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죠의 기묘한 모험

[디에팬츠] 동상이몽

2023년 디에팬츠 앤솔로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수록작.

- 2023년 8월 19일에 열린 죠죠 통합 온리전 '팬텀 조류 크루세이더즈는 부서지지 않는 황금의 오션 볼 런 리온 랜드' 에서 판매된 디에팬츠 앤솔로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에 수록된 글입니다.

- 7부 『스틸 볼 런』의 스포일러에 기반을 둔, 생존 IF 창작물입니다.

- 포스타입에서 각주 서식을 지원하지 않는 관계로, 편의상 각 문단 아래에 인쇄본에 있던 부가 설명을 달아두었습니다.


동상이몽

“여행이라도 다녀오게.”

“어디로 말입니까?”

“칼레에서 배를 타고 프랑스로 가게. 그다음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파리와 로마는 꼭 방문하도록 하고. 반년은 걸릴 거야. 마음에 든다면 더 있다가 와도 좋네. 비용이라면 얼마든지 댈 테니.”

스틸 볼 런 레이스가 끝나고 반년이 흐른 어느 날. 아서 아이킨 후작은 디에고 브란도에게 제안을 해 왔다. 후작은 유하다 못해 물러터진 아들 에이든보다 디에고를 퍽 아꼈다.

그는 디에고가 열세 살일 때, 재능을 알아보고 후견인을 자처했다. 지난 레이스에는 큰돈을 들여 실버 불렛을 선물해 주었으며,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선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둥 물심양면으로 그를 지원해 주었다. 심지어 디에고가 미국의 죠스타 목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마술(馬術)을 배우겠다고 하자 만류하며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그러나 디에고는 이 제안이 탐탁지 않았다.

“감사하지만 아직 레이스 때 입은 상처가 채 낫질 않았습니다.”

“주치의를 바꿔야겠군. 건강한 모습으로 아들이 여행을 떠난다면 그만큼 기쁜 일도 없으니까.”

적당한 말로 둘러댈 생각이었으나 후작은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실제로도 디에고의 옆구리에 난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현재 실종된 대통령과의 사투 끝에, 그의 몸은 정확히 두 동강이 났다. 디에고는 승리에 도취한 채로 기묘한 죽음을 맞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살아났다. 누가 도운 것인지는 몰라도 넝마가 된 몸뚱이를 누군가 붙여놓았다. 마구 흩어진 장기가 제 자리를 찾아갔다.

이후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정신을 차린 디에고는 레이스를 포기하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실로 경이로운 회복력을 보이며, 그는 병원 침상에서 신문 읽기에 열중했다. 죠니 죠스타가 처참한 결과로 레이스를 마쳤다거나, 남은 레이스에서 자신을 사칭하던 기수가 실격된 후 끔찍한 사체로 발견되었다는 기사는 특히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그마저도 질리고 나면 참가 기수마다 얽힌 뜬소문 기사를 즐겼다. 네아폴리스 왕국의 사형수, 천재 기수 형제의 몰락, 수녀복을 입고 폐허에서 눈물 흘리던 기수 이야기를.

그리고 그는 똑바로 걸을 수 있는 몸이 되자마자 오늘 이 자리에 섰다. 후작의 의도는 뻔했다. 평생 마구간에서 굴러 교양이라곤 없는 녀석을 선보이는 게 내심 부끄러웠으리라. 그가 아무리 고상한 발음을 흉내 내며 잘생긴 얼굴을 뽐내도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그랜드 투어¹⁾, 고전 세계를 배우러 가는 여정이란 영국 사교계에선 무려 한 세기 전에 끝난 유행이다. 요즘은 멍청한 벼락부자나 천박한 미국인 따위가 돈을 펑펑 쓰며 유럽행 배에 올랐다. 후작은 그런 무리에 디에고를 끼워서라도 기대하는 게 있었고, 디에고에겐 이런 처사가 곧 모욕이었다.

1) 17세기 중반부터 유럽의 상류층 귀족 자제들이 견문을 넓히고자 동행 교사와 떠나던 여행. 18세기부터 부르주아층, 미국의 부호들도 합세했으며 19세기에 이르러 그 의미는 퇴색되었다.

물론 디에고는 후견인과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일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옆구리에 묘한 통증을 느끼며, 그는 익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귀한 도움에 어쩔 줄 모르는 겸손한 청년의 낯이었다.

“감사합니다.”

어찌 됐든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 오면 그만일 테다.


그해 이른 가을, 디에고는 칼레항에서 동행 교사를 만났다. 홀로 떠나도 상관없다고 했건만, 후작은 동행 교사가 따라붙는 게 그랜드 투어의 전통이라고 강조했다. 아마 어릴 적 그에게 라틴어나 프랑스어를 가르쳐준 이가 나올 줄로 알았으나, 생판 처음 보는 청년이 그를 맞이했다. 디에고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이는 남자였다. 몸집은 자신과 비슷했으나 호리호리한 감이 있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필립 하워드 포스터입니다. 모쪼록 유익한 여행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후작과는 무슨 관계지?”

“영지 내 기록물 관리와 함께 고고학 연구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에이든 도련님을 가르쳤습니다.”

“귀하신 몸이군. 잘 부탁해.”

필립은 적당히 과묵했으며, 겸손해서 디에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다. 길을 갈 때면 방향을 안내하면서도 디에고보다 앞서가는 일이 없었다. 배나 기차는 디에고를 일등석에 태우고, 자신은 이등석에 있다가 다시 상대와 합류했다. 이는 숙소에 머물 때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모든 행동에 절제가 깃들어 있었으며 여러 나라말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 다만 입는 옷은 몹시 촌스러워 디에고가 선심을 써 몇 벌을 사 주어야 했다. 문득 마음에 둔 여자가 있냐고 물으면 황급히 대화 주제를 돌리는 것으로 보아 샌님이 분명했다.

그래도 그가 여행길에 들려주는 이야기는 나쁘지 않았다. 풍부한 교양에 기반을 둔 설명은 정말로 유익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나름의 공통점까지 있었다. 무려 승마를 즐긴다는 점이었다. 필립은 “이쪽은 어디까지나 얕은 식견”이라고 둘러댔으나, 영국 경마계는 물론 승마에 대해 아주 해박했다. 특히 디에고가 출주해 우승한, 3년 전 더비²⁾는 아주 감명 깊게 봤다고 하던가.

2) Derby. 3세가 된 경주마만 출주 가능한 영국의 유서 깊은 경마 레이스. 매년 엡섬다운스 경마장에서 열리며, 국왕 소유의 경주마도 참가한다.

이어지는 여정은 점점 마음에 들었다. 후작의 이름을 대면 어디서든 돈을 충당할 수 있었다. 파리에 도착하면 몇몇 여성들이 디에고를 보며 열광했다. 루브르에서 이름난 그림을 보다가도 그를 알아본 이들이 악수를 청했다. 배움도 있고 향락도 있으니 분명 즐거웠다. 그 미국 횡단 레이스에서 겪은 악몽은 희미해져만 갔다. 친부를 찾아 죽이는 건 잠깐 미뤄두고 싶어졌다. 어느 순간 가슴팍에서 허리까지 이어지는 상처에는 새살이 빠르게 돋아났다. 만족스러운 나날이었다. 이것이 진정 승리자의 삶이지 않을까.

다만 옛 기억은 그를 예상도 못 한순간에 일깨웠다. 빛바랜 환영은 도시를 통과하는 열차 창문에서, 연회장 탁자 위 포도주잔에서도 떠올랐다. 프랑스 남부로 향하는 열차는 분명 아메리카 대륙을 달리던 기차와 사뭇 달랐다. 창가로는 삭막한 황야 대신 부드럽게 물결치는 들판이 보였다. 비싼 포도주 빛깔은 성인의 유해 옆으로 흐르던 피와 다른 색이었다. 지난 기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달큼하고 가벼운 맛이었고. 그렇다면 어째서 악몽은 쉽게 떠나가질 않는 것인가.

스틸 볼 런 레이스는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기억은 때때로 벌레에 물린 듯 가볍게 따끔하다가, 가슴을 짓누르듯 끔찍하기도 했다. 반으로 갈라진 제 육신, 강력하고도 매혹적인 짐승의 힘, 차마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와 음모. 누군가 여행지까지 미행이라도 하는 것일까. 맞설 방법이라곤 그때 얻은 짐승의 감각밖에 없었다. 눈을 감는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감각 밖으로 밀어내고, 어떤 불길한 것이 자신을 뒤쫓는지 찾아낸다.

수색은 쉽지 않았다. 유해와 비슷한 냄새는 어째서인지 사방에 널려 있는 것만 같았다. 제 안구에서 마차의 짐칸으로, 도로변의 순진한 어린아이에서, 동행 교사의 옷소매까지. 오히려 이쪽에서 헛것을 찾아대나 싶을 정도였다. 신경질이 나서 무심코 마차 옆자리에 앉은 필립을 노려보면 그는 사람 좋게 웃기만 할 뿐이다.

“많이 피곤하신가 보군요. 오늘 도착할 여관에서 하루 묵고 알프스를 넘어야 합니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두는 게 좋겠습니다.”

필립의 말이 옳았다. 긴 여행은 유익하지만 고되었다. 어쩌면 피로에 찌든 나머지 이 샌님까지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디에고는 눈을 감았다. 마차를 끄는 말의 숨결, 도로를 긁어대는 바퀴의 울림을 자장가 삼았다.

그리고 이 판단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그날 밤 디에고는 꿈속에서 기차선로 위에 누워 있었다. 다시 토막 난 몸으로 실컷 부르짖는다. 내가 이겼노라고.


디에고와 필립은 말 세 필과 함께 알프스를 올랐다. 보나파르트가 넘었다는 위용이 무색할 만큼 잘 닦인 길이 능선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디에고는 내심 마음이 놓였다. 지금은 가슴 뛰는 영웅담보다 편안한 여행길이 좋았다. 점박이 말과 갈색 말이 각각 디에고와 필립을 태우고 시원스레 달려나간다. 그 뒤로는 짐을 실은 검은 말이 쫓아간다. 필립은 특유의 차분한 어조로 몰락한 프랑스 황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위대한 여정은 잘 알려진 그림과 달리 위엄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고 했다.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말 위에 있으니 열기가 올라 추위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가끔은 다른 여행자들이 눈에 띄었는데, 될 수 있으면 그들과 거리를 두고 말을 몰았다. 이런 곳에서 싸움이라도 나면 곤란하다는 필립의 판단이었다. 덕분에 주위는 한적해서, 두 사람의 대화나 행동에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새하얀 만년설만이 말소리를 주워듣고 집어삼켰다.

디에고는 문득 이곳의 찬 공기를 들이켜고 싶어졌다. 옷깃으로 턱에 난 균열을 가린 채, 짐승의 감각으로 크게 들이쉰다. 맑고 날이 선 숨이 가득 찬다. 굉장히 상쾌했다. 다른 여행객들의 잡내는 떠나간 지 오래라, 오직 두 냄새만 선명했다. 냉기가 스치고 지나간 풀 내음과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유해의 흔적.

“브란도 씨, 혹시 코로 숨쉬기 불편하신가요? 야영지에 도착하면 약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별거 아냐. 신경 쓰지 마.”

동공이 째진 눈으로 곁눈질한다. 말 위에서 움직이는 동행인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다시 사람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검은 고수머리, 푸른 눈. 요령 없이 정직해 보이는 인상.

“새삼 당신, 나랑 만난 적 있던가?”

“그럴 리가요. 아, 엡섬다운스 관중석에서 잠깐 눈이 마주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되지도 않는 소릴.”

정말이지 재미없는 사내다. 디에고는 다시 눈길을 정면으로 돌렸다. 그대로 세 시간 정도 달려가니 야영지가 보였다. 그는 그곳에서 필립이 끓여준 차를 마셨다. 감기에 잘 드는 약초로 끓인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다른 여행객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텐트에서 눈을 붙였다. 필립은 마치 시신처럼 몸을 곧게 편 채로 잠들었다. 몰래 그의 손목을 만져보았을 때, 디에고는 묘한 냉기를 느꼈다. 사내의 체온이라 하기엔 묘하게 낮았다.

여정은 막힘 없이 이어졌다. 일주일하고도 더 달려야 하는 길이었으나, 디에고에겐 지겹지 않았다. 다만 의구심은 커져만 가서, 그는 매일 밤 필립이 잠든 사이 체온을 얼추 재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알프스를 건너던 둘째 날에는 손목의 냄새를 맡았다. 그다음 날에는 머리카락, 넷째 날에는 목덜미. 여자의 체온, 유해의 냄새, 뽐내지 않는 모습. 닷새째에 이르자 의심을 떨쳐낼 의지조차 사라졌다.

그날은 유난히 눈보라가 세게 몰아쳤다. 이런 날씨에는 말들도 오래 가지 못하고 몸을 움츠리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멈춰서는 게 상책이었다. 깎아지른 바위 뒤 텐트에서 필립은 다른 날과 다를 바 없이 잠들었으니. 디에고는 오늘 확신을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크게 숨을 몰아쉰다. 텐트 틈으로 들어온 찬 공기가 폐에 닿기도 전에 밀도 높은 비늘이 돋는다. 장갑을 벗어 던지는 대로 날 선 발톱이 튀어나온다. 직감에 따라 단숨에 필립의 목을 움켜쥔다.

하지만 그 발톱은 닿지 않았다. 코와 입이 막힌다. 양손이 부질없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짐승의 눈은 똑바로 앞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이가 금속 통을 들었다. 그 속으로 머리를 감싸던 모든 살점이 사라져갔다. 검은 고수머리가 선홍빛 직모로, 푸른 눈은 암적색으로, 얼빠진 얼굴은 고집 센 인상으로 바뀌었다.

“자는 척하는 것도 슬슬 힘들더군.”

모든 의심이 맞아떨어졌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반응할 뿐이다. 디에고는 그대로 핫 팬츠에게 입을 맞추었다. 살점은 첫 입맞춤과 다를 바 없이 쉽게 엉겨 붙었다. 여전히 정욕이나 경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발톱이 붉은 머리와 어깨를 거머쥐었다.

살점을 쓸어 담은 금속 통이 제 관자놀이를 세게 후려친다. 골이 울려도 입술은 떼어낼 수 없다. 상처가 갓 아물었을 허리가 쑤신다. 균형 잡힌 어깨 위로 발톱을 세운다. 짧은 육탄전이 이어지고, 흐물거리는 한 덩어리 틈에서 두 혀가 간신히 말을 뱉어낸다. 눈보라는 모든 소란을 먹어치워, 바깥에선 이 상황을 알 수 없으리라.

“언제부터 내 옆에 있었던 거지?”

“칼레에서 만날 때부터. 아, 그 고고학자는 죽이지 않았어. 내가 찾아갔을 때 이미 죽어있더군. 원한이라도 산 모양이야.”

핫 팬츠는 그날과 달리 당황하지 않았다. 서로 숨을 앗아가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도 알고 있었다. 몸은 본능적으로 다음 숨을 갈구하지만 한번 내뱉은 말은 멈추지 않는다.

“뭘 원하는지나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교황청의 작업에 협조해.”

“자세히 설명해 보실까.”

그녀는 가만 몸을 뒤로 젖혔다. 숨을 되찾고 짐승의 품에서 빠져나오기엔 충분한 동작이었다. 엇박자로 두 겹의 숨이 텐트에서 울렸다. 디에고보다 핫 팬츠의 숨이 더 빠르고 거칠었다. 다른 이의 살갗을 뒤집어쓴 채 지내왔기에 찾아온 피로가 적지 않았다. 디에고도 얽어대던 팔을 풀어냈다. 눈앞에서 숨을 고르고, 땀에 젖은 붉은 머리를 넘겨대는 상대를 보고 있자니 얄팍한 승리감에 취할 것만 같았다. 길게 째졌던 눈동자는 다시 선명한 푸른빛을 되찾는다.

“누군가 유해를 보관한 금고에 잠입하려고 했어.”

“그게 나랑 관계가 있는 일인가? 너 같은 낙오자가 개입할 일도 아닐 테고.”

“내가 아닌 ‘우리’로서 말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정당한 권리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뿐만 아니라 여러 기관과 협력하고 있는 문제고.”

“네 사심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 레이스 참가자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했다만.”

핫 팬츠는 그대로 손을 뻗어 크림 스타터를 쥐려다, 손을 거두었다. 그게 유일한 불만의 표시였다. 반응할 가치조차 없다는 의미. 이를 악물거나 인상을 쓰지도 않았다.

“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군. 대단한 협상은 바라지 않아. 나는 당신을 포섭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이야. 죠니 죠스타를 포함한 다른 진상을 알 법한 이들을 추격할 것, 그리고 조금이라도 아는 제삼자의 입을 막아둘 것. 보수는 확실히 지급하지. 전에 말했던 당신의 생부 다리오의 정보까지 더해서.”

다시 낮은 음성이 흘러나온다. 디에고는 내심 그 목소리가 자신처럼 짐승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자신보다 억누른 게 느껴지지만,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음성.

“호오, 구미가 당기는데.”

그는 그리 말하면서도 살짝 인상을 썼다. 다리오. 그 이름만 들으면 속이 뒤틀리지 않을 때가 없었다. 한동안 미뤄두었던 증오가 다시 고개를 내민다.

“바티칸의 이름 아래서 얻을 수 있고, 불명예가 되지 않는 선에서 요구하도록.”

“그렇다면 너를 달라고 할 수도 있는 건가?”

“소박하다 못해 천박하군.”

이번에 핫 팬츠는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암묵적인 경고였다.

“농담이야.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들려줘. 어차피 남쪽으로 가는 마당에. 더 들어보고 결정하겠어. 벌써 밤이 깊었으니까.”

“거절한다면 이쪽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아. 은폐 작업도 겸하고 있는지라.”

“당장 여기서 죽일 생각은 없잖아. 내일도 잘 부탁하지, 선생.”

디에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몸을 웅크렸다. 눈을 감고 있으니 뒤에서도 몸을 눕히려는 소리가 들려온다. 거칠었던 숨소리는 갈수록 느릿하고 고요해졌다. 비좁은 텐트 안에서 몸을 뒤척이면 몇 번이고 그녀와 등이 맞닿았다. 그는 몸을 움직이려다 그 감각이 아주 밉지는 않아 그대로 잠을 청했다. 뒤에 있는 그녀도 마찬가지인지, 꿈쩍도 하질 않는다. 디에고는 가만 생각에 잠겼다. 이 혹독한 시련이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찾아와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전혀 놀라거나 피할 일이 아니다. 제 욕심을 충족할 만큼의 신비에 연루된 이상, 스틸 볼 런의 악몽과 마주할 필요가 있었다. 저 여자와 함께하는 길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다시 이길 것이다. 추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정점에 오르리라. 속으로 몇 번 되뇌고 나면 금세 잠에 빠져든다. 디에고는 그날 밤 다시 토막 난 몸으로 눕는 꿈을 꾸었다. 누군가 비틀거리며 저 멀리 날아간 제 하반신을 주워왔다. 본인의 가슴팍에 흐르는 피는 잊은 채, 분주히 남의 몸을 끼워 맞추는 꼴이 신기했다. 디에고는 마구 비명을 지르다가도 도로 연결된 몸뚱이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호기심과 경이로움에 눈을 떼어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다음 날 눈보라가 그치는 대로 산에서 내려와 도시로 향했다. 디에고는 한층 유해진 낯을 한 채 핫 팬츠의 뒤에 바싹 붙어 말을 몰았다. 핫 팬츠는 어제 벗겨낸 거죽을 흉내 내, 낯짝 위에 살점을 덧바른 채 앞장섰다. 그녀는 이제 디에고만 있을 때 필립을 연기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과묵했던 모습에 퉁명스러운 말투가 더해졌다. 거리낌이 없는 행동은 말할 것도 없었고. 길을 가다가 후작이나 디에고를 아는 사람을 마주칠 때만 연기가 돌아왔다. 디에고는 그녀의 행동을 흥미롭다는 듯 가만 지켜보았다.

“바티칸에선 그런 것도 가르치나?”

“쓸데없는 소릴.”

“처음 만났을 때도 그리 다정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대로 대화는 끝났다. 속내를 긁어보는 건 매일 밤 해도 충분할 것이다.


그들은 말을 바꿔 타고, 바삐 움직여 밀라노로 향했다. 핫 팬츠는 여전히 선생 노릇을 해 주었다. 밀라노 대성당의 아름다움이나, 여러 도시국가가 국경을 맞대고 팽팽하게 경쟁하던 이야기는 디에고에게도 흥미로웠다. 그는 버릇없을지언정 배우지 못하는 자는 아니었기에, 탐식하듯 경청하고 때때로 매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다시 선생은 충실히 답한다. 내막을 모르는 이들이라면 두 사람의 충실한 여정에 감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둘은 밀라노에 머무르게 되자 호텔에서 같은 방을 쓰기로 했다. 핫 팬츠 입장에서 더는 숨길 게 없다는 심산이었다. 그래서 밤이 되면 남을 본뜬 살가죽을 벗겨냈다. 그런 다음에는 본래 모습으로 디에고와 협상하거나 그가 허튼짓하지는 않나 감시했다. 디에고는 그녀의 설득에 이끌리다가도 경직된 분위기에 내심 딴죽을 걸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어느 날 저녁, 밀라노를 떠나 피렌체로 향하기 전날에도 그러했다. 충동은 단 한 마디로 튀어나왔다. 두 사람 모두 일찍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하릴없이 두 침대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있던 참이었다.

“오페라라도 보러 갈까.”

“팔자도 좋군.”

“선생이라면 먼저 보러 가자고 말해야 하는 게 아닌가? 모처럼 이탈리아에 왔는데.”

“……근처에 유명한 극장을 하나 알아.”

생각보다 쉽게 넘어온다. 디에고는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저 오랜 결착 상태에 그녀조차 환기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고, 제멋대로 상상이나 할 뿐. 그는 가까운 부티크에서 여성복을 사 왔다. 암녹색의 긴 드레스, 실크 장갑, 얼굴을 적당히 가릴 수 있는 모자. 격식에 맞는 옷을 입어야 들어갈 수 있다는 말에, 핫 팬츠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디에고가 건넨 것을 모두 걸쳤다. 그가 내미는 손을 붙잡아 에스코트를 받았고, 바로 옆자리에서 공연을 감상했다. 디에고는 그녀의 유순한 모습에 매우 흡족해했다.

그들이 본 오페라는 훌륭했다.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암실에 갇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이야기였다. 두 사람은 남들처럼 기립해 손뼉을 쳤고, 다시 손을 잡은 채 극장을 빠져나왔다. 한 마디도 나누지 않으면서. 그 정적은 마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갈 때까지 이어졌다.

“내 고향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옛날이야기가 하나 있어.”

디에고는 189호실 문을 열며 슬쩍 말을 꺼냈다. 핫 팬츠는 모자를 벗으며 가만 눈을 맞추었다. 듣고 있으니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디에고는 술술 제 말을 이어나갔다. 핫 팬츠를 손아귀에 쥔 양 의기양양한 낯짝이었다.

“아주 명망 높은 기사가 말이지, 왕의 명령을 받아 끔찍하게 생긴 추녀와 결혼을 하게 돼.”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성급하긴, 더 들어 봐. 그런데 그 추녀가 밤에는 엄청난 미녀로 변해. 그리고 남편에게 말하지. 자신은 마녀에게 저주를 받아 낮이나 밤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데, 당신은 내 모습을 어찌하고 싶냐고. 밤에만 아름다워져 남편을 만족시킬지, 아니면 낮에만 만인의 찬사를 받게 할지. 꼭 지금 우리 같지 않나?”

핫 팬츠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침대 옆 좁은 탁자 위로 실크 장갑을 벗어 내던지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가웨인과 레이디 라그넬 이야기인가. 그는 아내에게 아름다울 시간을 직접 선택하라고 했어. 그랬더니 아내의 저주는 풀리지. 남편에게 주도권을 받아야 풀리는 저주였으니까. 결코, 우리와 같을 수 없어.”

무표정 위로 서서히 잔잔한 멸시가 떠오른다. 드레스 자락 아래로 구두를 벗는 소리가 들려온다.

“옷 좀 갈아입도록 하지.”

이제 핫 팬츠의 음성은 바스러질 것처럼 건조했다. 누가 들어도 썩 꺼지라는 소리겠다. 디에고는 침실 밖에 딸린 응접실로 발을 옮기며, 웃음기 섞인 말을 내뱉었다.

“주도권이라면 언제나 네게 있었을 텐데.”

이윽고 침실 문이 닫혔다. 욕망하되 절제하는 자는 그대로 몸에 익은 남성복을 찾아 입었다. 그대로 침실 한쪽에 놓인 거울 앞에 선다. 자신이 거두어야 할 것을 떠올려 본다. 위대하신 성자의 용서, 자신의 죄, 짐승 같은 사내에게 덧붙여 주었던 살점과 또 무언가. 한편 문 너머 응접실 벽에 기댄 디에고도 빼앗아온 것을 돌이켜 본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붉어진 손, 미련한 노부인의 황금, 저 여자의 숨.

모든 것을 곱씹어 보고 나면 그때 저 여자가 지었던 표정을 흉내 내 본다. 울상이었던가, 초조한 낯이었나. 어느 쪽도 아니었을 텐데.


여행은 계속되었다. 피렌체로 향하는 기차, 일등석 객실에서 디에고는 다른 승객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다. 핫 팬츠는 필립의 거죽을 쓰고 그 옆에 앉아, 펜을 들었다. 프랑스어로 몇 마디 짤막한 농담이 오간다. 높으신 분들이 주고받는 돈, 사교계에 도는 저열한 치정 싸움, 신성모독. 펜을 쥔 손은 떨리지 않는다.

디에고는 잠깐 수다를 떨다 말고 그의 동행 교사에게 바싹 붙었다. 오랜 친구를 대하듯, 동시에 아랫사람을 대하듯 팔을 어깨에 걸친다. 긴 손끝은 상대의 손목 언저리를 두들기며 한껏 심기를 거스른다.

“선생, 무얼 쓰고 계시는지.”

“후작께 보낼 편지입니다. 밀라노에 있을 때 전해드리질 못해서, 피렌체에 도착하는 대로 부칠까 합니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편지를 써 내려갔다.

아서 로버트 아이킨 후작께. 언제나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디에고 브란도 씨와 볼로냐를 거쳐 피렌체로 갑니다. 브란도 씨는 매일 충실히 배우고 계십니다……

“좋은 말만 써 줄 필요는 없어.”

그가 귓가에 대고 독사처럼 속삭인다.

“악담이라도 적어주길 바라는 건가?”

“농담도 못 하겠군.”

어깨를 감싸던 팔이 내려간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다른 승객이 웃음을 터뜨렸다. 로마에서 유학하는 아들을 만나러 간다던, 점잖은 독일인 노신사였다.

“브란도 경, 선생을 놀리시면 어떡합니까.”

“놀리다뇨, 제게 형제 같은 분인데. 아, 참고로 제가 동생입니다.”

디에고는 마지막 단어에 유독 힘을 주었다. 한순간에 여러 겹 웃음이 터져 나온다. 명백히 고의가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같은 처지 어린 양을 부르는 말이 아니라, 마음을 한껏 떠보려는 말. 그리하여 핫 팬츠도 웃었다. 펜을 내려놓고 크게 숨을 뱉어냈다. 비탄을 떨쳐내기엔 그만한 게 없었으니.

“형보다는 아버지 같은 선생이 되고 싶었는데, 유감이군요.”

그녀는 도로 펜을 쥐었다.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순박하고 온순한 낯을 연기하면서도 차마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갈한 글씨가 종이를 서서히 물들인다. 시야 너머에선 디에고가 얼굴을 구기고 있으리라.

다음 편지는 로마에 도착하는 대로 부치겠습니다. 부디 평안하시길.

짐승과 수녀는 그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기차에서 내려 피렌체를 활보했다. 이름난 미술관을 여럿 둘러본 뒤, 대성당에 울려 퍼지는 미사곡에 귀를 기울인다. 선명한 햇살은 스테인드글라스와 천정의 프레스코화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디에고는 엄숙한 가락을 한 귀로 흘려보내며 찬란한 유리에 눈길을 주었다. 핫 팬츠는 그가 짐승이 아닌 사람의 눈으로 찾는 게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에게 무얼 그리 찾는지 따로 묻지 않았다. 머지않아 두 눈이 어느 한 곳에서 가만 멈춘다. 푸른 옷을 두르고 둥근 창 중앙에 앉은 여자. 그 품에 안긴 앙상한 성자.

“여인 중에 가장 복된 이³⁾도 시시하더군.”

3) “모든 여자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누가복음 1:42-43]

그날 밤, 디에고는 호텔 안락의자에 앉아 중얼거렸다. 두 사람이 족히 앉을 크기라, 왼쪽 팔걸이에 오롯이 몸을 기댈 수 있었다.

“바티칸에 가서도 그리 말할 수 있을까.”

핫 팬츠는 그 앞에 서서 디에고를 내려다보았다. 스프레이를 써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얼굴엔 약간의 피로, 옅은 경멸이 떠다닌다. 디에고는 눈을 끔뻑이다, 느릿한 손길로 옆자리를 톡톡 두들겼다. 그녀는 거절하지 않고 앉았다. 다만 디에고와 달리 남은 팔걸이에 기대지 않고, 똑바로 앉아 상대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거기서 대리석 성모를 본다고 생각이 달라질 것 같진 않아. 어느 희생보다 처녀 수태를 칭송하는 마당에.”

“당신 어머니 얘기인가. 사적인 감정은 넣어두도록 해.”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디에고는 그대로 제 옷자락을 걷어 올렸다. 이음매였다. 잘 단련한 몸을, 밧줄 같은 흉터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는 보란 듯이 왼손 검지로 그 흉터를 훑어나갔다. 늑골 아래를 지나, 척추 마디 사이를 스치고, 다시 한 바퀴 돌아 제자리에. 핫 팬츠는 손끝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면서도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네가 한 짓인가?”

“그래.”

“왜 나를 치료했지?”

“당신과 협력하고 있었으니까.”

“아니야.”

곧바로 말끝에서 비웃음이 배어 나온다. 그는 도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도 살짝 구부정한 몸으로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야생에서 짐승이 적과 아군을 식별하려는 동작과 비슷했지만, 분명 짐승이 아닌 사람의 눈이었다.

“나를 연민했기에 치료했잖아. 지나칠 수 없었겠지. 내게서 무얼 보았을지……”

“신을 섬기는 자의 미덕이야.”

“아니! 네 사적인 감정이었지.”

“그만, 거기까지.”

핫 팬츠의 둔탁한 음성이 방에 울렸다. 그녀는 크림 스타터를 꺼내 들어 디에고에게 겨누었다. 붉은 눈은 똑바로 앞을 보았으며 떨림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왼눈에는 작은 균열이 일었다. 울먹이고 흥분한 기색 하나 없이 딱 한 줄, 눈물이 흘러나왔다. 삐뚤어짐 없는 얼굴을 타고 턱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도로 메말라버렸다. 찰나와 같았으나 단 한 사람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짐승은 사람의 눈으로 균열을, 한 방울을, 명백한 동요를 지켜보았다. 그는 발톱을 거둔 채 한 손을 뻗었다. 뜸 들일 것도 없이 그녀의 뺨을 감싸고, 물 한줄기가 스친 자리를 엄지로 두어 번 쓸어냈다. 그대로 혀끝에 대어 맛을 보았다. 비탄과 죄책감은 짠맛이었다.

“네게 협조하겠어. 내 발로 바티칸까지 가주지.”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탐식의 기회가 아닌, 발 뻗을 둥우리를 찾았을 때의 기쁨이었다.


봄의 입구, 스틸 볼 런 레이스가 끝나고 1년은 더 지난 어느 날. 런던 변두리에 있는 아이킨 후작의 저택으로 편지가 하나 날아왔다. 그의 양자나 다름없던 기수 디에고 브란도가 여행지에서 보낸 것이었다. 디에고가 전하는 말은 짧고도 명확했다.

친애하는 후작께. 저는 로마의 중심으로 갑니다. 예상보다 여행이 길어지겠습니다. 다시 만날 날까지 무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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