로 같이 가 보시죠.”

두 사람이 창고로 향할 때는 이미 해질녘이었다. 연못을 둘러싸고 녹음이 우거진 정원은 노을에 물들어 주홍빛으로 은은히 빛났다. 제아무리 고모다 일가의 가세가 빠르게 기울고 있다지만 아직 저택은 건재해 보였다. 이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비밀스런 저택을 마음껏 둘러볼 기회를 얻은 것은 행운일지도 모른다.

정원을 두르는 샛길을 지나며 오아키는 침묵이 어색했는지 운을 떼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로한 선생님은… 좀처럼 놀라지 않으시네요.“

“무슨 뜻입니까?” 로한이 반문했다.

"아, 대단하시다는 말이었어요. 저는 처음 천사니 주술이니 하는 얘기를 들었을 때 크게 충격받았거든요. 설마 그런…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이 바로 여기서 일어나고 있을 줄은..."

로한 역시 천사가 갑자기 움직였을 때 크게 놀라긴 했다. 하지만 오아키의 말은 그런 충격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겠지.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제 직업상 기묘한 일들을 자주 마주치게 되더군요."

오아키는 말을 이었다.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삼촌이 그랬다는 게 가장 충격이었어요. 전 삼촌을 잘 모르지만, 어릴 때부터 그분 만화를 보고 자라서 항상 삼촌이 천재 만화가라고 믿고 존경했거든요. 그런데 그 작품들이, 천사를 볼모로 잡아서 가능했던 거라니…"

“그래도 삼촌분은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던 것 같군요. 천사를 직접 잡아두겠다는 생각은 쉽게 떠올릴 수도, 실행에 옮길 수도 없으니까. 그 점은 존경할 만하네요.”

"그렇게 본다면… 동감해요. 저라면 그런 생각은 절대 못 했을 텐데."

어쩐지 슬픈 어조로 오아키가 대답했다.

오아키가 자신이 짊어진 짐과 능력의 한계를 울적하게 반추하는 동안 로한은 다른 곳으로 신경이 쏠려 있었다. 창고 쪽으로 가까워질수록 일종의 자기장 같은 힘이 느껴졌던 것이다. 처음에는 강한 직감이라고 생각했으나 평소와는 달랐다. 말 그대로 털끝이 곤두서는 듯한 감각이었다. 로한은 오아키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궁금하여 옆을 힐끗거렸으나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전과 같은 표정을 유지했다.

그렇다면 이 감각은 권속의 능력인 모양이다. 안 보이는 걸 보이게 해준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싶었다. 일단 창고 안에 무언가 중요한 물건이 있는 건 분명하겠군. 찾는 물건이 있어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로한은 오아키의 뒤를 따라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창고는 예상보다 훨씬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고모다 히로시의 작품과 원고가 가지런히 꽂힌 책꽂이가 한쪽 벽을 차지했고, 다른 쪽에는 고인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상자별로 나누어 담겨 있었다. 로한이 의외라는 눈빛을 하자 오아키는 미묘하게 웃으며 말했다.

“부모님이 삼촌 물건은 최대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도록 신경을 쓰셨더군요. 생전에 저한테는 한 번도 이곳을 보여주지 않으셨지만요… 아마 삼촌의 비밀을 알고 나서, 천사의 축복이 떠날까 봐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삼촌 일기에도 적혀 있었거든요, 주술은 정교한 의식이라 어느 하나도 어긋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기가 있다고요?“ 로한이 물었다.

”네, 첫날 들려드렸던 얘기도 그걸 읽고 나서 알게 된 내용이에요. 지금은 제 방에 있으니 나중에 보여드릴게요. 필요하시다면요.”

“그렇게 합시다. 도움이 될지도 모르죠.”

로한은 말했다.

그리고, 이 방 어딘가에 더 확실히 도움이 되는 물건이 있었다. 분명 이 상자 사이에 있을 텐데, 너무 빽빽히 쌓여 있어 어느 상자인지 단번에 구분이 가지 않으니 문제였다. 로한이 상자를 하나둘씩 치우기 시작하자 오아키는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서성거렸다. 상자를 거칠게 놓기라도 하면 안에 있는 물건들이 망가질지도 몰라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잠깐, 이게 뭐야?”

로한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로한을 흘긋거리던 오아키가 가까이 다가왔다.

“왜 그러세요?”

“아, 이 수첩에 붙어 있는 게... 수상해서요.”

오아키는 수첩을 보고 뜻밖에도 웃음을 터뜨렸다. 로한이 이 집에 온 이후 처음 듣는 웃음소리였다. 그는 뭐가 그리 웃긴지 잠시 안경을 벗고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아하하하! 아니, 가계부에 붙은 영수증을 보고 수상하다고 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저도 삼촌이 저 정도로 꼼꼼하셨다는 건 믿기지 않긴 해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나도 영수증이 덕지덕지 붙은 가계부 따위에 온 신경이 집중될 줄은 몰랐거든. 천사 녀석, 아직 힘이 덜 회복된 나머지 능력을 부여할 때 뭔가 실수를 했나? 로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영수증을 들춰보았다. 로한 선생님, 가끔 참 엉뚱하신 것 같다니까요. 하고 조잘거리는 오아키는 무시하는 중이었다. 영수증 뒤의 공책 면에 휘갈겨 쓴 글씨로 무언가 적혀 있었다.

「천사 하트 브로치, 오키노시마 박물관에 기증 완료.」

이런 미친 놈이?


며칠 후 로한은 죠스케가 있는 지하 창고로 향했다.

이제 죠스케는 오아키가 있을 때는 자는 척 자세를 잡다가 방에 로한만 남으면 알아서 일어나고 있었다. 한번은 이유를 물으니 헤븐즈 도어 때문에 잠에서 깨는 게 얼마나 불쾌한지 알긴 아냐는 소리를 들었다. 거야 그렇겠지, 이것만 봐도 답이 나오잖아? 로한은 오른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죠스케는 로한에게 질린다는 눈빛을 보냈다. 분명히 잘못을 해서 힘줄을 뺏긴 건 로한인데 어째서 그렇게 당당하냐는 거다. 이 문제로 잘잘못을 따지는 것부터가 네놈이 천사라는 증거겠군. 인간의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유치하게 굴고 있으니 말이야. 로한이 이렇게 받아친 날에 둘은 말싸움으로 모든 시간을 허비하고 소득 없이 헤어졌다. 그날 그나마 얻은 것은 죠스케가 짜증을 낼 때 입술을 삐죽거리는 습관이 있다는 정보뿐이었다.

오늘 죠스케는 방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무료한 듯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중이었다. 단정하게 틀어올린 리젠트 사이로 자꾸만 잔머리가 흘러내려 목덜미 부근의 두 꽁지머리가 조금씩 커졌다. 머리카락이 어째서 저런 식으로 움직이는지는, 글쎄, 인간의 이해를 벗어난 영역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로한은 대뜸 말문을 열었다.

“오키노시마 박물관에 가 봤는데 말이야.”

“그런데?” 죠스케가 몸을 곧추세우며 대답했다.

“브로치처럼 생긴 물건은 없더군. 감이 오는 곳도 없고.”

“뭐야, 제대로 찾아본 거 맞아요?”

죠스케가 실망스럽다는 듯 살짝 미간을 구겼다. 로한은 어이가 없었다. 본인이 직접 찾아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래?

“너야말로 능력 더 없어? 권속에 따르는 더 강한 감지 능력이라든가. 단서가 박물관에서 끊겨서 이대로는 힘들 것 같다고.”

로한이 되쏘자 죠스케는 약간 어두운 낯빛이 되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는 듯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들겼다. 그러다 생각을 바꾸었는지 천천히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로한… 진짜로 더 큰 힘을 원함까?”

죠스케가 은근슬쩍 물어왔다.

“원하고 말고가 어딨어, 이 일을 빨리 해결하려면 필요하잖아. 네놈한테도 그게 편할 것 아냐?”

“그건 그렇긴 한데요오~”

“일단 설명이나 해 봐. 뭔지 듣고 결정하지.” 로한이 말했다.

죠스케가 제안한 것은 아예 정신을 연결하는 방식의 권속 계약이었다. 상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나, 마치 원격 통화처럼 의식을 공유하여 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겸사겸사 연결을 통해 제때 힘을 보태줄 수도 있다고 했다. 즉 사생활 침해가 따로 없었다.

이래서 마치 수상한 거래를 제안하는 악마마냥 말문을 뗐던 거군? 로한이 지적하자 죠스케는 무슨 소리냐며 손사래를 쳤다. 본인이 어딜 봐서 악마냐고 대꾸하고는 글쎄, 정신을 공유하려면 딱 한 가지 절차가 필요하다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댁이 비위가 약하면 좀 힘들 수도 있슴다. 지난번에는 이마에 키스를 했잖아요. 그쵸? 이번에는 그것보다 더 강한 접촉이 필요하거든요…? 뭔지 알겠지? 입에다가… 물론 싫음 말고~”

로한은 이 말을 듣자마자 생각했다.

거짓말이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죠스케 놈이 자신을 며칠 봤다고 그새 호감을 쌓아서 이런 거짓말을 할 생각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게다가 서로 만나서 지금까지 한 거라곤 싸운 것밖에 없는데 말이다. 본인이 천사랍시고 삼류 로맨스 소설 설정에도 안 나올 이야기를 믿어달라며 줄줄 늘어놓는 것도 웃기지 않나? 사십여 년 간 외로움에 시달린 나머지 아무 존재나 잡고 한번 입술을 부딪혀 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죠스케가 키스를 원한다는 사실 자체는… 흥미로웠다.

어째서?

왜일까?

응하지 않으면 알 수 없겠지. 로한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데, 입 접촉은?” 로한이 물었다.

죠스케의 얼굴은 붉어졌다 파래졌다를 반복했다. 천사의 안색 변화를 보는 건 꽤나 재미있는 일이었다.

“방금까지 잔뜩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놓고?” 죠스케가 물었다.

“그게 중요한가? 우리 둘 다를 위해서 이게 필요한 건 맞잖아.”

로한이 대답하자 죠스케는 한참 동안 이런 인간을 봤나, 하는 몸짓을 취했다. 그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가까이 와 봐요, 그럼. 내가 알아서 할게.”

뭘 또 알아서 하느냐는 반박은 잠시 접어두고 로한은 죠스케 앞으로 다가섰다.

죠스케는 양 손으로 로한의 어깨를 잡았다. 지난번보다 손에 약간 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긴장일까? 영겁의 세월을 산다는 천사인데, 설마 키스 하나 두고 그럴 리가. 로한이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고개를 기울이다 말고 죠스케가 떫은 어조로 말했다.

“눈은 좀 감는 게 어때요.”

“네가 무시해.” 로한이 대꾸했다.

“하 참… 알았다, 알았어.”

죠스케는 마지못해 수긍하고는 로한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었다. 천사의 입술은 놀랍게도 생각보다 훨씬 부드럽고 말캉했다. 이마에 닿았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이 정도였군… 로한이 그런 감상에 잠기는 사이 죠스케는 단단히 결심한 듯 양 손에 더욱 힘을 실었다.

그러고는 혀를 내밀어 로한의 입술을 밀어 열고는 한 차례 입속을 헤집었다.

뭐야?

로한은 퍼뜩 양 눈의 초점을 맞추었다.

죠스케의 입술이 빠르게 떠나가더니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시야에 들어온 죠스케는 입을 닦으며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녀석은 또 뭐가 불만인데?

잠깐, 그보다, 방금 일부러 삼킨 거야?


죠스케의 제안이 실은 그다지 본인의 욕망과 상관없었다 해도 둘의 권속 계약 자체는 성공적이었다. 이제부터 로한의 머릿속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죠스케의 목소리가 울릴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계약은 양방향이므로 죠스케의 머릿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키스를 하면 계약이 성립된다는 구닥다리 소설 같은 설정이 의외로 진실일 줄은 몰랐지. 로한은 헛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죠스케는 이 오해 아닌 오해에 자신보다도 더 어색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후로 몇 시간 동안이나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권속 관계를 강화하자마자 머릿속으로 남의 목소리가 쏟아져 들어오는 건 사양이다.

로한은 차를 타고 다시 오키노시마 박물관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지난번에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에는 개방된 전시관을 모두 둘러보아도 특이한 끌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하나, 관람객용 전시관과 동떨어진 수장고에 보관 중인 경우. 둘, 박물관에서 아예 다른 곳으로 옮긴 경우. 로한은 내심 전자이기를 바랐다. 더 이상 일이 복잡해지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추가로, 여전히 풀리지 않는 근본적 의문도 있었다.

왜 고모다 히로시는 박물관에 브로치를 기증한 거지?

로한이 앞뒤를 자르고 묻자 몇 초 있다 죠스케의 의식이 흘러들어왔다.

낸들 알겠슴까? 뭐… 최대한 멀리 보내버리고 싶었을지도, 겁을 먹어서.

그럴듯했다. 고모다 히로시가 죠스케를 수십 년간 가둬 놓기로 결정했다면, 미래에 닥칠 분노가 무서워서라도 천사의 힘을 미리 빼돌려 두었겠지.

하지만…

그런데, 왜 하필 박물관이냐는 거다.

가 보면 알겠죠. 참고로 나는 초행이지만 로한은 처음이 아니니 길은 알아서 잘 찾아주십쇼.

이 녀석 말투가 아까부터 묘하게 퉁명스러운데.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겼겠지만 며칠 지내보니 구분이 된다.

너… 아직도 키스 때문에 신경이 쓰여?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머릿속으로 한꺼번에 말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럼 신경 쓰이지 댁은 신경 안 쓰이겠어?! 이런 건 원래 믿을 만한 사이에 친해지고 나서나 하는 거라고!! 알긴 알아?!!

천사도 그런 순정이 있단 말이야?

천사라서 그렇기보다도 내가 그런 검다, 내가. 그리고, 순정보단 진한 동맹관계 같은 거거든? 인간네 기준이랑 달라요.

그렇다면 더더욱 뜻밖이군.

뭐가.

난 우리 사이에 동맹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 그렇다고 키스할 사이까진 아니잖아?

그건 맞는 말이긴 했다.

고모다 저택에서 박물관까지는 차로 약 한 시간이 걸렸다.

오키노시마 박물관은 이름이 시사하듯 오키노시마 섬에 지어진 박물관이었다. 섬은 면적이 그리 넓지 않았으나 본토와 교량으로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하며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이 위치한다는 점 때문에 방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박물관 뒤편으로 펼쳐진 소나무숲도 명소로 널리 알려진 편이었다.

도착 후 로한은 고모다 히로시가 기증한 브로치가 존재하는지 다시 문의하고 수장고 견학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루브르에서도 가능하던 절차가 오키노시마에서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는 소리다. 수장고 내부 점검 중이라 외부인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고 박물관 측은 설명했다. 그나마 브로치가 서류상으로 수장고 내부에 존재하는 것은 확인이 되어 다행이었다.

점검이 끝나려면 3주는 걸린다는군.

로한이 생각을 보냈다.

그래서 돌아갈 거야? 아니잖아요. 안에 있는 건 알았으니 당장 들어갑시다.

기다렸다는 듯 죠스케가 답했다.

어이, 천사에게야 식은 죽 먹기겠지만 나는 아니라고. 들락거리는 사람이 많으면 헤븐즈 도어로 해결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

밤에 들어가면 되지.

문을 열어줄 사람은 다 퇴근했을 텐데.

까짓거 부쉈다가 복구하면 되잖아?

그건 네가 한다는 뜻이지? 내가 아니라?

댁한테 그 힘까지 보내줄 수 있을진 몰라도 일단 해보죠.

로한은 밤까지 기다리는 동안 수장고 근처를 서성이며 지난번 고모다 저택에서 느꼈던 감각이 되돌아오는지 확인했다. 여전히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가끔 정말 집중하면 목덜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게 브로치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차가운 가을 바람 때문인지 헷갈렸다. 권속을 강화하면 감각도 배로 예민해진다고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메모 하나 있던 고모다 저택의 창고에서보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것이 적은 걸까. 로한은 죠스케와 몇 마디를 더 주고받아 보았지만 더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밤은 빠르게 찾아왔다. 계절의 변화와 함께 해가 지는 시간도 앞당겨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박물관을 가득 채웠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 고요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박물관에서 불이 켜진 곳은 입구 근처의 당직실이 유일해 보였다. 수장고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스케치를 끄적이던 로한은 주위를 둘러보고 일어섰다.

내 파괴와 복구의 능력을 로한한테 그대로 부여하는 건 불가능해요. 그러니 가장 간단하게 시도할 검다.

죠스케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문 손잡이를 쥐어 보십쇼.

로한은 열쇠구멍이 새겨진 차가운 금속 문고리를 가볍게 쥐었다. 예상대로 단단히 잠겨 있었다.

손잡이를 돌리는 힘은 팔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로한의 심장에서 나와 팔로 흘러들어가서 손끝으로 향한다고 생각하는 검다. 팔은 통로일 뿐이에요. 무슨 소린지 알겠슴까?

이런 건 말로만 들어봤자 알 리가 있냐. 로한은 속으로 되받아치며 자신의 심장박동에 우선 신경을 집중했다.

몇 초 후 갑자기 생경한 감각이 느껴졌다. 심장 속에서 튀어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심장과 폐 사이에서 가까스로 자리를 차지한 것 같기도 했다. 그 힘은 닿는 것은 무엇이든 찢어내려는 듯 날카롭고 위태롭게 숨쉬고 있었다. 몸 속에 잘못 꿰매어져 들어간 송곳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런 느낌일까. 로한은 식은땀을 흘리며 정신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이 송곳 같은 힘이 심장에서 빠져나와서, 손끝에 도달한다고 생각하는 거랬지.

너무 의식하지 않는 게 편해요.

죠스케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심장 박동과 함께 팔을 타고 손 끝으로 흘러가게 놔두는 검다.

로한은 불규칙한 호흡을 가라앉히려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송곳이 살짝 움직이더니 유연하게 구부러지는 듯했다. 마치 혈류 속에 잠긴 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날것의 힘은 오른팔을 타고 손끝으로 내려갔다. 힘이 살갗을 뚫고 방출되려는 순간 손아귀 속의 문고리가 덜컹거렸다. 그러고는 소리 없이 꽉꽉 뭉쳐져 로한의 손바닥 속으로 떨어졌다.

문고리와 잠금장치가 사라진 문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 대단한데.

로한은 중얼거렸다.

… 뭐 이 정도 가지고.

거대한 수장고 내부는 적막했다. 수많은 선반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키노시마 박물관의 소장품은 약 6만여 점이다. 그중 한 번에 전시실에서 공개되는 유물은 1천 점을 넘지 않는다. 언제나 나머지 5만 9천 점은 이 수장고 속에 있는 것이다. 그 속에 죠스케의 브로치도 존재해야 한다.

로한은 이상한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직은 별다른 감각이 없다. 그렇다면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소리다. 로한은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매 걸음마다 머리카락을 쭈뼛 세우는 듯한 한기, 그리고… 아주 미약하게나마 퍼져나오는 온기가 있었다.

로한은 고개를 돌렸다. 난로 같은 게 가동되고 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선반 사이에서 약한 빛을 발하며 온기를 퍼뜨리는 저것은.

죠스케의 브로치겠군.

찾았어.

로한은 선반 위의 브로치를 집어들었다. 재료는 평범하게 황동이었으나 정교함만큼은 남달랐다. 인간의 심장이 극도로 세밀하게 세공되어 마치 금방이라도 펄떡펄떡 뛸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로한의 손 안에서 미세한 진동이 규칙적으로 느껴졌다. 설마, 정말로 두근거리고 있는 건가.

들어가자마자? 와… 대박인데요?

죠스케가 흥분한 듯 놀란 어조로 말했다.

내 말이.

다행이구만. 얼른 나가면 되겠네요.

그렇잖아도 갈수록 추워지고 있었으므로 로한은 입구 쪽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대체 박물관 측은 온도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건지 의문스러웠다. 이대로라면 유물이 제대로 보존될 리 없는 수준인데. 보통은 이십 도 안팎이 권장되지 않던가.

로한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공중에서 물방울이 얼어 바닥에 흩뿌려졌다.

뭐라고?

죠스케. 여긴…. 뭔가 이상해.

로한은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찌푸렸다.

…응?

왜 수장고 내부는 영하인데, 네 브로치만 온기를 유지하지?

로한은 주머니에 손을 더욱 깊게 찔러넣으며 발을 옮겼다.

애초에 왜 수장고는 이토록 추운 거고?

왜 밖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을까?

갈수록 발걸음이 느려졌다.

마치 쌓인 눈을 헤치고 한 걸음씩 내딛을 때처럼.

이봐.

다른 유물들은 얼어붙지 않는데

왜 얼어붙고 있는 건…

나뿐이지?

그게 무슨 소리야???

잠깐… 로한!!!

……

로한!!!!


로한은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눈을 떴다. 밝은 햇살이 창문을 타고 들어오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심장도 찢어질 듯 욱신거렸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방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장소였다. 고모다 저택 인근 한적한 곳에 위치한 로한의 숙소다.

쓰러지기 직전의 마지막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로한은 흘러들어오는 대로 하나씩 되짚었다. 분명 오키노시마 박물관에 방문했었고, 밤을 틈타 수장고에 진입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브로치를 찾아 돌아나오고 있었다.

추위에 얼어붙기 전까지는.

그래, 추위, 그리고 브로치.

어째서 인식하지 못했을까? 방 안에서 강렬한 이끌림이 느껴지고 있었다. 마치 쇳가루를 흩뿌린 자기장처럼, 그 이끌림은 정확히 로한의 왼쪽 주머니로 이어졌다. 그는 주머니에서 브로치를 꺼냈다.

가져오는 건 성공한 모양이었다. 몸도 이만하면 멀쩡한 것 같고. 한데… 왜 숙소에 도착하기까지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지?

로한은 머릿속으로 물었다.

죠스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로한은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로한이 고모다 저택의 별채 지하에 도착한 것은 약 20분 후였다. 오아키는 가타부타 따지는 것 없이 로한의 요청에 지하실을 열어준 후 자리를 떴다. 오늘따라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 듯했다.

로한은 홀로 지하실에 남아 죠스케 앞을 서성거렸다. 평소라면 곧 천사가 눈을 뜨고 일어날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죠스케는 고개를 수그린 채 꼼짝하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여 이름을 불러도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지.

“헤븐즈 도어.”

로한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스탠드를 불러냈다. 죠스케의 페이지가 빛나며 스르륵 펼쳐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죠스케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다급해진 로한이 아예 뭔가를 적는 시도라도 하려는 참이었다.

죠스케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어이.”

로한이 부르자 죠스케는 눈을 겨우 뜨고 로한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웅얼거렸다.

“미안, 난 좀 잘게…”

두 눈은 다시 스르륵 감겼다. 로한이 뭐라고 말을 덧붙일 새도 없이.

몇 시간 후 로한은 여전히 지하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사이 고모다 저택을 한 바퀴 기웃거리고 왔으니 ‘여전히’라고 하기엔 조금 어폐가 있겠지만. 아무튼 죠스케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은 빤히 보이니 또다시 확인하러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죠스케의 눈꺼풀이 한 차례 떨렸다. 그는 힘겹게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로한과 시선을 마주친 죠스케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도 있었어?”

죠스케의 목소리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 어떻게 된 거야?”

“아… 별 일은 아닌데. 안하던 걸 하느라 힘을 많이 써 버렸지 뭠까."

죠스케는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으나 얼굴에 잔잔히 녹아든 피곤은 숨겨지지 않았다. 로한은 눈을 찌푸렸다.

그는 원 옆에 무릎을 접고 앉은 후 주머니에서 심장 브로치를 꺼냈다. 브로치는 여전히 손 안에서 미약하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브로치를 본 죠스케의 눈빛에 조금 더 생기가 돌았다.

“일단… 넌 이걸 회수하는 편이 낫겠지. 안 그래?“

로한이 물었다.

”아무래도 그렇죠. 나한테 주면 알아서—”

죠스케의 말은 당황으로 끊겼다. 로한은 아무 말 없이 죠스케의 옷에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다니까…"

죠스케는 작게 투덜거렸지만 이미 브로치는 가슴팍에 고정된 뒤였다. 로한은 브로치를 매던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래서, 이 다음엔 어떻게 되는데?"

죠스케는 로한을 보고 브로치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그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이거 참. 원래는 브로치 돌려받으면 좀더 뭐랄까, 간지나게 탈바꿈하려고 했는데….. 지금 그럴 컨디션이 아니라서 영 아쉽슴다.”

뭘 간지나게 한다고? 로한이 질문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 죠스케의 브로치가 번쩍했다. 내내 수수했던 흰색 옷이 삽시간에 검은색으로 물들어갔다. 팔을 따라 길어지는 옷소매와 그 끝을 장식하는 황금색 띠. 느긋하면서도 힘을 준 듯 곧추세워진 옷깃과 곳곳에서 번쩍이는 황동 핀들. 넉넉한 품의 바짓단 끝은 깔끔하게 접혀지고 딱 봐도 고급스러운 구두가 이를 마무리했다. 심장 브로치는 어느새 단순하고 모던한 하트 디자인으로 바뀌어 있었다.

죠스케는 이제야 좀 힘이 난다는 듯 어깨를 살짝 들썩였다.

“이 정도는 해야 어디 다닐 수준은 되지!”

로한은 어처구니없는 감정에 아까까지의 걱정이 절반 가량 사라지는 생소한 감각을 경험했다.

죠스케 녀석… 본인이 세일러문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심지어 변한 옷차림을 보니 영락없는 남고생이다. 그것도 수상하게 넉넉한 주머니 사정을 이용해 맵시를 챙기려 애를 쓰는 남고생 말이다. 뭘 보고 이러는지 몰라도, 이 놈은 전반적인 인간 문화에 관해 매우 편향된 판타지를 갖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로한이 잠시 감상에 잠긴 동안 죠스케가 이쪽을 슬쩍 보더니 뒤늦게 물어왔다.

“댁이야말로 아픈 데는 없어? 심장이라든가…”

심장? 그러고 보니 일어날 때 욱신거렸던 기억이 난다.

“아까는 아팠는데, 지금은 괜찮아진 것 같군.“

“그럼 다행이네.”

심장이라.

이 녀석은 이걸 어떻게 아는 거지?

“죠스케. 도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어?"

죠스케는 로한을 말없이 쳐다보다 긴 한숨을 쉬고 털어놓았다.

“댁이 거기서 정신을 잃은 사이에… 내가 댁 몸을 임시로 차지했어.“

“… 뭐? 그런 것도 가능하단 말이야?“

”아, 원래는 그럴 수 없슴다. 권속이라 해도 댁은 댁이고 나는 나니까. 남의 의지를 조종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그땐 로한이 의식을 잃어서 정신의 공백이 생겼고,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그 빈 공간을 비집고 들어갔어. 다행히 아직은 몸을 움직일 수 있더라고. 그래서 박물관을 탈출하고,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서 숙소로 돌아간 검다.“

“… 그러느라 힘을 많이 썼다는 거군.”

“남의 몸을 대신 움직이는 건 꽤나 어려운 일임다. 특히 지금처럼 제한이 많을 때는.“

로한은 죠스케를 위아래로 훑었다. 몇 시간 전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던 상태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모습이다. 물리적 피곤함은—천사에게 ‘물리적’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다면—남아있는 것 같지만.

로한은 말했다. 이것이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나름의 진심을 담아 언급한다는 어조로.

“자네가 내 목숨을 구했군.“

죠스케는 두 눈을 꿈뻑였다. 로한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전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고는 씨익 미소지으며 답했다.

“이 정도는 해줘야지.“

그렇게 말해 두고선 머리를 긁적이며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그런데… 댁이 애초에 내 권속이 아니었다면 그 창고에서 추위에 얼어붙을 일도 없었을 거라… 뭐, 그렇게 됐네요.“

거야 그렇겠지. 이는 지난 밤을 돌이켜볼수록 명백해지는 사실이었다. 천사의 브로치가 내뿜는 온기를 효과적으로 가리는 추위라니 우연이라기엔 지나치게 공교로웠다. 실제로 온도가 영하로 하락했다기보다는 천사나 그 비슷한 존재를 노리는 힘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어떻게 그런 방어를 손써두었단 말인가?

이것도 고모다 히로시가 꾸민 일일까?

로한이 그렇게 묻자 죠스케는 의외로 대답이 곤란하다는 반응이었다. 그건 천사인 본인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감각이 제한된 인간의 몸에 들어간데다 능력도 완전하지 못해서 추위 이면의 힘을 파악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만일 주술이라면 지하의 힘을 빌려왔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 이상은 아는 바가 없다고.

“고모다 히로시 그 자식, 생전에 나한테 온갖 말을 나불거리면서도 자기 능력이나 주술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편이었슴다. 삼류 악당 스타일이었다면 나를 여기 가둔 순간 우쭐해하면서 바닥까지 다 불었을 텐데, 불쾌한 놈이야.”

죠스케는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내용에 비해 감정의 동요가 없는 말투였다. 냉정한 분노가 저변에 불타고 있다는 뜻이라는 걸 로한은 알았다.

“그 힘이 네 물건의 기척을 감춘다면, 머리카락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을지 모르겠군.“

로한이 문득 생각나 제안했다. 죠스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아닐걸요? 끌어당겨지는 감각은 브로치보다 머리카락에서 훨씬 강하게 느껴져야 함다. 인간 기준으로 설명하긴 어려운데… 나한테 제일 중요한 건 머리카락이거든. 그런데 창고에선 브로치가 먼저 느껴졌다며.”

로한은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확실히 선반 사이 실낱같은 온기를 따라가니 그곳에는 브로치만 있었다. 만약 더 뜨거운 물체가 있었다면 브로치의 온기는 묻혀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편이 오히려 다행이죠.”

죠스케가 덧붙였다.

“왜지?”

“당연한 거 아냐? 댁이 다시 박물관에 갈 필요가 없어졌잖아.”

“대신 머리카락의 행방은 다시 묘연해졌고.”

“아니~ 애초에 말야.”

죠스케가 살짝 떫은 말투로 말했다.

“그거 내 머리카락이거든요. 댁 머리카락이 아니라. 남의 머리카락 때문에 왜 목숨을 걸어요?”

“내가 언제 목숨을 걸겠다고 했어? 머리카락을 찾기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뿐이라고. 게다가 그렇게 말하는 네놈이 시킨 일이잖아, 이건?“

“아~니~~”


죠스케와의 만남은 예상보다 큰 어려움 없이 마무리되었다. 확인 결과 로한도 죠스케도 몸과 영혼에 반영구적인 상해나 저주의 흔적은 남지 않았다. 로한이 어젯밤 수장고에서 얼어 죽을 뻔하고 급한 대로 죠스케가 로한의 몸을 비집고 들어와 대신 조종한 것치고는 매우 순탄한 결말이었다.

로한은 그 정도로 위험한 힘이 방어하고 있는 오키노시마 박물관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숨기고 있을지 호기심이 일었다. 죠스케를 완전히 회복시킨 다음 그를 설득하여 수장고에 진입한다면 순탄하게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죠스케가 힘을 되찾는다면 로한과의 계약은 끝나겠지만, 추가로 이 정도 협력을 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죠스케는 이제 심심하면 로한의 머릿속으로 말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것도 로한과의 계약이나 고모다 일가와는 전혀 관련 없는 수다가 대부분이었다. 그 명품 브랜드에서 새로 내놓은 신발은 디자인이 어떻냐느니, 요즘 유행하는 락밴드는 어떤 게 있냐느니. 그러다 로한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든가, 장소는 뭐가 있는지도 은근슬쩍 물어보기도 했다. 아무래도 65년 이후로 갇혀 있다 보니 외부 소식이면 무엇이든 굶주린 듯했다. 로한은 딱히 할 것도 없을 때는 아는 대로 대답해 주었으나, 죠스케와 취향이 억만 광년은 떨어져 있어 죠스케가 항상 불만족스러워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죠스케가 브로치를 되찾으면서 로한의 넷째 손가락 힘줄은 해가 저문 후부터 자정까지 존재하다가 자정 이후에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로한은 죠스케에게 분명 네놈 좋은 일을 해주었는데 왜 자신이 힘줄을 보존하는 시간은 도리어 줄어든 거냐고 지적했다. 여기에 죠스케는 뻔뻔스럽게도 천사로서 한번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대답했다. 이 경우 그 ‘맹세’는 죠스케가 힘을 완전히 되찾을 때까지 로한의 힘줄을 자신이 보관한다는 내용을 가리키며, 일시적으로 힘줄이 회복되는 것은 오로지 죠스케의 힘이 부족해서라고. 즉 로한의 힘줄이 매일 오락가락하는 현상은 죠스케 본인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다. 로한 입장에서는 들으나 마나 한 해명이었다. 결론은 머리카락을 빨리 찾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귀결되었으니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놈의 머리카락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로한은 며칠 후 저택을 다시 한 바퀴 둘러보러 고모다 일가를 찾아갔다. 오아키는 로한을 맞이하고 만일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안채 사무실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변함없이 바쁜 모양이었다. 그 사이에 더욱 눈가가 어두워진 것을 보아 일은 잘 풀리지 않는 것 같았다. 오아키가 흘리는 말로는 사업상의 문제와 부모 사망 후 불거진 친척 간 갈등이 가장 큰 어려움이란다. 그나마 약혼자가 한결같이 곁에 있어 힘이 된다고 했다. 로한 선생님도 아직 포기하지 않아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로한은 너무 기대하지 말라고 답했지만, 오아키는 이를 겸양의 표현으로만 받아들이는 듯했다.

분명히 지난번에 저택을 돌아보았을 때 로한은 고모다 히로시의 가계부가 보관된 창고에서 강한 이끌림을 느꼈다. 그러니 머리카락에서는—적어도 죠스케의 말에 따르면—그보다도 강력한 무언가가 느껴져야 했다. 그 정도로 강력하다면 멀리서부터 눈치를 채야 맞을 텐데. 이상하게도 느껴지는 건 많지 않단 말이지. 로한은 안채 옆의 샛길로 들어서며 생각했다.

창고를 둘러싼 정원에 도착하자 털이 곤두서는 듯한 감각이 더욱 예민하게 팔을 타고 올라왔다. 로한은 우선 창고를 무시하고 한참을 걸어 정원 끝자락에 도달했다. 정원 깊숙한 곳에는 차를 마실 수 있는 조그만 다실이 존재했다. 그 너머로는 저택의 담장과 뒷문이 이어졌다. 오아키의 주의가 미처 닿지 못한 듯 경관에 어울리지 않는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지고 있었으나, 그다지 이상한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로한은 뒷문을 슬쩍 열고 그 너머를 잠시 살펴보았다. 작은 대나무숲 사이에 공터가 있고, 그 뒤로는 주차장이 있었다. 역시나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다.

차라리 오아키가 갖고 있다는 고모다 히로시의 일기부터 살펴보는 편이 낫겠군. 로한이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돌리는 참이었다.

어딘가에서 매캐한 향이 흘러 들어왔다.

누가 모닥불이라도 피웠나? 아니면 낙엽을 태우고 있는 건가. 늦가을인 만큼 어느 쪽이든 크게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어느덧 차가운 가을 바람이 폐를 채우기 시작했다. 댓잎이 부대끼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을 타고 냄새가 더욱 강해졌다. 이 마을은 숲이 넓게 펼쳐져 있으니 불을 피운다면 번지지 않게 조심해야 할 날씨다.

그때 매캐한 향에 다른 것이 섞여 들어왔다.

언뜻 맡기에는 마치 뼈가 불타며 풍기는 노린내 같았다. 다만 동물을 태운다기에는 이상했다. 강렬한 유황 같은 향기가 겹쳐져 있었다. 맡을수록 지독한 냄새라 로한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소리.

인간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새된 비명 소리가 날카롭게 로한의 귀청을 울렸다.

로한은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어느 곳에서도 연기는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설마 이것도 초월적 힘이 개입한 현상일까?

그는 냄새와 소음이 뒤섞여 풍겨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비명 소리는 한 번 울리고 다시는 들리지 않았으나 유황과 뼈가 타는 냄새는 더욱 강해졌다. 냄새는 대나무숲을 지나 공터 쪽으로 로한을 이끌었다.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눈에 잡히는 것은 대나무와 낙엽과 흙뿐이었다.

사방에 새까맣게 불타는 깃털이 날리는 가운데 화염이 혀를 낼름거리고 있었다.

뭐?

로한은 눈을 세차게 깜빡였다.

울창하게 우거진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렸다. 공터 바닥에서는 낙엽이 뒹굴었다.

…이런 건 처음인데.

뭐가요?

글쎄. 나도 더 봐야 알 것 같군.

그러니까 그게 뭐냐니까?

로한은 공터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아까의 환영 같은 이미지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나 냄새는 여전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지면을 살펴보았다. 고개를 숙이자 냄새가 더 강해졌다. 골이 띵해질 만큼 독성이 끓어오르는 냄새였다.

로한은 흙먼지 속을 더듬었다. 분명히 평범하게 축축해진 흙이었으나 손가락은 불에 가까이 간 듯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여긴가?

흙 속에서 길고 가는 것을 잡아당기자 서로 뒤엉킨 머리카락 다섯 올이 뽑혀 나왔다. 절반 이상이 불에 그을려서 윤기 없이 구부러져 있었다. 로한이 머리카락을 손바닥 위에 놓자 머리카락은 축 늘어졌다. 그러다 스스로 살아 움직이며 필사적으로 서로 꼬여 들어갔다. 마치 불에 데인 뱀이 몸부림치는 듯한 모양새였다.

움직임을 보아하니 천사의 머리카락인 건 확실했다. 다섯 올이라도 찾은 건 기뻐할 일이다. 다만…

로한은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매캐한 유황 냄새를 실어나르며 공터를 빙빙 도는 바람. 그리고 살과 뼈가 타는 향. 또다시 들리는 흐느낌과 비명 소리.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사악한 기운이야…”

로한은 중얼거렸다.

그는 죠스케에게 무언가 말을 걸어보려고 했다.

그 순간 손바닥에서 꿈틀거리던 머리카락 다섯 올이 로한의 손목을 휘감았다. 그러고는 맥박이 뛰는 정맥 속으로 스스로를 찔러넣었다.

로한은 고통에 차 비명을 질렀다. 아니, 신음했을지도 모른다. 손목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머리카락 때문에 자신이 무슨 소리를 내는지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어느새 서로 꼬이고 합쳐져 한 마리의 바다뱀이 되더니 심장으로 되돌아가는 혈액의 흐름을 따라 헤엄치기 시작했다.

로한은 겨우 숨을 가다듬었다. 죠스케 이 망할 녀석은 이런 식으로 머리카락이 움직일 거라고 언질이라도 주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또 천사라서 인간 입장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는 소리나 지껄여 봐라. 그런 생각을 하던 차였다.

로한의 가슴속으로 자신의 것이 아닌 감각이 흘러들어왔다.

펼쳐진 날개.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깃털들. 물에 잠겼다 수면 위로 끌어올려진 물고기마냥 숨이 막히는 감각. 끝없이 번지는 검은 불꽃. 그리고 심장이 조각조각 찢어지는 고통.

그 모든 것들을 해일처럼 뒤덮는 슬픔과 새하얗게 타오르는 분노.

로한은 떨리는 팔로 땅을 짚고 겨우 몸을 지탱했다.

죠스케.

이 기억은…. 대체 뭐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오직 침묵만이 감돌았다.

어느덧 날이 저물고 있었다. 고모다 저택을 떠나기 직전 로한은 죠스케가 있는 지하실로 향했다. 그곳에 가면 직접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죠스케의 머리카락이 로한의 심장에서 사라진 이후부터 죠스케는 몇 시간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로한은 줄곧 자신이 느낀 감각에 관해 말을 걸었으나 죠스케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머리카락과 관련된 자신의 경험에 관해서는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죠스케가 입을 열기 싫다면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로한은 찾아야 할 머리카락이 아직 남아 있는 입장이었다. 그것도 애시당초 죠스케가 제안한 거래 아니던가? 그 제안 당사자가 갑자기 이제 와서 정보를 더 알려주기는커녕 입을 닫아버린다니. 그것도 이미 주고받은 말이 적지 않은 사이에. 로한으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는 오아키가 빌려준 열쇠로 지하실 문을 열었다. 계단을 내려가니 죠스케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서 있었다. 죠스케가 로한을 돌아보았다.

“왔어요?“

로한이 입을 열기도 전에 죠스케는 말을 이었다.

“그 머리카락은 나한테 잘 돌아왔더라. 찾아줘서… 고맙슴다.“

죠스케에게서 고맙다는 말을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로한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말했다.

“뭐, 됐어. 그나저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러니까 로한은 이만 돌아가 봐도—”

죠스케는 로한과 동시에 말을 꺼내다 멈추었다. 그는 입을 꾹 닫았다 다시 열었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십쇼.“

로한은 돌아서지 않았다.

그는 원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앞으로 네 머리카락을 찾으면… 난 또다시 네 기억을 경험하게 되는 건가?“

죠스케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도. 그건 나도 어쩔 수 없는 거라. 그런데 왜?”

“그럴 바에야.”

로한이 말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네가 먼저 말해주는 편이 낫지 않겠나? 너와 고모다 히로시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면 말이야.”

죠스케는 주머니에 손을 더욱 깊숙히 찔러넣었다. 그는 속눈썹 너머로 로한을 응시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댁 말은 내가 겪은 걸 처음부터 끝까지,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건지 다 말하라는 뜻이지?“

“전부 말하라는 게 아냐, 최대한 말해줬으면 한다는 거지.”

“그게 그거죠.”

죠스케가 쏘아붙였다.

“그리고 난 말할 생각 없슴다. 나는 애초에 댁한테 얘기했어요. 브로치랑 머리카락만 찾아오면 된다고. 그리고 당신은 잘 찾아오고 있잖아요.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뭘 할 생각인지 댁은 몰라도 돼—“

“무슨 소리야, 그게?”

로한이 눈을 치켜뜨고 반문했다.

“이봐, 죠스케. 되새기기에 고통스러운 기억인 건 알겠어. 그런데 그걸 다 말하라는 게 아니잖아? 나는 지금 우리 사이에 숨겨진 거라도—”

“내가 그게 고통스러운 기억이라서 말하길 꺼린다고 생각해?”

죠스케가 말을 잘랐다.

“그러면?”

“… 댁은 알 거 없어.“

또 원점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러는 거지?

이 녀석은 무슨 생각인 거야?

로한은 납득되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죠스케를 바라보았다. 죠스케는 짙은 눈썹을 찡그린 채 또다시 입술을 닫은 채였다. 이미 오래전에 결심을 굳힌 흔적이 그의 얼굴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로한은 그 표정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럴 거면 권속 계약은 왜 맺었는지 묻고 싶군.“

로한이 말했다.

“네 힘을 빌려주고, 기능적인 정보는 공유하면서 문제의 핵심은 알려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지?”

죠스케는 로한을 노려보았다.

“애초에 다른 권속이었다면 날 믿고 따랐겠죠. 계속 캐묻는 게 아니라.“

“다른 권속 얘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 내가 지금 말하는 건 우리 둘의 관계라고.”

“그러니까 더더욱—“

죠스케는 언성을 높이려다 움찔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 다 댁을 위해서라고요.“

”날 위해서?“

“그렇다니까. 왜 날 못 믿어주는데?”

“못 믿어주는 게 아냐, 의문을 품는 거지.”

로한은 죠스케의 상냥함과 선의는 믿었다. 하지만 그건 성정에 대한 믿음이지 이 상황에 대한 믿음은 아니었다. 전날까지는 오만 이야기를 다 주고받다 갑자기 특정 주제에서 소통을 거부하면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근거 없는 믿음은 신뢰가 아니라 맹신에 가깝다.

그러나 과연 현재의 죠스케가 이 논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의심스러웠다.

“그러니까, 결국 날 못 믿는 거잖아.”

아니나 다를까다. 로한은 이마를 짚었다.

“앞으로 찾을 머리카락이 열 개 남았다면서?“

”… 그렇죠.”

“그럼 찾을 때마다 내가 알아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짜맞추는 건 되고, 네가 직접 말하는 건 안 된다고?“

”…….“

죠스케는 입술을 위아래로 꾹 다물다 뗐다.

"그 머리카락 속에 무슨 기억이 있을지는 나도 모름다. 있다 해도 조각나 있을 걸요.”

머리카락만으로 과거를 알아서 짜맞추기는 힘들 테니 본인은 걱정 없다는 소리였다.

아니, 죠스케의 희망사항에 가깝겠다.

“그래… 네 입장은 잘 알겠다. 맘에 든다는 뜻은 아니지만.”

로한이 또렷이 말했다.

“… 그럼 됐어요.”

죠스케가 어깨를 으쓱했다. 로한은 혀를 한번 차고 돌아섰다.

"로한."

발걸음을 옮기려는 뒤통수에 대고 죠스케가 이름을 불렀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어차피 얼마 안 남았슴다.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주십쇼.”

로한은 고개를 돌리고 아무 말 없이 지하실에서 걸어나갔다.

그날 숙소로 돌아가며 로한은 죠스케와의 대화를 반추했다.

처음에는 답답함과 분노가 밀려왔다. 로한이 보기에 죠스케는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주장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빼앗긴 물건을 찾아달라고 일방적으로 부탁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것도 알려줄 수 없다고 나온단 말인가? 게다가 이유는 대지 못하면서 그런 자신을 믿어달라고 사정하는 것은 로한과의 신뢰관계를 멋대로 이용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동시에 로한은 기묘함을 느꼈다.

죠스케의 주장에는 아무 논리가 없었으나 그는 비밀을 지키는 데에는 진심이었다. 죠스케에게는 그래도 나름의 이유와 계획이 있다는 소리다. 로한에게는 말하기를 거부하는 이유와 계획 말이다.

이와 비슷한 태도를 로한은 목격한 적 있었다.

로한이 죠스케와 처음 만났을 때, 죠스케는 브로치와 머리카락에 대한 정보만 제공한 후 나머지는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로한은 빨리 손가락 힘줄을 되찾고 싶었기에 죠스케의 통보는 편리한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그때는 죠스케가 뭔가를 일부러 숨기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둘은 어디까지나 사무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그 정도 선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로한은 죠스케에게 기대하는 솔직함이 있었다. 그건 죠스케도 마찬가지일 거라 믿었다. 서로 더 내밀한 이야기도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둘은 꽤…

가까워졌으니까.

그런데도 죠스케의 태도는 첫만남 때와 변함이 없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말을 아끼는 걸까?

그 녀석은 대체 뭘 알아서 하겠다는 거지?

죠스케에게 더 캐물어서는 답이 나오지 않을 질문들이었다.

어느덧 밤이 깊어져 찬바람이 몰려왔다. 로한은 옷깃을 여미며 숙소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불현듯 생각했다.

이제야말로 고모다 히로시의 물건들을 샅샅이 뒤질 때라고.


다음날 오아키는 로한이 고모다 히로시의 일기부터 요청하자 즉시 서재에서 일기장을 찾아 가져다주었다. 본인은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조금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드디어 이걸 보시는군요, 하는 말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로한이 일기장을 펼쳐 슥슥 넘겨보는 동안 오아키는 옆에서 슬쩍 로한을 기웃거렸다.

“한 삼사십 년 된 일기장이라 종이가 좀 낡았어요. 찢겨나간 곳들도 꽤 있고요.”

그가 덧붙였다.

“주로 어딜 돌아다녔고 뭘 했는지 일정을 정리하는 용도로 쓰신 것 같아요. 스스로 조사하신 정보들도 여백에 깨알같이 써 두셨더라고요. 최근에 한번 다시 봤는데, 여러 가지 주술이 생각보다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었어요.”

로한은 사실 히로시의 일기장에 크게 핵심적인 정보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죠스케와 얽힌 중요한 사건은 따로 있을 텐데, 일기장을 읽고 오아키가 그것을 알아냈더라면 로한에게 이미 말을 했을 것이다. 혹은 애당초 남에게 천사와 관련된 부탁을 할 이유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주술과 관련된 정보는 꽤 흥미로워 보였다.

소환술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다. 소환을 시도하는 시간. 소환에 필요한 물건들. 그리고 소환 시 읊는 주문.

흔히 사람들은 시간과 물건에 치중한 나머지 주문을 도외시한다. 그러나 사실 소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문이다. 언어는 힘을 내포한다. 예를 들어 단어의 순서를 바꾸면 소환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고, 정반대의 언어를 사용하면 소환의 의도를 역행시키는 주문이 된다. 이론적으로는 이를 이용하면 심지어 소환해 둔 존재를 원래 장소로 되돌려보낼 수도 …

….

뮤즈를 소환하려면 세간에 악마 소환술이라고 알려진 기술을 변형해야 하며 …

주문 시 사용하는 단어는 다른 자매가 아닌 칼리오페를 가리키도록 주의 ….

로한은 눈을 찌푸렸다.

일기장에서는 천사라는 단어보다 뮤즈가 훨씬 더 높은 빈도로 반복되고 있었다. 설마 고모다 히로시는 뮤즈를 소환하는 방법을 조사하고 있었던 건가? 은유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뮤즈가 존재한다고 믿은 걸까. 그가 만화가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무 존재나 소환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예술가로서 성공하도록 도와줄 존재를 찾는 편을 선호했겠지. 지금 지하실에 있는 그 녀석이 뮤즈라기엔…

어폐가 많아 보이지만 말이다.

과연 몇 페이지를 더 넘기자 65년 11월 10일이라고 휘갈겨 쓴 날짜 밑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소환 오류 천사 소환 및 속박 성공. 오히려 잘 됐음.

꼼꼼한 계약이 필수인 대부분의 존재들과 달리 천사는 융통성 있는 편. (※ 야곱 일화 참조. 오래되고 불명확한 이야기이나 의외로 사실에 가까웠음)

천사의 이름은 알아내지 못함. 즉 대천사는 아님.

이걸로 나는 물론이고 우리 집안 모두가 대대손손 성공할 수 있어!!

내내 냉정하게 사실관계만 서술하다가 마지막 줄에서 말투가 달라지는 걸 보아 결국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모양이다. 글에서 이십 대 초반 청년의 흥분이 절로 녹아나오는 듯했다.

여기까지는 오아키가 들려준 이야기와 대체로 일치했다. 로한은 혹시 몰라 그 다음 페이지들도 죽 훑어보았지만 이후로는 새 만화 계약과 출판에 관련된 일정 메모만이 연달아 등장했다. 고모다 히로시는 조사에 진심인 것치고는 일기를 자주 쓰지 않는 스타일인 듯했다. 아예 한 달을 건너뛰는가 하면 본인 기준으로 중요한 약속만을 적어두기도 했다. 만화 아이디어 메모를 위한 것인지 낙서들도 중간중간 끼어 있었다.

그나마 주술의 기술적 측면과 관련된 설명은 많았다. 지하의 불을 일으킬 수 있는 주술용 성냥을 좀더 구했다는 언급이라든가—아마 오아키가 사용한 성냥도 이 종류일 것이다—봉인 원을 그리고 유지하는 방법 등이었다. 그러나 천사 자체에 관한 언급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런 기록들이 1967년 3월까지 이어졌다.

로한은 공책을 끝까지 훑은 후 탁 덮었다.

“어때요, 좀 도움이 되셨나요?”

오아키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약간은요. 혹시 삼촌분이 이 이후에 작성한 일기도 있습니까? 돌아가시기 전에 쓴 메모라든가.”

로한이 물었다. 고모다 히로시가 어떠한 이유에서든 죠스케의 분노를 샀던 건 사실이므로 로한의 생각으로는 그가 요절한 것도 우연이 아닐지 몰랐다. 만화가가 원인 불명의 화재로 사망한 것은 이로부터 약 십 년 후인 1978년이니, 본격적으로 일이 틀어진 계기는 70년대에 들어서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글쎄요... 그나마 가장 참고하실 만한 건 이 일기일 거예요. 삼촌이 기록 비슷한 걸 계속 하시긴 했는데, 이 공책 저 공책 옮겨다니면서 그때그때 쓰신 것 같아요. 그다지 정리가 잘 되어 있지는 않다고 할까요. 부모님이 전부 창고에 넣어버리신데다 저도 일하느라 바빠서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알겠습니다. 창고를 다시 살펴야겠군요.”

오아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치 더 할 말이 남은 사람처럼 입을 달싹였다. 로한은 그를 지나쳐 문을 열고 나가려는 참이었다. 오아키는 결국 로한을 붙잡고 빠르게 말했다.

“로한 선생님, 혹시 천사의 축복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발견하신 게 있나요? 전에 브로치와 머리카락을 찾아야 한다고 하셨던 것 같아서…”

로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에게 어디까지 밝히면 좋을까. 사실을 숨겨 봤자 좋을 건 없겠다. 로한 자신도 아직 확실치 않은 점은 말할 수 없다만.

“축복에 대해서는, 아직 없습니다. 아마 천사의 축복이 돌아오리라 기대하는 것도 무리일 겁니다."

로한은 대꾸했다.

오아키는 작게 한숨을 쉬며 로한의 옷깃을 놓았다. 고개를 든 그는 예상외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 감사합니다, 로한 선생님. 사실은… 저도 그럴 거라고는 느끼고 있었어요."

"느끼고 있었다고요?"

"아, 그냥… 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오아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사실 요즘은,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부모님 사업을 정리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회계 장부를 들여다보고 있다 보면… 천사의 축복 같은 건 먼 세상 일처럼 느껴지곤 해요. 분명 천사는 지하실에 버젓이 있는데도요. 혹시 이건 그저 천운이 다한 건 아닐까? 우리가 해결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는 안경을 벗어 만지작거렸다.

"어쩌면 로한 선생님의 조사에 의지하고 싶었던 것도, 현실은 너무 복잡하고 어렵기만 하니 어떻게든 천사의 힘에 기대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어요... 횡설수설하고 있네요.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로한이 답했다. 고모다 일가의 존망이야 로한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해결할 마음도 없었다. 다만 오아키가 겪는 무력감은 로한도 자주 목격해온 바 있었다. 비단 오아키뿐만 아니라 인간이 대항할 수 없는 흐름에 부닥치는 이들은 으레 그러했다. 별 수 없는 일이다.

“크흠. 그러면 창고를 열어드릴게요.”

오아키가 안경을 다시 끼며 말했다.

창고 주위로 강렬한 자기력이 작용하는 듯한 느낌은 여전했다. 오히려 처음 방문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 강해진 듯했다. 기분 탓인지, 아니면 머리카락이 몸속으로 지나간 후 죠스케와의 연결이 더 긴밀해진 탓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로한은 끌림을 최대한 무시하려고 노력하며 창고 안의 상자를 뒤적였다. 오아키는 그사이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저택을 떠난 상태였다. 가기 전에 로한에게 창고에서는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로한은 지난번에 살피지 않았던 상자들을 바닥에 내리고 공책과 서류를 훑어보았다. 고모다 히로시가 스케치한 습작들이 있는가 하면, 독자들이 보낸 팬레터도 여러 뭉치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 속에서 죠스케와의 악연을 언급한 메모를 찾으려면 적지 않은 시간을 소요할 것 같았다. 우선은 고모다 히로시의 글씨가 가득한 노트부터 따로 분류해야겠지—

로한은 자신이 집어든 공책에 시선을 빼앗겼다. 히로시의 가계부가 또다시 손바닥에 들려 있었다.

무슨 일이지?

로한은 눈을 찌푸리며 가계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니, 내려놓으려 했다. 가계부는 손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로한은 이제 정말 자기력이 작용하기라도 하는 건가 질문을 던졌다.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가계부의 종이들을 단단히 묶고 있는 실 사이에 머리카락이 여섯 올 끼어 있다가 로한의 손까지 휘감고 있었다.

이게 왜 여기 있어?

설마, 가계부에서 끌림이 느껴졌던 건 처음부터 이 머리카락 때문이었나?

돌이켜 보면 메모에서 브로치를 언급한 것만으로 그처럼 강한 힘이 작용하는 건 이상하긴 했다.

로한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머리카락은 왼손을 감은 채 천천히 빙빙 돌았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주사기 바늘처럼 한쪽 끝을 손등의 정맥에 들이댔다. 모양과 위치를 보아하니 이번에는 좀 덜 아플 모양인가 싶었다.

따끔하는 감각과 함께 검은 머리카락은 줄줄이 로한의 손등 속으로 사라졌다. 곧 간질간질하는 느낌이 로한의 심장에 닿더니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마치… 깃털이 가볍게 닿을 때의 촉각 같았다.

깃털?

천사의 날개인가?

하지만 자신—그러니까 죠스케—의 날개는 아니었다.

귓가에서 누군가 시끄럽게 우짖는 소리가 들렸다. 까치 소리였다. 이상하게도 로한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안정감과 친근감에 휩싸였다.

그는 아주 오래된 친구이자 가장 오래된 권속 중 하나였다.

또한 앞으로도 영겁의 세월을 함께할 영이었다.

…… 함께할 수 있었어야 했는데.

……

……

로한은 긴가민가한 채 자신으로 돌아왔다.

이게 끝이라고? 처음 흡수했던 머리카락과는 정서적 차이가 크다. 기억이 파편화된 채 저장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사실이었군.

죠스케, 방금 그 까치는…

로한은 저도 모르게 죠스케에게 말을 걸었다. 여전히 죠스케는 대답이 없었다. 예상대로였다.

그는 크게 숨을 내쉬고 다시 공책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어느덧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로한은 여전히 창고에 있었다. 그간 골라낸 공책들을 절반쯤 확인한 시점이었다. 여전히 고모다 히로시와 죠스케의 악연이 무엇인지 명시하는 자료는 없었지만, 로한은 흥미로운 증언을 적지 않게 발견했다.

대부분의 영은 계약을 통해 소환자와 쌍방 구속 관계에 놓이나 천사는 축복을 내린다는 특성상 이 부분이 모호해진다. 이 사각지대를 파고들면 한번 속박한 대상을 형식적으로 소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야곱이 만약 천사를 여러 날 동안 붙잡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을 놓아주는 대신에 축복을 내려주겠다는 말을 여러 번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오래 잡아둘수록 더 많은 축복을 받을 가능성은? 아니, 너무 위험한 생각일지도 몰라…

몇 시간 후 확인한 다른 공책에는 이보다 발전한 아이디어가 적혀 있었다. 날짜를 보니 사망하기 몇 달 전 시점이었다.

악마술에서 계약 갱신 시 사용하는 주술을 천사에게 사용한다면 소유권을 남에게 이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질렀다. 실수였다. 후회해봤자 소용없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하지만 가족에게는 죄가 없다. 죄 때문에 저주받는다 해도 재앙은 나에게만 닥칠 것이다. 가족은 괜찮겠지…

고모다 히로시가 천사를 가둬둔 열쇠를 가족에게 남겨주었던 건 단순히 관리하라고 넘겨준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소유권을 이전한다는 의미도 내포한 물건이겠지. 그리고 그 열쇠는 현재 고모다 오아키의 수중에 있다.

그나저나, 두 증언의 사이 즈음에 ‘용서받지 못할 짓’이 일어난 걸 보면 고모다 히로시가 뭔가를 시도한 건 확실했다. 그 짓이 무엇인지 제발 어디에든 써 뒀어야 할 텐데.

로한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다음 공책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누군가 창고 문을 노크도 없이 벌컥 열어젖혔다. 오고 가며 얼굴만 익힌 저택의 사용인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로한이 물었다. 사용인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이, 일단… 얼른 따라오세요. 고모다 오아키 씨가…”

그가 황급히 말했다.

로한은 읽던 공책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고 벌떡 일어섰다.

오아키는 차로 십 분 거리에 있는 병원 응급실 침대에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약혼자도 함께였다. 약혼자는 의식을 잃은 오아키의 손을 꽉 잡은 채 울음을 참으려 했다. 입으로는 쉴새없이 기도문 같은 것을 중얼거렸다.

사용인은 로한에게 그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했다. 오아키는 사업상 급한 일을 처리하러 외출했다가 저녁에는 짬을 들여 약혼자와 오랜만에 식사를 하러 갔다. 저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생선 요리 음식점이었다. 약혼자가 너무 반가웠던 나머지 생선에는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일까. 분명 생선 뼈를 제대로 발라냈다고 여겼건만 살코기를 삼키자마자 오아키는 숨이 막혀 쓰러졌다. 약혼자는 경악하여 응급차를 부르고 오아키가 생선뼈를 토해내도록 애를 썼지만 이미 목에 걸린 뼈는 요지부동이었다.

로한을 보고 오아키의 약혼자는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형식적 인사치레를 건네려 했다. 울먹임에 목소리가 끊겨 거의 들리지 않았다. 로한은 고개만 끄덕이고는 오아키의 상태를 살폈다. 눈은 희게 돌아가 있었고, 얼굴부터 목까지 피부가 납처럼 창백했다. 곧 내시경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들었지만 빠르게 검사하지 않으면 정말로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로한이 우선 스탠드를 불러내려는 참이었다.

목 안쪽에서 움직임이 보였다.

로한은 놀란 눈으로 오아키의 목을 주시했다.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로한은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오아키의 약혼자와 사용인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침통한 표정을 유지했다.

로한은 천천히 오아키의 목덜미에 손을 가까이 가져갔다.

목 안쪽에서 움직임이 격해졌다. 뭔가가 목을 뚫고 나오려는 듯 피부를 밀어 늘렸다. 이윽고 강한 이끌림이 느껴지더니 새까만 실 같은 것이 오아키의 목젖 아래에서 흘러나왔다.

그 녀석의 머리카락이었다.

머리카락은 바로 옆에 놓인 로한의 손끝으로 직행했다. 마지막 네 올이 로한의 손가락을 꿰뚫고 들어갔다. 로한은 터져나오는 비명을 억누르며 자신의 손을 급히 잡아 눌렀다. 방금까지 오아키의 목을 조르다시피 하던 머리카락 아니랄까봐 폭력적이고 무식하기 짝이 없다. 대체 무슨 기억이기에 이 정도인 거지?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 오아키를 붙잡는 장면이 보였다. 오아키의 숨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군.

로한은 가물거리는 의식을 붙들고 생각했다.


눈을 감고 죽은 듯 잠자고 있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생경한 감각이 밀려온다. 저도 모르게 눈을 떴다. 아직 힘이 완전히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이지. 더 생각하기 전에 겪어본 적 없는 고통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죠스케!

살려 줘—

귀를 찢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린다. 까치 울음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모골이 송연해지는 소리. 뼈가 불에 타는 소리도 들린다. 새까만 지하의 불이다. 이 새끼가 기어이 만족하지 못하고—

그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무력하다.

권속의 뼈와 살과 영혼이 마지막 한 조각까지 불타 소멸하고 있다.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인간은 곧 그 역겨운 낯짝을 자신 앞에 내보인다. 지정 대상에게 소유권을 양도하는 주술. 용기가 가상하다. 그는 모든 게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고는 거기에 대고 맹세해 준다.

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나가 봐. 네놈이 쌓아올린 걸 서서히 잿더미로 만들어주지. 일단 너, 그 다음엔 이 집, 네 가족, 날 소유하는 사람은 전부 다. 황천을 건너고 나서도 안식을 얻지 못하게 해 주마.

물론 인간은 도망친다. 그럴 줄 알고 맹세한 거다. 자신의 눈빛을 꺼뜨리니 죄 많은 인간이 불에 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는 다시 눈을 감는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었다.


로한은 오른손을 자극하는 고통에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눈을 떠 보니 아까의 그 병원이다. 오아키와 나머지 두 사람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한 선생님! 눈 뜨셨네요!!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으세요?”

오아키가 다급히 말했다. 목이 약간 쉰 모양이다.

“갑자기 쓰러지셔서... 혹시 그동안 무리하신 건 아닌가요?”

걱정스러운 목소리. 오아키의 약혼자였다.

로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마를 쓸어내렸다. 오른손 약지가 얼얼했다. 방금 회복된 탓인지 약간씩 움찔거렸다. 머리도 지끈거리고 심장이 조금 아팠으나 의식은 재빠르게 돌아오고 있었다. 방금 경험한 기억까지도.

방금 경험한 기억.

그리고 회복된 넷째 손가락.

야단났군.

로한은 소리쳤다.

“내가 몇 분 동안 쓰러져 있었죠? 당장, 빨리 대답해요!”

“시, 십 분도 안 됐어요…”

오아키가 깜짝 놀라 말을 더듬으며 답했다. 로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아키와 그의 약혼자가 경악하며 로한을 붙들었다. 쓰러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움직이시면 어떡하냐, 의사가 상태를 볼 때까지만 기다리라는 말이 쏟아졌지만 로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뿌리쳤다. 그는 누가 다시 붙잡기 전에 병원 문 쪽으로 재빨리 걸어가며 당부했다.

“오늘은 저택에 돌아가면 안 됩니다. 절대로.“

병원 로비의 소란을 뒤로하고 로한은 주차장으로 뛰어가 자신의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어차피 급한 대로 오아키의 약혼자더러 모두를 저택 밖에 머물도록 보호한다고 써 두었으니 큰 일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로한은 진심으로 그러길 바랐다.

저택으로 향하는 짧은 시간이 영겁의 세월처럼 느껴졌다. 늦지 말아야 할 텐데.

멀리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양이 보였다. 사람들이 하나둘 뛰쳐나오고 있었다. 역시 불은 냈군. 거기부터 시작해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물론 뛰어난 건축가가 공들여 만든 예술품을 잃은 것은 아쉬운 일이겠다. 하지만 지금 우선순위에서는 한참 밀리고 있었다.

로한은 차를 대문 앞에 세워두고 고모다 저택으로 진입했다. 오아키가 사업을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저택에서 고용하던 사람들도 대다수 빠져나갔다. 덕분에 다행히 화재에서 제때 탈출하지 못한 사람은 없는 듯했다. 아까 대문에서 뛰쳐나오던 사람들이 마지막이었나 보다. 로한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목재가 불에 타는 냄새가 났다.

그는 매캐한 냄새를 참으며 정원으로 향하는 샛길로 들어섰다. 집의 중심부인 안채와 녀석을 가두어두었던 별채에서부터 불이 번지고 있었다. 정원도 서서히 불에 휩싸이고 있다. 한쪽 벽이 무너진 창고에 도착한 로한은 숨을 골랐다. 일단 목적지에는 무사히 도착했고.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쯤이면 찾았어야 맞는데,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이 녀석은—

그때 로한의 팔을 누군가 잡아챘다.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검까?"

화난 목소리가 울렸다.

찾았군.

로한은 고개를 돌려 죠스케를 바라보았다. 새파랗게 불타는 눈에 멋부린 가쿠란을 입은 소년. 전과 같은 모양새지만 이제는 희끗희끗한 날개가 추가되어 있었다. 이게 녀석의 온전한 모습이다 이거지.

"보다시피, 네놈을 기다리고 있었지."

로한이 대꾸했다.

죠스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로한을 노려보았다. 두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잊어버렸나 본데… 내가 힘을 다 찾은 이상 댁을 당장 지구 반대편으로 보내버리는 건 일도 아냐."

“날 오지 않게 막으려던 거라면 이미 실패했잖아. 이제 와서 지구 반대편으로 보내 봤자 무슨 소용이지?"

로한은 맞받았다. 조금씩 다급함이 잦아들며 분노가 서서히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댁이 차라리 안 보는 게 나은 일들이 있어요. 이제 시작하려는 참이라고—"

"이런 이유로 진실을 숨기고 발뺌했던 거냐? 겨우 이런 이유로?”

로한이 언성을 높였다.

“겨우 이런 이유?”

안채를 태우던 불꽃이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죠스케는 소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한 단어 한 단어를 짓씹어 말했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마십쇼. 그 기억을 다 보고도 겨우 이런 이유라고 말하다니 정말 당신답다는 생각이 들고 있으니까.”

“멋대로 착각하지 마라. 네 권속의 죽음을 말한 게 아냐. 네놈이 날 이 비극에서 보호하겠답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숨기려던 걸 말하는 거야—"

"비극이라고요?"

죠스케가 으르렁거렸다.

"재앙이라고 하면 맞겠지. 근데 비극은 아니죠. 정당한 복수고 본보기고 심판이라고.”

“아, 초월적 존재다운 생각이군. 네게 공감할 녀석들을 구하고 싶으면 차라리 천상으로 돌아가지 그래?"

로한이 대꾸했다.

"부모 욕 몇 마디 했다고 상대방 자식 열네 명을 전부 몰살시킨 선례에 비하면 너 정도는 자비로운 편일 테니까."

죠스케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로한을 응시했다. 눈동자 속에서 아주 잠시 혼란이 분노를 대체하나 싶더니 곧 냉랭한 불꽃이 돌아왔다.

“지금이라도 발 빼요, 로한."

그가 말했다.

“고모다 히로시는 내 권속을 죽였어요. 축복으로는 만족을 못 해서, 내 머리카락을 갖고 다른 존재를 소환하려다 죽여버린 검다. 인간들 눈에 내 복수가 어떻게 보이든 내가 상관이라도 할 것 같아? 이건 내 일이야. 댁은 빠지라고."

“네놈 지금 지독하게 편의주의적인 거, 알고는 있어?"

로한이 쏘아붙였다.

“복수에 필요한 힘을 되찾아 달라고 한 건 너다. 시작부터 나는 네놈 복수극의 중심이었어. 그렇게 만들어 놓고 목적만 꽁꽁 숨기면 없던 일이 되나? 거기다 이제 와서 발을 빼라? 불가능한 요구를 하는군."

“댁은 내 복수랑 상관이 없으니까!”

죠스케가 소리쳤다.

“당신은 고모다도 뭣도 아니잖아. 그 사람들이랑 그닥 친한 것 같지도 않더만. 그냥 운 나쁘게 말려든 것뿐이었다고!"

”힘줄을 빼앗고 내가 거부할 수 없는 거래를 제안한 것도 불운 탓이라고 할 테냐? 네놈이 끌어들인 게 아니고?“

“뭐, 그래요. 백 번 양보해서 그렇다 쳐. 그런데 댁은 내가 고모다 놈들에게 무슨 감정을 갖고 있는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이제 그 기억들을 다 봐놓고도 날 막아서는 거야? 왜 그러는데?“

“네놈이 오아키까지 죽일 생각인 줄은 몰랐지."

로한이 차갑게 말했다. 죠스케는 잠시 침묵하다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기분 나쁘다는 표정이었다.

“이름을 막 부르네요. 그 인간 이름을."

이건 또 무슨 흐름이야?

로한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그러고는 입가를 굳혔다.

“너, 설마 질투하는 거냐?”

“… 그럼 안 하게 생겼어? 내 권속이 나 말고 그 인간 편을 들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권속은 임시 계약이었던 거 기억 안 나? 그리고 권속이면 뭐 어쩌게, 네놈 뜻에 덮어놓고 따라야 한다는 규칙이라도 있어? 아니라며."

"권속이면 뭐 어쩌냐니, 아니 난 댁이—"

죠스케는 언성을 높이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는 조용히 내뱉었다.

“댁이 왜 그런 저주받을 일가 사람 때문에 날 막아서는 건지 이해가 안 돼."

“단단히 착각하는 것 같은데, 오아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내 입장은 마찬가지였을 거다.”

로한이 대꾸했다.

“고모다 히로시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지. 하지만 그는 이미 죽었어. 네놈이 원하는 대로 고통스럽게 천천히 죽었겠지. 네 소유권을 물려받은 오아키의 부모도 죽었고. 굳이 그 후손까지 건드릴 필요가 있어?”

“당연히 이유가 있죠.”

죠스케는 로한을 쏘아보며 단언했다.

“이게 내 방식이야. 이런 식으로 복수하겠다고 이미 맹세했다고요. 고모다 히로시가 죽어서까지 고통받을 방법이 이거 아니고 뭐겠어? 아무리 맘에 안 든다 해도 내 복수를 댁이 막을 수는 없슴다. 그러니까 비켜요."

뭐라고 해도 말이 안 통하는군. 계속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다. 어차피 예상한 바였다. 죠스케는 이미 오래전에 결심을 굳혔다는 것을 로한 역시 알고 있었다. 그 결심이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범주에 있다는 것도. 그렇다면 로한이 해야 할 일 역시 명확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때 로한의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급하게 뛰어온 모양이었다. 건물이 불타는 소리에 발소리가 묻혀 가까이 오기 전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설마, 지금 불타는 저택 안으로 뛰어들어올 만한 사람은…

“로한 선생님! 거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로한은 경악하며 천천히 돌아섰다.

고모다 오아키가 재에 반쯤 휩싸인 채 서 있었다. 그는 로한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필사적으로 손짓했다.

“보아하니 일이 편리하게 돌아가는데요.”

죠스케가 냉랭하게 말했다.

젠장, 젠장, 젠장—

로한은 다급히 오아키에게 도망치라고 소리쳤다. 헤븐즈 도어를 소환하여 죠스케를 펼치면 아주 약간이나마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러나 죠스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로한을 지나쳐 오아키 앞으로 이동했다. 오아키가 공포와 충격으로 얼어붙은 사이 죠스케는 그를 나른한 눈으로 한번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을 한번 튕겼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오아키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오아키는 온몸에 힘이 빠진 듯 움직이지 못했다. 겨우 힘겹게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죠스케는 그 앞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턱을 괴었다. 그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다 히로시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약속한 게 있죠. 내 소유자는 전부 서서히 잿더미로 만들어주겠다고. 명확한 약속이라고 생각하지 않슴까? 달리 해석할 여지는 없어.”

죠스케의 손가락이 쓰러진 오아키의 머리카락 끝에 가서 닿았다. 마치 양초에 불을 붙인 것처럼, 긴 머리카락이 가장자리에서부터 미세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눈앞에서 온몸이 불타는 건 시간문제였다. 

로한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죠스케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는 머뭇거리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죠스케의 어깨에 가볍게 왼손을 올렸다.

“말려도 소용없다고 했잖아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죠스케가 말했다.

로한은 조용히 죠스케의 어깨를 자신의 왼팔로 감쌌다. 마치 반쯤 포옹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는 고개를 떨구어 죠스케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도 알아.”

로한의 오른손은 죠스케의 날개에 있었다.

정확히는 희끄무레한 깃털들 사이에 위치한 검은 깃털 위에 있었다. 그는 단번에 깃털을 잡아당겼다. 아픔을 느낀 죠스케가 벌떡 일어나 뒤돌았을 때 이미 로한은 검은 깃털에 대고 성냥을 긋고 있었다. 아까 불타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창고를 필사적으로 뒤져 찾아낸 구속 주술용 성냥이었다.

천사가 깨어나기 전에 빠르게 해치워야 하니 약식 주술을 쓴다.

검은 깃털을 뽑아 저승의 불꽃으로 태우며 읊기만 하면 돼. 그 내용은…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죠스케가 고함쳤다.

로한은 웃어 보였다.

“네 기억을 다시 불러낼 수 있는 건 너뿐만이 아니거든, 죠스케.”

지금은 지하실에서와 달리 봉인용 원이 없으니 소유권 이전 주문의 물리적 구속력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로한이 원하는 건 형식적 소유권이었으니까.

검은 날개깃으로 증인을 세우고

검은 불꽃으로 서명을 대신하며

검은 이름을 불러 계약을 봉하니

….

한번 주문을 읊기 시작하자 로한의 입은 마치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지금 시작된 일은 절대 돌이킬 수 없다고 누군가 머리 뒤편에서 속삭이는 듯했다. 정말로 그렇다면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로한은 더욱 빠르게 입을 움직였다.

죠스케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붉어졌다.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로한의 입을 막으려 했다. 일단 물리적으로 틀어막으려다 입이 계속 움직이면 소용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걸 보아하니 평소보다 평정심이 부족했다. 죠스케가 다급하게 손짓을 하자 곧 로한의 목구멍이 막혀왔다. 아예 목소리가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모양이었다.

로한의 주문이 차츰 작아지다 끊기기 시작했다. 죠스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남타르. 알라투.

나베리우스. 클레쉬. 베파르.

마이몬. 아셰마데바. 호르벤딜의 이름으로.

계약은 체결되고 봉인되었다.

등 뒤에서 희미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한이 말하지 못한 주문의 마지막 문구였다. 죠스케가 급히 뒤를 돌자 그곳에는 오아키가 있었다. 그는 쓰러진 채로 눈동자를 굴려 로한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굳은 결심이 서린 눈빛이었다.

로한은 목을 붙잡고 한 차례 콜록거렸다. 목소리가 다시 제대로 나오기 시작했다.

“자, 죠스케. 네 소유권은 이제 오아키에게 없어. 나에게 있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너도 알 거라 믿는다.”

그가 말했다.

정원이 불길에 휩싸이고 있었다. 사방에서 타닥거리며 나무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죠스케는 오아키를 보다 로한을 다시 쳐다보았다.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감정과 분노가 한데 뒤섞여 있으니 실로 볼만했다. 녀석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이다.

“이런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 것 같아?“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더 잘 알 텐데. 네 소유자를 전부 태워 죽일 거라는 약속은 네놈이 한 거잖아."

로한이 대꾸했다. 죠스케는 입을 달싹였다. 뭔가 말하고는 싶지만 무슨 말을 먼저 꺼내놓을지 스스로도 확신이 안 서는 듯했다. 결국 겨우 입을 열어서 하는 말이라고는 물음표 달린 욕설뿐이었다.

“완전 미친 놈 아냐?! 댁은 대체 뭐야? 제정신이에요??"

신기하네. 불과 몇 분 전에는 내 쪽이 네게 비슷한 감상을 가졌던 것 같거든. 현실에도 시적 정의가 있다면 아마 이 순간이 아닐까 로한은 생각했다.

“이보다 더 제정신일 수는 없을 거다."

그가 답했다.

죠스케는 한참 동안 로한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이 상황을 믿을 수 없고 믿기도 싫다는 눈치였다. 어차피 그런 표정을 지어 봤자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로한은 그 사실이 죠스케의 머릿속에 저절로 녹아들 때까지 팔짱을 끼고 기다려 주었다. 좀 빨리 깨달으면 좋겠는데. 이대로라면 죠스케를 제외한 두 사람이 화재에 휩싸여 사망할지도 모르니까. 겨우 소유권 주술까지 성공해 놓고 그런 결말이 나오면 얼마나 허무하겠나.

죠스케는 한숨을 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대체 뭘 원하는 거야, 댁은."

로한은 미소를 지었다.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자.”


로한과 죠스케는 로한의 차에 타고 있었다. 정원 전체가 타오르기 전에 저택을 탈출하고, 오아키를 다시 병원에 데려다 놓은 다음에 주차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죠스케는 로한이 오아키를 부축해서 옮기는 동안 내내 아니꼬운 눈길을 보냈지만 그를 막아세우지는 못했다.

병원에서 오아키는 약혼자의 도움으로 응급실에 옮겨졌다. 약혼자는 오아키를 찾아 헤매다 로한에게서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온 참이었다. 하룻밤에 두 번이나 응급실 들락거릴 일이 생기다니 그에게도 쉽지 않은 날이다. 그나저나 고모다 오아키가 사람을 구하려고 불타는 저택으로 뛰어들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어쩌면, 결국 천사의 저주를 받고도 살아갈 만한 사람이 있다면 오아키일지 모른다고 로한은 생각했다.

“기분 좋아 보이네요?”

옆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죠스케가 창문에 기대어 턱을 괴고 로한을 흘겨보고 있었다.

“안 좋을 이유가 없잖아."

로한이 대답했다.

“말이나 해 보십쇼, 그게 뭔지.”

“어디 보자.”

로한은 손가락으로 꼽으며 대답했다.

“오른손이 전부 회복됐고, 내 목숨은 무사하고, 오아키도 대충 목숨은 건진 것 같고, 이제 고모다 일가와 다시 볼 일은 없고, 그동안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소잿거리를 잔뜩 얻었는데다 옆에는 네가 있지."

“마지막은 내 기분 달래려고 대충 끼워넣은 거 아냐?”

“네가 같이 있는 게 싫었다면 차에 태웠겠어? 내 진심을 무시하지 마라."

흥, 하고 죠스케는 코웃음을 쳤다.

“쫓아냈어도 억지로 탔을 거거든요.”

“너도 진심이라는 뜻이라면, 잘 됐네.”

죠스케는 끄응 하는 소리를 내더니 머리카락을 마구 쓸어넘겼다. 그는 한참을 침묵하더니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댁 때문에 얼마나 찝찝해졌는지 알아?"

"뭐가."

"뭔지 알면서? 당연히 끝까지 복수하겠다는 약속이죠."

그건 원래 좀 찝찝해야 맞는 거야. 네놈이 이상한 거라니까. 하지만 이 녀석은 수만 년 이상 이런 방식으로 살아왔을 테니 로한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사람은 여럿 죽었고, 저택도 전부 불에 탔는데?"

"무슨 뜻인지 다 알면서 말 돌리지 마십쇼."

"사람은 원하는 걸 다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야."

"천사가 되어서 약속을 깨는 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인지 알아요?"

“그럼 현실적인 이유로 약속을 못 지키게 됐다고 납득하면 되지.“

“천사가 현실 때문에 좌절한다고? 가오가 안 살잖아!“

”아니면 사랑 때문이라고 해. 낭만적인 표어 아냐? 네 취향에도 맞을 것 같고.”

“사랑이요?”

죠스케가 얼굴을 구겼다.

"내가 댁한테?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럼 질투한다고 인정은 왜 했는데?"

"그거야 댁이— 내 권속이니까?"

이런 대화가 끝도 없이 이어져 봤자 오늘 안에 답은 안 나올 것 같았다. 로한은 화제를 돌렸다. 

"참. 말이 나와서 말인데, 권속 계약은 왜 아직도 해제 안 했어?"

로한이 물었다. 죠스케는 냉큼 대답했다.

“이제 댁이 내 소유자가 되어 버렸는데 해제하고 싶겠어? 나도 보험 하나는 들어놔야지.”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보험을 든 건 로한 쪽인 것 같은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만장일치로 그렇게 말할 거라고 로한은 확신했다.


“그건 그렇고, 지금은 어디 가는 거라고요?”

죠스케가 조수석 창문을 내다보다 물었다.

"아까 얘기하지 않았어? 나도 이제 집 가서 잠은 자야 해."

"그거 말고. 중간에 겸사겸사 들를 곳이 있다며."

"가기 전까진 비밀이야."

로한이 대꾸했다. 죠스케는 옆에서 어차피 가면 알게 될 거 왜 지금 숨기냐며 궁시렁댔지만 로한은 신경쓰지 않았다. 너도 비밀을 유예할 때 어떤 묘미가 있는지 좀 겪어봐야 하지 않겠냐.

어느덧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해가 지평선에서 얼굴을 내밀기 직전의 시간이다. 어두운 도로는 텅 비어 있다. 지금쯤이면 고모다 저택은 남김없이 잿더미로 변했을 것이다. 불타는 저택을 뒤로하고 도로를 달리는 밤이라니 흔히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이 아니다. 물론 고모다 일가 정도의 사건이 한 번 더 일어난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겠지만. 고난에 대한 감상은 일단 차치해 두자.

이 녀석과 또다시 엮인다면 왠지 이런 경험이 끊이지 않을 것 같아서, 로한은 골이 아파오면서도 아주 조금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궁금했다.

고요함을 뚫고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이쯤이군. 로한은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죠스케도 군말없이 문을 열었다.

“바다네요?”

죠스케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평범해서 놀랍다는 말투였다.

“해가 뜨는 바다지.”

로한이 정정했다.

“오~ 내가 바다에서 일출을 본 시간만 다 합쳐도 수천 년은 될 텐데."

죠스케가 놀리듯 말했다.

"나랑 보는 건 처음일 거 아냐. 그리고, 전에 내가 좋아하는 장소가 궁금하다고 하지 않았어?"

"… 확실히 그랬던 것 같긴 하네. 그게 이런 곳일 줄은 몰랐지만."

"전에 취재를 나왔다가, 여기서 귀한 바다새를 봤거든."

로한이 대답했다.

“그 이후로 가끔씩 들르고 있지. 혹시 다시 보게 될지 모르니까.”

“오늘은 갈매기밖에 없어 보이는데.”

“아쉽게 됐네.”

로한의 말을 듣고 죠스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드디어 슬쩍 웃음을 띄웠다. 오늘 밤에 지은 첫 번째 웃음이다.

"그 새를 다시 볼 때까지 내가 같이 오길 바라는 거죠."

눈치 빠른 척 하기는.

"한 번 다시 봤다고 같이 안 올 거야?"

"그럴 리가."

죠스케가 받아쳤다.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입가를 다시 굳힌다. 파도 소리가 배경을 채우는 중에 죠스케의 콧날이 새벽의 햇살을 받아 은은히 빛난다.

"솔직히 말해서요."

그가 운을 떼었다.

"댁 같은 권속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떤 점에서지?"

"댁도 알 거 아냐? 권속이란 건 원래 부하이자 동료고 그 이상이에요. 근데 로한은 부하도 아니고, 동료인지도 애매한 것 같고. 아까도 말했지만, 애초에 내 권속인 녀석이 내 복수를 막는 건 말도 안 된다고요."

"내가 권속이라는 점을 그렇게 물고 늘어질 줄은 몰랐는데. 나랑은 그냥 편리하려고 맺은 계약 아니었어?"

로한이 말했다.

"처음엔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 달라. 어쩔 수 없는 감정이란 게 있어요. 왠지 권속이라면 이래야 할 것 같은 거."

천사에게는 권속이 꽤나 특별한 관계인가 보군. 로한은 생각했다. 그 까치를 떠올리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로한 역시 죠스케의 기억을 경험했으니 무슨 느낌인지 와닿는 바가 있었다. 무한한 신뢰, 오랜 기간 함께한 애틋함, 현대보다는 봉건 사회의 무사가 바치는 충성심에 가까운 감정. 로한은 제공할 수도 없고 제공할 생각도 없는 것들이다. 

“… 확실히, 혼란스럽긴 하겠군. 그렇다고 일반적인 인간과 천사의 관계도 아니니까.”

로한은 인정했다.

"뭐... 보통 인간들한테는 꿈에 가서 경고 몇 마디 하고, 나쁜 놈들은 저승길 바래다 주고, 괜찮은 녀석이 보이면 축복 좀 뿌려 주는 게 끝이라서."

"게다가 이름을 가르쳐 줬잖아. 그거, 흔한 일이 아니라며?"

죠스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웬일로 마음이 복잡한 눈치다.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거 있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어. 나는 널 소유하게 됐고 너는 날 권속으로 두고 있지. 하지만 그런 명칭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 서로 보고 싶다면 보는 거고, 싸우고 싶다면 싸우게 되겠지. 나는 내 삶을 살고, 너는 네 삶을 살아가면서 계속 부대끼면 되는 것 아냐? 로한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죠스케가 이 방안을 모를 리 없다는 것도 알았다. 머리로 아는 것과 심장으로 느끼는 건 다르고, 말은 현실보다 단순한 법이다.

로한은 단지 기다릴 뿐이었다.

죠스케의 옆에서.

"뭐, 답이 안 나오는 걸 지금 골머리 앓아봐야 머리만 더 아프죠."

마침내 죠스케가 말했다. 두 눈은 태양에 고정되어 있었다. 해가 떠오르며 온 하늘을 장밋빛으로 물들이는 중이었다. 주홍색 구름이 점점이 지평선을 장식헸다.

"그리고 답이 나오려면 댁을 계속 보고 살아야지 않겠어요?"

예상치 못한 발언에 로한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 인간은 또 왜 이래, 하고 죠스케가 로한을 쳐다본다. 아랑곳하지 않고 로한이 웃으며 말했다.

“복잡하게 생각하던 것치고 이상하게 명쾌한 결론이군."

“뭐, 그래서 이의 있어요?”

죠스케가 퉁명스레 말했다.

“그럴 리가.”

로한은 답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부드러운 말투였다.

“나도 그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초겨울 바다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Fin.


후기

- 제목은 Metallica - Enter Sandman 가사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사유는 닐 게이먼 작 <샌드맨>을 약간씩 참고함 & 가사가 고모다 가문 시점의 불안과 통하는 것 같아서였네요.

- 원래는 <샌드맨> 중 뮤즈 에피소드를 로한 버전으로 패러디한 단편이 될 예정이었는데, 쓰다 보니 대대적으로 갈아엎게 되었습니다. 고모다 히로시가 원래 뮤즈를 소환할 생각이었다는 것 정도에서 흔적이 남았네요.

- 로한이 읊는 주문도 <샌드맨> 서곡에 나오는 주문을 참고해서 작성했습니다. 

- 고모다 가문과 오키노시마 섬의 이름은 에도가와 란포의 미스터리 단편 <파노라마 섬 기담>에서 따왔습니다. 장르가 미스터리인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연결점은 없습니다.

- 로한이 말하는 '부모 욕 좀 했다고 자식 열네 명을 죽인 선례'는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론과 아르테미스가 니오베의 자식들을 몰살한 일화를 가리킵니다.

- 퀴어플라토닉한 씨피 팬픽을 쓰게 되다니 속이 보인다 싶네요.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