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월포영 [1-5화]
동양풍 로맨스판타지 / 개인작
25,134자
편당 약 4,50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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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월포영(殘月泡影)
프롤로그
이명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폐가 찢어지는 것만 같은 고통이 나를 덮쳐 왔다. 머리가 어지러운 이유가 비릿한 혈향 탓인지, 흘린 피 때문인지를 모르겠다.
필사적으로 손바닥으로 상처를 틀어막아 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나, 죽나?
이대로, 정말 허무하게 죽는 건가?
한평생 무녀로서의 직책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는데. 이제 그 업에서 벗어나 소박하고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보답도 못 받고 죽는다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도 몸은 자꾸만 차게 식어갔다.
온몸에 힘이 빠져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지만, 나는 끝까지 홍련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그 금방울을 잘못 건드려 요란한 소리를 울리며 바닥에 굴러떨어지게 만들고 말았다.
홍련은 내가 흘린 피 웅덩이 위에서 한참을 구르다가 결국 나를 찌른 이의 발밑에 멈췄다.
그와 동시에, 더는 버티지 못한 내 몸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범인을 욕하는 소리, 그에 맞서 핏대를 높여 소리치는 범인의 목소리, 나를 부축하러 달려오는 신관의 목소리.
……총체적으로 아주 가관이었다.
달려온 신관이 품 안에 나를 안은 채, 이리저리 두드리고 흔드는 것마저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제 그만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
누군가가 거칠게 신전의 닫힌 문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고저 차이가 없는 차분한 목소리도 울렸다.
잠깐의 정적 뒤에 울리는, 여지껏 들어본 적 없는 가장 강렬한 감정이 녹아있는 용 특유의 울음소리.
그 포효의 주인이 점점 내게 가까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익숙한 체온과 체향이 나를 감쌌다.
‘마지막으로 느끼는 게…….’
당신이라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그의 입술 끝을 매만졌다.
그게, 마지막으로 느낀 따뜻함과 부드러움이었다. 그걸 끝으로 점차 손에 힘이 빠져나갔다.
……신이시여. 정녕 당신이 저를 가여이 여기신다면, 새로운 기회를 주십시오.
적어도, 한 번이라도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있다면 이렇게까지 억울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너무 불공정하잖아. 이, 빌어먹을 새끼야.
마침내, 그를 어루만지던 손마저 힘없이 툭, 떨어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홍련이 반짝였다.
마치 힘을 발할 때처럼, 희미하게.
1화
물먹은 솜처럼 팔다리가 무거웠다.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아 답답한 마음이 차올랐다. 동시에 코와 귀에도 물이 한가득 들어찼다는 것을 깨닫자 불쾌해졌다.
……물이 한가득 들어찼다고?
그 생각이 들자, 신기하게도 여지껏 무거웠던 눈꺼풀이 점차 사르르 열리기 시작했다.
눈을 뜨고 마주한 것은, 점차 멀어져가는 수면 위에 빛무리. 그리고 계속해서 가라앉아가는 자신의 몸.
그제야 연화는 자신이 물속에 빠져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흡이 한계에 달했던 건지 괴로움도 몰아닥쳤다.
그녀는 손끝으로 제 목을 붙잡고 잠시 바둥대다가, 한 번 더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있는 힘 없는 힘 쥐어짜내 뭍을 향해 헤엄쳤다.
“푸하……! 콜록, 콜록…….”
간신히 물 밖에 닿은 연화는 한껏 삼켰던 물을 잔뜩 토해냈다.
어느 정도 숨이 돌아오니,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노을조차 거의 다 져 어둑한 하늘이 무성한 나무들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숲……?”
조금 전까지 분명히 제를 올리기 위해 신전에 있었을 텐데, 왜 숲에……. 아니, 그보다 분명히…….
그녀는 몸을 지탱하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완전히 땅을 디디고 섰다. 조금 전까지 고인 물에 있었던 몸인지라, 바람을 맞으니 춥다 못해 얼어 죽을 지경이었다.
일단은 더 체온이 떨어지지 않게 옷의 물기를 짜내려 옷자락을 잡은 순간, 연화는 무언가의 위화감을 느꼈다.
첫 번째로, 잡아 쥔 옷이 마지막에 자신이 입고 있던 옷과는 달리 상당히 질 떨어지는 값싸고 거친 옷감이라는 점이었다. 그다음으로는, 그 옷을 쥐고 있는 손이…….
‘왜 이렇게 작아?’
손이 큰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작은 편도 아니었다.
그녀는 물을 짜내야 한다는 생각조차 잊고 그저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가, 빙글빙글 돌 듯이 걸어보았다.
너무나 이상했다.
정말 어린 아이의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짧고 어딘가 위태로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 몸이 제 몸 같지 않았다.
‘그 전에.’
그러나 그녀는 생각하기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얼어 뒤지겠다, 미친!”
익숙한 숲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길을 못 찾을 정도로 으슥한 숲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무사히 한 마을에 닿을 수 있었다.
‘……이런 마을이 있었나?’
무녀로서 자주 초연국 전체를 시찰하곤 했던지라, 아주 작은 마을도 머릿속에 꼼꼼히 담아두는 연화다. 그런데, 이 마을은 전혀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렴 어떤가. 당장 몸을 녹이고 주린 배를 채울 수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녀가 마을 길가에 들어서려고 발을 내딛자,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세 명의 아이들이 연화의 앞을 막아섰다.
“야, 무영!”
그중 가장 서열이 높아 보이는 아이가 입을 열었다.
……대충 상황 흘러가는 걸 보아하니, 자신을 부른 것 같긴 한데, 연화는 왜 자신을 보고 ‘무영’이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누가 무영이야?”
“이게 죽다 살아나서 미쳤나?”
연화를 무영이라 부른 아이는 기가 찬다는 듯 허, 소리를 내며 팔짱을 끼곤 재수 없는 목소리로 다시금 재잘댔다.
“붉은 머리카락의 마녀로 태어났으면, 얌전히 그냥 물에 빠져 죽지 왜 살아 돌아왔대? 그래도 꼴에 살고 싶었나 봐?”
“흠, 혹시─ ‘날’ 물에 빠뜨린 게 너희들이야?”
연화는 자애롭게 웃으며 역으로 그들에게 되물었다.
“그, 그게 왜 중요한데!?”
“……쯧, 뭐 뀐 놈이 성낸다더니 딱 그 꼴이네. 그냥 물어본 거야, 왜 그렇게 뭐 꿀리는 놈처럼 발발대면서 대답해?”
안 그래도 추워 죽겠는데 이렇게 바깥에 붙잡혀 있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짜증 났다.
“야, 설아야. 아무리 생각해도 무영 쟤 좀 이상해졌는데?”
“좀이 아니야. 많이 이상해졌어.”
“원래 저런 성격 아니잖아.”
“설아 앞에선 아무 말도 못 하고 기던 애가 갑자기 왜 저래?”
“……진짜 죽다 살아나서 미친 거 아냐?”
다 들린다, 이 어린놈들아.
무녀가 되기 전 연화였다면 필시 주둥이를 놀린 아이의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가공할 힘으로 싸대기를 날려 입을 닫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녀가 된 후의 그녀는 시정잡배처럼 싸우는 걸 그만둔 지 오래였다. 애초에 더는 물리적인 힘을 쓸 이유가 없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난하게 자라 억척스러워진 성격과 오는 시비 안 막는 성질이 어디론가 도망갔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니다. 내가 괜한 걸 물었네.”
그녀는 한 차례 옷을 짜냈지만, 곳곳에 남은 물기에 달라붙은 흙먼지를 탁탁 털어내고는 방긋 웃으며 아이들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어쩐지 그들이 알고 있던 무영과는 다른 모습에 아이들은 저도 모르게 연화가 다가간 만큼 물러났다.
“그냥 너희들이 내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빠른데 말이야. 그치?”
자애로운 목소리와 달리, 두 손을 뚜둑거리며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그 모습은, 마치 악마처럼 보였다.
““잘못했습니다…….””
“…….”
연화는 적당한 나무 그루터기에 다리를 꼰 채 앉아 아이들을 감독했다.
“원래는 적당히 손봐주려고 했는데, 너무 오랜만이라 조절을 못 했네. 그건 사과할게?”
‘나, 분명히 너희들한테 사과했어. 나중 가서 딴말하지마.’라는 명령조였기에 아이들은 황급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일단 붉은 머리카락의 마녀가 뭔지부터 설명해줄 사람?”
연화의 앞에 무릎 꿇은 아이들은 왜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멀거니 두 눈을 꿈뻑였다. 그러나 연화의 살기 어린 눈빛에 아이들 모두 시선을 떨궜다.
“설명해줄 사람?”
연화가 재차 되묻자, 그제야 눈치 있게 팔까지 자진해서 들고 있던 두 아이가 남은 한 사람을 동시에 쳐다봤다.
‘설아라고 했었나, 이름이.’
연화는 한쪽 팔로 제 턱을 괴고는 가만히 그 아이를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이 몹시도 따갑게 느껴졌는지, 설아라는 아이는 비로소 입을 우물거리며 무언가 말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홍련의 무녀와 같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이를 그렇게 부릅니다.”
“그게 뭐가 문제가 되는데?”
애초에 초연국에서 붉은 머리카락은 희귀한 색에 축하는 속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연화가 진정한 ‘홍련’의 무녀라는 소리를 듣는 데 일조해주기도 했다.
“마지막 홍련의 무녀는, 역대 무녀들과는 달리 몹시 사악한 마녀였으며, 무녀의 긍지와 명예를 더럽히고 끝끝내 그를 숨기기 위해 자살한 존재기 때문…, 입니다.”
뭐?
뭔, 무슨 개소리야, 그게?
연화는 점차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러던 중 그녀는 설아가 한 이야기에서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마지막 홍련의 무녀라니?”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있지. 무녀는 당대의 한 사람만이 존재할 수 있다고. 당대의 무녀가 죽었으면 후임이 그 자리에 임명되는 게 당연…….”
연화는 스스로 이야기하면서도 무언가 석연찮아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야. 설아라고 했지.”
“네? 네…….”
“마지막 홍련의 무녀가 죽은 지 몇 년 지났는지도 알아?”
“알죠. 백 년이요.”
“뭐?”
“백 년…….”
설아가 못 들었나? 싶어 다시금 한 번 더 얘기하는 순간, 그녀는 연화로부터 멱살을 잡히고 말았다.
“배, 백 년이라고 했어? 백 년? 십 년도 아니고 백 년──?!”
“……하.”
설아는 생각했다.
차라리 그때 앞을 막아서지 말 걸 그랬다고. 무영이 미쳐도 단단히 미쳐 돌아왔다고.
“하아…….”
허탈함, 허망함, 망연자실…….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연화의 가슴에 복받치듯 차올랐다.
“이게……, 이게 말이 되냐고.”
당대 최고이자 역대 최고의 무녀로 평가받던 자신의 과거는 온데간데없어지고, 웬 사악한 존재로 탈바꿈되어 알려진 게 백 년이 지났다고 하질 않나.
심지어 그로 인해 홍련의 무녀라는 존재 자체가 누군가의 고의로 싹 지워져 이제는 무슨 흑역사처럼 되어있질 않나.
“……착잡하다, 착잡해.”
용들에게 백 년이란 결단코 긴 시간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백 년은 진실로 존재한 역사가 왜곡되고, 실은 이게 왜곡되었다는 정보마저 지워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초연국의 건국 신화에도 언급되는 무녀의 존재를 그렇게 취급하냐고!
연화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땅을 마구 짓밟았다.
애초에 그렇게 죽은 것 자체가 너무 억울했다.
초연국을 위해 헌신했던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무녀로서 통과해야만 했던 험난한 시련들,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라며 이뤄낸 수많은 위업. 그로 인해 윤택해진 초연국.
아니, 심지어 재앙을 몰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소멸시키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이 정도면 솔직히 위인으로 선정되어 성대하게는 아니더라도 나름 기려지고 있어야 하는 게 맞지 않냐고.
그나마 그런 명예로움과 축적해두었던 부를 누리고라도 죽었으면 조금이라도 덜 억울했을 것이다.
연화는 정식으로 은퇴한 이후에야 그것들을 누려볼 생각이었다.
즉,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사치를 부려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더 억울했다. 억울하다 못해 아주 역정이 났다.
있던 걸 누리지 않고 있던 것과 이제는 누리지 못하게 됐다는 건 당연하지만 하늘과 땅만큼 차이 났다.
“응? 근데, 무녀를 지운 건 그렇다 쳐도, 내가 그런 취급을 당하는 데 무량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을 텐데.”
뒤늦게 찾아온 의문에 연화는 손톱 끝을 깨물었다.
신룡은 잘 변하지 않는 존재다 보니, 백 년이 지났어도 변한 게 없겠거니 싶어 묻지 않은 게 실수였다.
연화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가 이내 주먹을 쥐고 다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지금 시간대면 저잣거리가 한참 북적일 테니 사람들한테 뭔가 묻기 쉽지 않을까.
……그리고, 겸사겸사 남은 밥도 먹을 수 있으면 더 좋고.
연화는 마을의 번화가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2화
“……후우.”
매몰찬 경멸의 눈빛으로 개밥 주듯 던진 먹을 것마저 감사히 받아먹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연화는 딱딱한 검은 빵을 태연하게 우적우적 씹으며 지금까지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무량 님? 네년이 갑자기 왜 그분께 관심을 두는 게냐?
-놔, 이 소름 끼치는 마녀 자식아!
-다른 건 몰라도 네 머리칼을 보고도 어째서 무량 님이 분노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네. ……그럼 진작에 죽었을 것을.
하나같이 애를 앞에 두고 할 얘기들은 아니었다.
암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어린 애한테 그렇게 소름 끼치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할 수 있냐, 도덕의식 없어?
정보는커녕 영양가 있는 이야기조차 듣지 못한 것에 새삼 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래도 한 가지 얻어걸린 것이 있다면, 무량이 분노했다면 죽었을 거라는 얘기, 그거 하나뿐이었다.
본디 그는 의미 없는 살생은 하지 않는 주의였다. 영물을, 나아가 생을 소중히 여기며 그들을 돌보는 것에 시간을 쏟는 이가 바로 무량이었다.
그런 그가 분노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을 죽인다?
그건, 연화에게 있어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좀 더 그에 관한 이야기가 듣고 싶은데 상황이 마땅치 않으니…….’
연화의 역사가 그렇게 왜곡된 채 기록되어 전승되었다면, 다른 마을에 가서도 비슷한 취급을 당할 게 뻔했다.
그녀는 마지막 빵 부스러기까지 야무지게 싹싹 뭉쳐 먹고는 손을 탁탁 털었다.
어째서 역사가 그렇게 비틀리게 됐는지, 다른 신룡들은 왜 그것을 바로잡지 못했는지.
지금 연화가 품고 있는 모든 의문을 풀어줄 열쇠는 역시 역사를 올바르게 알고 있는 다른 신룡들에게 있었다.
이전의 연화라면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비치는 것만으로도 바로 대면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그녀로서는 무리였다.
꾀죄죄한 몰골에 마땅히 그녀를 맡아주고 있는 보증인도 없는 고아 신분의 아이가 초연국에서 가장 높은 권력계층인 신룡을 만나고 싶다고 만난다?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갑작스레 그런 것들을 물어본다 한들 의심만을 살 게 뻔했다. 만났다 한들 만남 자체가 무산되어 내쫓길 수도 있었다.
‘그러니 당장 필요한 건 그들을 만날 그럴싸한 명분, 그리고 그런 질문을 해도 납득받을 수 있는 합당한 자격.’
전자는 바로 생각나는 게 없었지만, 후자의 경우는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연화는 홍련의 무녀가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격 요건 중 하나인 홍염의 능력을 이용해 자격을 증명할 생각이었다.
홍염은 본래 불을 다루는 영물들의 우두머리인 주작의 인정을 받아 꽃피우는 능력이었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능력을 개화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오로지 주작의 선택을 받은 이들만이 그 능력을 갈고닦을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홍염의 능력은 영혼 자체에 각인 돼. 몸이 바뀌었더라도 알맹이가 그대로 온존된 채 환생한 거라면, 홍염을 다룰 수 있어.’
나름 곡기도 들어찼고, 옷도 어느 정도 말라 아까처럼 덜덜 떨 정도로 춥지도 않았다.
연화는 벌떡 일어나, 조금 전 빠져나왔던 숲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시금 호숫가 근처까지 다다른 연화는 물가를 바라보았다. 이지러져 가는 달이 수면 위에서 찰랑거렸다.
연화는 잠시 그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깊게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홍화부.”
청아한 목소리가 조용한 숲속에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희미한 방울 소리도 났다.
‘다행이다, 홍염을 일깨울 수 있어!’
그녀는 뛸 듯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조심스레 자세를 취하고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다음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몸 깊숙한 곳에 조그만 불꽃이 일렁이는 듯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처음으로 홍염을 일깨울 때의 감각과 같은 것에 절로 희열이 차올랐다. 하지만, 집중을 깰 수는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힘의 반발로 내상을 입어 쓰러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연화는 차근차근 주문들을 입에 담으며 침착하게 의식을 진행해나갔다.
“……차분히 피어올라, 마침내 봄에 당도하여 앞으로도 나를 이끌 수 있도록. 여율령시행!”
드디어 마지막 주문을 입에 담았다.
한순간 속에서 확하고 불꽃이 크게 타올랐다가 사그라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감각에 그만,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잠깐 사이에 흘린 땀으로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 재채기가 나올 것만 같았다.
‘이러다 진짜 감기 걸려 죽을지도.’
어째 종일 뽀송뽀송하게 있지를 못하는 거 같지.
그녀는 손가락을 튕겨 홍염을 피워보았다.
그러자, 딱 두 손가락으로 콩을 잡은 만큼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래, 이게 어디냐…….”
그래도 꼴에 불은 불이라고 따뜻했다. 없는 것보단 나았다.
몸이 조금씩 따뜻해지는 것과는 달리, 마음은 점차 차갑게 식어갔다.
앞길이 구 만 리 같았다. 능수능란하게 능력을 다뤘던 과거의 자신이 그리워지고 말았다.
‘그래도, 한 번 했었던 거니까 전보단 빨리하겠지.’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자.
연화는 자신을 다독이며 굵은 나무줄기에 등을 기대앉고는 눈을 감았다.
바로 근처에서 새가 우렁차게 지저귀는 탓에, 연화는 일찍 눈을 뜨고 말았다.
돌도 씹어먹을 정도로 팔팔한 나이라 해도 바깥에서 자는 건 역시 무리였나보다.
온몸이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삐거덕거리며 쑤시는 탓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따뜻한 물에 들어가서 노곤하게 풀어져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럼 다 나을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은 그런 투정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이젠 명맥이 끊겼을 홍염을 다시 다루는 존재라는 것만으로도 신룡들에게는 대서특필일 것이다.
누구에게 가기로 정했든, 훈련하면서 가면 능력의 성장은 문제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어떤 용에게 찾아가느냐겠지.
전생의 그녀와 관계가 제법 허물없던 용. 그리고, 지금 연화가 있는 곳에서 걸어서 갈 수 있을 법한 곳에 사는 용.
이곳이 어딘지 정확히 짐작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기후를 통해 단화 거리의 외곽 지역이 아니겠냐고 유추할 수는 있었다.
‘중간중간 들러서 쉴 곳이 있다면 어떻게든 가볼 법도 한데 말이지.’
연화는 고민했다.
몇 번을 더 이리저리 따져보았지만, 역시 처음으로 만날 용으로 적단룡 이상의 적법한 대상은 없었다.
정해졌으면, 바로 움직여야지.
연화는 기지개를 한 번 더 켜고는, 가뿐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어린아이’라는 외형이 연민을 느끼게 하는 모양이었다.
다른 마을에서는 연화의 머리카락 색을 보고 흠칫하긴 해도, 대놓고 멸시하는 눈길을 보내진 않았다.
다소 냉정하고 딱딱한 어조로 말을 걸긴 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사람을 앞에 놓고 함부로 입 놀리는 것보단 그게 낫다.
한 마을에서 구걸로 배를 채우고, 아사하기 직전 즈음 다음 마을에 도착해 또 배를 채우고…….
그렇게 일주일을 내리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은 끝에 연화는 초연국에서 가장 번화한 무역 도시─ 단화 거리에 닿을 수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다고 눈물을 흘리며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태산과도 같았지만, 오자마자 이상한 거지 취급받으며 퇴장당하고 싶진 않았다.
지금 자신의 몰골이 아주 말이 아니라는 건,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연화는 구걸하며 받았던 돈을 세보았다. 동화 세 닢이 남아 있었다.
최소한 식사와 목욕물은 대접받을 수 있는 싸구려 여인숙에 잠시 묵을 수 있는 돈이었다.
‘빨리 어디든 좋으니 발견하는 대로 들어가서 늘어지게 잠이라도……, 응?’
때 묻은 동화를 놓칠세라 꼭 쥔 채 점차 앞으로 나아가던 그녀는 거리가 평소보다 더욱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는 걸 눈치챘다.
불꽃이 가져다주는 안정감, 풍요로움, 풍성한 다채로움.
그 빛을 머금은 색색의 등불이 어두운 하늘에 수 놓인 장관의 모습. ‘축제’라는 단어가 떠오를 수밖에 없는 광경.
“단화제!”
연화는 저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시끌시끌한 소란스러움이 거리에 넘쳐나고 있어, 아무도 듣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거지 같은 하늘 놈이라도 지금만큼은 날 돕는구나……!’
단화제.
지금의 단화 거리를 만드는 데 공헌한 인간이자, 랑 가문의 시초이기도 한 리엔과 신룡 미르를 기리는 축제다.
신룡에게는 감사와 존경을, 인간에게는 앞으로도 은혜와 축복을 약속할 것을 서약하는 것이 축제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와 더불어, 단화제에는 가장 큰 볼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비무제(比舞祭)였다.
문자 그대로 춤을 겨루는 대회로, 본래는 무녀 후보생들이 각자의 소양을 겨루기 위해 미르가 직접 기획한 사업 중 하나였다.
백 년이 지나, 무녀가 없어진 지금도 대회의 명맥 자체는 유지되고 있을 것 같은데…….
‘……일단은.’
씻자.
씻고 사람 꼴 좀 한 다음 뭘 물으러 가자.
“개운해…….”
연화는 수건으로 물기를 탁탁 털어내곤, 방 앞에 놓인 죽그릇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아직 뜨거운 김이 솔솔 올라오는 죽을 한번 잘 휘젓고는 입으로 옮겨 넣었다.
정말 잠시간의 허기만을 달래줄 정도로, 씹을 것도 없이 묽은 죽이었다.
고소한 맛으로 먹어야지, 뭐. 그녀는 게눈 감추듯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는 옷을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걸을 때마다 나무판자가 끽끽거리는 계단을 타고 내려간 연화는 먼저 여인숙 주인에게 비무제에 관해 물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저 같은 외지인도 비무제에 참가할 수 있을까요?”
“응? 꼬마 아가씨가? 음……. 딱히 참가 자격이 제한되어있진 않지만, 우승은 무리일걸.”
주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연화의 행색을 한 차례 쓱 훑더니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역사가 깊은 대회라 워낙 쟁쟁한 곳이거든. 눈길을 확 사로잡을 그런 춤이 아닌 이상에야…….”
“우승하면 뭐 주는데요?”
“글쎄다. 그건 모르겠구나. 왜냐면 우승자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해도, 결정적으로는 미르 님이 정하시는지라.”
“미르 님이 정한다고요? 그럼, 우승하면 미르 님을 만날 수 있나요?”
“그래. 너무 과한 소원만 아니라면, 어지간하면 들어주신다고 들었어.”
뜻밖의 정보를 손에 넣은 탓에, 연화의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본래 비무제에서 우승한 이에게는, 명예와 약간의 부를 쥐여줄 뿐이었다. 신룡과 독대하는 부상은 존재하지 않았었다.
시대가 흐르면서 바뀌게 된 걸까.
어찌 됐든, 시기가 좋았다.
“참가 신청은 어디서 해요?”
“중심지에 청료관에서 받을 거야. 정말로 나가려고?”
“헤헤……, 참가상이라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하긴. 참가해서 예선만 통과해도 은화 다섯 닢은 받을 수 있을 게야. 절대로 적은 돈이 아니지. 행운이 있길 바란다, 얘야.”
“고맙습니다!”
연화는 일부러 쾌활하게 대답하며 여인숙을 나섰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루한 소녀의 무모한 도전처럼 보이도록.
“자, 그럼…….”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씨익 웃어보였다.
“우승은 내 거다.”
3화
“이름이…, 무영이라고 했지. 출신지는?”
“단화 거리의 외곽에 있는 조그만 마을입니다.”
“아, 유청 마을 말이구나. 좋아. 이걸로……, 참가는 됐어. 그 외에 신청하고 싶은 것 있니?”
“옷하고, 장검 하나를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흠? 검무 분야? 그쪽은 워낙 쟁쟁한데~”
연화는 괜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삼켰다.
접수원은 그 미소를 잘못 생각했는지 연화를 향해 힘내라는 듯한 자세를 취해줬다.
“대회는 앞으로 사흘 후, 정오부터 시작되니까 잊지 마!”
“감사합니다.”
“아, 옷하고 소품은 바로 받아갈 수 있어. 뒤쪽에 천막 보이지? 저기서 받아가면 돼.”
연화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접수원이 가리킨 천막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막을 드리우고 안으로 들어서니, 한가하게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어섰다.
“필요한 게?”
“옷하고 장검이요. 이 정도 되는.”
그녀는 두 팔로 살짝 너비를 가늠해 보였다.
그러자 소품 쪽에 서 있던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곤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 다른 사람이 줄자를 들고 연화에게로 다가왔다.
그녀는 몇 군데 치수를 재고는, 옷을 한 벌 골라 건넸다.
“이거, 나중에 반납할 때는 어떻게 하면 되나요?”
“응? 딱히 반납 안 받아. 그냥 가진다고 생각하면 돼.”
“……후하네요. 당연히 대여라고 생각했는데.”
“아하하, 그렇지만 소품류는 확실히 반납해야 해.”
치수를 재준 이가 손을 휘적이며 웃었다. 그리고는 다 됐으니 받아가라는 듯 손끝으로 가리켜 보였다.
“알겠습니다. 빌려주셔서 감사해요.”
“적단룡의 풍요로운 은혜가 함께 하기를.”
“……당신에게도 은혜가 깃들기를.”
상투적인 대화를 주고받은 연화는 검과 옷을 품에 끌어안은 채 천막을 나서 묵고 있는 여인숙으로 돌아왔다.
‘대여한 옷이라는 걸 알 수 있는 특징적인 단조로움…….’
이 옷을 입고 나섰다는 것만으로도 깔보고 무시하는 이들이 있을 터였다.
문득, 무녀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자신의 어린 나날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자신 때는 옷을 대여해준다는 구제 제도조차 없어 남루한 행색 그대로 참가해야만 했다. 소품 정도는 빌려줬지만.
그때 비하면 지금이 훨씬 낫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차별적 편견은 어쩔 수 없겠구나 싶어 입안이 썼다.
‘무녀의 맥이 백 년 동안 끊겼다면 필시 지금의 사람들은 홍염의 능력이 뭔지 본 적도 없겠지. 진정한 무녀들만이 출 수 있는 홍련검무도 본 적 없을 테고.’
그러니 연화는 두 항목을 한꺼번에 선보일 셈이었다.
단지,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그녀는 힐끔 시선을 내려 앙상한 두 팔과 다리를 바라보았다.
지금 연화의 혼이 눌러앉은 이 몸. 그러니까, 무영의 몸에 홍련검무를 출 수 있는 감각이 존재하느냐였다.
검무를 추는 것 자체는 기억과 혼 그 자체에 각인되다시피 하여 머릿속에 다 들어 있었다.
다만, 몸이 그것을 따라주느냐는 별개였다.
만약 무영의 몸이 아주 심각한 몸치·박치라면?
……사흘 안에 그걸 뜯어고치고 우승한다? 아무리 연화라고 해도 불가능했다.
“하아……. 제발, 기본적인 감각 정도는 있어라.”
그녀는 그렇게 빌며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조그만 뒤뜰로 향했다.
그리고는, 검집 채로 검을 쥔 채, 부드럽게 한 바퀴 빙글 돌아 보였다. 마냥 두터워 보이던 치맛자락이 예상외로 유연하게 원을 그리며 펼쳐지듯 퍼졌다.
치마 안에 수 놓인 얇은 천자락들이 포말이 이듯 너울거리고, 긴 소맷자락이 나풀대며 호를 그렸다.
바람을 가르고, 곡선을 그리고, 짧지 않은 머리카락마저 나풀나풀 일렁이듯 흔들린다.
흐드러지는 앵화처럼.
부드럽게 개화하는 한 계절 한 철의 꽃처럼.
유연한 움직임으로 모두를 아우르는 포용성을 보이는가 하면, 때로는 용맹한 매처럼 절도를 보였다.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은 춤이었다.
혼이 기억하고 있기에 움직이기 쉬운 걸까.
아니면 무영이라는 아이가 본래 무희를 꿈꿨기에 몸이 가뿐하게 느껴지는 걸까.
어느 쪽이든, 연화는 감사함을 느꼈다.
이대로 몸이 쭉 생각처럼 움직여주기만 한다면, 우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미르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흥미로운 존재가 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초대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의 계획에 한 걸음 더 성큼 다가갈 수 있었다.
뒤뜰에서 나와 다시 여인숙으로 돌아가니,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옷에 귀한 장신구를 덕지덕지 붙인 웬 여자애 하나가 여인숙을 휘어잡으려 하고 있었다.
“여기, 비무제 나간다는 애가 묵고 있다며? 어디 갔어, 걔?”
주인은 상당히 당황한 눈치로 대답을 고르고 있었다. 손님의 행방까지 어떻게 일일이 관리하겠는가.
‘그나저나, 소문이 그렇게 빨리 나나?’
연화는 털털한 걸음으로 여자애 근처에 다가가, 이내 거만하게 앉아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난데. 왜 찾아?”
“너야?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려는 애가?”
얜 또 뭔데 갑자기 시비야.
연화는 목덜미를 주무르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허, 원래 열리는 취지대로라면 나는 물론이고 너 같은 애도 참가 못 해.”
천한 애라고 덧붙이려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근데 진짜 얘는 생긴 게 좀…, 욕심을 한데 뭉쳐서 빚은 거 같이 생겼다.
“뭐? 너 같은? 너 같은 이라고 했어, 지금?”
그녀는 상을 탕, 내려치며 자리에서 벌떡 튕기듯 일어섰다.
연화는 그전에 가볍게 한 발자국 뛰듯이 물러나 그녀의 몸에 맞는 불상사를 피했다.
“어. ‘너 같은’이라고 했다. 왜? 아니꼬와?”
“명망 있는 란 가문에 셋째 딸인 나, 웬을 지금 너 같은 이라고 무시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 뭐, 그런 가문도 있구나. 그래서, 그런 고귀한 아가씨께서 미천한 제겐 무슨 볼일이신지?”
깎아내리는 것인지, 추켜세워 올리는 건지 미묘한 발언이었지만, 이 아가씨는 다소 멍청했는지 뒤 문장만을 듣고 만족한 모양이었다.
“창피당하기 전에 참가 취소하라고. 어차피 너도 그럴싸한 옷이랑 참가 상금이 탐난 거지 중 하나일 거 아냐?”
“흠…….”
“그러니 거지 주제에 괜히 비무제의 격 떨어뜨리지 말고 당장 가서 참가 취소해!”
“……그걸 왜 네가 정해?”
“뭐?”
“아니, 뭐 거지니 천한 존재니 그건 내 꼴보고 정할 수 있다 치자. 내가 비무제의 격을 올릴지 떨굴지 어떻게 아는데, 네가?”
“아니, 그건……. 그러니까. 그래! 여지껏 봐온 경험이야, 경험!”
“허이구…. 산지 이제 15, 16년 돼 보이는 꼬맹이 주제에…….”
연화는 진심으로 얼굴을 팍 구기며 벌레 씹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뭐라고 해도 난 나가야 할 이유가 있거든? 그러니까 헛소리 작작하고 그냥 집에 가서 연습이나 하든지 해라.”
“야!”
연화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이 묵는 방으로 돌아가려 계단에 발을 올렸다.
“야!!! 지금 너 나 무시했어!?”
“……목청만 더럽게 크네, 진짜.”
결국, 연화는 다시 몸을 돌려야만 했다.
다시 웬의 근처에 선 그녀는 망설임 없이 여자애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말을 다 들은 웬은 이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덜덜 떨기 시작했다.
“오, 오오오늘만큼은 그냥 봐주겠어!!”
웬은 그 말을 끝으로 부리나케 여인숙에서 모습을 감췄다.
연화는 주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저로 인해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게 한 점, 죄송합니다.”
“아, 아니. 조금 놀랐을 뿐이니까…….”
“이렇게 시비 걸러 직접 행차하는 경우가 또 있나요?”
“……그래. 가끔 자격지심이 높은 아가씨들이 너 같은 아이가 참가하는 것도 추잡하다고 여겨 방해 공작을 펼칠 때가 종종 있어.”
“주최 측에서 그런 부분은 제지하지 않나 보네요.”
“정확히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어서 그래. 대부분 명망 있는 가문의 자제들이 참가하고, 그 외의 사람들은 참가조차 꿈을 꾸지 않으니까.”
그래서 더 티가 났던 거구나. 웬 본 적도 없는 너절한 여자애가 대뜸 참가 신청을 했으니 시선을 끌었을 법도 하다.
“자유 참가라고 해도, 대부분은 예선조차 통과 못 하니 참가 상금이 탐나도 꿈을 접는 편이야.”
“과연…….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뭘, 이 정도로. 나는 기왕이면 너 같은 애가 이겼으면 좋겠다 싶기도 해.”
“……잘 사는 애들이 좀 재수 없게 굴긴 하죠?”
“하하, 비밀로 해줘야 한다!”
소문이라도 났는지, 그 이후로 연화에게 시비를 걸러 오는 이들은 없었다.
이따금 필요 때문에 시장길에 나섰을 때, 몇몇 인물들에게 호기심과 호기가 동시에 담긴 눈빛을 받는 것만 빼면 말이다.
아마, 뭐……. 나름 잘 사는 애들이 그러는 거겠지.
이상한 살이 덧붙여져 소문이 나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봤자 야만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뭐 그 정도겠지만.
대회 날까지 앞으로 하루.
이틀의 시간 동안 홍련검무를 더욱 완벽하게 교정하고, 그를 돋보여줄 홍염의 능력을 키우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처음 콩알만 했던 불꽃은, 이제 검신을 아름답게 휘감을 수 있을 만큼 커진 상태였다.
꺼지지 않도록 정신만 잘 집중한다면, 춤을 다 출 때까지는 유지할 수 있었다.
이전의 자신을 생각하면 여전히 불만족스러웠지만, 그래도 열흘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이만큼 성장한 걸 생각하면 뿌듯하기도 했다.
이대로 결전의 날까지 순탄히 흘러가기만 하면 좋겠다고 연화는 생각했다.
그러나, 인생은 원래 생각처럼 되지 않는 법이었다.
4화
단화 거리의 위엄과 풍부한 경제력을 유감없이 선보인 덕에, 비무제의 개막식은 더없이 호화로웠다.
아무런 상식이 없는 외지인이 처음으로 이 광경을 봤더라면, 마치 누군가 즉위한다고 착각할 정도로 말이다.
연화는 품에 안고 있는 검을 꼬옥 쥐며 한 차례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곧, 그녀의 차례였다.
다행히 지금까지 딱히 이상한 장난질을 당하지도 않았고, 괜한 시비를 거는 아이들도 없었다.
너무 편안하게 제 차례를 기다리게 된 탓에, 각오를 다지고 왔던 것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연화의 번호를 호명하는 소리가 천막 너머로 울려 퍼졌다.
그녀는 바닥에 앉아있던 탓에 치마 끝에 묻은 먼지를 탁탁 쳐내 털어내며 일어섰다.
그 순간, 주변 아이들이 왠지 모르게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
연화는 고개를 잠시 갸웃했다. 특별히 이질감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불안한 웃음소리였다.
특별히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아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 불안감은 곧 제 모습을 드러냈다.
연화가 천천히 무대 위로 걸음을 옮겨 가니, 그제야 치맛 속이 금방이라도 뜯어질 듯 덜렁거렸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언제 의상에 장난질을 쳐놓은 거지.
아까 물 마시러 갈 때?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들렀을 때?
어쨌든, 결대로 찢은 다음 서툰 바느질로 얼추 이어져 있도록 수선해놓은 정성에 연화는 속으로 혀를 찼다.
치맛자락이 아닌 치마 속을 난도질한 탓에, 입고 나서 활동한 후에야 악질적인 장난이 드러나도록 장치해놓은 꾀 아닌 꾀가 괘씸했다.
이대로라면, 어떤 동작이든 춤을 추는 사이 볼품없이 의상이 벗겨져 수치를 당할 게 뻔했다.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나갈지 고민하는 사이, 무대 위에 도착하고 말았다.
‘……예법에는 상당히 어긋나긴 하지만, 거추장스러운 걸 벗어던지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연화는 수많은 관중을 상대로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리고는, 잠시금 쥐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치마를 뜯어내 속에서 덜렁대는 얇은 천 자락들을 벗어던졌다.
아예 한술 더 떠, 다리 옆부분도 찢어버렸다.
안에 입은 달라붙는 검은 속바지 한 장이 얼핏 보일 듯 말 듯 하는 것에 관중들이 동요하며 수군거렸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시작하겠습니다.”
그녀는 검을 가슴 앞에 오도록 쥐고는, 검집에서 뽑아냈다.
뽑아 든 검집이 무대 한구석에 늘어지듯 굴러떨어지는 사이, 그녀는 다시금 손을 뻗어 도신을 한 차례 훑듯이 매만졌다.
그러자, 이내 화려한 봄꽃 같은 빛깔의 불꽃이 은은하게 날을 감싸듯 타올랐다.
처음 보는 독특한 능력 탓에, 관중들은 수군거림을 멈추고 모두 입을 모아 옅은 환호를 토해냈다.
연화는 과거의 수백 번 췄던 그 춤을 다시금 세상에 선보였다.
절도 있는 동작에서 뻗어 나오는 우아한 선. 위엄 있는 기세에서 자라나는 고결함.
별의 역노를 잠재우기 위한 춤.
용의 힘,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부작용과 업의 고통을 진정시키기 위한 무녀의 춤.
백 년 전, 맥이 끊어져 세상에 잊힌 그 춤이 세월을 넘어 다시금 비무제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관중들은 모두 그 기백에 압도된 듯, 환호를 보내는 것도 잊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연화가 홍련검무의 마지막 동작을 취하고도 한참 후에야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성을 쏟아냈다.
“후우…….”
홍염의 힘을 유지하느라 저절로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다.
연화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흐음.”
그녀는 쥐고 있던 부채로 우아하게 입가를 가린 채, 연신 손가락을 튕겼다.
“미르 님. 혹시……, 뭔가 불편하신 점이라도?”
평가위원 중 한 명이 평소와 다른 그녀의 행동에 조심스레 목소리를 울렸다.
미르라고 불린 존재는 여상스러운, 아니 그보다 더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 반대란다.”
적단룡─미르. 비무제의 총책임자이자, 단화 거리의 주인.
그녀는 칭호와 같은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을 한 차례 훑어 내리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아직 순번이 조금 남았는…….”
“더 볼 필요 없지 않니?”
담백하게 의견을 묵살하는 고고한 미소에 평가위원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뒷번호야 작년에도 본 애들이잖니. 그 아이들이 새로운 걸 준비했다고 생각하긴 어려운데?”
“그건…….”
“사람들이 기대했을 비무제를 온전히 즐기지 못하도록 하게 된 건,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이건 내가 주관하는 축제야. 그러니 내 마음대로 해도 문제……, 없지?”
“……맞습니다.”
“그럼, 그런 거로 알고. 당장 저 춤을 춘 아이를 바로 은밀하게 데려오도록 해. 난 단류궁에서 기다릴 테니까~”
“알겠습니다, 미르 님.”
미르는 청아한 굽 소리를 울리며 비무제의 무대에서 벗어났다.
‘홍염의 능력에 홍련검무라. 잊히다 못해 대가 끊겨 아예 세상에서 지워진 두 가지를 한꺼번에 갖고 나온 저 애는 대체 뭔지.’
꼭, 알아봐야겠어.
연화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다시금 천막으로 돌아왔다.
솔직히 이 정도로 예선을 뒤집어 놨으면, 본선은 자동으로 올라가겠지? 홍련검무를 선보였으니 다음에는 앵화접무를 보이면 어떻게든…….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다음에 보일 춤을 고르고 있는데, 뜻밖의 소식이 귀에 들어왔다.
“단화제의 가장 큰 행사인 비무제를 기대해주신 여러분! 송구하오나, 올해의 비무제는 개최자인 미르 님의 뜻에 따라 예선에서 우승자를 뽑게 되었습니다.”
관중들의 야유와도 같은 아쉬운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연화는 무심한 척 검집에 매달린 술 장식을 매만지면서, 귀를 쫑긋 세워 뒷이야기를 들었다.
“결과에 대해서는 이번만큼은 철저히 비밀을 보장해달라는 미르 님의 말씀이 있었던 만큼, 여러분도 협조해주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지금껏 자리를 지켜주신 분들께는 사죄와 감사의 의미로…….”
천막에 남아있던 아이들은 모두 의미심장한 눈길로 연화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연화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귀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그때, 천막 안으로 몇 명의 사람이 들어왔다.
“모두 수고했어. 결과에 관해서는 며칠 후, 사람을 보낼 테니 그때까지 다들 기다려주면 좋겠는데……. 다들 괜찮을까?”
그 말에 다시금 아이들의 눈망울에 희망이 피어올랐다. 아직 가능성이 있다는, 그런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아이들을 통솔해 한 명씩 천막 밖으로 내보냈다.
이제 천막 안에는 연화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태연하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순진한 표정으로 다시금 천막 안으로 들어온 이들을 향해 물었다.
“저도 돌아가면 되나요?”
“……아니.”
한 명이 그렇게 답하고는, 곧 다른 이를 향해 눈짓했다. 신호를 받은 이는 천막의 문을 단단히 봉했다.
연화의 근처에 서 있던 사람이, 그녀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잘 들어, 얘야. 네가 바로……, 미르 님이 직접 지목한 이번 비무제의 우승자야.”
연화는 일이 너무 술술 풀려서 쾌재를 부르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고는 잘 모르겠다는 듯,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침묵으로 답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놀랐을 거로 생각해. 외지에서 올라와 이렇게 우승할 거라곤 너도 생각하지 못했을 테고.”
그 말에 연화는 당황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무래도 특례가 된 만큼, 공식적으로 네 우승을 축하할 수는 없는 건에 대해선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그, 그건 괜찮아요…….”
“그래? 장하구나. 곧, 널 단류궁으로 데려갈 사람들이 올 거야. 본래대로라면 화려하게 데려가야 하지만…….”
“비밀스러워야 하니까, 그렇지 않다는 거죠? 이해했어요.”
짐짓 어른스럽게 답하는 연화의 모습에 두 사람은 그제야 안심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연화는 그 후 천막 안에서 가볍게 화장하고, 좀 더 세련된 옷으로 갈아입혀졌다.
본판이 썩 나쁘지 않았던 탓에 약간의 손길만으로 ‘아가씨’처럼 꾸며진 연화는, 두 명의 호위와 함께 궁으로 향했다.
얼핏 보기엔, 잘 사는 아가씨가 궁 근처로 놀러 가는 것으로 보였다. 심지어 비무제에서 봤던 무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행색이었으니 더욱 의심을 살 일이 없었다.
‘…아, 저 가게에서 파는 사과 사탕 먹고 싶다.’
여유로운 잡생각도 하면서 걸으니, 생각보다 궁에 금방 도착했다.
호위로 따라온 두 사람은 자신들은 여기까지라며 가벼운 목례를 하고 행운을 빌어주었다.
연화는 조금이지만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단류궁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단아한 붉은 빛으로 꾸며진 풍성한 정원. 화려하고도 풍요로운 대지의 은혜를 오롯이 담아놓은 것만 같은 정경이었다.
그 호화롭고 다채로운 경치에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자니, 기품이 느껴지면서도 통통 튀는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꾸며놓으니, 더 닮은 것 같네.”
비웃음도, 그 어떤 뜻도 담기지 않은 담담한 말에 연화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무슨 조화를 부려놓은 걸까?”
그녀는 천천히 계단에서 내려와 연화의 곁에 섰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연화의 턱 끝을 붙잡아 올려 강제로 시선을 맞추게 했다.
“잘 모르겠으니, 설명 좀 해줘야겠는데.”
용 특유의 세로로 길게 찢어진 뱀과 같은 동공의 매서운 눈빛이 사정없이 연화에게 내리꽂혔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것만으로 기절했을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미르 님.”
“……오랜만? 난 너 같은 애 처음 보는데?”
“어라, 벌써 연화를 잊으면 섭섭한데요.”
“……어딜 그 되먹지 못한 입으로 함부로 그 이름을 입에 담아.”
꾸욱.
미르의 연화의 턱 끝을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그녀의 등 뒤로 살기와도 같은 기백이 흘러나왔다.
“……음,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안 믿으실 거죠?”
“그런 일은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어. 본 적도 없고. 그러니 믿을 수 없지.”
“하지만, 홍염의 능력을 눈앞에서 보셨잖아요?”
“…….”
연화는 손가락을 한번 가볍게 튕겼다. 다시금 그녀의 말을 입증하듯 세 개의 불꽃 덩어리가 주변에 도깨비불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침착하게 좀 더 진솔한 얘기를 나누는 것 같은데.”
“…….”
미르는 칫, 하고 혀를 한 번 차고는 이내 연화를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녀의 말에 동의는 하는 모양이었다.
붉은 용은 앞장서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연화는 한 차례 큰 고비는 넘겼다는 생각에 깊은 숨을 내뱉은 뒤, 미르의 뒤를 따랐다.
5화
“자, 그래서…….”
미르는 쥐고 있던 부채를 우아하게 펼쳐 들어 제 입가를 가린 채 가라앉은 눈빛으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감히 너 따위가 홍련의 무녀에게만 계승되는 홍련검무를 알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홍염의 능력을 다룰 수 있게 됐는지부터 들어봐야겠구나.”
“어차피 제가 드릴 수 있는 답은 아까와 같을 테지만……. 음, 제가 조금 두서없이 얘기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하렴. 어차피 지금도 믿기 어려운 것투성이니까.”
“그럼…….”
연화는 자세를 고쳐 앉고, 헛기침하여 목소리를 정돈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죽었으리라 생각했던 제가 눈을 떴을 때, 저는 이 ‘무영’이라는 소녀의 몸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얘기하며 제 손을 가슴께에 얹어 보였다.
“하지만 환생…, 그것도 전생의 기억을 지닌 채로 남의 몸에 끼어들 듯 다시 태어났다는 사례는 초연국의 무수한 전설에조차 등장하지 않는 일이죠.”
“그렇지. 감히 긴 세월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는 나조차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일이니까.”
“뭐, 신기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어요. 다른 이의 몸에서 태어난다면 겪을 기억의 혼선이나 이질감 따위의 문제도 없더군요. 마치 저를 위해 맞춰진 몸처럼….”
“…….”
“홍염의 능력은 본디 혼에 각인되는 것. 만약 혼 자체가 모종의 이유로 옮겨진 것이라면 능력을 사용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고, 다행히 그 추측은 맞아떨어졌죠.”
“……그렇군.”
미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게 잠시 생각에 빠진 듯하던 그녀는 이내 시선을 연화에게로 맞췄다. 그에 맞춰 연화는 다시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이후로는, 제가 있던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거처가 있는 용이 미르님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이곳에 왔을 뿐입니다. 단화제가 열리는 시기인 것까진 몰랐어요.”
내내 묵묵히 연화의 이야기를 듣던 미르가 연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채를 탁 소리가 나도록 접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을빛이 비쳐 들어오는 창가 근처로 천천히 다가선 미르는 이내 붉은 머리카락을 고정하고 있던 비녀를 빼내어 손에 쥐었다.
“네가 말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전부 믿긴 어렵지만, 사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단다.”
붉은 용은 그렇게 말하며 비녀를 공중으로 가볍게 던져올려 다시 낚아챘다.
“그 몸에서 눈을 떴을 때, 맞춰진 몸처럼 이질감도 불편함도 없었다고 했지.”
“……그런데요.”
“설명하기 복잡하긴 한데, 떠돌던 네 혼이 정착하기 쉬운 애초부터 비어있는 인형 같은 존재……, 그것도, 네 혼과 공명도가 상당히 높은 그런 몸체를 미리 준비시켜두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란다.”
“하지만, 그럼 시공간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술법이 되어야 할 텐데요. 제가 죽은 시점으로부터 지금은 백 년이나 지났으니까요.”
“맞아. 하지만 초연국에는 모든 불가능을 가능케하는 기적의 성물이 있잖니?”
“……홍련?”
“그래. 마지막으로 홍련을 회수한 건 영감이었어. 공명정대한 그가 극도로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면, 사적으로 그 힘을 운용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니까 말이야.”
“……본래 홍련은 인간에게만 허용된 힘이지만, 신수에도 그 권한의 일부가 있으니까.”
연화는 두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어휴, 이거 얘기하다 보니 완전히 너를 연화 아가씨 취급한 채로 얘기해버렸잖니…….”
“어라, 인정하셔서 이런 이야기를 하신 줄 알았는데요.”
“아직 내가 널 연화 아가씨로 인정하려면 멀었거든?”
미르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한번 손등으로 가볍게 쓸 듯이 훑어내리며 새침하게 대꾸했다.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지만, 상당히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이긴 하네요.”
연화는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어깨를 으쓱하며 대화 주제를 다시 돌렸다.
“그래, 지금으로서는 영감을 찾아가 진위를 따질 수도 없어. 그랬다간 나도 목이 붙어있을지 장담하기 어렵거든.”
연화는 대체 그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난 건지,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미르가 자신에게 그것까지 소상히 알려줄 것 같지 않았다.
“뭐, 이 얘긴 잠시 묻어두기로 하자. ……그래서, 네가 진짜 연화 아가씨라면 굳이 홍련검무가 아닌 일반적인 검무를 췄어도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었을 텐데.”
“……홍련검무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관심을 두시지 않았겠죠.”
“훗…, 그건 그렇네. 사실 네가 별 볼 일 없는 그냥 무영이라는 꼬맹이였다면, 내 궁에 초대도 하지 않았을 거야.”
…어쭈, 얼추 짐작하고 있는 마당에 그렇게 심술을 부렸다 이거지. 연화는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뚱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그래도, 아직 완전히 믿긴 어려운 얘기야. 하지만, 이렇게 얘기 나눠보니까 아가씨일 거라는 생각이 더 굳건해졌어.”
“왜요?”
“말씨가 완전히 내가 아는 아가씨 그대로거든.”
“그거야, 제가 본인이니까 그렇겠죠…….”
“이렇게 말투에 따라오는 미세한 표정 변화까지 똑같으니 믿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마음이 기운다니깐!”
“그걸 세상 사람들은 보통…….”
“아, 아. 잔소리는 싫어! 알았어, 알았다고.”
미르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두 귀를 막는 척했다.
“뭐, 다 빼놓고 봐도 말이야. 홍염의 능력을 곁들인 홍련검무를 그렇게 배짱 있게 출 사람은 내가 알기론 예나 지금이나 한 사람밖에 없긴 했어.”
“……그래서, 오랜만에 절 놀려본 소감은?”
“지~인짜 재밌었어! 사실 좀 더 놀리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되네. 역시 난 아가씨를 너무 사랑하나 봐!”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안 믿네? 난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줄 수 있는데도?”
“뭐든? 그럼 제가 뭘 물어보든 답해줄 수 있어요?”
“오! 그럼, 당연하지. 답할 수 있는 거라면 답해줄게!”
미르는 상쾌한 목소리로 그렇게 답하고는 창가에 기댄 채 연화를 바라보았다.
연화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짐짓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째서, 무녀와 관련된 전승이 잘못 계승되어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는지, 신룡들은 왜 그 사실을 바로잡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듣고 싶어요.”
미르는 연화의 그 질문에 능글맞게 생글생글 웃던 미소를 얼굴에서 싹 걷어냈다.
그리고는 창가에 어두운 천을 드리우고는 다소 목소리를 낮춰 무겁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건.”
“……급히 보고할 것이라. 더는 속세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얘기했을 터인데. 아니면, 다시 한번 더 내가 재앙이 되길 바라는 게냐.”
“아, 아닙니다!”
“목소리를 듣는 것도 짜증 나는군. ……거기 두고 가.”
전령은 자신에게 떨어진 노골적인 축객령에 황급히 대답하고는 급하게 물러났다.
물러나는 전령의 낯빛이 잔뜩 겁에 질려 새파래져 있었기에 상당히 불쌍해 보였지만, 아무도 그를 위로하는 이는 없었다.
검보랏빛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존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한 걸음으로 전령이 종이 한 장을 놓고 간 탁상 근처로 향했다.
팔락.
그는 천천히 종이에 적혀진 내용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호오.”
그에게 전달된 서신은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모든 내용을 읽은 그는 이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 종이를 불태웠다.
“무녀의 계승자라…….”
그의 눈동자가 예사롭지 않게 빛났다.
또 그런 사칭범이 나타났다는 것이 통탄스러웠다. 진작에 그런 존재의 싹들을 전부 잘라냈을 터인데.
그는 잿더미가 되어버린 종이를 한참 바라봤다.
그로부터 벌써 백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결코 짧은 건 아니었으나, 무언가를 기다리는 처지에선 영겁처럼 느껴질 시간.
‘이번에는……, 너일까.’
그는 잿더미마저 완전히 불태워 없애버리고는 눈을 감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폭정과 하나린의 사실 왜곡이라.”
“변명으로밖에 안 들리겠지만……, 영감이 그렇게 변하고 초연국의 정세를 안정시키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후자는 신경을 쓰지 못했어.”
“……그리고, 어느새 그게 당연한 진실처럼 되어버려서 수습하기도 어려워졌다?”
“아무래도. 그 마귀할멈, 능력은 없어도 통솔하는 능력 하나는 끝내주니까 말이지. 그래도 명색이 같은 신룡인데 내 말은 쥐뿔도 안 먹히더라. ……미안.”
“흠…….”
연화는 고민하듯 턱가를 어루만졌다.
“딱히 미르님이 사과하실 일은 아니죠. 중요한 건 두 신룡 모두 어떤 동기로 그런 일을 했느냐인데…….”
“일단 말해두지만, 난 모른다?”
“별로 기대 안 했어요, 그건.”
“……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거 아냐? 그래서, 어쩔 거야? 직접 묻기라도 하게?”
“언젠가 그래야죠.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에요.”
“흐응? 그럼 지금은 뭘 할 생각이지?”
미르는 부채 끝으로 톡, 톡, 뒷목을 두드리며 되물었다.
“무녀의 전승을 올바르게 되돌릴 겁니다. 최종적으로 제가 바라는 건, 무녀의 재림이죠.”
“호오……, 무녀의 부활을 꿈꾸고 계시다?”
연화는 말없이 또렷하게 미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르는 그 답에,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쿡쿡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웃음을 참을 수 없었는지 제 배를 움켜잡고 소리높여 깔깔 웃었다.
“으하하, 말도 안 돼! 정말 야망 하나 끝내주는 게 진짜 아가씨답네!”
“……욕이에요, 칭찬이에요?”
“칭찬이지, 당연히! 아무튼, 그래. 그렇단 말이지…….”
미르는 무척이나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았다는 특유의 표정을 지으며 연화를 향해 손가락을 쭉 뻗었다.
“그 원대하게 재밌어 보이는 계획에 이 몸도 친히 참가하지!”
“제가 연화라는 걸 믿지 않으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윽, 그건…, 그렇지만 재밌어 보이는 걸……. 그리고, 네가 진짜 연화 아가씨가 아니라면,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끄는 건 안 됐을 거라고.”
“저야 믿어주시면 감사하긴 합니다만.”
“그럼 그냥 고마움을 만끽하면 되잖아!”
“……하아, 그래요. 그런 거로 해요.”
연화는 대놓고 노골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 이것저것 연화임을 입증하기 위해 준비했는데, 이렇게 대화만으로 풀릴 줄 알았으면 그렇게 고생하며 연습하지 말걸─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맞다.”
한숨을 내쉬던 그녀가 갑작스레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손뼉을 한번 치며 미르를 바라보았다.
“응, 왜?”
“저, 이래 보여도 비무제 우승자거든요? 설마 당신을 독대한다는 걸로 상품을 대체할 생각은 아니시겠죠?”
“……허. 알았다, 알았어. 특별히 내가 지목한 우승자니까, 그에 걸맞은 상품을 줘야지.”
연화는 사람 좋은 미소를 만면에 띄운 채 미르가 자신에게 하사할 상품을 기다렸다.
아무리 그래도 받을 건 받아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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