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T 1

현대AU 게일타브

비밀 다락 by 멍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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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의 중심지에 위치한 문라이즈 아파트는 악랄한 물가를 자랑하는 뉴욕 일대에서 비교적 합리적인 월세를 제시하는 몇 안되는 곳이었다. 최근 재건축으로 멀끔해진 고층 건물의 사이에 껴있는 문라이즈 아파트는 지은 지 30년이 거뜬히 지났으나 리모델링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어 눈에 뜨게 허름한 외관으로 발더스 스트리트의 미관을 해치고 있었다.

로비를 제외하고 한 층에 네 가구, 그러니까 총 4개층 16가구를 수용할 수 있는 문라이즈 아파트에는 평균 체구의 성인 남성이라면 반드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낮고 협소한 크기의 현관문이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우측에는 광고지와 주인 없는 유실물, 빛바랜 우편이 가득 쌓여있는 낡은 우편함이 있었고 좌측에는 한 때 이 아파트에도 관리인이 있었다는 걸 증명하듯이 가벽으로 분리 되어있는 작은 관리실이 있었다. 관리실은 상당히 오랜 기간 방치했다는 증거로, 먼지가 겹겹이 쌓인 책상 위에 누렇게 색이 바랜데다 모서리가 안으로 말린 삭은 서류 서너 장과 이제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 구형 유선 전화기가 있었다. 그밖에 또다른 특징이라면, 불행히도-어쩌면 당연하게도- 이 오래된 아파트에는 엘레베이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최상층에 사는 입주자들은 장을 보는 걸 극도로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이를테면 꼭대기 방에 새로이 입주하게 될 티쉬 예술대학 신입생 오웬 밀러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후우우.”

계단을 오르기 전, 먼저 오웬은 한숨을 한번 길게 내쉬며 각오를 다졌다. 한 손에 20인치 캐리어를 하나씩, 기합과 함께 양손에 힘을 주어 캐리어를 들어 올린 오웬은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그녀가 낡은 계단 위를 오를 때마다 잔뜩 쌓인 먼지가 모래 바람이 이는 것처럼 밑창 아래에서 풀썩거렸다. 그리고 오웬의 뒤를 따라 버터컵이 꼬리를 흔들며 계단을 따라 올랐다. 40파운드가 족히 나가는 캐리어 두개를 동시에 옮기는 건 역시 기행이었을까. 오웬이 결국 2층과 3층 사이의 계단참에서 잠시 캐리어를 내려놓고서 숨을 돌리고 있는 사이,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도와줄까?”

화들짝 놀란 오웬이 뒤를 돌아보자 검은색 가죽 자켓을 입은 여자가 삐딱하게 선 채로 오웬을 보고있었다. 그녀의 가슴께에선 고풍스러운 십자가 목걸이가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오웬이 잠시 넋을 놓고 “어…….” 하는 얼빠진 소리를 내는 동안,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풍선껌이 한 번 부풀어 올랐다가 ‘펑’ 하고 작은 파열음과 함께 터졌다. 오웬이 눈동자를 데록 굴렸다. 이어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

“흠―.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네 캐리어랑 또, 너의 엄청나게 큰 강아지가 이 비좁은 계단을 차지하고 있는 건 알고 있지?”

오웬은 자신이 낑낑대며 계단을 느리게 올라가는 동안 그녀가 그 뒤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는 것을 늦게나마 알아차렸다. 말인 즉슨, 도와주겠다고 할 때 순순히 도움 받으란 뜻이었다.

“미안. 괜찮다면 도와주지 않을래?”

“그래.”

그녀는 그제야 만족하다는 듯이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미세하게 웃고는 오웬이 건넨 왼손의 캐리어를 받아들었다. 버터컵은 참견하듯이 그녀가 받아든 캐리어와 그녀의 바지 밑단을 번갈아가며 킁킁거렸다. 버터컵은 몽골리안 방카르로 60파운드에 육박하는 무시무시한 덩치의 강아지였다. 아무리 강아지를 좋아한다고 해도 보통의 사람들은 그녀의 크기에 압도당하기 마련이었지만, 그녀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보였다.

“몇 호야?”

“501호.”

“아, 에일린이 쓰던 방이네.”

“에일린?”

“학교 선배야. 올해로 졸업했지만…. 그래도 넌 운이 좋은 편이네. 이 아파트가 거기서 거기긴 하지만, 여자가 묵었던 방이 그나마 컨디션이 좋거든.”

오웬이 공감의 의미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곤 다시 캐리어를 들어 올렸다. 짐이 반으로 줄자 계단을 오르는 것이 세배는 수월해졌다. 두 사람은 단숨에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일렬로 늘어진 복도는 왼편에 두 가구, 오른편에 두 가구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녀는 오웬이 두리번거리기도 전에 검지로 왼쪽을 가리켰다.

“501호는 저기 안쪽 집이야.”

“아,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이 정도 가지고 뭘.”

“몇 호에 살아? 아, 참. 내 이름은 오웬이야. 오웬 밀러.”

오웬이 허둥지둥거리며 제 티셔츠에 손바닥을 한번 슥 문지러 땀을 닦은 다음 악수를 청했다. 그녀는 흔쾌히 악수를 받아 들이며 대답했다.

“난 너랑 반대쪽 503호. 제너벨이야.”

“같은 층이구나. 잘 부탁해, 제너벨.”

“강아지 이름은 뭐야?”

“이쪽은 버터컵.”

“쓰다듬어 봐도 돼?”

“물론이지.”

제너벨은 버터컵 앞에 쭈그려 앉아 그녀와 눈을 맞추고는 “안녕, 친구.” 하고 담백하게 인사했다. 버터컵은 고개를 한 번 양쪽으로 털고선 대답하듯이 ‘흥’하고 콧바람을 세게 냈다. 버터컵이 엉덩이를 바닥에 깔고 앉자 제너벨은 “그렇지.” 하고는 버터컵의 귀와 머리를 살살 긁으며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기분 좋다는 듯이 미소를 짓거나 혀를 내밀고 헥헥 대지 않았지만 버터컵은 제너벨의 손길이 멎을 때까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타인에게 경계가 심하고 점잖은 버터컵으로써는 그 정도면 꽤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제너벨은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만큼 그녀를 쓰다듬은 후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털이 뻣뻣한걸.”

“테디베어처럼 부드럽진 않지.”

“아무튼 문라이즈에 온 걸 환영해.”

제너벨은 오웬이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옅게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오웬을 위한 조언을 남겨주었다.

“조언 하나 하자면 귀마개를 미리 사두는 게 좋을거야. 이곳은 방음이 거의 안되니까. 여긴 시끄러운 녀석들이 많이 살거든.”

“너도 그래?”

"내가 시끄럽냐고?“

제너벨은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헛웃음을 지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 중에 아파트가 조용해지길 제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나일걸?”

무미건조하게 대답한 제너벨은 버터컵을 향해 손을 짧게 흔들고는 503이라고 적힌 문 너머로 자취를 감췄다. 경첩이 거슬리는 소리를 냈고, 이내 무거운 문이 쾅 하고 닫혔다.

2

오웬이 문라이즈 아파트를 선택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물론 제일 큰 이유 중 하나는 저렴한 월세였다. 방을 계약하던 당시 집 주인 이소벨의 말로는 아파트의 실제 소유자는 자신의 아버지이나, 실질적인 운영 및 관리는 자신이 도맡고 있다고 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도시에서 이소벨은 드물게도 이타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는데, 그녀는 이 아파트에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우선적으로 입주시키겠다는 운영 방침을 고집하고 있었다. 뉴욕대는 캠퍼스 간 셔틀버스를 제공하고 있어서, 브루클린에 있는 공학대학까지 제 시간에 가기만 한다면 편히 오갈 수 있는 방법이 있었기에 위치적으로도 조건이 부합했다. 무엇보다 버터컵을 실내에서 키워도 된다는 허가도 받았으니, 이보다 더 좋은 집을 찾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어 오웬은 그 자리에서 계약서에 서명했다.

뉴욕에서의 생활도 이제 3주차에 접어들었다. 타지에서의 생활은 모든 게 어색하기만 했고, 아파트는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협소했지만, 최악의 상황을 상정했기에 그렇게 나쁘지도 않았다. 꼭대기 층의 방은 비가 오면 물이 샐지도 모른다고 했으나, 대신에 사는 이가 없어 층간소음이 덜했다. 운 좋게도 바로 옆집에 사는 사람도 조용한 편이었는지 간간이 들려오는 생활소음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시끄럽지도 않았다. 방 안에 있던 가구는 모두 낡고 더러웠지만 오웬은 그런 것에 크게 연연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그저 돈을 아꼈다는 것에 기뻐했다. 부엌-부엌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방의 한 쪽 귀퉁이-은 요리를 하기에 협소했지만, 오웬은 원래 요리를 자주 하지 않기 때문에 상관 없었다. 무엇보다 오웬이 제일 마음에 들어한 것은 발코니가 있다는 점이었다. 오웬은 종종 그곳에서 뻥 뚫린 거리의 풍경이나 구름과 하늘따위를 스케치하거나 가끔 담배를 피우며 여유를 부리곤 했다. 작은 쇼파를 놓아도 될 정도로 꽤 넉넉한 발코니 공간은 그녀뿐만이 아니라 버터컵이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버터컵은 쇼파 위로 폴짝 뛰어 올라 그곳에 편히 몸을 뉘이고선 그곳에서 자거나 날아 다니는 새를 구경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다만, 제너벨이 그녀에게 귀마개를 사라고 조언했던 것에 대해선 얼마 가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개강과 동시에 주에 한 두번씩 열리는 파티 탓이었다. 주최자가 누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클럽 음악과 사람들의 환호성이 심야까지 건물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제너벨이 조언한대로 준비해둔 귀마개도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오웬이 보름 간 겪은 것만도 벌써 세번이었는데, 파티가 열리기라도 하면 그 날은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쉬 예술대학에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로 제일 기쁜 일이었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이정표라곤 없던 오웬에게 어쩌면 제일 필요한 것이었다. 장례식 이후 내도록 우울에 잠겨 있던 오웬은 합격 우편을 받아들자 마자 부모님과 함께 살던 주택을 내놓았고 얼마 없는 짐을 챙겨 뉴욕으로 왔다. 비록 부모님께서 남겨주신 유산의 대부분을 학자금으로 쓰게 될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오웬이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보낸 일상은 다음과 같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버터컵과 산책했고, 약 한 시간의 산책을 끝마치면 학교에 갔다. 점심은 교내 카페에서 빵과 커피를 먹거나, 학교 근처에 서브웨이가 있어 그곳에서 샐러드나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서 책을 한 두권 빌려 집으로 돌아오거나 때때로 에세이를 쓰는 것이 전부였으나, 오늘은 아파트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파트타임 면접이 있었다. 당장의 생활비가 부족하진 않았지만 기댈 구석이 없는 삶이라는 게 본디 그러하듯 대비가 필요했다. 오웬은 수업이 끝나고 애매하게 남는 늦은 오후의 자투리 시간에 파트 타임을 해서 생활비를 보탤 생각이었다. 점장은 오웬이 티쉬 예술대학의 학생이라는 것과 최근에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홀로서기를 하게 됐다는 점, 그리고 강아지를 반려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나 감명 받은 듯 했다. 그는 곧 연락을 주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20분 간의 면접을 끝냈다. 느낌이 좋았다. 오웬은 식료품점에 들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시리얼, 파스타 소스, 과일 따위를 조금 사서 아파트로 돌아갔다.

오웬이 아파트 계단을 오르는 동안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노랫 소리가 건물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짜증나는 점이 있다면, 분하게도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가 꽤 감미로웠다는 점에 있었다. 오웬은 담담히 계단을 올라 4층에 도착했다. 계단을 다 오르고 나면 숨을 고르는 데에 5초쯤 필요했다. 오웬이 키로 문을 따고 들어가자 발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버터컵이 현관 앞에 앉아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재밌게 놀고 있었어?”

활짝 웃은 오웬은 테이블에 식료품이 담긴 봉투를 내려놓고 손을 씻은 뒤, 곧장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버터컵을 한껏 쓰다듬어 주었다. 버터컵이 무언가를 오물대고 있다는 건 그 뒤였다.

“버터컵? 지금 뭘 먹고 있는 거야?”

오웬은 버터컵의 입을 벌리려고 한참 씨름했지만 좀처럼 버터컵은 입을 벌려주지 않았다. 오웬은 혹시 자신이 사료 봉지나 육포 간식을 찬장에 제대로 넣어두지 않았나 싶어 주변을 살폈으나 그런 흔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버터컵이 누워 있던 발코니의 쇼파 위에 놓인 닭고기 개껌이었다. 침이 흥건하게 묻은 개껌은 누가 봐도 버터컵이 먹은 흔적이 다분해보였다. 오웬의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해졌다. 그녀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개껌을 들고선 버터컵을 돌아보았다.

“버터컵, 이거 어디에서 난 거야?”

그런들 대답할 리 없었으나, 버터컵은 한 번 간결하게 “왕!”하고 짖을 뿐이었다. 출처 모를 개껌도 개껌이었지만,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버터컵이 평소보다 조금 더 동그래진 것도 같았다. 마치 버터컵이 자신도 모르게 간식이 무한정 쏟아져나오는 마법의 호주머니라도 발견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당분간 간식 양을 줄여야겠어. 오웬은 굳게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압수야.”

버터컵이 항변하듯이 최대한 불쌍하게 낑낑 거렸지만, 오웬은 가차없이 침으로 눅눅해진 개껌을 쓰레기통에 집어 넣었다.

3

모처럼 여유로운 주말이었다.

이번 주말엔 쓸만한 서랍장을 저렴하게 구매하기 위해 아침 일찍 플리마켓에 갈 필요도 없었고, 집 안 어딘가를 수리할 공구를 빌리기 위해 제너벨의 방 문을 노크할 필요도 없었다. 오웬은 오전 내내 한번도 깨지 않고 늦잠을 잤다. 그리곤 점심으로 토마토 스파게티를 직접 해먹었고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었다. 활짝 열어놓은 발코니로 오후의 따뜻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있을까 싶은 순간이었다. 그녀의 발치에 앉아 웅크리고 자고 있던 버터컵이 번뜩 눈을 뜨고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한 건 그 때였다.

“음?”

버터컵은 코를 연신 킁킁거리며 홀린 듯이 발코니로 향했다. 오웬은 잠시 책을 내려두고 무거운 시계추처럼 양 옆으로 붕붕 흔들리는 버터컵의 꼬리를 따라 그녀의 행적을 주의 깊게 살폈다. 버터컵이 발코니의 쇼파 위로 훌쩍 뛰어오르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버터컵이 무언가 발견한 것 처럼 오른편을 보고 헥헥 거리자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개껌이 불쑥 튀어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버터컵이 그것을 입에 물자, 이번엔 웬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버터컵의 귀며, 턱,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마치 처음이 아니라는 듯이 낯선 이의 손길을 허락하고 있는 버터컵의 모습은 편안해보였다. 오웬은 완전히 당황해서 입만 크게 벌린 채 그 모습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낯선 이의 손이 거두어지자 버터컵은 만족했다는 듯이 쇼파 위로 편히 자리를 잡고 개껌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일련의 과정을 모두 지켜보던 오웬이 뒤늦게 발코니로 나가 봤지만 그곳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버터컵이 물어뜯고 있는 것은 일전에 그녀가 쓰레기통에 버렸던 것과 똑같은 닭고기 개껌이었다. ‘버터컵이 최근 들어 살찐 것 같다.’는 그녀의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발코니를 통해서 옆집으로 넘어올 수도 있는 구조이니 옆집 사람이 버터컵에게 간식을 주는 정도야 눈 감고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간식이 무한정 나오는 마법의 호주머니라는 게 글쎄, 옆집 발코니일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오웬은 주인도 모르게 은밀히 자신의 강아지를 살 찌우고 있는 이 친절하고 달콤하면서도 악마같은 이웃의 얼굴이 몹시도 궁금해졌으나 호기심을 나중으로 미뤄두었다. 지금은 성급하게 502호의 문을 두드리는 것보다 발뺌 하지 못하도록 ‘무단 간식 헌납’현장을 급습하는 것이 베스트였다. 버터컵은 아무것도 모른 채 새로 생긴 개껌을 뜯는 데 완전히 몰두해 있었다. 나만 따르는 줄 알았더니. 간식만 주면 전부 좋다는 거야? 오웬은 왠지 모를 원망과 약간의 배신감을 담은 눈빛으로 버터컵을 바라볼 뿐이었다.

4

“수고했어! 오웬.”

“너도, 알피라. 좋은 밤 보내!”

오웬은 앞치마를 잘 개어 라커에 넣어둔 뒤 알피라와 인사를 나누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알피라는 그녀와 비슷한 시간대에 함께 일하게 된 파트타임 서버였는데, 강렬한 마젠타 염색모가 신기할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오웬은 강의를 듣고 레스토랑에서 세 시부터 일곱 시까지 일 했고, 알피라는 그보다 조금 더 늦은 다섯 시에 출근해 아홉 시에 마감했다. 각오했던 바였지만 학업과 파트 타임을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때만큼 담배가 간절해지는 때가 없었다. 바깥은 이제 막 해가 저물어 반대쪽 귀퉁이부터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오웬은 가게를 나오자마자 길게 한숨을 한번 쉬고 나선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찾아 들어갔다. 그리곤 가방에서 능숙하게 담배갑을 찾아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문 뒤, 다시 한 번 가방을 뒤졌다.

“…아, 제발. 거짓말이지?”

아무리 가방 속을 헤집어도 라이터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웬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가방에 든 잡동사니를 몇 개 꺼내 들고 바닥을 확인했지만 역시나 라이터는 없었다. 오웬은 짜증스럽게 입에 물고있던 담배를 순간 바닥에 던져 버리려다가 담배 한 갑이 11불이 족히 넘어가는 걸 기억해냈다. 오웬은 필터 끝이 눅눅해진 담배 한 개비를 고스란히 담배갑에 다시 집어 넣었다.

“되는 일이 없네.”

오웬의 입꼬리가 한껏 내려갔다. 오웬은 풀 죽은 채 입술을 삐죽이며 아파트로 향했다. 배는 고프고, 몸은 지치고, 그러나 할 일은 산더미였다. 특히나 오웬을 제일 걱정스럽게 만드는 것은 최소 세개의 에세이가 요구되는 교양과목이었는데, 작품에 제한은 없었으나 너무 수준 낮은 공연이나 너무 대중적이라 앞서 천번쯤 에세이가 작성됐을 대중예술작품을 대상으로 삼을 순 없으니 최소 200불을 요구하는 브로드웨이 쇼 뮤지컬 티켓을 구해야만 했다. 오웬은 고개를 좌우로 털며 생각을 떨쳐내려고 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오웬은 열쇠로 문을 열고 501호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버터컵?”

평소같았으면 이미 발소리를 듣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을텐데 어디에 있는지 온 데 간 데 없다. 불을 켜고 방 안으로 들어서자 오웬은 버터컵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버터컵은 앞 다리를 들고선 발코니의 벽면에 기대어 있었다. 풍성한 꼬리가 양옆으로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502호!’

오웬이 내내 기다려왔던 현장 급습의 기회였다. 오웬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살금살금 발코니로 향했다. 버터컵은 또 간식을 받아먹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완전히 홀린 것처럼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 따위는 전혀 못 느끼는 듯 했다.

“…그래, 친구. 오늘 하루도 잘 보냈어? 이런. 간식부터 내놓으라는 거야?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서운한걸.”

발코니에 완전히 가까워지자 처음 듣는 남자의 다정한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말을 거는 투가 꽤 자연스러운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는 게 티가 났다. 오웬이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벽을 짚고선 발코니 너머로 눈만 보일 정도로만 슬쩍 얼굴을 내밀었다. 옆 발코니에서 손을 내밀어 버터컵을 쓰다듬고 있는 남자는 어깨에 닿는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온 신경은 오로지 버터컵에게로 향해있는지, 그는 오웬이 자신을 보고있음을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오웬은 조심스럽게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저기….”

“……?”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버터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와 오웬의 눈이 딱 마주쳤다. 남자는 잠시 놀란 표정으로 입을 조금 벌리더니, 입꼬리를 끌어 당겨 웃으며 자연스레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가워. 이웃사촌. 이 커다란 귀염둥이의 주인이 너야?”

그는 발코니 너머로 손을 건네 악수를 청했다. 오웬은 그의 뻔뻔함에 뭐라 할 말을 잃고 얼결에 발코니로 쭈뼛쭈뼛 나와선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남자는 가볍게 손을 쥐고 두어 번 흔들고선 손을 뗐다.

“아, 이런. 내가 너무 앞서나갔군. 자기 소개를 먼저 해야겠지? 나는 게일 데카리오스야. 보시다시피 여기, 문라이즈 아파트 502호에 살고 있고. 잘 부탁해.”

“원래 그렇게 뻔뻔해?”

“하하. 정확해. 그런 소리 자주 들어. 그래서, 네 이름은?”

“오웬 밀러. 오웬이라고 불러.”

“그래, 오웬. 나도 ‘게일’로 충분해.”

두 사람이 통성명을 마치자 잠자코 기다리고 있던 버터컵이 한 번 짧게 ‘왕!’하고 짖었다. 자신에게도 관심을 가져달라는 의미였다.

“아, 게일. 그러니까 이쪽은 ‘귀염둥이’가 아니라 버터컵이야.”

“오, 버터컵. ‘귀염둥이’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야.”

“혹시나 해서 묻는건데, 네가 요즘 버터컵에게 계속 간식을 준거야?”

“음……. 실은, 그래. 맞아. 발코니에서 버터컵을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데, 너무 귀여워서 친해지고 싶었거든.”

“너 때문에 요즘 버터컵이 점점 통통해지고 있다고. 그거 알아?”

“맙소사, 그 정도로 많이 줬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정말로, 정말로 미안해. 오웬.”

게일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사과하자 오웬은 저도 모르게 푸스스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풀 죽은 모습이 어쩐지 버터컵과 묘하게 닮은 것 같아서 마음이 금방 누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어찌되었든 제 강아지를 이렇게나 귀여워하는 모습이 꽤 마음에 들기도 했다.

“그래. 앞으론 그녀에게 간식을 주고 싶으면 꼭 나한테 허락부터 받도록 해.”

“물론이지. 너그러움에 감사드립니다, 마이 레이디.”

게일이 과장된 자세로 정중하게 인사하자 버터컵이 한번 더 ‘왕!’하고 짖었다. 그녀의 인내심이 거의 바닥났다는 뜻이었다.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대화를 끊기엔 적절한 타이밍이었는지도 몰랐다.

“이거 봐. 네가 줘야할 간식을 안주니까 화가 났잖아. 난 이만 버터컵에게 저녁밥을 챙겨주러 가야겠어. 게일.”

“그래. 좋은 밤 보내, 오웬. 그리고 버터컵. 너도.”

게일이 짧게 그녀와 버터컵에게 번갈아 손을 흔들었다. 오웬이 먼저 발코니를 빠져나오자, 버터컵이 알아서 그녀의 뒤를 쫓아 집 안으로 들어왔다. 오웬은 찬장에 넣어둔 사료 봉투를 꺼내 버터컵의 밥 그릇을 채우면서도 만면에 가득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어딘가 좀 독특하긴 했지만, 유쾌한 말재주와 뻔뻔함이 웃음이 헤픈 오웬에게는 정확하게 주파수가 맞았다. 어쩐지 막연하게도 설레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음에 조금 더 오래 얘기해볼 기회가 생긴다면 좋겠는데. 

“많이 먹어, 버터컵.”

오웬은 가득 채운 밥그릇을 아래에 내려두고는, 그 앞에 쭈그려 앉아 한동안 버터컵이 밥을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머릿속에 가득했던 담배 생각마저 온데간데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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