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네스] 비밀

카이네스 베이스 드림.

1.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피부가 초록색이거나, 머리카락이 형광으로 빛나거나, 다리가 네 개, 팔이 세 개라도, 어쩌면 내 눈이 열 개라도 중요하지 않은 일이죠. 이름도, 출신도, 심지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동의하죠?

내게 듣고 싶은 게 있어서 여기 온 거잖아요.

좋아요. 말해줄게요. 당신은 그럴 권리가 있어요.

풉! 권리! 그래요. 당신은 유일하게 내게 진상을 들을 권리가 있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답니다. 경찰에게도, 변호사에게도, 심지어 판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워, 워. 진정해요. 이건 형사사건이잖아요. 봐요, 옆에서 아무것도 듣지 않는 척하는 경찰, 오, 아니군,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인가요?

안돼요. 이건 페어플레이가 아니야. 이건 당신만 들을 수 있어요. 난 당신에게만 말할 거야. 알렉시스 네스에 대한 일인걸. 당신에게만 말할 거니까, 당신만 들을 수 있어.

뭐가 그렇게 겁나지? 난 당신 반 토막만 한 여자인데! 여기 들어오기 전에 검사를 받아서 몸에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아. 얼마든 제압할 수 있어. 물론, 다른 방법도 있지. 내 목을 졸라서 죽인 다음, 뇌가 손상되기 전에 갈라서 보는 거야. 하하! 할 수 있다면 말이야!

 

후…. 좋아요. 당신이 내 제안을 받아들여 줘서 무척 기뻐요. …진심이에요.

정말 자리를 비우는 것과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척하는 건 발소리에서 차이가 난답니다. 울림이 달라요. 하지만 지금 당신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니겠죠.

음,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요? 난 설명을 그리 잘하는 편이 아니거든요.

아, 그래요. 알렉시스 네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야기할까요. 그리 길지는 않아요. 친구가 그 클럽의 팬이었거든요. 쉽게 상상이 가죠? 여자 혼자 가기 민망하니 종종 친구들을 꼬드겨 경기 관람을 했고, 그래요, 그 친구가 저랍니다. 저는 연습 시합에서 그를 처음 보았어요.

무척 귀여웠어요. 그는 골을 잘 넣는 편이었고… 음, 지금과는 좀 달랐죠. 물론 지금도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그때는, 꽃봉오리였다고 할까. 싱그러움이 있었죠. 그때는 그냥 그랬었거든요.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미안해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제가 그에게 반한 건, 그래, 이건 똑똑히 기억해요. 미하엘 카이저가 골을 넣은 순간이었어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죠. 알렉시스 네스가 패스하자마자 미하엘 카이저는 번개처럼 공을 찼고, 그의 슛은 골키퍼를 농락하듯 오른쪽 모서리에 꽂혔어요. 공이 아주 빠르게 그물에 꽂히면, 그물이 순간적으로 출렁거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나요? 뭐, 저보다는 잘 아시겠지만. 그 순간이 그랬어요. 순식간에 경기장이 고요해지고, 그리고 순식간에 함성으로 가득 찼죠. 경기의 끝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기도 전에 네스가 카이저에게 달려오더군요.

별처럼 빛나는 눈을 하고서요.

멀리서도 똑똑히 보였어요. 동공이 한껏 확대된 채로 웃으면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는 꼬마처럼 뛰었다고요. 그리고 뭐라고 한 줄 알아요?

‘대단해요! 카이저!’

네스는 카이저보다 조금 작아요. 아주 조금. 고개를 살짝 위로 올려서 봐야 하죠. 그러면 경기장의 불빛이 각막에 반사되어서, 무척이나 아름답게 빛나는 거예요. 반짝반짝, 반짝반짝…. 그래요, 홀렸어요. 그건 홀렸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어요.

누구라도 홀렸을 거예요! 추워서인지 뛰어서 열이 난 탓인지 모를, 상기된, 그런 예쁜 얼굴을 보면요! 당신도 알지 않나요? 네스는 귀여워요. 정말 귀여운 사람이에요. 난 그걸 그때 알아버린 거죠.

그 뒤로는,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굴었어요. ‘것처럼’이라니, 우스운 말이죠. 전 말 그대로 사랑에 빠진 얼간이었는데요. 알고 있나요? 사랑에 빠진 여자는 뭐든 할 수 있답니다. 당장 할 수 있는 건 팬클럽에 가입하고, 경기를 볼 수 있는 날은 무조건 참석해서 응원하는 것뿐이었지만요.

네스를 볼 수 있다면 좋았어요. 그렇지만 그것 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죠. 망할, 그는 sns도 제대로 하지 않더군요. 어느 지역 출신인지 알아내는 것도 힘들었어요. 수소문에도 한계가 있었어요.

그도 그럴 것이, 전 그의 이름과 얼굴 외엔 아는 게 없으니까요. 나이도, 출신지도, 키와 몸무게도, 발 사이즈도, 그가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 애완동물의 이름도 모르는걸요. 그건 정말 슬픈 일이에요.

당신도, 당신도 알아야 해요. 그건 정말, 정말 끔찍한 일이니까. 좋아하면 더 알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렇죠당연하잖아그를좀더알고싶은게무슨잘못인지모르겠어나는그저그의모든것을알고싶을뿐인데그의일부분만으로는만족하지못하겠단말이야

 

2.

잠시 물 좀 마실게요. 고마워요….

후…. 그때도 이런 기분이었어요. 막막하고 슬펐죠. 하지만, 모르면 알아가면 되는 거잖아요. 남에게 듣는 것보다 직접 알아내는 게 더 보람 있고 말이에요! 다행히 내게는 이런저런 기술이 있고…. 세상에, 인터넷엔 뭐든 다 팔고 있다구요! 삼십 달러와 클릭 한 번이면 초소형 도청기를, 그것도 최신식으로 구할 수 있는걸요. 하하! 당신 이쪽으론 완전 문외한이군요? 귀여워라!

진정해요! 정말 귀엽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내가 귀여워하는 건 오로지 네스군 뿐이에요. 그는 정말 귀엽죠. 그 폭신폭신한 머리부터, 아! 그러고 보니 그거 알아요? 네스군의 머리카락은 보기보다 길답니다. 곱슬머리라서 짧게 보이는 건데, 길게 펴면 아마 어깨까지는 올 게 분명해요. 그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주웠는데, 아참, 아까 빼앗겼죠. 이런….

뭐, 집에 몇 가닥 더 있어요. 머리를 뽑은 건 아니에요. 그와 접촉할 때, 조금 흘린 걸 주운 것뿐이니까. 머리카락을 억지로 뽑으면 아프잖아요? 네스군이 아픈 건 싫은걸요.

그는 자상하니까,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네? 그가 자상한 걸 어떻게 아냐고요? 당연히 그가 제게 다정하게 대해주었으니까요.

왜, 카이저의 역전 골로 이겼던 날 있잖아요. 네스군이 과감하게 패스를 한 날 말이에요. 다들 패스를 제대로 못 한 줄 알고 야유를 퍼부었지만,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카이저가 나타나서 콰앙! 하고 역전 골을 넣어버렸던 날요.

그날 선물을 준비해 갔거든요.

곰 인형에 작은 장치를 넣어서, 음, 부끄럽지만… 네스를 닮은 인형으로 준비해봤어요. 눈이 반짝반짝해서 귀여운 거로요. 물론 네스군의 눈이 더 예쁘긴 하죠. 어쨌든 작은 장난이었어요.

그런데 누구에게 주어야 할지 몰라서, 입구를 서성이고 있는데…. 그가 나오더군요.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쳤어요. 무척이나 다정한 목소리로, 흔히들 말하길, ‘녹아내릴 것 같은 주제에 최선을 다해서 경직된 목소리’로, 그가 말하더군요. 아니, 그건 속삭이는 것에 가까웠어요.

‘카이저는 이곳으로는 나오지 않아요.’

다정하기도 하지. 저는 카이저가 아니라 네스를 보러 온 건데 말이에요.

그는 사복을 입고 있었어요. 언제 산 건지 가슴은 조금 끼는 것 같고, 그와 반대로 바지는 품이 넉넉했죠. 무슨 색인지도 똑똑히 기억해요. 그건 파란색이었어요. 미하엘 카이저의 눈처럼 선명하게 푸른 빛이었죠. 제 생각에 네스에게는 좀 더 짙은 색이 어울려요. 지금 유니폼 같이요. 그의 머리카락이 옅은 회색처럼 보일 때가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죠.

아, 그래요, 그러고 나서…. 그가 제 손에 들린 선물을 봤어요. 무척이나 다정하고 사려 깊게도, 누구에게 선물을 건네야 할지 알려주더군요. 아! 그건 정말이지 심장에 좋지 않은 일이에요! 네스는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아주 현명하게 대처했어요. 그에게 직접 선물을 주었다면 제 심장은 터져버리고 말았을 테죠. 얼마나 사랑스러운 배려인지 몰라요! 스태프에게 선물을 전달할 때까지 저는 그의 귀여운 모습에 넋이 나간 상태였어요. 그리고 나서는 인내의 시간이었죠.

뭐냐니, 말했잖아요. 인형 안에 작은 장치를 넣어 놨다고요. 처음 시도하는 거니까, 가장 리스크가 적은 거로 골랐어요. 장거리 수신이 되고, 가볍고, 싼 물건으로. 음질이 아주 좋은 건 아니지만 뭐 어때요. 처음부터 완벽한 걸 바랄 수는 없어요.

왜 화내는 건가요? 나쁜 짓은 하지 않았어요. 제가 원한 건 단지 네스군의 목소리에요. 아, 물론 그전에도 수집하긴 했지만, 좀 더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거든요.

그는 내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는 듯, 인형 속에서 기계를 꺼내서 주머니에 넣어 주었어요. 말했잖아요. 그는 무척이나 다정하고 상냥하니까…. 가여웠던 걸까요? 아무렴 어때요. 중요한 건 그가 바로 그걸 부숴버리지 않았다는 거예요.

정말 기뻤어요. 그의 달콤한 목소리를 들었거든요. 카이저와 단둘이 있을 때의 그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목소리…. 얼핏 산뜻하게 들렸지만, 그의 말은 분명 꿀처럼 달고 끈적했어요.

미하엘 카이저는 모르겠죠. 네스군은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는 무척이나 냉정하게 말해요. 다정하긴 하지만 그건 그냥 예의를 지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녜요. 하지만 그에게만은 달라요. 그래요, 그의 스트라이커에게는 한없이 무르고 말랑말랑해진답니다!

그런 모습을, 한 조각이라도 말이에요, 내게 보여주다니,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심장이 터져서 죽어 버릴 것 같았어요. 겨우 심장을 붙잡고 있는데, 그의 숨소리가 기계를 울렸어요.

봐요, 이렇게, 아주 가까이, 기계에 입술을 대면, 숨소리가 불규칙하게 울려서, 불쾌한 소리가 나거든요…. 그건 아주 짜릿한 ‘불쾌감’이었어요.

네스군이 제게 경고했거든요.

한 번만 봐 주는 거라고요. 그리고 귀가 찢어질 것 같은 파열음이 들렸죠. 하하! 그가 내게 일부러 들려준 거예요. 그런 달콤한 목소리를요!

 

불쾌해요? 당신이? 왜요? 이상하네요. 당신이 왜 불쾌하지? 난 그에게만 관심이 있는걸요.

아, 미하엘 카이저에게도 관심이 있긴 해요. 필드 위에서의 네스는…. 뭔가, 기대하는 얼굴이거든요. 카이저의 발 앞에 정확히 공을 안착시킨 후엔, 항상 무언가를 기대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봐요.

그리고 카이저가 골을 넣으면, 세상에 다시 없을 정도로 귀여운 얼굴로 웃어요. 선물을 받은 것처럼. 그러니까 저는 카이저가 네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었으면 해요. 왜냐면, 네스는 정말 귀여우니까.

당신도 이해하죠? 그는 어휘력이 그리 좋지 않고, 조금 사납기도 하고, 그렇지만 무척이나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는걸요.

그를 더 귀엽게 만드는 건 맹목적인 모습이에요. 미하엘 카이저를 볼 때의 얼굴, 상기된 표정, 들뜬 목소리, 몸짓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득한 애정…. 그래요, 처음 보자마자 알았어요. 어떻게 모르겠어요? 매일같이, 아니 아침마다, 아니, 아니, 거울을 볼 때마다 보던 표정인걸요.

알렉시스 네스는 사랑을 하고 있어요. 그것도 답이 없는 짝사랑을요. 어떻게 그런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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