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 계기

러브라이브! 스쿨 아이돌 프로젝트 시리즈/아사카 카린X엠마 베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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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1(始作)

「명사」 

어떤 일이나 행동의 처음 단계를 이루거나 그렇게 하게 함. 또는 그 단계.

 

계기4(契機)

「명사」

「1」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변화하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나 기회.

「2」 『철학』 사물의 운동ㆍ변화ㆍ발전의 과정을 결정하는 본질적인 요소.


아무도 없는 넓은 방. 방을 가득 채운 것은 오로지 정적과 창을 통해 스며드는 달빛. 카린은 이불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나른하게 쏟아지는 피로, 조용한 방, 잠을 청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당장 내일부터 일정이 잔뜩인데. 어서 잠들어야 한다며 자신을 다독이던 그는 몇 분 지나지 않아서 몸을 일으켰다. 어서 잠들지 않으면, 내일 아침 약속에 늦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른 후, 눈도 감아보고 양도 세어봤지만, 효과는 없었다. 아아. 이제 정말 어떡하지. 내일 잘 일어날 자신도 없는데. 내일은, 엠마를 데리러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반드시 일찍 일어나야만 했다.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며칠 전으로 돌아간다. 골든위크를 맞이해 긴 휴일을 갖게 된 그들은 각자 쉬는 날을 가진 후, 다시 라이브 준비를 하기로 했다. 적당한 휴식도 중요한 법이니까요! 기합을 가득 넣은 세츠나가 외치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둥둥 떠 있는 듯했다. 골든위크 전, 마지막 연습을 끝낸 카린은 엠마와 함께 기숙사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 날따라 들떠 있던 엠마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 것은 그들이 방에 들어왔을 때였다. 맞아, 카린 쨩. 내일부터 며칠 동안, 혼자 일어날 수 있지?

너무 놀라면 오히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는 신발을 벗을 생각도 못 한 채 그저 가만히, 잔뜩 들뜬 자신의 룸메이트를 바라보았다. 어라, 카린 쨩? 카린 쨩? 두어 번 정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을 때, 그는 현실로 돌아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멍한 기분이 걷힌 후, 아주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그럼. 짧은 대답이었지만, 만족했는지 스위스에서 온 유학생은 방긋 웃음을 지으며 잠깐 기다리는 말을 남긴 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맛있는 빵을 먹을 때보다, 연습하며 실컷 노래하고 춤출 때보다 더 기쁜 듯한 얼굴을 한 엠마를 눈동자에 담으며 카린은 그제야 수십 분 전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나, 잠깐 스위스에 다녀오려고!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를 아주 깜빡하고 있었다. 왜였을까. 그 말의 무게를, 문장 속에 담긴 현실성을 깨닫지 못한 것은 어째서였을까. 스위스라는 국가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아니면 그 거리가 와닿지 않아서? 길게 이어지던 생각이 뚝 끊어진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 방에서 나온 엠마의 목소리 덕이었다. 이건, 혼자 일어나고 혼자 잠들게 될 카린 쨩을 위한 선물! 그가 건넨 것은 옅은 녹 빛의 상자였다. 후후, 엠마도 참……. 작은 상자가 손에 들어온 순간, 그는 천천히 깨달았다. 잠시 고향에 다녀온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지 못했던 이유를. 아침에 눈을 뜨고, 잠들기 직전에 늘 주고받던 인사와 마주하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건지 아직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손에 올려진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는 그제야 ―아주 늦은 자각이었다.― 오늘 저녁 “잘 자.”라는 목소리를 들으면, 이다음에 같은 인사를 듣는 것은 며칠 뒤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위스는 아주 머니까, 하루 이틀 정도로는, 반나절 정도로는 다녀올 수 없는 곳이지. 새삼, 언제나 이야기를 들어 익숙하던 나라가 낯설게 느껴졌다. 너는, 그렇게 먼 곳에서 이곳까지 와서 나와 만나게 된 거구나.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생각을 수없이 굴리며 그는 상자 뚜껑에 손을 가져갔다. 그때였다. 아아, 안 돼! 탄산수처럼 톡 쏘듯이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어느새인가 엠마는 뚜껑 위에 올라간 카린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고 살짝 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 된다니. 이거, 내 거 아니야? ……. 엠마? ……카린 쨩. 응, 엠마. 그렇게 몇 번이고 더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답하기를 반복하다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 건, 엠마였다. 내가 가면 봐. 알았지? 가까운 거리에서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 덕에 카린은 저도 모르게 그러겠노라 답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카린이 일어났을 때 엠마는 『카린 쨩, 다녀올게』라는 쪽지를 남긴 채 스위스로 향한 뒤였다.

조용하던 라인에 『도착했어♪』라는 말과 함께 드넓은 자연이 담긴 사진이 몇 장 온 것은, 그가 ‘잘 도착했을까.’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헤아리는 것을 그만뒀을 즈음이었다. 액정 너머, 수십 킬로가 떨어진 나라의 풍경을 담은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엠마의 모습을 보며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답장을 남겼다. 『잘 다녀와』


 

그리고 지금. 카린은 자야 할 시간이 지났음에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왜일까. 생각을 곰곰 더듬으며 라인을 읽어가던 그는 오늘 아침, 일어나마자 봤던 소식을 다시금 마주했다. 아침, 두 눈을 비비며 힘들게 일어난 카린을 맞이한 것은 엠마의 짧은 한마디였다. 『오늘 저녁에 돌아가니까, 내일이면 모두 만날 수 있어~!』 아. 그것 때문이었나. 오랜만에 룸메이트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들떴구나. 카린은 작은 웃음을 터트린 후, 다시 침대에 누웠다. 내일 엠마가 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말이지. 이 이야기를 엠마가 들으면 뭐라고 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이불을 턱 끝까지 당겼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잠에 빠지려던 순간……. 그는 탁구공이 튀어 오르듯 다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니다, 아니다. 이토록 잠들지 못하는 이유는 내일 엠마가 오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와 지내지 못한 며칠간, 자신도 모르게 자리 잡은 감정을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아.”

 

작은 신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왜, 이걸 눈치채지 못했을까. 다정한 목소리, 따뜻한 눈빛, 부드러운 속삭임, 스쳐 지나가듯 말한 것들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은 이유, 단 며칠 떨어져 있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진 건 전부……. 그는 튀어나오려던 감상을 막기 위해 두 손을 써야만 했다. 제 얼굴을 덮은 손의 온기보다, 달아오른 얼굴이 더 뜨거웠다. 심장이 가슴 부근이 아니라 얼굴에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아침에는 “잘 잤어?”가, 저녁에는 “잘 자.”가 익숙해졌을 무렵? 함께 스쿨아이돌을 하며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을 때? 처음 그의 노래를 들었을 때일까. 아니다. 카린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마, 시작은……. 생각의 끝, 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엠마가 주고 간 상자였다. 아, 한 번도 안 열어봤구나. 카린은 그제야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USB와 쪽지 하나, 홍차 티백이 들어있었다.

 

『짜잔. 카린 쨩, 놀랐을까? 전에 카나타 쨩에게 자장가를 불러준 적이 있는데, 카나타 쨩이 “모두가 들어줬으면 좋겠네~”라고 말해줘서, 카나타 쨩에게 주려고 녹음하다가 카린 쨩의 것까지 만들었어♪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할 때, 들으면 빨리 잠들어서, 다음 날 일찍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 엠마의 스폐셜 자장가야♪ 홍차는 마음을 릴랙스하게 해줘서, 수면에 도움이 되는 걸 골랐어. 카린 쨩이 좋아하는 향이면 좋겠네.』

 

아. 큰일이다. 이런 다정한 문장을 읽으면……. 카린은 지금 곁에 엠마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뛰는 심장과 뜨거워진 귀를 보인다면, 분명 좋아한다는 것을 들키고 말 테니까. 그는 서둘러 노트북을 켜고 USB 안에 담긴 음성파일을 자신의 핸드폰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어폰을 챙겨 다시 침대에 누웠다. 처음보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얼마나 차분해질지 모르는 일이었으나, 내일 엠마의 얼굴을 보기 전에 이 노래를 듣고 싶었다. 혼자 잠들 자신을 위해 건네준 선물이니까. 그는 아주 천천히 『엠마의 자장가』라고 되어 있는 음성 파일을 재생했다.

“……아.”

 

언제 잠들었지. 그는 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햇볕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어폰은 제멋대로 엉켜 있었고, 노래는 어느 순간 멈춰있었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노랫소리에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그는 천천히 기지개를 켜며 잘 잤다고 생각했다. 푹 잔 덕분일까. 아니면 듣고 싶었던 목소리를 들은 탓일까. 그는, 전날 저녁에는 찾을 수 없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아마, 그의 사랑이 시작된 계기는 두 사람의 시작과 같은 날이었다.


카린은 그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일과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온 그를 맞이한 것은 큰 키에, 머리를 양갈래로 땋고 맑은 눈빛을 한, 스위스에서 이곳까지 스쿨아이돌을 하기 위해 왔다는 유학생이었다. 어떻게 인사하며 들어가야 할지 몰라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을 때, 마침 카린이 온 것인지 엠마는 꽤 당혹스럽다는 낯빛을 하고 있었다. 아마 본인은 생각만 했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덜덜 떨리는 입술 사이로 “어떡하지……. 뭐라고 인사하지…….”라는 문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때, 카린이 했던 생각은 ‘꽤 맑고 예쁜 목소리네.’라는 것이었다. 그 뒤로 방에 들어오라고 했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긴장이 풀렸는지, 엠마는 맑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카린 쨩’으로 호칭도 바뀌어 있었다. 아침에 깨워줄 수 있느냐는 부탁에 흔쾌히 “좋아~”라며 웃은 알프스에서 온 유학생은, 첫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카린도 내일의 준비를 위해 방으로 들어가려던 무렵, 잠옷을 갈아입던 중인 모습의 엠마가 방에서 뛰어나와 카린을 붙잡았다. 연한 녹빛의 잠옷 상의와 그보다 더 엷은 색의 교복 치마의 조합이 꽤 웃겼지만, 그는 애써 말하지 않았다.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은 그 아이는, 그날 카린이 봤던 웃음 중 가장 맑고 반짝이는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카린 쨩이 내 룸메이트라서 다행이야.”

 

……라고. 그는 순간, 자신에게 불어오는 넓은 초원과 아득한 하늘의 공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때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분명 그때부터였다. 아, 너와 나의 시작이 내 사랑의 계기였구나.


 

달칵. 카린이 회상을 끝낸 타이밍과 꽤 비슷한 순간이었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몇 초 후, 작은 신음이 들렸다. 읏차. 그리고 다시 수 초 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엠마였다. 오늘 더 늦게 도착할 예정 아니었나? 이따가 카나타와 함께 공항에 마중 갈 생각이었는데. 그는 서둘러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방문을 열자 보인 것은 아직 정리하지 못한 짐을 품 안에 안고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엠마였다. 카린 쨩? 일찍 일어났네! 좋은 아침. 며칠 만에 듣는 아침 인사였지. 그런 생각에 빠져서, 괜히 말이 헛나오지 않도록 의식하며 카린은 느리게 대답했다. 으응, 엠마가 준 걸 듣다가 일찍 잠들어서. 혹시 말끝이 딱딱하진 않았을까. 카린은 손바닥을 적시는 땀을 닦기 위해, 애꿎은 상의에 손을 문질렀다. 오늘 늦게 오는 줄 알았는데, 일찍 왔네. 엠마. 찬장에 비스킷을 채워 넣던 엠마는 카린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가 눈꼬리를 곱게 휘어 접으며 웃었다. 응, 카린 쨩을 빨리 보고 싶어서.

 

다정한 웃음, 따뜻한 시선, 맑은 목소리. 맑은 가을 하늘 같은 웃음을 짓는 봄바람 같은 사람이라니. 카린은 자신의 사고회로가 딱딱하게 굳는 것 같았다. 보고 싶었다는 건, 단순히 친구로서? 아니면……. 길게 늘어지는 생각은 쉽사리 정리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아직 엠마를 좋아하는 걸 깨닫기 전의 아사카 카린은 무어라고 답했을까. 카린의 생각이 구르기를 멈춘 것은, 또다시 엠마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였다. 있잖아, 카린 쨩. 내가 쓴 쪽지 읽었어? ……응, 아직 홍차는 마시지 못했지만. 사실 쪽지에서 하고 싶은 말이 또 있었어. 어라, 뭔데?

탁. 천장을 닫는 둔탁한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득 채웠다. 손에 묻은 먼지를 털려는 것인지, 아니면 중요한 대결에 나가기 전 기합을 넣는 의식 같은 건지, 엠마는 자신의 두 손을 탈탈 털었다. 그리곤 천천히 카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룸메이트가 되던 그날이 겹쳐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그는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엠마의 모습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카린 쨩. 카린 쨩이 내 룸메이트여서 정말 다행이야. 이전과 같은 말, 같은 거리. ―아니, 그때보다 더 가까워진 것 같은데……? 그 생각이 아이의 손을 떠난 풍선처럼 떠 올랐다.― 약간의 공백. 엠마는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서, 다만 이전보다는 더 작은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좋아해, 카린 쨩.”

 

카린은, 제 앞에 있는 룸메이트이자 친구이자 동료이자 라이벌 그리고……, 자신이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주 느리게 고개를 주억이며,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나도, 좋아해. 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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