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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 여인의 속삭임

주나울루주나

선두에서 달리던 말이 속도를 줄임과 동시에 뒤따르던 병사들의 대열 또한 속도를 늦췄다. 잠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말 위의 인영은 돌연 훌쩍 뛰어내리며 뒤쪽의 병사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이쯤에서 잠시 쉬어가는 게 좋겠다.”

대열을 이끌던 장군, 아르주나의 말에 병사들이 곧바로 대답했다. 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아르주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병사들이 신속히 뒤돌아 사라졌다. 그들은 부대에 명령을 전할테고, 곧 병사들은 근처에 진지를 세우리라. 그때까지는 잠시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그동안은 근처를 살필 겸 휴식을 취하는 편이 좋으리라. 아르주나는 마침 눈이 마주친 병사에게 뜻을 전한 후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부대가 위치한 곳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숨길 만한 숲과 하천이 보였다. 이 정도면 병사들이 하룻밤을 보낼 만한 물자를 얻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그와 같은 실리적인 생각도 잠시, 그는 익숙한 숲의 내음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숲에서 나고 자라기를 14년, 유랑하기를 12년, 은둔하기를 13년이라. 적어도 40여 년의 세월을 그는 숲과 함께했더랬다. 이제는 왕궁과 수도의 생활에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그곳에서와 달리 숲을 마주하면 묵은 긴장과 피로가 한순간에 풀리는 것만 같았다. 후우, 아르주나가 천천히 눈을 감고는 깊은 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아르주나여, 얼굴에 수심이 가득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형제가 온 세상을 평정했는데, 어찌하여 마음을 놓지 못하십니까.”

뒤쪽에서 달콤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낯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언뜻 푸른 빛이 비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와 머리칼, 군데군데에 보이는 뱀의 비늘은 그녀가 속한 종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울루피여, 당신이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잊었군요. 나는 나가족의 공주입니다.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든 거할 수 있지요.”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르주나가 그러하듯, 울루피 또한 수십 년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노화의 징조도 보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마치 수십 년 전의 만남이 그대로 재현된 것만 같은 감상이 들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달라진 것이 있었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아르주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수십 년 전의 그때와 달리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당신께서는 제 질문에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르주나여, 어찌하여 그리도 비통한 낯을 하고 계십니까?”

“나는 그대를 바라볼 낯이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나를 바라보세요. 자아, 나의 부군이여.”

울루피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의 움직임은 마치 뱀처럼 조용했고, 신속했다. 차가운 그녀의 손이 아르주나의 뺨을 감싸고, 고개를 제게 향하게 했다. 그럼에도 아르주나의 눈은 여전히 허공을 좇고 있었다.

“이라반이 죽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 애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번듯한 성인이 된 아이입니다. 자신의 몸은 스스로 지켜야 했지요. 그 애는 용감하게 싸웠습니까?”

“누구보다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그렇다면 되었습니다.”

그제야 아르주나는 울루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더없이 평온한 낯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을 잃은 어미라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을 표정에 아르주나는 어째서인지 크리슈나를 떠올렸다. 어쩌면 이리도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수십 년이 지나도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신과 달리, 제가 사랑하는 이들은 어쩌면 이리도 쉽게 상실을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아르주나의 눈에서 따뜻한 것이 흘러나왔다. 울루피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애는 언제나 당신을 궁금해 했지요.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당신이나 인드라프라스타의 이야기가 들려오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습니다. 당신을 존경했고, 사랑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 싸우다 죽기를 바랐습니다. 당신이 그 아이로 인해 슬퍼하는 것은 그 아이를 무시하는 처사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울루피가 아르주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럼에도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울루피는 한 걸음 더 다가와 아르주나의 몸을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상냥한 당신은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요, 내 사랑.”

그리고는 다시 몸을 떼어내고, 아르주나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는 조금 전과 달리 아주 약간의 비통함이 서려 있었다.

“이렇게 합시다. 당신이 스스로를 벌하고 싶다면, 내가 당신을 도와주겠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당신은 지금 당신의 형님이신 법륜왕 유디스티라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전역을 돌아다니고 있을 테지요. 당신의 또다른 아들이 있는 마니푸르에 다다랐을 때, 당신은 그와 싸우다 한 번 죽게 될 것입니다.”

아르주나는 가만히 제 아내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눈물은 그친 채였으나 여즉 발갛게 부어있는 눈은 그가 애써 울분을 삭이고 있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그는 작게 숨을 들이키며 물었다.

“바브르바하나는 나와 싸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그리 되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전쟁에서 수많은 이들을 죽였고, 수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것이 그 죄의 댓가입니다. 유일하게 남은 자식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남은, 윤회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일순간의 죽음 후 다시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과거 다르마 신이 당신들 형제에게 그리 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울루피의 답에 아르주나는 이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치기 어린 젊은 시절의 일이었으며, 한순간에 저들 형제가 모두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이었다. 유디스티라의 재치로 다시금 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나 한 번 목숨을 잃었던 때의 기억은 그들에게 상흔처럼 남았다. 아르주나는 곧 울루피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했다. 일시적인 죽음을 통해 그의 죄는 사해질 것이며,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제게 그럴 만한 자격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

“아르주나여, 이것이 나의 축복이며, 나의 사랑입니다.”

아르주나의 생각은 울루피의 말로 인해 끝맺어졌다. 그것이 정답이었다. 그는 언제고 축복과 사랑을 받는 영웅이었으며, 그로서 행동해야 했다. 그에게 축복과 사랑을 받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만 했다……. 아르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지키지 못한 아이들의 몫까지, 그 아이의 손에 죽겠습니다. 그리고 살아가겠습니다. 당신의 축복을, 사랑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르주나가 말을 끝마치자마자 울루피가 입을 맞췄다. 갈라진 나가족의 혀가 입술을 훑는 것을 느끼며, 아르주나는 아내의 몸을 끌어안았다.

“살아가세요, 아르주나.”

그 말을 끝으로 여인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마치 한여름밤의 꿈처럼. 그러나 아르주나는 그 모든 일들이 실재함을 알았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기억하며, 그는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남기고 간 숨으로 생을 살아가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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