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도 봄꽃은 핀다.
GL 단편 (사제×드래곤)
6,504자
23년 3월 경 커미션으로 작업했던 GL 단편입니다.
썸네일 : 신청자분 팬아트
새하얀 융단의 끝자락을 누군가 잡아당긴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거센 눈발이 끊임없이 몰아쳤다. 그 탓에 나뭇결에조차 이미 서리가 내린 지 오래였다. 눈에서 나고 눈에서 자란다는 설녀조차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이 눈보라 속에선 길을 잃을 것이 틀림없었다. 위를 보고 아래를 보아도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그렇기에, 적어도 오늘만큼은 평등하게 쏟아져 내리는 달빛의 은혜를 오롯이 눈만이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고요한 새벽에 누군가 한 꺼풀 더 장막을 친 듯했다.
눈이 떨어지는 소리, 발걸음을 옮기면 나는 특유의 뽀도독 눈 밟는 소리가 너무나 크게 세상에 울렸다. 숨을 내뱉으면 눈밭과 같은 새하얀 숨결이 대기 중으로 흩어졌고, 내쉰 숨결만큼의 차가운 기운이 폐부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이 순백의 적막 속에서도 생명은 박동한다.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아브노바는 달을 좋아했다.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는지, 어쩌다가 좋아하게 되었는지 그런 세세한 계기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는 달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고즈넉한 밤하늘 아래 달빛을 받는 아름다운 그 아이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사실을 자각한 때에는, 이미 달을 관측하는 행위가 성스럽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아이를 바라본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너무나 보고 싶을 때, 그녀의 빈자리가 너무나 허전할 때, 끝없는 고독함에 잠식될 때, 외로울 때……. 그럴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날의 루시아가 떠올랐다. 빛나는 달만큼 가슴 속에 빈곤했던 무언가가 차오르는 기분이 들어, 아브노바는 달이 반짝이는 하늘을 보는 것도 좋아하게 되었다.
적어도 아브노바의 마음속에서 달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북극성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아이도 지금 이 달을 보고 있겠구나, 지금 이 시각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브노바는 그런 생각을 하며 쓰디쓴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문득, 옛 생각이 났다.
그 아이는 자유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빚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몹시도 자유로운 존재였다. 그녀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던 그 날이 떠올랐다.
‘가끔은 일탈도 괜찮지 않아?’
그러나, 그때의 나는 거절했었다. 성휘룡으로서의 의무감과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루시아는 오히려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달래주었다.
‘그럼 내가 당신의 전령이 되어줄게. 어디에 있든, 언제가 되었든. 당신에게 바깥의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종달새가 되어줄게.’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너의 돌아올 곳이 되어주마. 그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네가 나와 계속 함께한다면 좋겠다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어째서 여행을 하는 걸까.
지금 생각해보면 새삼스러운 질문이었다. 루시아는 한자리에 있기보다 여러 곳을 두루 다니며 세상 만물을 온몸으로 느끼기를 즐겼다. 손끝에서 피어나는 진리를 보는 것도, 체감하는 것도. 대자연의 신비를, 자연의 생명력을 몸소 느끼는 것을 좋아했다.
문득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의 한 끄나풀이 손가락 끝에 걸렸다. 자신의 이야기에 감탄사를 흘리며 진지하게 경청해주던 아브노바의 모습이었다. 사계의 한 철마다 만나기에 더욱 그러했을까. 그녀를 보고 있으면 어딘가 포곤포곤해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언제나 숲을 지키는 수호룡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는 그녀에게 새로운 경험을 시켜주고 싶었다. 새로운 걸 보고 듣게 해줌으로써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주고 싶었다.
아브노바는 루시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즐거워했다. 진심으로 즐거워한 것인지, 그러한 티를 내준 것인지까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자신과 함께 있을 때의 그녀는 반짝여 보였다.
신이 있다면 감사 인사를 올리고 싶었다. 아브노바를 만나게 해준 것에 대하여, 그녀와 가까운 관계로 있을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하여…….
여행하며 보는 그 어떤 것보다도 아브노바의 미소, 그녀가 말 한마디 한마디를 듣는 게 훨씬 더 즐거웠다. 그렇기에 가끔은 건방진 생각도 했었다. 드래곤인 그녀에게 인간인 자신이 건넬 수 있는 이야기는 지극히 한정적일 것이 분명함에도, 자신이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이야기에 눈을 빛내는 그녀의 달콤한 미소를 보는 것이 좋았으니까.
루시아는 앞으로도 아브노바가 바란다면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그녀가 즐거워한다면, 그녀가 행복해한다면, 그녀가 기뻐한다면, 그럴 수 있다면.
그러니, 어째서 여행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답의 근원에는 아브노바를 위해서라는 이유가 반드시 들어있을 터였다.
아브노바는 별이었다. 그렇다면 루시아는 언제나 그 별을 보고 집을 찾아오는 여행자라고 할 수 있겠지. 멀리 가더라도 변함없이 별을 보고 별의 곁에 돌아오는 방랑자. 그제야 루시아는 아브노바의 뜻을 알아챘다. 누군가의 돌아올 곳. 자신이 언제든 돌아와도 기꺼이 어색하지 않은 보금자리의 역할을 수행하겠노라고. 새삼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만 그 순수하고 즐거운 여행은 언제까지고 이어지지 못했다.
루시아의 여정은 갑작스레 막을 내렸다.
예고도 없이 자신의 몸에 나타난, 성자의 증표─ 성흔 때문이었다.
루시아가 성자가 된 것과 동시에 세상은 급격히 혼돈에 물들어 갔다. 아니, 이미 급속도로 진행 중인 일에 다급하게 신의 부름을 받았다는 표현이 좀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마왕이라는 존재의 이름으로 펼쳐지는 폭력,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절망이라는 압도적인 감정이 리타비스 대륙을 휘어 감쌌다.
광활한 대지 위에서 꽃피던 곡식과 열매의 은혜는 산산이 부서지고 시들어 풀 한 포기 자라기 어려운 척박한 땅으로 변해갔고, 투명하고 맑은 깊이를 가진 깨끗한 흐름의 강과 호수는 핏빛으로 물들어 혼탁하게 더럽혀져 썩어갔다. 나무에 피어 탐스럽게 익던 과실들은 사정없이 으깨진 채 시체의 육편들과 뒤섞여 굴러다녔다.
파괴, 절망, 파멸, 낙담, 비관.
마이너스의 감정들로 점철된 세계 속에서도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인간’은,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할 수 없었다.
루시아는 강인한 인간이었다.
이전부터 그런 자질이 보인다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하물며 역사 속 성자들과 비교해 봐도 그 힘은 더하면 더했지 절대 꿀리지 않았다.
‘…….’
인간의 욕지거리가 입 안에서 자꾸만 텁텁하게 맴돌았다. 빌어먹을, 너는 왜 그렇게 출중해서 신의 선택을 받게 되었는가.
성자에 대한 이야기는 풍문으로만 들어도 충분했다. 한 치의 거짓 없는 명백한 진실들만이 떠돌아다녔기 때문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나만 알고 있는, 아는 사람들만 아는 보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이름이 수많은 사람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꼴을 보면 자꾸만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묘한 감정이 들끓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솔직한 듯 솔직하지 않은, 남들에게 자신의 본모습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힘들어하고 있어.’
내색하지 않으려는 건 알 수 있었다.
신의 대리자라고 일컬어도 손색이 없는 위치에 있는 만큼 받아왔을 기대의 무게가, 짊어지고 있는 책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아브노바로서는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알게 모르게 한숨을 내뱉는 모습에 더는 주저할 겨를이 없었다.
“내 앞에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이유는……, 그대, 내게 위로를 받고 싶음이렷다?”
“하하, 정말이지……, 당신한테는 숨길 수가 없네요…….”
“오랜만이구나, 루시아.”
평온한 어조로 말을 걸고 있지만, 사실은 조금 화가 나 있었다. 이렇게 될 때까지 제대로 쉬지도 않고 그놈의 사명을 위해 움직였다고 생각하면,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화가 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속에서는 감정들이 뜨겁게 들끓고 있었다. 루시아 또한 다른 인간들과 다를 바 없는 같은 존재인데. 어째서.
그들은 루시아를 어떤 존재로 보고 있는 거지? 인간? 성자? 아니면, 신의 대리인? 아니, 그냥 그녀를 ‘루시아’라는 존재로서 바라보고 있긴 한지. 아브노바는 그렇게 생각하며 루시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지금 제가 품고 있는 이 감정이 그녀에게도 닿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뭐 하는 거예요? 당신답지 않네요.”
그녀의 금발이 오늘따라 유독 귀하고 아름다운 금실처럼 느껴졌다. 루시아의 녹색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짙고 고귀한 색으로 와닿았다.
아브노바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슬퍼 보이면서도 행복해 보였다. 마치,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도 너답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데, 나라고 그러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다고.”
“……그런가요.”
루시아는 아브노바의 손길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그녀의 손길을 받아낼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어루만짐을 즐기던 그녀는 이내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금 고요함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그러나, 지금은 이 적막감이 그들에게 딱 맞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만두면 안 되냐고, 다 버리고 사명으로부터도 도망쳐버리면 안 되겠냐고 묻고 싶어질 테니까.
그리고, 그에 대한 답 또한 아브노바는 이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처음부터 같은 듯 다른 존재였으니까.
아브노바는 달이 좋았다.
언제나 변함없이 아름답게 빛나는 달빛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런 달을 닮은 루시아가 좋았다. 루시아의 한결같음이 사랑스러웠고, 그녀의 강인한 의지를 동경했고, 그렇기에 빛나는 그녀에게 반했다.
그러나 그 달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오직 아브노바의 기억 속에서만 온전했다. 아브노바는 빛을 잃어가는 지금의 달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는 밤하늘의 달을 보는 것을 즐기지 않게 되었다. 그날, 속으로 울음을 삼키던 그녀가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또 허튼 생각을 하고 있겠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면, 월식이 시작되는 것이 보인다.
동시에, 루시아에 대한 걱정이 차올랐다.
완성되지 않았으면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추락하는 너를 보며 항상 하는 생각이었다.
굵은 소금을 통째로 쏟아붓는 마냥 흩날리던 눈보라가 드디어 멎었다. 약간의 진눈깨비가 휘날릴 뿐이었다.
한순간에 세월의 풍파를 맞은 듯, 부서져 가는 낡아버린 신전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채 오직 자신의 무기만을 손에 쥔 루시아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듯했다. 눈이 내리지 않는 맑은 하늘이었다면, 별이 가장 아름답게 빛나고 있을 지점이었다.
그녀는 이미 아브노바가 자신의 코앞에 다다랐음을 알고 있는 듯했다. 아브노바는 그런 그녀를 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루시아.”
눈에 반사되는 빛 때문일까. 평소에도 아름답던 금실 같은 머리카락이 더욱 고귀한 색으로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짙은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아직도 기품을 잃지 않고 빛나고 있었다.
“……종말의 끝에 도저히 너 혼자만 두고 갈 수가 없었느니라.”
아브노바는 먼저 입을 열었다. 루시아라면 분명 어째서 멋대로 돌아왔느냐고 따질 테니까.
“있잖아요…….”
사박사박, 눈 위를 거닐어 그녀의 지근거리에 다다르자 루시아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은 말이에요. 성자 같은 거, 되고 싶지 않았어…….”
제발 이런 때만큼은 울고 싶으면 울어줘. 어째서 너는 이 순간까지도 그렇게 초연하게 웃고 있는 거야.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아. 더는 참지 않아도 괜찮아. ……내 앞이잖아.
“나는 방랑하는 바람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모두의 바람이 되고 말았어…….”
자애롭고 부드러운, 만질 수만 있다면 비단을 만지는 것처럼 기분 좋게 와닿을 것 같은 목소리가 점차 여려졌다. 갈라지고 깨어져, 이제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아브노바는 황급히 루시아를 품에 껴안았다.
지금 이렇게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러니까……, 아브노바는 루시아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완성되지 않았으면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희망이 추락하고, 기대가 멀어지고, 빛이 부서지는, 그런 결말밖에 남지 않은 비극적인 이야기. 가늠할 수 없는 크기를 가진 어둠을 환하게 비출 등불이 꺼지기까지의─ 최후를 담는 이야기.
“좀 더 노바 씨와 같이 있고 싶었어요.”
루시아는 아브노바의 아이스블루의 머리칼 끝에 입을 맞추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도 그녀는 웃어 보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굉장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을 향한 증오, 신을 향한 분노, 루시아를 향한 절망, 루시아를 향한 애정, 루시아를 향한 사랑, 루시아를 향한 후회, 루시아를 향한 안타까움. 그 모든 감정이 뒤엉켜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을 터였다.
그녀의 눈물 자국 위로 새로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브노바의 것이었다. 마치, 루시아가 우는 것처럼 정확히 그 위를 따라 흘러내렸다.
사랑해.
네가 나에게 마음을 열어준 그 순간부터, 너를 사랑하게 되었단다.
널 속박하던 것들이 없었다면 좀 더 빨리 말할 수 있었을까. 이런 결말이 온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는데, 어째서 나는 그러지 못했던 걸까.
루시아는 아브노바의 마지막 눈물을 닦아주며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안녕,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비록 나는 새로운 신이 되어 당신의 곁을 떠나겠지만, 그런데도 언제나 당신의 곁을 지킬 거예요.
새벽빛이 홀로 남은 새하얀 드래곤을 감쌌다.
눈이 멎은 잿빛 하늘은 다음 해가 뜨기를 고대한다.
성휘룡 아브노바는, 이 설원이 초원으로 변할 때까지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사랑했었던 유일한 인간을 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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