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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이해하는 법 (커미션)

2023. 08. 21

마비노기 멀린 드림 커미션

멀린 X 스텔라

 

 

선택은 불쾌하다. 정확히는 무언가를 골라야 하는 행위 그 자체보다 상황 쪽이 그러했다. 얼핏 보아서는 퍽 자비로운 선택지를 내민 듯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니까, 결코 강요가 아님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태도 쪽이. 물론 이 공간은 인간이 아니다. 그러니 태도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다. 허나 여기를 만들고 두 사람을 데려와 가둔 존재는 필경 있을 것이다.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성정이 제법 고약했다. 멀린은 답지 안 하게 미간을 좁혔다. 스텔라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여자는 기이할 만치 조용하고 차분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는다. 그저 하얀 벽이 두 사람의 앞을 굳게 가로막는다. 벽은 마냥 하얗지 않다. 깨끗하지 않다. 아무렇게나 휘갈긴 거대한 글자들이 벽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이 세상에 기억될 자를 골라주세요.

합의가 끝나면 본디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드립니다.

 

벽은 단단하고 문은 보이지도 않는다. 가구도 없다. 이 공간은 방이라기보다는 상자 같았다. 오직 멀린과 스텔라를 넣고 뚜껑을 닫아버린 상자. 상자 외부의 존재가 뚜껑을 열어 둘을 꺼내주지 않는 이상 나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시도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통하지 않았을 뿐이다. 남자도, 여자도 구태여 입에 올리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아주 오래 살았다. 오래 산 사람들은 이상한 일에 자주 휘말리곤 했다. 그래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멀린은 아예 이제 좁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스텔라는 남자를 내려다본다. 시선이 머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얼핏 보기에 여자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겉은, 그랬다. 평범한 인간 축에서도 여자는 약자에 가까운 모습을 취했다. 그러나 여자는 평범과는 거리가 멀었다. 밀레시안이란 그런 종족이었다. 스텔라는 무언가를 먹을 필요도 다음날을 기약하며 억지로 눈을 붙일 필요도 없었다. 그저 그곳에 존재할 뿐. 그러니 생체 시계로 시간을 추측할 수도 없었다.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늘 그런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만 그러했다. 분명 정신이 들고 제법 긴 시간이 지났는데 배도 고프지 않았고 잠이 오지도 않았다. 남자는 문득 생각한다. 스텔라는 늘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시계와 창문이 없는 공간에서 두 사람이 시간을 가늠할 수단은 없었다.

“스텔라.”

“……응.”

이름을 불린 여자는 그 이유를 굳이 찾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지 않는다. 시선의 끝은 벽에 닿아 있다. 의미는 명확하나 의도는 알 수 없는 글귀에. 남자는 말을 지운다. 꺼내지 않는다. 이대로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걸까. 밖으로 나갈 방법은 뻔했다. 벽에 적힌 대로 합의하는 것. 그러나 멀린은 늘 예상외의 존재였다. 남자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그는 타인이 바라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지루했다. 분명 다른 나갈 방법이 있을 것이다. 바깥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지가 그나마 문제였으나 사실 생각해 보면 문제도 아니었다. 까놓고 말하자면 왕성 대마법사로 일하다가 튀어 봤는데도 세상은 그대로였다. 그러니 이렇게 그가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큰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걱정되는 건 스텔라 쪽이었다. 공간이 좁아 눈을 뜨기만 해도 시야에 여자의 모습이 들어찼다. 여자의 머리칼은 마땅한 광원 없이도 반짝거렸다. 후광이라도 있는 사람마냥. 아니다. 어쩌면 실제로 후광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만한 존재였다. 단적으로 말해 이 세계에서 여자보다 강한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강하다면 그냥 탱자탱자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도 될 법한데 여자는 저 스스로를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굳이 엮이지 않을 수 있는 일에 손을 내밀고 애써 고통을 자처한다. 지금까지 곁에서 지켜봤을 때 이유라고 부를 만한 이유는 딱히 없었다. 천성인 것이다. 이 상황 자체에 그닥 별생각이 없는 자신과 다르게 스텔라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구해낼 수 있었으나 구해내지 못한 사람들을 계속 곱씹을 수도 있다. 당연히 그럴 사람이었다. 멀린은 스텔라를 모르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이 밖으로 내보내 주고 싶었다. 이유는 굳이 찾지 않았다. 찾을 필요가 없었다.

“돌아가고 싶지?”

“……”

“말하지 않아도 알아, 네 마음 정도는.”

“……”

두 사람은 여전히 마주 보지 않는다. 누구도 서로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느슨한 대화만이 불안한 열기를 걸치고 느긋하게 흘러갈 뿐이다. 그들이 입을 다물면 정적이 넘실거린다. 손과 발을 적신다. 여자가 결국 고개를 돌린다. 멀린의 눈은 아직 정면을 향해 있다. 하얀 벽을 채운 글씨들은 유독 날카로웠다.

“멀린.”

“왜?”

“기억될 자를 골라 달라는 건, 선택받지 못한 사람은 잊혀진다는 거잖아…….”

“……”

“난 멀린이 잊혀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남자는 그제야 고개를 돌린다. 시선이 얽힌다. 이곳에 존재하는 눈은 모두 푸르다. 스텔라의 표정은 평소보다 배로 진지했다. 여자는 언제나 비슷한 표정을 얼굴에 두르고 있었으나 남자는 그 차이를 모두 알았다. 남자는 여자를 속속들이 안다. 설령 음습한 오만이라고 비웃음을 살지 언정 그는 안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제가 신이라도 된 양 모든 것을 구원하려고 했다. 신이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이긴 했다. 그 뒤에 어떤 고통이 기다리고 있어도 여자는 그 길을 걸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스텔라는 의존하지 않는다. 감내할 뿐. 남자는, 그 여자를 지켜주고 싶었다. 단순한 치기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실제로 그럴 힘이 있었다. 상대가 스텔라가 아니었다면, 충분히 지켜주고도 남았을 터였다. 결코 그가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스텔라, 그건…….”

“응.”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정적이 재차 찾아든다. 스텔라는 애초에 말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아니었고, 멀린은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했다. 어느 쪽이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을 살았다. 기억의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다. 지적 생명체란 편차는 있으나 제법 예민한 존재들이다. 어느 한 사람이 기억하지 못한 사소한 약속이나 대화의 일부분으로 인해 관계가 파탄 날 수 있을 만큼. 그런데 하물며 존재 자체가 걸려 있으면 어떨까. 오래 산 만큼 그들은 많이, 잊혀졌다. 그 횟수가 많다고 해서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서로가 서로를 더 우선할 수밖에 없었다.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들은 일평생 그런 방식으로 살아왔으므로.

“그리고 있잖아.”

“……”

“기억나?”

“뭐?”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너를 지켜주겠다고 맹세했던 거.”

“……”

“기억 안 난다고 할 건 아니지? 나 서운해~”

멀린은 똑바로, 스텔라를 바라보며 웃었다. 여자는 그 웃음을 기억한다. 자신감이 스며 나오는 표정이었다. 그 자신감은, 근거 없는 게 아니었다. 어린 인간의, 치기 어린 맹세 같은 게 아니라 살 만큼 살 사람이 제 생을 걸고 말하는 맹세를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남자가 제게만 이렇게 군다고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히려, 그의 자취가 세계에서 잊혀지는 것을 여자는 피하고 싶었다. 스텔라는 멀린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명백하게 이상한 사람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타인을 지켜주려고 할까. 멀린이 본 스텔라도 그랬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물론 있었으나 어떤 수를 써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었다.

“기억나.”

“그럼 됐고~”

“……”

“그러니까, 네가 잊혀지면 나도 잊혀질 거야. 그런 법이니까.”

“잠깐. 멀린.”

“둘 다 잊혀지는 것보다는, 하나만 잊혀지는 게 낫지 않아?”

멀린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러니까 오늘 저녁 뭐 먹을래. 아니면 우리 같이 양털이나 깎으러 갈까. 그런 분위기로. 스텔라는, 제 손이 떨리기 시작하는 걸 알았다. 손이 떨리는 건 처음이 아니다. 중요한 건 손보다 마음이었다. 그리고 명백하게 시야가 흔들렸다. 이런 적이 처음도 아니고. 아닌데도, 그간의 경험이 겪을 리 없는 주마등마냥 흘러간다. 나를 믿어줬던 사람들. 내가 구하지 못했던 손들. 귀를 멍멍하게 만드는 울음소리……. 그 모든 것 위로, 남자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 아래에 쌓여 있던 것들을 모두 뭉갤 정도로 무겁게.

“나는, 합의 안 할 거야.”

“스텔라.”

“절대, 안 할 거야…….”

여자가 옅게 뇌까렸다. 멀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지킨다는 건 애초에 무엇일까. 나는 널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켜주겠다거나 곁에 있어 주겠다거나 그런 사소하고 치졸한…… 조금은, 자기 만족적인 맹세 같은 게 전부일까. 그래도 괜찮았다. 정말 여기서 스텔라가 밖으로 나가고, 자신이 잊혀진다면 스텔라는 저로 인해 괴로울 일은 없을 테니까.

스텔라는 아주 오래 살았다. 그건 멀린도 마찬가지였으나 스텔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 좋았다. 사실 좋지 않았어도 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구태여 제게 빌지 않았어도 했을 일이었는데도 그들은 자꾸 제 앞에서 도움을 청했다. 여자의 힘을 원하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여자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으나 완벽한 신은 아니었으므로 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스텔라는 돌아오는 원망을 늘 받아들였다. 괴롭긴 해도 저치들이 더 괴로울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런데 저 남자는 왜, 제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을까. 도와달라거나, 힘을 빌려달라거나. 그런 것들. 오히려 멀린은 스텔라와의 관계에서 주는 쪽이었다. 언제까지 이걸 받아도 될까. 날카롭게 가슴을 찌르던 불안이, 이 순간만큼은 잠잠했다.

“그래.”

멀린은, 아주 담담했다. 둘은 고요 속에서 침묵으로 합의했다. 멀린의 운명은 결국 스텔라에게 달린 셈이었고, 스텔라는 절대 그런 일을 할 위인이 아니었다. 배도 고프지 않고 목도 마르지 않고 잠도 오지 않는 기이한 하얀 상자 속에서 버티는 일쯤이야 그들에게 어렵지 않았다. 스텔라도, 멀린도 서로를 잘 알았으나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른 존재란 결국 그런 법이니까. 하지만 그 어떤 제약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서 둘은 비로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쥐게 된다. 세계라고 부르기에도 미묘한, 조각나고 망가진 하얀 방. 존재하는 건 둘 뿐. 여기에서 지내다 보면, 언젠가 네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은 입을 다물고 같은 생각을 한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아 서로는 알지 못할 상념들이 은밀하게 떠돈다. 그들은 각자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딱 좋은 온도. 아무 생각도 존재할 수 없는 공간. 명확하게 있는 건 서로의 존재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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