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종말의 나날들
띵우 합작
여느 날과 같은 아침이었다. 잠에서 깬 우성은 우선 제일 먼저 자리끼로 두었던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세수와 양치를 하며 휴대폰으로 뉴스와 신문을 체크했다. 별달리 흥미로운 이야기가 없어 휴대폰 화면을 끌 때쯤이면 가글도 끝이 난다.
어제는 캐릭터 프린팅 티셔츠를 입었으니 오늘은 조금 색다르게 아란 니트를 골랐다. 솔리드한 후드티를 입을까도 고민했지만, 왠지 최근에 입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을 바꿨다. 같은 이유로 청바지 대신 면바지를 고르고, 스니커즈 대신 캐주얼한 스타일에도 어울리는 브로그를 신발장 안쪽에서 찾아 신었다. 우성 스스로 보기에도 꽤 근사한 모습이었다.
아침식사로 준비해 둔 샌드위치를 꺼내 먹으려다가 시계를 보니, 아차, 이러다가는 지각이다. 우성은 샌드위치를 적당히 샌드위치용 래핑지에 싸 들고 황급히 집을 나섰다. 9시 15분 기차를 타지 못하면 다음은 한 시간 뒤에나 기차가 있었다. 어떻게 지켜온 무지각 개근 기록인데, 이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우성은 결국 달리기 시작했다. 기차역까지는 전력 질주를 하면 7분 정도. 우성은 마음속으로 “준비, 땅!”을 외치고 속도를 올렸다.
기차역에 세워진 시계탑은 늘 2분 정도 빨랐다. 멀리서부터 3으로 향한 긴 시계바늘을 알아본 우성은 비교적 한산한 플랫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으앗!”
코너에서 나온, 무언가 중얼거리던 남자와 부딪쳐 샌드위치와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186cm에, 전력 질주중인 성인 남성과 부딪치고도 그 남자는 휘청이기만 하고 넘어지지 않았다.
‘아, 자존심 상해….’
아프다, 민망하다 같은 감정보다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남자가 다가와 우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란 니트, 잘 어울리네요.”
우성은 쇳소리 섞인 목소리를 듣고서야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처졌지만 고집 있어 보이는 두꺼운 눈썹에 남자답게 곧은 코, 경계선이 짙은 입술…. 어디선가 봤던 것도 같고, 난생 처음 보는 것도 같은 묘한 인상의 남자였다. 우성이 남자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자 남자가 굴러간 샌드위치를 주워서 래핑지를 꼼꼼히 살핀 다음 우성에게 건넸다.
“아, 감사합니다….”
“다행히 포장은 멀쩡한 것 같아요.”
우성이 얼떨떨한 상태로 샌드위치를 받아들자 남자가 무심한 듯한 말투로 한마디를 보탰다. 정말 묘한 기시감이었다.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우성은 기차에 오르기 전에 남자를 붙잡아야 했다.
“혹시 우리 만난 적 있어요?”
남자가 눈을 몇 번 깜짝이더니 속도를 줄여 멈춰서는 기차를 검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무표정에 가까운 남자의 얼굴이, 우성은 어쩐지 웃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출퇴근 시간에 가끔 본 것 같네요.”
말을 튼 김에 나란히 기차에 앉았다. 좌석이 정해져 있지 않은 입석표지만, 종점 근처 역이다보니 자리는 널널했음에도. 남자와 앉아 가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남자가 과하게 친절하지도, 냉담하지도 않고 완벽하게 우성의 선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우성은 난생 처음으로, 낯선 사람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소개가 늦었네요. 정우성이라고 해요. 산왕 호텔 5거리에 있는 가구점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어요.”
남자가 우성의 악수를 받아들였다.
“이명헌입니다.”
명헌이 우성에게 미술관 큐레이터라고 적힌 명함을 건넸다. 우성은 명헌의 명함에 적힌 휴대폰 번호를 유심히 보았다. 눈에 익히기 쉽고 외우기 쉬운 번호였다.
“명함을 주신다는 건, 필요한 일 있으면 연락하라는 뜻이에요?”
장난스럽게 질문을 하면서도, 우성은 덜컹이는 것이 기차인지 심장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이제 막 알게 된 사람에게 설렘을 느끼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도 전혀 이상하거나 낯설지가 않았다. 마치 오늘 이 시간, 우성을 위해 명헌이 준비되기라도 한 것처럼. 명헌이 드디어 광대가 올라갈 정도로 웃더니 머리를 쓸어 넘겼다.
“관심 있으면 연락해 달라는 뜻이었는데요.”
“네?”
“미술품에요.”
우성이 당황해 얼굴을 붉히자 명헌은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었다. 우성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 놀림 당하는데도 기분이 나쁘기 보다는 명헌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우성은 난생 처음으로, 이전에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짓을 해 보기로 했다. 오늘은 여느 날과 같은 하루였을 텐데 명헌으로 인해 갑작스레 스프링클이라도 뿌린 듯 다채로워졌으니까. 수 백, 수 천의 달콤한 조각들을 먼저 건넨 것은 명헌이니까. 기이할 정도의 확신이 생겼다.
“미술품이 아니라 그 쪽에게 관심이 있으면요?”
그 순간 우성은, 명헌의 얼굴이 꼭 커스터드 크림처럼 부드럽게 풀어지는 것을 보았다. 오랫동안 은은하게 끓인 멀드 와인 같은 애정이 담긴 눈동자를. 오렌지 빛의 아침 햇살이 명헌의 머리카락과 어깨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열린 창 틈새로 슬그머니 들어온 봄바람이 마음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렇게 바라보면 누구라도 한눈에 반할 수밖에 없지 않나? 여느 날과 같은 날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다시 사랑에 빠지기에 좋은 날이었다.
⸙
“찾아오는 게 어렵진 않았어요?”
명헌이 걷어 올렸던 소매를 손목까지 끌어내리며 우성에게 다가왔다. 걷어 올린 게 섹시한데. 우성이 입 꼬리를 당기며 어색하게 전시실 안으로 들어섰다. 사이 톰블리의 회색 나선형이 잔뜩 그려진 드로잉들이 전시된 벽면이 우성도 알아볼 수 있는 백남준의 ‘TV부처'를 둘러싼 구성이었고 안쪽에서는 로드니 그레이엄이 35mm 필름으로 촬영한 9분짜리 비디오가 재생되고 있었는데, 우성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백남준의 작품뿐이었다.
“찾아오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미술품은 하나도 못 알아보겠어요.”
“점수 딸 기회 주겠다는 말을 참 듣기 좋게 하시는데.”
명헌이 우성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미술품 이야기도 했지만,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명헌은 우성보다 한 살 많았고, 호칭은 금세 정리됐다. 명헌은 우성이 좋아하는 농구 팀을 한 번에 맞추었는데, 어떻게 맞췄냐는 우성의 말에 “그냥, 내가 제일 좋아하는 팀이라서 말해 봤는데.”라는 대답을 해 우성을 놀라게 했다.
좋아하는 피자, 선호하는 커피의 아로마, 자주 듣는 음악 장르,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해산물 조리법…. 대화 주제는 하나같이 우성의 흥미를 끌었다. 연애라는 것을 시작해 본 뒤로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한 첫 데이트가 없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고작 첫 데이트인데 우성은 운명론자가 되기로 결심해도 좋을 것 같았다. 이런 말을 하기에 이를 수는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첫눈에 평생을 확신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명헌이야말로 우성에게 딱 들어맞는 퍼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 집에 바래다 줘.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데 내가 데려다 주는 건 조심스럽거든.”
명헌의 귀엽고 뻔뻔한 부탁에 우성은 웃어 버렸다. 명헌은 선을 지키나 싶으면 어느 순간 불쾌하지 않은 속도로 훅 넘어왔다가 다시 슬금슬금 빠져나갔다. 우성은 그게 약이 오르면서 동시에 즐거웠다. 왜 진작 이 사람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명헌의 집은 우성의 집에서 멀지 않았다. 어차피 출근길 플랫폼에서 다시 마주칠 거 아니냐는 우성의 말에 명헌은 뜬금없이 쑥스러워 하며 웃어 보였다.
⸙
우성은 기상 시간을 20분 더 앞당겼다. 20분 앞당긴다고 머리라도 더 오래 만질 타입은 아니었다. 우성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명헌을 만나고 플랫폼에서 명헌과 함께 자판기 커피라도 뽑아 마시고 싶을 뿐이었다. 양치를 하며 읽은 기사 중에는 동물원에서 새끼 맥이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기사에 실린 새끼 맥 사진이 명헌을 닮았다는 생각에 은밀하게 미소 지었다.
기차역에서 만난 명헌은 우성의 “오늘 아침에 제가 가장 재밌게 읽은 기사가 뭐게요?”라는 질문을 듣고 명헌은 망설임 없이 우성이 좋아하는 밴드의 콘서트 소식과 어떤 영화감독의 다섯 다리 불륜 소식을 꺼냈다(둘 다 놀라울 정도로 흥미롭고 궁금한 기사였다!). 우성이 새끼 맥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명헌이 놀란 얼굴을 했다가 “맥도 울음소리가 있나?” 라고 중얼거렸다. “글쎄요. 형은 어떻게 울 것 같아요?” 우성의 질문에는 “퇴근하고 같이 저녁 먹으러 갈래? 라고 울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성의 답은 당연히 “좋아요.” 였다.
⸙
일주일 동안 매일 출퇴근을 같이 하고, 때로 저녁을 같이 먹고, 네 번째 데이트를 한 금요일 저녁에는 우성의 집 앞에서 굿 바이 키스를 했다. 폭신하고 따뜻한 키스 후에 이어진 포옹은 꼭 명헌 역시 우성만큼이나 이 관계에 푹 빠졌다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꽉 들어찼다.
“저 형한테 너무 빨리 빠진 것 같아요. 형이 부담스러워 하면 어떡하죠?”
중얼거림에 가까운 우성의 말에 명헌은 우성을 더욱 힘 주어 끌어안았다.
“거짓말 한 게 하나 있는데, 난 역에서 부딪치기 훨씬 오래전부터 너랑 이러고 싶었어.”
“그럼 진작 말 걸어 주지!”
우성이 장난스럽게 책망하지 명헌이 난처한 듯도 하고 애처로운 듯도 한 눈을 하고는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러고 싶었는데 타이밍이 안 맞았어.”
“이제라도 이렇게 만나서 다행이에요. 형 그런데… 그… 자고 갈래요? 헤어지기 아쉬워서….”
파격적이라면 파격적인 제안을 하는 우성의 뺨과 목덜미가 평소보다 붉었다. 명헌이 우성의 목을 끌어당겨 코끝에 입을 맞추고 물러났다.
“진짜 잠만 자는 거라면. 속옷이랑 칫솔 여분 있어?”
우성이 고개를 끄덕였고, 명헌이 우성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같은 냄새가 나는 잠옷을 입고 명헌과 우성은 늦은 밤까지, 현재의 양 끝에 매달린 과거와 미래를 이야기했다. 장난스런 키스와 밤처럼 깊은 잠.
다음 날은 우성의 휴무일이었다. 명헌의 제안으로, 둘은 손님이 되어 우성이 일하는 매장으로 놀러 갔다. 핑계는 명헌의 침대였다. 독립스프링형 매트리스를 오래 써서 포켓형으로 바꾸는 김에 프레임까지 바꾸고 싶다는 이야기. 이왕이면 성인 남자 두 명이 누울 수 있을 만큼 컸으면 좋겠다는 명헌의 말에 우성이 흘기듯 눈웃음을 지으며 “침구 고를 때에도 데려가 줄 거예요?” 라고 물었다. 명헌이 우성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귓속말로 답했다. “같이 써 줄 거라면.” 우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게 된 지 열흘 남짓, 고작 다섯 번째 데이트인데도 우성은 이 거리감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졌다. 침대는 우성의 ID를 이용해 직원 할인을 받아 당일 설치를 요청했고, 침구는 그대로 사 들고 명헌의 집으로 함께 돌아갔다.
오래된 침대를 버리고 나서 먹는 점심 식사는 명헌이 직접 만든 라자냐였다. 라구 소스를 얼마나 많이 넣었는지, 양치를 했는데도 키스를 할 때 라구 소스 냄새가 나는 것 같다며 명헌이 웃었다. 우성이 디저트로 또 라자냐 비슷한 걸 먹는다고 생각하겠다며 명헌의 양 뺨을 눌러 튀어나온 입술에 대고 낼름 혀를 내밀어 명헌이 진저리를 치게 만들었다.
“느낌이 이상해.”
“받아들여요.”
“당황스럽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명헌은 우성과 더 깊이 혀를 섞었다. 침대 설치 기사가 오기 전까지 소파에서 몸을 겹치고 한참동안 키스를 했다. 침대가 준비되고 나서는 키스의 다음을 이어갔다. 우성은 처음인데도 거짓말처럼 황홀할 정도로 밀려오는 쾌감에 몇 번이고 “어떡해.”라며 명헌의 새 침구를 세탁할 구실을 만들었다. 뒷정리를 하며 열어둔 창으로 토요일 낮의 봄볕 냄새가 들어찼다. 수 십 번의 키스가 우성의 몸 곳곳에 부끄러울 정도로 쏟아졌다. 이 다정함이 언제까지고 이어지기를 우성은 바랐다.
⸙
명헌과 만나게 된 지 보름쯤 지나자 이젠 서로의 집에 오가며 잠들고 함께 기차역으로 가는 것이 익숙해졌다. 기차역에서 뽑는 자판기 커피 대신에 각자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 챙겼고, 서로의 집에 우산을 가져다 두게 되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사랑에 빠진 명헌을 보고, 동료인 성구는 “천하의 이명헌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구나.”라며 혀를 내둘렀다. 명헌은 “내가 그 앨 위해 준비된 걸지도 모르지.” 같은 팔불출 같은 소리나 했다. 우성의 한 살 많은 소꿉친구인 현철은 “대체 뭐 하는 놈인지 알아야겠다.”라며 걱정을 하더니 막상 셋이 함께 술을 마시자 명헌과 친구가 되어 버렸다.
“선물이에요.”
다시 금요일 저녁, 잔업으로 퇴근이 늦어진 명헌이 우성의 집에 도착하자 우성이 명헌의 품에 화분 하나를 안겨 주며 한 말이다. 프릴 같은 보라색 프릴 같은 포엽 한가운데에 작고 흰 꽃이 쌀 알갱이처럼 피어 있었다.
“스타티스라고 하더라고요. 길 가다가 형 생각 나서 사 봤어요.”
“날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어?”
“글쎄요…. 그냥 형이 좋아할 것 같았어요.”
우성의 말이 맞았다. 스타티스는 명헌이 이름까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꽃들 중 하나였다. 스타티스의 꽃말이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려준 것은 명헌의 오랜 연인이었고, 그 연인이 처음 주었던 꽃 선물이 스타티스였다. 그걸 지금, 우성이 다시 명헌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듯 선물하다니. 명헌은 모든 게 뒤죽박죽인 와중에 변치않는 것은 자신의 마음뿐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이런 건 큰 문제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우성의 마음에 화답하고 싶었으니까.
“좋아하는 꽃 맞아. 감사의 의미로 소원 하나 들어줄게.”
화분을 끌어안은 명헌이 우성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누른 뒤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이건 계획에 없던 변덕이었다. 우성은 놀란 듯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형이랑 캠핑 가고 싶어요.”
따위 사소한 소원이나 말했다. 더 거창한 것도 들어줄 수 있는데.
“언제?”
“…지금부터?”
“가자.”
“정말요? 저 사실 이미 다 준비해뒀어요! 원래는 내일 말하려던 건데.”
눈을 빛내며 말끝에 힘을 주는 우성의 얼굴을 명헌은 조금 바보처럼 바라보았다. 루틴에 철저할 정도로 성실하다가도 중간 중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우성의 성격을 이제는 명헌도 아주 잘 알았다.
“오늘 달 없이 맑아서 별도 잘 보일 것 같은데. 지금 가.”
“제가 운전할게요. 형 잔업 하고 와서 피곤할 테니까.”
결국 명헌은 스타티스 화분을 안은 채 조수석에 앉았다. 캠핑 갈 때가 아니면 잘 몰지 않는다는 우성의 차는 그럼에도 깔끔하게 관리가 되어 있었고, 명헌은 이런 데에서도 알 수 있는 우성의 성격이 사랑스러워 출발 전에 볼 안쪽이 다 눌리도록 우성의 뺨에 진하게 키스를 해 주었다.
철 지난 유행가를 따라 부르며 도착한 캠핑장은 아예 회원제인 곳이었다. 이건 또 몰랐네. 명헌이 황당함에 웃어 버리자 우성이 의기양양하게 “저 텐트도 잘 쳐요.”라며 자기 자랑을 했다. 아무렴, 못하는 거라곤 거짓말 정도겠지. 그럼에도 명헌은 최선을 다해 우성이 텐트를 설치하는 걸 도왔다. 밤 바람이 차지 않아 밖에서 별을 보기에 좋은 날씨였다.
북두칠성의 손잡이에서 시작해 아크투르스와 스피카로 이어지는 봄의 대곡선을 찾고, 데네볼라를 찾아 봄의 대삼각형을 완성한 다음에는 작게 빛나는 콜 카롤리를 찾아 다이아몬드를 만들었다. 레굴루스를 찾으면 사자자리도 금방 모양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명헌은 우성의 손가락을 따라 별자리를 그려 보았다. 이런 데이트는 명헌에게 무척 새로웠다.
“이전에 만났던 사람들이랑도 별 보러 가고 그랬어?”
명헌의 질문에 우성은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는 혼자 오는 걸 좋아해서, 누구랑 오는 건 처음이에요. 저 그런데…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요.”
“뭔데.”
“첫사랑이 누구예요?”
뜬금없는 질문에 명헌이 마시던 페퍼민트 차를 조금 뿜었다. 우성이 다급히 티슈를 잔뜩 뽑아 건네주었고, 명헌은 이 질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조금 고민을 했다. 받아들이는 방식이야 어찌됐든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너야.”
“거짓말. 우리 엄청 빨리 가까워지긴 했지만 만난 지 그렇게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요? 장난치지 말고.”
“너 맞아. 나는 수십 번 환생했거든. 맨 처음에 사랑에 빠졌던 게 너였고, 그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그리고 이번에도 너를 만났어.”
“뭐예요, 그게. 로맨틱한 농담으로 넘어갈 줄 알고?”
우성이 눈을 흘기며 입술을 뚜하고 내밀었다. 그럼에도 번지는 미소는 숨기지 못해, 기어이 팔꿈치로 명헌의 옆구리를 툭 치며 웃어 버렸다. 명헌이 과장되게 아픈 척을 하며 억울한 표정을 꾸며냈다.
“진짠데, 억울하네.”
“됐네요. 우리 들어가서 자요, 이제. 내일은 산책로도 같이 걸어요. 조금 들어가면 아카시아 향기가 엄청 좋거든요.”
의자에서 일어난 명헌이 앞서 가는 우성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뒤뚱뒤뚱 걸어가며, 명헌은 계속해서 자기변호를 했다. 진짜라니까,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아니라면 네가 사과를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겠어? 내가 어떻게 너를 알아봤겠어? 내가 얼마나 너랑 다시 만나고 싶었는지 너는 모르지?
⸙
왠일로 우성의 퇴근 시간에 맞춰 명헌이 가구점으로 찾아왔다. 마침 창고 정리가 끝난 참이었다. 명헌의 손에는 낯선 모양의 봉투가 들려 있었다.
“이게 뭐예요? 자동차 극장?”
우성이 봉투를 받아들고 안을 살폈다. 시 외곽에 있다는, 오래된 자동차극장에서 도시재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영화제를 개최한다는 내용이 적인 안내문과 티켓 두 장이 들어 있었다. 오늘 저녁에 상영하는 영화는 마침 우성이 궁금해 하던 고전 Sci-Fi였다. 개화하는 5월의 모란처럼 우성이 웃었다. 빨리 퇴근하겠다며 탈의실로 옷을 갈아 입으러 들어가더니 정말 순식간에 얇아진 스웻 셔츠에 귀여운 셀비지드 진 차림으로 돌아와 명헌의 팔짱을 꼈다. 오늘은 명헌이 차를 끌고 나와 우성을 조수석에 앉혔다. 명헌이 우성을 위해 조수석의 문을 열어줄 때 우성이 “데이트 특권이에요?”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정답은 ‘언제든지’였다.
팝콘과 콜라를 사 와 콘솔박스에 담아 두고는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었다. 명헌 역시 자동차 극장은 처음이라 조금 버벅였는데, 오히려 우성이 자연스럽게 명헌을 도와 세팅을 마쳤다. 명헌은 우성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반갑고 기뻐, 감사의 표시로 우성이 원하는 바에 따라 입술을 내 주었다.
고전 Sci-Fi인 만큼, 명헌은 이 영화를 여러 번 봤었다. 혼자 본 적도 있었고, 누군가와 함께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우성이 처음부터 “혹시 내용 알더라도 스포일러 금지!” 라고 말을 해 두었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다. 앞 유리를 투과하는 장면 장면들이 우성의 눈동자 위에서 다채롭게 반짝였다. 우성은 영화에 푹 빠져서는 대사를 따라하기도 하고, 눈을 크게 뜨고 놀라기도 하며 시선을 스크린에 고정했다.
“남자가 사실 거짓말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우성의 짐작은 사실로 밝혀질 것이다. 명헌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네.”
“그리고 노인이 이 사건의 열쇠인 것 같아요. 그런데 아이를 위해서 비밀로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우성은 예리하게 영화의 스토리를 추측했다. 명헌이 영화를 여러 번 보아 알기로, 우성의 추측은 전부 정답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보면 돼요.”
우성의 정론에 명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아예 우성 쪽으로 몸을 틀어 우성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시선을 느낀 우성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하는 거예요?”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보기.”
“아, 뭐야, 부끄럽게….”
우성은 민망하다는 듯 웃더니 한층 편안해진 얼굴로 명헌 쪽으로 몸을 돌려 명헌의 뺨을 쓰다듬었다.
“가끔, 형이랑은 뭘 시작하기도 전에 끝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좋은 거야?”
“그만큼 익숙하고 편하다는 뜻이에요. 단순한 데자뷔 같은 것보다…. 정말 전생이 있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형을 만나서 좋아요.”
명헌이 말없이 고개를 돌려 우성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손을 뻗어 우성의 무릎부터 허벅지를 부드럽게 쓸자 우성이 탄식하며 몸을 움찔거렸다. 명헌은 그 떨리는 속눈썹의 진동마저 눈에 새기고 싶었다.
⸙
우성이 명헌과 데이트를 시작한 지 한 달도 너끈하게 넘겼다. 아무리 만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지만 거의 매일 얼굴을 보는데도 질리지 않는다는 게 신기해, 어느 날 아침 우성은 잠에서 깨자마자 제 가슴 위에 올라온 명헌의 팔을 내려다보며 웃어 버렸다. 잠든 명헌의 이마와 코, 뺨 곳곳에 입을 맞추며 귀찮게 하자 명헌이 눈도 뜨지 않은 채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팔을 뻗어 우성을 품에 가두고 복수를 했다. 웃음소리에 기분 좋게 앓는 소리들이 섞이기 시작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느긋하게 일어나 브런치를 해 먹은 뒤로는 동네 산책을 했다. 같은 동네라고는 해도 명헌의 집과 우성의 집 사이에는 거리가 꽤 됐는데, 이 동네에 산 지 오래된 명헌과 달리 우성은 명헌의 집 근처는 잘 알지 못했다.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이 산책의 목표였다. 명헌이 나가는 길에 기다란 고양이 간식을 한웅큼 챙겨 우성에게 건네주었다.
“오래 봐서 그런지 동네 고양이들이 나 알아보거든. 부르면 나타나.”
명헌의 말대로 명헌이 공터에서 “고양이들, 와라." 하고 부르자 골목 여기저기에서 고양이들이 기웃거리며 나타났다. 신기하리만치 모든 고양이들이 명헌 앞에서 뒹굴거리거나 명헌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며 호감을 표했는데, 더욱 신기한 것은 고양이들이 처음 보는 우성에게도 비슷하게 애정 표현을 한다는 점이었다. 간식을 주기도 전부터 아예 품에 안으라며 기어오르는 고양이까지 있었다.
“인기 많네.”
“이상하다, 저희 집 근처에서는 이런 적 없었는데. 이쪽 고양이들은 사람을 되게 좋아하나 봐요.”
“아닐걸. 미남을 밝히는 걸지도….”
“형!”
영양가 없는 수다를 떨며 들고 나온 간식을 다 소진한 다음에는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 정도는 우성 역시 가 본 적에 있었는데도 괜히 낯설게 느껴졌다. 철따라 색채가 바뀌는 것을 처음으로 알아차린 기분이었다. 라일락 향기가 넘실거리고 장미가 만개한 계절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인데도 낯설기보다는 익숙한 느낌이 들어요. 형이랑 같이 와서 그런가? 그런데 진짜 이런 공원인 줄 몰랐어요.”
즐거운 듯 말이 빨라진 우성을 돌아보고 명헌이 부드러운 미소를 걸쳤다.
“좋아할 것 같았어.”
“형은 진짜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는 것 같아요. 환생이 아니라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온 것처럼 타이밍 딱 맞출 때도 있고. 맞죠? 형 미래에서 온 거죠? 이번 주 로또 번호 뭐예요?”
“이따가 찍어 줄게.”
“봐! 역시! 미래에서 왔구나!”
우성의 말에 명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우성은 그 웃음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었다. 시간이 갈수록 익숙해지면 소홀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명헌과 알고 지내는 날이 하루하루 더해질 때마다 애틋한 마음 역시 차곡차곡 쌓였다. 그렇다면 우성에게도 명헌이 진짜 첫사랑이 아닐까. 간질거리는 생각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그건 꽤 기분 좋은 발상이었다.
⸙
명헌이 농구 경기 티켓을 샀다. 지난번 로또가 전부 꽝이었던 데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명헌이 스포츠 매치 복권을 샀고, 5천원 배팅한 복권의 경기 두 개 중 하나는 이미 승패와 점수대까지 맞추었다. 그러니 오늘 경기가 명헌의 예측대로 흘러간다면 와인을 곁들여 조금 고급스러운 식사를 하자는 약속이었다. 당연하게도, 명헌은 두 사람이 좋아하는 팀의 승리에 돈을 걸었다. 우성은 지더라도 팀에 대한 의리를 지켰으니 괜찮을 것 같다며 엄지를 세웠다.
토요일에도 일을 해야 하는 두 사람 다 주말 오후 반차를 사용했고, 출근용으로 차려 입은 그대로 기차를 타고 시 외곽에 있는 체육관으로 함께 향했다. 체육관에서 직접 농구를 보는 것은 무척 오랜만이어서 우성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바빠서, 멀어서, 귀찮아서, 혼자 가면 재미없어서 같은 핑계들은 더는 필요 없었다. 우성에게는 명헌이 있었고, 명헌에게는 비밀이지만 이 데이트를 위해 고향에 다녀오는 계획도 하루 미뤘다. 그만큼이나 기대했던 데이트였다.
명헌은 81-73 정도의 점수를 예상한다고 말했는데, 이번 시즌 팀의 성적이나 선수들의 컨디션을 종합해 볼 때 우성 역시 80-60 정도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둘은 하이파이브를 하며 관중석에 앉았다.
두 번째 쿼터 때 타임아웃이 생겼다. 상대 팀의 파울이 있었고, 그에 관해 양 팀이 다 작전 회의를 하게 됐다. 우성과 명헌은 파울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주변이 시끄러워 가까이 붙어서 대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저 파울은 강백호 잘못은 아니지 않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오히려 따지자면 의도를 가지고 움직인 건 파울을 유도한 서태웅이지.”
“정작 서태웅도 강동준도 파울은 피해 갔지만요….”
한창 이야기에 집중하는데 주변에서 ‘오~’하는 환호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성과 명헌이 고개를 들고 둘러보고 있자니, 우성 옆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우성의 어깨를 콕콕 찌르고 스크린을 가리켰다. ‘러브 캠’이었다. 스크린에는 명헌과 우성이 붙어 앉아 있는 장면이 송출되고 있었다. 둘이 스크린을 보고 잠시 굳어 있는 사이 어디에선가 ‘키스해!’ 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그걸 말한 사람은 장난으로 외친 것일 테고 둘이 정말 연인 사이인 것은 모르겠지만.
우성은 장난기가 돌았다. 연인다운 키스를 하는 것도 괜찮겠지만 명헌의 뺨에 가볍게 뽀뽀만 남기면 명헌이 나중에 서운하다며 안 그래도 처진 눈썹을 더 떨어트릴 것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았다. 우성이 미소를 띤 채 명헌의 볼을 향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명헌의 두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한 개가 아니라 두 개와. 입술이 닿은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입 꼬리 쪽. 우성은 제 볼에도 닿는 명헌의 온기에 몸을 휙 물렸다. 이제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것은 명헌이었다. 우성에게는 명헌이 한 손으로 입술을 가리고 놀란 듯이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얄미우리만치 귀여웠다. 관중석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명헌은 조금 뒤늦게 머쓱한지 턱을 긁적이며 캠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성은 명헌보다 더 어색한 표정으로 인사하듯 손을 흔들었다. ‘잘 울린다!’ 같은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렇지? 역시 우리 엄청 잘 어울리지? 우리처럼 잘 맞는 커플도 없을걸.
러브 캠 해프닝 덕분인지 경기는 명헌의 예상과 고작 1점차 밖에 나지 않은 채 마무리됐다. 명헌의 복권이 들어맞았다. 상금은 11만 원 언저리였고, 명헌이 말한 대로 근사한 저녁식사를 하는 데에 와인 한 잔 정도를 보탤 수 있을 정도였다.
야경이 보이는 레스토랑에 예약을 했는데 해가 길어지는 계절이라 두 사람은 야경 대신 서서히 번지는 노을의 바림을 감상해야 했다. 그 또한 낭만적이라 불만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하늘이 치즈색이 되어 가서인지 와인과도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로또는 하나도 못 맞추더니 이건 점수까지 맞춘 게 아직도 신기해요.”
“네가 너무 실망한 것 같아서 미래에 잠시 다녀왔지.”
“그럼 조금 더 과거로 가서 로또부터 맞춰 주지 그랬어요.”
우성이 스테이크를 한 조각 입에 넣고는 황홀해하는 얼굴을 했다. 명헌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번엔 로또를 맞춰서 같이 오랫동안 해외여행을 가는 것도 좋을지도.”
“저 스쿠버 다이빙 배우고 싶어요. 발리 어때요? 길리 섬이라든지. 거북이가 진짜 많대요.”
“이미 다 알아봤네.”
재잘재잘 쏟아지는 우성의 이야기를 들으며 명헌은 피식 웃어 버렸다. 우성이 스쿠버 다이빙에 관심이 있으며, 발리에 대해 알아봤었다는 건 명헌이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알아가도 알아가도 여전히 새로운 우성이 명헌은 너무도 귀중해서, 이 순간이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차라리 시간이 멈추기를 바랐다. 영영.
여느 날과 같은 시작이었다. 잠에서 깬 명헌은 우선 제일 먼저 달력과 시계를 확인하고, 세수와 양치를 하며 우성의 집까지 걸리는 시간을 체크했다. 어차피 언제나와 같을 텐데, 고민을 끝낼 때쯤이면 옷까지 갈아입은 뒤다.
집을 나서면 세상이 멈추어 있다. 아니, 아주 느리게 움직인다. 시계의 초침이 천천히 나아간다. 당연하게도 휴대폰은 먹통이다. 우성은 평소처럼 30분 정도 뒤에 잠에서 깰 것이고, 명헌은 느긋하게 우성의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넘어지고 있는 아이를 똑바로 일으켜 세우고, 웨이터가 실수로 쏟은 커피에 닿지 않게 대머리 신사를 조금 옮겨 주고, 담벼락 위를 걷는 고양이의 턱을 간질였는데도 우성의 집까지는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명헌은 자연스럽게 우성이 준 열쇠를 써서 우성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우성은 명헌의 예상대로 아직 잠들어 있었다. 명헌이 잠든 우성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자 우성이 간지러운지 미간을 좁히더니 기지개를 켜듯 자세를 바꾸다가, 슬쩍 눈을 떴다. 그 아주 고요하고 부드러운 눈꺼풀의 움직임에 명헌은 새삼스레 사랑을 자각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미소를 얼굴 가득 띄운 우성이 명헌을 향해 양 팔을 뻗었다. 비언어적 언어는 얼마나 단순하고 그래서 충만한지. 명헌을 품에 가득 안은 우성이 키들거리며 명헌의 뺨에 자신의 뺨을 문질렀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약속을 하러 왔어.”
“무슨 약속?”
“다시 널 만나러 가겠다는 약속.”
영문 모를 이야기였다. 우성이 명헌을 끌어안은 채로 몸을 굴렸다. 명헌이 바로 눕고, 우성이 그 위에 엎드렸다. 명헌이 장난을 치는가 싶어 눈을 한참 들여다보아도, 우성이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성을 향한 넘치는 애정뿐. 괜히 부끄러워진 우성이 몸을 일으키자 명헌 역시 따라 일어났다. 명헌은 우성이 자리끼로 둔 물을 마시고, 세수와 양치를 하러 가기 전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내다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래, 이상하겠지.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새들은 날갯짓 없이 하늘에 둥실 떠 있으니까. 하지만 우성은 명헌이 생각한 것만큼은 놀라지 않았다. 어쩐지 이 풍경 역시 이미 보았던 것도 같았다. 명헌이 흘러가듯 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고, 우성은 길지 않은 심호흡을 했다.
“형은 정말 미래에서 왔어요?”
우성의 말에 명헌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미래, 미래라는 건 명헌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것 중 하나였다.
"비슷해. 정확히는 같은 49일을 반복해서 살고 있지."
"그래서 형이 날 그렇게 잘 알고 있었구나."
우성이 큰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지 않네."
"놀랐어요. 놀랐지만, 받아들일 수 있어요. 이것도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닌 걸까요? 이상하게, 무섭지 않네…. ‘때가 됐다’는 느낌이에요.“
명헌이 우성에게 다가가려 하자 우성이 고개를 들고 명헌을 향해 씩 미소 지었다.
“저 세수랑 양치 좀 하고 올게요. 같이 나가요.”
우성은 양치를 하는 동안 휴대폰을 들여다보았지만 신호가 전부 먹통이었다. 비행기모드와도 달리 시계조차 엉망이었다. 결국 아무 단서도 얻지 못한 우성은 그대로 욕실에서 나와 명헌과 키스를 하고, 키스를 하는 김에 서로의 몸을 조금 만졌다. 흥분감과 고양감 사이에 슬픔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명헌이 나가자고 하더니 그대로 침대로 돌아가는 줄 알았다며 웃었다. 우성은 그것도 나쁘지 않은 계획 같지만, 바깥 구경을 하고 싶다는 답을 돌려주었다.
“우리 퀵 실버 같지 않아? 마블 코믹스의.”
거리를 10초도 걷지 않았을 때 나온 명헌의 질문은 사실 전전 회차인가 그 전 회차인가에 우성이 했던 말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우성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우성에게는 모든 것이 다시 처음이었다.
“그 생각은 못했는데, 그러게요.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보이지도 않겠다.”
“그렇지. 아, 커피 마실래?”
“커피요? 기계들도 다 먹통 아니에요?”
“내 손목시계는 멀쩡해. 그리고 커피는 기계가 먹통이라도 상관없어.”
명헌은 그렇게 말하고는 근처에 영업 중인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치 박제라도 된 듯 멈추어 있는 점원 앞에 갓 내린 아메리카노 두 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명헌이 아무렇지 않게 그 두 잔을 가져오자 우성은 거의 경악했다.
“도둑질 아니에요?!”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이라 괜찮아. 다시 49일 전으로 돌아갈 텐데. 우리 말곤 커피 마실 사람도 없고.“
명헌의 설명은 합리적이었다. 우성이 명헌으로부터 컵을 건네받았다. 컵은 아직 따뜻했다. 형은 이 카페에서 커피 두 잔이 나온다는 것도 알고 있던 걸까? 하지만 그런 건 쓸데없는 의문이었다. 별다른 설명이 더 없는 걸로 보아, 이 시간이 되돌아가는 현상에 대해 명헌 역시 알아낸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명헌은 ‘이번에도' 우성을 만나러 왔다. 그 사실만큼 애틋하고 사랑스러우며 진솔하고 폭력적인 것은 없었다.
공개공지에 설치된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 말고 또 입을 맞췄다. 출근 준비로 바빴을 사람들은 멈추어 있고 느긋하게 여유나 부리고 있는 명헌과 우성의 시간만이 바른 속도로 흘렀다. 그 사실이 재미있어 우성은 키스를 하다 말고 웃어 버렸다. 명헌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대신 말랑한 입술 위에 한 번 더 도장을 찍듯 버드키스를 하고 물러났다.
“누가 맨 처음 입술끼리 맞대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걸 발견했을까?”
“글쎄요. 연인들이었을까요?”
“혀를 섞을 생각을 한 사람들도 특이해.”
“우리 특이한 짓 한 거예요?”
“특이한 짓 했지.”
“한 번 더 해요. 좀 더 보편적인 행위라고 인식할 수 있게.”
키스에 보편성을 더하고 난 뒤에도 커피는 따뜻했다. 명헌이 커피를 벤치 위에 내려 두고 일어나 우성의 손을 잡아끌었다. 우성은 명헌을 따라 컵을 벤치에 내려 두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소에 못 했던 것들 하러 갈까?”
명헌의 말에 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었다.
“전부터 백화점 마네킹들 옷이랑 포즈 바꿔 보고 싶었어요.”
우성의 제안대로 두 사람은 백화점 쇼윈도의 마네킹들을 전부 우스꽝스러운 차림새로 갈아입히고, 바보 같은 구도로 연출했다. 이른 아침부터 어른들이 할 만한 놀이로 최고였다.
“우리 이제 춤추자."
백화점을 나서자마자 건네진 갑작스러운 제안에 우성이 황당함과 즐거움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서요?"
"뭐 어때. 차도든 인도든, 아무도 우릴 못 볼 텐데. 보더라도 잊을 거고."
명헌이 허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우성이 아는 몇 안 되는 왈츠 곡 중 하나였다. 호두까기 인형에 나오는 곡이었으니까.
"이 음악에 맞춰서 추는 거예요?"
"우리 둘 다 아는 곡이니까.“
우성이 명헌의 허밍에 맞춰 함께 멜로디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둘은 멈춰있는 차들 사이를 누비며 춤을 추었다. 우성은 어설픈 스텝으로 명헌을 따라 움직였고, 명헌은 우성의 허리를 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횡단보도 위에서, 버스정류장 앞에서, 신호등 아래에서. 춤을 추던 우성이 멈춘 분수대 물줄기 사이를 손으로 쓸어내리자, 물방울들이 빛을 받아 무지개처럼 부서졌다. 명헌은 우성이 만든 그 찰나의 눈부심보다도 우성이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엉망진창 왈츠가 꿈만 같았다.
"형 허밍 하는 거 들으니까 노래할 때 목소리 좋을 것 같아요.“
"네 앞에서 노래 부른 적 없었나?"
"없었어요. 이번이 처음이에요. 전에는 불렀었어요?"
“한두 번.”
“치사해. 나한테도 불러 줘요.”
“다 너한테 불러 준 건데.”
“전 기억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한 번 더. 네?”
우성의 요구는 합당했다. 긴 춤의 끝은 명헌의 노래로 마무리됐다. Fly me to the moon. 명헌은 왜 그 노래를 부르고 싶어졌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기억하는 가사를 좇았다. 헷갈리는 부분은 허밍이 메웠다. Let me sing for ever more…. 명헌은 우성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모든 첫 만남에도 불구하고 우성은 매번 새롭게 반짝였고 명헌은 매번 똑같이 사랑에 빠졌다. 시간이 아무리 반복되더라도 우성은 매 회차마다 달랐다. 매 회차마다 다르다는 건 지난 회차를 기억하지 못하면서 다음 회차에는 조금 더 빨리 명헌에게 마음을 연다는 이야기도 포함됐다. 그러니 명헌은 우성과 함께 49일 후의 미래를 보고 싶었지만, 동시에 이 되풀이되는 49일이 얼마나 다채로운 우성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거리를 걸으며 명헌이 노래의 마지막 소절까지 마쳤다. 그런가, 그런 우성에게 고백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또 나 만나러 올 거예요? 기차역으로?”
“응.”
우성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는 천천히라도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정말 멈춘 것만 같았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떤 식으로 시간이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꼭 마그네틱 테이프의 마지막 부분처럼 늘어지는 지금이 바로 그 시간의 끝이라는 사실을.
“시간 얼마나 남았어요? 되돌아가기까지.”
“30분 정도.”
“우리 처음 만난 시간이랑 비슷해지겠구나…. 저 기차역에 가고 싶어요.”
우성이 결연한 눈으로 명헌을 향해 말했다. 우성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명헌은 이번에도 우성이 마지막까지 함께 있을 장소로 두 사람이 만난 그 플랫폼을 골랐다는 데에 안도했다. 혹여 두려운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했다. 우성이 “마지막까지 형이 같이 있어 준다면 괜찮을 것 같아요.”라고 말한 회차도 열 번은 족히 넘었다. 그 신뢰가 단회차에 쌓인 것이 아님을 명헌은 알았다. 루프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우성은 어디서 만난 것 같다느니,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다느니, 점점 명헌과 함께 축조한 추억이며 감정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해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정말 이 타임 루프까지 기억해낼지도 몰랐다. 명헌이 우성의 손을 잡았다. 모든 것이 시작한 곳으로 가는 것이 어떤 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경건한 마음으로.
“얼마나 많이 돌아왔어요?”
“스무 번 이후로 세지 않았어.”
“매번 49일 밖에 시간이 없어요? 포기하고 싶진 않았어요?”
우성의 질문에 명헌은 아주 오래 전의 기억들을 더듬었다. 맨 처음 돌아왔을 땐 아직 우성에게 이 정도의 마음을 품지 않았었는데, 결국 우성과 다시 만나게 됐다.두 번째로 돌아왔을 때에도, 세 번째에도. 명헌이 피하려 하든 말든 결국 명헌은 우성과 다시 데이트를 하게 됐다. 명헌은 우성이 싫지는 않았지만 일곱 번째 회차에서 더는 견딜 수 없어 우성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그 때 우성의 말에 명헌은 처음으로, 진심으로 다음 회차의 우성을 다시 만나고 싶어졌다.
“7일이 일곱 번 반복되니 행운의 숫자 같다고 했어, 네가. 그래서 포기할 수가 없었어.”
매번 처음처럼 형과 만나고, 반하고, 데이트를 할 수 있다니 행운이 아닐 수가 없잖아요. 명헌은 여전히 그 7회차 우성의 미소만큼은 무엇보다 생생하고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재미있다. 방금 딱 그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걸음에 맞추어 우성의 웃음소리가 경쾌하게 흔들렸다. 명헌은 그 사랑스러운 순간을 적어도 자신만큼은 또렷이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우성이 명헌과 잡은 손을 깍지 껴 고쳐 잡고는 명헌을 돌아보았다. 매번, 어떻게 네 미소는 이다지도 찬란한지.
“또 반하러 갈게요.”
명헌이 우성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그래. 나도 그럴게.
플랫폼은 우성과 명헌이 처음 만난 날보다 북적였다. 시계탑의 시계는 도통 움직일 시간을 하지 않았고, 기차는 들어오던 중에 우뚝 멈춰선 채였다. 모든 게 비정상인 와중에 우성은 두렵지도, 불안하지도 않았다. 단 하나 아쉬운 것은, 어쩌면 이번에도 명헌을 기억하지 못한 채 다음 회차로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것. 그럼에도 우성은 자신과 명헌이 다시 만나 사랑하게 될 것임을 알았다. 믿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우성이 명헌을 온전하게 기억하며 넘어가는 회차가 오면 그 때는 50일째를 맞이할 수 있으리라는 것도.
두 사람이 부딪친 바로 그 자리에 서서 우성이 명헌을 향해 확신을 담아 세 개의 포물선을 그리며 물었다.
“형, 저 같은 사람 다시는 못 만나겠죠?”
명헌이 웃었다. 7회차부터는 매번 같은 엔딩이었다. 우성의 말을 스위치 삼아 명헌은 시간을 되돌아간다. 나선형으로 역행하는 우주의 끝이자 시작점은 결국 다시 같은 플랫폼이다. 방금 전에 헤어진 연인과 처음 만나기 위해 걸음을 옮기며, 명헌은 주문을 이어받듯 우성의 질문에 뒤늦은 답을 한다.
“다시는, 다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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