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힐] 사랑의 발명 4
초고 끗낫다~!
예현이 힐데의 사랑을 독차지 한 것은 당연한 수순처럼 보였다.
관심을 따라 간 사랑은 예현을 향해 집중되었다. 그렇다고 다른 품 안의 인간들을 사랑하지 않는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힐데는 다정했고, 공평하게 사랑을 나눠주었다. 사람들은 몇달간 이어진 사랑공세에 익숙해져서 이젠 힐데가 나를? 하는 착각을 하는 일은 없었다. 특히나 한 사람에게 쏠리는 사랑을 목격하고 난 다음에라면야, 착각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통상 18개월에서 30개월 가량의 유통기한을 가진 사랑이 흘러가고 있었다.
예현은 느릿하지만 확고하고 간지러운 힐데의 사랑에 온 몸이 젖어가는것을 느꼈다.
감정 전이에 대해 설명할때나, 추행당했다고 할 때의 반응들은 힐데가 성적으로 무던하고, 더디고, 수줍음이 많은 성향인걸 알 수 있게 했다. 그가 직접 신전출신이라고 소리쳤을 정도였으니 알 만 했다. 연애에 대해서도 세상의 온갖 부끄러움으로 무장한 그는 이마에 닿은 입술 외엔 다른 스킨십은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스킨십에 대해선 예현이 죄책감에 닿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양했다.
강 주가 그렇듯 사람을 사랑스럽고 다정하게 바라볼 줄도 알았고, 신사적이기도 한 힐데는 정중하게 사랑을 말 할 줄 아는 정적인 표현을 하는 이였다. 그러면서도 이탈리안인 릭이 어이쿠, 하고 반응 할 만큼 간지러운 말을 덤덤하게 내뱉기도 하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사랑을 속삭일 줄 아는 사람이라니, 예현은 힐데가 보수적이길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초반엔 연구원들이 꽤 많이 희생당했던걸 떠올린 예현은 쓰려오는 속을 손으로 더듬었다. 기사단장을 역임했던지라 귀족들의 예법에도 능숙한 힐데는 상대를 '특별'하게 여기는데에 도가 텄다.
'영애들을 숱하게 모시긴 했죠.'
심드렁하게 말하면서도 예쁨을 잔뜩 받아서 기분 좋은 티를 내는 이고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 대장 짱이지? 하는 어린 애 같기도 했다.
상대를 유일한 것 처럼 대했다. 네가 특별하다고 끊임없이 행동으로 보였다.
대화할때엔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집중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맞췄다. 그 눈과 태도엔 온통 당신밖에 없다는 말을 담고 있었다. 연구원들은 그런 태도에 약했고, 약의 효과라는걸 알면서도 설렜다며 손사레를 쳤다. 다행히 배저들은 임무때문에 흩어져있거나, 힐데의 사랑을 받기엔 역부족인 인간들이 많았기에 힐데는 무사히 임무를 나갈 수 있었다. 힐데의 품 안에 든 사람들도 이렇게 사람이 달라질 줄 몰랐다며 입을 대곤 했다.
그런데 보수적이라니. 수줍음이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조금만 더 개방적이었다면 강 주 못지 않은 난봉꾼으로 예현의 위염에 보탬이 됐을 생각을 하니 위가 조여오는 듯 했다.
"예현?"
다정함을 가득 감은 눈동자가 예현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힐데는 저가 아끼는 사람들을 곧장 이렇게 '바라보곤 했다.' 예현은 항상 그 시선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어디 아파?"
걱정을 함빡 담은 시선에 무너진 마음을 고쳐 쥔 예현이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당신 생각 중이었어요."
웃으며 말하자, 힐데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아픈게 아니어서 다행이다…."
대체로 솔직하게 말해주고 있는 힐데는 안심이라는 듯 발갛게 달아오른 뒷목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예현은 그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 손이 얼마나 따뜻한지 알고 나니 항상 맞잡고 싶었다. 그래서 빤히 보는 버릇이 생겼는데, 그럴때마다 힐데는 이 눈길이 부끄러운지 뺨과 귀를 붉게 물들이고 어쩔줄 몰라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전혀요. 오늘도 멋진걸요."
"예현도, 멋있어."
버벅이고 부끄러워 하면서도 최대한 감정을 전달하려 하는 힐데가 좋았다. 예쁘다는 칭찬을 주로 듣는 예현은 멋지다고 굳이 표현해주는 힐데가 좋았다. 아니, 사실은 갖가지 이유로 힐데가 좋았다….
심지어는 타인을 사랑하는 힐데도 좋았다. 그가 평소에 선 안으로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현이 정말로 좋아하는 점은,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향해 애정을 드러내는것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예현을 헷갈리게 하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사랑에 한 가지 종류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있으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들지 않을까 싶었으나, 그 구분을 명확하게 표현 해 분 힐데가 좋았다. 예현을 대할 땐 좀 더 신중해지는 점이나, 조심스러워하는 점, 친근하게 굴면서도 오히려 정중한 부분까지. 가끔은 아미가 말했던 것처럼 자기가 예현을 낳은 것 처럼 애정어린 눈으로 보고, 지키고 싶어하고 돌보고 싶어했다. 예현은 저에게 부족했던 모든 종류의 사랑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예현은 참혹한 기분을 느꼈다.
레이라는 사람을 떠나보낼 때의 당신이 얼마나 슬펐을까.
그리고 이렇게 나를 사랑하는 당신을 기만하는 나는.
이 종교같은 사랑을 하는 당신을 기만하는 내가, 이대로 안주하고 있어도 괜찮을까? 당신에게 고통을 준 인간인데도?
예현은 더이상 힐데는 배신할 수 없었다.
그를 배신 한 존재가 너무도 많았으므로….
이야기를 하기로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힐데를 잘 앉혀두고, 따뜻한 차와 그가 좋아하는 다과를 차린 곳에서 말해야지. 춥지도, 덥지도 않을 때, 식후 두세시간 후면 괜찮을까? 그가 놀라더라도 많이 고통스럽지 않도록….
고민하던 예현은 어느날 힐데와 티타임을 갖게 되었을 때, 어쩐지 지금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힐데."
"응?"
"할 말이… 해야 할 말이 있어요."
"무슨 말이길래 그렇게 긴장해."
짧게 웃은 힐데가 듣겠다는 듯 의자를 당기고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였다.
원로들 앞에서는 오히려 들을 기대고 느른하게 취하던 태도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이겠지 싶었다. 그리고 더는 저 모습을 보지 못 할 까봐 두려웠다.
"연구동에서, 개발 중이던 약이 있었어요."
사랑의 묘약.
힐데는 조금 아연한 얼굴을 했다. 이야기를 듣던 그는 이내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예현이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괜찮다며, 계속 말하라고 배려해 주었다.
"그래서, 그 묘약이 정말 성공했다고?"
"…네. 힐데에게 사용 후, 효과를 보였고, 인권 침해를 사유로 해당 실험은 곧바로 폐기처분 했습니다만…."
"내가 먹은 게 있구나."
"해독제를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닌데, 폐기가 빨라서 검증을 못했으니 사용하긴 어려울겁니다."
"…해독을 못 한 상태로…. 언제부터… …."
힐데는 말이 없었다. 짐작이 가능했기 때문이이라.
예현은 처벌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앉아 있었다. 두 손을 모아잡고, 고개를 조금 숙였다. 입술은 말라갔고, 침묵은 길어졌다. 힐데는 가만히 관자놀이를 문지르다가 예현을 보았다.
앞으로 기울인 몸을 물려 의자에 기대자 끼익, 하는 소리가 났다. 예현은 그 소리가 어떤 종말을 이야기하는 소리인 양 흠칫 놀랐다. 힐데는 그런 예현을 잠시 보더니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물었다.
"약의 유지기간은 어떻게 돼?"
"호르몬이 진정되기까지는 18개월에서 30개월 가량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30개월을 채 못 갈거라고…."
"그럼 30개월은 아닐거고…. 차이가 너무 큰데."
"...윤이, 말 하라고, 약물 효과인걸 말 해야 한다고...."
"… …."
"…비겁한 선택을 했다고…."
"…그사람은 말을 골라서 할 필요가 있어."
힐데는 상냥하고 공감을 잘 해 주는 사람이었지만 아닌 부분은 아니라고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 부분은 명백한 예현의 잘못이었다. 그럼에도 예현은 입술을 말아물었다.
"내 짐작으론 치료약은 없고, 이러기 시작한 건 여섯달쯤 됐어. 맞나?"
"맞아요."
"한참 남았네."
한숨같은 말에 예현은 실없이 여섯달 동안 우리가 뽀뽀도 안 한 이유가 있다고요, 같은 생각을 했다. 멀쩡한 성인-혹은 늙은-남자 둘이 연애를 하는데 여섯 달 동안 한 것이 손잡기라니.
"쑥맥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배려해준거였구나."
"힐데가 싫어할수도 있잖아요...."
힐데가 짧게 웃었다. 둘다 갖은 생각으로 서로를 위하다가 졸지에 손만 잡아본 사이가 됐다는 게 우스운 듯 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더니 이내 휴대전화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하기 시작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뮐른."
"헉. 힐데...?"
[뭐야.]
"사랑의 묘약 기억 하십니까?"
[아, 그거.]
힐데는 입가로 검지손가락을 대곤 전화를 스피커로 돌렸다.
"그거 지속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 해독약이나 해독 방법이 있는지 여쭤보려고 연락드렸습니다."
[그거 미완성본 가져가지 않았나?]
"미완성이요?"
[폐기 명령 내려와서 처분하려고 보니까 완성본이던데. 미완성본은 기간이 짧아. 반년정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한 번 들러.]
"수고해, 뮐른!"
예현이 황급히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뮐른과 개인적으로 연락도 합니까?"
다급해서 군대식 말투가 나온 예현을 보곤 힐데가 가볍게 웃었다. 뮐른의 공포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원래 안하는데 급하니까 했어. 이런건 교차검증 해야하니까."
그는 휴대전화를 톡톡 두드리더니 이내 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윤. 사랑의 묘약, 알고 있습니까?"
[벌써 약빨 떨어질 때가 됐나? 미완성본이란, 쯧.]
"윤!"
[뭐.]
"그런 말 없었잖아!"
[나도 몰랐어. 폐기할 때 보니까 어떤 덜떨어진 놈이 미완성본 가져갔더라. 내가 얘길 안했던가?]
미안하게 됐다. 라고 말하는 윤의 목소리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것 같았다.
"몰라. 됐어. 끊어!"
[근데 너네 진짜 손만 잡....]
뚝 끊어진 전화는 예현의 손에서 침묵했다.
"딱 반년째네."
"… …."
"조금만 기다려 보면 알 수 있겠다. 그치?"
힐데는 가볍게 휴대전화를 가져가서 달력 어플을 켜더니 달을 넘기며 헤아리다가 이번달을 가리켰다. 꼭 여섯 달이었다.
"호르몬은 생각보다 정확하니까 날짜만 정확하다면 알 수 있을거야."
"…맞아요."
여섯달째 날은 사흘도 안 남았다. 그리고 예현은 그걸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힐데가 원하는 것을 거절하는 방법을, 예현은 알지 못했다.
"그럼 지금은… 예현도 혼란스러운 것 같은데."
시간을 좀 둘까?
청천벽력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힐데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예현은 양 손을 꼭 쥐곤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 속여왔으니 남은 시간동안 힐데의 마음도 정리가 필요할거고, 이후에 모든 환상이 깨지고 나면 또다른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몹시 혼란스러울테고, 어쩌면 예현을 미워할수도 있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인간들에게 신물이 나 그들을 버리려고 할지도 모른다….
힐데는 가만히 예현을 손을 보다가 그 위에 손을 올렸다. 온기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토록 닿고싶어하던 손인데도, 반갑지 않았다. 예현은 따뜻한 손 아래에서 가만히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거리를 두게 됐다.
임무를 갈 때엔 사나흘쯤은 우습게 떨어져 있는데도 요며칠이 그보다 더 외로웠다.
윤과 아미가 있는데도 외로움이 가시질 않았다.
힐데의 행선지나 상태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배저인 한 예현이 상관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곁에 없다는 사실 하나만이 사무쳤다.
힐데의 연락은 그들이 그렇게 시간을 갖기로 한 지 닷새째에 왔다.
"연락이 늦었지. 미안해. 확신이 필요했어."
목을 만지작거리면서 어정쩡하게 선 힐데가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사과가 이어지는 동안 예현은 힐데의 손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 손의 마지막 온기를 기억한다.
저 손을… 다시 한 번 더 잡고 싶었다.
그 순간, 예현의 얼굴을 향해 손이 다가왔다. 예현은 저도 모르게 반 걸음 다가가 손바닥에 얼굴을 기댔다. 양손에 폭 들어간 말랑한 뺨을 엄지로 가만히 쓸어본 힐데가 이내, 고개를 조금 틀어 예현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췄다.
쪽소리도 나지 않는 가벼운 인맞춤이었다. 바람이 분 것도 같았다. 그렇게 떨어진 입술을 쫓아 본능처럼 목을 조금 뺐던 예현은 멍하니 있다가 곧 번개를 맞은 듯 놀란 눈으로 힐데를 바라보았다.
"이게 내 대답."
희게 웃은 힐데가 이어서 말했다. 그도 부끄러운지 뺨이 조금 붉었고, 손은 연신 예현의 뺨을 조물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다들 사랑스러워. 여전히 좋고, 지켜주고 싶어."
과거를 더듬듯 아련해지는 눈 너머로 이제는 멀어진 감정이 보이는 듯 했다.
"그리고 좋아하는거랑, 사랑하는거랑은 다른거잖아?"
여전히 네가 사랑스럽고, 이젠 입맞춰주고 싶었어. 우리 너무 오래 손만 잡은 것 같기도 하고?
농담을 곁들인 말에 예현은 구원받은 듯 벅차올랐다.
"제가 잘 할게요, 힐데...."
온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예현의 고백에 힐데가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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