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힐] 날개
펄럭이는 날개는 피에 절어 비행용이라기보다는 무게중심을 잡는데에 주로 쓰였다.
참상은 하늘에서 땅까지 이어졌다.
갈라진 하늘, 무너지는 땅, 폐허가 된 세상에서 존재하는 세번째 전쟁은 그들이 목도한 지독한 현실이었다. 그 전쟁을, 힐데는 승리로 이끌었다. 죽음에 다다른 그를 억지로 살린것은 인간이었다. 우릴 두고 죽지 말라던 말, 우리를 놓지 말라던 말. 힐데가 들었을 그 처절한 말들.
카이로스는 마침내 이른 종전을 만끽할 틈이 없었다. 힐데는 깊은 잠에 빠졌고, 평소엔 숨기고 다니던 날개를 축 늘어트린 채 잠들어서 깨지 않았다.
정돈되지 않은 깃털이 구겨질대로 구겨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빠진 깃털과 새로 난 깃털이 자고 있는 사람 특유의 따뜻한 냄새를 함빡 묻힌 채 방 안에 고여있었다. 블랙배저들은 힐데의 날개를 보고 놀랐다가, 신기해했다가, 지금에 와서는 이따금 들여다보고 어느때보다 서글퍼했다.
그가 날개를 어떻게 관리해왔는지를 기억하기 때문이리라.
날개를 관리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그는 완전히 잠에 빠져든것은 아닌 듯 했다. 이따금 깨는 것 같았다. 식사를 차려두면 식사한 후 그릇을 정리해놓은 흔적이 있었다. 잭은 그걸 보곤 혼자 있고 싶은가보다, 싶었다. 과수면이 왔을수도 있다. 그럴 수 있지. 그럴만한 상황이었다. 그는 가만히 수긍하면서 밀크를 내려주었다. 밀크는 홀짝 내려가 빠르게 힐데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홀로 두면 안 되는 사람이 있다. 힐데는 지금, 거기에 속했다.
"나는 기다릴거야, 힐데."
오랫동안 기다릴거야.
중얼거린 카이로스는 책을 펼쳐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밀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숨소리도 없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리다가, 조용해졌다. 힐데베르트 탈레브. 그는 신전출신이었고, 기사단장이었지만 기도는 하지 않았다. 그의 눈물로 축성을 할 정도로 신실한 자였지만, 잭이 본 이래 그는 신에게 기도올리지 않는 자였다. 그러니 이 침묵은 뭘까,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카일과 레이가 저를 용서하길? 용서하지 않길? 좋은 곳으로 갔길? 무엇도 소용이 없을텐데도.
그걸 알고 있을텐데도.
힐데는 평소에도 기척이 크지 않은 편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질질 끄는 소리가 났다.
카이로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힐데가 머물던 방으로 향했다. 삐우우, 삐우우, 우는 소리가 났다. 혹시나 위협이 될까봐 조심조심 다가갔더니, 힐데가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긴 날개를 축 늘어뜨린채, 발 밑으로 질질 끌고서.
"힐데!"
화들짝 놀란 힐데는 품안의 밀크를 더 꼬옥 안고 몸을 움츠렸다. 날개는 꿈틀거리기만 할 뿐 사라지거나, 건강할 때처럼 세워지지 않았다. 지금 그의 날개는 마치, 어딘가 다친 듯 한 모습이었다.
"그때 날개를 다쳤나? 아파? 가만히 있어보게. 내가 한 번 봐도 될까?"
카이로스는 마물들과 교감하며 그들을 많이 알고 있는 자였다. 당연히 간단한 진료정도는 가능했고, 힐데는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며 몸을 뺐다.
"문제 없어."
그러면서 밀크를 바닥으로 내려주곤 제 날개를 그러모아 안아들었다. 품안에 가득 차는 날개는 힘이 없어보였다. 햇살에 잘 익은 꼬순내가 나던 흰 날개가 제 빛을 잃은 채 푸석푸석한 채 멋대로 안겨있는 모습은 카이로스에겐 충격적이었다.
"안돼겠다. 오늘부터 자네 집 신세좀 지겠어."
"…왜?"
"자네도, 자네 날개도 엉망이야. 알고있잖아."
"… …."
잭은 비장의 한 수를 꺼내들었다.
"원망받고 싶은가?"
죽어버린 황금빛 눈동자가 스륵, 움직여 카이로스에게 고정되었다. 음울하게 가라앉았음에도 찬란한 눈동자는 그 빛을 여전히 잃지 못했다. 그래서 더 찬란했다. 아름다웠다. 시선을 기꺼이 빼앗겼다. 하지만 그는 알고있었다. 진흙탕 속에서 어여쁘게 피어 보인것이 멀쩡할 리 없다는 사실을, 카이로스는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저건 상처다. 그리고 힐데가 죽인, 그의 가족같은 사람들과의 인연.
"카일이 뭐라고 했는지 나는 몰라."
다만 너는 언제나 복수에 성공했지, 힐데베르트 탈레브.
이번에도 역시나. 너는 실패하지 않았다. 이게 복수일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언제나 성공했어.
"혹시, 너를 원망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내가 되겠다."
네 검 끝에 서겠다.
"나를 겨눠. 나는 네게 백번이고 천번이고 말하겠어."
카이로스는 심장이 있을 위치에 손을 얹었다. 바닥에 남겨진 밀크가 삐웅삐웅 울었다. 카이로스의 바지를 타고 올라와 그의 손과 심장 사이로 파고들려고 했다.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보였다.
"살아남으라고."
"… …."
"너는 우리의 마지막 영광이니."
날개를 끌어안은 손끝이 덜덜 떨렸다. 황금색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찡그려지는 눈을 따라 눈물이 이지러졌다. 뺨으로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은 길조차 내지 않고 날개로 떨어져내렸다.
소나기가 오듯, 그렇게 갑작스럽게.
"내가, 어떻게 너를."
"힐데."
"네가 어떻게 나에게…."
날개를 꼬옥 안은 몸이 스르륵 무너졌다. 바닥에 무릎꿇고 날개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거친 숨에 등이 휘청거렸고, 거친 숨이 색색거리며 새어나왔다. 웅크린 몸이 처음 배저가 되었을 때보다 훨씬 더 야위었다.
차라리 원망을 했다면 이토록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힐데베르트 탈레브라는 인간은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았다. 상관없는 타인에게 상처받지 않는 대신, 사랑하는 것들에게 크게 상처받았다. 그는 제 가족같던 이들을 제 손으로 베어내었다. 레이를 벤 것이 저가 아닐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검은, 그 분신같이 소중했던 검을 건넨것은 힐데베르트의 계략이었다. 내가 너를 죽였다. 내가, 직접. 너희를.
내가 기어코 너희 모두를.
"내가 잘못했어, 힐데. 응? 힐데…."
"그러지 마."
"힐데."
"나를 원망하지 마…."
아이처럼 울음이 터진 그는 날개를 놓고 나가온 잭을 끌어안았다.
부러진 것처럼 처진 날개가 제멋대로 뻗었고, 무릎꿇은 채 잭을 안은 손이 볼품없이 떨렸다. 붙잡는 손에는 힘이 없었다. 그 강대한 힘으로 전쟁을 이끌었던 이의 손이 어린 아이의 것 만 못해졌다.
"내가 어떻게 너를 원망하겠어, 힐데."
카이로스는 등을 구부려 힐데의 등을 덮었다.
누구에게 말하는건지 모를 힐데의 허리를 끌어당겨 힐데를 허벅지 위로 끌어올렸다. 날개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힐데는 울고만 있었다. 너는 그러면 안된다는 말을 끓는 듯 내뱉고만 있었다. 온 얼굴이 젖었다. 닦아내는게 의미가 없는 눈물에 손마저 축축했다. 힐데를 완전히 품에 넣은 카이로스가 그를 꼭 안았다. 허리를 당기고, 어깨를 감아 완전히 몸을 밀착했다. 작은 머리를 목덜미에 파묻게 했다. 어린 아이나, 다친 동물들을 꽉 껴안아 주는 것은 네가 혼자가 아니라고, 내가 너를 보호한다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힐데에게는 그의 편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그를 우선할 존재가.
잭은 제가 그런 존재가 되리라 맹세했다.
"나는 너를 원망할 수 없어. 너를 원망한다면, 그건 너를 위한 일일거야. 네 삶을 위해. 하지만 네가 내 원망을 바라지 않는다면, 힐데."
들어봐.
"나는 기꺼이 너를 사랑하겠어."
"카이…?"
"여태 너를 사랑해 왔는데, 이제와서 너를 원망할 수 있을 리 없잖나."
눈물에 일그러진 눈이 목덜미에 비벼졌다. 머리를 들 기력도 없는지 목소리만 숨처럼 새어나왔다.
"카이…."
"그래. 나는 여기있어. 네가 원하듯 완전히 성한 상태는 아닐지라도, 네 눈동자와 같은 황금의 눈동자는 아닐지라도 나는 지금 여기 있어. 네 곁에, 온전히 너의 것이야."
잠시 멈추는가 싶었던 눈물이 다시 퐁퐁 솟사오르는지 목덜미가 축축해졌다.
그의 기사단장은 잘 무너지지 않았다. 견고한 세계수처럼 굳건히 자리에 서서 옳은 선택을 해왔다.
그 결과가 제 가지를 베어내는 절망적인 행태여도 그는 그렇게 했다. 그것이 옳기 때문이다. 인간이 감히 심판자 역할을 하려 한 탓일까? 힐데는 언제나 옳았으나, 언제나 고통스러웠다. 그의 삶은 절망과, 복수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신전이라는 출신, 제국의 신성한 검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흉터로 가득했다. 마침내 고결하기에 그에겐 상처가 너무 많았다.
채 낫지 못한 흉터와 고통에 무딘, 무엇보다 빠른 결단력으로 제 몸마저 잘라낼정도의 판단력은 쉬이 길러진 것이 아니었다.
"힐데. 정말이지 나는 단 한순간도 너를 원망한 적이 없어. 내 심장에 걸고 맹세하지."
그러니 괜찮아. 나는 너를 믿고, 네가 나를 믿어주었으면 좋겠어.
네게도 남은 게 있어. 너와 같은 눈은 아니지만, 타오르는 태양같은 눈동자로 네 곁에 언제까지고 있을 내가 있어. 내 유일한 자랑거리지. 이젠 네것이야. 그 눈으로 항상 너를 볼테니 말이야.
위로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밀크가 힐데와 카이로스의 품 사이에서 한참을 꾸물거리다가 잠들만큼 오래.
그리고 힐데가 잠들었다가, 다시 침대에서 깨어났을 때, 울었던 기억에 수치스러워서 한참을 이불속에서 나오지 않았을 만큼.
카이로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이마를 빨갛게 물들이고 어쩔 줄 몰라 할 만큼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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