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

[진화랑] 도련님의 곁에는 항상 그 메이드가 있다.

데빌 인자를 품고 억눌러 사는 도련님 진과 자기 마음가는 대로 자유롭게 사는 전투 메이드 화랑. 리퀘 받고 연성 했습니다.

꿈조차 꾸지 않는 깊은 잠에 빠진 진은 저 멀리서부터 마치 메아리처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의식을 집중했다. 어이, 도련님... 이제 그만 일어나는게 어때. 도련님...? 자신보다 약간 높은 톤, 상대를 깔보는 것 같은 말투. 하지만 진에게는 그 누구의 목소리보다 더 자신을 기분 좋게 만드는... 천천히 진이 눈을 떴다. 암막 커튼 사이로 환하게 보이는 빛을 보니 이미 해가 중천에 뜬 모양이었다.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고 있으려니 누군가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암막 커튼을 걷었다. 곧장 커다란 통 창문을 통해 강렬한 햇빛이 그대로 진이 누워있는 침대를 비췄다. 역시 집은 남향이 최고라니까. 빛 하나는 끝내주게 들어오네. 암막 커튼을 걷은 자가 작게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쏟아진 빛에 눈도 제대로 못뜨고 반쯤 몸을 일으킨 진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햇빛에 비춰진 붉은 노을같은 머리색과 그 머리색처럼 밝고 환하게 웃는 메이드 복을 입은... 남성이 진의 눈에 들어왔다.

" 여, 좋은 아침. 도련님 "

" ...좋은 아침, 화랑... "

" 아침 식사 시간 늦기 전에 빨리 정신차리고 씻어. 잔소리 듣기 싫잖아? "

" ...화랑 "

" 음? 아아, 그렇지. 매번 까먹어버리네. 좋은 아침이야, 진 "

자신과 단 둘이 있을 때는 도련님 같은 호칭이 아닌 이름으로 불러주기를 바라는 진의 소망에 맞춰 화랑이 진과 눈을 마주치며 이름을 불렀다. 이 집에는 수많은 집사들과 메이드들이 있지만 이렇게 진을 무서워하지 않고 이름을 불러주며 눈을 똑바로 마추쳐 오는 건 오직 화랑 뿐이었다. 그래, 오직 자신만을 모시고 보조하기 위해 이곳에 있는... 나의 메이드. 자자, 이제 정신 차렸어? 빨리 씻고 식당으로 가. 준씨가 기다린다고. 그 말에 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는 걸 바라본 화랑이 익숙하게 잠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진의 하루는 항상 이렇게 화랑으로부터 시작된다. 좋아, 오늘도 미남이네. 그럼 기분 좋게 보내자고, 진. 함께 침실을 나온 둘은 곧장 반대 방향으로 헤어졌다. 진은 식당이 있는 왼쪽으로, 화랑은 집사와 메이드들이 모여서 쉬는 사용실로. 화랑의 아침 일과는 진을 깨우는 것 뿐. 아마 필요하다면 진이 화랑을 호출할 것이다. 화랑이 제 손목에 감긴, 진이 직접 채워 준 시계이자 호출기를 힐끔 바라보고는 사용실로 들어섰다.

" 좋은 아침이네, 진 "

" 네, 좋은 아침이에요. 엄마 "

식당으로 들어서니 그곳에 앉아있는 건 진의 엄마인 준이었다. 진이 화랑만큼이나 이 집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부드럽게 웃어주는 준을 마주보며 웃어준 진은 뒤이어 식당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는 바로 얼굴을 굳혔다. 한쪽 눈이 붉은 빛을 띄고 있는 그는 미시마 재벌의 회장인 카즈야였다. 그는 미시마 가에 은밀히 이어진다는 데빌 인자를 가지고 있는 초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데빌 인자는 진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이 이 집, 나아가 밖에서도 진이 그 누구에게도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조용하고 살얼음판 같은 식사 시간 중 먼저 식사를 끝낸 건 진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진이 카즈야의 옆을 스쳐 지나 갈 때 카즈야의 목소리가 진을 멈춰세웠다.

" 오늘 저녁 저택에서 환영회가 있다. 빠지지 말고 참석해라 "

" ...네 "

서로를 바라보지 않은 체 말하고 대답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준이 어쩔 수 없다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즈야에게 다가가는 걸 식당을 나가기 직전 힐끔 쳐다본 진은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식당을 완전히 나가버렸다. 천천히 제 방으로 향하던 진이 카즈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환영회라, 또 미시마 재벌 산하의 기업을 늘린건가. 군사 기업일지 아니면 바이오 산업 쪽인가, 그것도 아니면... 잠시 생각에 잠겨 걷고 있는 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건.

" 잘 지냈나, 조카님?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이군 "

" ...리 숙부 "

" 잘도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네. 나 같으면 먹다가 체해서 바로 소화제부터 찾을 것 같은데 말이야 "

윙크를 하며 말을 건 사람은 진의 숙부 중 한명인 리 차오랑이었다. 헤이하치가 데리고 온 입양아로 카즈야와 미시마 재벌의 총수 자리를 두고 대립, 끝내 카즈야에게 총수 자리를 빼앗기게 되었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휴머노이드 제조업체인 바이올렛 시스템즈사를 창설, 크게 성장 시키면서 지금은 당당하게 미시마 재벌의 한축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카즈야 하고는 온화하게 - 준과 결혼하기 전까지는 물리적으로 치고박고 싸웠다 - 으르렁거리는 사이었고. 본가가 아닌 별채에서 지내는 일이 많은 리가 본가에 왔다는 건...

" 이번 환영회, 혹시 리 숙부 산하 쪽인가요? "

" 오, 역시 조카님. 머리 잘 돌아가네. 맞아, 우리 쪽 산하야. 이번에 새롭게 합류하게 되어서 말이지. 단, 군사 기업이지만 "

" ...그렇군요... "

" 그래... 음? "

본가 밖에서 들린 목소리에 리도 진도 창문 너머를 응시했다. 창문 밖에 보이는 본가가 자랑하는 거대한 일본식 정원에서 물을 주며 꺅꺅 떠들고 있는 사용인들과... 거기에 합류해 같이 웃고 떠들고 있는 화랑이 보였다. 화랑은 어디까지나 진의 전속 메이드였지만 본인의 오지랍인지 아니면 여기저기 참견을 해야 속이 시원한 타입인건지 진의 호출이 없을 때는 저택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사용인들과 함께 일을 하곤 했다. 그런 화랑을 처음에는 꺼려하던 그들도 점차 마음을 열고 대해주기 시작했고. 호스로 물을 주고 있던 화랑이 장난 삼아 호스 방향을 사용인들에게 돌리자마자 터져나오는 웃음기 섞인 비명소리와 외침에 키득키득 웃는걸 가만히 보던 진은 리의 말에 퍼득 정신을 차렸다.

" 여전하군. 화랑이 조카님의 전속 사용인이 된지 얼마나 됐지? "

" ...3년 정도 인 것 같네요 "

" 신분도 과거도 모를 사람이 사용인으로 들어온 것도 놀라운데 메이드복이라. 처음에 봤을 땐 벌칙 게임이나 아니면 내가 못 본 사이 조카님의 취향이 매니악하게 바뀐 줄 알았는데 말이야 "

리의 말에 어색하게 웃은 진이 화랑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시를 떠올렸다. 진이 18살이었던 3년 전. 어느 순간 갑자기 미시마 가의 사용인으로 들어온 화랑은 진과 같은 나이라는 이유로 그의 전속 사용인이 되었다. 안녕, 도련님.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자신의 위치를 알고는 있는건지 자신이 모셔야할 도련님인 진에게도 서슴없이 반말을 써대는 화랑은 집사장의 지적과 잔소리에도 태도의 변함이 없었다. 집사장도 반쯤 포기하고 준이 눈을 감아 준 덕분에 화랑은 사용인들 중 유일하게 자신이 모셔야할 도련님에게 반말을 할 수 있는 자가 되어버렸고 진도 이제는 반말이 익숙해진 덕분에 화랑이 존대를 하면 오히려 소름 돋아 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위치 상 학교나 밖에서 평범하게 생활할 수 없는 진에게 있어 화랑은 유일한 친구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집사복에 검은 머리칼이었던 화랑이 머리를 붉게 물들이고 메이드복을 입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전 세계를 주름 잡는 미시마 가의 후계자답게 진에게는 생각보다 자주 암살 시도가 들어왔다. 사연도 모두 가지각색의 암살 시도가 매번 실패로 돌아가는 이유는 보안팀의 철저한 검문도 있었지만 진의 곁을 항상 지키고 있는 화랑이 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아온건지 화랑은 어린 나이에도 총기와 무기를 다루는 솜씨가 어른 못지 않았고 항상 진을 지키는 든든한 방패였다. 그래, 그게 바로 화랑의 자부심이기도 했고. 하지만... 진이 20살, 성인이 되었을 때 열린 파티에서 그는 처음으로 데빌 인자를 각성하고 자신을 습격한 암살자와 더불어... 화랑까지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게 되는 어마어마한 실책을 저지르게 되었다. 폭주하던 데빌 인자가 겨우 진정되고 정신을 차린 진은 자신을 끌어안고 진정시키고 있는 준의 품에서 피투성이가 된 체 실려가고 있는 화랑의 축 늘어진 팔을 목격했던 그때를 아직도 잊지 못했다.

그 날을 기점으로 진을 둘러싼 모든 것이 변했다. 그의 주변에는 오직 두려움과 혐오, 그리고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진에게 호의를 주는건 엄마인 준과 제 삼촌들 뿐. 카즈야와의 거리 또한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는 진을 처음부터 혈육이라는 피의 관계가 아닌 후계자라는 기계적인 관계로만 대했으니까. 다만 진의 데빌 인자가 각성했다는 소식에는 카즈야도 말이 없었다. 하지만 진이 가장 걱정하고 두려워한 건 유일한 친구이자 자신을 지키는 방패인 화랑이 자신을 외면하는 것이었다. 화랑... 화랑... 화랑... 화랑이 의식을 찾지 못하고 병원의 중환자실에 입원에 있는 동안 진 역시 하루종일 제 침실에 쳐박혀 한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식사도 거부했고 그 누구의 방문도 거절했다. 죄책감과 두려움, 그리고 제 내면 안의 데빌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몸부림 칠 때 그런 그를 구해준 건 역시...

" 야... 야...! 아, 도련님! 이제 그만 일어나지 그래? "

" 화... 랑? "

" 그래, 나다. 밥도 안먹고 나가지도 않는다며? 바보같은 짓 하네, 정말 "

불면의 밤을 보내던 정신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기절한 사이, 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고 제 눈에 들어온 그의 모습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왼쪽 팔은 깁스를 한 화랑이 멀뚱멀뚱 저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진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화랑을 끌어안았다. 우왁! 놀랬잖아, 이 바보가...! 제 위치를 잊고 타박을 주려던 화랑은 저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는 진에 결국 말 없이 조용히 그 품에 가만히 안겨있었다. 의식을 찾은지 3일도 되지 않은 불편한 몸으로 - 절뚝거리며 걷는 화랑에 진이 남몰래 울었다는 건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 화랑은 용케도 진의 케어에 집중했다. 한번만 더 이렇게 나오면 나 그만둔다. 협박 아닌 협박은 효과가 있었고 진은 화랑이 돌아온 날부터 다시 평소처럼 생활했다. 그래, 진이 달라진 건 없었다. 달라진 건 주변 사람들이었지. 히익...! 진의 한발짝 뒤에서 걷던 화랑은 자신들을 보자마자 작게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뒤돌아 사라지는 사용인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진이 제 안의 데빌 인자를 각성한 순간부터 진은 몇몇 사람들을 제외한 자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화랑은... 그것이 내심 안타까웠다. 데빌 인자인지 뭐니 해도... 결국 진은 그냥 진인데. 그래서였을까. 며칠 후 화랑은 머리색을 화려하게 염색을 하고 오더니 복장마저 메이드복으로 교체했다.

" 화, 화랑...? 그 복장은... "

" 어때? 잘 어울려? 역시 마스크가 잘생겼다보니 뭘 입어도 어울리지 안 그래? "

" 갑자기 왜... "

" 그냥 뭐... 이게 확실하게 튀잖아? "

영문 모를 말을 하는 화랑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한 진이었지만 며칠 후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무채색에 가까운 자신의 옆에서 그 누구보다 화려한 밝은 머리색과 메이드복이라는 언밸런스의 화랑이 사람들의 시선을 모두 가져가고 있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자에게 쏠리는 시선 덕분에 진은 자신을 향한 공포와 두려움의 시선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 결국 화랑은 자신을 위해 전투 메이드가 된 것이었다. 잠시 창문 너머로 화랑을 바라보던 진은 시선을 느낀 것인지 자신이 있는 곳을 올려다보다 손을 흔드는 그를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짓고는 이내 리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후, 피곤한데... 참석 해야하는 건가. 제왕학 수업을 끝내고 환영회의 참석을 위해 옷을 갈아입고 본가의 파티장으로 향하던 진의 눈에 복도 한가운데 서 있는 화랑을 발견하고는 그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화려한 그에게 시선이 쏠려 그 앞에 서 있던 왠 남자를 이제서야 발견한 진이 인상을 찌푸린 사이, 화랑에게 뭔가 이야기를 하던 남자가 능글맞게 웃으며 툭툭 화랑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이내 뒤돌아 가버렸다. 뭐지...? 진이 천천히, 발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화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팔만 뻗으면 닿을정도의 거리가 되었을 때 작게 들린 목소리는.

" ...저 너구리 같은 늙은이가... "

" 뭐가? "

" 우아악! 가, 갑자기 놀래키지마! "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진심으로 놀란 화랑의 어깨가 튀고 휙 뒤를 돌아본 화랑이 진을 발견하고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타이밍도 진짜 최악이네, 진이 듣지 못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화랑이 이내 평소처럼 웃으며 별거 아니라고 태연하게 굴었다. 그런 화랑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은 이내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일단 화랑을 보내주었다. 내일 아침에 같은 시간에 깨우러 올거니까 와인 너무 많이 마시지마. 하긴 넌 술 같은 거 장식품 정도일테지만. 화랑이 장난스레 던진 말에 웃어준 진은 방금 전 그의 혼잣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게되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미시마 재벌의 후계자님. 미시마 재벌의 후계자이지만 몇년 전 데빌 인자의 각성으로 인해 진에 대한 공포심이 퍼져 아무도 그에게 접근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마시지도 않을 와인잔을 손에 든 체 먼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고 있던 진은 저에게 접근하는 나이를 지긋이 먹은 낯선 사람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처음보는 낯선 사람이 자신에게 이렇게 서슴없이 접근하다니. 자신의 악명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겁이 없는 것인지. 잠시 낯선 남자를 바라보던 진이 입을 열었다.

" 당신은 누구지? 처음 보는 사람 같은데 "

" 저는 이번에 운 좋게도 미시마 재벌과 협력을 하게 된 기업의 회장일 뿐입니다. 이름 또한 기억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그저 후계자님과 대화를 해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

" ...나와 대화를 해서 그쪽이 얻는게 무엇일지 모르겠군 "

" 얻는거라... 당신은 아직 후계자이기 때문에 손에 직접 쥐고 있는 것은 없죠. 하지만 딱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

" 내가 가지고 있는거라고? "

" 네, 붉은 머리칼의 메이드복을 입은 당신의 메이드 말이죠 "

남자의 말에 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런 진의 표정을 봤음에도 남자는 거리낌 없이 제 목적을 입에 담았다. 저는 당신의 메이드를 원합니다, 후계자님. 그 자를 저에게 양도하신다면 제가 당신의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물론 거절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때는 그저 후계자님께서 더 이상 후계자가 아닌 총수가 되었을 때 여러가지로 힘들게 될 뿐이죠.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후계자님. 오늘의 목적은 이것 뿐이라서 말이죠. 진이 뭐라 말을 할 틈도 없이 자기가 할 말만 하고 가버리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던 진의 손에 들린 와인잔에서 파직 소리가 나더니 이내 금이 가버렸다.

젠장. 진이 답지 않게 거친 소리를 내뱉고는 이내 침대에 털썩 엎어졌다. 억지로 참석한 환영회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원하지도 않는 후계자라는 이유로 환영회에 참석해 지루한 시간을 억지로 감당해야 하는 것도 화가 나는데 그보다 더 화가 나는 건 화랑을 달라는 말에 별 다른 말을 하지 못한 자신이었다. 미시마 재벌을 위해선 작은 손해 정도는 감당해야 한다. 그런 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진으로서는 화랑을 주는 대신 미시마 재벌에, 자신에게 힘이 되어 주겠다는 그 말에 반박할 말 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고보니 아까 그 남자는 화랑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가버렸던 그 남자와 많이 닮아있었다. 설마 화랑에게도 비슷한 제안을 한건가? 그렇다면 그가 중얼거린 그 말은... 아, 젠장. 그냥 넘어가는게 아니었는데... 자신을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했던 걸까 아니면 제 안의 데빌을 자극하지 않으려 말을 아꼈던걸까. 어느 쪽이든... 유쾌하지 않네. 인상을 찌푸린 진이 눈을 감았다. 제 안에서 저를 비웃으며 속삭이는 데빌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너무나도 뼈 아프게 다가왔다.


준비는 끝났어, 도련님? 화랑의 말에 제 옷매무새를 다듬은 진이 올려다 본 곳에는 꽤나 큰 건물이 있었다. 오늘은 카즈야가 직접 진을 지목하여 후계자 수업의 일환으로 기업 간의 인수합병 즉, M&A를 성사시키고 오라 명령을 받고 간만에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다만 화랑을 데려가라고 한 걸 봐서는... 결코 곱게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거군,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한 진이 힐끔 제 옆의 화랑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붉은 머리칼과 메이드복을 입은 화랑의 손에는 커다란 서류 가방이 들려있었다. 얼핏보면 서류가 잔뜩 든 가방으로 보이겠지만 그 안에 있는 건... 하아, 작게 한숨을 쉰 진이 먼저 걸음을 옮기자 화랑도 그 뒤를 따랐다. 먼저 도착한 상대 기업의 사람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회의실의 상석에 앉은 진은 회의를 시작하자마자 자신들을 맹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하는 상대에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나가... 역시인가. 그리고 10분 후. 진은 일제히 저를 향해 무기를 겨누는 사람들에 숨을 작게 내쉬고 편안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 화랑 "

" 네네, 더러운 걸 치우는 건... 메이드의 역활이지 "

순식간에 그런 진의 앞을 지키듯 막고 선 화랑의 양손에는 화랑이 애용하는 데저트 이글 L6가 들려있었다. 강한 반동으로 인한 떨어지는 명중률, 그리고 가끔씩 터지는 잼 - 총탄 걸림 현상 - 으로 실전에서 사용하기에는 불합격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화랑은 그런 데저트 이글을 잘도 사용했다. 이유는 딱 하나... 강한 화력 때문이었다. 화랑이 메이드복을 크게 펄럭이며 응사하기 시작했다. 진을 노리고 있던 자들은 모두 그 메이드복에 가려져 제대로 조준조차 못했고 그런 사람들을 사냥하는 건 화랑의 몫이었다. 하아,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진은 조용해진 주변에 눈을 뜨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온통... 피바다와 시체 뿐이었다.

" 청소 끝. 근데... 이 정도로 끝날 것 같지는 않은데, 도련님 "

" 그래, 일부로 이런 곳까지 불렀으니까... 더군다나 주변엔 허허벌판. M&A는 핑계고 그냥 날 암살한 생각 밖에 없었겠지 "

" 귀찮아~ 사람을 이런 곳 까지 부르고 하는 게 고작 암살이라니... 아니다, 이건 대놓고 죽이러 드는 거니까 암살은 아닌거 아냐? "

" 글쎄... 일단 돌아가자, 화랑 "

화랑이 텅텅 비어버린 서류 가방과 마지막 한발에서 잼이 걸려버린 왼손의 데저트 이글을 집어 던지고는 메이드복 안쪽으로 손을 집어 넣어 허벅지에 고정시켜 놓은 홀스터에서 단검을 꺼내 들고는 앞장 서서 걷기 시작했다. 화랑, 데저트 이글의 탄환은? 장전되어 있는 거 5발, 예비 탄환 20발. 총 25발 남았어. 적이 얼마나 많을지 모르니까 원샷원킬로 간다. 그거야 쉽지. 진의 말에 뭐 그리 쉬운 미션을 주느냐는 가벼운 말투로 대답한 화랑과 진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1층까지 이동했다. 1층까지 내려가는 동안 덤벼드는 암살자들은 모두 화랑이 뛰어난 사격 실력으로 원샷원킬로 즉사 시켰고 아주 가끔 양동작전을 통해 코 앞까지 접근한 자들은 단검에 목이 베어 컥컥 신음 소리를 내며 죽어갔다. 그렇게 아무런 위기도 없이 무사히 돌아가나 싶던... 그때.

" 진, 뒤로 물러서! "

화랑의 외침에 저도 모르게 뒤로 뒤어발짝 물러선 진은 저와 화랑의 사이를 정확하게 가로막으면서 등장한... 익숙한 무언가에 눈을 크게 떴다. 거대한 인간형 로봇, 미시마 재벌의 G사에서 개발 중인... 잭8이었다. 이게 왜 여기에...? 아니 무엇보다... 치익, 안의 부품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높낮이가 없는 음성이 울려퍼졌다. 목표 카자마 진, 확인. 처리를 시작합니다. 음성이 끝남과 동시에 화랑이 잭8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으나...

" 아, 진짜 왜 하필이면 지금이야. 이 빌어먹을 데저트 이글! "

틱, 소리와 함께... 잼이 발생했다. 쯧, 혀를 찬 화랑이 필요가 없어진 데저트 이글을 집어 던지고는 그대로 진을 향해 달려들어 그의 앞을 가로막음과 동시에 단검으로 잭8이 쏜 탄환을 가볍게 튕겨냈다. 화랑!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괜찮아, 라며 대답한 화랑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부러져버린 단검을 집어 던진 사이 잭8의 손에 화랑의 머리를 붙잡더니 그대로 집어 던졌다. 아!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벽에 부딪쳐 쓰러진 화랑에게 진의 시선이 쏠린 사이 잭8이 진의 멱살을 붙잡아 번쩍 들어올렸다.

" 윽! "

" 처리를 시작합니다 "

" 누구 마음대로 처리를 시작하겠다고 난리야! "

온몸을 강타하는 통증을 이겨내고 벌떡 일어난 화랑이 순식간에 잭8에게 접근해 팔꿈치에 해당되는 부위를 정확하게 올려찼다. 그 엄청난 각력에 순식간에 잭8의 오른팔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였다. 당장 떨어져, 이 고철덩어리야! 진! 그 충격에 진은 멱살이 풀려 땅에 발이 닿자마자 순식간에 잭8에게 접근해 주먹을 휘둘렀다. 후계자라는 위치 상 직접 나서는 일이 적을 뿐. 미시마 가에 내려오는 격투술인 풍신류와 카자마 가의 고무술을 모두 익힌 진을 이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그런 진과 유일하게 대련이 가능한 화랑 또한 태권도의 달인이었다. 그래, 두 사람은 사실 근접전의 스폐셜리스트였다. 화랑! 제 외침에 화랑이 저와 속도를 맞춰가며 잭8에게 공격을 퍼부었고 이내 푸시시, 연기를 내뿜으며 잭8이 바닥에 쓰러졌다. 하아... 하아... 아, 젠장... 화랑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 잭8이면 미시마 재벌에서 연구 중이던 로봇 병기 아니었어? 그게 대체 왜... "

" ...그룹 내에 배신자가 있다는 뜻이겠지 "

" 쯧... 돌아가자마자 할 일이 많아지겠네, 진... 아니, 도련님 "

" 지금은 우리 둘만 있으니까 이름으로 불러도 되는데 "

" 그건 저택에서만 그렇게 하기로 한거잖아! 준씨가 밖에서는 보는 눈도 많으니까 자중하라고 했단 말이야 "

하아, 일단 빨리 돌아가자. 해야할 일이 많아 졌...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어딘가를 보며 눈이 커진 화랑이 진의 옷깃을 잡아 당기며 뒤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진은 제 얼굴에 튄 피에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기능 정지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잭8의 레이저가 화랑의 어깨를 그대로 궤뚫었다. 칫, 혀를 찬 화랑이 이를 악물고 그대로 발차기로 머리를 부시고 나서야 잭8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었다. 아, 빌어먹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 진이 황급히 화랑을 부축했다.

" 화랑! 정신 차려, 화랑! "

" 난 괜찮으니까... 아, 젠장 "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고. 진은 하늘에서 떨어져 착지하는 3기의 잭8을 보며 쓰게 웃었다. 진이 화랑을 들쳐매고 황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진, 나는 괜찮으니까... 시끄러워! 정신없이 건물 안을 뛰어다니며 숨을 곳을 찾던 진이 도착한 곳은 아까 전 자신들이 죽인 암살자들이 즐비한 회의실이었다. 쾅, 문을 닫고 화랑을 내려놓은 진은 과도한 출혈로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화랑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화랑의 역활은 자신을 지키는 것. 분명 화랑이 목숨을 잃을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그런 순간이 닥치니 진은... 제 무력함이 한탄스러웠다. 차라리 맡겨버릴까. 그때처럼, 제 안의 데빌에게 맡겨버리면... 적어도 화랑은...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제 내면 안에서 조용히 속삭이고 있는 데빌의 속삭임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래, 맡겨버리자. 데빌 인자가 두려워서, 미시마 가의 피에 속박되어서 그저 주어진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 자신보다는... 진의 눈이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다 파괴해버려도 좋아. 화랑을 지킬 수 있다면.

" 데빌을... 두려워 하지마, 진... "

" 뭐...? "

" 그 힘을... 이용하는 건... 너야... 너는 데빌의 힘으로... 무엇을 하고 싶... "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의식을 잃은 화랑을 가만히 바라보던 진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제 내면 안에서 데빌과 마주했다. 저와 비슷한 얼굴에 뿔과 날개를 달고 있는 데빌이 비죽 웃으며 진의 주변을 날아다녔다. 이제서야 나와 마주칠 용기가 생긴 모양이군. 너는 겁쟁이다. 너 같은 겁쟁이가 누군가를 지킬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나? 그러니 나에게 넘겨라. 너 대신 내가 너의 적을 모두 분쇄하고 죽이고 영광을 가져다 주겠다. 데빌이 손을 뻗어 진의 가슴을 짚었다. 그러자 서서히 데빌이 진을 침식하기 시작했다. 조금씩조금씩. 제 내면을 침식해 오는 데빌에 말없이 침묵을 지키던 진이 덥썩 데빌의 손목을 붙잡았다.

" 뭐냐, 아직도 반항... "

" 화랑이 물었지... 너의 힘으로 무엇을 하고 싶냐고... 너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분쇄하고 죽이겠다고 했지... 하지만... 난 아니야! "

진이 데빌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소리쳤다. 난 데빌, 너의 힘으로 누군가를 지킬거다! 더 이상 무력하게 포기하고만 있지 않겠어! 나는 운명에 저항하겠다! 그렇게 외치며 진이 데빌의 손목을 뿌리치고는 그대로 주먹을 뻗어 데빌을 가격했다. 그 충격으로 공중으로 날아오른 데빌이 스르륵 사라졌다. 그러니까 데빌... 나에게 힘을 빌려줘. 너는... 나잖아... 내가 지키고 싶은 건 분명 너도 지키고 싶을거야. 진의 말에 맑은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천장을 뚫고 데빌의 뿔과 날개를 단 진이 화랑을 끌어안고 날아올랐다. 곧 땅에서 그런 진을 발견한 3기의 잭8이 날아오른 진을 향해 레이저건을 사정없이 쏘아댔지만 그 공격을 마치 활공하는 새처럼 피한 진의 이마에서 발사한 레이저가 순식간에 잭8을 모두 산산조각 부셔버렸다. 파지직, 스파크를 튀기며 활활 타오르는 잭8들을 바라보던 진이 날개를 크게 움직여 그곳을 빠르게 벗어났다. 제 품안에서 숨이 점점 꺼져가는 화랑을 구하기 위해서.


그 후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리가 총수로 있는 바이올렛 시스템즈 사로 날아간 진은 저를 보며 잔뜩 긴장한 리를 향해 화랑을 구해달라 소리쳤고 이내 데빌의 힘이 발현되었지만 의식은 온전히 진이라는 걸 확인한 리의 빠른 대처로 화랑은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화랑을 리에게 맡기고 빠르게 제 본가로 날아간 진은 그 사이 순식간에 배신자를 찾아내 처단했다. 이제 뒤에서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는게 아닌 주도적으로 앞으로 나서는 진에 카즈야는 이제서야 데빌 인자를 이해하게 됐냐며 혀를 찼고 준은 그런 카즈야의 등을 세차게 때리면서 잔소리를 해댔다. 저리 보여도 준에게 꼼짝 못하는 카즈야였다.

" 이야, 재난이었네. 그렇지? "

" 몸은 괜찮아? "

" 응, 괜찮아. 누구씨 덕분에 아주 삼시 세끼 몸에 좋은 것만 먹고 하루종일 잠만 잤더니 몸이 좀 퍼진 것 같아서 말이지. 완치 판정 받으면 이제 또 빡세게 운동해야지 "

" 너무 무리하지마 "

어깨에 붕대를 감았지만 본인의 말대로 잘 먹고 잘 잔 덕분에 안색은 눈에 띄게 좋아진 화랑의 말에 진이 웃었다. 그리고 진이 데빌 인자를 인정한 후 열린 파티에서 진은 그때 자신에게 화랑을 달라고 했던 회장과 마주쳤다. 진이 변한 것을 알지 못한 회장은 그때의 나약한 진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한번 더 협박에 가까운 요구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런 회장을 향해 진은.

" 다시 한번 더 그딴 소리 하면 그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신을 파산시켜주지. 화랑을 건드릴 생각하지마! "

악수를 하는 척 하면서 회장의 귀에 살기를 섞어 내뱉은 진에 그제서야 진이 예전의 진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회장은 덜덜덜 떨었고 이내 도망치듯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이 저도 모르게 푸앗, 웃어버렸다. 생각보다 너무 쉬운 처리 방법에 그 동안 우울해하고 고민해했던 자신이 너무나도 바보같이 느껴진 탓이었다.

" 기분 좋아 보이네? "

" 그렇게 보여? "

" 항상 우중충 하고 우울한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너무나도 밝아보이니까 내가 다 어색하다 "

" 그냥... 이렇게 쉬운 걸 오래동안 고민하고 속 앓이 하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져서 "

일찍 돌아온 진의 잠자리를 준비하던 화랑이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좋은게 좋은거지, 라고 중얼거렸다. 아, 맞다. 진이 화랑의 손목을 잡고 끌어 당기더니 메이드복의 어깨 부분을 슬쩍 내렸다. 흉터가 조금 남았지만 상처는 완전히 아물어 있었다. 다행이다, 잘 치료되서. 그렇게 중얼거리며 진의 입술이 흉터에 내려앉았다. 그런 진을 바라보며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것도 잠시 화랑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 있잖아, 너 이제 사람들의 시선 따위 괜찮은 것 같으니까... 나 메이드복 그만 입을까 하는데 "

" 안돼 "

" 아, 왜! "

" 마음에 들었던 것 아니었어? "

" 마음에 들었다기 보다는 난 뭘 입어도 잘 어울리니까 그냥 입었던 거지... 넌 모르겠지만 메이드복 입고 나서부터는 온갖 변태들이 다 꼬여서 뒤에서 힘들었다고. 그러니까... "

" 그래도 안돼 "

" 아, 왜! "

" 그런 녀석들은 내가 처리해줄테니까 계속 입어. 넌 나의... 전투 메이드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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